순일스님 법문/금강경

금강경 1 - 1 (2011-11-01 (화)) - 순일스님

Daisy청량심 2024. 8. 13. 06:41

제1.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어기서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제1.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어졌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진지 드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에 들어가셔서 걸식을 하셨다. 그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한역본에서는 1장의 제목이 ‘법회의 인연’이다. 이와 같이 각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소명태자가 임의로 붙인 것으로서 원래의 금강경에는 소제목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의 경전 말씀 그대로 직역하기 위해서 모든 소제목을 달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Ⅰ. 통론

사위국 기수급고독원림에서 해탈 하신 천이백오십 분의 제자와 함께 계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해탈 하신 분들 외에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 등의 분들은 더욱 많이 계셨었다. 승가는 모두 걸식을 하였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몸소 직접 걸식을 하셨던 역사적 사실을 1장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니셨던 것을 알 수 있다.

Ⅱ. 각론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어졌다.”

대체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많이 해석이 된 문장이다. 이것의 산스크리트 직역은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어졌다’이다. 금강경만이 아니고, 원음(근본)경전에서 모두 이와 같이 수동태로 되어있다. ‘듣는다’는 ‘들리어졌다’로 ‘본다’는 ‘보여졌다’로 되어있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능동태는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고 수동태는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에 관련된 사리자 존자님의 말씀을 한 번 보자.

“①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더라도,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②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③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이 나타납니다.”
(맛지마니까야,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

‘본다’는 것은 밖의 형상을 향해서 주의와 관심을 주는 것이고 ‘보여진다’는 것은 밖의 형상들에 주의와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형상들이 시각에 들어오는 것이다. 전자는 마음이 일어나며, 후자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본다     :     마음 -----> 눈 -----> 형상
보여진다 :     마음 <----- 눈 <----- 형상들

이러한 ‘보여진다’는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서 ‘비추인다’가 되는데 이때 세상(형상들)은 더욱더 넓게 시각에 들어오며 또한 더욱 선명해지고 투명해진다. 비유컨대 거울이나 호수처럼 마음이 없는 것들의 표면에 형상들이 비추이면 그것을 ‘비추인다’고 하듯이 이와 같이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없으면(無心) 세상은 거울에 비추이듯이 비추이게 된다(照見).

이러한 비추인다가 더 투명하여져서 ‘보는자’와 ‘보여지는 형상들’의 자타(自他)가 없으면 하나로서 ‘봄’이 된다.
본다 ---> 보여진다 ---> 비추인다 ---> 봄
이러한 여정은 점점 더 개체성이 사라지면서 전체가 되어 가는 것이고 또한 점점 더 마음이 투명해지고 무심(無心)이 되는 것이다.

위에 사리자 존자님의 말씀에 임으로 넘버링을 달았다.
①번은 눈에 형상이 안 보일 때 그것에 주의를 주지 않으면 당연히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주의를 주면 마음이 생긴다. 예를 들면 눈에 형상이 안 보일 때 머릿속으로 상상이라는 주의를 하게 되면 마음이 일어나듯이.
②번은 눈에 형상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주의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③번은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주의와 관심을 주면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면서 하는 형태이다.

‘들을’ 때는 자기의 견해와 관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들리어질’ 때는 아무런 견해가 없는 녹음기와 같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송출자는  부처님 말씀을 개인의 견해 없이 ‘들리어진’ 그대로만 그대로 전하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