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원래의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다.
여기서 ‘금강은 다이아몬드’ ‘반야는 혜(慧)’ ‘바라'는 건너다’ ‘밀다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금강반야(다이아몬드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의 경’이다. 금강반야가 무엇인지는 다음의 초기경전 말씀으로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성미가 급하고 격렬하다. 사소한 농담에도 노여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분개한다. 분노와 성냄과 불만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마치 곪은 종기가 나무 꼬챙이나 사금파리에 부딪히면 고름과 피가 많이 나오듯이 어떤 사람은 성미가 급하고 격렬하다. 사소한 농담에도 노여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분개한다. 분노와 성냄과 불만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로 형상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반야를 통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마치 보석이건 돌이건 금강석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듯이 어떤 사람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반야를 통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사람품 곪은 상처 경)
다이아몬드는 광물 중에서 강도가 제일 쎄다. 그러므로 자르지 못할 것이 없다. 이러한 ‘다이아몬드 마음’으로 모든 번뇌를 부순 것이 해탈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해탈이 나왔다. ‘마음의 해탈’과 ‘반야 해탈’이다. 우리는 보통 해탈이라고 하면 ‘오직 하나의 해탈’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해탈은 이와 같이 두 가지이다.
‘마음의 해탈과 반야해탈’ 둘 다를 이룬 경우와 ‘반야 해탈’ 하나만 이룬 경우. 이렇게 두 가지이다. 전자를 ‘양면(兩面) 해탈’이라고 하며 이것이 ‘반야 해탈’ 하나만 이룬 것 보다 더 높은 해탈이다.
‘마음’과 ‘반야’는 다르다. 마음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반야’이다. 삼매를 조건으로 마음보다 더 내면의 본질인 반야가 드러난다. 계정혜 삼학은 ‘계율, 삼매, 반야’이다. 계율을 조건으로 삼매가 되고, 삼매를 조건으로만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난다. 삼매는 ‘통일된 마음’인데 마음이 통일 되면 드러나는 ‘반야’가 무엇이겠는가? 마음이 통일 돼서 완전히 고요해지면 이제 그 본성인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반야의 ‘무더기’라고 한 이유는, 삼매를 하면 각각의 삼매의 경지에 해당하는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날 뿐, 구경의 반야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무더기’라고 쓴 것이다. 물론 구경의 삼매에서는 구경의 반야가 드러난다. 그때는 ‘무더기’가 아니며 온전한 구경의 ‘반야’이다.
각각의 삼매는 ‘마음의 구족’이다. 삼매의 구경의 경지를 통해 마음이 완전히 청정해지면 ‘마음의 해탈’이다. 각각의 신통-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은 반야의 구족이다. 그러므로 육신통은 ‘반야해탈’에 속한다.
그러므로 ‘금강반야’는 ‘금강석마음과 반야’를 합친 뜻으로 보여진다. 즉 양면해탈로 보여진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이제 다시 살펴보면, 중생의 오염된 마음(밀다)이 금강반야로 건너가는 법(法)이 설해진 경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다.
이제 금강경의 첫 장을 시작함에 있어서 미리 밝혀둘 점이 몇 가지 있다.
1. 원음경전(근본경전)에 계신 말씀을 많이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2.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의역을 하지 않고 직역만을 할 것이다.
3. 중의적으로 여러 뜻이 있을 때 제일 중요한 직역의 뜻을 먼저 밝히고 그 다음으로는 그 안에 숨은 뜻들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4. 한자본과 산스크리트어본 둘을 비교해서 두 가지 경전의 뜻이 다를 때에는 산스크리트어본을 따를 것이다. 이유는 한자본은 산스크리트어본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보다 오래된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이 금강경을 읽다 보면, 기존의 금강경 해석서들과 완전히 다르거나 혹은 아주 많이 다른 차이점들을 보게 될 것이다. 부디 인내심을 갖고 보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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