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법에 대한 의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목적은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여 불생불멸의 청정지복인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에는 ‘마음의 해탈’과 ‘반야 해탈’이 있다.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성제(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사유하고 닦아야 한다. 탐진치의 소멸이 해탈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비의도’를 해야 하며, ‘비의도’란 ‘非탐진치’이다. 비탐진치를 위해서 ‘삼매와 위빠사나’를 이루어야 한다. 삼매와 위빠사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념처(신수심법)를 닦아야 한다. 요약하면 37보리도품을 닦아야 한다.
다른 법수로 이야기 해본다면, 몸과 말과 마음의 계율과 보시를 먼저 닦고, 바른 생활을 하고, 식사절제와 육근 단속을 하고, 깨어있음에 전념하고-경행과 좌선을 많이 하고- 사념처 중에서 먼저 ‘신수심’을 닦고 그리고 ‘법’을 닦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 장애를 닦고 삼매를 닦는다. 그러면 ‘바른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나기 시작해서 ‘탐진치가 모두 소멸’하여 ‘모든 의도가 소멸’하면 해탈에 이른다.
불법이 다른 종교의 법과 다른 점은 이 세계의 어떠한 존재라도 영생(永生)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천상세계가 있으며 거기에 사는 신들은 높은 신들일수록 더 행복하고 수명도 길지만 결국은 죽어서 다시 윤회하는 존재들이다. 그 천상세계를 포함해서 모든 세계는 변하는 것으로서 궁극의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단지 상(相)의 세계이다-. 요약하면 천상세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와 존재’는 모두 변하며, 그것은 괴로움이며,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을 모두 여의면 궁극의 불멸의 실체이며 해탈이다.
이러한 불법에 대해서 의심한다면 해탈은 기대 할 수 없다. 다만 잘 닦아서 높은 천상세계에는 갈 수 있겠다.
3. 계율과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
계율은 꼭 필요하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은 오직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하는데 필요한 사항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불교의 계율과 상관이 없는 계율도 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 당시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부처님의 제자 중에 데바다다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는 부처님의 사촌이었다. 처음에 출가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지어서 좋은 진전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부처님께 승가를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이를 나무라셨다. 그러자 그는 부처님을 시해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부처님께서는 발을 다치셨다. 시도가 어긋나자 그는 오백 명의 스님들을 이끌고 승단을 나와서는 스스로의 승단을 만들었다. 데바다다가 오백 명의 스님들을 유혹한 명분은 부처님의 계율은 너무 느슨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우기에도 거처에 들어가서 안거해서는 안 되며, 나무 밑에서 그대로 비를 맞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인도에서 우기에 비를 그대로 맞고 수행한다면 이것은 대부분 병이 들거나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바다다는 이렇게 계율에 집착하면서 스님들을 유혹했다. 이것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기 때에 거처에서 안거 하고 싶은 스님들은 예전처럼 그대로 안거를 하고 만약 나무 밑에서 그대로 우기 철을 보내고 싶은 스님들은 그렇게 하라고 계율을 다시 제정하시는 사례까지 벌어졌었다.
이 외에도 그 당시 외도들은 고행을 계율로 착각하는 전도된 공부들을 참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소를 닮기 위해서 소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고, 소똥을 먹는 그런 고행적인 계율에 집착을 했다. 이렇게 하면 해탈하거나 죽은 뒤 천상세계에 간다고 외도들은 믿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런 자가 그 고행을 다행히 성공한다 하여도 죽은 뒤에는 소로 태어나게 되며 성공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에 지옥에 윤회 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소멸하는데 필요한 계율이 아니고, 오직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그런 계율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공부를 망치게 된다.
그 당시 브라만들은 여러 의례 의식들을 행했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물에 매일 목욕을 하는 의식과 그 외에 유사한 많은 의식들이 있었으며 이렇게 하면 죄는 씻기며 살아서 해탈에 이르거나 그보다 못하면 죽어서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이렇게 믿고 의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죄는 스스로 공부지음에 의해서 씻기는 것일 뿐, 그런 목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브라만들은 참 많은 제사의례 의식을 행했다. 이때 많은 동물들을 죽여서 그것을 제물로 바쳤으며 제사의 의식절차는 허례허식으로 상당히 까다로웠다. 부처님께서는 동물을 살생하는 제사에는 공부 된 스님은 참석하지 않으나 살생이 없는 제사에는 공부 된 스님이 참석하며 그 제사의 공덕은 크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동물을 살생하지 않고 조상에게 제사를 잘 지낼 때 그 조상이 천상세계에 있다면 차려놓은 음식은 먹지 않지만 그 후손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이고, 아귀계에 있다면 그 제사 음식을 배불리 잘 먹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축생이나 지옥에 있다면 그 제사에는 올 수 없다고 하셨다.
제사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해 주는 제사’이다. 지금도 이러한 제사의식을 많이 하고 있으며, 그 당시에도 많은 종교들에서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 제사를 주재하면 죽은 사람을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의식을 행하였다. 다음은 이 대목과 관련 된 부처님 말씀이다.
“세존이시여, 서쪽 지방에 사는 바라문들은 물병을 가지고 다니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물속에 들어가고 불 지피는 헌공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서 임종한 사람을 위로 인도한다고 하고 잘 다스린다고 하고 천상에 가게 한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 아라한. 정편각자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촌장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시 물어보리니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설명해보라.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있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고 넓은 바윗덩이를 깊은 물속으로 던진다 하자.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 곳으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올라오소서, 큰 바윗덩이시여, 떠오르소서, 큰 바윗덩이시여, 뭍으로 나오소서, 큰 바윗덩이시여.’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크고 넓은 바윗덩이는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올라오고 떠오르고 뭍으로 나오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 있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사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중상모략을 멀리 여의고, 욕설을 멀리 여의고, 잡담을 멀리 여의고, 간탐하지 않고, 마음에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버터 단지나 참기름 단지를 가지고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깬다 하자. 그러면 단지의 파편이나 조각은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고 버터나 참기름은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 곳으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내려가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 가라앉으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 아래로 내려가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버터나 참기름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내려가고 가라앉고 아래로 내려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중상모략을 멀리 여의고, 욕설을 멀리 여의고, 잡담을 멀리 여의고, 간탐하지 않고, 마음에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쌍윳따 니까야, S42:6 아시반다까뿟다 경)
여기 부처님 말씀처럼 죽기 전까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선처(善處) 혹은 악처(惡處)에 가는 것이며, 그것을 어떤 의식이나 제사로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죽은 사람을 위해서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인지상정이며 좋은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공덕이 있다.
4.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은 탐욕의 부분집합이다. 6,7번을 보면 천상세계에 대한 집착이 있고 8번은 어떻게든 존재하고픈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다. 이 모두가 탐욕이다. 부처님께서는 탐욕의 소멸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승의 이름을 ‘걸식자’로 부르신 것이다.
5. 악의(성냄)
부처님께서는 성냄의 소멸을 말씀하셨다. 마음속에서 성냄을 완전히 소멸하고, 만약 마음속에 성냄이 남아 있다면 ‘몸과 말’로 만이라도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6. 색계(色界)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이 없더라도 높은 천상세계인 색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다면 해탈하지 못하고 죽은 후 색계에 화생(化生)하게 된다. 여기 색계의 존재는 빛의 몸이다. 더 높은 색계의 존재일수록 더욱더 대광명(大光明)이다.
7. 비색계(非色界)에 대한 집착
대다수가 흔히 무색계(無色界)라고 쓰고 있는 이 단어의 팔리어 직역은 ‘비색계’이다. 중국에서부터 무색계라고 의역해서 썼고 한국 불교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지금은 대다수가 관습적으로 무색계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것이 편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비색계’라고 쓰는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다. 앞으로 금강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것에 관한 논의가 계속 될 것이며, 왜 부처님 말씀은 있는 그대로 직역을 해야지만 법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비색계의 존재는 빛도 아니고, 형체도 아니며 순수의식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료들’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전체가 아니며 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것은 ‘비존재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8. 자만(自慢)
‘나가 있다’는 것이 자만이다. 즉 어떠한 존재로든 존재하고 싶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모두 버렸어도 아직 색계나 비색계의 천상세계에 태어나고 싶다면 그것은 ‘나로 존재하고 싶은’ 자만이 있는 것이다. ‘나가 있다’는 ‘잠재적 경향성의 소멸’되어야 한다.
9. 들뜸과 후회
공부 초기에는 흥분과 비탄이라는 파동이 큰 들뜸과 후회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들뜸과 후회는 공부가 깊은 존재의 것으로서 아주 작은 파동만 남은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부동심(不動心)이다.
10. 무명(無明)
무명이 사라지면 명지(明知)가 드러난다. 해탈이다.
이제 다시 ‘큰 걸식자’로 돌아와 보자.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아라한들을 큰 걸식자라고 이름을 지으신 이유는 탐욕을 완전히 소멸하라는 뜻이다. 욕계의 감각적 욕망과 색계, 비색계의 높은 천상세계에서 살고픈 탐욕마저 모두 소멸하고 나아가 ‘나가 있다’는 잠재적 경향성의 완전한 소멸을 말씀 하셨다.
해탈의 ‘수단’은 이해하기 아주 쉽다. ‘탐진치의 소멸’이 바로 해탈이다. 한 마디로 하면 ‘탐욕’의 소멸이 바로 해탈이다. 탐진치의 소멸이 바로 ‘의도의 소멸’이다. 의도가 있다는 것은 ‘탐’이 있다는 뜻이다. ‘탐’의 소멸이 ‘나가 있다는 잠재적 경향성의 소멸’이다.
곧 ‘탐진치의 소멸 = 의도의 소멸 = 나가 있다는 잠재적 경향성의 소멸 = 해탈’이 된다.
이와 같아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소멸하라는 뜻으로 제자들의 이름을 ‘큰 걸식자’로 부르셨다고 이야기 하면 간단할 것을 10가지 족쇄를 다 살펴 본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10가지 족쇄는 공부의 깊이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1,2,3번이 없고 4,5번이 어느 정도 소멸 되었다면 그는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최소 2번에서 최대 7번 안의 생에서 해탈이 예정된 성자이다.
4,5번이 거의 소멸하여, 희미하게 자욱만 남았다면 그는 사다함이라는 성자이다. 사다함은 한 번만 더 오면 그 생에서 해탈할 분이다.
4,5번이 완전히 소멸하면 그는 아나함이다. 여기에 다시는 오지 않으며 색계 중에서도 높은 사선천에 화생하며 그곳에서 사시다가 해탈 할 분이다. 10번까지 모두 소멸했을 때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해탈한 아라한이시다.
삼매와 위빠사나가 어느 정도 된 유학(有學)의 경우에도 스스로의 공부가 어느 경지인지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마음공부의 방법이 있다. 더군다나 현재 불교에만도 그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주시지 않은 방법마저도 참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그 방법들로 본인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10가지 족쇄’와 비교하면 스스로의 공부 깊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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