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일지/수행 일지

2024-05-10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사유

Daisy청량심 2024. 5. 11. 05:02

    늘 그랬듯 공부해야할 법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순일스님의 가피로 조금씩 차근차근 제게 옵니다.

이번에는 동료 수행자님들께 제 배움을 공유하라고 이 경전(케마까 경) 이 제게 온 것 같이 느껴져 제 경험담을 공유하겠습니다.

 

    얼마전 녹음된 순일스님의 차담을 들으면서 XX님이 '오온이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배워서 알긴 알겠는데 막상 오래된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앎으로 체득이 안된다고 말씀하신것을 듣고 제게 된 공부를 공유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용기내어 올립니다.

 

    저 같은 경우, 예전에 나름 극심한 괴로움에 허덕이며, 이를 꼭 없애야겠다는 집념으로 법문들을 듣던 중 어떤 법문에서 연기법을 이해하면 깨달을 수 있다(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라는 말이 뇌리에 꽂혔었습니다. 그 후로 연기법에 대한 법문들을 찾아 듣게 되었었는데 많은 부분 이해할순 없었지만 몇 구절에서 부처님 말씀처럼 '오온이 내가 아닐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 법문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나 그 법문에선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접촉하면 저절로 마음(느낌, 인식, 의도, 식)이 생기는 것이지 (마치 자연현상처럼 조건과 결과로) 마음이 나라서 또는 내것이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오온이 내가 아니다'라고 말씀들 하셨지만 이해가 안되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곤 했었는데, 이 법문은 제게 약간 충격으로 다가왔고 저로 하여금 정말로 그런가 하고 저의 행동과 생각들을 천천히 사유하게 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서랍장 위에 먼지가 보였고 '먼지 좀 닦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올라왔으며

좌전 중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도 모두 곰곰히 그 시작점부터 살펴보니 모두 제가 어제 또는 언젠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들에 기인해서 생각(마음)들이 올라온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어떤 생각(마음)들도 제가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온 것들이 아니었고 제 경험으로 인한 지식 이외의 것에서 오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 상상, 망상을 내가 새로이 일으킨 것들이라 착각할 수 있겠으나 그들 역시 각자의 무의식(아뢰야식)에 저장된 지식들을 기반으로 나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법문에선 이 마음들이 내것이거나 나였다면 내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나'일 수 없고 '내것'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좌선을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이 생각이란 놈들이 저절로 생기고 사라지게 하는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험들을 종합해 보면 마음들은 '나'이거나 '내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 사라짐을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몸 또한 죽은 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이 몸은 죽은 후 딱딱한 몸에서 마음의 몸으로 바뀌니 그저 그 수명이 다하면 알음알이(무의식에 저장된 경향성), 업에 의해 생겼다가 변하고 사라지고 하니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법문에선 자동차를 예를들어 오온을 설명하셨습니다.

모든 부품들이 모여 자동차가 만들어지고 자동운행 장치를 켜면 자동차는 자율주행을 합니다. 오래전의 사람들은 자동차를 보고 자동차 안에 말의 영혼이 있어 자동차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오온들은 자동차와 같이 조건지어 모여진 것들일 뿐 나도 아니고 내것도 아니라고 설하셨습니다. 자동차엔 없는 자유의지란 것도 일종의 부품이지 '나'가 아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며칠 전 읽은 케마까 경(S22:89)은 제 경험들과 일치하는 내용이라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었고 연이은 순일스님의 차담에서 XX님의 질문으로 제 경험들을 공유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은 정말로 경이롭습니다.

 

진정한 앎(지)과 봄(견)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순일스님께 배웠듯이 삼매 수행을 통해 얻은 통찰지로 보아야 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올립니다. 

 

아래는 케마까 경(S22:89)의 한 부분입니다. 순일선원 홈페이지 '법의 향기'에도 올렸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 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인식을 두고  심리현상들을 두고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욕구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잠재성향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인식이다  심리현상들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이 되는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욕구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잠재성향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나면 꼭 홀로 사유해보고 난 후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던 순일스님의 법문이 생각납니다. 법에 대한 사유는 아무리 많이 해도 해롭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도 생각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