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 - 사성제 7 A,B - 순일 큰스님
저번시간에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3번째까지 했잖아요.
오늘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가 됩니다.
“팔정도”에요 다 아시다시피 여덟 가지 바른길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팔정도인데 여덟 가지 길인데, 제가 9번 10번을 썼는데 임의로 쓴 것이 아니고, 10가지로 말씀하실 때는 저렇게 나오세요. 부처님께서 여덟 가지 일때는 저렇게 나오는데 사실 8가지로 나와도 9번, 10번이 나중에 저것이 포함된 거예요. 부처님께서 10가지로 저렇게 말씀하실 때도 많이 계십니다. 경전에 먼저 바른 견해는 부처님께서 저것도 연기법 이예요.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바른 사유가, 바른 사유를 조건으로 바른말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견해가 삿된 견해가 되면 삿 된 사유, 삿 된말, 삿 된 행위 이렇게 쭉 나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정견이 제일 중요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른 견해는 부처님께서 고집멸도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그러셨죠. 앞서서 말씀드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서 바른 견해가 있어야만 된다. 쉽게 이야기 한다면 이것이 괴로움이다 에서 색 수 상 행 식이 몸과, 느낌, 인식작용, 우리가 하는 의도들, 아뢰야식, 즉 몸뚱아리, 느낌은 몸에 여섯 가지 감각장소에서 느낌을 느끼죠. 눈 귀 코 혀 몸 마노라는 마음, 그것에 느낌, 인식은 이 느낌만이 아니라 바깥쪽을 인식하는 것 바깥쪽에 모양을 인식하는 것, 바깥쪽에 소리를 인식하는 것, 냄새 맛 감촉 마노의 대상인 법들, 법 세계, 구성요소들 이 인식이죠.
그러면 몸뚱아리와 느낌은 나의 감각, 정서의 느낌, 인식은 나 아닌 바깥들을 전부다 인식하는 것, 의도는 얘가 하는 의도들, 6가지 눈의 의도, 귀의 의도 등등, 6가지식, 이러면 전체세상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는데 이 세상이라고 이루어진 것이 전부다 괴로움이다. 라는 것이 바른 견해다. 그건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몸뚱아리로 여긴다면 몸뚱아리는 전부다 소멸하는 거죠. 색수상행식은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겁니다.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즐거움이 아니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색수상행식은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색수상행식은 나도 아니다 결코 실체도 아니다. 그러니 색수상행식은 괴로움이 맞다. 이것을 떠나라 이걸 떠나면 아무것도 없는 단멸이 아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이걸 떠나면 이름 할 수 없는 불멸의 불성이 드러난다고 하신 거죠. 그러니 색수상행식을 얘는 떠나야 되는 거고 얘 떠나면 아무것도 없다가 아닙니다. 불멸이 드러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라.
그러신게 세상의 일어남도 있고 세상의 소멸도 있다. 그런데 세상의 소멸을 하여야 해탈인데 소멸을 안 하고 세상 안에서 살면은, 욕계 색계 비색계라는 세계를 윤회하면서 살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산다면 점점 높은 세계 욕계에서는 여섯 가지 천상세계를 가라 그러셨죠. 사람세계 보다는 떠나갔고, 사대천왕 신의세계 하늘나라에 가라 그러셨고, 사대천왕 신의세계 보다는 33천 신의세계가 더 높고 오욕락을 더 갖추었으니까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갖추었으니까 33천세계로 가라. 33천 신의세계 보다는 야마천이 더 훌륭하니까 야마천으로 가라, 거기보다는 도솔천이 더 훌륭하니까 도솔천으로 가라, 도솔천보다는 화락천이 훌륭하니까, 화락천으로 가라. 화락천보다는 타화자재천이 훌륭하니까 그 세계로 가라. 그 세계보다는 색계의 초선천의 빛의 흐르는 높은 신들의 세계가
더 좋으니까 빛의 신으로 가고, 거기보다는 2선천, 거기보다는 삼선천, 이렇게 사선천 이렇게 가라 그러신거죠. 그렇지만 그것은 다 세계라고 하신 겁니다 세상이다. 그 세상을 다 초월하게 되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소멸이 되고 세상이라는 영화가 아니고 영화 이전에 이름 할 수 없는 스크린이라고 하는 다 알고 다 보는 불성이 드러난다. 그 불성이 될려면 세상이 소멸해서 편재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색수상행식도 초월하고 세상도 초월해라 이렇게 얘기 한 거죠.
만약에 세상을 초월 못한다면, 보다 높은 천상을 그래도 가야 된다. 이렇게 얘기 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고 이것이 괴로움이다. 고 그런데 왜 이 세상에서 섞여도 자꾸 살면서 괴로운가! 이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신 거죠. 이 세상을 왜 좋아하는가? 기분 좋고 즐거운 감각적 욕망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색수상행식도 좋고 저 쪽에 색성향미촉법도 좋고 나도 좋고 세상도 좋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세상에서 자꾸 돌고, 돌고 윤회하는 건데 그것에 잘못된 것이 뭐가 있는가? 감각적 욕망은 분명히 있지만 그 달콤함은 작고 괴로움이 크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러신 겁니다. 달콤함이 없는 것이 아니죠. 분명히 있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이 뭐가 잘못 된 거냐? 다시 이야기해도 달콤함은 있는데 괴로움이 더 크다.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에 사람이 가면 그림자가 쫒아 가듯이 달콤함이 있는 곳에는 기필코 위험함이 있다.
재난 괴로움이 있다. 달콤함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인 겁니다. 그러면 그래서 달콤하지도 말자가 아니라, 달콤함을 떠나면 괴로움을 떠나게 되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지고의 이름 할 수 없는 최고의 최상의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이 드러난다고 하신 거죠. 그런데 달콤함은 참 그래도 우리 좋죠. 떨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꿀이 있는데 꿀 먹고 싶거든요. 그래서 그럼 달콤 하긴 한데 부처님께서 달콤한 것들을 먹고 싶을 텐데. 어떻게 하나하나 천천히 한번에가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나는 점진적으로 깨닫는 방법을 설했다. 점진적으로 어떻게 달콤함을 벗어나며 위험함을 벗어나는가가 지금 오늘 우리가 같이 이야기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전 시간에는 12연기가 나왔었죠.
12연기는 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래서 괴로움이 어떻게 생겼고, 이런 이치이기도 하고 나만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전체 괴로움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단 바른 견해의 일단인데, 삿된 견해는 뭐냐 하면 삿된 견해는 이런 거죠. 색수상행식은 영원 하다라는 것이 삿된 견해입니다. 이 몸뚱아리와 마음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삿된 견해입니다. 여기서 지금 영생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죠. 영생교 처럼 몸뚱아리와 마음을 갖고도 색수상행식은 항상하다 영원하다고 지었든 자들이 있고, 지금 여기가 아니면 요번에 죽은 다음에 한 번에 가는 천상세계는 거기는 영원하다.
거기도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을 갖고 오욕락을 충분히 갖춘다. 천상세계에 부처님께서 거기도 영원하지 않다고 그러셨죠. 수명은 길지만 그러면 또 누군가는 빛의 몸이 되면 빛이 되면 영원하다 빛마저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셨습니다. 형체 없는 순수의식의 동료들이 있는 세계 비색계를 가면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그러셨죠. 보다 높고 보다 지고의 상태지만 그런 것은 전부 영원할 수 없다.
바로 이 말씀인데 모양 있는 것들은 영원할 수가 없고, 비색계의 순수의식은 모양도 없지만 동료들이 있다 라는 것 자체가 “너와 나가”있다 라는 거고. 너와 나가 있다는 것은 눈에 안보여도 형체가 있는 거고 부분자 들이고, 전체가 아니고 전체가 아닌 부분은 움직임이 있는 거고, 움직일 공간이 있는 것들에는 시공이 있는 거고,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들은 전부 변하고 멸하는 겁니다. 불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떠한 형체가 됐건 색수상행식으로 영원할 것이다 라고 믿는 것은 참으로 삿된 견해다.
이 견해를 갖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으로 한번 천상가면 영원할 것이다 라고 믿기 때문에 이것이 삿된 견해니까 그렇게 하게 되면 삿된 견해로 뭐가 생기냐하면 천상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아서 영원히 감각적 욕망을 하겠다고 하는 거죠.
이러면 삿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방법이 없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된 자는 한번 여겨보시면 뭐가 기대가 되냐 하면 삿되게 색수상행식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제 탐 진 치를 오히려 더 하겠끔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다보니까 탐 진 치를 더 하는 길로 가게 되니까, 점점 더 성냄도 강화되고, 어리석음도 강화되고, 이렇게 자기를 위해 점점 이런 길로 가다 보면은, 세상의 재물이 됐건, 명성이 됐건, 명예 행복 힘 권위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어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뒷 통수를 치게 되 있는 거죠. 착하게 살 수 없고 악하게 사는 것이 기대가 되는 겁니다. 삿된 견해로 간 사람들은....
그래 바른 견해로 간 사람들은 이 색수상행식이 “나라는 것이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괴로움이라고 알았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이 지금 안이비설신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안 사람들은 바른 견해는 눈의 감감적 욕망, 귀의 감각적 욕망, 코에, 혀에, 몸에, 마음에, 성냄과 욕망들을 없애려고 노력하죠. 그렇기 때문에 해탈이 될 것이고, 해탈이 못되더라도 없애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고귀한 천상세계로 가는 겁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제자 스님들에게 이렇게 얘기해라 했죠. 제자여 다른 외도들이랑 토론을 할 때 이렇게 물어보아라. 여보 “그대와 나는 종교가 다릅니다. 교리도 다릅니다. 배운 것도 다릅니다. 그러나 목적은 우리가 궁극은 하나일까요, 다를까요.”하고 물어 보아라 현명한 외도라면 교리가 다르고 배운 것도 다르더라도 궁극의 목적은 하나일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면 궁극의 하나인 목적이 탐 진 치가 많은 사람이 궁극에 도달하겠는가, 탐 진 치가 없는 사람이 궁극에 도달할 것인가 라고 물어보아라. 현명한 외도라면 탐 진 치가 없는 사람이 적은 사람이 궁극에 도달할 것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탐 진 치가 더 없는 자가 될려면 이 몸과 마음이 나인 자가 나라고 여기는 자가 탐 진 치를 없앨까요?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여기에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얘를 빼 어 버리자 오염원을, 이런 사람이 탐 진 치를 더 버리겠습니까. 그러니 출발이 색수상행식이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출발하는 것이 바른 견해가 맞습니다. 자 오늘 공부로 들어가겠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바른 견해에 대해서 얘기 드렸습니다.
그러면 바른 견해를 알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닦나 이것이 8정도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바른 사유가 됩니다.
[바른 사유]는
1. 출리에 대한사유
2.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3.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입니다.
출리는 뭐냐 하면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떠나겠다는 이런 사유가 됩니다.
악의 없음은 마음속에 미움 증오 이런 것을 품지 않겠다는 거고요.
해코지 않음은 마음속에 비록 품었더라도, 행동으로 남을 해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출리에 대한 사유는 나중에 크게 보면은 감각적 욕망보다 더 초월해서 천상세계라는 세계도 나는 가지 않겠다 라는 것이 출리에 대한 사유가 됩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떠나겠다. 이 얘기죠. 모든 세상을 초월하겠다. 이렇게가 출리에 대한 사유입니다. 마음속에 악의를 품지 않으면 악의가 없으면 아나함이죠. 아나함은 해탈 전 입니다. 악의가 없는 정도 말고 아주 조금만 화가 남아 있어도 엄청난 경지인 거죠. 그런 경지면은 부처님께서 제석천왕이 여기에 내려와 있는 것과 똑같다고 그랬습니다. 그 정도로 행복하다는 거죠. 그 정도로 행복하다면 우리는 사유해 볼만한 겁니다.
우리는 화를 내는데, 화만 안내면 당장 죽어서가 아니라 여기서 제석천왕과 똑같은 지위라는 거죠. 그러면 깨달음 공부가 이런식 으로 온다면 너무 쉬운 겁니다. 어찌 보면 화를 없는 게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보상에 비하면은 화만 없애면 보상이 너무 크기 때문이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화는 참기가 쉽지 않죠. 어려운데 또 어찌 보면 그래요 보상이 이렇게 큰데 그까짓 것 참아버리면 되는 거죠. 왜냐하면 화를 내는 상대는 겨우 상대밖에 없잖아요. 상대가 나를 화나게 해서지 지구사람들이 다 나를 화내게 했을 리는 없거든요. 화내게 한 사람은 그 순간에 한명 내지 두 명 이거든요. 보통 한명 두 명 한테 화를 내는 것만 참으면, 우주만한 복이 오기 때문에 정말 참을 만한 거죠. 그런 경우가 된다 면은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속에 악의를 품지 않겠다. 그런데 악의를 품어서 혹시 품었더라도 해코지를 않겠다 이것이 바로 사유고요 여기까지지만 하나 더 붙인다면 만약에 해코지 를 했다면, 그러면 우리식으로 참회를 해야 되는 거죠. 해코지를 했다면 참회를 하고 다시는 해코지를 안하겠다고 되돌리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저 팔정도가 있다는 거 생각해 보세요.
우리 안에 감각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없다 에요. 뒤집어서 얘기하면 “악의가 없는 사람이 없다 에요. 해코지 않는 사람이 없다 에요” 왜 그러냐 한번 여겨보세요. 있으니까 닦으라 그러셨고, 있으니까 저것이 있기 때문에 신들도 저것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아직 세상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있으니까 닦으라 무슨 말씀 인냐 하면 있다고 한 번에 닦을 수 있나요. 점진적으로 닦는 겁니다. 그래서 앞서서 여기 없는 말씀도 드린 것이 해코지를 했다면 하는 거죠 사실은 신들도 다 하는 거예요. 우리 그런데 문제는 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고 참회하는 거죠. 그리고 또 안 할려고 합니다. 그래도 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참회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안 할려고 합니다. 악의 없는 마음도 그렇고 감각적 욕망도 그런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이런 겁니다. 바른 사유 그런데 바른 사유 했다고 바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방법론으로 나온 것이 바른말입니다.
이제 바른 사유는 했지만 사유했다고 말과 행동으로 바로 저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지 않은 말들 계목에 네 가지(4), 행위는 세 가지(3), 바르지 않은 행위들 세 가지(3)는 흥행이고 네 가지 큰말에 삿된 말이지만 그 외에 말에 바르지 않은 말과, 바르지 않은 행동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거 나올 때마다 그것을 참회하고 다시 바른쪽으로 고쳐 나갈려고 노력해라는 거죠. 부처님 말씀이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고 또 했겠죠. 삿 된 말을 또 참회하고 고치고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말과 행동을 바꾸다 보면 마음이 바뀐다는 겁니다.
물론 순서를 보면 마음이 먼저, 마음이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말로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거니까,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그 마음을 바꾸는 방법은,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겁니다. 혹자는 그럴 겁니다. 마음이 우선인데 어떻게 마음먹은 다음, 말과 행동이 나왔는데 말과 행동을 바꾸면 이게 무슨 말이 되는가 하겠지만, 바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웠기 때문에 법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됩니다.
사유란 것은 마음이 하는 겁니다. 마음이 해갔고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거죠. 삿된 마음과 불법을 배운다면은 아직은 작지만 다른 마음이 생기기시작하는 겁니다. 그 둘이 이제 갈등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전에는 삿된 마음으로 삿 된 말과 삿 된 행동을 했지만, 불법을 모른다면 그것이 전부가 되지만 불법을 배운 이제 바른 사유에 바른 마음으로 갈등을 하면서 말을 점점 더 바른말로 가게하고 바른 행동으로 가게 하면은, 그 맨 처음에 사유했던 조그만 마음이 점점 커지는 거죠.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마음이 그렇게 점점 되는 겁니다.
실지로 그래서 오래된 숙업에 의해서 이미 생겨진 마음이야 삿된 마음이 있다고 쳐도 지금 부처님 법을 배운 작그마한 불씨의 마음으로 새로이 말과 행동을 바꾸게 되면 조그마한 불씨의 마음이 커지면서, 이제 새로운 업을 훌륭하게 만들어 가는 거죠. 그래 나중에는 업마저 초월해야 된다. 그래서 보시면 말은 구업, 몸의 행위는 신업, 그 다음에 바른 사유는 의업해서 신.구.의 삼업이 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하게 되면 거 훌륭한 업을 쌓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둠을 추구하는 자 어둠의 결과가 따르고, 밝음을 추구하는 자 밝음의 결과가 따른다고, 신구의 삼업으로 그 잘...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하면은 밝음을 추구하는 자기 때문에 밝은 업의 결과가 생기는 거죠. 그리고 해탈은 물론 저것마저 초월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바른생활은 생계가 됩니다. 직업이 바른 직업 여기까지가 보시면 일상생활에서의 얘기입니다. 그 뒤부터는 수행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바른생활까지가 일상생활에서 잘 사세요. 이런 거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바른 업 인게 높은 천상세계까지는 틀림없이 가는 방법이에요. 여기까지는 그런데 여기는 천상세계 까지 에요. 지금은 세상에 종교가 가지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의 종교는 재가자용 종교에요 출가자용이 아니라, 여기까지가 재가자용 종교입니다. 지금 바른생활 까지가. 다르게 얘기하면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안으로는 계율을 하고 밖으로는 남을 도와라 여기까지 입니다. 직업은 바른 것을 가져라. 여기까지가 재가자용 종교고 세상의 보통의 종교가 다 제가 재가용 종교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보통은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거든요. 세상의 종교들이 각각의 종교들의 궁극을 믿고 계율을 지키고 남을 도와라 보통의 종교가 여기까지 아닌가요. 그러면 보통 다 재가자용 종교가 되기 때문에 그 종교로 갈 수 있는 데는 천상세계까지 밖에가 없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천상세계니까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끝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천상의 신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이 이제 정진, 사띠, 삼매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읽고 재가자용 출가자용 이런 단어상의 어찌 보면 듣기가 민망한 단어를 쓴 이유가 있어요.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천상세계는 무조건 간다라고 부처님 얘기 하셨습니다. 바른 직업 까지가 계율100%가 아니죠. 계율 어느 정도하고 계율이 100%라면 해탈이 된 거죠. 그러니까 지금 바른말, 바른 행동이 100% 됐다는 것이 아니고, 바른말 바른 행동 어느 정도만 되고 바른직 업만 어느 정도 만 되고 지금 그렇게만 만 되더라도, 그냥 천상세계는 맞습니다.
요번 생에 행복하고 그런데 부처님께서 초월하는 길도 말씀하신 거죠. 초월하는 길 들어가기 전에 한번만 다시 정리해 보죠. 아주 쉽습니다. 세상 전체의 법칙이 요번 생도 행복하고 다음 생도 행복한 것은요 거룩하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요 어느 정도만 계율을 지키고 제가 자꾸 어느 정도만 하는 이유는 있어요. 100%는 해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으로는 계율을 지키고 바깥으로는 어느 정도 세상을 향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 돕고 말이죠 간단하죠. 이 세 가지입니다. 믿음은 기본이지 않겠어요.
부처님에 대한 믿음 안으로는 계율하고 밖으로는 남 돕고 그러면 다 되는 거 잖아요. 밖으로 봉사하는 것 배웠고 이것 하면서도 좋은 거 잖아요. 지금도 좋고 천상은 무조건 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도 천상을 가더래도 저 바른 견해가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은 달라요. 바른 견해가 없어도 천상은 가요. 지금 그렇게 제가 얘기 드린 대로 하면은 다른 종교는 바른 견해가 없어도 궁극을 믿고 안으로는 계율하고 밖으로는 남 돕고 보시하면은 천상은 가요 바른 견해 없어도. 문제는 바른 견해가 없으면, 요번 생에 천상정도가 아니라 더 초월할 수 있는 것을, 바른 견해가 없으면 못해요. 그리고 천상 가더래도 거기서 죽은 다음에가 문제에요.
바른 견해가 있는 사람은 천상에서 또 닦아서 죽은 다음 더 높은 데로 계속 갈 것인데, 바른 견해가 없는 자는 견해가 삿되었기 때문에 천상에 간 다음 그 다음에 죽은 다음에 거기서 떨어지면은 더욱 뭐가 떨어지는데 떨어지고 그렇게 가는 겁니다. 계속 윤회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문제인거죠.
그래서 여기서 바른 정진 이라는 것은 사정근입니다.
[사정근]이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은, 안 일어나겠끔 노력하고 이미 일어난 내 마음 속에 일입니다.
2)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은 없앨려고 노력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은 일어나겠끔 노력하고
4)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은 더욱 더 키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이 안 일어나겠끔 노력할려면, 해로운 법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기 전에, 불법을 공부 안 해서 부처님 말씀이 뭔지 듣지 않은 사람은, 뭐가 해로운지 뭐가 유익한지 모르기 때문에요.
아직 안 일어난 해로운 법을 일어나지 않겠끔 노력하는 것도 불가능한 거죠. 먼저 사정근에 선행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을 배워서, 숙지를 해야 되는 거죠. 사유와 숙고를 해서 아 부처님께서 나에게 이런 것은 없는데, 이런 것은 해로운 거구나! 다행이다 나에게는 없다 이것 일어나지 않겠끔 노력해야 되겠다.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것 해로운거라 그러셨네 사유해 보니까 해로운 거 맞네!
부처님 말씀대로 이것을 없애려고 노력해야겠다. 아 이것은 유익한 거였구나! 난 이런 것을 갖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유익한 법이라 그러셨네. 그러면 더욱 더 키워야겠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사정근을 두 마디로 간단하게 얘기하면
1)해로운거 없애고,
2)유익한 거 키워라 그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마음을 개발해라 얘기에요. 훌륭한 쪽으로 물론 종래에는 부처님께서 마음을 개발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요 발전이 아니라
마음이 궁극에 홀로 빛난다 홀로 빛나는 마음 원래로 마음이 돌아가려는 마음의 해탈 이라고 그러셨어요. 심해탈 반야해탈은 좀 다른 얘기입니다. 반야해탈은 이 마음보다 더 이면에 다 알고 다 보는 완전한 반야가 있다. 세상이 아닌 그 무엇이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반야해탈입니다. 그리고 심해탈 반야해탈 양면해탈 이 계셨죠.
그래서 마음의 해탈은 마음의 오염원 더러움만 싹 없어지면 본래로 마음이 텅 비어서 깨끗해서 홀로 빛난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는 홀로 빛나는데, 우리는 오래된 업으로 마음의 먼지와 더러움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은 홀로 빛나게 하기 위해서 과정에서 마음이라는 방을 청소를 해주어야 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는 개발이라는 말씀을 쓰신 겁니다.
마음의 개발 다르게는 마음을 길들여라 그러신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래십호 중에서 하나인 것이 중생을 잘 길들이신 분, 중생의 뭐를 길들이시죠? 마음을 잘 길들이시는 분 그래서 과정에서는 우리가 마음을 잘 길들려라 하신 겁니다. 그러니 사정근은 한마디로 한다면 마음을 잘 길들이는 거고 잘 개발시키는 겁니다. 그 개발시키는 방법이 해로운 거 없애고 유익한 것은 키운다.
하이고 이유는 해로운 것 키우면 개발이 까꾸로 가는 거죠. 제가 단어를 어떻게 지었는지 모르지만 악한 마음을 좋은 쪽으로 개발이 아니라 해로운 법을 많이 쌓으면 안 좋은 쪽으로 마음을 만드는 겁니다. 개발의 반대말을 모르겠네요. 퇴화가 퇴보가 그렇게 하면서 그리고 통론으로는 그렇지만 여기서 사정근은 사띠와 직접적으로는 삼매에 관련된 것입니다. 사띠와 삼매와 관련해서 사띠와 삼매를 더욱더 키우는 거라면 그렇게 하고 사띠와 삼매를 더욱더 없애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사띠와 삼매를 아직 생기지 않겠금 하는 그러한 법이라면 그러한 법은 없애 도로 노력하라. 사정근이 사띠와 삼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띠는 뭐냐! 라는 건데요 사띠는 어원적으로는 직역이 기억입니다. 기억인데요, 이것이 위빠사나의 쉽게 설명을 드리면 자식 벌이라고 생각하시면 편안할 것 같아요. 위빠사나는 반야와 동의어로 쓸 때도 많이 있지만, 사람들이. 제가 보기에는 위빠사나도 반야의 자식 벌입니다. 반야의 직계자식이 위빠사나고, 위빠사나의 직계 아들이 사띠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띠가 기억인데 마음 챙김으로 바꿔서들 이해하지만, 기억의 의미가 많습니다. 지금 대념처경 나중에 공부할 텐데, 몸 관찰, 호흡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 관찰 쪽 나올 때 관찰을 맨 처음에 뭘 로 해야 되냐 하면, 기억으로 해야 되고, 경에 보면은 사띠 확립이 되면 오래 전에 한 말과, 오래 전에 한 행동을 기억하고 싶은 만큼, 기억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이 계속 나와요. 그런거와 연관된 단어입니다.
그때 맨 처음에는 정신 차려서 무언가를 관찰하는 거죠. 그래서 기억하는 거지만 정신 차린다는 것은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건데, 나중에 사띠가 마음을 관찰하려면 마음보다 우위 개념이어야 되는 거죠. 마음으로 마음을 차릴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정도가 가면 사띠가 마음보다 더 주체적인 개념이 되는 거죠. 주인이 되는 거죠. 그때부터는 위빠사나 식으로 변하는 겁니다. 마음보다 더 우위 개념이 되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는 반야가 된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저 바른 사띠는 우리가 언제 공부하냐하면 요거 다 끝나고 다시 돌아가서 오늘은 통론으로 얘기 드리는 거고요. 나중에 다시 각론으로 하나, 하나 살피게 되는데 저 사띠만 하더라도 아까 처음에 오온 , 몸 관찰, 지수화풍 사대로 나누어서하는 관찰, 31가지 내지 32가지 몸의 부위를 해체해서 하는 관찰, 공동묘지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해서 8가지로 마음관찰 하는 방법, 법의관찰해서 5가지 장애의 관찰, 색수상행식의 관찰,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의 관찰, 칠각지의 관찰, 8정도 돌아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띠가 많아요. 많은데 나중에 각론으로 얘기 드리겠지만, 지금은 통론이 먼저 8정도를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는 각론으로 넘어갈 때 충분히 얘기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삼매로 넘어갑니다.
지금 이 순서가 사띠 다음에 삼매입니다. 삼매가 그 만큼 쉽지는 않을 거다 라는 얘기죠. 삼매를 부처님께서 4가지 삼매로 말씀하실 때도 계시고 8가지 삼매를 말씀하실 때가 계십니다.
주로 4가지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일때 색계삼매라고 하죠. 5,6,7,8은 무심삼매입니다. 그런데 주로 초선 이선 삼선 사선만 이야기 하실 때에는 꼭 사띠 공부가 같이 나옵니다. 사선만 갖고는 삼매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띠 공부가 같이하러 나옵니다. 그런데 8가지 삼매가 나올 때는 좀 다릅니다.
8가지 삼매가 다 나올 때는 제가 본 바로는 사띠 공부가 안 나옵니다. 삼매가 깊게 되면은 거기에 해당하는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나기 때문에 별도의 사띠 공부를 안 해도 삼매가 깊어 지면은, 사띠 보다 더 높은 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지금 4가지 삼매만 나오게 됩니다.
초선, 이선, 삼선, 사선 4가지 삼매인데요. 아 삼매를 먼저 정의하죠.
삼매는 사마디 입니다. 빨리어가. 사마디가 중국가서 응용된 것이 삼매, 의역이 선정 그래서 우리가 8선정이라고 의역으로 많이 하고 저도 저기다 계.정. 혜 라고 썼는데 정이라고 썼는게 중국에서 사마디를 의역한 것이죠. 원래는 계목, 사마디, 반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계, 정 ,혜가. 그런데 아까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조끔 달라요 선이라고 한게 선. 정 이라고 한게 선 과 플러스 정 인데요
저나나 산스크리스트로 빨리어로 쟈나(Jhana)라고 되어있는 건데 쟈나가 선 쓸때요,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쓸 때는 쟈나고 오선부터는 사마디 이렇게도 쓰셨고, 또는 5,6,7,8은 ‘사마디’ 또는 부처님께서 통칭으로 1,2,3,4,5,6,7,8을 전부다 사마디로 쓰셨을 때도 있었고 이렀습니다. 그러나 나누어 쓰셨을 때는 1,2,3,4,는 ‘쟈나’ 라고 쓰쎴습니다. 5,6,7,8은 ‘사마디’ 이렇게 쓰셨는데,
삼매다 라는 것은 법수에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내면으로 향하고, 고요히 가라앉고, 삼매에 든다. 이렇게 설하신 경우가 있고요,
산란한 마음이 단일한 마음, 통일된 마음이 되는 것이 삼매다. 또는 삼매는 하나의 끝에 완전히 집중되는 것이다.
자 이렇게 쓰셨어요. 그러니 한번 이걸 잘 보세요. 바깥으로 안의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으로 바깥으로 치달려 나가면, 마음이 산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치달려 나가는 것이, 내면으로 향하고, 거두어져서 더 고요히 가라앉고, 그래 삼매에 든다, 이 말씀 이었죠
이것을 아까 바깥으로 치달리면 산란해지니까, 내면으로가 단일한 마음이 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산란한 마음이 단일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끝에, 완전히 집중을 해야 된다. 하나의 끝에 완전히 집중을 해야지만, 바깥으로 여기, 저기로 치달려 나가지 않기 때문이죠. 자 삼매는 이런 겁니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치달려 나가지 않고, 어딘가 하나의 끝에 정점에 완전한 몰입을 이루는 것, 이랬을 때 완전한 몰입을 이루었다는 자체가 단일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 단일한 마음에는 단일한 마음과 전일한 마음이 있습니다. 전일. 예를 들면 점의 하나의 끝에 몰입이 되었다면 요것은 단일한 상태, 숲이라는 대상으로 숲 전체에 여기 숲이 있는데, 숲에 대해서만 숲 옆에 집도 있고 뭐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거 다 안 들어온다. 숲만 들어오면 숲에 대해서 전일한 상태다. 하면 요건 전일하다는 말을 씁니다.
아까 요것 하나가 단일한데 이만큼이 단일하다 말이죠. 사이즈가 크게 단일하다할 때 전일하다 이렇게 쓰는데 단일한 삼매와 전일한 삼매의 차이점은 전일한 삼매가 경에서는 ‘광대한 삼매’라고 하신 거고, 순일이식으로 하면 천안삼매라고 쓰는 게 ‘전일한 삼매’입니다. 전일한 삼매가 단일한 삼매보다 높은 경지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전일하게 가는 겁니다.
점점 더 전일하게 더 넓게, 넓게, 넓게 그래서 더 넓게 가면은, 삼매가 된 만큼이 자기 마음의 현주소입니다. 즉 삼매가 되기 전에는 몸뚱아리만한 것이 자기 마음이었는데 삼매가 되어서 이 법당만 해졌으면, 마음이 법당만 해 진 것이고 삼매가 부산만 해졌으면, 전일하게 부산만한 마음이 된 것이고, 한국만큼, 지구만큼, 지구까지 넘어가면 광대가 아니라, 무량한 삼매로 넘어가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과 광대를 별도로 쓰셨습니다.
‘광대’는 넓은 것, ‘무량’은 넓은 정도가 아니라 한 없는 것 이렇게 쓰셨습니다.
자 돌아옵니다. 초선,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초선에 들어 머문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들과 해로운법들을 떨쳐버린 뒤가 포인트입니다.
일단 삼매에 들기 전에 떨출려고 실생활에서 노력하고 실지로 삼매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출려고 노력했지만 떨쳐지지 않았죠. 그때 방법으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해라 수행주제에 대해서. 하나의 끝에 완전히 집중을 해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떨쳐진다.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법들이 떨쳐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희열과 행복이 가득하게 번지면서 초선에 들을 것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자 감각적 욕망들과 해로운법이 말로는 욕망과 법이라고 했는데 실지로는 마음입니다. 욕망을 누가하냐하면 마음이 하는 거고, 해로운법을 누가 하냐하면 마음이 하는 거기 때문에, 산란한 마음이 단일한 마음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지금 마음이 산란하다 그 마음이 단일하게 될 려면 그 산란한 마음은 어떤 걸 대상으로 오는가. 감각적 욕망이라는 생각들을 하면서 그 마음이 온다 해로운 법들을 생각하면서 그 마음이 오니까, 그 마음을 지금 버리자 그 마음을 지금 통일이 되자 해 보아도 통일이 안 되니까, 그 원인이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 마음이니까, 지금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이란 마음을 놓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을 했는데 안 없어진다. 안 없어지니까 노력했죠. 노력했으면 이제 자 수행주제에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해 보셔요. 그러면 마음은 동시에 두 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감각적 욕망이나 해로운 법이라는 마음을 하면서, 얀트라를 또 보는 마음을 할 수가 없죠. 동시에 두 개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에 지속적인 고찰하는 마음만 생기면, 나머지 마음은 없어진다. 감각적욕망과 해로운 마음은 없어진다.
그때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데 그러면 관건은요 지속적인 고찰 하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에, 얼마나 칼 같이 지속적인 고찰하는 것만 그 마음만 고찰이 딱 되면, 나머지 마음은 없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나의 끝에 완전한 집중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의 끝에 완전한 집중도 누가 하죠. 그것도 마음이 하는 겁니다. 하나의 끝에 완전히 몰입되었으면 마음은 하나의 끝에 완전히 몰입 되었는 거고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몰입된 마음 외에는 아무 마음이 없습니다.
그때 몰입된 그 마음을 조건으로 희열이 오는데 전율을 동반한 희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구석구석 오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행복이 스며듭니다. 그런데 초선에 들었는데 바로 빠져나오죠.
내가 빠져나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초선이 더 되었으면 좋겠는데 안 되고 다시 산란한 마음이 된다. 이유는요 내 마음에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의 마음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잠깐 집중한 것을 조건으로 일시적으로 멈췄던 거예요. 그 마음들이 그래 도로 산란한 마음으로 빠져 나오잖아요. 그래 또 하고 또 하고 삼매를 하는 거죠. 그래서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을 더욱 더 없애려고 노력하고, 더욱 더 그렇게 되면 삼매가 잘 되고, 집중을 하게 되면, 점점 더 집중이 처음에는 30분 걸렸다가 하면, 10분 걸리고, 5분 걸리고, 1분 걸리고, 집중하자마자 삼매가 되고, 처음에는 삼매가 몇 분도 안되었다가 빠져나왔던 것이, 점점 더 시간으로 더욱 더 유지가 되고, 즉각적으로 들고, 유지할 만큼 하고, 빠져나올 때 아무 때나 빠져 나와라. 초선을 여기까지 지어라 고 하셨죠.
자 ~초선 다시 한 번 얘기 합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초선에 들어 머문다.
떨쳐 버렸음에서 생긴, 떨쳐버렸음을 조건으로 삼매가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위빠사나에서도 똑같이 쓰여 지는 겁니다. 중요한 겁니다. 지속적인 고찰을 수행주제로 할 려고 그러면 순서가 먼저 일으킨 생각이 필요합니다. 비유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서재가 있습니다. 서재가 있어 갔고 책들이 쫙 꽂혀있습니다. 책 제목이 삼매도 있고 계율도, 있고 유교도 있고, 공자사상도 있고, 쫙 있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그 중에 삼매란 책을, 지금 찾고자 합니다. 그러면 삼매란 책을 찾고자 하면 처음에 일으킨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삼매란 책이 어디 있지, 난 이것을 찾아야지, 이것이 일으킨 생각입니다. 그래갔고 서재를 두리 번, 두리 번 하다가 책을 찾았습니다. 아! 저기 꽂혀 있구나? 삼매가 삼매를 봐야지! 그때부터 삼매란 책을 보는데 지속적인 고찰입니다. 지속적인 고찰을 하는데, 아직 마음이 단일하지 않기 때문에, 옆에 꽂혀 있는 책들이 거~음식을 맛있게 먹는 법, 옆에 자꾸 들어옵니다.
아이구! 저것 봐라! 나 지금 배고픈데. 눈이 걸로 갑니다. 걸로 갔다가 아차 나는 삼매 책을 볼려고 했던거잖아! 도로 삼매로 눈을 돌려야지, 도로 일으킨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삼매를 봅니다.
지속적인 고찰, 책 옆으로 눈이 또 갑니다. 아~ 이건 안 돼! 다시 돌아와야지 일으킨 생각, 그다음 보게 되면 지속적인 고찰, 이해되었을 겁니다. 목적은 지속적인 고찰입니다. 지속적인 고찰을 하기위해서는 선행 되는 게 일으킨 생각입니다. 아니 이렇게 쉬운 얘기를 왜 했냐고, 하신다면 삼매를 하다보면 생각이 삼매로 가는 게 아니라, 삼천포로 갑니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왔다 갔다 집에 두고 온 거 생각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 지루하다, 혹은 상상의 나래를 펼 때도 있습니다. 즐거운 생각, 싫은 생각 이때에 누가 빨리 돌아 오냐가 수행주제로, 누가 빨리 돌아 오냐가 일으킨 생각입니다. 빨리 돌아오는 사람이 공부가 잘되는 겁니다.
상상은 어쩔 수 없어요. 누구나 다 옵니다. 잡생각.... 그때 훌륭한 사람은 다 잡생각은 오는데 누가 빨리 다시 돌아와서 지속적인 고찰하러 돌아 오냐가 일으킨 생각이 됩니다. 자 초선이고....
이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스스로 확신이 있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인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좀 문장이 복잡합니다.
지금 완전히 이해해야 될 것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지금 Because of that 이란 뜻입니다. 앞에 것 초선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초선이 가라앉은 것을 조건으로 이렇게 되는건데 앞서서 삼매란 안으로 향하고, 내면으로 가라앉고 삼매에 든다.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고요히 가라앉고. 자 2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고, 그냥 가라앉고가 아니라 가라앉았기 때문에, 조건입니다. 자 보세요. 이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더 내면으로 가라앉았단 말입니다.
더 고요히 그러니까 자기 내면의 것이고, 더 가라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죠. 확신이 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왜 없죠. 자 아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라앉는단 말이에요.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가라앉을 만큼 가라앉으니까, 더 이상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자 단일한 마음입니다.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2선에 들어 머문다.
아까 초선은 뭐였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 2선은 삼매에서 생긴. 다르죠. 엄밀하게 2선부터가 삼매입니다. 초선은 엄밀하게 삼매가 아니라 욕계에서 삼매의 세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초선입니다.
비유컨대 여기서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다리가 초선에 해당하는 겁니다. 아직 저기로 건너간 것도 아니요, 이쪽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2선부터는 삼매입니다. 그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하다.
초선과 이선의 희열과 행복은 둘은 다릅니다. 초선은 희열과 행복이 거칩니다. 아주 폭발적입니다. 거친 정도를 동반한데 이선은 아리,아리 합니다. 이선은 내면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희열은 아리아리한데 행복은 더 크다는 거죠. 2선에 들게 되면요 아~ 행복합니다.
자 3선은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정념정지가 있고, 여기 정념정지라는 한자로 했는데, 사띠와 알아 차려짐이 있고, 이 뜻입니다. 사띠가 있고, 알아차려짐이 있고, 삼빠자냐가 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그래서 이를 두고 성자들이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사띠가 있고 평온하게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자 앞에 조건은 Because(때문에)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초선과 이선에 희열이 있었죠. 초선에 격렬했습니다. 이선에 약해졌습니다. 희열이 아리, 아리 삼선에서 희열이 빛바랬습니다. 이 얘기는 가라앉는 것을 하게 되면 아까 더 어떻게 된 거죠? 내면으로 고요히 더 들어갔다 그래서 희열이 아리, 아리 해졌다 없어졌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 얘기입니다.
마음으로 평온하게 머물고 정념정지가 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정념정지를 빼고 얘기합니다. 평온하게 머물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쉽게 얘기하면 무슨 얘기죠. 온몸과 마음으로 평온하고 행복하다. 몸과 마음으로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냐하면 거기에 정념정지가 있다. 사띠가 있고 알아차려짐이 있다. 3선에서 본성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온 마음과 온몸으로 행복한 겁니다. 본성이 어느 정도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면 한번 보세요. 희열이 빛바랬으니까 아 고요하다 아 온몸과 온 마음이 평화롭다. 그런데 단순히 그게 아니라 실지로 정념정지가 있다는건요, 그 삼매에서 저절로 몸이 관찰이 되요.
몸을 가장 편한 자세로 구석구석 관찰이 돼서 다 편한 자세로 몸을 다 놓게 됩니다. 자면서도...그래서 성자들이 이를 두고 라는 것은 3선이 성자급이란 얘기입니다. 성자들이 그걸 갖고 논할 이유가 없잖아요. 성자들이 이를 두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사띠가 있고, 온 마음으로 평온하게 머문다고 묘사한 제 3선에 들어 머문다. 성자들이 칭송하고 성자들이 온몸과 온 마음으로 행복하다고, 하는 정념정지가 있는 바로 그 3선에 들어 머문다는 겁니다.
자 한번 4선 가기 전에 정리해 봅니다.
초선의 희열이 격렬해 갔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석구석 씻어 내리는데 이것은 마음의 때만이 아니라, 실지로 몸에도 세포들을 개화시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선은 아리아리 해갔고, 3선까지 희열이 빛바랜 것까지 들어가면 지금 억수로 고요하다는 겁니다. 이때 외부적인 상태는 마음은 단일하죠. 당연히 외부는 전부다 이 고요가 어떤 의미로 다가 오냐 하면, 진공상태로 다가옵니다. 자기가 삼매가 된 만큼의 사이즈들이 전부다 진공으로 상태가 됩니다. 온 우주가 여기에 있다 아득하다. 이런 상태로 옵니다.
사선(4선) 갑니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하고, 사띠가 있고청정한 제 4선에 들어 머문다. 지금 어떤 한글로 된 데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를, 괴로움도 버리고 행복도 버리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하신 순서가 경전에 이대로 되어 있습니다. 행복 먼저 버려야 됩니다. 괴로움을 버리고 행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여기서 행복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고요 좀 전에 삼선까지의 지복을 얘기하는 겁니다. 삼선까지의 지복도 버린다. 삼선까지의 지복도 버리니까 미세하게 남은 괴로움마저 소멸해 버린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이것도 순서가 기쁨이 먼저 나옵니다.
기쁨과 슬픔을 버렸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버렸다는 것은 흥분과 비탄, 기쁨과 슬픔, 이런 것은 파동이 너무 큰 거죠. 그런 것은 옛날에 버렸다는 거죠. 세상적인 즐거운 것은 그러나 아울러 이미 예전에 버렸고, 지금 버린 것은 삼선의 행복도 버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도 버렸기 때문에 드디어 이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행복하지도 않은 오해할 수 있죠. 아~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게 아니다 이거죠. 평정하고(부동) 사띠가 있고,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이렇게 까지가 4선입니다.
여기서는 4선까지지만 8선을 말씀하실 때가 계시니까, 8선까지 마저 합니다.
5번째 삼매가 공무변처. 물질을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마음에 갖가지 산냐를 잡도리 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 가이없는 처의 상태에 머문다. 물질을 소멸하고 또는 초월하고 입니다. 물질의 세계를 이 허공까지가 물질입니다. 물질을 초월하고 소멸하고... 어떻게 초월했냐하면 부딪힘의 접촉의 인식을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눈뜨고 세상을 보고 있는데도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했기 때문에 어떻게요?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잠깐 드립니다. 온전한 눈을 갖추었고, 시야에 대상들이 들어 올 때에, 사물들이 그것들에 주위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깊게 되 면은 눈 뜨고도 사물과의 접촉이 소멸합니다.
그는 직역으로 장애인데 눈뜨고 장애가 사라집니다. 경계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대상과의 경계가 자타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와 너 가 없다. 그런데 이 공무변처에서는 자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라집니다. 전부다 쉽게 얘기하면 나도 세상도 모두 사라집니다.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여 장애를 소멸하여 소멸이 되니까, 갖가지 산냐가 마음에 잡도리 되지 않는다. 각가지 상들이 세상의 모든 상들이 사물들이 마음에 잡도리 되지 않는다.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위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에 잡도리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이 가이없는 상태에 머문다.
이렇게 되는 것이 공무변처입니다.
지금 제가 상태라고 한 것이 경에서는 세계라고 요약 되서도 나오는데, 그것은 세계는 세계라고 하기에는 세상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처라 쓰신 것은 공무변처라고 한 것은 세상에 속하긴 한데 세상이라고 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겁니다. 그러나 처가 붙은 이유는 아직 궁극이 아니기 때문에, 장소로 이렇게 붙은 거지만 그것을 세상 이것은 곤란한 겁니다. 형체 없는 상태들 이기 때문에, 식무변처,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식이 가이없는 상태에 머문다.
무소유처 7번째 삼매입니다.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머문다. 무소유처죠 거기도 물론 아무것도 없는 세계인데, 아무것도 없는 장소 원래 직역은 아무것도 없는 장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머문다.
비상비비상처 8번째 삼매죠. 이것은 빨리어로 [네와 산냐] [나 아 산냐]입니다. 영어로 [never 상 no 비상]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코 상이 아니다 비상도 아니다. 이건 좀 결코 상이 아니다 라는 것은 불성이 거의 드러났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no 비상, 비상도 아니다가 no 가 같은 never가 되면 앞에 것처럼 never상 never 비상이 되면 궁극일 겁니다. 상도 완전히 초월했고 비상도 완전히 초월했다. 그런데 아직 상은 never 인데 결코 아닌데 비상의 no 정도죠.
이것이 [뽓타빠다경]에 계시죠.
여기에 이르면 고유의 산냐가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이렇게 해서 구경까지 이르 른다 편재한다. 고유의 산냐라는 것은 이제 앞에 그 전에는 이면으로 참된 산냐 이런게 나옵니다. 궁극의 불성은 못됐고 불성 전쯤에 고요함은 고요한 것이 아직은 상인 것이(산냐인 것이) 구경까지 편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쓰신 말씀입니다 여기는 비상비비상입니다. 여기서부터 고유의 상이 이제 그때쯤이면 불성이 많이 드러난 건데 세상의 끝에까지 편재한다.
이렇게 계신 말씀인데 더 긴 얘기는 찾아보십시오. 더 긴 얘기 하면 사족이 될까봐.... 디가니까야 [뽓타빠다경]입니다.
8번째 삼매는 never 산냐 no 비산냐 (아산냐)
결코 상이 아니고 비상도 아니다 ( 한글로 상이 안닌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지만 실제 직역은 비상도 아니다 이렇게가 됩니다.
무심삼매가 되면 잠에서 깨어있게 됩니다. 잠에서 마음이 잠들었는데 불성은 깨어있게 됩니다. 잠을 초월하는 상태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우리가 저녁에 잠만 자면은 아무것도 모르죠. 세상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는 거죠. 잠들면은 그래서 깨어있지 못하는데 마음이 잠들었기 때문에 무심삼매에 들게 되면 마음이 잠들어도 불성이 깨어있게 되는 겁니다.
선잠 잔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잠을 초월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 물론 꿈에서 깨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꿈 밖에서 보게 되고, 꿈을 초월하는 것을 필두로 해서 자라기도 전에 의도들이 보여 집니다. 상카라들이. 거 그리고 아뢰야식에서 마음이 처음에 애초에 씨앗이 나오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겠죠. 그런 것들을 지나 가게 되면 잠에서 깨어 있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 있을 때에, 깨어 있기 시작하면서가 아니라,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많이 깊어졌을 때에, 편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불성이 이것이 좀 전에 얘기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이렇게 해서 구경까지 편재한다는 겁니다.
자 통론으로만 삼매를 한 번 얘기 드리고 다 통론이에요. 오늘은 여기서 마칠 건데 자 여기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가 나에게 맞는 영화는 2시간 반 있으면 끝납니다. 여러분 영화가 스크린이 끝나게 되면 영화가 없어지고 영화가 상영되었던 그 자리에 햐얀 스크린을 보게 됩니다. 비유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있을려면 이 세상이 아닌 눈에 안 보이지만 스크린이 있어야 됩니다. 이 상이라는 산냐의 세계, 영상의 세계가 있을려면 이 세계 이면에 눈에 보이지지 않지만 살아있는 스크린이 있어야 됩니다. 불성이라고 하는. 런데 그 스크린을 어떻게 볼 것이냐? 영화의 2시간 반이면 끝나니까 껄수 있지만, 이 영화는 영원히 안 끝나니까 이 영화는 영원이 안 끝난다. 죽어도 안 끝난다. 그럼 이 영화의 세계는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현자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는 안 끝나는데 그래 이 영화는 안 끝나지. 내가 한번 내 안에서 꺼뜨려 보자. 눈 감는다고 꺼지는 건 아니죠. 영화가~ 현자들은 눈뜨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을 눈뜨고 주위와 관심을 주지 말아 보자. 아까 부처님 말씀처럼. 그런데 자꾸 주위와 관심이 가지 않나요? 그래서 그러면 아 하나로 몰아보자
아까 부처님 말씀처럼 사유주시 하나의 끝에 완전한 집중을 한다. 그래 하나의 끝으로 몰아보자 몰아갔고, 잘 몰입이 되니까 아까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마음이 없어지니까, 이거 봐라. 내면에도 딴 마음이 없고 바깥에도 지금 저거 하나 외에는 영화가 꺼졌구나. 보는 것 외에는 영화가 꺼졌네. 이렇게 해서 일심삼매가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보는 것만 남았다면 여겨보세요. 조금 더 있다하면 보는 것 하나마저도 꺼질 것이라는 이해되시나요? 보는 것 하나마저도 꺼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공무변처에 들어가는 겁니다. 공무변처에 들어가니까 마음이 무한히 공의 상태로 넓어지니까, 거기서 돌아 나오니까 공무변처를 초월하니까 오호라 식무변처가 바깥쪽으로는 가이없이 들어오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는 거죠? 세상이 가이없이 들어오네! 개체가 없어졌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런 삼매를 거쳤기 때문에 천의세계를 본다 말씀이 다 계시는 거죠. 그렇게 가는 삼매입니다. 그러니 삼매를 또 하나 비유하고 지나갑니다. 두 가지 비유해야 되겠군요.
삼매를 하려고 하면 여러분 쌀알에 조각을 하고 이쑤시개에 조각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쌀알에 조각하려면 Because... 뭐, 뭐, 하기 때문에 조건이 필요합니다. 쌀알에 조각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죠? 집중 쌀알에 엄청난 집중을 해야 하고 숨이 멈추어야 됩니다. 숨 쉬면서는 조각할 수 없는 겁니다. 하는 동안은 멈추고 숨이 가빠지면 휴~하고 다시 멈추고 이렇게 해야 되는 거죠. 그래 삼매는 두 가지 조건은 완전한 집중과 숨인데, 숨은 4선가서 멈추는 거니까, 숨은 일단 멈추겠다고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호흡 배우신 것이 있을 거예요. 그 호흡하고 완전한 집중. 쌀알에 집중한다고 그 조각한다는 것처럼 칼 같은 집중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일단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다음 순서에 있죠. 운전자가 초보운전자가 자동차로 운전할 때 긴장을 갖고 전방을 주시합니다. 초 집중을 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사고 나기 때문이죠. 초보운전자는 멀리 못 봅니다. 앞에 가까운데만 보게 되죠. 그렇게 20~30년 되 갔고 베터랑 운전자가 되면, 베터랑 운전자도 앞을 안보고는 운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초보운전자와 똑같이 앞에를 수행주제를 보게 되지만, 이제 이 사람에게는 긴장도 없고, 행복이 있으면서 전방이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앞이 좋은 전방이 아니라 편안하게 넓게, 전방이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비유가 앞에는 초선하기 전이고 초선, 이선 갈수록 지금 비유한 겁니다. 그와 같은데 그와 같지만 초보운전자가 베터랑 운전자 흉내낼려고 전방을 넓게 본다든지 하면은 사고 납니다. 삼매는 이와 똑같습니다.
초보 삼매 들어갈 때에 칼 같은 집중이 필요할 뿐이지, 넓게 편안하게 들어오게 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겁니다. 칼 같이 앞에 전방만 집중하듯이 지속적 고찰 하다보면, 점점 베터랑이 되기 때문에, 저절로 다 들어오는 거거든요. 처음부터 그렇게 가면 곤란하다.
오늘은 여기까지고요. 다음 시간에 좀 더 각론하고...
오늘 행복하십시오.
나무석가모니불 _()_
녹취자 : 예 심 (7/6/2011)
** 녹취하다보니까 법문내용이 너무 좋아서 강력히 듣기를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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