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사성제

사성제 6A (2010-12-31)

Daisy청량심 2023. 10. 10. 03:07

2010/12/31 - 사성제 6A - 순일큰스님

부처님 법문 들으러 오신 여러분께 많은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저번시간에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했잖아요. 오늘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 길, 팔정도로 갈 참인데요. 저번 것 한번 정리한번 해보고 갈려고 합니다. 저번에 두 번째,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세 번째,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이렇게 해서 12연기의 일어남, 12연기의 소멸은 다 살펴봤잖아요.
칠판에 있는 12연기를요, 그런데 다 살펴보기는 했는데 하나를 더 이해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거든요. 저번시간에 이해했던 것은 무명이 소멸하면, 늙고 병들고 죽음이 소멸하고,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라고 하는 고통이 괴로움이 다 소멸해버린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거꾸로 역순으로 배우는 것이 늙고 병들고 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까? 태어남이다. 태어남의 원인은 존재다. 쭉 올라갔었죠. 무명까지.

그래서 무명이 소멸하면, 다 늙고 병들고 죽음 근심 탄식이 모든 괴로움이 다 소멸한다는 건 배웠는데요. 무명을 어떻게 맨 처음부터 소멸하냐 이거죠. 무명을 맨 처음부터 소멸 하는 건 이치에 안 맞죠. 뭘 소멸해야 하냐 하면 갈애를 소멸하라고 하셨어요. 갈애 중간쯤에 있죠. 그렇게 되면 해탈이다. 대념처경에 있는 얘기로 드릴께요. 두 번째의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인가? 두 번째죠

직접적으로 딱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갈애이다. 왜 갈애 이냐하면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윤회죠. 갈애하면 윤회하니까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면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그것이 갈애다. 윤회의 원인은 갈애다. 즉 괴로움의 원인 윤회라는 것은 괴로움과 동의어다.
윤회하면 전체 괴로움이 생기니까 태어나면,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의 원인이다. 그러신 거에요. 그러면서 갈애를 없애라 하시면서 갈애가 뭔가 설명하시는 것이, 갈애라는 것은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면서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말씀 하셨고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 갈애가 그것이다. 이것까지 저번 시간에 공부했었습니다. 세 가지 갈애가 있다.

갈애를 방편에 따라 하면 여섯 가지 갈애가 되요. 눈의 갈애, 눈이 좋아 하는 것,  귀의 갈애, 코의 갈애, 혀의 갈애, 몸의 갈애, 마음의 갈애, 이렇게 가 되는 거죠. 갈증이 그런데 맨 처음 갈애를 왜 세 가지로만 설하셨냐 하면, 왜 중생들은 전부 다 감각적 욕망을 하기 때문에, 큰 테마이기 때문에 하나 설하셨고, 그 다음에 테마는.. 존재하고 싶은 사람 계속 존재하고 싶은 것이 큰 테마구요, 또 하나는 아예 존재하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한 테마이기 때문에 제일 큰 테마로만 갈애를 세 가지로 설하신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의 원인이다 하셨고 괴로움에,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에서는 그러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하면 갈애의 소멸이다. 라고 단적으로 말하십니다. 그것부터 보면은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통론으로 뭐라 하셨냐하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갈애의 일어남이 괴로움의 일어남이고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인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갈애는 이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곳이 있으면 거기서 일어난다. 그러셔요. 그리고 그러면  통론으로 세 번 째 갈애는 어디서 소멸하는가? 그것역시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곳이 있는 곳에서 갈애는 소멸해야 한다고 그러셔요. 왜 그러냐 하면 갈애는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당연하고요, 없애는 것도 그 장소에서 없애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지옥에서는요 갈애가 없어요. 고통만 받기 때문에, 고통만 받고 있는데 고통만 받는 즐겁고 기분 좋지 않은 장소에서 없애야 될 갈애도 없고요, 없애 라고 해도 없앨 수 없어요, 고통 받기 때문에 나는 이 다음에 태어나면 좋은 데 태어나서 갈애를 해야 한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즐겁고 기분 좋은 거기서 참아서 없애야 되는거예요. 갈애를, 이해되셨죠. 그래서

갈애의 두 번째 괴로움의 일어남, 갈애의 일어남이 그러면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곳에서 갈애가 일어나는데, 눈은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이다. 귀 코 혀 몸 마음은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즉 나죠. 안이비설신의 그리고 눈이 보는 바깥의 모양들 소리 냄새 맛 몸에 닿는 대상들 감촉들 마음의 대상들이 법 구성 요소들이 바로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눈과 모양이 접촉할 때 식별하는 거기서 생기는 알음알이 아뢰야식이죠. 식별할 수 있는 능력 식별지가 이 세상에서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이다.

즉 세 가지 이야기가 되잖아요. 눈과 안이비설신의와 바깥의 색성향미촉법 그리고 그것의 식별하는 아뢰야식, 이 세 가지가 전부다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감각접촉이 벌어지죠. 접촉이 벌어 지죠. 나와 세상 간의 감각접촉이 물론 감각접촉에는 여섯 가지가 있죠.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에 감각접촉은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감각접촉에서 벌어지는 것이 느낌이잖아요. 12연기에서 느낌은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느낌 다음에 저기서는 갈애가 바로 나왔는데 여기서는 대념처경에서는 인식이 나옵니다. 느낌 다음에 인식은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왜 인식이 먼저 나왔냐하면요, 그렇게 나올 때가 많아요, 상윳따니까야에 특히 부처님께서 구분해서 얘기하시는 거에요. 안이비설신의가 접촉해서 느끼는 것은 느낌, 색성향미촉법을 안이비설신의와 접촉할 때 안이비설신의의 주체적 입장에서는 느낌이라고 설하시고, 색성향미촉법 위주로, 그걸 위주로 설하실 때는 그것을 인식이라고 설하시는거예요. 바깥쪽을.. 좀 어렵죠? 여기까지 나가면 좀 곤란할 것 같기도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바깥세상의 대상들을 파악하는 인식은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나가서 의도는, 갈애는, 일으킨 생각은, 지속적인 고찰까지가 나가요. 쉽게 생각하시면 되요. 통론 이였는데 “나 라는 안이비설신의와, 나 바깥에 색성향미촉법을 다 하게 되면 그게 세상이에요.” 그게 세상전체를 얘기하는 건데요. 부처님께서 그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라고 그러셨는데 세상의 일어남은 궁극이 아니다. 라고 그러셨어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만이 아니에요. 천상세계까지 모두 망라해서 지옥까지 세상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 그러셨어요. 세상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에 불가한 거고 세상은 무명에 의해서 일어난 거다. 무명이 소멸하면 세상이 아닌 궁극이 있다 라는 겁니다.

세계가 아닌 그래서 즐겁고 기분 좋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세상 전체를 기분 좋고 즐거워하는 동안은 그 세상에서 살게 되니까 기분 좋고 즐거워하는 것을 모두 소멸하게 되면 세상 끝에 선 다음에 세상을 초월하게 된다는 말씀이고요. 만약에 초월을 못했다 하더라도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에, 세상에 접촉들을 즐거워하지 않을수록 더 높은 천상세계에 간다고 하신 거예요. 더 높은 천상세계에.....

이것을 설명하려면 쉽지는 않죠. 지금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자꾸 접촉하면서 즐기고 느끼고 환희하게 되면 그 환락에 의해서 고통을 느낀다라고 하셨어요. 환락만 있으면 좋을 텐데 환락을 할수록, 탐욕을 할수록, 탐욕과 성냄이 점점 강해져갔고 그리고 개체는 점점 더 개체성이 공고해져서, 괴로움은 더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에 의해서 탐욕하지 않으면, 환락을 즐기지 않게 되면은 개체성은 사라지고, 높은 단계에 살아서도 신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삼매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왜 그런지는 조금 있다가 구조를 설명하겠지만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환락을 즐기지 않으면, 내면에서 개체성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조건 지어진 관계를 놓기 시작하기 때문인데, 저기 정신물질로 세상이 다 이루어진 거잖아요. 정신물질로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들이 생겨난 건데요.

제가 비유하죠. 꿈이 있는데요. 꿈이 맨 처음에 나타날 때 아뢰야식이 꿈을 다 만들어요. 등장인물들까지 자기가 만든 꿈이에요. 거기에는 나도 있고, 나 아닌 색성향미촉법들 배경도 있고, 다른 등장인물들이 있어요. 그건 내가 다 만들었어요. 처음에 그래놓고 그런데 얘만 나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내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환락을 즐겨요. 탐욕을 하고, 싸움하면서 이렇게 되면 꿈에서 자기가 다 등장인물 만들어놓고, 그 한명만 나가 되요. 그런데 그 꿈에서 ‘나’라는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환락을 즐기지 않게 되는 순간에, 내가 그 꿈을 바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요. 등장인물들이 다 나였다는 것을. 즉 꿈속에서 내가 다 만들어 놓고 내가 탐욕하거나 상대방이랑 싸움을 하잖아요. 그럴수록 영원히 그 애는 나에요. 그러면 그 안에서 고통이 벌어지거든요. 그런데 ‘나’가 나 아닌 것들에 대한 탐욕이나 저항을 하지 않게 되면 은 그 꿈의 원래대로 돌아갔고 내가 이 등장인물들을 다 만들었다를 알게 되요. 이렇게 비유하면 비유가 조금 낫겠군요.

사실이고요. 예를 들어서 그랬을때 그 꿈은, 꿈에서 행복해지죠. 그리고는 그 꿈을 벗어나죠.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이것이 해탈인데 만약 해탈을 못하더라도 아까 제가 그 꿈에서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탐욕과 저항을 줄이면 해탈은 못하더라도 줄이면 좀 전에 천상세계에 간다고 그랬잖아요. 꿈에서 행복해지는 것을 비교할 수 있어요. 그 꿈에서 탐욕과 저항을 줄이게 되면, 아직 내가 다 등장인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더라도 그 등장인물들에게 크게 탐욕 안하고 저항 안하게 되니까... 그 꿈은 행복하게 되요.

이걸 어떻게 비유 할 수 있냐 하면, 우리가 꿈을 맨 처음에, 처음에 출발은 아주 좋게 시작할 수 있어요. 꿈에서 그 경우에도 내가 성격이 나쁜 사람이잖아요. 막 화가 나고 그러면 처음은 좋게 출발해도 꿈에서 결국 화내다가 중간쯤 가서는 그 꿈은 나빠져요. 결말은, 또는 내가 탐욕이 많으면 아주 smooth하게 훌륭하게 시작했는데도 그 꿈은 내가 탐욕 하다가 중간에 성격대로 되니까요, 꿈 안에서는 못 참는 거 아시죠? 자기 성격 그대로 나와요. 현실에서는 참아도... 그러면 탐욕이 세다보니까 꿈이 처음엔 훌륭했는데 안 좋게 끝나요.

그런데 반대로 꿈의 시작은, 영화의 시작은 엉터리로 시작했어요. 기분 나쁘게. 그런데 아뢰야식의 경향성이 훌륭해요. 별로 탐욕도 작고 사람들에게 늘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현실에서 했었고, 화가 거의 없고 그 꿈은 금방 좋아집니다. 그 꿈은 마치 제가 실지 예를 들었었는데 백일몽, 꿈 말고 신데렐라 상상하는 것, 낮에 소녀시절에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상상들을 많이 하죠. 그런데 신데렐라 상상하다 보면 자기가 신데렐라도 만들었고, 왕자도 자기가 만들었어요. 상상으로 그래서 데이트를 시작하기도 하는데 나중에 막 헤어지죠. 헤어지기 싫은데, 나중에 진짜 리얼하게 되죠. 무의식에 쑥 들어가 보면 둘 다 내가 만들었어요. 등장인물을 헤어지지 말라고 해도 헤어져요. 내 무의식에 헤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경향성이

그런데 경향성에 화도 적고 탐욕이 없는 사람은 신데렐라를 상상하면 할수록 왕자랑 아주 해피한 쪽으로 가요. 계속~ 이게 아까 제가 해탈이 아니라 천상 세계에 간다 이 말씀입니다. 갈애를 소멸하면 해탈이고, 소멸 못했다 하더라도 소멸하는 쪽으로 가면 천상세계다 더 높은  이게 이세상의 법칙이에요. 혹은 한번 이렇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경에서 그러신 거거든요. 외도들을 만났을 때 외도에게 물어봐라 우리가 서로 교리가 다르고, 이치가 다르다 하더라도 목표는 하나일까? 다를까? 그러면 외도들도 목표는 하나일거다 라고 말할 것이다.

궁극은 하나다. 궁극에 이르는 자가 탐욕이 많은 자일까 탐욕이 없는 자일까? 하면 올바른 외도라면 탐욕이 없는 자일 거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궁극에까지는 못가더라도 천상에 가는 사람이 탐욕이 적은 사람일까 탐욕이 많은 사람일까 물어본다면 올바른 외도라면 탐욕이 적은 자가 더 높은 천상세계에 갈 거다.

마찬가지로 성냄도 어리석음도 그 모두를 망라한 원인이 갈애거든요. 즉 이 얘기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갈애가 많은 사람이 해탈 할 수 있는가? 갈애가 적은 사람이 해탈 할 것인가? 그러면 갈애가 없는 사람이고요. 보다 몸이 무너진 다음에 천상세계가 많은데 그 중에 제일 높은 천상 세계에 갈 사람은 갈애가 적은 사람이다 라는 거죠. 이치로도 그렇고 실지로도 그렇다. 갈애가 적은 사람은 아까 꿈에서 내가 꾼 꿈이다 라는 것을 다 알았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거죠. 그 개체가 아니라 그 꿈을 벗어나려고 할 정도니까 굉장히 마음이 커진 거에요. 무량하게 되었어요. 실지로도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마치 저번에 비유했지만 가상현실 세계에 들어갔는데, 자기가 즐길려고 그런데 들어가서 즐기다 보니깐 가상현실을 까먹었어요. 그래서 컴퓨터 세계에 하나의 아바타에 불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고락은 너무나 괴로운데 자기는 맨 처음에 즐길려고 들어갔었는데, 그 아바타가 컴퓨터 세계를 빠져 나올려고 그러면, 그 세상과 접촉을 끊기 시작하면 되는 거에요. 그 대상들 그 세계와 자꾸 접촉할수록  아바타가 되버렸는되요, 접촉을 끊으면 되는데요, 접촉을 끊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요.

하나는 1. 그 세계에서 탐욕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중지하는 거예요.
두 번째 2. 삼매에 들어버리는 거에요.  깊은 삼매 그 세계를 초월해요. 그런데 2번은 1번에 (그 세계에 갈애라는 것을 )을 먼저 선행하지 않으면 삼매가 안 된다 는 것 이게 문제에요. 그 세계에 접촉하는 것을 먼저 끊는 것을 조건으로만 더 높은 삼매가 되기 때문에 삼매가 되면, 공무변처라는 무심이 되면, 눈뜬 채로 나도 초월해 버리고 세상도 초월해 버려요. 그 제서야 아는 것이 이게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요. 오선에서는 상당히 높은 삼매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삼매에 많이 들어라 하신 것은 삼매에 든 자는 부처님 법문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그러신 거예요. 바로 알 것이다. 그런데 삼매가 안 된 자는 법문이 불분명하게 들릴 거다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삼매가 깊이 되면은 그것이 되지만 아직 삼매가 될 려면 선행되어야 될 것이 세상에서 감각적 욕망들을 갈애를 어느 정도 소멸해야지만 되거든요. 그것이 부처님께서 육근을 단속하라 하신거에요. 안이비설신의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크게 괴로워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면 육근단속을 처음부터 갈애를 소멸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니까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하는 탐욕에 머물러를 인정해 주셨거든요.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 못 끊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탐욕에 강요되어, 완전히 동요되어 하는 것을 좀 방어해라 수호해라 하신 거에요.

즉 완전 동요되어가 뭐냐 하면 눈으로 보고 너무 좋아해서 빠져 갖고 눈으로 계속 볼려고 하는 것, 그것은 탐닉이 되는 거죠. 그것을 방어하라 그러신 거에요. 그러면 탐에 머무르기만 해도 당연히 계목을 잘 지키는 사람은,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좋은 명성을 얻고 어떤 회중에 가더라도 떳떳하고, 죽을 때 여행 가듯이 깨끗하게 준비하고 죽고, 죽자마자 높은 천상세계라고 하셨기 때문에 탐에 머물러를 인정하신 거죠.

그러나 탐에 너무 동요되는 갈애의 부분에서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들을 방어해야 한다. 그래서 갈애를 소멸해야 한다고 그러신 거죠. 그리고 또 다른 비유를 해보면은 『말룽가뿟다경인』데요, 그때 말룽가뿟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간략하게 법을 좀 설해주십시오.

설해주시면 저는 숲에 홀로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미리 말씀하십니다. 말룽가뿟따여, 이를 어찌 여기는가? 그대가 보지 못했고, 전에도 본적이 없으며, 지금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즉 과거에도 본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미래에도 보지 못할 눈으로 알아야 하는 모양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본적 없는 모양들에 대해서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본적 없는 모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으니까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없잖아요.

옛날에 미국 인디언들이 배가 들어왔을 때, 큰 배가 들어왔을 때 뭔지 몰랐다 이겁니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겁니다. 상상불허죠. 본적 없는 것을 본거죠. 뭔지 모르는데 거기에 탐욕이나 애정을 갖거나 저항을 가질 수 없는 거죠. 그런 것 처럼 귀가 코가 혀가 몸과 마음이, 과거에도 경험해 본적이 없고 미래에도 경험 못해봤고, 지금도 모르는 것을 보고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못 갖죠.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하는 법들에 대해서, 보고는 눈으로, 듣고는 귀로, 감지는 코, 혀, 몸에 대한 대상. 이건 감촉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감지라고 해요. 알아야 하는 것은 마음 그런 법들에 대해서는, 볼 때는 단지 볾  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만 있고, 알 때는 단지 앎만 있다. 그때 단지 앎만 있을 때는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있지 않고, 그것에 의함이 있지 않으며,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여기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가운데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다 하신 거예요.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 하면, 우리는 보게 되면은요, 보는 대상에 대해서 기억과 사유라는, 해로운 법이 물밀듯이 들어 온다. 그러셨어요. 우리가 보면은 기억과 사유가 생기죠. 그 대상에 대해서 본인이 알든 모르든 기억과 사유가 없는데, 탐닉한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앞서서 얘기한 것이 그대가 전에도 본적이 없고, 미래에도 본적이 없고, 지금도 본적이 없는 것에 대하여, 탐욕과 애정이 생길 수 있는가?

뭔지 모르는데 말이죠, 있을 수 없죠. 지금 우리가 본 거에 대해서 본 것을 안다는 것은 기억과 사유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 기억과 사유는 둘 중에 하나에요. 탐닉에 대한 기억과 사유든지, 싫어하는 기억과 사유든지, 둘 중에 뭐가 됐건,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늘 괴로워하고 있다는 거예요. 귀도 코도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눈으로 볼 때는 볾 만이 있다는 말씀은, 기억과 사유가 없다, 아무생각 없다, 몸이다 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만, 그다음에 아무 생각이 없다. 이렇게 눈으로 귀로 감촉으로 마음으로 앎만 있을 때, 단지 앎, 그 자체만 있을 때 거기에는 “그것에 의함 이라는 것이 없다”는 게 대상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아까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뭐냐면 본 것을 생각하고, 본 것 가운데 생각하고, 본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본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에 대해 환락을 즐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것은요, 늘 본 것을 생각해요.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진행을 하냐 하면은 늘 본 것 가운데 생각해요. 비유할께요. 애기를 생각할께요. 애기가 인형이 있을때 어린아이의 인형을 보면, 학교 가서도 인형을 생각해요. 그리고 온통 학교 생활을 인형 가운데 생각해요. 그리고 자기는 못 보는 새로운 사물을 보면, 인형으로부터 추론해 낼 려고 해요. 그것을 인형으로부터 생각해요. 그리고 인형에 대해서 내 것이라고 여기면서 인형에 대해서 환락을 즐깁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어린애기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애가 조금만 크면, 그 아이는 인형이 시시해서 던져버리죠. 시시해서 인형을 던져버리고, 더 이상 인형을 생각하지 않고, 인형가운데서 세상을 생각하지 않고, 인형으로부터 모든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인형을 내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을 것이고, 버려 버리고, 인형에 대한 환락을 즐기지 않는다.

하이고,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처럼 여기 지금 부처님께서 우리는 본 것에 대한 기억과 사유를 한다. 라는 게, 본 것을 생각하고, 늘 본 것 가운데 생각하고, 본 것으로부터 생각하며, 본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이러니까 늘 집착는게 않습니까?  본 것에 대한 환락을 즐긴다 하이고 무슨 까닭인가? 그는 아까 이 애기 비유처럼 그는 아직 모르는 애기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 지금 부처님께서 지금 볼 때는 반드시 볾 만이 있고, 이 말씀은 모른다. 이 얘기에요. 기억과 사유가 경험은 하지만, 그 다음에 경험은 하지만, 생각하고 가운데 생각하고, 먹는 것부터 생각하고, 이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저번 시간에 얘기 드렸는데 2선이 깊거나 3선 초기쯤만 하더라도 여기 초가 두 개 있는데 분명히 초가 두 개 있는데, 긴 초와 짧은 초가 삼매에서 초라는 이름을 먼저 모르고, 길고 짧은 것을 몰라요. 눈으로 보이는데 경험은 되는데 분별이 없어졌어요. 그때가 바로 거기서 부터가 볼 때는 볾 만 있고 예요.

그러면 그게 뭐가 좋냐는 생각이 들거에요.  생각이 없을 때는 보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때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가 벌어져요. 이럴 수가. 오! 이럴 수가 있구나. 여기에 온 우주가 있구나. 완전 진공상태구나, "I am that"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내가 그것이야!  꼭 작은 삼매 되도요, 삼매가 점점 넓혀져 갑니다. 그때 둘이 아닌 상태인거에요. 오직 온 우주가 완벽하게 거기 있는 거에요.

예를 들었었습니다. 어떤 조사님이 그려셨다 는 되요.  누군지 모르지만  제가 들은 소리 입니다. 비가 제 구멍에 오는구나! 그랬답니다. 삼매에서 비가 제구멍에 떨어집니다. 비가 오면 무작위로 오지 어디 땅에 제구멍에 떨어지겠어요? 그런데 삼매에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있는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원래 구멍대로 딱딱 정해진 대로 떨어지걸로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표현할 길이 없어 이것은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십오지 언어로 이해한거에요.

그러나 그 안에 내면에서 벌어지는 마음상태는 표현할 길이 없죠. 모르시겠죠. 지고입니다. 아주 지고입니다.... 지고라는 말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을 해볼까요, 부처님께서 이 갈애 감각적 쾌락을 희열과 행복이라는 초선과 이선의 삼매, 또는 그것보다 더 높은 삼매, 3선 이상이 안 되며 감각적 쾌락을 버릴 수 없다고 그러셨어요.

                                   2011.5.13
                                   녹취자: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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