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9 - 사성제 5B - 순일 큰스님
그리고 느낌에 관련해서도요, 부처님께서는 아까 이 말씀 그대로 다 하신 겁니다.
느낌이다 라는 것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하면 늘 변하니까 무상한거죠.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예요.
물론 어떤 분은 또 이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느낌에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있다는데 어떻게 괴로움이냐
아까 얘기 다 드렸습니다.
괴로운 느낌 그 자체가 괴로운 느낌이고 즐거운 느낌은 영원하지 않고 잠시후 괴로워 질테니까 괴롭고 그리고 즐거운 느낌은 너무 작은 느낌이고, 천상세계에 비하 면은, 그것보다 더 높은 상태에 비하면 차라리 괴로운 거예요.
즐거운 느낌들은 그래서 괴롭다.
느낌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데, 그 느낌들을 나의 것 이라고 하고 느낌들을 즐긴다. 이 얘기입니다.
느낌들이 “나”라고 하고 느낌들을 불멸의 실체라고 할 수 있겠냐 하는 거죠. 아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불멸이 아니고 불멸에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니까!
썩 하잘 것 없기 때문에 버려라 그러신 겁니다. 그러시면서 예를 드시죠.
여기 숲에 부처님 계시든 숲이죠.
이 숲 여기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낙엽을 주어갖고 나무에 가지들을 주어가고 불을 질러 태우면 나무들을 그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무들과 잎사귀들과 가지들은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집어 갖고 불을 태워도 됩니다.
제자들이 그러니까 그대들도 그대들 지금 그대라고 여기는 안이비설신의도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가 가져가서 불태우고 뭐하더라도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들도 그렇게 되어도 괴롭지 않다 그러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불성이 드러난다는 거죠.
지금 안이비설신의가 나의 것 이고 나고 이것이 나의 실체다. 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괴롭다. 그러신거거든요.
그걸 놓게 되면 괴로움은 전적으로 사라진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보시면 모든 종교입니다.
불교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올시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예요.
내안에 거합십시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나를 도구로 쓰십시요. ‘나’라는 몸과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쓰십시요.
이때 뭐가 되느냐 하면 안이비설신의가 나가 아니다 라는 거예요.
이것은 도구니까 당신 마음대로 갖다 쓰십시요.
이렇게 되었을때 괴로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이렇게 가고 있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괴로움이 소멸한다. 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나”라고 믿을 때만 전적으로 괴로운 겁니다.
실제적으로 얘기해보죠 옆집에 누가 죽었단 말이죠. 우리 괴롭나요?
물론 연민은... 하지만 내 가족이 죽은 것처럼 괴롭지는 안잖습니까?
얘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저 옆집 사람처럼 얘는 나의 것 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이게 결코 실체가 아니다 라고
여기게 되면 그 순간부터 행복해 질까요?
여기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어 간다면 얘한테 잘못된 길이 벌어져도 강 건너 옆집사람 보듯이 할 겁니다.
경의 말씀으로 드렸지만 부처님께서 여기 어떤 자는 안이비설신의가 영원할 것이다 라고 믿는다. 무상이 아니라 그리고 안이비설신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즐거움이다. 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는 곧 보게 된다. 그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그래서 그는 괴롭다.
그런데 여기 또 어떤 현명한 자는 그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항상한 것이 아니고 무상이고 즐거움이 아니고 괴로움이다 라고 잘 안다.
잘 아는 그에게도 그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곧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늙고 병들고 죽고 그런데 그는 괴롭지 않다.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무상하고 변하고 괴로움이다 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도 이치적으로 안 괴롭다가. 이해가 안 되신다 면은 아까 항상하고 즐겁다는 사람보다는 덜 괴롭다는 것 이해되시죠? 덜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은 들거예요.
덜 괴롭기는 하지만 해결방안은 아니지 않느냐!
해결방안이 있는게 일단 그렇게 출발을 해 갖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실체적으로 머리로 아는게 아니라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진짜 내가 아니구나. 이렇게 돼 버리는 겁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즐거운 것을 자꾸 추구하는 동안만 이렇게 정형화 되어 얘가 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얘가 좋아하는 것을 떨구다 보면 “얘가 나구나” 가 없어져 버립니다.
비유합니다. 아직은 이렇게 개발은 안되었는데요.
영화에서 보면은 뭐 몸에서 무슨 장치를 하고 컴퓨터 세계로 들어가요.
그런 영화 많이 나오죠? 가상현실에 들어가서 진짜처럼 빠져버리는거
현실에서 들키지 못하는 위험한 것들서부터 모든 감각적 욕망을 즐기려고 들어가는 거예요.
가상세계에 그래서 셋팅을 10분만 해놨어요.
바깥 세계에서 10분인데 거 컴퓨터 세계에서 한 20년을 경험하겠끔.
그리고 조절하고 들어가는데.. 이거 언제 무서운 일이 벌어진 거예요.
감각적 욕망만 벌어진게 아니라 요즘은 사파리 이런데 가 갔고 아프리가(Africa)에 가갔고 사냥을 하는데 갑자기 사자가 덤비고... 이 현실이 아닙니까?
그 까짓것 가서 죽지 않을거니까 사자가 내 앞에 막 나타나게 하고 이렇게 세팅을 해 놨는데 진짜 들어가면 무서운 건데 문제는 그 세계에 들어가서요. 맨 처음에는 이거 잘 만들었네 가짜다 이럴거예요. 그 세계가 그런데 언제부터 그 세계에 빠져들까요? 쉬운 겁니다. 그 세계에서 감각적 욕망을 자꾸하게 되면 그 세계가 진짜라고 빠져버리는 겁니다.
자기는 바깥에 있는데 그 세계에 만들어 놓은 아바타가 진짜 ‘나’ 다 라고 빠져버립니다. 감각적 욕망을하면 할수록... 그런데 거 가상의 설치를 하려 들어갔는데 그 친구가 어떤 계기로 감각적 욕망을 안한다고 한 번 해 보죠.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감각적 욕망의 그 세계에 안 빠지면은 가상현실이 가짜라고 거기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자기는 아바타가 아니 라는 걸 알고 있어요. 밖에서 보고 있다는 걸 이유는요 그 세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그 세계에 빠지는 것과 감각적욕망을 하면 할수록 그 세계에 점점 빠져 듭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지금 부처님께서 아까 “그대는 그대의 것이 아니고, 그대가 아니고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것을 머리로 이해하셔라 가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진짜로 그렇다 하시면서 그 방법을 닦아라. 그러신 겁니다.
이제 알았다면 그 방법을 닦는 것은 그 개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감각적 쾌락을 거친 것들을 놓기 시작해야 되는 거죠.
그렇지만 그것만 갖고는 불완전한게 불가능해요.
그렇게 노력해 갖고는 그러면서 삼매를 해야 돼요.
삼매 자체가 삼매만 갖고도 사실은 개체성을 초월하는 거예요.
상태가 삼매만 갖고도 마음이 요안에 묶여있지 않을 거예요.
마음이 편재해 가요.
마음의 해탈. 광대한 삼매. 무량한 삼매. 마음이 계속 편재해 가는 거예요.
개체 안에 속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고요.
저기 보시면 아까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이 두 개를 조건으로 아뢰야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거기에 식별하는 아뢰야식이 있게 되면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좀 전에 감각접촉이 있었던 거예요.
감각접촉이 즉, 눈으로 얘기하면 눈하고 모양, 색이 있다고 접촉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과 모양에서 아뢰야식이 일어나야 돼요
식별이 일어나면 눈과 대상에 아는 식별이 벌어지면 눈과 대상, 아뢰야식 이렇게 세 가지가 되면은 접촉이 벌어지는 겁니다.
감감접촉이 “그제서야 느낌이 벌어지는 거죠.”
만약에 예를 드는데
눈이 모양을 보고 있는데 인식을 못한 사람이 있어요. 멍청해 갖고..
어느 순간에 여러분도 다 한번 경험한 적 있었을 것 같은데요.
모양을 봐도 정신이 멍하거나 생각이 없어갔고 뭐가 뭔지 모른 상태에서 식이 식별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멍해서 그럴수도 있고,
삼매에서 할 수 있는데요. 삼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을 초월해서 그런 상태가 있는 거예요.
아까 공무변처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해서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아까 세 가지 해 갔고 접촉이 되어야지만 느낌이 이렇게 벌어지거든요. 느낌은 이렇게가 있고요, 갈애는 아까 세 가지가 있고요.
취착은 네 가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2. 견해에 대한 취착
3. 10가지 장애 중 세 번째인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
4. 자아교리에 대한 취착
이렇게 네 가지 취착이 있다고 얘기 드렸는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아까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비색계의 존재가 소멸한다.
쭉 다 설명 드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만 설명드리면 좀 전에 소멸을 얘기했는데 저번에 일어남을 얘기하면 애초에 무명이 있어갔고 무명은 아위자예요. 그것은 빨리어니까 영어 스펠로 하면 AVIJJA(아위자 : 무명)
위가 빨리어 로는 위 발음 비슷한 모양이예요. 아위자 왜 얘기해 드렸냐하면 그 명지라는거 있죠. 해탈하면 명지가 드러난다. 삼명이 드러난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할때 그때는 위자거든요. 그래서 잠깐 얘기 드린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제가 아(a)라고 할때는 한국말이 아니라 a 그럴때는 A 라고 발음 할지도 몰라요 a 위자라고 할지도 몰라요. avijja 무명이 사실은 명지가 아닌 것.
금강경 하신분은 다 이해하시죠. 그러면 a 만 없어지면 명지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무명이 사라지면 바로 명지가 바로처럼 된다.
그러면 자 오늘은 무명의 소멸은 얘기했고 저번에 일어남을 얘기했고 연달아 얘기해 볼께요. 일어남 얘기하는 거예요.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남을 얘기하는 겁니다. 소멸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가, 의도를 조건으로 아뢰야식이 일어나고, 아뢰야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가 직역이예요. 한자로는 명색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조건으로 안이비설신의가, 안이비설신의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일어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일어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병들고, 죽음과 동시에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라고 하는 괴로움의 전체무더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괴로움의 전체무더기를 조건으로 믿음이
자..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괴로움이 일어나기까지 거룩한 분을 믿어야지 않겠어요. 믿어서 괴로움을 없애야 되거든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안 괴로우면 믿음은 안 생기거든요. 행복한데 왜 믿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고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저번시간에 얘기 드렸는데 이렇게들 얘기하는데 일정분은 맞는 건데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 하는 것은 신은 없는데 괴로워서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데요.
그것은 틀린건데요. 부처님께서는 다 있다. 다 있는데 부처님께서 위대하신 이유는 그들도 괴롭다 여기보다는 행복하지만 그것마저도 넘어서라 그러신거죠. 그래서 거룩하신 겁니다. 신들이 레벨로 다 있는데 그것도 괜찮은거다. 그것도 나날이 행복해 지는 거지만 궁극에는 궁극의 신마저도 초월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의 종교가 아닌거예요. 타종교에서는 부처님이 사람 아니냐 그러신 건데 그게 아닌 겁니다. 신마저 넘어서라 그러셨거든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라 살아서 신들 세계 다 가보셨잖아요. 제일 높은 신들까지 그 위에까지 가 셨든거거든요? 그래서 초월해라 그런데 자 돌아옵니다.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를 조건으로 믿음이, 괴로우니까 믿어야지 그런데 다시 이야기해도 이것은 안 계신다가 아니라 진짜 계신다. 그런데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를 조건으로 믿음이, 믿음을 조건으로 환희가, 저번에 많이 얘기해 드렸어요. 믿음이 모든 종교에서 다 믿음을 필요로 하는데 그 종교에서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환희가 있어요. 명칭만 다르더라도 환희가 없으면 믿음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러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환희가 없으면 그게 말로 한 거예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정말 그때 막 희열이 솟아요.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믿음에는 그냥 믿습니다 안 되고 부처님 믿음에 말씀주신 공부 방법을 실천을 조금씩 하는 분에게 믿음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희열이 솟게 되는 거예요.
경험에 근거한 믿음, 맹목적 믿음이 아니고 진짜 ‘나’ 하는 경험에 근거한 믿음이 생기고 더 나아가서 확신에 찬 믿음 이거 맹신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자기가 쫒아서 수행을 해 보니까 오! 마이 ‘이렇구나’ ‘이럴수가’ 확신에 찬 믿음이 생기는 건데요. 예를 들면 사실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신 분들은 이럴 겁니다. 부처님을 좀 아시는 분들은 여래십호를 아시면서 이런 생각이 들거예요.
“거룩하신 석가모니 부처님 아버님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나올거예요. 부처님을 진짜로 믿는다면 부처님 아버지께 귀의합니다. 이렇게가 나와요.!
속마음으로 겉으로야 뭐 다들 얘기할 때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자기 속마음에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게 경에서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님이 누군지 아시죠. 정법안장을 이어받으신 위대하신 분 아닙니까. “아들아” 그러셨어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리고 경에서 여러 군데 나오지만 다 아들이라고 그러셨습니다. 그 의미가 큰 겁니다. 그 우리가 거룩한 분입니다.
사실은 불교는 유일 신앙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초기경전보면 유일 신앙 맞습니다. 유일 신앙인데, 그분께서 신이 아니라고 그걸 넘으셨다. 라고 하신겁니다. 전체로 그래서 부처님을 아시는 분은 거룩한 아버지께 부처님 아버지께 귀의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되면 그분에게 환희가 있게 됩니다.
불교의 여러거 석가모니 부처님 모셔놓고 옆에 뭐 있고 이게 아니다 이러면 거룩한 믿음이 아니다. 옆에 뭐 좌우보처 있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뭐 읊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법다웁게 추론이 되는데 여기에 법의 대장군인 석가모니 부처님께 두 위대한 제자가 있었죠. 부처님이 인정하신 사리붓다 존자님하고 목갈라나 존자님 두 상수제자입니다. 그리고 정법안장을 이어받은 위대한 마하가섭 존자님 등등이 계셨는데 법다운 추론이 가능한데
여기서도 누군가가 세분에 대해서 명호를 외우면서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 나무마하가섭존자님, 나무마하가섭존자님 한다고 해 보죠.
나무사리붓다존자님 귀의합니다.
나무목갈라나존자님 한다면은 법다운 추론을 할 수 있는데
전 그런 분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실 겁니다.
우리의 모든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께로 나왔다 나에게 그런 말 말라.
그분들이 얼마나 위대한 해탈을 한 분인데 나는 법다웁게 추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곁에 다 그렇게 계시거든요. 우리의 모든 법은 석가모니부처님께로 나왔습니다. 사리붓다 존자님께서 극!극!극!
사리붓다 존자님이 연세가 훨씬 많으세요. 부처님께 극!극!극! 존경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위대하신 분들도 그러셨다는 것은 지금도 사실은 거룩하신 거룩하신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는 안 되실 거예요.
되는 분들은 누구냐하면 10만겁 이전부터 쭉 ‘빠두뭇따라’ 부처님서부터 실지로 계보가 계셔요.
완전 성불하신분들 부처님들처럼 예정되어서 갔고 그분들은 괜찮죠.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배우는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을 조건으로 환희가 생겨요. 환희를 조건으로 희열이, 이 희열은 세속적 희열이 아니라 출세간적 희열인데 삼매를 생기는 거죠.
초선, 이선에서 이 희열부터가 그 사람을 개화(開花) 시킵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희열이 있으면서 삼매에서 그 사람을 개화시킵니다.
그 모든 육체적, 정신적으로 활짝 꽃봉우리 피게 만듭니다.
그동안 안으로만 갖혀져 있던 굳은 눈은 고체 덩어리의 몸과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듭니다. 그래 희열과 행복이 가득하다. 희열을 조건으로 경안이 혹은 고요함이 혹은 평안이 다 얘기하는데 이게 뭐냐면 삼선이예요.
삼선은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마음으로 평온하게 머물고 사띠가 있고 알아차림이 머리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려지는 본성이 있고, 온몸으로 행복하고 쉽게 얘기하자면 사띠가 있고, 알아차려지는 본성이 어느 정도 드러났고 마음은 평온하고, 몸으로 행복하고 그러니까 몸과 마음으로 행복하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하게 머물고 사띠가 있고, 행복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제 3선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경안이죠.
희열을 조건으로 경안이, 경안을 조건으로 삼매가, 여기서 삼매는 네 번째 삼매예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기 때문에, 괴로움과 행복을 초월한 평정한 사띠가 깊은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뭅니다. 라는 네 번째 삼매입니다.
경안을 조건으로 삼매가 삼매를 조건으로 반야가 금방 반야할 때 아직은 완전한 반야는 아닙니다. 반야의 무더기가 부처님께서 무더기라고 하실 때는 완전한 것은 아니고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야의 무더기를 조건으로 반야의 무더기를 있는 그대로 보거든요.
개체의 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알고 보는 것을 조건으로 싫어하는 것을 멀리 떠남이 무엇을요, 개체를.
삼매가 많이 되니까 법에 대한 분명한 눈이 생기는 게 이 개체는 아니올시다를 알거든요. 낮은 삼매에서도 자기가 편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예요. 편재를 하고 있는데 개체가 아니올시다는 너무 자명한 거죠. 그래 나는 개체를 떠나야 겠다. 싫어함을 멀리 떠남을 ,싫어함을 멀리 떠남을 조건으로 탐욕이 빛바램, 탐욕이 빛바램을 조건으로 소멸이, 무엇이 소멸했죠. 개체가.
살아서 소멸을 체험한다가 해탈이 그 다음 이렇게 얘기한거죠.
살아서 어떻게 소멸을 체험하죠? 살아서 소멸을 체험하면 분명한 앎이 생긴다 지혜가. 태어난 것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하여야 할 일은 다하여 마치었고, 더 이상 이러한 상태란 없다. 어떤 존재로도 오지 않는다. 이 말씀입니다.
태어난 것은 부수어졌고가 살아있는데 자기를 초월해 버린 거예요.
얘가 아니다 얘를 벗어난 거예요. 살아서....
얘는 목숨이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나겠죠 얘를 초월해 버렸으니까 태어난것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브라만장이예요. 원래 어원적으로는 성역 없음 이예요.
완전히 탐이 끝났다. 라는 겁니다..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하여야 할 일은 다하여 마치었고 사성제에 대한 것을 다 마치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
다 마치셨기 때문에... 이 윤회의 세계에서 할 일 이라고는
유일하게 그것이 하여야 할 일 이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일반중생들이 그게 할 일이 아니라 탐. 진. 치 가 할 일이죠. 그래서 계속 윤회하는 거죠. 연료로. 그러나 공부가 되면 될수록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괴로움의 소멸만이 유일한 공부였고, 그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마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런 상태는 없다. 얘가 죽으면 목숨이 다 하면 더 이상 이런 상태로 얘처럼 윤회해서 오는 일은 없다.
어떠한 존재로도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가 아닙니다. 단멸이 아니라고 그러셨습니까 “없다. 존재로도 오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 “어떠한 존재로도 오지 않는다”가 잠깐 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상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세상이 있으며 세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혹은 세상의 일어남입니다.
상윳따여, 눈과 형색이 있다. 그리고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아뢰야식이 있다.식별하는 이 세 가지가 있고, 아뢰야식이 알아야 될 법들이 있는 곳, 법이라는 것은 이 세계 전체 구성요소입니다.
거기에 세상도 있고, 세상이라는 개념도 있다.
그런데 상윳따여, 눈이 없고, 형색이 없고, 알음알이가 없고, 알음알이가 알아야 할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세상도 없고, 혹은 세상이라는 개념도 없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상윳따여, 눈만 있는 것 이 아니고 눈 귀 다 나와요 제가 생략한 거예요
통째로 이야기 한다면 안이비설신의가 있고, 나 바깥에 나외 다죠. 색성향미촉법이 있고,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아뢰야식이 있고, 아뢰야식으로 알아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도 있고 중생이라는 개념도 있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가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둘의 아뢰야식도 없고, 아뢰야식으로 알아야 할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중생도 없고, 혹은 중생이라는 개념도 없다. 지금 이 말씀은 있기도 하고 없는 것도 있다 라는 거예요.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계 이 세계에서 윤회하는 동안은 여기에 중생도 있고, 세상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마라도 있고, 빠삐만도 있고, 악마도 있고, 신도 있고, 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개체의 안이비설신의를 초월하고 이것을 초월하면 바깥의 색성향미촉법을 초월하고, 둘 만에 접촉에 전해 벌어지는 화합하는 아뢰야식이 없겠금 만들어 버리고 아뢰야식이 알아할 법들을 없겠금 만들어 버리면, 세상은 소멸한다. 중생도 소멸한다.
거기에는 중생도 없고 중생이라는 개념도 없다.
거기에 세상도 없고 세상이라는 개념도 없다.
거기에 열반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아니라, 세상도 있고 세상의 소멸도 있다. 중생들은 세상이 있다 가 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소멸도 아신다. 편재해 버리셨다 이 얘기입니다.
세상이 있을 때 신들의 세계, 지옥의 세계, 모든 세계가 있다. 다 있는데 그들은 궁극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세상의 끝에 서 셨다.
다른경에 계시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나는 세상의 끝에 서지 않고는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끝에 서야 된다.
끝에서도 하나 더 가야 된다고 그러셨다. [뽓타빠다경]에서 세상의 끝에서는 것이 열반이 아니다. 거기서 저 두 번째의 의도가 완전히 소멸하면 지멸이 든다가 바로 세상의 소멸인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소멸이 아닙니다. 세상은....부처님께서 소멸했다 해도 해탈하신 분의 입장에서만 소멸로 했다. 그 전체로 편재하셨다는 겁니다. 돌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재하는지 사실은 쉽게 아는 거예요.
너무 간단하지 않아요. 개체를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거라메”
단멸이 되는 거예요. 개체를 버렸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단멸이 되는 거예요. 부처님이 거짓말장이가 되는 거예요. 그럴리는 없는 거예요 “개체가 없으면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면 개체를 어떻게 소멸하냐 아까 소멸한게 해탈이라 하셨잖아요. 소멸을 증득한게 태어난 것은 부수어졌고, 소멸을 체험하면어떻게 소멸 하냐, 그냥 죽자가 되는 게 아니고 개체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좋아하는 것을 놓아라 놓는다는 거죠. 싫어하는 것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체가 드러난 것이다.
오늘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없다면 구원은 없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없다면 구원은 없다가 아무것도 없다면 개체를 소멸해라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색 수 상 행 식은 아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은 아니다. 색은 몸이요 수는 느낌이요 인식, 행은 의도, 식은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이 몸과 마음을 이 덩어러진 것들은 오온은 다섯 가지 무더기들은 전부다 항상 하지 않는 거다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이 몸뚱아리와 마음이 어찌 궁극이겠는가?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아니니까 그것을 버려라
버리면 세상을 구원할 그 불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신 거예요
여기까지 쉬운 말씀 우리가 이해한 것이고, 그러나 과정까지가 쉽지 않은 것은 머리로 이해되었는데 그러한 삶을 놓는거 나에게 곤란할 것이다.
왜 우리가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과정에서 부처님께서 탐을 인정해 주셨거든요. 우리에게 탐에 머물러만 해라. 그리고도 계율 지키면서 분발하면은 머물러만 해도 많은 재물을 모은다. 좋은 명성을 얻을 것이다. 어떤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당당할 것이다. 죽을 때 여행가 듯이 깨끗하게 준비하고 죽을 것이다. 죽자마자 천상세계에 까지 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겁니다.
해탈은 못해서도 그런데 탐에 머물러가 아니라. 탐에 강요되어 탐에 완전히 동요되어 인색함까지 가서 남의 뒷 통수 쳐 가면서 돈을 벌게 되면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갈 곳은 파멸처 지옥이다 그러신 거예요.
그래서 탐에 미친 듯이 하지 말고 머물러 정도는 다 인정해 주셨잖아요. 과정에서 먼저 다스려야 될게 “화”부터 다스려라. 그리고 어느 정도 계율을 하면서 처음에 계율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좀 놓으면서 육근단속 그 다음 식사의 적당량을 알고, 과식하지 말고, 조금 출출하게 깨어있음에 전념해라.
위빠사나 저번 얘기한 것 5가지 장애, 그 다음에가 1.감각적 욕망 2.성냄 3.해태와 혼침 4.들뜸과 후회 5.의심 이 다섯 가지 장애 극복하고 삼매해라 이러신 겁니다.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그런데 이게 순서대로 한다 이런게 아니고 사실은 순서대로 의미도 있지만 처음부터 같이해야 하는 거죠. 일상생활에서 계율적인 거 하고, 일상생활에서 육근단속하고, 일상생활에서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일상생활에서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위빠사나 하고, 일상생활에서 다섯 가지 장애 극복하고, 일상생활에서 앞에 거 해가면서 삼매를 같이 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동시상영하게 되면 깨달음은 멀지 않은 거고 해탈이 멀지 않은 거지만 해탈 못하더라도 분명히 나날이 향상일로 할거기 때문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고 몸이 무너진 다음 천상은 틀림없는 겁니다. 해탈이 아니더라도 그런 삶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모두 행복하십시오.
나무석가모니불 _()_
녹취자 : 예심 2011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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