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사성제

사성제 4B (2010-12-17)

Daisy청량심 2023. 10. 10. 02:50

2010/12/17 - 사성제 4B - 순일큰스님

 부처님께서 자아교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20가지 자아교리도 있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물질이 자아다.’ 어떤 사람은 ‘거친 육체가’ 어떤 사람은 이것은 아닌데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자아다.’ 어떤 사람은 ‘비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다.’ 이렇게 자아다 저렇게 자아다. 어떤 사람은 ‘7가지 단멸 론을...’ 그런 것은 없다.

지금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 그런 견해 자체가 ‘전부 다 견해를 없애야 한다.’ 그런 신거예요. 아까 얘기한 거와 똑 같아요. 열반한 사람이 그럼 ‘있네.’‘없네’. 견해가 있겠냐는 거예요. 지금 몸뚱아리와 느낌과 인식과 의도와 알음알이 가진 것이 굉장히 많은데 있다 없다 한다는 거죠. 이것은 ‘있다’, ‘없다는 그런 말씀을 초월한 얘기입니다.

[우다나경] 에 나오는 말씀인 데요,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형성된 것은 제행할 때 행이에요. 제행무상인데요, ‘지금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일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여기서 태어나고,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자에게 우리들이죠. 자아에게 벗어남이란 없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중생들에게 그것을 벗어날 길이 있다.” 이러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12연기에서 보고 있는 것 전부다 우리가 형성된 것들 이예요. 태어나고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들 이게 일어남예요.

나중에 소멸해라 하시 는 게 왜 소멸을 해라하시냐 하면,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불사에 위배되는 거니까.

 돌아옵니다. 자아교리에 대한 취착은 놓아야 됩니다. 왜냐면 자아교리가 궁극은 분명히 있습니다. 불성이 그러나 궁극이 있네. 없네. 대해서는 궁극은 있는데 불사라 말씀하시니까 머릿속에서는 그렇지만 놓아야 되요. 왜 그럴까요? 마지막에도 공부 많이 되었어도 미세하게 자아교리를 갖고 있을 때에 그것이 높은 신이잖아요. 해탈 못하고 10가지 장애 중에 색계의 높은 신, 비색계의 높은 신도 자만이 있다.

‘내가 있다.’라는 그 생각 때문에 해탈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공부 많이 지어져도 그렇게 어떻게 공부를 짓냐 하면, 이 개체성을 놓는 것으로 공부를 지어야 되는 거지, 이것은 무상한 거니까 무상한 것을 전부 다 버리는 길로 공부지어야지 ‘궁극이 있네. 없네. ’이런 견해를 내면으로 지으면 곤란한 것이죠.
이게 참 안타깝죠. 끝판 까지 궁극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궁극이 못됐다는 것입니다. 왠지 이해되시죠? 궁극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개체들만 하는 거예요. 존재들만...

 번외 얘기 하나 드릴까요. 와짜뿟다 유행 승이 (외도입니다. 그 당시 나중에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부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니다. 부처님 그 당시 힌두교 빨리 어로는 ‘아-따’ 한글로 ‘자아’로 번역했지만 지금도 자아교리의 취착이라고 했지만 꼭 자아라는 말 일까 의문스러워요.  궁극인데 왜 한글로 자아라고 번역했냐 하면, 힌두교의 대다수가 이것을 궁극이라고 여기지 않고 ‘이 안에 있는 영혼이다.’ 라는 식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자아라고 (지금도 그런다 말입니다. 불멸하면 다 문제는 이 안에 있다고 여긴다 말이죠) 이 안에 있으면 쪼가리죠. 영혼같이 그래서 자아라는 단어에 합당하지 않은데 본래 뜻은 그런데 힌두교인 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뭐라고 생각하니까 자아 마치 아我처럼 된 건데 그 다음 써보죠.

와짜뿟다 유행 승이 ‘부처님 자아는 있습니까?’ 하고 첫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침묵.....두 번째도 ‘자아는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안 물어 보고 두 번째도 확고하게 ‘있습니까?’ 라고 생각하니까 두 번 여쭙니다. 침묵 하셨어요. 일어나서 가버렸습니다. 가자마자 아난존자께서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 왜 대답을 안 하셨나요?’ “그가 유행승 이 ‘자아는 있습니까.’ 했을 때 내가 있다 라고 대답했다면, 영속론자 들에 편을 드는 것이고, 없다라고 했다면 단멸론 자에 편을 드는 것이다. 영속론자는 ‘영원히 산다. 자아로 이런.’론자들 이고, 단멸론 자는 ‘한 번 죽으면 끝이다.’는 이런 론자 들인데, 양쪽 다가 아니다. 항상 함은 없다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봤듯이 항상함 은 있는데, 그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이 말씀인 거예요. 왜냐면 항상함 이라고 자꾸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 생각 하냐면, 형체 없는 게 아니라, 형체 있는 뭘 자꾸 항상 하고 싶어 하거든요.

 세 번째로는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하면, 와짜뿟다 유행 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만약에 내가 있다고 대답했다면 “나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변한다.”라고 하는 무상이라고 하는 지혜가 일어나게끔 하는 법에 부합 되는가?  아난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만약 내가 불멸의 자아가 있다. 라고 한다면, 지금 나는  평소에 모든 형성된 것들은, 모든 쪼가리들은 변하는 겁니까? ‘불멸이 아니니까 변하는 것들만 버려라.’라고 설하셨다는 거예요. 물론 그 설하신 목적은 변하는 것을 다 버리고나면,  궁극이 될 거니까 이름 할 수 없는....   . 그러면 “우리가 배워야 될 법은 ‘변하는 것은 다 버려라.’만 배우면 된다.”이런 말씀이예요.

부처님께서 지금 내가 그 대답에 “불멸이 있다 ”그러면 이 친구는 변하는 것을 다 버려라. 그 쪽으로는 공부를 안 할 거고 ‘아! 있구나.’ 하면 그것을 잡으러 갈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부처님께서 이 오온이 12연기가 제가 저 번 시간에도 얘기 드렸지만,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일어남이다.’라고 얘기 드렸는데, 상윳따니까야에 말씀 계셔요. 이게 세상의 일어남이다, 이게 세상 전체의 일어남이고, 개인사가 아니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뒤에 가면 나중에 세상의 소멸을 공부할건데 ‘이 얘기는 뭐냐면 세상은 궁극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세상은 모두 변하는 겁니다. 형성되어진 것이고, 법이 되어 쪼가리들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전분데, 그것은 다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버려라.’하셨다 말이 예요. 그랬을 때 궁극이 드러난다.

그러니 궁극은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알거나, 감지하거나, 마음으로 알거나, 얻거나, 탐구 사유하거나, 고찰로써,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아예 영원히 모른다가 아니라, ‘개체가 색수상행식이 살아서 소멸 했을 때만 불성이 드러난다.’ 이 얘기거든요. 세상이 소멸했을 때만 이라는 얘기예요. “개체가 소멸했을 때”라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난 세상의 일어남도 말하고 세상의 소멸도 말한다. 개인사에서 세상이 소멸이 왔을 때, 오온의 개체의 소멸은, 세상으로 보면 세상의 소멸이다. 그때 불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세상만 다 소멸시키면 되는데, 세상은 다 변하는 거니까, 다 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굳이 궁극이 별도로 있네. 없네. 하면 부처님 얘기 하신다면, 듣는 사람은 자폭하지 않겠어요?

 요약합니다. 왜 이런 요약을 했냐 하면, 세상은 두 가지 견해들이 있어요. 한 쪽은 영원한 무엇이 있다. 한 쪽은 없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양쪽 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사실은 자아교리에 대해서 그러나 저는 얘기 할 수 밖 에 없는 게 제 얘기가 비록 지금 도움을 안 주더라도, 궁극은 있다....

요새 세상에 없다. 없다 쪽으로 많이 가기 때문에, 제가 한마디 한 것입니다. 궁극이 없다면 지금 불사 자체가 불사가 우리는 다 죽음 그런데 불사가 있다. 변하는 것은 다 죽음이거든요. 안 변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지만 그것을 있네. 없네. 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가지 취착 얘기 드렸습니다. 그리고 존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라는 것은, 강하게 움켜쥐니까,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비색계의 존재가 있죠. 욕계만 하더라도 지옥, 정토, 축생, 아귀 사람 사대천왕, 삼십삼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까지가 욕계입니다. 좀 전에 ‘사대천왕’ 거기서 부터는 다 신의 나라죠. 뒤로 간 것이 더 높은 욕계의 신들의 나라, 지옥만 하더라도 수명이 다 다르고 더 지독한 지옥도 있고 이러죠. 부처님께서 경에서 여러 군데서 말씀하십니다. 지옥도 있고, 천상도 있고, 조상도 있고, 다 있다. 이거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정말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 한 가지 이런 걸 생각해 봐야 되요. 아니 세상의 일어남과 소멸함 까지 사라진 분이 갑자기 뜬금없이 지옥도 있고 천국도 있다. 왜 이야기하시냐는 거죠? 이건 모순이 안돼요. 지금 세상의 일어남 ‘세상이 있는 동안에는 분명히 다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의 소멸함 스스로 해탈할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 모든 세계를 초월해 갔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욕계 안에서도 팔정도를 조금씩만 닦아도 사람 보다 높은 세계로 가는 거고, 지금 이 세계 보다 더 높이 나날이 향상일로 하는 것은 색계로 가야 되는 거죠.

색계에도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 이렇게 있죠? 초선천에도 세 가지 레벨이 다른 천상세계가 있고, 이선천에도 세 가지 천상세계 삼선천에도 세 가지, 사선천에 일곱 가지, 이렇게 있을 겁니다. 정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비색계와 무색계라고 하는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 해탈 전 까지요. 이 비상 비비상까지가 다 윤회하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경에서 강력하게 “있다” 그러셨습니다.

보통 있다 없다고 안하시는 그 분께서 있다 그런 거 여러 군데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잘못 생각 하는 거다. 그렇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순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 있는 한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있다가 훌륭하다는 말씀 하시는 게 아니라, ‘해탈을 못한다면 최소한 나날이 높은 데로 가라.’ 그러나 해탈하겠다면, 그것이 다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초월해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색계 사선천에 불 환자 아나함만 다시 안돌아오지, 거기서 열반하시지 비색계마저도 인간 이하로 떨어진다 말이 예요. 목숨이 다하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 예요.

그런 존재들이 많이 있다. 천상세계에서도 인간이하로 많이 떨어진다. 그건 왜 그러냐하면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러셨어요. 사성제를 모르면 그럴 수 밖 에 없는 것이 사성제의 기본이 색 수 상 행 식은 괴로움이니까 이것을 버리기 시작 한게 더 큰 궁극의 행복이다 설하셨는데,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색 수 상 행 식을 채워주는 것이 더 행복이다.’라고 공부 했을 테니까.

그런데 왜 천상을 어떻게 갔냐 하면 그래도 자기를 채워주면서도 계율 지키는 사람들 있죠. 자기를 채워주면서도 보시하는 사람들 있죠. 자기를 채워주면서도 가끔 삼매 하는 사람들 있어요. 그것을 조건으로 갔던 건데 거기서 목숨이 다하게 되면 자기 욕망을 열심히 채웠던 그 과보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인간으로 나오기 쉽지 않다. 이런 얘기죠.

 그런데 아까 나날이 향상일로 하는데 있어갔고 부처님께서 재가자들에게 정말 많은 재물을 모으고 좋은 명성으로 다 주셨잖아요. 부처님께서 재가의 경우는 출가자란 좀 법문을 레벨이 다르게 설명하셨어요. 재가에게는 제가 지금 하는 법문은 출가용 법문인지 몰라요. 부처님께서 재가용 법문은 계율을 어느 정도만 지켜라. 계율도 오계만 얘기 하시죠. 그리고 감각적 욕망 중에서 거친 것들만 조금 없애라. 왜냐하면 실지로 수다원과를 이룬 굉장히 훌륭한 장자가 500명을 이끌고 있는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훌륭한 장자예요. 재가자인데 그 분이 와서 설법을 듣다 말고 ‘부처님! 그 설법은 저에게 어렵습니다. 우리는 금과 은을 향유하고 이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들에 맞는 설법을 주십시오.’

굉장히 훌륭한 제자가 부처님께서 ‘재가자는 계율을 어느 정도 단속하고, 보시를 어느 정도 잘하고, 그 다음에 정진을 할 수 있다면 정진을 조금하고..’ 이렇게 말씀 하시는 거죠. 그러면 방일하지 않은 이유로 많은 재물을 모은다, 살아서 좋은 명성을 얻고, 어느 회중에 가더라도 떳떳할 것이고, 몸이 무너질 때 여행 가듯이, 깨끗하게 준비하고 죽고, 죽자마자 천상세계다 얘기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그 정도에서도 우리처럼 정진도 해야 되고 삼매가 되며 이것은 얘기가 달라지는 거죠. 그러면 그 정도가 아니라 아까 색계의 천상세계의 직접적인 조건은 삼매라는 거죠. 그러면 확 달라지는 거죠.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법문은 사실 어떻게 보면 출가의 법문입니다.
 조금만 쉬었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존재에서 ‘태어남’ 저번 얘기 드렸죠. 윤회가 그거거든요.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욕계, 색계, 비색계, 높은 신들은 다 보고 있다는 거예요.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힌두교 바라문들이 아주 높은 신들께 제사 지내는 것도 공덕이 크다. 그러나 그걸 로는 궁극이 안 된다. 신들이 궁극이 아니다 하신 거죠.
부처님이 궁극인 거죠. 큰 높은 신들이 다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존재로 윤회 하는 거죠. 태어남은 필경 노병사가 있는 거죠. 좀 전에 태어나고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자에게는 필경 노병사가 있는 것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이것이 다 우리는 아는데요. 천상세계 신들이 영원할 것이다. 라는 것은 비법 이라는 거예요. 이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들도 윤회해서 곧 태어났잖아요. 생겨나고, 만들어졌고, 형성되어진 것이잖아요.

그러면 무척 오래 살지만 우주 몇 만겁 생기고 멸하지 않다는 거예요 수명이. 그래서 어떤 신은 착각해요. 나는 영생이다. 착각하는 신들은 무척 많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대는 영생이 아니다.’하니까 나는 영생이고 전지전능하다 어찌 그대가 아는가 하니까 부처님께서 나는 그대의 수명 10만 야뿟따라는 걸 분명히 보고 있다. 부처님께서 궁극까지 다 보시니까 10만 야뿟다 그냥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거의 안 변할 듯 한 그러니까 그들은 신들의 왕은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진지하게 얘기하니까, 신들의 왕은 놀래서 그러면 더 다른 얘기를 좀 해달라고...
부처님 그 전에 수없는 얘기를 다 해주니까 듣고 그 자리에서 놀래고 그러면 이제 알았다고 나는 영생이 아니라고. 이게 신들의 왕은 착각할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거의 전지 전능성 이니까 말이죠.... 전지전능이라고 얘기 잘 하지 않습니다. 거의 전지전능...

여기서 돌아오면 형성되어진 것들은 모두 논리로 보시면 형성되어진 것, 만들어진 것, 생겨난 것, 태어난 것, 이런 것들은 다 필경 멸한 다는 것, 이해되시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다 보고 다 아시는 그 분께서 그렇게 얘기 하신 겁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해탈이 아니다 라면 나날이 높은 존재로 가야 되는 겁니다. 천상세계로. 다음 번 윤회할 때 또 인간이상으로 와야죠. 그렇겠죠. 그것은 또 다시 돌아와 얘기해도 별로 어렵지 않아요. 어떨 때 인간 이하로 가냐 하면 10가지 계목은 다 있는 거예요. 10가지 계목을 다 지킬려면, 인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10가지 계목을 다 지키면 해탈이에요.

그러니까 %를 많이 지키면 되는데 특히 행쪽 세 가지를 많이 지키고, 그렇게 되면 동물로 오기가 거의 어려운거예요. 말 네 가지는. 행 세 가지가 살생, 도둑질, 간음 이것을 안 어기면, 이것은 동물로 오기가 거의 쉽지 않은 거예요. 이 얘기는 동물로 못 온다는 얘기에요. 사실은 그 중에 부분적으로 해도 인간으로 오기가 쉬워요. 제가 이러면 벌 받을까요?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  죄송합니다. 전 요번 생에도 살생했거든요. 그러니까 전생은 뭐 혹시 모기 파리 안 죽여 보셨나요?  그리고 어렸을 때 생물시간에 개구리 해부, 아까 100% 아니라고 한 것은 %라고 한 것은,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삼가면은, 거의 동물로 오기가 쉽지 않죠. 동물은 거의 계속 그렇게 하니까 동물인 거거든요.
그리고 말 네 가지를 더 잘 지키면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쓸데없는 잡담 이것은 인간보다 조금 나은 동물 이예요? 어떻게 보면 은, 그래서 탐심 진심 어리석음은 마음인데, 이것을 어느 정도 다스려야 되는 거죠. 어느  정도 다스리면 거의 인간 이상인거죠. 인간으로 나온다 이거죠. 그리고 보시 이것은 인간으로도 나오고 그 이상 뿐더러 문제는 나왔을 때에 똑같은 사람으로 나왔다면, 여기 아까 둘이 계율을 똑같이 지킨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둘이 똑같은 인간으로 나왔다면, 여기 아까 계율을 똑같이 지킨 사람이 있다면,   보시한 사람은 똑같은 인간으로 나왔지만, 훨씬 좋은 것을 받겠죠. 수명, 용모, 명성, 명예, 행복, 힘, 재물 등등. 천상세계 가도 그럴 거고....

경에 계신 말씀 이예요. 천상세계 가더라도 같은 신들 중에서, 최고의 신이 되고, 말씀 쭉 계십니다. 인간으로 와도 그렇고. 그래서 돌아와 얘기하면 부처님께서 오계를 얘기하시고 보시를 얘기하시고. 그것을 어마어마하게 아낌없이 주어라 였지만 아낌없이 어떻게 줍니까.
아까 계율 100%이면 해탈이듯이 아낌없이 주어라는 궁극의 경지 까지 얘기 하신거지. 보시를.... 처음에 아낌없이 어떻게 하겠어요. 계율 조금만하면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렇게만 해도 그것은 재가자에게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훌륭하게 할려면 잠깐 돌아와서 얘기하겠습니다. 아까 육근 얘기했는데 부처님 경에 계신 말씀드립니다. 성 도시가 있다.  도시가 있는데 도시에 성이 있다. 거기에 문이 있다. 6가지 문이.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가 있다. 그 문으로. 두 전령이 빠르게 다가갔다. 현명한 문지기가 패스시켰다. 들어가라고 성주님 어디 계시냐? 그래서 두 전령이 성주에게 보고하고 다시 그 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시면 부처님께서 이것은 내가 만든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도시는 몸을 얘기한다.

여섯 가지의 문은 여섯 개의 안의비설신의다. 현명한 문지기는 사띠의 비유다 그러셨어요. 두 명의 재빠른 전령사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다. 성주님 어디계시냐? 성주는 알음알이다. 잽싸게 보고하고 간다. 이렇게 비유하셨다 말이예요.

경에서 여기까지 말씀하시지만 다른 데는 이어진다. 부처님께서 ‘사띠를 잘 확립해라.’한 것은 ‘육근단속을 하는 사띠를 잘 확립해라.’하신 거예요. 안의비설신의를. 왜 그러냐하면 육근을 단속하지 않으면, 바깥쪽 색성향미촉법에 의해서 좋아하고 탐닉하고 싫어하는 것이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물밀듯이 들어오면 아까 성주가 뭐였죠? 아뢰야식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물밀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면 계속 나쁜 게 아뢰야식에 쌓이잖아요. 그래서 계행을 사띠로 잘 방어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잘 방어가 되면 현명한 문지기라고 한 것은 바깥쪽에 이제 그런 물밀듯이 나쁜 게 해로운 법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제 삼매와 위빠사나만 공부한 것들만 통과 시킨다 라는 거죠. 그러면 성주가 알음알인데 알음알이에 좋은 것들만 계속되죠. 삼매와 위빠사나가 그러면 오해하지 마시는데 와- 알음알이가 궁극인가보다.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계율 어느 정도하고, 보시 어느 정도하고, 그 다음에 육근단속을 해야 되는 거예요. 사띠를 확립하는 육근단속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제가 인간으로 다시 윤회하는 거 올 때는 지장 없다보다. 공부가 더 가는 거죠. 지금 살아서 공부를 거의 신으로는 쉬운 거고 그 이상이 되기가 보장이 되는 거죠. 사띠 확립하게 되면 육근단속을 하고 삼매와 위빠사나를 닦아줘야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삼매와 위빠사나가 아뢰야식에 계속 보고 한다는 것은 거기에 좋은 거 심어놓고 나오고 되돌아오고 이러는 거잖아요. 여기까지 경에 말씀 끝났는데....

 전문적인 얘기해보죠. 아뢰야식에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보고하고 나면 아뢰야식이 궁극인가요? 궁극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성주님 인거죠? 나중에 부처님께서 공부가 해탈에 이르면 신통을 할 때 이 알음알이가 죽과 밥으로 직접된 몸에 갇혀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
알음알이가 훨씬 큰 것입니다. 아뢰야식이 지금 수도 없는 생을 전부 다 거기에 저장된 것 아닙니까? 사실은 우리는 그 아뢰야식이 내 몸뚱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림없는 얘기죠. 이 몸뚱아리 갖고는, 몸뚱아리는 미생물 수준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뢰야식이 현존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아뢰야식이 궁극이냐 아니다.  그래서 힌두교 어디에서는 아뢰야식을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 실지로 체험을 하니까 궁극이다. 라고 착각을 해서 궁극 이다. 라고 쓰 있는 경우도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궁극이 아니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생의 기억이 모둔 한 자니까 아뢰야식이 다를 경우는 어디까지냐 하면, 무소유처까지가 아뢰야식의 끝판 이예요. 그 이상은 비상비비상이고 거긴 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러셨다 말입니다. 거기서 부터가 본성과 상, 산냐가 섞여있는 세계예요. 식이 아니고 찧고 빻고 할 수 있는 식의 가장 기본은 여러분 컴퓨터의 가장 기본은 저장할려고 하면 아주 간단해요. 이진법만 있으면 되잖아요.
맨 처음에 이진법이 많이 지어져갔고 여러 개념을 양성하는 거잖아요. 식의 끝판까지 간 것이 무소유처예요. 아무것도 없는 세계 그리고 더 가서 ‘비상비비상처에는 식이 없는 세계다.’이런 겁니다. 그리고 그 전 까지는 알음알이가 성주인거죠. 아뢰야식이 성주니까 대장이니까 식이 윤회 하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더 가게 되면 거기는 아뢰야식이 없는 거예요. 해탈이 아니더라도 전에 비상비비상에서 이렇게 대갔고 거기는 부처님께서 경에 계세요. 식의 세계가 아니라 산냐의 세계다. 상이 라고도 하는, 인식 이라고도 하는, 세계다. ‘인식의 상의 세계다.’ 말씀하신 거죠. 그것 넘어가서 거기서부터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이렇게 해서 ‘인식의 산냐의 구경에 이르른다.’ 세상 끝에까지 이르른다.

세상 끝에 이르러도 아직 해탈은 아니다. 아까 세상의 소멸 있다고 했으니까 거기서 이러한 것이 생겨난다. 내가 의도하면 좋다고. 그래서 의도 하게 되면, 다시 공부가 떨어진다. 이러신 거고요. 거기서 이러한 것이 생겨난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12연기 두 번째 의도예요. ‘나는 의도하지 않으리라, 하고서 의도를 완전히 끝내버린다. 그러면 지멸에 이르른다. 세상의 소멸에 이르고 스스로에게는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태어남, 그래서 노병사가 생겼습니다. 노병사가 생기니까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냐하면, 요번에가 괴로움이 일어남이죠. 이렇게 해서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괴로움의 전체 무더기가 발생한다. 이러신 거예요.

지금 1.괴로움의 전체 무더기가 일어난 것, 2.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밑에만 보시면 이해가 쉽지 않아요. 노 병 사, 태어남이 있으니까 당연히 노병사가 있지. 그러니까 생로병사가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이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좀 더 바깥쪽에 모든 것을 끌어 모아서 행복해져야 된다니까요. 이게 한 가지 경우고 거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의 경우이고, 지금 부처님께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까 설명 드렸습니다. 바깥쪽에서는 고통 반 즐거움 반, 영원은 없다. 그렇다고 출발에 바깥쪽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지말라가 아니 신게 바깥쪽과 처음에 출발은 내면에 바깥쪽에 어느 정도 추구하면서, 버리는 것을 조화롭게 해라는 거예요.

이걸 얘기 드리면 부처님께서는 탐에 머물러, 탐에 강요되어, 탐에 완전히 동요되어..... ‘인색함까지 간다, 여기까지 가면 전 방위로 괴로움이 생기는 거죠.  인색함을 없애고 탐에 완전히 동요됨을 없애라.’ 탐에 강요 됨 정도로 있다가 점점 더 가서 탐에 머물러 정도만 해라. 그러신 거예요. 재가자 에게 말이죠. 머무르기만 해도 말이죠.

재가자에게는 아까는 거친 것들 없앴으니까, 탐에 머무르면서 내면의 행복도 삼매서부터 어느 정도 되었는 거잖아요. 아까 바깥쪽으로 쭉 나갔던 것이 인색함 까지 갔든 것이 쭉쭉 들어와서 탐에 머물러 까지 왔기 때문이죠. 탐에 머무르기만 해도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부처님법 배운 사람은 계율을 조금씩 지켜나가도 삶에서 분발하게 되거든요.
삶은 부처님께서 분발하는 자의 몫이다. 나쁜 사람이 돈 벌어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은 게으르면 안 된다.’ 그러셨어요. 전생에 보시한 공덕이 많으면 몰라도 훌륭한 사람도 분발해야 돈 잘 벌고 명예롭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처님 법을 잘 쫓는 자는 계율만 믿음만 가져도 그 사람도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탐에 머무르기 만 해도 살아서 많은 재물을 모은다. 좋은 명성을 얻는다. 아까 쭉 얘기 드린 겁니다. 이것 얼마나 좋습니까. 내면으로 공부가 되어서 행복해 바깥으로도 탐에 머무르기만 해도 수리수리 마하수리 다 잘되지 않아요? 물론 다 잘된다는 것은 통론으로 얘기 드린 겁니다.

살아서 많은 재물 모으고, 좋은 명성 얻고, 잘 될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일이 매순간 매번 다 잘 될 수는 없겠죠. 그렇게 해서 경험에 근거한 행복이 젖기 시작하거든요. 굉장히 큰 행복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제 정신상으로 한 번 과도기가 있다는 거죠.

 오늘 까지가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했어요. 이제 다음번에가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가 있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렇게 있는 거죠. 다음번에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하겠습니다. 끝나기 전에 하나 만 더 얘기할께요. 아까 즐거운 느낌을 먼저 버릴 이유가 좀 있는데요.
즐거운 느낌을 버리게 되면, 괴로운 느낌이 올 때요 괜찮아요. 들뜸과 후회라고 즐거운 느낌에 너무 흥분하면요, 괴로운 느낌에 똑같은 도수로 너무 괴로워져요. 그리고 부처님께서 즐거운 느낌을 없애게 되면, 아까 경계가 불분명해져서, 내가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이유로 괴로워도 안 괴로워요. 즐거움을 놓게 되면 괴로워도 안 괴로워요. 경에 말씀으로는 육체적 고통이 오더래도 제2의 정신적 고통은 안 온다. 이러신 거예요. 중생들 몫이 예요. ‘공부된 사람은 안 온다.’하는 이유가 비유해 볼께요.
옆집 바로 옆집 말고 먼 집에 사람이 진짜 아프다 하면 우리가 고통스러운가요? 별로 안 고통스럽잖아요. 그것처럼 저~  먼 집이라고 얘가 내가 아니면 별로 안 고통스러워요. 그리고 저 옆집에 엄청 좋은 경사가 일어났데요. 옆집에 즐거워할 건데요 내가 즐겁나요? 별로 안 즐겁잖아요. 남의 집 얘기니까.....

그런 것처럼 애를 별개로 보게 되면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만 담담하다. 경에 계신 거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만 거기에 너무 탐닉하지 않는다. 즐거워해도 거기 너무 탐닉하지 말고 경험을 하되 ‘얘가 즐거워하고 있구나.'와  ‘나는 즐겁다.’는 다른거 잖아요. ‘나는 즐겁다’ 하면 거기 탐닉하는 거고, 위빠사나로 관찰하면 ‘아! 얘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구나.’ 이렇게들 하다보면 괴로운 것이 와도 안 괴로워요. 형이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되요. 그런 사실은 논리가 아니라 나중에는 정말 불성이 드러난다는 거죠. 얘가 아닌 이렇게 출발 하는 거거든요.

 하나만 하고 요약합니다. 평소에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즐거운 느낌이 올 때, 아~~ 나는 즐겁다가 아니라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면서 그래 즐겁군..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즐길만한 것이 아니고, 연연할 것이 못된다. 이렇게 여기라고 그러셨어요. 그렇게 하다보면, 괴로운 것이 왔을 때도, 이것은 즐길만한 것이 아니고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안 괴롭다. 이것이 양평에서 자주 얘기 드렸지만 논리만이 아니라 실지로 그렇게 되요. 제 경우도 그랬었어요. 치아가 2주, 3주 정도 잠을 못 잘 정도로 팅팅 부었는데, 무식하다고 병원에서는 그러는데 안 갈려고 해서 안 갔다. 이렇게 부은 정도면 억수로 아프잖아요.  몸뚱아리는 아프죠.

아픈데 안 아프게 표현할 길이 없는데, 얘는 아픈데 별도로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어요. 진짜 안 아프니까 안 갔죠. 그런 아예 안 아프다 도 아니고, 몸뚱아리는 분명히 아프다. 표현을 할 수 없지만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실지  예를 든 거예요. 예는 좀 이상했지만, 고통이 올 때 안 고통스럽다.

정신적 고 통은 아예 안 고통스럽다 예요. 육체적 고통이 오는데도 제 2의 정신적 고통은 없는데 하물며 정신적 고통이야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즐거움에 너무 빠져들기 때문에 반대적인 괴로운 늪에 괴로운 거죠. 얘한테 덤덤해지면, 얘도 덤덤해지고, 실제적으로 그리고는 너 바보 이 상자 되는 거예요.

나무석가모니불 _()_

녹취자 : 예심
2011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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