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사성제

사성제 4A (2010-12-17)

Daisy청량심 2023. 10. 10. 02:48

2010/12/17 - 사성제 4A - 순일큰스님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날씨가 좀 풀렸습니다.  
저번시간에 접촉 까지 했었어요. 안 이 비 설 신 의와 색 성 향 미 촉 법의 접촉인
인 데요
여기 안 이 비 설 신 의만 나왔지만, 말씀드렸다 시피  정신물질에서 조건적으로
생긴 것이 이 세상이거든요.  
그래서 안 이 비 설 신 의들만 쭉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내가 안 이 비 설 신의 상대 에서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 실지로 이와 관련된 것이 경에 어떻게 있는가 하면, 좀 특이한 경우인데요, 상윳다니까야에 전체 딱 한번 나오시는 말씀이에요,

정신물질에서 안으로는 이 몸이 생겼고, 밖으로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몸과 색성향미촉법, 몸 이라는 것은 안 이 비 설 신 이인 거예요.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한 쌍을 이룬다. 이 말씀이 계셔요. 경에서  그래서 저기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색 성 향 미 촉 법, 안 이 비 설 신 의, 이렇게 여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느낌인데요. 느낌에는  부처님께서 두 가지 느낌으로 얘기 하실 때에 는요.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일 때고요, 세 가지 로 주로 말씀하시는데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죠. 주로 세 가지 니까 세 가지 말씀을 잘 생각하시면 됩니다. 즐겁고, 괴롭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잠깐 언급해야하는데요,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 이 있는 데요.

세속에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기 상태에요. 그런데 안 좋은 상태에요 그런데 출세간은 이것은  네 번째 삼매에 해당하는 지고의 상태에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은 그래 이렇게 세 가지가 있고요, 다섯 가지로 말씀 하실 때가 계셔요.  다섯 가지로 말씀 하실 때는 육체적 즐거운 느낌의 힘은 쉽게 육체적 즐거운 느낌, 육체적 괴로운 느낌 , 정신적 즐거운 느낌, 정신적 괴로운 느낌 , 평온의 느낌, 이렇게 다섯 가지로 말씀 하세요.

아까 세 가지로 돌아가 보면 세 가지의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결국 육체 정신 따로 하게 되면 6가지 가 되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어요. 통상 6가지 느낌을 말할 때가 있는데, 6가지 느낌은 그것 말고  눈의 느낌, 귀의느낌 , 코의 느낌 , 혀의 느낌, 몸의 느낌, 마음의 느낌 이렇게 6가지죠. 이것도 만약에 또 좀 전에 육체적 정신적 곱하기 2 해버리면 12가지가 되는 거죠.
이렇게 6가지로 말씀 하실 때가 있고 , 18가지 38가지 108까지 가셔요 그런데 여기까지 아시면 되겠습니다. 6가지 느낌만 아시면 통론을 우리가 거의 안거예요.  그런데 이제 느낌은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제 우리 12연기 소멸에 나오시지만 완벽을 알 수 있지만  느낌을 없애라는 그러셨거든요. 왜 없애라 그려 셨나 한번 알아봐야 되는 데요. 일단 육근이 안의비설신의의 마지막 얘기 한 것 여섯 가지 느낌인 데요 육근이 느낀 다는 것은, 색 성 향  미 촉 법과의 접촉이라고 얘기했어요.

이 얘기는 나의 육근이 바깥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치달려나가서, 접촉 하는 게 느낌이라는 거거든요.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벌어집니다. 하나는 내가밖에 치달려나가서 즐겁기만 하면 좋겠는데,  좀 전에 괴로운 느낌이 있었잖아요 이것 잘 공부해 봐야 됩니다.  우리 육근은 안의비설신의는 좀 전에 즐거운 느낌도 있지만 괴로운 느낌이 있어요.
쉽게 바깥에 색 성 향 미 촉 법은 좋아 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죠. 이게 문제에요. 좋아 하는 것만 있어서 즐거움은 괜찮은데,  영원히 바깥쪽에는 싫어하는 것도 있단 말이죠.  물 반  고기 반 즐거움 반 괴로운 거반 이런 얘기는 바깥쪽에 색 성 향 미 촉 법이란 접촉하면 영원히 고통 반 즐거움반이죠.

한번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미워하는 것들과의 만남 , 얻고자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없는 괴로움 , 누가 다 할 수  있나 말이죠. 불가능하다. 신들은 사람들 보다는 많이 얻지만 100%불가능하다.
자~ 첫 번째 이유에요. 부처님께서 바깥쪽으로 치달리는 색 성 향 미 촉 법  바깥쪽에 조건으로 생기는 이 느낌을 버려 라는 이걸 갖고 있는 한은 괴로움은 완전히 없앨 수 는 없고,  괴로움 반 즐거움반이다. 이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요  우리가 괴로움을 없애려 이 공부하는데 더 행복해 진다는 거죠.

 그래서 느낌을 없앨수록  더 즐거운 느낌이 생긴다는 거예요. 모순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러냐하면 바깥에 색 성 향 미 촉 법 에 접촉에 의해 생긴 즐거운 느낌보다도 그것을 접어서 바깥쪽으로 치달리지 않고 운송으로 향해서 생기는 첫 번째 초선 초선에 희열의 느낌은 지금 바깥쪽  세간에 세상에서 접촉에 의해서 생긴 느낌보다 훨씬 다른 차원의 훨씬 더 큰 즐거움 이다.라고 하셨잖아요.  

부처님께서 그런데 이게 둘 다를 다룰 수 있으면 좋은데, 둘 다는 반비례 하는 거예요.  바깥쪽에 감각적 욕망에 느낌을 갖는 한은 그게 거칠게 가지면 가질수록 내면으로 향할 수 없어요. 바깥으로 치달리지 초선이 될 수 없다는 거죠. 문제는 바깥쪽으로부터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치달리는 안의비설신의를 단속을 해서, 사띠로 정신 차려서 단속을 해서 내면으로 향해야지만 초선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경에서 말씀하시잖아요.  경에서는  더  수승한 것 이렇게  나와 있어요.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른 차원이다. 얘기해 드린 것이 바깥쪽에 즐거운 것과 삼매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예요. 이 즐거움은 행복은 그래서 초선에서 생긴 즐거움은  부처님께서 바깥쪽에 치달리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 하신 거고 또 더 나아가서 이선에서 생긴 즐거운  느낌은 앞에 초선과 또 다른 차원의 더 큰 즐거움이다.

3선에서 생긴 즐거움은 2선보다 또 다른 차원의 더 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사선
오선, 육선, 칠선, 팔선,  여덟 번째 삼매까지 가신 다음에 상수멸 마지막 궁극의 경지 열반에서 생긴 즐거움은, 앞에 팔선보다 더욱더 큰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시는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외도들은 아마도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외도들은 부처님 이라고 말씀안하시죠.
고따마 존자는 모순을 이야기 한다. 상수멸은 느낌과 인식이 완전히 멸한 것인데, 또 그러면서 최고의 즐거움 이다. 라고 모순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 제자는 외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느낌만을 즐거움이다. 라고 안하시고, 느낌을 완전히 멸해서 괴로움이 완전히 없는 것도 궁극의 지복이다. 라고 말씀 하신다.
자~~돌아옵니다. 그러니 두 가지를 이야기 해드렸는데.....

 두 번째 이야기가 이해되시죠. 거친 바깥에서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즐기는 한은, 즐거움 반 괴로움 반, 이게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바깥에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버리기 시작 하면 삼매를 닦으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행복.

2선은 훨씬 더 큰 행복 이렇게 궁극에까지 간다는 거예요. 만약 존재로 따진다면 살아서 삼매가 되면, 신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살아서 저 천당 가고 천국 가서 일단 잘 살자가 아니구요.  여기서 괴로움은 저 대지만큼 있었다면, 저 괴로움이 이제는  대추씨만큼 밖에 없는 거예요.
살아서 이미  신들보다  더 높은 경지가 되었는 거죠.  괴로움을 많이 없앴는 거죠. 이래서 이런 이유로 부처님께서 바깥으로 치달리는 느낌을 접어라 이러시는 겁니다.  또 달리 번외로 이야기 해 보면, 느낌을 느낄수록 개체가 더욱더 확고해 져요. 자 눈이 무엇을 보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면요. 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어요. 쉽게 이야기 하죠. 몸뚱아리가 감촉을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동안은 몸이 있고 몸의 경계가 분명해져요 여기까지가 “몸이다‘  라고, 몸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놓아 버렸부면, 몸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시작 합니다. 어디까지가 몸인지 모르게 되요. 실지 이야기 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거와, 나라는 거와 색 성 향 미 촉 법을 자꾸 접촉 시켜서, 느낌이 자꾸 커질수록 나라는 애가 요만해 져서, 환경적으로 분명한 애가 생겨요. 그런데 그것을 놓기 시작하면 나의 한계가 불분명해져가요. 실지로 나의 몸뚱아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편재 되어 가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번외 이야기였지만, 이런 측면으로 알 수 있는 게 안 이 비 설 신 의와  색 성 향 미 촉 법의 접촉에 의한 느낌을 버리면, 버릴수록 많은 개체가 사라지고 더욱더 무한해진다 같다. 이러는 거죠.

자~ 느낌은 그렇고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애초에는 저기 저쪽 갈애를 보시면 아직 저기는 시제품 같은 거예요. 그 느낌이 뭔지 모를 때 처음 접촉 하는 거에 의해서, 갈애가 생긴다는 거죠, 갈애는 갈증 같은 거 생각 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느낌이 생기니까 사과를 보면 느낌이 생기면, 쉽게 저거 따 먹으러 가고 싶다.
이런 거죠. 취착은 더 센 거죠. 강하게 움켜쥠 저거 따먹어야 겠다.  이런 겁니다. 갈애가 생기면 취착은 더 강하게 움켜짐이니까 강하게 움켜쥐고 싶겠죠? 그렇게 되니까 강하게 움켜진 것들은 존재가 아니라, 뭔가 많은 것들을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강하게 움켜쥐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욕망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다시 존재로 나오는거죠. 욕계나 색계나 비색계로, 갈애는 크게 부처님께서 세 가지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2. 존재에 대한 갈애.
3. 존재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 이렇게 말씀 해 주셨어요,

즉, 감각적 욕망은 빠짐없이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갈애 이죠. 그런데 존재에 대한 갈애는 좀 달라요.  두 번째 존재에 대한 갈애는 대다수의 중생들이 갖고 있는 더욱더 존재하고픈 인데요. 세 번째는 단멸 하고 싶은 것인데요, 자살하고 싶다 죽고프다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다. 이런 존재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 갈애를 말씀 하셨습니다. 통론 이죠 여기다 들어가는 겁니다.

취착은 저번에 칠판에 적었는데 좀 다르죠.  취착은 첫 번째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2. 견해에 대한 취착
3.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
4. 자아 교리에 대한 취착,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은 모든 중생의 빠짐없는 욕망 이예요,
모든 중생은 아니겠군요. 왜냐하면 불 환자, 아나함, 여기는 다시는 안 오고, 천상세계중 제일 높은데 가 끝없는 높은 세계에 가서, 거기서 열반이하 되신 성자님 이분은 감각적 욕망이 없습니다. 성냄도 없고, 그런데 뭐가 있냐면 천상세계에 대한 집착 이게 있으시고 자만, 이 자만은 우리식의 자만이 아니라 아직 경계가 있는 존재로 존재하는 들뜸, 무명, 이렇게 있는 거죠.

돌아와서  1.취착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있고요 2. 견해에 대한 취착, 이게 뭐냐면 중생은 모든 견해가, 중생은 있다는 거예요. 예 ~ 중생은 모든 견해가 있다는 거예요. 해탈한 분만 견해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견해로 내가 옳네, 그대가 틀리네, 이러고 견해로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부처님께서 이 모든 견해가 왜 생기냐 하면 색 수 상 행식 을 소멸하지 못한 존재에게는 견해가 생긴다. 몸뚱아리가 있고, 느낌이 있고, 인식이 있고, 의도들이 있고, 아뢰야식이 있는 존재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색 수 상 행 식을 멸한 존재에게는 견해가 생기겠는가? 라고 하십니다.
살아서 몸뚱아리 소멸 했고, 느낌 소멸했고, 인식 소멸했고, 의도 모든 의도가 하나도 없다. 아뢰야식 소멸 했는데, 견해가 있겠습니까? 즉, 쉽게 이야기 하면 내가 있을 때 견해가 있지 내가 없는데, 무슨 견해가 있겠냐는 거죠. 그래서 견해에 대한 취착은 중생들은 다 있는데, 부처님 말씀은 버려라. 견해를 갖는 건 오직 하나 불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라. 그러신 겁니다. 팔정도 그것도 나중에 닦아졌다 하면 바른 견해도 초월이 되는 거죠.

그리고 세 번째로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인데요. 이걸 잘못 생각하면 묘한건데 부처님도 계율 지켜라 그랬는데 사실은 중요 한 거 열 가지 만 한 거지 수백 가지 잖아요, 계율이...... 흔히 부처님도 지켜라 하셨는데. 지금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이라 한 것은  나쁜 의미로 이야기 한 겁니다. 버려라. 이런 말씀으로 하신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것은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좀 봐야 될 껀데요. 일단 계율 전에 의례의식부터 이야기 하죠, 의례의식은 허례허식 같은 거  예요.

의례의식을 안한다는 이야기가 아니 예요. 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조상에 대한 제사도 지내야 된다. 조상도 있다.  이런 말씀 다 하시니까, 그리고 브라만들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공덕이 많다. 그러셨다 말이어요. 그런데 의례의식에 취착을 버려라. 이것으로 두 가지 의미인데 여기에 너무 구속되어 있다. 두 번째로는 이것으로 해 탈할 꺼다. 생각 한다면, 이것으로 해탈 못한다. 과정에 좋은 과정인 거예요. 과정까지는 천상도 갈수 있고 좋은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아까 뭐 계율 이런 건데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적이란 좀 달라요.

이 계율 의례의식이 좀 전의 시대 상황 힌두교나 브라만들이 어떻게 가 있었나 하면, 소를 닮는 고행을 하는 이런 것을 지키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소똥을 먹고, 소처럼 기어 다니고, 이랬을 때 부처님께서 그런 걸로 최고 잘 되어 봐야 소다. 완성이 되면 전에 드렸던 말씀이에요. 완성이 안 되면 지옥이다. 그래서 못 믿겠습니다. 하니까, 실지로 경에 부처님께서 공동묘지에서 불러냅니다. 나와라...너 지금 어디냐? 하니까 지옥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당시 계율적으로 이야기 하면 데바닷따 아시죠? 부처님 사촌이셨고, 왕자 출신이죠.

초기에 부처님 그 나중에 아난존자님들이 출가할 때, 샥가족들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출가 하셨는데, 그중에 계신 데바닷따에요. 부처님 나중에 상처 입힌 나쁜 사람, 이 사람이 부처님께 가서 나중에 세월이 많이 지난 다음에 부처님 승가를 좀 저에게 넘겨주세요. 하고 데바닷따가 부처님께 말씀 하셨다. 부처님께서 꾸짖었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오백 명의 사문을 데리고 승가를 나간다, 나가기 전인가 후인가 그쯤 이야기인데, 데바닷따가 부처님께서 자기에게 승가를 안 물려주니까, 꾀를 내었어요. 시해하기 전후인지 생각이 잘 안나요.

더 엄한 계율을 만들었어요. 부처님은 계율을 잘 안 지키신다. 이러면서 뺏어 올려고 명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계율이냐 하면, 비가 오더라도 집 같은데 들어가서 있을 수 없다. 대충 이런 말씀입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비가 오던, 뭐하던 나무아래서 비를 맞아야 한다. 그런 거 외에 여러 가지 있어도 부처님께서 수용하셨어요. 안거가 아닌 때에는 비를 맞아도 된다. 무조건 들어가면 안 된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거 외에 기억 안 나는 건데 말도 안 되는 계율들을 고행의식의 계율들을 만든 거죠.

부처님은 고행을 반대 하셨잖아요. 즐거움을 탐닉 하는 거와, 자기를 학대 하는 것은, 도수만 다른 것이지 똑같은 거다. 그러셨어요. 왜 자기를 학대 하냐? 학대 안하고 해탈 할 수 있는데, 그러셨기 때문에 지금 데바닷따가 만든 사실 이런 계율은 말이 안 되는 거죠. 우기때 비 쫄딱 맞으면 사람이 빨리 죽을 수 있잖아요.. 감기 걸려서.......
부처님께서 식사도 수용하시고 탁발도 이루신 것이 식사가 중요해서 아니라, 해탈하기 위해서 목숨을 유지해야 하니까 이런 여러 가지 필수품을 수용 하신 거잖아요.
해탈이 목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비 쫄딱 맞고 감기 걸릴 이유가 없죠.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계율로 데바닷따가 그렇게 했죠. 그런 측면의 계율들로 해탈할 것이다 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든요.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 그리고 또 제가 추론이지만 계율만 갖고 해탈 할 수는 없어요.

말이좀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계율 100%는 해탈 맞아요. 경에 계셔요. 제일 낮은 단계 해탈 이예요. 해탈 중에  그런데 왜 제가 계율만 가지고 해탈이 불가능 하다고 그랬나 하면, 경에 그렇게 계시기 때문이에요. 경에 계율 삼매 반야 할 때 말이죠. 삼매가 어느 정도 안 된 사람이 계율 100%는 안 된다고 계셔요. 그럼 왜 그럴 까요?  죄악입니다. 지금 아까 이야기 한 것 다시 돌아옵니다.  

느낌인데 계정혜 삼매를 계율을 부처님이 조금만 어느 정도 하고, 삼매를 꼭 닦으라고 하신 겁니다. 계율 100% 안되기 때문에, 계율 되고 삼매하고 반야의 무더기 본성의 무더기가 조금 드러나면, 계율 더 잘되고, 삼매 더 잘되고, 이런 순환성 고리인데.....
좀 전에 아까 느낌으로 돌아와서 바깥의 감각적 욕망을 버려라 하면 누가 버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더 수승한 초선의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맛보았을 때 이선에 삼선에, 이것 분명하구나!

훨씬 더 큰 불성의 행복이 있으니까, 바깥의 감각적 욕망을 버려야 지가 되는 거죠, 알기 쉽게 설명하면, 지금 내손 안에 떡이 하나 있어요. 이 떡보다 더 큰 것은 세상에 없어요.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떡보다 큰 게 열배나 이십 배나 큰 더 맛있는 찐빵이 있다. 말입니다. 이걸 버리면 그것을 준데요. 그때는 버려야죠. 이해 되셨나요?

왜냐면  더 다음 미묘하죠. 원숭이가 실지로 그릇되잖아요?  원숭이 요만큼 손에 구멍 뚫어놓고, 손 집어넣었단 말이에요. 바나나 있어갔고, 잡았는데 안 나온다 말이예요.  얘 머리 있는 얘거든요.
못 빠져 나온 되요. 바나나에 대한 욕망 때문에 놓으면 나오는데, 그래 지금 우리가 떡 하나 집었는데, 세상에 이거 하나 밖에 없다 말이죠. 굶은 사람은 열 명 있고, 도저히 못 놓는다 말입니다. 그런데 옆에 찐빵을 누가 열배짜리 갖다 놓았어요.
그러면 놓을까요? 안 놓을까요?  얼른 놓자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돌아옵니다.

아까 삼매나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나면, 더 지고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계율을 더 지키고 버리는 거죠. 그게 안 드러나면 못 버려요. 그래 실지로 경에서 부처님께서 삼매를 열심히 지으라 한 것이 삼매가 안 되면, 법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신 거예요. 법이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거예요.

하나는 삼매가 안 되면 본성이 안 드러나기 때문에, 알고 볾이 안 드러나기 때문에..., 두 번째는 더 수승한 행복이 없는데, 왜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는 거죠. 더 수승한 행복이 없다면, 감각적 욕망이 최고거든요. 아무도 안 버린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 돌아오면 이해 되셨죠? 초선은 감각적 욕망보다 훨씬 더 큰 행복이 있고, 이선은 훨씬 크고, 그런데 훨씬 큰 것은 미리 가르쳐 주셨지만, 법으로 되 보진 않았잖아요. 삼매 안 된 사람은 될 려면 맨 처음에는 계목을 어느 정도 지켜야지만 삼매를 해야지만, 삼매가 된다. 이러신 거예요. 처음에는 머리로 이해해서 부처님 말씀을 믿음으로 쫓아가 보는 거고, 나중에 삼매가 되니까, 분명히 법이 드러나기 시작 하는 거죠.
이때가 뭐냐면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믿음, 부처님 말씀대로 되기 시작했으니까, 자~ 돌아옵니다. 계율 100% 되면 제일 낮은 단계 해탈은 맞는데, 삼매 안하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까 계율만 해서 내가 100% 해탈 하겠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디 가서 제 이야기 뒤에 것만 끊어서 이야기 하면 큰일 납니다.
분명히 저는 앞 뒤 이야기 다 했습니다. 계율 100%면 해탈 맞다. 제일 낮은 단계다. 그런데 계율 하나만 가지고 100%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한겁니다. 계율, 삼매, 반야를 같이 해야지만 100%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번외이야기 잠깐 빠지겠습니다. 5가지 기능을 이야기하셨는게 1. 믿음의 기능 2 정진의 기능 3. 사띠의 기능 4. 삼매의 기능 5, 반야의 기능.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가 불교 말고 다른 종교를 가더라도 계율이 기본이에요. 5가지 기능 중 계율은 꼭 하라 하신 거예요.
계율이 있고, 믿음이 있어도 이 말씀이 사실은 계율이 아닐 거다. 이야기 한 거예요.
100%가 믿음이 있어도 맨 처음은 믿음으로 가더라도 지금 정진, 사띠,  삼매, 반야가 좀 드러나야 지만 경험에 근거한 믿음이 생기는 거거 든요.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여타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 종교에서 계율을 하라는 데도, 조금씩 하는데 어려운 이유가 삼매가 되어야지만, 그 이유를 스스로 알기 때문에 단순히 믿음만 가지고, 계율을 하다보면 지친다 하는 겁니다.

지치는데도 왜 하냐면 거기는 다른 종교보다 뭐하나 보상들이 있잖아요. 지쳐도 갈 수밖에 없는데....  돌아와서 이야기 하는 것은 믿음으로 가더라도 계율에 정진, 사띠, 삼매, 반야를 해야 합니다.  그래 오근 오력 얘기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을 놓아야 되고요. 네 번째가 자아 교리에 대한 취착인데요, 지금 이 이야기는 궁극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궁극은 있습니다. 열반이 궁극인 이유가 열반은 부처님께서 많이 말씀 하시죠,
경에서 불사의 문은 열어 놓았도다. 이렇게 말씀 하시고 불사로 향하고, 불사로 귀결되고, 불사로 완성되는, 또는 불사로 귀결되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고, 불사로 완성되는 죽음이 없는 팔정도를 닦아라. 죽음이 없다.

여기 한번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형성되어진 것이에요. 태어나고 조건 지어지고, 형성되어지고,  만들어 지고,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제행무상 모든 형성 되어진 것들은 변한다. 그래서 괴로움 이다 로 출발 하는건데요. 긍극도 그런데 괴로움이다. 궁극은 지복이다. 형성된 것은 죽음이다. 궁극은 불사다. 궁극은 불사라면 궁극은 형성 되어진 것이 아닌 거죠. 궁극은 항상한 겁니다.


2011년 3월 17일
녹취자 : 예심

'순일스님 법문 > 사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성제 5A (2010-12-29)  (1) 2023.10.10
사성제 4B (2010-12-17)  (0) 2023.10.10
사성제3B (2010-12-15)  (1) 2023.10.10
사성제 3A (2010-12-15)  (0) 2023.10.10
사성제2B (2010-12-3 )  (0)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