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명 경
- 절반 경
- 사리뿟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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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목적 경
- 어떤 비구 경1
- 어떤 비구 경2
- 분석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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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디야 경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수행을 위주로 한 가르침 Mahā-vagga 1
제45주제(S45) 도 상윳따 Magga-saṃyutta 68)
68) 37보리분법에 대해서
이제 여기「도 상윳따」(S45)부터 본서 제6권의 처음에 싣고 있는「성취수단 상윳따」(S51)까지의 일곱 부문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 즉 보리분법(菩提分法, bodhipakkhiyā dhamm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은 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②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③ 네 가지 성취수단[四神足] ④ 다섯 가지 기능[五根] ⑤ 다섯 가지 힘[五力] ⑥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⑦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의 모두 일곱 가지 주제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주제에 포함된 법들을 다 합하면 37가지가 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를 37보리분법이라 불렀다. 한문으로는 보리분법(菩提分法)으로도 옮겼고 조도품(助道品)으로도 옮겨져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CBETA로 검색해보면 보리분법으로 옮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면 보리분법 혹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에 대한 주석서들의 설명을 살펴보자. 먼저 『청정도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깨달음의 편[菩提分, bodhipakikhiya]에 있는 법이라 했다. 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②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③ 네 가지 성취수단[四神足] ④ 다섯 가지 기능[五根] ⑤ 다섯 가지 힘[五力] ⑥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⑦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 - 이 37가지 법들은 깨달음의 편에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깨달았다는 뜻에서 깨달음(bodhi)이라고 이름을 얻은 성스러운 도(ariya-magga,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의 편(pakkha)에 있기 때문이다. 편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도와주는 상태(upakāra-bhāva)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Vis.XXII.33)
비슷한 설명이 『무애해도 주석서』 (PsA.482)에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도와주는 상태'라는 표현을 살려서 중국에서는 조도품(助道品)으로도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주석서 문헌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보리분이라고 했다. 깨달음(bujjhana)이라는 뜻에서 보리(bodhi)라고 하는 이것을 얻은 성자(ariya-puggala)나 혹은 도의 지혜를 가진 자(magga- ñāṇa)의 편에 존재한다고 해서 보리분이라고 한“보리라는 것은 도(혹은 도를 얻은 자)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이다. 그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깨달은 뒤에 고유성질(sabhāva)에 의해서 그 [깨달음의] 편에 존재한다고 해서 보리분이라고 하는데 [네 가지] 마음챙김과 [네 가지] 정진(바른 노력) 등의 법들을 말한다. 이것이 보리분이다.” (DAȚ.iii.63)
“보리분법이란 네 가지 진리[四諦]를 깨달았다고 말해지는 도(혹은 도를 얻은 자)의 지혜의 편에 존재하는 법들이다.” (VbhA.347)
이처럼 여기서 보리(菩提, bodhi)라는 것은 사성제를 깨닫거나 도를 얻은 성자(예류부터 아라한까지)의 지혜나 바른 견해를 뜻하고 보리분법(菩提分法)들 즉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은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들의 편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도와주고 장엄하는 37가지 법들을 말한다. 당연히 아직 성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37가지 보리분법들을 닦아서 성자가 되는 것이며, 이미 성자의 지위를 증득한 분들은 이 37가지 보리분법들을 구족하여 깨달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들에서 보듯이 주석서 문헌들은 모두 이 37보리분법들을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이 구족하는 출세간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비담마나 주석서 문헌들의 입장이다. 아비담마는 실참수행보다는 법수들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이러한 법들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밝히고 정의하는 것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법들은 이미 그 주제어가 깨달음의 편에 속하는 법들이고 깨달은 자들이 구족하는 법들이라서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수행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37보리분법들은 깨달음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법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실참수행을 하려는 불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상윳따 니까야』에 모은 37보리분법에 대한 가르침(S45~S51)에서도 이런 측면이 절대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한편 『청정도론』XXII.39에 의하면 “성스러운 도가 일어나기 전에 세간적인 위빳사나가 일어날 때 이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은 여러 가지 마음들에서 발견되지만 … 이 네 가지 [도의] 지혜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일어날 때 이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은 하나의 마음에서 모두 다 발견된다.”라고 적고 있다.
37보리분법에 대한 설명은 『청정도론』 XXII.33~43과 『아비담마 길라잡이』제7장 §24이하도 참조할 것.
제1장 무명 품 Avijjā-vagga
무명 경(S45:1)69) Avijjā-sutta
69)『앙굿따라 니까야』「명지 경」(A10:105)도 본경과 같은 방법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다만 그곳에는 그릇된 지혜와 그릇된 해탈,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이 각각에 더 나타나는 것이 다르다.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위대한 사십 가지 경」(M117/iii.76) §§34~35도 참조할 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무명이 선구자가 되어70)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일어남으로써
양심 없음과 수치심 없음71)이 이것을 따르게 된다.72)
70) “'선구자가 된다(pubbaṅgamā).'는 것은 함께 생김(sahajāta)과 강하게 의지함(upanissaya)인 두 가지, 측면에서 선구자가 된다는 뜻이다.”(SA.iii.116)
즉 무명과 불선법은 서로가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sahajāta-paccaya]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親依止緣, upanissaya-paccaya]으로 조건이 되어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함께 생긴 조건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8장 §11과 §17과 §20의 해설을 참조할 것.
“'선구자가 된다.'는 것은 앞에서 가는 것(pubbe-carā)을 말한다. 무명은 알지 못하는 특징을 가졌고(aññāṇa-lakkhaṇā) 미혹하게 만듦(sammuyhan-ākāra)을 통해서 대상에 대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함께 결합되어 있는 법(sampayutta-dhamma)들에 대해서 그러한 형태로 수순하기 때문에(tadākāra-anuvidhānatā) 조건이 된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무상이요 부정이요 괴로움이요 무아의 고유성질(sabhāva)을 가진 법들을 항상한 것 등으로 거머쥔다. 이것이 함께 생긴 조건(sahajāta)으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미혹에 압도되어 사악한 행위(pāpa-kiriya)에 있는 위험함(ādīnava)을 보지 못하고 살생 등을 저지르고 남에게 여러 가지 나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함께 생긴 조건(sahajāta)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upanissaya)으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SAT.iii.103)
71) “'양심 없음(ahirika)'이란 도덕관념 없음에 확고한 것(alajjan-ākāra-saṇṭhita)을 말하고 '수치심 없음(anottappa)'이란 [악행에 대한] 두려움 없음에 확고한 것(abhāyan-ākāra-saṇṭhita)을 말한다.”(SA.iii.116)
72) '따르게 된다.'는 Ee: anudeva(Be: anvadev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그것과 함께, 하나가 되어, 그것이 없이 되지 않아서 일어난다(sah'eva ekato'va, na vinā tena uppajjati).” (SA.iii.116)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빠진 현명하지 못한 자에게 삿된 견해가 생긴다.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삿된 사유가 생긴다. 삿된 사유를 하는 자에게 삿된 말이 생긴다. 삿된 말을 하는 자에게 삿된 행위가 생긴다. 삿된 행위를 하는 자에게 삿된 생계가 생긴다. 삿된 생계를 가진 자에게 삿된 정진이 생긴다. 삿된 정진을 하는 자에게 삿된 마음챙김이 생긴다. 삿된 마음챙김을 가진 자에게 삿된 삼매가 생긴다.”
4. “비구들이여, 명지(明知)가 선구자가 되어73) 유익한 법[善法]들이 일어남으로써
양심과 수치심74)이 이것을 따르게 된다.
73) “밝은 측면(sukka-pakkha)에서 보자면, '명지(vijjā)'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지혜(kammassakata-ñāṇa)이다. 여기서도 함께 생김(sahajāta)과 강하게 의지함(upanissaya)인 두 가지 측면에서 선구자가 된다고 알아야 한다.” (SA.iii.117)
74) “'양심(hirī)'이란 도덕관념에 확고한 것(lajjan-ākāra-saṇṭhita)을 말하고 '수치심(ottappa)'이란 [악행에 대한] 두려움에 확고한 것(bhāyan-ākāra-saṇṭhita)을 말한다. 이것은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고 상세한 것은『청겅도론』 (XIV.142)에서 설명되었다.”(SA.iii.117)
비구들이여, 명지를 가진 [2] 현명한 자에게 바른 견해가 생긴다.
바른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사유가 생긴다. 바른 사유를 하는 자에게 바른말이 생긴다. 바른 말을 하는 자에게 바른 행위가 생긴다. 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 바른 생계가 생긴다. 바른 생계를 가진 자에게 바른 정진이 생긴다. 바른 정진을 하는 자에게 바른 마음챙김이 생긴다. 바른 마음챙김을 가진 자에게 바른 삼매가 생긴다. 75)
75) “세간적인 도의 순간(lokiya-magga-kkhaṇa)에는 이 여덟 가지 모두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na ekato sabbāni labbhanti). 그러나 출세간도의 순간(lokuttara-magga-kkhaṇa)에는 함께 일어난다.”(SA.iii.117)
그리고 세간적인 도가 일어날 때 이 여덟 가지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바른 견해는 나머지 일곱 가지 요소 모두에 대해서 안내자가 되고 바른 사유의 직접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지 바른 견해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바른 사유가 일어나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된다. 그리고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함께 다음의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라는 계의 항목의 조건이 된다. 이들 다섯은 함께 다음의 바른 정진과 바른 마음챙김의 토대가 되며, 바른 정진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는 원동력이 된다. 바른 정진과 바른 마음챙김의 결과가 바른 삼매이다.
절반 경(S45:2) Upaḍḍh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한때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나가라까76)라는 삭까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76) Ee에는 Sakkara로 나타나고 있다.
2.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과 사귀는 것77)은 청정범행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77)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각각 kalyāṇa-mittatā, kalyāṇa-sahāyatā, kalyāṇa-sampavaṅkatā를 옮긴 것이며 이 셋은 동의어다.
“아난다 장로가 혼자 있는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 사문의 법은 좋은 친구(kalyāṇa-mitta)와 각자의 남자다운 노력(paccatta-purisa-kāra) 때문에 성취된다. 그러므로 절반(upaḍḍha)은 좋은 친구에서 기인하고 절반은 각자의 남자다운 노력에서 기인한다.'라고”(SA.i.156)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과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이다.
아난다여,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78)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그는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79)를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지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80)
78)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를 주격으로 환원하면 kalyāṇamitto bhikkhu가 된다. 이것을 C.Rh.D는 'a bhikkhu who is a friend of righteosness'(KS 1:113)로 옮겼고, Woodward는 'a monk who is a friend of what is lovely'(KS 5:2). Ireland = 'a bhikkhu who is a friend of the good (SN-Anth 1:75)로 옮겼다. 보디 스님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경우에 kalyāṇa-mitta는 소유복합어[有財釋, bahuvṛīhi]로 bhikkhu를 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비구가 아니라 '좋은 친구를 가진 비구'라는 뜻이다. 보디 스님의 설명처럼 yassa bhikkhuno kalyāṇamittaṃ hoti(yo bhikkhu kalyāṇassa mittaṃ hoti가 아님), so kalyaṇamitto bhikkhū ti vuccati로 해석해야한다.
좋은 친구의 중요성은 아래 S45:49, 63, 77과 『앙굿따라 니까야』「깨달음 경」(A9:1/iv.351 ~ 353 = Ud.34~37)을 참조할 것.
79) 여기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 = 팔정도]'는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를 직역한 것이다. 니까야에서 팔정도의 표제어는 모두 이렇게 나타난다. 한역하면 팔지성도(八支聖道)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우리에게는 팔정도로 정착이 되었을까? 이것은 한역 4아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팔정도는 한역 『장아함』의 「십상경」(十上經, 『디가 니까야』 「십상경」(D34)에 해당함)에서는 현성팔도(賢聖八道)로 옮겨졌으며, 역시 『장아함』의 「산타나경」(散陀那經, 『디가 니까야』「우둠바리까 사자후경」(D25)에 해당함)에서는 팔성도(八聖道)로 옮겨졌다. 그러나 한역 『중아함』과 『잡아함』과 『증일아함』에 포함된 여러 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팔정도(八正道)로 옮겨져서 정착이 되었고 그 외 여러 단행본 경들과 대승경전들과 논서들에서도 팔정도로 정착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팔정도로 완전히 정착이 된 것이다. 내용으로 볼 때 정견부터 정정까지 모두 정(正)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팔정도로 의역한 것은 올바름[正]을 부각시킨 번역어라 할 수 있겠다.
역자는 본서 전체에서 경의 원문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八正道]”로 직역을 하였지만 주해 등에서 팔정도를 언급할 때는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팔정도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이 '도'로 옮기고 있는 magga와 '도닦음'으로 옮기고 있는 paṭipadā의 차이점이다.
여기서 paṭipadā는 prati(~에 대하여)+√pad(to go)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란 의미에서 ‘길도, 도닦음' 등을 뜻한다. 이 paṭipadā는 일반적으로 道로 옮기는 magga와 동의어로 취급한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magga는 여기서 보듯이 팔정도의 표제어로 즉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초기불전들에서 사성제의 도성제는 예외 없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dukkha-nirodha-gaminı patipadā)'으로 나타나지만(본서 제6권 「진리 상윳따」(S56)의 여러 경들을 참조할 것) 주석서 문헌들에서 사성제의 도성제는 대부분 magga-sacca(도의 진리, 道)로 줄여서 정착시키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도성제로 정착이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니까야에서 magga는 도(道, magga)와 과(果, phala)의 문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의 도는 모두 magga로 나타나며 이를 토대로 증득된 예류과부터 아라한과까지의 과는 phala(결실, 열매)라 불린다.
반면에 paṭipadā는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의 내용을 말할 때 초기불전에서는 예외 없이 모두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대부분 이것을 magga-sacca(도의 진리, 道諦)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중도(中道)는 'majjhimā(중간) paṭipadā(도닦음)'의 역어라는 것이다. 중도의 도는 magga가 아니다. 본서 제6권 「초전법륜 경」(S56:11) §3 등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라고 나타나고 있으며 이 중도의 내용은 §4에서 보듯이 바로 팔정도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초기불전 전체에서 중도는 항상 팔정도이다. 한 곳에서는 37보리분법을 중도라고 들고 있는데 물론 37보리분법은 팔정도를 정점으로 하는 수행체계이다. 이처럼 paṭipadā는 실천적 의미가 강하며, 위에서 보았듯이 paṭipadāā는 실제로 길위를 걸어가는 것, 혹은 실제 길을 밟고 지나가는 것(√pad, to go)을 뜻하는 어원에서 파생된 술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것을 '도닦음'으로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상좌부에서 수행의 세 가지 과정으로 언급하는 ① 교학(빠리얏띠, pariyatti, 배움) ② 도닦음(빠띠빳띠, paṭipatti, 수행) ③ 통찰(빠띠웨다. paṭivedha, 꿰뚫음)의 두 번째인 paṭipatti도 같은 어원(prati+√pad)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paṭipadā와 동의어이다. 이처럼 magga와 paṭipadā는 동의어로 간주하지만 magga는 도닦음을 통해서 증득된 도의 경지, 즉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의 문맥에서 많이 쓰이고 팔정도나 도성제의 표제어로 쓰이며, paṭipadā는 중도로 표방되는 실제적인 팔정도 수행 즉 도닦음을 강조하는 어법으로 쓰이고 있다.
80) “자식에게 '어머니로부터는 이만큼의 이익이 생기고 아버지로부터는 이만큼의 이익이 생긴다.'라고 분리해서(vinibbhoga)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친구로부터는 이만큼의 바른 견해 등이 생기고 각자의 남자다운 노력으로부터는 이만큼이 생긴다고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세존께서는 실제로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와 세 가지 명지(삼명)와 육신통은 모두 좋은 친구에 뿌리한 것(kalyāṇamitta-mūlaka)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SA.i.157)
4. “아난다여, 그러면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어떻게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닦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짓는가?
아난다여, 여기81) 비구는 떨쳐버림82)을 의지하고83)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84)으로 기우는85) 바른 견해를 닦는다.
81) 여기에 나타나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와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와 '소멸을 의지하고'와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은 각각 viveka-nissita, virāga-nissita, nirodha-nissita, vossagga-pariṇāmi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떨쳐버림을 의지하는(viveka-nissita)' 정형구로 여기 『상윳따 니까야』5권의 도처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위방가』 (Vbh.236)에서도 팔정도의 구성요소로 첨부되어 나타난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떨쳐버림(viveka)', '탐욕의 빛바램(virāga)', '소멸(nirodha)'의 이 셋은 열반의 이름이다. 열반은 재생의 근거를 떨쳐버렸기 때문에(upadhi-vivekattā) 떨쳐버림이요, 그렇게 해서 탐욕(rāga) 등이 빛바랬다고 해서 탐욕의 빛바램이요, 소멸했다고 해서 소멸이다.”(DA.iii.1019)
한편 본서 「비구 경」(S46:5)에 해당하는 복주서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라는 구문으로 모든 도의 역할(magga-kicca)과 과(phala)를 보이신 것이다. '소멸을 의지하고'라는 구문으로는 열반의 실현(nibbāna-sacchikiriyā)을 말씀하신 것이다.”(SAȚ.ii.130)라고 설명하고 있다.
82) 주석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떨쳐버림(viveka)을 설하고 있다.
①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떨쳐버림(tadaṅga-viveka, 위빳사나를 닦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시적인 떨쳐버림), ② 억압에 의한 떨쳐버림(vikkham-bhana-viveka, 禪의 증득에서 생기는 일시적인 떨쳐버림), ③ 근절에 의한 떨쳐버림(samuccheda-viveka, 출세간도의 증득에 의한 떨쳐버림), ④ 가라앉힘에 의한 떨쳐버림(paṭippassaddhi-viveka, 출세간과의 증득에 의한 떨쳐버림), ⑤ 완전히 벗어남에 의한 떨쳐버림(nissaraṇa-viveka, 열반의 실현에 의한 떨쳐버림)(SA.i.158)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여기서 '떨쳐버림'으로 옮긴 viveka를 문맥에 따라서 '멀리 여읨'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83) “'여기서 떨쳐버림을 의지한(viveka-nissita) 바른 견해를 닦는다.'는 것은 ①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떨쳐버림(tadaṅga-viveka)과 ③ 근절에 의한 떨쳐버림(samuccheda-viveka)과 ⑤ 완전히 벗어남에 의한 떨쳐버림(nissaraṇa-viveka)에 의지하여 바른 견해를 닦는다는 뜻이라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를 닦는데 몰두한 수행자(ariya-magga-bhāvana-anuyutta yogi)는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는 역할(kicca)로는 ①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떨쳐버림에 의지하고, 의향(ajjhāsaya)으로는 ⑤ 완전히 벗어남에 의한 떨쳐버림에 의지하여 바른 견해를 닦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의 시간(magga-kāla)에는 역할로는 ③ 근절에 의한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대상(ārammaṇa)으로는 ⑤ 완전히 벗어남에 의한 떨쳐버림을 의지하여 바른 견해를 닦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함(virāga-nissita)'과 '소멸을 의지함(nirodha-nissita)'에도 적용된다.”(SA.iii.158)
84) “'철저한 버림(vossagga)'은 두 가지이니 버림에 의한 철저한 버림(pariccāga-vossagga)과 들어감에 의한 철저한 버림(pakkhandana-vossagga)이다.
① 버림에 의한 철저한 버림이란 위빳사나의 순간(vipassanā-kkhaṇa)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오염원을 제거(kilesa-ppahāna)하고, 도의 순간(magga-kkhaṇa)에는 근절에 의하여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②들어감에 의한 철저한 버림이란 위빳사나의 순간에는 그것으로 기욺(tanninna-bhāva)에 의해서 열반으로 들어가고(nibbāna-pakkhandana), 도의 순간에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서(ārammaṇa-karaṇa)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이 세간적인 것(즉 위빳사나)과 출세간적인 것(즉 도)이 섞인(lokiya-lokuttara-missaka) 경우에 다 적합하다(attha-vaṇṇana). 여기서 바른 견해는 위에서 설한 대로 오염원을 제거하고(pariccajati) 열반에 들어가기(pakkhandati) 때문이다.”(SA.i.159)
85)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vossagga-pariṇāmi)'이란 철저한 버림을 위해서 기울고 잘 익는다.(paripakka)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성스러운 도를 닦는데 몰두한 비구는 그의 바른 견해가 오염원을 제거하는 철저한 버림을 위하고(kilesa-pariccāga-vossagg-attha) 열반에 들어가는 철저한 버림을 위해서(nibbāna-pakkhandana-vossagg-attha) 기울고 잘 익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팔정도의 나머지 구성요소에도 다 적용된다.” (SA.i.159)
철저한 버림(vossāga)과 같은 어근(√sṛj, to send forth)에서 파생된 술어로 놓아버림(paṭinissagga)이 있다. 놓아버림이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유위법들이 모두 무상함을 통찰해 들어가서 오염원들을 놓아버리는 수행을 뜻하는 것이라면, 철저한 버림은 여기서 보듯이 모든 취착이 완전히 버려져서 도의 목적지인 열반에 아주 가까워진 경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본서 제6권 「하나의 법 경」(S54:1) §8에서 놓아버림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의 16단계 가운데서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술어로 쓰이고 있다. 물론이 경우에 그곳의 주석서(S54:1 §8의 주해 참조)는 철저한 버림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경에서 철저한 버림과 놓아버림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바른 사유를 닦는다. … 바른 말을 닦는다. … 바른 행위를 닦는다. …
바른 생계를 닦는다. … 바른 정진을 닦는다. … 바른 마음챙김을 닦는다.
… 바른 삼매를 닦는다. 86)
86) 팔정도의 여덟 가지 구성요소에 대한 설명은 본서 「분석 경」(S45:8)과 주해들을 참조할 것.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이러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닦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짓는다.”
5. “아난다여, [3]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난다여, 나(세존)를 좋은 친구로 삼아서,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들은 태어남으로부터 벗어나고,
늙기 마련인 중생들이 늙음으로부터 벗어나고,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이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죽기 마련인 중생들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에 빠지기 마련인 중생들이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87)
87) 본경의 내용 전체는 본서 제1권 「불방일 경」2(S3:18) §§4~7에서 세존께서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 법을 설하시는 가운데 그대로 인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사리뿟따 경(S45:3) Sāriputta-sutta
1. <사왓티의 아나타벤디까 원림(급고독원)에서>
2.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에 해당합니다.”88)
88) “아난다 장로는 제자가 완성해야 할 지혜(sāvaka-pāramī-ñāṇa)의 꼭대기(matthaka)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의 청정범행(magga-brahma-cariya)이 전적으로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kalyāṇa-mitta-sannissaya)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법의 장군(dhamma-senāpati, 사리뿟따 존자)은 제자가 완성해야 할 지혜의 꼭대기에 서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알았다(aññāsi).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SA..iii.118)
4. “장하고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사리뿟따여,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이다.
사리뿟따여,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그는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를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 지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5. “사리뿟따여, 그러면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어떻게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닦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짓는가?
…
[4] <이하 앞의「절반 경」 (S45:2)과 같은 내용임.>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바른 견해를 닦는다.
… 바른 사유를 닦는다. … 바른 말을 닦는다. … 바른 행위를 닦는다. …
바른 생계를 닦는다. … 바른 정진을 닦는다. … 바른 마음챙김을 닦는다.
… 바른 삼매를 닦는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비구가 좋은 친구와 사귀고 좋은 동료와 사귀고 좋은 벗과 사귀면 이러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닦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많이 [공부]짓는다.”
5. “사리뿟따여,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여, 나(세존)를 좋은 친구로 삼아서,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들은 태어남으로부터 벗어나고,
늙기 마련인 중생들이 늙음으로부터 벗어나고,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이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죽기 마련인 중생들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에 빠지기 마련인 중생들이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라문 경(S45:4) Brāhmaṇa-sutta
2. 그때 아난다 존자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걸식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아난다 존자는 자눗소니 바라문89)이 암말이 끄는
전체가 흰 마차를 타고 사왓티를 나가는 것을 보았다.
89) 자눗소니 바라문(Jāṇussonī brāhmaṇa)은 꼬살라의 유명한 바라문 마을이었던 잇차낭깔라(Icchānaṅkala 혹은 Icchānaṅgala)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궁중제관(purohita)이었다. 주석서에 의하면 자눗소니는 그의 부모가 지어준 개인 이름이 아니라 꼬살라 왕이 지은 궁중제관의 서열을 나타내는 작위명이라고 한다.(MA.i.109) 『맛지마 니까야』「두려움과 공포 경」(Bhayabherava Sutta, M4)과 『앙굿따라 니까야』 「무외 경」(A4:184) 등 적지 않은 경들이 그와 세존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그는 세존에 대한 큰 신뢰를 가진 재가신도였다.
참으로 그것은 흰 장신구를 단 흰 말에 흰 멍에를 얹었으며, 흰 장식을 한 흰 수레에,
흰 고삐에, 흰 몰이막대에, 흰 일산에, 흰 터번에, 흰 옷에, 흰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흰 부채로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존자들이여, 참으로 저 마차는 신령스럽습니다. 참으로 저 마차는 신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90)라고 말했다.
90) 여기서 '신령스럽다'는 brahma를 옮긴 것이고 '신령스러운 마차'는 brahma-yā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신령스러움(brahama)'은 으뜸과 동의어(seṭṭha-adhivacana)다. '신령스러운 마차(brahma-yāna)'란 으뜸가는마차(seṭṭha-yāna)라는 뜻이다.”(SA.iii.120)라고 설명하고 있다.
3. 그때 아난다 존자는 사왓티에서 걸식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걸식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5]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걸식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자눗소니 바라문이 암말이 끄는 전체가 흰 마차를 타고 사왓티를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흰 장신구를 단 흰 말에 멍에를 얹었으며, 흰 장식을 한 흰 수레에, 흰 고삐에, 흰 몰이 막대에, 흰 일산에, 흰 터번에, 흰 옷에, 흰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흰 부채로 부채질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존자들이여, 참으로 저 마차는 신령스럽습니다.
참으로 저 마차는 신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이 법과 율에서도 신령스러운 마차를 천명할 수가 있습니까?”
“아난다여, 천명할 수 있다. 아난다여, 신령스러운 마차는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법의 마차라고도 하고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라고도 한다.”
4. “아난다여, 바른 견해를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탐욕을 길들임으로 귀결되고, 성냄을 길들임으로 귀결되고, 어리석음을 길들임으로 귀결된다.
바른 사유를 … 바른 말을 … 바른 행위를 … 바른 생계를 … 바른 정진을 … 바른 마음챙김을 … 바른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6] 그것은 탐욕을 길들임으로 귀결되고, 성냄을 길들임으로 귀결되고, 어리석음을 길들임으로 귀결된다.”
5. “아난다여,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신령스러운 마차는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를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법의 마차라고도 하고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라고도 한다고 알아야 한다.”
6.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믿음과 통찰지는 그것(마차)의 특질
항상 굳게 매어져 있도다.91)
양심은 몰이막대, 마음은 멍에에 묶는 끈
마음챙김은 주의 깊은 마부 {1}
91) 게송의 문법구조로 보면 첫 번째 게송의 제일 첫 구에 나타나는 관계대명사 yassa는 맨 마지막 게송의 '이것이(etad)'에 걸리고 있다. 역자는 편의상 여기서 한 번 끊어서 옮기고 있다. 또 다른 마차의 비유는 본서 제1권 「요정 경」(S1:46) {150~152}에도 나타나고 있다.
계는 마차의 장신구, 禪은 차축,92) 바퀴는 정진
평온은 짐의 균형을 잡고 무욕은 자리의 깔개 {2}
악의 없음과 해코지 않음과 한거는 그것의 무기
인욕은 갑옷과 방패,93) 유가안은으로 나아가도다. {3}
92) “'禪은 차축(jhān-akkha)'이라는 것은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다섯 가지 禪의 구성요소(jhān-aṅga)를 두고 말한 것이다.”(SA.iii.121)
다섯 가지 선의 구성요소란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인 고찰 [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cittassa ekaggatā = 집중), 한문으로는 심·사·희·락·정 (尋·伺·喜·樂·定) 이다. 이 다섯 가지는 초선의 구성요소이지만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삼매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서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다섯 가지 선의 구성요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18의 [해설], 특히 151쪽의 도표를 참조할 것. 禪 혹은 바른 삼매의 정에 대한 설명은 본서 「분석 경」(S45:8) §11과 주해를 참조할 것.
93) '갑옷과 방패'는 Ee: dhamma-sannāha(법다운 갑옷)과 Be: camma-sannāha(가죽 갑옷) 대신에 Se: vamma-sannāha(갑옷과 갑옷)로 읽어서 조금 의역하여 옮긴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난 위없고 신령스러운 마차94)
지자는 이를 타고 세상을 떠나 필연적으로 승리하도다.” {4}
94)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난(etad attani sambhūtaṃ)'이라고 한 것은 이 도의 마차(magga-yāna)는 자신의 남자다운 노력(purisa-kāra)에 의지해서 자신에게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신령스러운 마차(brahma-yāna)'란 으뜸가는 마차(seṭṭha-yāna)란 뜻이다.”(SA.iii.122)
무슨 목적 경(S45:5) Kimatthiya-sutta
2.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여기 외도 유행승들이 저희들에게
'도반들이여,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저희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도반들이여,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설명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한 것입니까?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7]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한 것입니까?
[세존께서 설하셨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4. “참으로 그러하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설명하면
내가 말한 대로 말한 것이다. 나를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내가 설한 것을 반복한 것이다.
[내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해서 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리고 만일 외도 유행승들이 그대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러면 이러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대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도반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닦음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러한 괴로움을 철저히 알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닦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그대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
어떤 비구 경1(S45:6) Aññatarabhikkhu-sutta
2. 그때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청정범행, 청정범행'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것이 청정범행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청정범행의 완성입니까?”
“비구여, 바로 이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청정범행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8]
비구여, 그리고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이 바로 청정범행의 완성이다.”
어떤 비구 경2(S45:7)
2. 그때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탐욕을 길들임, 성냄을 길들임, 어리석음을 길들임'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탐욕을 길들임, 성냄을 길들임, 어리석음을 길들임은
무엇을 두고 한 말입니까?”
“비구여, 탐욕을 길들임, 성냄을 길들임, 어리석음을 길들임은 바로 열반의 요소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번뇌의 멸진이라 부른다.”95)
95) “'탐욕을 길들임(rāga-vinaya)' 등은 형성되지 않고[無爲, asaṅkhatā] 죽음이 없는(不死, amatā) 열반의 요소(nibbāna-dhātu)의 동의어이다. 그리고 '번뇌의 멸진(āsava-kkhaya)'은 아라한됨(arahatta)을 일컫고, 탐욕을 길들임 등도 역시 아라한됨을 뜻한다.” (SA.iii.123)
4.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불사(不死), 불사'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것이 불사며 도대체 어떤 것이 불사에 이르는 길입니까?”
“비구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을 일러 불사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불사에 이르는 길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분석 경(S45:8) Vibhaṅga-sutta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를
설하고 분석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96)
96) 아래에 나타나는 팔정도의 구성요소에 대한 정의는 『디가 니까야』「대념처경」(D22/ii.311 ~313) §21과 『맛지마 니까야』「진리의 분석 경」(M141/iii.251 ~252) §§23~31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래에 달고 있는 주해들은 역자가 옮긴 「대념처경」(D22)의 주해들 가운데서 뽑은 것이다. 경에 나타나는 팔정도의 구성요소에 대한 정의는 『논장』의 『위방가』 (분별론)에서도 경의 분류방법(Sutanta-bhājanīya)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Vbh.235~236) 그러나 아비담마의 분류방법(Abhidhamma-bhājanīya)에 의하면 팔정도의 구성요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출세간적인 것(lokuttara)으로 여겨지고 있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97)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9]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98)
97) “괴로움에 대한 지혜(dukkhe ñāṇaṃ)라는 등으로 네 가지 진리의 명상주제를 보이셨다. 여기서 처음의 두 가지 진리(고와 집)는 윤회하는 것(vaṭṭa)이고 나중의 둘(멸과 도)은 윤회에서 물러나는 것(vivaṭṭa)이다. 이들 가운데서 비구가 윤회하는 것을 명상주제로 하여 명상하면 윤회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해서는 명상하지 못한다.” (DA.iii.801)
98) “여기서 [괴로움과 일어남의] 두 가지 진리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고, [소멸과 도의] 두 가지는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괴로움의 진리는 일어날 때 분명하다. 몽둥이나 가시 등으로 때릴 때 '아, 괴롭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어남의 진리는 먹고 싶어함 등을 통해서 일어날 때 분명하다. 그러나 특징을 통찰하는 것으로는 이 둘은 모두 심오하다.
이처럼 이 둘은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다.
나머지 둘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마치 우주의 꼭대기를 거머쥐려고 손을 펴는 것과 같고, 무간지옥에 닿으려고 발을 뻗는 것과 같고, 일곱 가닥으로 쪼갠 머리털 끝을 떼어내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이 둘은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네 가지 진리들에 대해서 공부짓는 등을 통해서 처음 단계의 지혜가 일어남을 두고 괴로움에 대한 지혜(dukkhe ñāṇa) 등으로 설하셨다. [그러나] 통찰하는 순간에는 그 지혜는 오직 하나이다.” (DA.iii.802)
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 인가?
비구들이여,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99)
99)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와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는 각각 nekkhamma-saṅkappa, abyāpāda-saṅkappa, avihiṃsā-saṅkappa를 옮긴 것이다.
“출리에 대한 사유 등은 감각적 욕망과 악의와 해코지를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다. 그렇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들 세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로운 사유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사유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라 한다.”(DA.iii.802)
한편 여기서 사유로 옮기고 있는 saṅkappa는 생각이나 일으킨 생각으로 옮기고 있는 vitakka[尋]와 동의어이다.(『앙굿따라 니까야』「사밋디 경」(A9:14) §1 참조) 주석서들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saṅkappā ti vitalkkā - SnA.i.201 등) 『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33 [해설]도 참조할 것.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100)
100) “거짓말을 금하는 것 등도 거짓말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롭고 나쁜 행실을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kusala-veramaṇi)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이라 한다.”(DA.iii.802)
절제(veramaṇi 혹은 virati)는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부터 쓰이는 전문술어로서 팔정도 가운데서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의 셋을 지칭한다. 자세한 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2장 §6을 참조할 것.
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101)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102)
101)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으로 옮긴 원어는 Ee, Be, Se에 모두 다 abrahmacariyā veramaṇī(순결하지 못한 삶을 삼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생활을 완전히 금하는 것으로 비구와 비구니 계목에 속한다. 그러나 「대념처경」(D22) §21과 「진리의 분석 경」(M141) §27과 『분별론』(Vbh.235)등의 같은 부분에는 모두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재가자들이 지키는 계목에 속한다.
그러나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왜 본경에서는 이렇게 나타나는지에 대한설명이 없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경의 이 부분은 주석서 문헌이 생긴 후에 벌어진 필사상의 오기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주석서는 그 이유를 설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자는 「대념처경」(D22) §21 등과 같이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으로 옮겼다.
102) “산목숨을 죽이는 것(살생)을 금하는 것 등도 산목숨을 죽이는 것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세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롭고 나쁜 행실을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행위(正業, sammā-kammanta)'라 한다.” (DA.iii.803)
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103)
103) “'삿된 생계(micchā-ājīva)'란 먹는 것 등을 위해 일어난 몸과 말의 나쁜 행실이다. '제거하고(pahāya)'라는 것은 없애고 라는 말이다. '바른 생계로(sammā-ājīvena)'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칭송하신 생계를 통해서라는 말이다. '생명을 영위한다(jīvitaṃ kappeti).'는 것은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는 말이다. 바른 생계는 음모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일곱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삿된 생계라는 나쁜 행실을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생계(正命, sammā-ājīva]' 라 한다.” (DA.iii.803)
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 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104)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105)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106)
이미 일어난107)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108) 법[法]들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109)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110)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111)
104) “'아직 일어나지 않은(anuppanna)'이라는 것은 '하나의 존재에 대해서나 그와 같은 대상에 대해서 아직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이란 말이다. 남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오, 참으로 나에게는 이런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지 않기를'이라고 이와 같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한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한다.]" (DA.iii.803)
105) “'열의를 생기게 하고(chandaṃ janeti)'라는 것은 그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도닦음을 성취하는 정진의 열의를 생기게 한다는 말이다.” (DA.iii.803)
106) “'애를 쓴다(padahati).'는 것은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은들 무슨 상관이랴.'라고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것이다.”(DA.iii.803)
107) “'이미 일어난(uppanna)'이란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것이다. 이제 이런 것들을 일어나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을 버리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한다.” (DA.iii.803)
108)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anuppanna kusala)'이란 것은 아직 얻지 못한 초선(初禪) 등을 말한다.” (DA.iii.803)
109) “'이미 일어난(uppanna)'이란 것은 이들을 이미 얻은 것이다.”(DA.iii.803)
110) “'지속시키고(ṭhiti)'라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하여 머물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DA.iii.803)
111) “이 바른 정진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움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마음 등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한 역할을 성취하여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하면서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정진이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이라 한다.”(DA.iii.803)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10]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112)
112) “바른 마음챙김 역시 몸 등을 파악하는 마음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한 역할을 성취하여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하면서 오직 하나의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이라 한다.”(DA.iii.803)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오직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 관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관찰이 가라앉혔기앉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관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정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정하고 마음챙기며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神)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을 소멸되었으므로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113)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114)
113) “禪은 예비단계에도 도의 순간에도 여럿이다. 예비단계에는 [禪의] 증득에 따라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여러 가지 도(즉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에 따라 여럿이다. 왜냐하면 어떤 자는 첫 번째 도(예류도)를 초선을 통해서 얻거나 혹은 두 번째 도 등도 초선을 통해 얻거나 혹은 제2선 등 가운데 어느 한 禪을 통해서 얻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첫 번째 도를 제2선 등 가운데 어떤 禪을 통해서 얻기도 하고 두 번째 도 등도 제2선 등 가운데 어떤 선을 통해서 얻기도 하고 초선을 통해서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류도 등의] 네 가지 도는 禪을 통해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전적으로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차이점은 기초가 되는 禪(pādaka-jjhāna)에 의해서 결정된다.
기초가 되는 禪의 결정에 따라 우선 초선을 얻은 자가 초선에서 출정(出定)하여 위빳사나를 할 때 일어난 도가 초선을 통한 것이다. 도의 구성요소와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여기서 성취된다. 제2선에서 출정하여 위빳사나를 할 때 일어난 도가 제2선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여기서 도의 구성요소는 일곱 가지이다. 제3선에서 출정하여 위빳사나를 할 때 일어난 도가 제3선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여기서는 도의 구성요소는 일곱 가지이고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여섯 가지이다. 이 방법은 제4선에서 출정하는 것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적용된다.
무색계에서는 '사종선(四種禪)'과 '오종선(五種禪)'이 일어난다. 이것은 출세간이지 세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했다. 왜 그런가? 여기서도 초선 등의 어떤 禪에서 출정하여 예류도를 얻고는 무색계 [禪]의 증득을 닦은 뒤 그는 무색계에 태어난다. 그 禪을 가진 자에게 그곳에서 세 가지 도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기초가 되는 선에 따라 [도가] 결정된다.
그러나 어떤 장로들은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는 무더기[蘊]이 [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자들은 개인의 성향이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자들은 [도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가 결정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판별은 『청정도론』에서 [도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의 해설에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DA.jii.803~04)
『청정도론』 XXI.83 이하와『아비담마 길라잡이』 808~809쪽도 참조할 것
114)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正定, sammā-samādhi]'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예비단계에서는 세간적이고 나중에는 출세간에 속하는 바른 삼매가 된다고 설하신 것이다.”(DA.iii.804)
꺼끄러기 경(S45:9) Sūka-sutta
3. “비구들이여, 만약 밭벼나 보리의 꺼끄러기가
[위로 향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잘못 향하고 있을 때 손이나 발에 밟히면
그것이 손이나 발을 찔러 피를 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꺼끄러기가 [다른 방향으로] 잘못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잘못 향하고 있는 견해와 잘못 향하고 있는 도를 수행하여 '무명을 찔러버리리라, 명지(明知)115)를 일으키리라, 열반을 실현하리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견해가 잘못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115) “'명지(vijjā)'는 아라한도의 지혜(arahatta-magga-ñāṇa)이다.”(AA.i.55)
『청정도론』에서는 명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명지(vijjā)'란 세 가지 명지[三明]도 있고 여덟 가지 명지[八明]도 있다. 세 가지 명지는 『맛지마 니까야』「두려움과 공포 경」(M4/i.22 이하)에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하고 여덟 가지는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D3/i.100 이하)에서 설한 대로 알아야 한다. 또 위빳사나의 지혜( 「사문과경」D2 §83)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통(D2 §85)과 함께 여섯 가지 특별한 지혜[六神通]를 더하여 여덟 가지의 명지를 설하셨다.”(『청정도론』 VI.30 ~31)
즉, 천안통, 천이통, 신족통, 타심통, 숙명통, 누진통의 육신통 가운데 뒤의 셋을 세 가지 명지(삼명)라 하고, 이 육신통에다 위빳사나의 지혜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통을 포함시키면 8가지 명지가 된다. 8가지 명지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 제1권 「사문과경」(D2) §§83~98을 참조할 것.
4. “비구들이여, 만약 밭벼나 보리의 꺼끄러기가 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때 손이나 발에 밟히면 그것이 손이나 발을 찔러 손이나 발에 피를 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꺼끄러기가 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11] 그와 마찬가지로 바르게 향하고 있는 견해와 바르게 향하고 있는 도를 수행하여
'무명을 찔러버리리라. 명지를 일으키리라, 열반을 실현하리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견해가 바르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바르게 향하고 있는 견해와 바르게 향하고 있는
도를 수행하여 무명을 찌르고 명지를 일으키고 열반을 실현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바른 견해를 닦는다.
바른 사유를 닦는다. … 바른 말을 닦는다. … 바른 행위를 닦는다. … 바른 생계를 닦는다. … 바른 정진을 닦는다. … 바른 마음챙김을 닦는다. … 바른 삼매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그 비구는 바르게 향하고 있는 견해와 바르게 향하고 있는 도를 수행하여 무명을 찌르고 명지를 일으키고 열반을 실현한다.”
난디야 경(S45:10) Nandiya-sutta
2. 그때 난디야 유행승116)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난디야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116)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난디야 유행승(Nandiya paribbājaka)이 누구인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초기불전에는 세 명의 난디야가 나타난다. 본서 제6권 「난디야 경」(S55.40)과 『앙굿따라 니까야』「난디야 경」(A11:14)에 나타나는 삭까 사람 난디야(Nandiya Sakka)와, 아누룻다(Anuruddha)존자와 낌빌라(Kimbila) 존자와 함께 『맛지마 니까야』「짧은 고싱가살라 경」 (M31) 등에서 언급되는 난디야 존자(āyasmā Nandiya)와, 본경의 난디야 유행승이다.
3 “고따마 존자시여, 얼마나 많은 법들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열반으로 가게 되고 열반을 목적지로 하게 되고 열반을 귀결점으로 삼게 됩니까?”
4. “난디야여, 여덟 가지 법들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열반으로 가게 되고
열반을 목적지로 하게 되고 열반을 귀결점으로 삼게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난디야여, 이러한 여덟 가지 법들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열반으로 가게 되고
열반을 목적지로 하게 되고 열반을 귀결점으로 삼게 된다.”
5. 이렇게 말씀하시자 난디야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12]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청신사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제1장 무명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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