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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경(S12:11) Āhāra-sutta
3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74) 중생들을 도와주는75) 네 가지 음식76)이 있다.
74) '생겨나려는'은 sambhavesin을 옮긴 것이다. 이것은 보디 스님의 지적처럼 빠알리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미래 능동 분사이다.(Geiger, §193A, EV1, 527에 대한 주 참조) 그러나 주석서는 이 단어를 sambhava+esin으로 이해하여 “생겨남, 출생, 태어남을 구하고 찾는 자(ye sambhavaṃ jātiṃ nibbattiṃ esanti gavesanti).”(SA.ii.22)로 풀이하고 있다. PED와 BDD도 이를 따라서 각각 'seeking birth'와 'one who is seeking birth'로 설명하고 있다.
75)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은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m vā anuggahāya역하여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여기서 bhūtānaṃ(이미 존재한 자들)을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설명하고, sambhavesīnaṃ을 미래(ayati)의 태어남을 찾는 자들(sambhava+esin)로 이해해서 유학과 범부들(sekkha-puthu-jjanāna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23)
그런데 주석서의 이러한 입장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원문에는 이미 존재한 중생(sattānaṃ)이라고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아라한이라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음식의 역할을 설명한 평범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유지하게 하고(ṭhitiyā)'와 '도와주는(anuggahāya)'은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뜻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Ibid)
76) “여기서 '음식(āhāra)'이란 조건(paccaya)들이다. 조건들은 자신의 결실(phala)을 가져오기(āhārati)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들을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SA.ii.22)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음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이다.77)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있다.”78)
77) 이 네 가지 음식은 빠알리어로는 각각 kabaḷīkāra-āhāra, phassa-āhāra, manosancetanā-āhāra, viññāṇa-āhāra, 이다. 중국에서 각각 단식(段食), 촉식(觸食), 의사식(意思誠), 식식(識食)으로 옮겼다.
78) “그런데 만일 조건이라는 뜻(paccay-aṭṭha)에서 음식이라고 한다면, 왜 중생들에게는 다른 조건들도 많은데 유독 이들 넷만을 음식이라고 적용시키고 있는가? 이들은 중생들의 내적인 존재지속[相續](ajjhattika-santati)을 [유지하는데]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visesa-paccayattā)이다.
즉 '덩어리진 [먹는] 음식(kabaḷīkāra-āhāra)'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는 중생들의 육체적인 몸(rūpa-kāya)에 대해서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nāma-kāya)에 대해서 '감각접촉(phassa)'은 느낌(vedanā)의 [특별한 조건이요], '마음의 의도(mano-sañcetanā)'는 알음알이에게 [특별한 조건이요], '알음알이(viññāṇa)'는 정신·물질(nāma-rūpa)에게 [특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SA.ii.25)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어떻게 조건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덩어리진 음식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물질들(ojaṭṭhamaka-rūpāni)을 생기게 한다. 감각접촉의 음식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 느낌들을 생기게 한다. 마음의 의도라는 음식은 업(kamma)을 통해서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삼계의 존재(tayo bhavā)를 생기게 한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재생연결에 관계된 정신 · 물질(paṭisandhi-nāma-rūpa)을 생기게 한다.(SA.ii.25~26)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물질들은 분리할 수 없는 물질(avinibbhoga)들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6장 §7 (10)의 해설 등을 참조할 것.
한편 네 가지 음식은 본 「인연 상윳따」(S12)의 S12:12; 31; 63; 64에 계속 나타나고 있다. 네 가지 음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서 제5권 S46:51과 제6권 S55:31에서도 음식은 특별한 조건으로 언급되어 있다. 네 가지 음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XI.1~3을 참조할 것.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은 무엇이 그 근원79)이며, [12]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며 갈애로부터 일어나고
갈애로부터 생기며 갈애로부터 발생한다.”80)
79) 여기서 '근원'은 nidāna의 역어이고, '일어남'은 samudaya의, '생김'은 jātika의, '발생'은 pabhava의 역어인데, 주석서는 이 넷이 모두 이유(kāraṇa)를 나타내는 동의어라고 밝히고 있다.(SA.ii.27)
80) “여기서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다(cattāro āhārā taṇhānidānā).'라고 하신 것은, 재생연결(paṭisandhi)이 일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자기 존재(atta-bhāva = 몸)라 불리는 음식들은 이전의 갈애(purima-taṇhā, 즉 재생을 있게 한 이전 생의 갈애)가 그 근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어떻게? 재생연결의 순간에(paṭisandhi-kkhaṇe) 중생들에게는 중생이라는 존재지속[相續, 흐름, santati]을 통해서 생겨난 [몸이라는] 물질들인(uppanna-rūpabbhantara)에 영양소(ojā)가 생겨난다. 이것이 갈애를 근원으로 한(taṇhā-nidāna) 업에서 생긴 덩어리진 [먹는 음식(upādiṇṇaka-kabaḷīkārāhāra)이다. 그러면 이러한 재생연결식(paṭisandhi-citta)과 함께하여 일어난 감각접촉과 마음의 의도와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뜻하는 알음알이가 각각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업에서 생긴 '감각접촉'과 '마음의 의도'와 '알음알이'라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생연결의 순간에 음식은 전생의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purima-taṇhā-nidānā) 생긴다. 이러한 재생연결의 순간에서와 같이 그 다음의 최초의 바왕가의 마음의 순간(paṭhama-bhavaṅga-citta-kkhaṇa) 등의 경우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SA.ii.28)
네 가지 음식의 조건 짓는 역할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23음식의 조건(食緣, āhāra-paccaya]을 참조할 것.
5. “비구들이여, 그러면 갈애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갈애는 느낌이 그 근원이며 느낌으로부터 일어나고 느낌으로부터 생기며 느낌으로부터 발생한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느낌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느낌은 감각접촉이 그 근원이며 감각접촉으로부터 일어나고
감각접촉으로부터 생기며 감각접촉으로부터 발생한다.”
7. “비구들이여, 그러면 감각접촉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여섯 감각접촉은 여성 감각장소가 그 근원이며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일어나고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생기며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발생한다.”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여섯 감각장소는 정신·물질이 그 근원이며 정신 · 물질로부터 일어나고
정신 · 물질로부터 생기며 정신 · 물질로부터 발생한다."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신·물질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정신·물질은 알음알이가 그 근원이며 알음알이로부터 일어나고
알음알이로부터 생기며 알음알이로부터 발생한다.”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알음알이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알음알이는 의도적 행위들이 그 근원이며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일어나고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생기며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발생한다.”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의도적 행위들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의도적 행위들은 무명이 그 근원이며 무명으로부터 일어나고 무명으로부터 생기며 무명으로부터 발생한다.”81)
81) “여기서 음식과 갈애 사이에(antare) 하나의 연결(sandhi)이 있고, 갈애와 느낌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으며, 알음알이와 의도적 행위 사이에도 하나의 연결이 있다. 이와 같이 세 개의 연결과 네 개의 집합(ti-sandhi-catu-saṇkhepa)을 가진 윤회(vaṭṭa)를 가르치셨다.”(SA.ji.29)
“처음에는 과(果)와 인(因)의 연결(hetu-phala-sandhi), 가운데는 인과 과의 연결, 마지막에는 과와 인의 연결이 되어서 세 개의 연결과 네 개의 집합(saṇkhepa)이 되는 것이다.”(SAȚ.ii.28)
12.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82)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82) Ee와 Be에는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부터 “정신적 고통·절망이 발생한다.”까지와 §13의 환멸문의 해당 부분이 '… pe …'로 생략되어 나타나지만 Se에는 이처럼 생략되지 않고 나타난다. 이 부분이 생략되어 버리면 위의 §11까지에서 나타난 무명-행…애-음식의 연기구조인지 아니면 12지 연기의 정형구인지가 분명하지 않게 되어서 역자는 Se를 참조하여 이 부분을 다 살려서 옮겼다.
13.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83)
83) 본경은 특이하게도 음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역으로 갈애-느낌…으로 그 조건발생(연기)을 구명(究明)해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무명에 도달한다. 그런 뒤에 다시 무명에서부터 생-노사까지의 12지 연기로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여 경을 마무리 짓고 있다.
몰리야팍구나 경(S12:12) Moḷiyaphagguna-sutta
3. “비구들이여, [13]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음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있다.”84)
84) “세존께서는 이쯤에서 가르침을 멈추셨다. 왜? 몰리야팍구나 비구라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그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가르침을 멈추신 것이다.” (SA.ii.29)
4. 이렇게 말씀하시자 몰리야팍구나 존자85)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알음알이의 음식을 먹습니까?”86)
85) “몰리야팍구나 존자(āyasmā Moliyaphagguna)는 재가자였을 때(gihikāle) 큰 상투(moḷi)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몰리야팍구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출가하고서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SA.ii.30)
『맛지마 니까야』「톱의 비유 경」 (M2l/i.122~123)에서 세존께서는 그가 비구니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고 교계를 하셨다. 본서 「깔라라 경」(S12:32) §3에 의하면 그는 환속하여 재가자가 되었다.
86) 팍구나 존자는 음식이 있다면 그 음식을 먹는 자도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고 이렇게 질문을 드린 것이다. 만일 알음알이도 음식이라 부른다면 이러한 음식을 먹는 어떤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알음알이의 배후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정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그의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 그의 이름조차도 언급하지 않고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라는 용어로 그를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서 호된 평을 하고 있다.
“이 삿된 견해에 빠진 자는 미친 사람과 같다(ummattaka-sadisa). 예를 들면 미친 사람이 바구니(pacchi)를 가지고 길에 나가서 쇠똥이든 돌이든 사람 똥이든 음식 부스러기든 마음에 드는 것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든 아무거나 집어서 바구니에 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이 이론가도 타당한 것(yutta)이든 타당하지 않은 것(ayatta)이든 아무렇게나 질문을 한 것이다.”(SA.i.30)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87)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알음알이의 음식을 먹습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알음알이의 음식은 어떤 [법의 조건이]88) 됩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87) “'나는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라는 것은, 나는 어떤 중생(satta)이나 사람(puggala)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SA.ii.31)
88) [] 안은 주석서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는 “어떤 법의 조건이 됩니까(katamassa dhammassa paccayo)?”(SA.ii.31)를 번역하여 넣은 것이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再生]의 발생이라 [불리는 정신·물질]의 조건이 된다.89)
그러한 [정신·물질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90)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89) “여기서 '알음알이의 음식(viññāṇ-āhāra)'은 재생연결식(paṭisandhicitta)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再生, 再有]의 발생(ayatiṃ punabbhava-abhinibbatti)'은 이 알음알이와 함께 일어난 정신·물질(sahuppanna-nāma-rūpa)이다.”(SA.ii.31)
본서「의도 경」1(S12:38)의 주해도 참조할 것.
『앙굿따라 니까야』「존재 경 (A3:76)에서 세존께서는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욕]계에 … 중간의 [색]계에 … 수승한 [무색]계에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하여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punabbhava-abhinibbatti)이 있게 된다.”라고 천명하신다. 이것은 전생에서부터 찰라생 · 찰나멸하면서 상속하는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의 음식의 역할을 하여 모태에서 금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이 되고, 이것이 음식이 되어서 함께 일어나는 정신 · 물질을 생기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존께서는 연기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알음알이를 알음알이의 음식으로 말씀하고 계시며, 주석서는 이것을 한 생의 최초의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을 정신 · 물질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재생연결식이라는 음식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연기의 정형구의식과 명색을 한 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과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명색으로 설명하고 있다.
90) “그러한 존재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āyatiṃ punabbhava-abhinibbatti)이라 불리는 정신 · 물질이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는 뜻이다.”(SA.ii.31)
5.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감각접촉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감각접촉을 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6.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느낀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다.'라고.”
7.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애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갈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14]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갈애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애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다.'라고.”
8.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취착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취착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취착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취착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고, 취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다.91)
… 태어남이 있다. …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라고.”
91) “그런데 왜 그는 여기서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질문을 드리지 않는가? 이 삿된 견해에 빠진 자는 중생(satta)이 바로 존재(bhūta)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에 위배(laddhi-viruddha)되기 때문에 질문 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존으로부터 계속해서 이것은 이것에 조건된다(idappaccayā idaṃ)라고 듣고 있기 때문에 [연기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saññatti)이 생겨서 질문을 드리지 않았다. 스승께서도 그가 쓸데없는 질문(tuccha-puccha)을 계속하자 더 이상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부터는 연달아서(ekābaddhaṃ) 설법을 하신 것이다.” (SA.ii.31)
9. “팍구나여, 그러나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92)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93) 94)
92)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왜 순관과 역관이 다른가? 연기의 가르침에 관한 다른 경들과는 달리 본경에서는 연기법의 역관이 순관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즉 순관에서는 식-명색-육입-촉-수-애…의 10지 연기로 전개되었지만 여기 역관의 시작점에서는 식-명색-육입이 나타나지 않고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六觸處]로부터 시작해서 육촉처-촉-수-애…의 8지 연기로 전개가 되고 있다.(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대한 논의는 본서 「외도 경」 (S12:24) §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주석서와 복주서는 순관과 역관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이렇게 순관과 역관이 다르게 나타날까? 역자의 견해를 적어 본다. 본경과 주석서에서 보듯이 식은 재생연결식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식과 함께 일어나는 명색과 육입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역관의 시작은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석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식과 명색은 각각 재생연결식과 이 재생연결식과 함께하는 정신 · 물질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본경의 역관에서는 왜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 saḷāyatana] 대신에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六獨處, cha phassāyatana]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것도 감각장소 자체의 남김 없는 소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곳의 역할을 하는 장소가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지 감각장소 자체가 남김없이 소멸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문맥에서도 육촉처(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는 적지 않게 나타나지만 연기의 정형구에서 육촉처가 나타나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역자가 컴퓨터로 검색한 바에 의하면 육촉처가 연기의 정형구에서 나타나는 경은 본경과「외도 경」(S12:24) §8과 『디가 니까야』「범망 경」(D1) §3.71의 세 곳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2지 연기가 아닌 연기, 즉 10지 연기를 설하는 본경이나 8지 연기를 설하는 「외도경」 (S12:24) §8에서 역관의 출발점은 육입이 아니라 육촉처이다. 왜 그럴까? 육입이나 식-명색은 소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범망 경」(D1) §3.71에서도 감각장소-감각접촉-느낌-갈애-취착-존재-생-노사의 8지 연기로 62견이 일어남을 밝히신 뒤에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서 62견을 극복하는 것을 설하고 계신다. 이 경우도 62견의 소멸은 육촉처를 바르게 앞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말씀이 된다.
그러면 왜 12지 연기에서는 무명멸측행멸, 행멸즉식멸, 식멸즉명색멸, 명색멸즉육입멸, 육입멸즉촉멸이 나타나는 것일까? 12지 연기에서는 그 출발점이 전생의 무명-행이기 때문에 전생의 무명과 행이 소멸하면 금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도 소멸하고 아울러 명색과 육입 등도 소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의 식과 명색은 소멸할 수 없다. 실제로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연기의 정형구에서 'A가 소멸하기 때문에 B가 소멸하고'라는 역관의 공식은 육촉처가 나타나는 경우를 제외한 다른 정형구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10지 연기를 설하는 『디가 니까야』「대전기경」(D14)과 9지 연기를 설하는 「대인연경」(D15)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8지 연기나 10지 연기에서 역관이 육촉처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식과 명색과 육입은 결코 소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93) “본경에서는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 하나의 [인-과의] 연결(sandhi)이 있고, 느낌과 갈애 사이에 하나의 [과-인]의 연결이 있으며, 존재와 태어남 사이에 하나의 [인-과의] 연결이 있다.”(SA.ii.31)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의 조건이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이전의 존재(purima-bhava)로부터 다음 생의 존재(āyatibhava)의 조건이 되는 근본원인(mūla-kāraṇa)에 의해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 하나의 연결(sandhi)이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알음알이란 업형성의 알음알이(abhisaṅkhāra-viññāṇa)를 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SAȚ.i.30)
한편 『맛지마니까야 복주서』는 “업형성의 알음알이란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을 말한다.”(MAȚ.ii.118)라고 설명하고 있다.
12지 연기에서 식과 명색은 둘 다 과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3의 해설 참조) 그런데 본경처럼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연기구조에서 식과 명색이 하나의 연결이 되려면 인과나 과인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복주서는 이처럼 본경에서 식은 인이고 명색은 과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의도 경」1(S12:38)의 주해도 참조할 것.
94) 이처럼 주석서는 본경의 가르침을 식-명색-육입-촉…의 10지 연기로 해석하고 여기서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한다. 이것은『디가 니까야』「대인연 경」(D15)이 식으로부터 연기를 설명하면서 그 경문에 식을 한 생에 최초로 모태에 드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21)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초기불전과 주석서들은 연기각지(緣起各支)에 나타나는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해석하며 특히 식으로부터 출발하는 10지 연기나 9지 연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문 바라문 경1(S12:13) Samaṇabrāhmaṇa-sutta
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 · 죽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며,95)
95) “여기서 '사문이나 바라문들(samaṇā vā brahmaṇā vā)'은 진리들을 꿰뚫을 수 없는 외도(bāhiraka) 사문 · 바라문들을 말한다. 그들은 괴로움의 진리[苦諦, dukkha-sacca]를 통해서 늙음 · 죽음을 알지 못하고, '갈애(saha taṇhāya)와 태어남[生]으로부터 늙음 · 죽음은 일어난다.'라고 일어남의 진리[集諦, samudaya-sacca]를 통해서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알지 못하고, 소멸의 진리[滅諦, nirodha-sacca]를 통해서 늙음 · 죽음의 소멸을 알지 못하고, 도의 진리[道諦, magga-sacca]를 통해서 도닦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태어남(생), 존재(유) 등의 모든 [연기]각지(sabba-pada)에 대해서도 이처럼 네 가지 진리[四諦, catu-sacca]를 통해서 알지 못한다.”(SA.ii.31~32)
주석서는 연기각지의 모든 일어남의 진리에는 모두 갈애와 그 각지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는 바로 앞의 각지를 넣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태어남(생)의 일어남은 갈애와 존재이고, 존재(유)의 일어남은 갈애와 취착이라는 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남을 … 존재를 … 취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 · 물질을 … 알음알이를 … 의도적 행위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96) 자들은
그 누구든지, [15] 사문들 가운데서는 사문이라 불릴 수 없고
바라문들 가운데서는 바라문이라 불릴 수 없다.
그 존자들은 사문 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97)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지 못한다.”
96) 여기서는 12연기의 무명(avijjā)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왜? 의도적 행위들의 일어남이 바로 의도적 행위들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고 그 원인은 바로 무명이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의 일어남이라는 구절로 이미 무명이 언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 S12:14, 28, 29, 30, 33, 34, 71~81, 82~93도 본경과 같은 구조로 된 연기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97) “'사문 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sāmaññatthaṃ vā brahmaññatthaṃ vā)'이라고 했다. 여기서 성스러운 도(ariya-magga)가 바로 사문 생활(sāmañña)이고 바라문 생활(brahmañña)'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과(ariya-phala)가 바로 사문 생활의 결실과 바라문 생활의 결실로 설해진 결실(attha)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11가지 경우로 사성제를 말씀하셨다.” (SA.ii.32)
4. “비구들이여, 그러나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 · 죽음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며,
태어남을 … 존재를 … 취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 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 · 물질을 … 알음알이를 … 의도적 행위들을 꿰뚫어 알고
의도적 행위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아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들 가운데서는 사문이라 불릴 만하고
바라문들 가운데서는 바라문이라 불릴 만하다.
그 존자들은 사문 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다.”
사문 · 바라문 경2(S12:14)
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러한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가?”
4. “그들은 늙음 · 죽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며,
태어남을 … 존재를 … 취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 · 물질을 … 알음알이를 … 의도적 행위들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러한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16]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들은 사문들 가운데서 사문이라 불릴 수 없고
바라문들 가운데서 바라문이라 불릴 수 없다.
그 존자들은 사문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지 못한다.”
5.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러한 법들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법들을 꿰뚫어 알고 어떠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아는가?”
6. “그들은 늙음 · 죽음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며,
태어남을 … 존재를 … 취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 · 물질을 … 알음알이를 … 의도적 행위들을 꿰뚫어 안다.
그들은 이러한 법들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들은 사문들 가운데서 사문이라 불릴 만하고
바라문들 가운데서 바라문이라 불릴 만하다.
그 존자들은 사문 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다.”
깟짜나곳따 경(S12:15) Kaccānagotta-sutta
2. 그때 [17] 깟짜나곳따 존자98)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98) 깟짜나곳따는 Ee: 깟짜야나곳따(Kaccāyanagotta) 대신에 Be, Se: 깟짜나곳따(Kaccānagotta)로 읽은 것이다. Ee: 「찬나 경」(S22:90)에도 깟짜나곳따(Kaccānagotta)로 인용되고 있다.
이 깟짜나곳따 존자(āyasmā Kaccanāgotta)는 우리에게 가전연 존자로 잘 알려진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혹은 마하깟짜야나(Mahā-Kacāyana, 니까야에는 두 가지 표현이 다 나타난다. 마하깟짜나 존자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할릿디까니 경」1(S22:3)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존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깟짜나곳따는 깟짜나 족성을 가진 자라는 뜻인데 깟짜나는 그 당시 유명했던 바라문 가문의 족성이다. 깟짜나곳따라고 이름한 이유는 마하깟짜나 존자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본서 제1권 「깟사빠곳따 경」 (S9:3)에는 깟사빠곳따 존자(āyasmā Kassapagotta)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깟사빠 족성을 가진 자란 의미이다. 깟사빠도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인도에서 잘 알려진 바라문 가문의 족성인데 마하깟사빠존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깟사빠곳따라 불렀을 것이다.
아무튼 깟짜나곳따 존자는 본경에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제3권 「찬나 경」(S22:90) §9에서는 아난다 존자가 본경의 §4~6을 찬나 존자에게 인용하여 설하는 것이 나타난다. 본경은 이처럼 연기의 가르침에 관한 한 초기부터 잘 알려진 경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도 중도를 표방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어서 한국 불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경이라 할 수 있다.
본경의 주제는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이며, 세존께서는 12연기가 바로 바른 견해임을 명쾌하게 표방하신다.
3.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됩니까?”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99)
99) “'대부분(yebhuyyena)'이란 성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가지를 의지한(dvaya-nissita)'이란 양 극단(koṭṭhāsa)을 의지한 것을 말한다. '있다는 관념(atthitā)'이란 영원하다는 [견해[常見, sassata] 이다. '없다는 관념(natthitā)'이란 단멸한다는 [견해][斷見, uccheda] 이다.”(SA.ii.32)
“'이 모든 세상은 있고 항상 존재한다.'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가 국집하는(gaṇhāti) 견해(diṭṭhi)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 모든 세상은 없고 단멸한다.'라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가 국집하는 견해가 '없다는 관념'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형성된 세상(유위의 세상, saṅkhāra-loka)을 뜻한다.”(SAT.ii.32)
역자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으로 풀어서 옮긴 원어는 각각 atthitā와 natthitā이다. 이것은 있다와 없다를 뜻하는 동사 atthi와 natthi에다 추상명사 어미 '-tā'를 붙여서 만든 추상명사이다. 단순하게 취급하여 이 두 단어를 그냥 '있음'과 '없음'으로 옮기면 본서 제3권 『꽃 경」 (S22:94)에서 세존이 인정하시는 '세상의 현자들이 있다(atthi)고 동의하는 것과 없다(natthi)고 동의 하는 것'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본서 제3권 「꽃 경」(S22:194)과 그곳 §3의 주해 참조)
역자는 복주서의 해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복주서는 "sā diṭṭhi atthitā"와 "sā diṭṭhi natthitā”(SAȚ.ii.32)로 표현하여 atthitā와 natthitā가 단순한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있다는 견해(diṭṭhi)'와 '없다는 견해'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보디 스님의 제안도 받아들이면서 역자는 이 둘을 각각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으로 풀어서 옮겼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100)
100) “'세상의 일어남(lokasamudaya)'이란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의 생겨남(nibbatti)을 뜻한다. '바른 통찰지(sammappaññā)'란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도의 통찰지(savipassanā maggapaññā)를 뜻한다.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는 것은,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에 대해서 법들이 생겨나는 것(nibbatta)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없다는 단견(natthīti uccheda-diṭṭhi)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소멸(loka-nirodha)'은 형성된 것들의 부서짐(bhaṅga)이다.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yā loke atthitā sā na hoti),'는 것은,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부서지는 것(bhijjamāna)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있다는 상견(atthīti sassata-diṭṭhi)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세상의 일어남'은 순관(유전문)을 통한 조건의 형태(anuloma-paccay-ākāra)이다. '세상의 소멸'은 역관(환멸문)을 통한 조건의 형태(paṭiloma-paccay-ākāra)이다. 왜냐하면 [조건이라는] 세상의 의지처(loka-nissaya)를 보는 자는 조건들이란 단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건 따라 일어난 것(paccay-uppanna)은 단멸하지 않음(anuccheda)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없다는 단견(natthīti uccheda-diṭṭhi)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건들의 소멸(paccaya-nirodha)을 보는 자도 조건들이란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의 소멸(paccay-uppanna-nirodha)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있다는 상견(atthīti sassata-diṭṭhi)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SA..ii.32~33)
여기서 단멸(uccheda)과 소멸(nirodha)을 구분해서 음미해야 한다. 단멸은 없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멸절과 단절을 말하고(단멸론), 소멸은 일어난 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5.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101)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102)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 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103)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104)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105)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106)
101)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는 긴 합성어 upay-upādāna-abhinivesa-vinibaddho를 옮긴 것인데, upaya는 '집착'으로(문맥상 Se, Fe의 upāy-대신 Be의 upay-로 읽었음), upādāna는 '취착'으로, abhinivesa는 '천착'으로, vinibaddha (Be, Ee의 vinibandho 대신 Se의 vinibaddho로 읽었음)는 '묶여 있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렇게 옮긴 것은 주석서가 제시한 대로 합성어를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여기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모두 갈애(taṇhā)와 사견(diṭṭhi)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중생들은 갈애와 사견 때문에 삼계의 법(tebhūmaka-dhamma)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등의 형태(ākāra)들로 집착하고 취착하고 천착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SA.ii.33)
물론 여기서 갈애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대상을 좋아해서 생기는 것이요, 사견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대상을 상 · 락 · 아 ·정(常樂我淨) 등으로 잘못 알아서 생기는 것이다.
102) Ee에는 'attā na me(나의 자아가 아니다.)'로 나타나지만 Be, Se에는 'attā me(나의 자아다)'로 나타난다. 문맥상 Be, Se의 '나의 자아다.'가 적당하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겼다.
103)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는 tañcāyaṃ upayupādāmaṃ cetaso adhiṭṭhānaṃ abhinivesānusayaṃ na upeti na upādiyati nādhiṭṭhāti 'atta me'ti라는 해석하기에 쉽지 않은 문장을 주석서에 입각하여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tañcāyaṃ(= taṃ ca ayaṃ)'은 '그러나 이(ayaṃ) 성스러운 제자(ariya-sāvako)는 이러한(taṃ) 집착과 취작을 …'로 읽어야 한다. 'cetaso adhiṭṭhānaṃ'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됨(cittassa patiṭṭthana-bhūtṃ)'을 말한다. 갈애와 사견에(taṇhā-diṭṭhisu) 해로운 마음[不善心, akusala-citta]을 확립하면(patiṭṭhāti) 거기에 대해서 천착하게 되고 잠재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둘을 마음이 머무는 곳(adhiṭṭhāna)이라 부르고 천착과 잠재성향(abhinivesa-anusaya)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고수하지 않는다.” (SA.ii.33)
104) “'단지 괴로움(dukkham eva)'이란 것은 단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일 뿐(pañc-upādāna-kkhandha-matta)이란 뜻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na kaṅkhati na vicikicchati).'란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어서 여기에 다른 어떤 중생(satta)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SA.ji.33)
이 문맥에 가장 적당한 것이 와지라 비구니의 게송(본서 제1권 「와지라 경」(S5:10) {553)}~{555})이다. 이렇게 하여 중생이라는 고정관념[衆生相, satta-saññā]이 극복되는 것이다. 105)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aparapaccayā ñāṇaṃ).'는 것은 남을 의지하지 않고(aññassa apattiyāyetvā)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지혜(atta-paccakkha-ñāṇa)를 말한다.”(SA.ii.33)
여기서 paccakkha는 눈앞에 드러난(prati+akṣa)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명학 (因明學)에서 말하는 직접지[現量, Sk. pratakṣa]와 같은 말이다. 추론지 [比量, anumāna]나 비유지[譬喩量 upamāna]나 성인의 가르침[聖言量, āpta-vaca]을 통해서 알게 된 지혜가 아니고 직접 체득한 지혜라는 뜻이며, 온 · 처 · 계 · 근 · 제 · 연으로 대표되는 법에 대한 지혜가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류과 이상의 성자의 경지이기도 하다.(SA.ii.282)
106)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중생이라는 고정관념 (satta-saññā, 衆生相)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바르게 봄(sammā-dassana)이 있게 된다고 혼합된 바른 견해(missaka-sammādiṭṭhi)를 말씀하셨다.” (SA.ii.34)
여기서 혼합된 것(missaka)이란 세간적인 것(lokiya)과 출세간적인 것(lok-uttara)에 다 통용되는 것을 말한다.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107)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108) 여래는 법을 설한다.
107) “'하나의 극단(eko anto)'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정점이 되는 극단(nikūṭanta)이요 저속함의 극단(lāmak-anta)인 첫 번째 것으로 상견(sassata)을 말한다. '두 번째 극단(dutiyo anto)'이라는 것은 두 번째 [견해로써] '모든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생겨난 견해(uppajjanaka-diṭṭhi)인데 이것도 정점이 되는 극단이고 저속함의 극단이다. 이것이 두 번째인데 단견(uccheda)을 말한다.”(SA.ii.34)
108) '중간[中]에 의해서'는 majjhe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와 복주서는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래「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12:17)에서는 이 majjhena를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 (anallīyitvā), 중도 (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 등이다.”(SA.ii.36)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이처럼 양극단을 여읜 중간[中, majjha]을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초기불전 자체를 두고 보자면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 예를 들면 4부 니까야(Nikāya)에는 본서 제6권 「초전법륜 경」(S56:11)을 위시하여 대략 6군데에서 중도(majjhimā paṭipadā)가 나타나는데 4념처와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앙굿따라 니까야』「나체수행자 경」 1/2(A3:151~152/i.295)를 제외한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본서 제4권 「라시야 경」(S42:12) §4 참조)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요 4념처는 팔정도의 바른 마음챙김의 내용이다. 그리고 『무애해도』(Ps.ii.147)에도 팔정도가 중도로 표방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서 문헌을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본경에서처럼 유무의 양극단의 중간이며 고락(苦樂)과 단상(斷常)의 양극단의 중간(본서「나체수행자 깟사빠 경」 (S12:17) §7 이하 참조)으로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 팔불중도는 중국 길장(吉藏) 스님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 여러 번 나타나는 대승불교에는 잘 알려진 술어임.)나 공 · 가 · 중도(空·假·中道)로 정리되는 『중론』 (中論, 中論頌, Mula-madhyamakakarika)「관사제품」의 삼제게(三諦偈, 24:18)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불전에서의 중도는 이처럼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 · 가 · 중도로 통찰하는 것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중론』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본경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고, 이것은 유무의 중간(中, majjha]이다. 그러므로 용수 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 전체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역자가 중도를 자꾸 팔정도로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도를 일 · 이 · 거 · 래 · 유 · 무 · 단 · 상(一異去來有無斷常)의 팔불(八不)이나 공 · 가 · 중(空假中) 등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오히려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아주 크기 때문이며, 실제 한국불교에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 말 그대로 도닦음(paṭipadā)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道)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ṭi-padā)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 즉 도닦음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설법자(法] 경(S12:16) Dhammakathika-sutta
2. 그때 [18]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는 [비구], 법을 설하는 [비구]'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법을 설하는 [비구]가 됩니까?"
4. “비구여, 만일 늙음 · 죽음을 염오하고109)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110)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109) “'염오하기 위해서(nibbindan-atthāya)'라는 것은 염오의 관찰을 얻기 위해서(nibbida-anupassanā-paṭilābhāya)라는 말이다. 이것은 늙음 · 죽음을 처음으로 하여 말씀하신 유위법(saṅkhata-dhamma)들에 대해서 염오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빛바래기 위해서(virajjanatthāya)'라는 것도 빛바램의 관찰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이다.”(SAȚ.ii.34)
110) 여기에 나타나는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함(nibbidā, virāga, nirodha)'은 본선 제3권 「무더기 상윳따」(S22)와 제4권 「육처 상윳따」(S35)의 많은 경들에서 나타나는 염오-이욕-소멸의 정형구와 같으며, 이것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의 정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해제 §3-(4)-②와 본서 제3권 「과거·현재·미래 경」1(S22:9)과 「무상 경」(S22:12)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5. “비구여, 만일 늙음 · 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으면111) 그를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112)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111) “'도를 닦는다(paṭipanno hoti)'라는 것은 계(sīla)로부터 시작해서 아라한도 (arahatta-magga)까지를 도닦음(paṭipanna)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SA.ii.34)
같은 문장에 대해서『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다(nirodhāya paṭipanno),'는 것은 아라한도를 통해서 소멸하기 위해서(arahatta-maggā nirodhāya) 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라한]과를 증득했을 때는(phala-patte) 참으로 소멸되었다(nirodhita)고 한다.” (MA.iii.270)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염오는 위빳사나를 뜻하고 탐욕의 빛바램은 도를 뜻하고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nibbidāyāti vipassanā, virāgāyāti maggo, nirodhāya upasamāyāti nibbānaṃ - DA.ii.670)
112)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dhamma-anudhamma-ppaṭipanna)'이라는 것은 출세간인 열반의 법을 따르는 법이 되는 도닦음을 닦는(lokuttarassa nibbāna-dhammassa anudhamma-bhūtaṃ paṭipadaṃ paṭipanno)'이라는 말이다.”(SA.ii.34) 즉 '열반이라는 출세간법을 얻도록 하는 도닦음을 닦는'이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복주서는 “열반의 법(nibbāna-dhamma)이란 열반을 가져오는(nibbān-āvaha) 성스러운 도(ariya magga)를 말한다. 따르는 법이 됨이란 열반을 증득함 (nibbāna-adhigama)에 적합한 고유성질을 가진 것(anucchavika-sabhāva-bhūta)을 말한다.” (SAȚ.ii.34)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볼 때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는 다름 아닌 유학(sekha,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인 비구를 말한다.
6. “비구여, 만일 늙음 · 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하면113) 그를 '지금 · 여기[現法]에서 열반을 실현하는114)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113) “'취착 없이 해탈함(anupādā vimutta)'이란 네 가지 취착(upādāna)을 통해서 어떤 법도 취착하지 않고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SA.ii.34) 네 가지 취착에 대해서는 본서 「분석 경」(S12:2) §7을 참조할 것.
114) “'지금 · 여기[現法]에서 열반을 실현하는(diṭṭhadhammanibbānappatta)'이란 것은 지금 · 여기에서 열반을 얻음(nibbāna-ppatta)을 말한다.”(SA.ii.34) 이것은 아라한 혹은 무학(asekha)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다른 주석서는 '지금 · 여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 여기[現法, diṭṭha-dhamma]란 눈앞에 [직접 보이는](paccakkha) 법dhamma, 현상)을 말한다.” (DA.i.121)
다시 복주서에서는 “지금 · 여기(diṭṭha-dhamma)란 봄(dassana)이라는 지혜를 통해서 얻어진 법(dhamma)이다. 여기서 감각기능[根]의 대상[境]이 아닌 [禪의 경지 등]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감각기능의 대상처럼 간주될 수가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를 두고 '눈앞에 [직접 보이는] 법'이라고 했다.”(DAȚ.i.230)고 덧붙이고 있다. '지금 · 여기'로 옮긴 diṭṭha(現)-dhamma(法)를 중국에서는 現法으로 직역하기도 하고 現今으로도 옮겼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here and now로 정착이 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 여기'로 정착이 되어간다.
7. “비구여, 만일 태어남을 … 만일 존재를 … 만일 취착을 … 만일 갈애를 … 만일 느낌을 … 만일 감각접촉을 … 만일 여섯 감각장소를 … 만일 정신 · 물질을 … 만일 알음알이를 … 만일 의도적 행위들을 … 만일 무명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8. “비구여, 만일 무명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으면
그를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9. “비구여, 만일 무명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하면
그를 '지금 · 여기[現法]에서 열반을 실현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115)
115) “이와 같이 본경은 ‘설법자[法師, dhamma-kathika]'라는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 유학과 무학의 경지(sekkha-asekkha-bhūmi)라는 두 가지를 보여주셨다.”(SA.ii.34)
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12:17) Acelakassap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때 [19]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걸식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가셨다.
나체수행자 깟사빠116)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116)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세 명의 나체수행자 깟사빠(acela Kassapa)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41:9)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3. “만일 고따마 존자께서 저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저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4. 두 번째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만일 고따마 존자께서 저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저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5. 세 번째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만일 고따마 존자께서 저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저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117)
117) “왜 세존께서는 세 번이나 거절을 하셨는가? 존중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gārava-jananattha)이다.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들은 즉시에 대답을 해 주면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세 번 거절하면 존중하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듣고자 하고(sussūsanti) 믿음을 가지게 된다.(saddahanti), 그리고 세존께서는 중생들의 지혜가 익게(ñāṇa-paripāka)하기 위해서 세 번을 요청하도록 하신다.” (SA.ii.35)
6.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고따마 존자께 많은 것을 여쭙지 않을 것입니다.”
“깟사빠여, 그대가 원한다면 질문을 하라.”
7. “고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118)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118)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sayaṃkataṃ dukkhaṃ)?'라는 질문은 옳지 않다. 스승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괴로움을 만드는 자아라고 부를만한 어떤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이 방법은 '남이 만드는 것(parato)'에도 적용된다.” (SA.ii.35)
“이 삿된 견해에 빠진 자는, 자아는 오온을 벗어났고(pañcakkhandha-vinimutta) 항상하고(nicca) 행위자이고 경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kāraka-vedaka-lakkhaṇa) 상상하면서 질문했기 때문에 이 질문 자체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SAȚ.ii.35)
아래 §9에서 이것은 영속론자들 혹은 상견론자들(sassata-vādā)의 견해일 뿐이라고 논파되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119)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119) 아래 §9에서 이것은 단멸론자들(uccheda-vādā)의 견해일 뿐이라고 논파되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120)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120) 이것은 일부영속론자들(ekacca-sassatikā)의 견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 §10에서 양 극단을 여읜 중간의 천명으로 논파되었다. 일부영속론자들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제1권 「범망경」 (D1) §2.1 이하를 참조할 것.
“고따마 존자시여, [20]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121)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121) 이것은 우연발생론자들(adhicca-samuppannikā)의 견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 §10에서 연기를 통해서 논파되었다. 우연발생론자들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범망경」 (D1) §2.30 이하를 참조할 것.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이란 없습니까?”
“깟사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깟사빠여, 괴로움은 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깟사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안다. 깟사빠여, 참으로 나는 괴로움을 본다.”
8. “그런데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이란 없습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깟사빠여, 괴로움은 있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라고 여쭈면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깟사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안다. 깟사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본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122) 부디 제게 괴로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부디 제게 괴로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시오.”
122) “여기서부터 그는 스승에 대한 존중심이 생겨서(sañjāta-gārava) 그대는 (bhava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세존께서는(bhagavā)이라고 말하고 있다.”(SA.ii.35)
주석서의 이런 지적처럼 이때까지 그는 세존을 부를 때 'bhavaṃ Gotama(고따마 존자시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는 호격도 세존이시여나 주인이시여를 뜻하는 bhante로 바뀌고 세존을 bhagavā(세존)라 부르고 있다. 존중하는 (gārava)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9.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123)
123)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 ”로 옮긴 원어는 so karoti so paṭisaṃ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이다.
이 문장을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해서 옮기면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로 해석해야 한다.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번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역자는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 미얀마어 번역본에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는 소유격인데 주석서는 이것을 처소격을 뜻하는 소유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35)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여기서 ‘괴로움'이란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을 뜻한다. 이 주장은(iti vadaṃ)에서 먼저 나타난 '처음에'라는 단어(ādi-sadda)는 나중에 나타나는 '상[견]'이라는 단어(sassata-sadda)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 그래서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ādito va) 상견을 밝히고 상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짓는 자(kāraka)'와 '경험하는 자(vedaka)'는 오직 하나라고(ekam eva) 취하는 상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5~36)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고 만다.”124)
124) 이 부분도 바로 앞의 주해와 같은 이유로 역자는 주석서와는 다르게 옮겼다.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에 '다른 사람이(añño) 짓고 다른 사람이(añño)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는 '짓는 자는 여기서 단멸한다. 그러면 그가 지은 것을 다른 자가 경험하게 된다(tena kataṃ añño paṭisaṃvediyati).'라는 이러한 단견과 함께하는 느낌에 의해서 두들겨 맞고(abhitunna) 찔렸기(viddha)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단견을 밝히고 단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단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6)
10. “깟사빠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125)
125)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 (anallīvitvā), 중도 (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일어남을(kāraṇato phalaṃ), 그리고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kāraṇa-nirodhena) 그 [결과]가 소멸함을 밝히신 것이지 어떤 짓는 자(kāraka)도 경험하는 자(vedaka)도 상정하시지 (niddiṭṭha) 않았다.” (SA.ii.36)
아무튼 여기서 연기는 고락(苦樂)을 여의고 단상(斷常)을 여읜 것으로 설명되며 특히 고락의 자작자수(自作自收)와 자작타수(自作他收)의 문제를 짚어보고 있다. 중간[中]과 중도(中道)에 대해서는 위「깟짜나곳따 경(S12:15) §6의 주해를 참조할 것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21]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126)
126) “이렇게 해서 나머지 [두] 질문이 논파되었다(paṭisedhitā), 왜냐하면 여기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ubho ante anupagamma)'라는 말씀으로 세번째 질문을 물리쳤으며(paṭikkhitta),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네 번째 질문인] 우연발생론(adhicca-samuppannatā)을 물리쳤다고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SA.ii.36)
11.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색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세
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12. “깟사빠여,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 출가하여 구족계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한다.
넉 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한다.
물론 여기에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127)
127) 이것은 『율장』의 「대품」(Vin.i.69~71)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항목이다. 『율장 주석서』는 이를 '외도의 따로 머묾[外道別住, titthiya-parivāsa]'이라 부르고 있다.(VinA.v.990)
주석서에 의하면 전에 외도였던 사람은 먼저 사미가 되게 하고(sāmaṇera-bhūmiyaṃ ṭhita) 4개월이 지나서 대중의 동의를 얻어 구족계(upasampadā)를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께서 그가 별주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하시면 별주의 과정이 면제된다고 한다. 깟사빠 존자의 경우에는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은] 직후에 세존께서 대중의 동의를 받아 바로 비구계를 주셨다(upasampādesi)고 한다. (SA.ii.36~37)
13. “세존이시여, 만일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 출가하여 구족계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하고 넉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하신다면 저는 4년의 견습기간을 거치겠습니다.
4년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시어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해 주소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14.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깟사빠 존자는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않아 [22]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128)
128) 이 정형구에 대한 설명은 본서 제1권 「브라흐마데와 경」 (S6:3)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15.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띰바루까 경(S12:18) Timbaruka-sutta
1.<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 에서>
2. 그때 띰바루까 유행승129)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띰바루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129) 주석서와 복주서는 띰바루까 유행승(Timbaruka paribbājaka)에 대해서 아무 설명을 하지 않는다.
3.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130)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
130) “본경에서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vedanā-sukha-dukkha)이 설해졌다. 이것은 과보로 나타난 즐거움과 괴로움(vipāka-sukha-dukkha)이다."(SA.ii.38)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이란 없습니까?”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띰바루까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안다. 띰바루까여, 참으로 나는 괴로움을 본다.”
4. “그런데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23]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이란 없습니까?'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없는 것이 아니다.
뎀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있다.'라고 대답하시고,
제가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보지 못합니까?'라고 여쭈면 '띰바루까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안다.
띰바루까여, 참으로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본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부디 제게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부디 제게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5. “띰바루까여, '느낌과 느끼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을 [상정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131)
131) “'느낌과 느끼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sā vedanā so vediyati)'이라고 시작하신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라는 [잘못된] 믿음을 물리치기 위해서(laddhiyā nisedhanattha) 설하셨다.
만일 처음에 '느낌과 느끼는 자는 같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느낌은 느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vedanāya eva vedanā katā)이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느낌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어 상견(sassata-diṭṭhi)을 설하고 상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SA.ii.37~38)
띰바루까여,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132)
132)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aññā vedanā añño vediyati)'이라고 시작하신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paraṃ kataṃ sukhadukkhaṃ).' 라는 [잘못된] 믿음을 물리치기 위해서 설하셨다.
만일 처음에 '느낌과 느끼는 자는 다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있었던 짓는 자로서의 느낌은 나중에 단멸하고 다른 자가 그의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그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이러한 단견(uccheda-diṭṭhi)과 함께하는 느낌에 의해서 두들겨 맞고 찔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단견을 설하고 단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SA.ii.38)
6. “띰바루까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7. 이렇게 말씀하시자 띰바루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색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청신사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우현(愚賢) 경(S12:19) Bālapandita-sutta 133)
133) 본경은 12연기를 네 개의 집합(catu-saṅkhepa)과 20가지 형태(vīsatākāra)를 토대로 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견해(Ps.i.51~52; 『청정도론』XVII.288-298; 『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4~8 등 참조)의 단초가 되는 중요한 경이다. 아래 §6의 주해도 참조할 것.
3.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의 [24]
이 몸134)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 · 물질135)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136)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서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137)
134) “여기서 '이 몸(ayaṃ kāyo)'이란 자신의(attano) 알음알이와 함께한(saviññāṇaka) 몸을 말한다.”(SA.ii.38)
135) “'밖의 정신 · 물질(bahiddhā nāma-rūpaṃ)'이란 남들의(paresaṃ) 알음알이와 함께한 몸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는 [이 몸이라는 표현으로는] 자신의 다섯 무더기[五蘊, pañca khandhā]와 여섯 감각장소[六處, cha āyatannā]를, 그리고 [밖의 정신 ·물질이라는 표현으로는] 남의 오온과 육처를 드러내고 있다.”(SA.ii.38)
밖의 정신 · 물질을 이렇게 남의 오온과 육처로 한정짓는 것은 조금 의아스러운 설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알음알이의 대상이 되는 모든 정신 · 물질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경들에서는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imasmiṃ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ā ca sabbanimittesu)”라는 표현이 나타난다.(본서 S18:21; 22; 본서 제3권 S22:71; 72 등, 본서 「잠재성향 경」(S18:21) §3의 주해 참조)
136)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dvayaṃ paṭicca phasso)'라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눈과 형색 등의 한 쌍을 조건으로 눈의 감각접촉 등이 설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의 감각장소들[內處]과 밖의 감각장소들[外處](ajjhattika-bāhirāni āyatanāni)을 말한다. 이러한 경우를 큰 한 쌍(mahā-dvaya)이라 한다. 그리고 여섯 감각장소들(saḷ`ev` āyatanāni)이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六獨處, phass-āyatanāni]이니, 감각접촉의 원인이 되는 것(phassa-kāraṇa)이다.”(SA.ii.38~39)
137) 본경의 연기구조는 다른 경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다. 식-명색-촉-육입-수의 구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디가 니까야』「대인연경」(D15)에는 육입이 나타나지 않고 식-명색-촉-수-애…의 구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처럼 육입이 촉과 수 사이에 나타나는 경우는 다른 연기의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주석서는 이 육입이 촉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은 하고 있다. 즉 육입이 명색과 촉 사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본경은 특이한 구조의 연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주석서는 본경의 연기구조를 알음알이를 가진 자신의 몸과 남의 정신 · 물질(명색) 사이에만 국한해서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4.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현명한 자의 몸도 이와 같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 · 물질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서
현명한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호지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6.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의 몸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에게는 그 무명이 제거되지 않고 갈애가 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바르게 괴로움을 멸진하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138)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게139) 된다.
그는 [다른] 몸을 받아서는 태어남과 늙음 · 죽음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근심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140)
138) “여기서 '청정범행(brahmacariya)'은 도의 청정범행(magga-brahmacarya)을 말한다. '괴로움을 멸진하기 위해서(dukkha-kkhayāya)'란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을 끝내기 위해서이다.” (SA.ii.40)
139) “'몸을 받음(kāy-ūpaga)'이란 다른(añña) 재생연결의 몸(paṭisandhikāya)을 받는다는 말이다.” (SA.ii.40)
140) 이상에서 보았듯이 본경은 분명히 전생의 무명과 갈애 때문에 금생의 알음알이가 생겨났고, 금생의 무명과 갈애가 다 제거 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내생의 다른 몸을 받아 생-노사우비고뇌가 계속 된다는 삼세에 걸친 윤회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금생에서 무명과 갈애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와 업지음을 끊어야 다시는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되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하는 것이다.
주석서 문헌들은 전생의 원인으로는 무명과 갈애 가운데 무명이 더 두드러진 것으로 설명하고, 내생의 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금생의 원인으로는 무명과 갈애 가운데 갈애가 더 두드러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무명과 상카라들을 언급함으로써 갈애와 취착과 존재도 포함되었다.”(『청정도론』 VII.21)라고도 적고 있고,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명이 그 뿌리이고 느낌이 마지막이며, 미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갈애가 그 뿌리이고 늙음과 죽음이 마지막이 되어 이 윤회의 바퀴는 두 가지이다.”(『청정도론』 XVII.285)라고 설하고 있다.
7.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현명한 자의 몸도 이와 같이 생겨난다.
그러나 현명한 자에게는 그 무명이 제거되고 갈애가 다하게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자는 [25] 바르게 괴로움을 멸진하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지 않게 된다.
그는 몸을 받지 않아서 태어남과 늙음 ·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다고 나는 말한다.”
8. “비구들이여, 이것이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차이점이고,
이것이 특별한 점이고, 이것이 다른 점이다.”141)
141) 본경은 무명 · 갈애 - 몸(알음알이와 함께한 몸)을 받음 - 밖의 정신 · 물질 - 감각접촉(여섯 감각접촉의 장소) - 느낌(즐거움과 괴로움) - 다시 몸을 받음의 6가지 구성요소를 늘고 있으므로 6지 연기로 분류된다. 이렇게 하여 본 경은 삼세양중인과의 튼튼한 경전적인 근거가 된다.
조건 경(S12:20) Paccaya-sutta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緣起)와 연기된[緣而生]142) 법들에 대해서 설하리라.
142) '연기된'은 paṭicca-samuppanna를 옮긴 것인데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으로 풀어서 옮길 수 있다.(실제로 본서 제3권 「아난다 경」(S22:21) §4와 제4권 「간병실 경」1(S36:7) §6 등에서는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그러나 본「인연 상윳따」(S12)에서는 문장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연기된'으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음을 밝힌다.
한편 CBETA로 검색을 해보면 이 단어는 연이생(緣而生)으로 한역된 경우가 가장 많고, 緣巳生으로도 많이 한역되었으며, 緣以生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인가? 143)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144)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며,145)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此緣性]146) 이다.
143) 이하 본경의 §§3~4는 『청정도론』XVII.5에 연기를 설명하는 경전적 근거로 길게 인용되어 나타난다.
144) “'존재하는 요소[界](ṭhitāva sā dhātu)'란 이 연기의 고유성질(paccaya-sabhāva)은 확립되어 있다(ṭhito va)는 뜻으로 태어남이 늙음 · 죽음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경우란 결코 없다는 말이다.”(SA.ii.40)
“여기서 요소[界, dhātu]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하는 늙음 · 죽음의 조건(paccaya)을 뜻한다. 이 연기는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해 있었지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여래는 통찰지로 그 사실을 보고 깨달으셨을 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소는 존재해 있었다.'라고 했다.”(Pm.571 =『청정도론』XVII.5에 대한 주석)
145)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는 요소가 바로 '법으로 결정된 것(dhamma-niyāmatā)'이다. 왜냐하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는 조건 혹은 고유성질이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됨(niyāmatā)이 있고 정의함이 있기 때문이다.” (Pm.571)
146)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此綠性]'은 idappaccayatā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ida(이) + paccayatā(조건의 성질)로 분석된다. 이것은 무명연행(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고)부터 생연노사(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까지의 연기의 정형구 전체를 지칭하는 술어이다. 여기서 ida(이것)는 12가지 연기각지들 각각을 지칭한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보라!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147)
147) 본 문단은 『청정도론』 (Vis.XVII.5)에 연기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문장으로 그대로 인용되어 나타난다. 이 문장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청정도론』에서 가장 길고 가장 난해하다고 일컬어지는 제17장의 연기의 해설이 전개된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출현 경」(A3:134)에서 이 문장은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 등으로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의 무상 · 고 · 무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본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은 없는 법을 새로 만드신 분이 아니라 연기나 제법의 무상 · 고 · 무아와 같은 세상의 진리를 드러내어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세존 스스로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없는 진리(법)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신 분이요 그분의 제자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닦는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
비구들이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
비구들이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 …
비구들이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
비구들이여,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
비구들이여,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 …
비구들이여,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 …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며,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此終性]이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26]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보라!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4.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기서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 이것의 조건 짓는 성질,148)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148) 여기서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은 각각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실함 등은 조건의 모습(paccay-ākāra)에 대한 동의어(vevacana)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각각의 조건들에 따라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함 [如如, tathatā]'이라 했다.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avitathatā)'이라 했다. 다른 조건으로부터 이 법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예를 들면, 행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생기지 다른 법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anaññathatā)'이라 했다. 앞서 말한 이 늙음 · 죽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혹은 조건의 모임(samūha)이기 때문에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idappaccayatā)'이라 했다.”(SA.ii.41; 『청정도론』 XVII.6)
본경의 §§3~4는 전문이 『청정도론』 XVII.5에 인용될 정도로 연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본서 제6권 「진실함 경」(S56:20)과 「진실함 경」 (S56:27)에서는 사성제에도 이 '진실함, 거짓이 아님,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님'의 셋이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된[緣而生]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늙음 · 죽음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태어남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존재는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취착은 … 갈애는 … 느낌은 … 감각접촉은 … 여섯 감각장소는 … 정신 · 물질은 … 알음알이는 … 의도적 행위들은 …
무명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6.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연기와 연기된[緣而生] 법들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149) 분명하게 보기 때문에
'나는 정말 과거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라고 하면서
과거로 치달려 가는 그런 경우는 있지 않다.
149) “'바른 통찰지로(sammappaññāya)'란 위빳사나와 더불어 도의 통찰지(magga-paññā)로라는 뜻이다.”(SA.ii.40)
그는 '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 아니면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27]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나는 미래에 어떠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될까?'라고 하면서
미래로 치달려 가는 그런 경우는 있지 않다.
그는 지금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도 안으로 의심이 없다.
'나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라고 하면서
현재로 치달려 가는 경우는 있지 않다.”150)
150)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러한 의심(kathaṃ-kathī)은 『맛지마 니까야』「제번뇌단속 경」 (M2) §7과 「긴 갈애를 부숨 경」(M38)에도 나타나고 있다. 『청정도론』XIX.5~6은 이를 과거에 대한 5가지와 미래에 대한 5가지와 현재에 대한 6가지로 설명하여 모두 16가지 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것의 극복은『청정도론』XIX.21~27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러한 16가지 의심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위빳사나의 7청정 가운데 4번째인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kaṅkhā-vitaraṇa-visuddhi,『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31과 『청정도론』XIX.1 이하 참조)이라 부른다.
본경과『청정도론』의 설명에서 보듯이 연기 혹은 조건발생을 정확하게 알아야 삼세의 모든 의심이 극복되며 이것은 도와 과의 증득에도 필수적인 항목이다.
7.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연기와 연기된[緣而生] 법들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분명하게 보기 때문이다.”
제2장 음식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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