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경
- 닿음 경
- 엉킴 경
- 마음의 고삐 경
- 아라한 경
- 광채 경
- 흐름 경
- 큰 재산 경
- 네 바퀴 경
- 사승 장딴지 경
칼 경(S1:21) Satti-sutta
2. 한 곁에 [13]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
비구는 싸띠를 확립하여 유행해야 합니다.” {51}
3. [세존]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 버리기 위해
비구는 싸띠를 확립하여 유행해야 하노라.”110) {52}
110) 첫 번째 게송으로 천신은 감각적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했고, 세존께서는 두 번째 게송에서 유신견을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한 가지 살펴볼 점은 성자의 경지에서 보자면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은 세 번째 단계의 성자인 불환도에 의해 성취되고, 유신견을 버리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의 성자인 예류도에 의해 성취된다는데 있다. 이렇게 되면 천신의 주장이 더 높은 경지를 얻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멋진 설명을 하고 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다. '이 천신은 비유는 아주 강하게 들지만 그 뜻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가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는 감각적 욕망을 단지 [삼매에 들어] 억압함을 통해서 버리는 것(vikkhambhana-pahāna)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이 불환도에 의해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는 한(na samugghāṭiyati) 거기에 묶여 있는 것(anubaddha)이 된다.'라고 하시면서 천신이 들었던 비유를 가지고 첫 번째 도인 예류도(paṭhama-magga) 대한 가르침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두 번째 게송을 읊으신 것이다.”(SA.i.48)
삼매 혹은 초선 이상의 경지에 들면 감각적 욕망은 제일 먼저 극복이 된다. 그러나 삼매에서 나오면 감각적 욕망은 다시 일어난다. 삼매에 의해 억압되었을 뿐이지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천신은 단지 삼매에 들어 감각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만을 말했을 뿐 실제로 뿌리 뽑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는 불환자보다 더 낮은 단계이면서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자가 되는 가르침, 즉 유신견의 제거를 통해 그 천신을 교화하셨다는 것이다. 오직 삼매에 들어 있는 순간에만 억압된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난 이런 경지를 '일시적인 해탈(sāmāyika vimutti)'이라고 한다. 일시적인 해탈에 대해서는 본서 「고디까 경」(S4:23) §2와 이에 대한 주해와, 『앙굿따라 니까야』제3권「일시적 해탈 경」1 (A5:149)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판본에 대한 고찰은 보디 스님 357쪽 40번 주해를 참조할 것.
닿음 경(S1:22) Phusati-sutta
2. [천신]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
청정한 자 망가뜨리는 자들이 있으니
그런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111) {53}
111) [ ] 안은 주석서를 참조해서 넣은 것이다. 앞의 '닿음(phusanta)'은 업(kamma)을 짓는 것을 말하고 뒤의 닿음은 그 과보(vipāka)를 받는 것을 말한다.(SA.i.48~49)
3. [세존]
“누구든지 청정하고 흠이 없으며,
순수한 그런 사람 망가뜨리면
그 죄악은 어리석은 그에게 되돌아가나니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와 같이.”112) {54}
112) 이 게송은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근거 없이 심하게 비방하다가 죽어 지옥에 떨어진 꼬깔리까 비구에 관계된 게송으로, 『숫따니빠따』(Sn.127) {662}로도 나타난다. 꼬깔리까 비구에 대한 자세한 일화는 본서 「꼬깔리까 경」2(S6:10 = 『앙굿따라 니까야』「꼬깔리까 경」(A10:89)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이 경에는 본 게송이 나타나지 않는다.
엉킴 경(S1:23) Jaṭā-sutta
2. [천신]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113) {55}
113) 본 게송은『청정도론』 제1장에서『청정도론』의 시작 게송으로 인용된 잘 알려진 게송이다. 본 게송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을 인용한다.
“엉킴(jaṭā)은 갈애의 그물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형색[色, rūpa] 등의 대상들에서 아래위로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 꼬여 있다는 뜻에서 엉킴이라 한다. 마치 대나무 덤불 등에서 가지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을 엉킴이라 부르듯이 그것은 자신의 네 가지 필수품과 다른 사람의 필수품에 대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안의 감각장소[處]와 밖의 감각장소에 대해 일어나기 때문에 안의 엉킴과 밖의 엉킴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다.
마치 대나무 덤불 등이 대나무 가지들로 뒤얽혀 있듯이 중생의 무리라 불리는 모든 유정들이 이 갈애의 그물에 뒤얽혀 있다. 그것에 의해 한데 얽혀 있고, 서로 꼬여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쭙니다.'라고 그것을 여쭙고 있다. 이와 같이 삼계를 얽어두는 엉킴을 누가 풀 수 있습니까? 즉, 누가 이것을 풀 능력이 있습니까?'라고 그 [천신]은 질문하고 있다.”(『청정도론』I.1)
3. [세존]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114) {56}
탐욕과 성냄과 무명이 빛바래고
번뇌 다한 아라한들이 이러한 엉킴을 푼다. {57}
정신 · 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
부딪힘[의 인식도 남김없이 소멸하고]
물질의 인식까지 남김없이 소멸하는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지도다.”115) {58}
114) 본 게송도 「청정도론」의 모두(冒頭)에 앞의 천신의 질문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청정도론』의 방대한 내용은 계 · 정 · 혜 삼학을 표방하고 있는 본 게송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청정도론』에 나타나는 본 게송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인용한다.
“여기서 이것이 [게송의] 간략한 설명이다.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계에 머물러서. 계를 철저히 봉행하는 자를 여기서 계에 머무는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계를 철저히 수지하여 계에 굳건히 머문다는 것이 여기서의 뜻이다. 사람중생이다.
통찰지를 갖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를 가진,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삼매와 위빳사나를 닦는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삼매를 서술했고, 통찰지라는 이름으로 위빳사나를 서술했다.
근면한 자: 정진하는 자. 왜냐하면 정진은 오염원들을 말려버리고(ātāpana) 태워버린다(paritāpana)는 뜻에서 열(ātāpa)이라 부른다. 그것을 가진 자가 근면한 자(ātāpī)다.
슬기로운 자: 슬기로움을 일러 통찰지라 한다. 그것을 갖춘 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깨어 있는 통찰지를 나타낸다. 질문에 대답하는 이 [게송]에서는 이처럼 세 번의 통찰지가 언급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jāti-paññā)이고, 두 번째는 위빳사나의 통찰지(vipassanã-paññā)이고, 세 번째는 모든 일을 주도하는 깨어 있는 통찰지(parihārika-paññā)이다.
윤회에서(saṃsāre) 두려움을(bhayaṃ)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그가 이 엉킴을 푼다. ① 계와 ②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표현된 삼매(定)와 ③-⑤ 세 가지의 통찰지(慧)와 ⑥ 근면함이라는 이런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 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할 것이다. 즉 그는 계의 땅 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 [갈아]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에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버릴 것이다. 그는 도의 순간에 엉킴을 푼다고 한다. 그는 과의 순간에 엉킴을 푼 자가 되어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을 받을만한 자가 된다.”(『청정도론』I.7)
115) “'정신(nāma)'이란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수 · 상 · 행 · 식)이다. '부딪힘의 인식과 물질에 대한 인식(paṭighaṃ rūpasaññā ca)'에서 '부딪힘의 인식'이라는 문구는 욕계(kāma-bhava)를 말했고, '물질에 대한 인식' 이라는 문구는 색계(rūpa-bhava)를 말했다. 이 둘을 취함으로써 무색계(arūpa-bhava)도 포함되었다.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진다(etthesā chijjate jaṭā).'는 것은 여기 삼계윤회가 끝나는 이곳(pariyādiyana-ṭṭhāna)에서 이 엉킴은 잘려진다는 말이다. 열반에 도달한 뒤 잘려진다, 소멸된다는 뜻을 보이신 것이다.”(SA.i.50)
마음의 고삐 경 (S1:24) Manonivāraṇā-sutta
2. [천신] [14]
“어떠한 마음[意]116) 이건 고삐를 죄면
거기서 괴로움은 오지 않다네.
모든 곳에서 마음의 고삐를 죄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합니다.” {59}
116) 여기서 '마음[意]'은 mano를 옮긴 것이다. 본서 전체에서 mano는 마노[意]로 옮기고 있지만 여기서처럼 문맥상 마음으로 옮긴 곳도 있다. 마음[心]과 마노[意]의 차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해제 §3-(2)-⑤를 참조할 것.
3. [세존]
“마음[意]이 이미 잘 제어되어 있다면
모든 곳에서 마음 고삐 쩔 필요는 없으리.
그에게서 사악함이 생겨나올 때
그런 때에 마음 고삐 죄어야 하리.”117) {60}
117) 주석서에 의하면 이 천신은 유익한(kusala) 마음이건 해로운(akusala) 마음이건, 세간적인(lokiya) 마음이건, 출세간적인(lokuttara) 마음이건, 모든 경우에 다 고삐를 죄어서(nivāretabba)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uppādetabba)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복주서는 여기에 대해서 이 천신은 어떤 마음이든 일어나면 그것은 다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무의식 상태(acittaka-bhāva)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SA.i.50)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이 천신은 벗어남으로 인도하지 않는 말(aniyyānika-kathā)을 하고 있다. 마음은 고삐를 죄어야 할 마음도 있고, 닦아야 할(bhāvetabba) 마음도 있다.'라고 생각하시면서 이 두 번째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Ibid) 마음의 고삐를 죄는 것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류트 비유경」(S35:246) §3을 참조할 것.
아라한 경(S1:25) Arahanta-sutta
2. [천신]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받아 가진 비구가
'나는 말을 한다. 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 118) {61}
118) 주석서에 의하면 이 천신은 숲에 사는 신이다. 그는 숲에 머무는 비구들이 '나는 먹는다, 나는 앉는다, 내 발우, 내 가사'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기를, '나는 이 비구들이 번뇌 다한 아라한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번뇌 다한 자들이 자아를 상정하는 것을 의지한 이야기(attupaladdhi-nissita-kathā)를 할 수 있는가? 참으로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세존께 가서 이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SA.i.51)
3. [세존]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라 할지라도
'나는 말을 한다. 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 두루 잘 알아서
능숙한 그 사람이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119) {62}
119) “'능숙한 자(kusala)'란 오온 등에 능숙한 자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loke samañña)'란 세상에서 통용되는 표현(lokanirutti),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어법(loka-vohāra)이다.
'다만 일상적 어법으로 일상적인 말을 한다(vohāramattena so yohareyya).'는 것은 자아를 상정하는 것을 의지한 이야기는 버리지만 일상적인 어법을 깨는 것(vohāra-bheda)을 범하지 않고 단지 '나, 내 것' 등으로 표현한다. 만일 '오온이 먹는다, 오온이 앉는다, 오온의 발우, 오온의 가사' 등으로 말하면 일상적인 어법을 깨어버린 것이 되어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일상적인 어법으로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SA.i.51)
『디가 니까야』「뽓타빠다 경」(D9)에서도 세존께서는 “찟따여,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D9 §53)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중요한 것은 번뇌가 다했는가,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자아관념을 척파하였는가에 있지 그 표현법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4. [천신]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받아 가진 비구가
'나는 말을 한다. 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자만 가져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120) {63}
120) 주석서는, 아라한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있다 자만(māna)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천신은 세존께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는 아홉 가지 자만이 없다고 대답하고 계신다고 설명하고 있다.(SA.i.51)
5. [세존]
“자만 버린 자에게 매듭이란 없으니
그에게서 자만과 매듭121)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라.
그 현자는 모든 망상 이미 넘어섰지만122)
'나는 말을 한다.'거나 [15]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 두루 잘 알아서
능숙한 그 사람이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 {64}
121) “'자만과 매듭으'로 옮긴 원어는 māna-gantha라는 복합어이다. 주석서는 이것을 'mānā ca ganthā ca assa'라고 병렬복합어[相違釋, dvandva]로 풀이하고 있어서(SA.i.51 ~52) 이렇게 옮겼다. 문장으로 봐서는 자만의 매듭(mānassa ganthā)이라고 옮겨도 좋을 듯하지만 교학적으로 자만의 매듭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석서는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자만은 열 가지 족쇄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매듭은 네 가지인데 그것은 간탐의 몸의 매듭, 악의의 몸의 매듭,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의 몸의 매듭, 이것만이 진리라는 독단적인 신조의 몸의 매듭이다.(본서 제5권 「매듭 경」(S45:174) 참조)
한편『쿳다까 니까야』의 『여시어경』(It.4)에도 māna-gantha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소유복합어[有財釋, bahuvrīhi]로 나타난다. 즉 자만의 매듭을 가진 사람들(pajā)을 나타내고, 『여시어경 주석서』는 “자만에 의해서 묶여진 사람들, 혹은 자만의 족쇄에 채워진 사람들(mānena ganthitā māna-saṃyojanena saṃyuttā)”(ItA.55)로 풀이하고 있다.
122) “'망상을 넘어섰다(vītivatto maññataṃ).'는 것은 갈애, 견해[邪見], 자만(taṇhā-diṭṭhi-māna)의 망상(maññana)을 넘어섰다, 건넜다(atikkanta)는 뜻이다.”(SA.i.52)
판본 고찰에 대해서는 보디 스님 360쪽 51번 주해를 참조할 것. 역자가 택한 maññataṃ은 Be를 따랐다.
광채 경(S1:26) Pajjota-sutta
2. [천신]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광채가 있어
그것으로 세상은 빛이 납니까?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저희는 존자께 여쭈러 왔습니다.” {65}
3. [세존]
“세상에는 네 가지 광채가 있나니
다섯 번째 광채란 존재하지 않노라.123)
낮에는 저 태양이 빛나고 있고
밤에는 저 달 역시 비추고 있네. {66}
123)『앙굿따라 니까야』 「광채 경」(A4:145)에서도 달의 광채, 태양의 광채, 불의 광채, 통찰지의 광채의 넷을 들고 있다.
불이 있어 밤낮없이 빛을 발하나
완전하게 깨달은 그 자야말로
빛나는 것 가운데 으뜸이로니
이 광명은 위없는 밝은 것이라.”124) {67}
124) “'이 광명(esā ābhā)'이란 부처님의 광명(Buddh-ābhā)을 말한다. 왜냐하면 지혜(ñāṇa)의 광명이건, 희열(pīti)의 광명이건, 청정한 믿음(pasāda)의 광명이건, 설법(dhamma-kathā)의 광명이건, 이 모든 광명은 부처님들이 출현(pātubhāva)하심으로서 생겼기 때문이다.”(SA.i.52)
흐름 경(S1:27) Sarā-sutta
2. [천신]
“흐름은 어디에서 자취 감추고125)
회전은 어디에서 멈추어 서며
정신과 물질 또한 어느 곳에서
그것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68}
125) “여기서 '흐름(sāra)'이란 윤회의 흐름(saṃsāra-sāra)이다. 이 윤회의 흐름은 어디에 이르러, 즉 어떤 원인으로 사라지고 그 자취를 감추는지를 묻고 있다.”(SA.i.52)
3.[세존]
“물과 땅, 불과 바람, 굳게 확립 못하는 곳
거기에서 흐름은 자취 감추고
거기에서 회전은 멈추어 서며
거기에서 정신 · 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네.”126) {69}
126) “'거기에서'란 열반(nibāna)을 말한다.”(SA.i.52)
본경의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은 『디가 니까야』「께왔다 경」(D11) §85에 나타나는 다음 질문과 대답과 유사하다.
[질문] ‘어디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어디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대답]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여기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자세한 것은 「께왓다 경」 (D11) §67 이하와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큰 재산 경(S1:28) Mahaddana-sutta
2. [천신]
“큰 재산 가졌고 큰 재물 가졌으며
왕국 가진 끄샤뜨리야들 조차도
서로가 서로의 [재화를] 탐하나니
감각적 욕망에 물릴 줄을 모릅니다. {71} 127)
127) Ee2는 본 게송 앞에 {70}을 새로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부 태국에서 발견된 두 개의 Lanna 필사본에만 나타나고 있을 뿐 다른 어떤『상웃따 니까야』필사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본경의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으며 더군다나 주석서도 복주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보디 스님도 옮기지 않고 있으며 역자도 생략하였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
존재의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128)
게걸스런 이런 자129) 가운데에서
누가 있어 욕탐을 버렸습니까?
게걸스럽지 않은 자130) 누구입니까?" {72}
128) “즉 윤회의 흐름(vaṭṭa-sota)을 쫓아가는 자를 말한다.”(SA.i.52)
129) '게걸스런 자'는 ussukka-jāta를 옮긴 것이다. ussuka는 여기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도 나타나고 본서 제4권 「이시닷따 경」1(S41:2) §12에서처럼 '성심을 다해(ussukkaṃ)'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본 게송에 대한 여러 가지 판본 고찰은 보디 스님 361 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
130) “'게걸스럽지 않은 자(anussukā)'란 자유인(avāvaṭā)을 말한다.”(SA.i.52)
3. [세존]
“집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도 버리고
가축도 버린 뒤에 집 없이 출가하여
탐욕·성냄 버리고 무명까지 빛이 바랜
번뇌 다한 아라한들 여기에 있으니
그들이 세상에서 게걸스럽지 않도다.” {73}
네 바퀴 경(S1:29) Catucakka-sutta
2. [천신] [16]
“네 개의 바퀴와 아홉 개의 문을 가져
탐욕으로 채워졌고 꽁꽁 묶여 있으며
진흙에서 생겨나왔습니다, 대웅이시여.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이까?” 131) {74}
131) "'네 개의 바퀴(catu-cakka)'란 네 가지 자세(catu-iriyāpatha,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 = 행 · 주 · 좌 · 와)를 말한다. '아홉 개의 문(nava-dvāra)'은 눈, 귀, 코, 입, 항문, 성기를 뜻한다.”(SA.i.53)
“'진흙에서 생겨나온 것(paṅka-jāta)'이란 이 몸은 어머니의 자궁(mātu-kucchi)이라 불리는 더러운 진흙탕에서 생겼기 때문이고, 머리털 등의 더러운 진흙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SAȚ.i.86)
3. [세존]
“채찍과 가죽 끈132)을 자르고
소망과 탐욕을 끊어 버리며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노라.” {75}
132) “'채찍(naddhi)'이란 증오(upanāha)이니 처음에는 분노(kodha)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증오가 된다. 이처럼 강한 분노(balava-kodha)를 뜻한다. '가죽 끈(varatta)' 이란 “채찍과 가죽 끈과 밧줄을 차례대로 자르고(Dhp.57; Sn.120)라는 게송에서 갈애(taṇhā)를 뜻한다. 밧줄(sandāna)은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본 게송에서는 나머지 오염원(kilesa)들을 가죽 끈이라고 알아야 한다.
'소망과 탐욕(icchā lobha)'에서 소망은 처음에 생긴 힘이 약한 것(dubbalā)이고 나중에 전개되는 강한 것(balavā)이 탐욕이다. 혹은 얻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aladdha-patthanā)이 소망이고 얻은 대상(paṭiladdhavatthu)을 [움켜쥐는 것이] 탐욕이다.
'갈애를 뿌리째(samūlaṃ taṇhaṃ)'라고 한 것은 무명을 뿌리로 하는(avijjā-mūla) 갈애를 뜻한다. '뽑아버린다(abbuyha)'는 것은 아라한 도(agga-magga)로써 뽑아버리는 것을 말한다.”(SA.i.53)
장딴지 경(S1:30)133) Enijaṅgha-sutta
133) 본경의 두 게송은 『숫따니빠따』(Sn.30) {165~166}으로도 나타난다.
2. [천신]
“사슴 장딴지를 가졌고134) 날씬하고 용감하며
음식을 적게 먹고 탐욕이 없고
사자나 코끼리처럼 혼자 다니고
감각적 욕망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
그 분을 친견하여 저희들은 여쭙니다.
어떻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합니까?” {76}
134) '사슴 장딴지를 가짐(eṇi-jaṅgha)'은 서른두 가지 대인상(三十二相, dvattiṃsa-mahāpurisa-lakkhaṇāni] 가운데 11번째 상이다. 32상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삼십이상경」(D30)을 참조할 것.
3. [세존]
“세상에는 다섯 가닥 감각적 욕망이 있고
마음[意]이 여섯 번째라 알려졌나니
여기에 대한135) 욕구136)를 빛바래버리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하노라.” {77}
135) “'여기에 대한(ettha)'이란 이 정신 · 물질[名色, nāma-rūpa]에 대한이라는 말이다. 즉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pañca-kāma-guṇa)을 통해서 물질(색, rūpa)을 설하셨고 마음[意, mano]으로 정신(명, nāma = 수 · 상 · 행 · 식의 4온)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합하여 [욕구, chanda]의 토대(bhumma)는 바로 오온이라고 적용시켜야 한다.”(SA.i.54)
136) '욕구'는 chanda를 옮긴 것이다. 역자는 chanda를 문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옮기고 있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iddhi-pāda]과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sammap-padhāna]에서는 열의로 그 외는 대부분 욕구로 옮긴다.(네 가지 성취수단에 대해서는 본서 제6권 「이 언덕 경」 (S51:1)과 §3의 주해를, 네 가지 바른 노력에 대해서는 제5권 「동쪽으로 흐름 경」(S19:1) §3과 주해를 참조할 것.) chanda의 번역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 「분석 경」2(S48:10)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제3장 칼 품이 끝났다.
'빠알리어 경전 > 쌍윳따 니까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S2:11 -S2:20. 제2상윳따 - 제 2장 급고독 품 (0) | 2023.06.20 |
---|---|
S1:71 -S1:81. 제1상윳따 - 제 8장 끊음 품 (0) | 2023.06.20 |
S12:21-S12:30. 제12상윳따 - 제3장 십력품(Dasabala vagga) (0) | 2023.05.25 |
S12:11-S12:20. 제12상윳따 - 제2장 음식(자양분) 품(Ahara vagga) (1) | 2023.05.25 |
S12:1 - S12:10. 제12상윳따 - 인연 상윳따(Nidana samyutta) - 제1장 부처님 품(Buddha-vagga) (0) | 202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