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사성제

사성제 9A (2011-2-9)

Daisy청량심 2023. 10. 10. 03:12

2011-2-9 사성제 9A - 순일 큰스님


올해 한해 행복하시고요 올해 한해 참 중요한 시점입니다.
순일선원도 그렇고 공부하시는 신도분들 모두가 중요한 분수령에 와 있다고 보여집니다.요번에  인도 성지순례에서 부처님의 높은 가피가 있었어요 말할 수 없이 높은 가피가 여리 이적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순일선원뿐이 아니라 신도들 모든 분들에게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공부와 세상적인 삶 모두에 축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봅니다.  그러나 시간 좀 걸리겠죠 많이 힘든분 계시다면 그러나 열심히들 살면 올해말 전에 모든게 잘 될거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대념처경에 전에 호흡과 관찰 했었어요 오늘은 몸 관찰입니다.
아 제가 오늘 가사를 입었죠  반가사를 입었는데 장삼으로 안 입었어요.
이렇게 입는것은 격식에 안 맞을것 같아요 그죠  그런데 전에 요번에 인도에 가서 알안게 원래 경전에 사무의 옷 세가지만 입어라고 그랬어요.그 당시에  원래 바지와 저고리 한벌씩 입는것 없죠.  티벳불교도 그렇고 남방불교도 그렇고 그냥 치마처럼 길게인데 벌써 바지 저고리 조끼 세개다 입었는거요 이거 안맞는건데 그런데 그거 다 알면서 입었는데 장삼은 너무 거추장스러워요 전에도 여러번 넘어질뻔 했지만 장삼입고 요번에도 양평선원에서 화장실 가다가 또 밟고 넘어질뻔도 했고 너무 길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장삼을 꼭 입어야 되는가 이거 한국식이거든요 없어요 그런데가 원래 스님들이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너무 안이로우며 다들 관습적으로 가는데 그것도 좀 모양이 이상하고 해서 입었다 안 입었다 제 마음되로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안입는 날이 훨씬 많은데 너무 많을껀데 이해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슨 격식을 차려야 할 날은 입긴 입어야 하겠죠 장삼은 그리하겠습니다.

몸에는 네가지 자세인데요 먼저 네가지 자세부터 얘기 드릴께요.
1. 누워 있는 자세
2. 앉아 있는 자세
3. 서 있는 자세
4. 걷는 자세

이 네가지를 모두 분명히 꿰뚫어 알라 그러셨어요 이것으로 통론으로 말씀이 끝났는거예요.  즉, 이 네가지 자세와 그외 모든 자세를 분명하게 꿰뚫어 알라 관찰해라 이말씀이죠 이것으로 몸관찰은 통론으로 끝났는 거예요.  즉, 더 요약해서하면 어떤 행위를 하건 그것을 분명히 꿰뚫어 알때까지 목적은 알때까지 노력을 관찰해라에요 관찰하는것은 결과가 아니에요 연습이죠.
관찰의 결과는 이제 관찰을 일부러 관찰을 하는것이 아니라, 굳이 관찰로 하면 관찰이 되어진다, 꿰뚫어 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먼저 왜 그럴까 얘기 드려 볼께요.  
삼매와 위빠사나죠.   우리가 삼매와 위빠사나 얘기를 많이 합니다.
1. 삼매는 몸이 없어지는 거예요 높은 삼매는.  몸이 없어지는 거고
2. 위빠사나는 몸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거예요.
  이차이입니다.  둘의 차이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죠.

삼매에서 몸이 왜 없어지냐하면 몸이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인거죠.
몸과 마음이 없어집니다. 몸과 마음이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삼매가     깊을수록 본성이 더 드러나니까 실체가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겁니다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거고요

위빠사나는요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이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위빠사나를    하면 본성이 드러나니까 아까 삼매에서처럼 몸과 마음이 고요해서 사라     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 되셨나요?  

삼매는 정지죠 정지기 때문에 고요하게 몸과 마음이 오온이 몸뚱아리 느낌 인식 의도 아뢰야식 색수상행식이 사라지는 것이고 삼매는 본성이 드러나고
위빠사나는 색수상행식이 관찰이 되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말은 색수상행식이 나가 아니라
밖에서 얘를 지켜보듯이 안팎에서 본성이 얘를 본다 라는 거예요 움직임을.
둘다 공통점은 본성이 드러난다.

하나는 색수상행식이 사라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삼매로
하나는 색수상행식이 보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되는 거죠.
색수상행식이 보이면 이게 내가 아니다 라는 거죠
본성이 드러나갔고 이것을 쉽게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지금 우리가요
나가 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나가 있다라고
왜 생각하냐 하면 한번 샛길로 빠져 얘기해 보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을요 맨 처음에 삼매에 들어서보면은
일심삼매에 색깔의 이름을 몰라요 색깔만 있을뿐이에요.  
우리가 이름을 어떻게 아냐하면 이름은 나중에 붙인 거예요.
태어나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예요.
얘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저게 빨간색이라고 색깔 이름을 얘기 못하잖아요.
색깔은 알지만 빨간색이란 이름을 모르죠.
자 이 얘기 하나와 우리가요 여러분 빨간색하고
마음에서 빨간색을 떠올리면은 갑자기 일하다가 뭐하다가 빨간색을 떠올리면은 어떻게 하셔야지 떠올릴수 있죠?
색깔의 영상을 떠올려서는 못 떠올려요 이름을 떠올려야 되요.
빨간색이라고 거꾸로 그래야 빨간색을 떠올릴수 있죠.
이름을 배우고 나니까 이 얘기가 뭐냐하면

맨처음에 모양이 있고 색깔이나 그 다음에 이름을 붙였다고 그러셨죠 부처님께서.  이름 붙이기 그 다음에 언어가 생기고 그 다음에 개념이 생기고 이 개념이 확장을 해서 많은 분별이 생기니까 “나”라는 것이 생긴거예요.
한번 보세요 좀전에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못 떠올리면은 빨간색의 색깔을 못 떠올리듯이 “나”라는 것의 분별이 떠올릴수가 없다면 나가 있더라도 ‘나’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겠어요.
제가 말을 잘 전달했는지 모르겠어요 전달하기가 좀 어려워요.

여기 초가 두 개 있는데 자주 얘기 드린건데 짧은초와 긴초가 있는데
삼매에 들면 먼저 초란 이름이 없어져요
삼매에 들면 분별의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상이지만 초가
그리고는 초가 먼저 없어지고 그 다음에 길고 짧다를 몰라요.
이 얘기는 거꾸로 우리가 초에서 맨 처음에 어렸을때,
얘기때 배운것은 길다 짧다를 먼저 배운 거예요.
초는 그 다음에 배운거예요.  이름은 역순입니다.
그래서 실지로 삼매에 들어갈 때 초란 이름을 먼저 모르고
더 삼매에 들어가면 어느게 길고 어느게 짧은지 몰라요.  
눈에는 짧고 길게 보이는데
짧다, 길다라는 분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영상만 있어요.

그러면 보세요.
그때 초가 두개가 있을때 영상만 있으면 그거 쳐다보고 삼매에 들어있는 사람은 무슨생각이 있을까요? ... 물론 생각이 없어요 삼매니까.
그냥 이름도 모르고 “있구나”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지금 사람이 여기 있는데요 분별이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있구나 그렇게 되겠죠.
“나 다”가 아니라  그래 경전에 보면 저번에
그에게 몸이 있구나
그에게 느낌이 있구나
그에게 마음이 있구나  
다 이렇게 끝나요.  그럴때까지 공부지으라 그러셔요 그게 결론이거든요.
아 관찰하다보니 보니까 얘가 몸이 있구나
분별이 없기 때문에

자 아까 초만 있듯이 그런 샛길로 빠져가다 여기서는 하나더 있어요.
빨간색 초보다 “얘가 몸이 있구나” 할때 어떤일이 벌어지냐하면
아까 빨간색 파란색 초 두개 이러는 것만이 아니라 더 넘어서 갔고
바깥에서 안팎에서 몸이 관찰이 되는 거예요.
그냥 내 몸 안에서 마음으로
아! 몸이 있구나 이러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밖에서 안에서 진짜로 보는 무어가 있어갔고
얘 몸이 있구나
이렇게 된다는 거죠 이해 되셨나요 이게 위빠사나입니다.

그때 한번 보세요. 어 얘 몸이 있구나 하면 지금 얘가 몸이 있구나 하는 그것은  몸이 아니죠 마음도 아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들것 아닙니까?
도대체 이 몸이 몸을 보고 있는 다른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몸을 보고 있는 다른것이 있으니까
그제서야 몸과 마음은 진짜로 내가 궁극이 아닌 거죠
그때 나가 있고 나가 없어집니다.
실지로 그러한 불성이 있다는 거죠.
그때 그 불성을
하나는 삼매로 불성이 드러나서 아예 정지상태로 몸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삼매 불성이 드러나 갔고
위빠사나는 그 개체를 오온을 관찰하는 그 무엇이 드러나는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위빠사나로 다시 돌아와서
그것이 있는데 관찰하는게 이 모든걸 얘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걸 다 보고 있는데 그게 될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죠?
연습해야죠.
그것이 이 모든걸 보고 있으니까 그것이 되도록 이 모든걸 볼려고 노력해야죠.  그런데 이 모든걸 볼려고 하면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얘만 볼려고 하면 되는 겁니다 얘만 볼려고, 그렇죠?

그래서 위빠사나로 돌아와서 얘만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자기만 볼려고 노력하면은
불성이 없다면 안 드러나겠지만
불성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노력만 한다면 드러난다는 거죠.

그러면 보세요 그게 한번 드러났다고 해보죠.
여직 얘가 난 줄 알고 살았는데 이게 아니더라 이거에요
그때부터 괴로움이 어떻게 되겠어요
괴로움이 소멸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얘가 ‘나’일때에 우리는 전방위로 괴로운 거예요
예 에 그제서야 아는거죠
일단 위빠사나 통론으로 얘기 드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지금 네가지 기본자세와
그외 모든 어떤 자세를 취하든 관찰해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끝난거예요 통론으로.  
그러나 다시 얘기해도 관찰이 목적이 아니라
관찰의 방법 그렇게 해서 완전히 꿰뚫어 보여질때까지
여기 몸이 있구나 할때까지
다 보여질때까지
관찰은 후손이에요 후행이에요
몸이 움직이고 있는것을 뒤따라서 뒤순위로 관찰하려는 노력이고
실지로 본성이 드러나면 본성이 선행이되요
몸의 움직임이 노력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관찰이 되어지는 상태에서
알아차려지는 상태에서
움직임이 있게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통론으로 말씀드리는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지 자세]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 있으면서 서 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으면서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 있으면서 누워 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 중략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 중략이 되어 있는 것에 그 대목이 다 있었죠.  
그에게 몸이 있구나 할때까지 하라 이런 말씀이 계셨어요.

여기서 통론으로 어떤 자세든 다 봐라 하셨는데
맨 마지막에 누워 있으면 누워 있다라고 안다라는 말씀은
그는 누워 있어서 누웠다 안다가 아니고요
자면서도 알라는 겁니다.
자면서도 얘는 오른쪽으로 누웠구나
얘는 왼쪽으로 누웠구나 알라는 거죠
더 나아가 자면서 얘를 없애고 얘 없는 상태에서 깨어 있음이 드러나라
이런 말씀인거죠

꿈없는 깊은잠에 완전히 마음은 잠들었는데 깨어있게 됩니다
그게 본성이죠
자 이렇게 통론으로 끝나신 다음에 다시한번 분명하게 알아차림해서
이제 몸 관찰을 가지가지로 나누세요
사실 아까 앞에 통론으로 이미 끝난거거든요.  
그런데 또 가지가지로 처음부터 설명을 해 주세요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나아갈때도 물러갈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앞을 볼때도 돌아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때도 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여기까지 일단락 이에요.


앞으로가고 뒤로가고
앞에보고 뒤돌아보고
구부리고 펴고
무릎도 구부리고 펴고
이차원 행동이죠. 이차원 앞에 뒤에 이차원 이에요  제일 단순 동작이죠.  동작중에는 2차원이 제일 단순합니다.  2차원부터 연습하라는 거에요.  
여기서
앞으로 가고 물러날때라고 하신것은
앞으로 갔다가
이렇게 돌아서 뒤로 오는게 아니고
그것도 반복이 되겠지만 여기서 계신 말씀은
앞으로 갔다가 그 자세 그대로 뒤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상윳따니까야에 말씀이 계시거든요.

얘 거기까지 한번 좀 긴 얘기일까봐 상윳따니까야에 계십니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갈때에 뒤로 안쳐다보고 가는거죠
뒤의 상황들을 미리 잘 기억했다가 잘 파악하고 잘 호지하고
뒤로가는 겁니다.
이렇게 앞으로 뒤로


앞에봤다
돌아봤다
구부렸다
폈다

이 이차원 동작을 한번에 한 동작을 한시간 정도는 해주셔야 겠죠!
이 이차원 동작이 제일 쉬워서도 처음에 있지만
단순동작을 하게 되면 마음이 어떻게 되죠?
우리 단순동작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아요 고요해 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본성이 드러나서
단순동작이 잘 관찰이 되는거죠 삼차원 동작보다는.
그래서 이 단순동작에서 거
뒤로 넘어가지 말고 뒤에 설명할 부분들 가지 마시고
단순동작에서 많이 하는게 좋아요 많이해서
안에서 관찰이 되고 밖에서 몸이 관찰이 되고
이렇게 할때까지 3차원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죠!

여기에 주석들을 보다 보면은 위빠사나가 근접삼매다 이렇게 나와요.
근접삼매다. 삼매는 마음이 없어니까요
삼매에 들면 처음에 몸 관찰이 안된다 이거죠.
마음이 있어야 몸 관찰을 하니까 사띠가 마음은 아니지만
그래서 근접삼매다 하는데 정말 몸이 밖에서 관찰이 될 정도가 되면
스스로가 무심이라고 여겨요.  그런데 무심은 아니죠 논리적으로.
왜냐하면 몸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마음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스스로는 마음이 있는 줄 모를 정도로 굉장히 고요해져 있어요
그때 관찰이 되요.
그 정도로 마음이 없는 듯이 가야지만 몸이 밖에서 관찰이 된다
이런 얘기고요.  왜냐면 마음이 있으면 아까 내가 있구나!
이렇게 되기 때문에 내안에 갖혀 있기 때문에 관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실은 여섯번째 삼매 가면은 식무변처죠
그 움직이면서도 삼매가 된다 무심이다. 이렇게 여기는데 그때는 엄밀히 얘기하면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무심은 아닌데 왜 그렇게 여기냐하면 마음은 진짜 거의 없고 본성이 드러나서 움직임들이 다 관찰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는 그때 이제 무심이다 라고 여기는데 정확히 엄밀히 얘기하면
이것은 부처님께서 나는 평소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
오직 위빠사나 반야만 있다
각성만 있는데
승가를 조건으로 가르킬때
각성속에서만 마음을 일으키고
각성속에서 마음을 유지하고
오직 각성속에서 마음을 소멸시킨다
이런 상태데요
각성만 있고 마음이 없으면 움직임이 있더래도 이치적으로 오래 있는것 같은데 거의 없는 상태데 그때 모든게 다 관찰이 되기 시작하죠.

그 다음에가 삼차원입니다.
가사 발우 의복을 지닐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즉, 그 다음걸 같이 한번 해 보고 드릴께요
먹을때도
마실때도
씹을때도
맛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차이점이 있죠 지금 앞에는 바깥쪽에 벌어지는 삼차원 동작
먹을때부터 맛보는 것까지는 안쪽에서 벌어지는 삼차원 동작, 다르죠
지금 가사 발우 의복을 지닐때에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는 말씀은
바깥쪽 여기 지금 가사 발우 이것밖에 안 나왔지만 바깥쪽에 하는 행위 모두들 얘기하시는 거예요.  삼차원 동작이 그 모든 삼차원 동작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요 결과는 뭐죠?  결과는 앞서서도 얘기 드렸지만 분명히 알면서 행하는 것은 노력이에요.  결과는 분명히 알아차려지면서 행해진다.

비유합니다.
꿈에서 깨어있으면 꿈속에서요 등장인물이 우리가 지금 꿈이라고 해볼께요 오늘밤 꿈입니다 등장인물 몇십분 계시는거죠.  
이 꿈을 깨어있다는 것은 우리가 뭐냐면 꿈 바깥에서 다 지켜봐요 꿈에서 깨어있으면
이때에 바깥에서 다 지켜봐요 그때에 바깥에서 다 지켜보면 여기 있는 분들이 움직이는거 다 보이겠죠.  여기 있는 분들이 느끼는거 다 보이겠죠.  마음 다 알아요. 그것은 좀전에 보세요 여기에
꿈이라면 누가 움직이고 있는데 제가 움직이고 있다 해 보죠.
그걸 관찰 할려고 하겠어요?
아니 바깥에서 깨어 있기 때문에 알아차려지면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까지 여기서 말씀은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자 돌아와서 여기서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라는 것은 노력의 의미고  
분명히 알아차려지면서 행해진다는 것은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때까지 해라는 말씀입니다.

자 영상을 생각하시면서 들으셔야 되요
먹을때
마실때
씹을때
맛볼때도 또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자 입 부분까지 왔어요
먹을때 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킬때도 먹을때죠 마실때 씹을때 맛볼때
입안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넘기는거 까지가 계신 거예요
이것은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는 것은 드디어 몸 안쪽까지 갔죠
몸 안쪽까지 관찰하는 거죠.  

그 다음에게 보면은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제 아까 이 만큼 먹을때 마실때 갔는데 이제 밑으로 갔어요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여러분 우리가 배우신 그 앉아서 방광 안짜고 소변 보기가 이 대.소변 볼때와 맞물려 있어요 그렇게 하시다 보면 관찰이 됩니다.
그래서 몸 안쪽까지 관찰이 되는건데 부처님께서 보시면 단락단락이 아까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가고 앞으로 보고 뒤를 보고 구부렸다 폈다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단락 끝나실때마다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꼭 나와요.

가사 발우를 고치는대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단락 끝나고 먹을때도 마실때도 씹을때도 맛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단락 한다락 끝내시는 이유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한테 딱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말씀하시는 거예요.  유치원 하면은 유치원 한단락 딱 끝나요.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해 되셨죠?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번씩 나오면 하나는 진급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려운 것을.
그래서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단락.
그리고는 드디어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제 한목에 얘기하셨어요.  
이제 그 정도가 됐다면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아까 했든 겁니다.  아까 앞에 통론으로 걷기 위해서 더 붙혀갔고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제 앞에 것이 됐다면 일상생활에서도 다 되는것 하시라는 겁니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이제 누우면서가 아니라 여기서
잠들면서도 보시죠.
이제 일상 대낮에 다 되었으면 저녁에 잠들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어떤 의미죠?  잠드는 것을 알다는 의미예요.
우리가 잠드는 것 알아요 저기까지는 알죠.
아~ 졸립다 혹은 좀 더 예민하신분은 아~ 잠이 들려고 한다 그 상태가  
여기까지는 알죠 그런데 그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은요
아~ 잠들려고 한다에 잠드는 것이 아니라 혼침상태에요.  

뇌에 몽글몽글 뇌에 가운데 쯤에 생각들이 많이 퍼져 있는것이
뇌의 가운데쯤 밑에 뇌의 정가운데를 얘기하는거 아닙니다.
제가 표현을 잘못했군요. 가운데가 뇌의 가운데를 생각하겠구나!

뇌의 중간에서 제일 아랫부분 뇌가 있다면 그 가운데가 아니라
그 극지점에서 뇌의 제일 아랫부분 그 부분쯤으로 생각이 몰리죠.
생각이 뇌에 많이 퍼져 있든 것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혼침으로 들어가죠 몽글몽글인데 아직 잠든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몽글몽글 하고 모여있는 것이 쏙 사라지면 잠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잠으로 들어가는걸 지켜 봤다면 잠에서 깨어있게 되죠.
어떤 의미냐 하면 잠들기 전이 있고 잠든 다음이 있고 그 중간이 교집합이 혼침인데 혼침전부터 지켜봐서 혼침에도 깨어있다면 그건 마음이 아니에요.  
이제 왜냐면 누가 혼침을 하고 있나하면 마음이 혼침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혼침인데 지켜보고 있다면

이건 언제 본성의 무더기죠.
아직 본성이 완전하지 않은 불성의 무더기인데 그래서 몽글몽글 하다 쏙 들어갔는데 쏙 잠에 들어간것까지 지켜봤다면 본성의 무더기가 깨어난거죠.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본성의 무더기가 드러나면 온 방면에 깨어있구나 이런게 없어요 처음에는.
삼매로 비유하죠
초선 삼매를 부처님께서 즉각적으로 들고
유지할만큼 시간상으로 하고
아무때나 빠져나와라 하신것처럼
초선에도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보통 있잖아요.

잠에서 몽글몽글 들어가는 것을 깨어서 지켜봤다고 해도 그게 유지하는 시간이 달라요 공부에 따라서
한번 그랬다고 계속 그렇게 된다가 아니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온밤 내내 깨어 있기가 공부가 깊어야 그렇게 되는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잠에서 깨면서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렇게 돼 있는거죠.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분명히 알려면은요
그 전부터 깨어 있어야 되요. 잠에서 누가 잠드냐? 마음이 잠드는 겁니다.

아침에 누가 깨냐 마음이 깨는 겁니다.
마음이 잠드는 것을 지켜 볼려면 마음이 아니어야 되고
아침에 마음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려면
1) 이미 그 전부터 깨어 있어야 되고
2) 그것은 마음이 아니어야 된다라는 거죠 . 그게 불성입니다

그러면 잠든 이후와 아침에 깨기 이전과의 그 중간시간
예를 들어 잠자는 평균시간이 8시간이라고 해 보죠
8시간 내내 깨어있지 못하더라도 공부의 깊이에 따라서 다르니까

뭔가 깨어있다는 거잖아요  뭔가 깨어있는 사람은 뭘 확인하는 줄 아세요?
불멸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생멸하는 것은 마음이거든요.
마음이 변화되면서 생멸하는 것이 아니고요
진짜 생멸의 마음을 볼려면은요
잠든게 완전히 죽은거 거든요 잠들면 보세요.
깊은잠 얕은잠 말고 누가 몸뚱아리를 찔러요.

깊은잠에 들었으면 모르죠.  연탄불 냄새가 나도 모르죠
깊은잠에 들면 소리가 옆에서 있어도 모르죠
즉, 이 얘기는 뭐죠?
몸뚱아리에 눈 귀 코 혀 몸이 잠들었다는 거죠
안이비설신의 중에 안이비설신의 잠들었다는 거죠
이유는‘의’가 잠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그러니까 이 몸뚱아리는 우리가 아시다시피 마음이 기절하면 아무 쓸모없는 거 잖아요 눈 귀 코 혀 몸이 기절만 하더래도
마음이 살아 나와야 얘가 감각도 느끼고 하는 거잖아요.

자 그러면 잠들었다는것은 지금 누가 잠들었나는 거냐
당연히 몸이 잠들었지만 몸뚱아리가 잠들었다기보다
마음이 잠들었기 때문에 잠든거예요
마음이 죽음이죠

아침에 일어날 때 마음이 살아 돌아나왔는 거에요
마음이 삶이죠
즉, 우리는 이걸로 생멸을 짓는것을 피할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데 말이죠
그 마음이 잠든다음 깨어 있음이 있어요 마음까지 지켜보면서
그것은 잠드는 법이 없어요
지복이고요
너무 지고스러워서
거기서 깨어있게 되면은 아침에 몸뚱아리로 나오기가 싫어요
그대로 죽고 싶어요 물론 이런 생각을 지을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없어요

그럴때 이젠 아침쯤 돌아올때 되면 생각이 미세하게 돌아나오니까
마음이 돌아나오기 시작하니까 그 마음 마저도 알아요
돌아나가기 싫다라는 것을
이대로 죽고 싶다라는 것을

염세로 죽고 싶다가 아니에요 그런 지고와 지복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서 몸뚱아리로 안돌아 나가고
마음으로 안 돌아나가도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멸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돌아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죠
아직 해탈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다 못마쳤기 때문이죠.
원한다고 안 돌아나갈 수 있는게 아니에요
돌아나와요 아침으로 아직도 할 일이 많구나 하면서

자 이게 뭐냐 하면요
힌두교 얘기 잠깐 하겠습니다.
[우파니샤드]죠 힌두교의 최고의 경전이죠
제가 힌두교를 높이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힌두교의 비슷한 얘기가 있어서 할려고 합니다

공부의 경지를 네가지로 얘기 했는데
1. 대낮에 깨어 있는 경지
2. 꿈에   깨어있는 경지
3. 꿈없는 깊은잠에 깨어있는 경지
4. 다시 돌아나와서 모두에 깨어있는 경지

이게 있어요 지금 비슷한 말이에요 왜 힌두교의 비슷한 것을
제가 찬양할려고 얘기 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이것은 공부가 된 사람은 누구나 거치는 경지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양면해탈과 저번에 반야해탈 있다고 얘기 드렸죠
반야해탈에도 두가지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대념처경이 반야해탈이거든요 통찰지 해탈이에요

양면해탈은
통찰지 해탈도 됐고
마음의 해탈 된 것이 제일 높은 양면해탈이고

여기서는 통찰지해탈 반야해탈 이거든요
반야해탈에도 두가지가 있어요
여기에 반야해탈은 대념처경에 반야해탈은 제일 높은 경지에요 반야해탈 중에서
양면해탈 보다 높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야해탈 중에서 제일 높은 경지에요 대념처경이

그러면 반야해탈 중에 낮은 해탈이 뭐냐 라고 하면  
좀전에 지효 회장님이 쟈나경 이라고 선경 앙굿따라니까야에
그것를 저한테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죠
디까니까에는 이렇게 나와요

초선에 들어서 삼매죠
거기서 생긴 통찰지의 무더기로 반야의 무더기로
해로운법 불선업 계목이 아닌 것들을 다 부수어서
100% 계목적이 되면 해탈이다.  이렇게 나와요. 이게 제일 낮은 단계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 해탈을 한 분들은
그리고 좀전에 디까니까에 이렇게 나오고
좀전에 지효 회장님이 보여주신 앙굿따라니까야에 어떻게 나오시냐 하면

초선에 들어서 그 삼매에서 빠져나온 뒤에 이번에 좀 다르게 나오셔요 어떻게 나오냐 하면
색수상행식은 무상이다 이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은 병이요 종기다 이것은 실체가 아니요
이것은 자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알아서  이렇게
말씀계셔요 이것은 우리 오온에 대해서 많이 나왔었죠
그런데 오온은 무상이고 변하기 마련이고 괴로움이고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여정을 잘 보셔야 되요  

우리가 사성제에서
오온 자체가 괴로움이요 많이 들었죠
사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
맨 마지막에 끝날 때에 오취온 색수상행식으로 취하는 다섯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이다 했었죠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을 우리는 맨처음 머리로 배운거예요
머리로 배우는데 와 닿지 않아요  
왜 색수상행식 몸 느낌 인식 의도 아뢰야식이 괴로움이라고 하시지
와 닿지 않은데

그런데 언제 와 닿냐하면 삼매때 와 닿아요. 삼매가 깊을때 와 닿아요.  
그래서 지금 경전에서 [자냐경]에서
초선에 들어서 나왔을때 라는 말씀은
초선에약하게 들은것이 아니라 초선도 고등학교 이상은 들어야 되요.
즉, 즉각적으로 들고 시간상으로 삼매를 얼마든지 유지하고 빠져나올수 있을때까지 초선이 됐다면 그 사람은 초선의 깊은 경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알아요.  뭘?  오온이 아니올시다라는 것을 알아요
쉽게 얘기해서 몸과 마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요
지복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정도 지복이 됐다면
초선에서 빠져나와서 아~ 억수로 지복이잖아 하면서
이 오온은
이 몸뚱아리 느낌 인식 의도 아뢰야식은
정말로 무상하구나
괴로움이구나
병이구나
종기구나
실체가 아니구나 라고 하신 다음에
여기서 마음을 돌려 버려라고 그러셨습니다 하면서
얘한테 마음을 주지 마라
그리고 어디를 향해서 마음을 주나하면
불사를 향해서
마음을 주라 그랬습니다.

2011.  7.  22
녹취자 : 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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