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쌍윳따 니까야

S46:51-S46:56. 제46상윳따 - 제6장 담론 품 (Sākaccha-vagga)

Daisy청량심 2023. 6. 24. 04:45

-     자양분 경

-     방법 경

-     불 경

-     자애가 함께 함 경

-     상가라와 경

-     아바야 경

 

 

자애가 함께 (S46:54) Mettāsahagata Sutta

상윳따니까야 5(각묵스님, 2009) p.381

 

1.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어졌다. 한때 세존께서는 꼴리야에서 할릿다와사나라는 꼴리야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2. 그때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걸식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다.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할릿다와사나로 걸식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의 원림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원림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3.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 평정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4. “도반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5. 그때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그때 비구들은 할릿다와사나에서 걸식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걸식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6. “세존이시여, 저희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걸식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습니다. … …  

 그때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저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7.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되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그런데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

 

도반들이여, 그런데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 평정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 라고.

8. “비구들이여, 이렇게 되물으면 외도 유행승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신들의 세상에서, 혹은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인간의 세상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할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나 혹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로부터 그것을 들은 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9. “비구들이여그러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비구들이여여기 비구는 

 

자애 함께하고 떨쳐버림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 의지하고 소멸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싸띠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고요함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사마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1)

 

(*1) 초기불전의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칠각지를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사무량] 연결 짓는 것은 특이하다고 있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으면 열반을 실현하기보다는 범천이 세상(brahma-loka) 태어난다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D17 §2.13 : M83 §6 : A5:192 §3등을 참조할 )

그렇지만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이 수행법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면
이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강한 힘을 낳는 토대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맛지마니까야』 「앗타까나가라 경」 (M52/ⅰ.351~352) §8~11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구들은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가운데 하나를 토대로 해서
번뇌를 모두 멸진하여 아라한이 되거나 불환자가 되고 위없는 유가안은을 얻게 된다고
경에서 아난다 존자는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 (*2)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2) “‘혐오스럽지 않은 (appaikūla)에는  가지가 있으니,
중생에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satta-appaikūla)
형성된 []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sakhāra-appaikūla)이다.
여기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란 원하는 대상(iṭṭha vatthu) 뜻한다.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paikūla-saññi)’ 라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는 (aniṭṭha saññi)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머무는가?
부정상(不淨相)으로 충만하거나(asubha-pharaa)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한다(aniccanti manasikāra).“(SA.ⅲ.171)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 (*3)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3)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자애(mettā) 가득 펴거나
혹은 요소[, dhātu] 뿐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다.
이렇게 ‘혐오스런 대상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고(paikūle appaikūla-saññi)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다를 피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문다. (*4) 

 

(*4) 앙굿따라 니까야 「띠깐다끼 경」 (A5:144/ⅲ.169~170)
이러한  가지 방법의 주시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설명하고 있으며,
디가니까야 「확신경」 (D28/ⅲ.112~113) §18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이것을 “번뇌가 다하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iddhi anāsavā anupadhikā ariya)”이라 부르고 있고,
무애해도 (Ps.ⅱ.212~213)에서는 성자들의 신통(ariya iddhi)-이라 부르고 있다.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36~38 나타나고 있다.

한편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비구는 자애를 통한  가지나  가지 선을 성취한 
그것을 기초(pādaka) 삼아서 위빠사나를 증장시켜서 아라한됨을 증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위빠사나와 더불어 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magga sambojjhaga)들에 대한 성자들의 신통을 보여준다.”(SA.ⅲ.172)

 

혹은 그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5) 들어 머문다비구들이여이런 반야를 가진 (*6) 비구가 여기서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을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은 깨끗함 정점이라고(*7)  나는 말한다.” (*8)


(*5) ‘
깨끗함을 통한 해탈(subha-vimokkha)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 가운데  번째이.
무애해도 (Ps.ⅱ.39)에서도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닦아서 이것을 얻을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MA.ⅲ.256)에서는 색깔의 까시나들을 닦아서 이것을 얻을 있다고 설명한다.
팔해탈은 디가 니까야 「대인연경」 (D15) §35 앙굿따라 니까야 「해탈 경」 (A8:66) 맛지마 니까야 「긴 사꿀루다이 경」 (M77/ⅱ.12~13) §22 등을 참조할

(*6) ‘
이런 통찰지를 가진 idha-paññassa 옮긴 것이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이것을 세간적인 통찰지를 가진(lokiya-paññassa)으로 소유복합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법구경(Dhp) {375}b 앙굿따라 니까야 「업에서 생긴 경」 (A10:208)에도 나타난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는 이것을  교법에 있는 통찰지(imasmi sāsane paññā 설명하고 있다.(AA.ⅴ.78)

(*7) “
자애에 머무는 자에게는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그때 혐오감이 없는 것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혐오감이 없는 청정한 푸른 색깔 등에 대해 마음을 가져갈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자애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을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끗함이 정점이라고 설하셨다.(『청정도론』 Ⅸ.120)

(*8) 
주석서에 의하면 가르침은 자애를 통한 (mettā-jhāna) 기초로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여 아라한됨을 증득할 없는 자를 위해서 설하신 이라고 한다.
같은 방법은 아래의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정을 통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SA.ⅲ.172)

 

10. “비구들이여그러면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비구들이여여기 비구는 연민 함께하고 떨쳐버림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 의지하고 소멸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싸띠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고요함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사마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다를 피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물질에 대한 산냐( 형상과 분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산냐()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비구들이여나는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공무변처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9) 이런 반야를 가진 비구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9) “연민에 머무는 자가 몽둥이로 때리는 물질로 인한 중생의 고통을 관찰할
연민이 일어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알게 된다.
그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알기 때문에 땅의 까시나 가운데서 [그가 명상했던] 어떤 까시나를 제거하여
물질로부터 벗어남인 허공에 마음을 가져갈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연민은 공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청정도론』 Ⅸ.121)

 

11. “비구들이여그러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비구들이여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싸띠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고요함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사마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다를 피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윈냐냐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비구들이여나는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식무변처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10) 이런 반야를 가진 비구는 여기서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10)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가 갖가지 기쁨을 가져올 원인으로 인해
기쁨이 일어난 중생의 알음알이를 관찰할  더불어 기뻐함이 일어나기 때문에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알음알이() 이해하는데 친숙해져 있다.
순서에 따라 얻은 공무변처를 초월한
허공의 표상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는 알음알이로 마음을 가져갈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더불어 기뻐함은 식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였다.( 『청정도론』 Ⅸ.122)

 

12. “비구들이여그러면 평정을 통한 마음이 해탈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비구들이여여기 비구는 평정 함께하고 떨쳐버림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 의지하고 소멸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싸띠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고요함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사마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 혐오스러운 [대상 다를 피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비구들이여나는 평정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무소유처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11) 이런 반야를 가진 비구는 여기서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11) “평온에 머무는 자는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고통으로 벗어나기를, 이미 얻은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기를.이라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행복(즐거움) 괴로움 등의 구경법(paramattha) 순서에 따라 얻은 식무변처를 초월한
구경법인 알음알이의 부재(abhava) –  부재에는 고유성질이 없다. -  마음을 가져갈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평정은 무소유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소유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청정도론』 Ⅸ.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