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금강경

금강경 3 - 2 (2011-11-09 (수)) - 순일스님

Daisy청량심 2024. 8. 13. 06:48

유색(有色)의 산스크리트 직역은 ‘형상과 빛깔을 가진(것)’이다. 비유색(非有色)은 ‘非형상과 非빛깔을 가진(것)’이다. 즉 ‘형상과 빛깔을 안 가진(것)’이라는 뜻이다.
‘유상(有想)’의 산스크리트 직역은 ‘상을 가진(것)’이며 ‘비상(非想)’은 ‘非상(非想)을 가진(것)’이다. 즉 ‘상(想)을 가지지 않은(것)’이라는 뜻이다.
‘상을 가지지 않은 (것)’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해탈 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림1에서 보듯이 ‘상(想)’과 ‘비상(非想)’은 서로 상호의존성의 관계로서 둘 다 중생이다. 또한 ‘비상’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비상’은 해탈하지 못한 중생이다.

나중에 5장을 공부할 때 그 유명한 구절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가 나온다.
모든 상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비상)’으로 본다면 즉시로 여래를 본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상 아닌 것(비상)’을 보통 여래를 보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들을 한다. 즉 해탈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비상(상 아닌 것)’은 해탈 시켜야 할 중생에 불과하다.

상(想)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고 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상(相, 想)’의 뜻을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상(想)의 산스크리트는 ‘산냐’이다. 이 ‘산냐’를 구마라즙 스님이 한자로 음역하면서 두 가지의 한자로 옮겼다. 그 중 하나는 상(相, 서로, 보다, 자세히 보다, 바탕의 뜻을 가지고 있다)이다. 다른 하나는 상(想, 생각하다, 생각, 모양, 형상)이다. 산냐에는 한자의 두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즉 ‘서로(나와 너 또는 나와 대상)’가 ‘형상’을 보고 난후 ‘생각을 한다.’는 의미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타(自他)-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가 있다.
2. 영상(映像)
3. 분별(分別)

먼저 한 쌍(둘)이상의 무리로 지어진 ‘중생들’이 있다. 그곳에는 ‘영상’이 있다. 영상을 보고 ‘이름’을 짓고 ‘언어’가 생기고 ‘개념’이 생기며 개념의 확장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상(相, 想)이다. 즉 세상전체가 모두 ‘상’이다. 12연기의 일어남이 상(相)의 일어남이고, 12연기의 소멸이 상(相)의 소멸이다. 이러한 상(相)의 소멸이 바로 해탈이다.

이제 ‘비유상비무상’을 살펴보자.
한자본의 ‘비유상비무상’은 산스크리트본에는 ‘결코 상이 아닌 비상도 아닌(것)’으로 되어 있다. 산스크리트를 영어로 옮기면 ‘never 상(想) no 비상(非想)’이다. 여기서 ‘never’를 구마라즙 스님은 그냥 ‘아닐 비(非)’로 옮겼는데(非유상비비상)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never’는 ‘없을 무(無)’에 가깝다.
원문에서 ‘무상비비상(無想非非想)’의 존재 역시 무여열반에 들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역시 이들 또한 해탈하지 못한 중생이다. 중생이긴 한데 세상(相의 세계)에서는 공부가 많이 된 제일 높은 경지에 속하는 중생이다.
‘never 想 no 非想’으로만 본다면 모든 상(相)을 소멸 한 듯한데 왜 아직도 상(相)이 남아 있는 중생일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never 想 never 非想’이 되어야 한다. 즉 ‘no 비상’에서 ‘no’가 ‘never’가 되어야 한다.
‘상’보다는 ‘비상’이 더 공부가 되었지만 여전히 ‘상’과 ‘비상’은 수직적 상호의존성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비상’도 또한 ‘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과 비상’을 모두 소멸시키려면 ‘no 상, no 비상’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 ‘never 상, never 비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한 중생은 ‘상은 never 했는데, 아직 비상은 no만 했다’. 그러므로 ‘비상 또한 never’를 해야 한다. 즉 ‘상’은 결코 아니어서 거의 소멸하였는데, 여전히 ‘비상’은 그냥 ‘no’정도로만 소멸되었다. ‘비상’ 역시 완전히 소멸(never) 되어야 한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no 상(想) no 비상(非想)
2. never 상 no 비상
3. never 상 never 비상
4. nir상 - 상과 비상을 모두 불어서 껐다(無想無非想). nirvana(열반)의 nir이다. 또는 상수멸(想受滅, 상과 느낌을 모두 멸한 열반의 경지)이다.

여기서 뒷 번호가 더 높은 경지의 공부이다. 즉 4번이 해탈이다. 앞서서 ‘유상’도 해탈시키고 ‘비상’도 해탈 시키라는 말씀이 나왔었다. 여기서는 더 나아가 ‘비상이 아닌 것(非非想)’마저도 해탈시키라고 하신다. 즉 ‘비상이 아닌 것’마저도 중생이다. 그러므로 하물며 ‘상 아닌 것(非想)’이야 당연히 중생이다. 그리고 ‘상은 결코 아니지만, 비상도 아닌 것(無想非非想)’마저도 해탈 시켜야 할 중생이다. 그래서 무상무비상(無想無非想, 상도 완전히 소멸시켰고, 비상도 완전히 소멸시켰다)이면 해탈이다. 이것과 관련된 원음경전(근본경전)의 부처님 말씀을 살펴보자.

“①뽓따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긴다. 환희로운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평안하다. 몸이 평안한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그의 감각적 욕망의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생겨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②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을 구족하며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③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사티가 있고 알아차려지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고 사티가 있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④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버려서 사티가 있고 청정한 제4선을 구족하며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⑤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상(想)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상(想)을 소멸하고 갖가지 상(想)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공(空)’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물질에 대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⑥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아뢰야식’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⑦뽓따빠다여, 다시 비구는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상(想)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⑧뽓따빠다여, 비구는 여기서 ‘고유한 상(想)을 가진 자’가 되는데 그때 그는 그 경지로부터 다시 다른 경지로, 다시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상(想)의 구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 그가 상(想)의 구경에 서있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의도해 나간다면 이런 나의 상(想, 구경의 고유한 상)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상(想)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도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도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상(想, 구경의 고유한 상)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상(想)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상수멸)을 체험한다. 뽓따빠다여,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상(想)의 소멸을 알아차리는(sampajana, 알아차려지는) 증득이 있다.”
(디가니까야, D9 뽓다빠다 경)

편의 상 ‘넘버링’을 하였다.

①번은 욕계(欲界)의 ‘감각적 욕망’을 떨치고 초선에 들은 것이다. 이때에는 ‘감각적 욕망의 상(想)’은 소멸하고, 오직 ‘초선의 상(想)’만이 있다. ‘감각적 욕망의 상(想)’은 거친 상이다. 그러나 ‘초선의 상(想)’은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다.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미묘하고 참된’이고 다른 하나는 ‘상(想)’이다. ‘미묘하고 참된’은 초선이라는 삼매를 통해서 ‘반야의 무더기’가 조금 드러난 것이다. ‘상(想)’은 아직 반야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즉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반야가 드러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해탈하지 못해서 ‘상(想)’이 있는 상태이다. 원음경전의 디가니까야를 보면 ‘계율을 조건으로 삼매가, 삼매를 조건으로 반야의 무더기가 드러난다.’는 말씀이 계신다. 즉 착하고 건전한 법을 짓는 사람만이 삼매의 수행주제를 할 때, 삼매가 되며, 또한 오직 그 삼매가 될 때에만 그 만큼의 ‘반야의 무더기-반야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어느 정도만 드러날 때, 무더기라고 함’가 드러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은 ‘상(想)’이고, 초선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감각적 욕망의 상’과 비교했을 때는 ‘비상(非想)’이 된다.
이때에는 오직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나라는 잠재적 경향성’이 소멸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진 자(者)’가 있다.

② 제2선에 들면 초선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 소멸한다. 그리고 삼매에서 생기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여기서 초선은 ‘상(想)’에 해당하고,  2선은 초선에 대해서는 ‘비상(非想)’이 된다.
초선에서부터 무소유처까지 전부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라고 같은 문장으로 나오지만, 높은 삼매일수록 ‘더욱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다. 더불어 ‘반야의 무더기’도 더욱더 많이 드러난다.
이때에도 오직 삼매에서 생긴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는데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10가지 족쇄 중에서 8번째인 자만(自慢)이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③④번은 ①②번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즉 ③번은 ②번에 비해서 더욱 ‘비상(非想)’이고 ④번은 ③번에 비해서 더욱 비상이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⑤번 이전까지는 높은 삼매에 들게 되면 그 이전의 삼매에서 생긴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 소멸했었다. 그러나 공무변처에 들게 되면 그 이전까지 있었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물질에 대한 상(想)이 소멸한다. 즉 앞서의 초선에서 사선까지는 ‘물질의 세계’에서의 삼매였던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물질을 완전히 초월한 삼매이다. 즉 초선부터 사선까지는 ‘색(色, 물질)’의 삼매였다면 공무변처부터는 ‘비색(非色)’의 삼매이다.
앞서서 부처님께서 ‘유색(有色)도 비색(非色)’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라는 말씀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흔히 초선부터 사선까지를 ‘색계(色界) 삼매’라고 하고, 공무변처부터 무상비비상처까지를 ‘비색계(非色界) 삼매-보통 무색계 삼매라고들 명칭 하지만 직역은 비색계삼매이다-’라고 한다.
이때에는 오직 공무변처에 대한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⑥번의 식무변처에 들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하고 이때에는 오직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⑦번의 무소유처에 들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은 소멸하고 이때에는 오직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⑧ 여기서 그는 ‘고유한 상(想)’을 가진 자(者)‘가 된다.
①~⑦번의 무소유처까지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만이 있고, 이때에는 ‘미묘하고 참된 상(想)을 가진 자(者)’만이 있었다. 그런데 ⑧번에서 처음으로 ‘고유한 상(想)을 가진 자(者)’가 나왔다. 그러므로 별도의 말씀이 안 계셔도 ⑧번은 ‘무상비비상처-보통 비상비비상처라고 부른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경지로부터 점차로 ‘상(想)의 구경’까지 이르게 된다. 즉 ‘고유의 상(想)’이 점진적으로 완전히 전체로 편재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태양이 있고 먹구름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때, 그 먹구름만 사라지면 태양은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즉 개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고유한 상(想)’이 구경까지 편재하는 것이지만, 궁극의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 반야는 태양처럼 이미 전체로 편재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상(想, 먹구름)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상(想)의 구경’은 금강반야가 거의 다 드러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역시 ‘미세한 상(想)’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의도하지 말라’고 하신다. 의도하면 ‘상(想)의 구경’은 사라지고, 다시 ‘거친 상(想)’이 생겨난다는 것은 즉 공부가 후퇴한다는 말씀이다. 계속해서 의도하지 않으면 ‘미세한 상(想), 구경의 상(想)’마저 소멸한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구경의 상(想)’마저도 ‘미세한 상(想)’이 남아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구경의 상(想)을 가진 자(者)’가 있었기 때문이다.
10가지 족쇄 중에서 8번째인 ‘자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12연기의 두 번째가 바로 ‘의도’이다.
존재하는 자(者)는 ‘의도’가 있다. 의도가 있으면 ‘존재’하게 된다. 의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상(想)이 있다.
이제 ‘그는 소멸했다’ ‘모든 상(想)도 소멸했다’.

“태어난 것은 부수어졌다(소멸했다). 청정한 범행(梵行)은 이루어졌다. 하여야 할 일은 다하여 마치었고, 더 이상의 윤회란 없다.”

‘구경의 상(想)’마저도 상(想)이다.
그러므로 ‘비상(非想)’도 상(想)이다.
‘비비상(非非想, no 비상)’도 상(想)이다.
‘무상비비상(無想非非想, never 상 no 비상)’도 상(想)이다.
상수멸(모든 상과 상 아닌 것들을 소멸한)만이 오직 해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