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웨살리로 탁발을 가셨다.
3. 그때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가 웨살리에서 산책을 나와 이리 저리 경행하다가 큰 숲의 중각강당으로 왔다.110) 아난다 존자가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보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말씀드렸다.
110) 주석서에 의하면 이번에 삿짜까가 세존을 뵈러 온 것은 잠에 대한 질문(niddā-pañha), 특히 '낮잠(divā supita)'에 대한 질문을 드리기 위해서라고 한다.(MA.ii.284) 이 낮잠에 대한 질문은 본경 §45에 나타난다.
“세존이시여,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가 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논객이고 스스로 학문이 깊은 자라 말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부처님을 비방하려 하고 법을 비방하려 하고 승가를 비방하려 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니 세존께서 연민히 여기시어 잠시 앉아계시면 좋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한 곁에 앉아서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4.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사문 · 바라문들은
몸을 닦는 수행에만 몰두하며 머물고 마음을 닦는 수행에는 몰두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들은 몸에서 일어난 몸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전에 어떤 사람이 몸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허벅지가 마비되고
심장이 딱딱하게 굳고 입에서는 뜨거운 피가 나오고 미치고 정신이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의 마음은 몸에 종속되고 몸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마음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반면에 어떤 사문 · 바라문들은
마음을 닦는 수행에만 몰두하며 머물고 몸을 닦는 수행에는 몰두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들은 마음과 마음부수에서 일어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전에 어떤 사람이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허벅지가 마비되고 심장이 딱딱하게 굳고 입에서는 뜨거운 피가 나오고 미치고 정신이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의 몸은 마음에 종속되고 마음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몸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래서 저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고따마 존자의 제자들은
마음을 닦는 수행에만 몰두하여 머물지 몸을 닦는 수행에는 몰두하지 않는다.'라고.”
5. “악기웻사나여, 그러면 그대는 어떤 것이 몸을 닦는 것이라고 들었는가?”
“예를 들면 난다 왓차, 끼사 상낏짜, 막칼리 고살라가 있습니다. 111)
111) 복주서에 의하면 난다 왓차(Nanda Vaccha), 끼사 상끼짜(Kisa Saṅkicc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의 세 사람은 아지와까 수행자들이다.(MAȚ.iii.123) 막칼리 고살리에 대해서는 본경 §48의 주해를 참조할 것.
고따마 존자시여, 그들은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음식을 주려고] 오라 하면 가지 않고, [음식을 주려고] 서라 하면 서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을 받지 않고, [내 몫으로] 지칭된 것을 받지 않으며, 초청에 응하지 않고,
그릇에서 떠 주는 음식을 받지 않고, 항아리에서 퍼주는 것을 받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와서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막대기를 넘어와서 주는 것을 받지 않고,
절굿공이를 넘어와서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며,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 받지 않고,
임신부에게 받지 않고, 젖 먹이는 여자에게 받지 않고, 남자에게 안겨 있는 여자에게 받지 않으며, [보시한다고 널리 알린 그 음식을 받지 않고, 개가 옆에서 보고 있을 때 받지 않고, 파리떼가 날아다닐 때 받지 않고, 생선과 고기를 받지 않고, 곡차, 과일주, 발효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한 입의 음식만 먹고, 두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두 입의 음식만 먹고 … 일곱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일곱 입의 음식만 먹고,
한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고, 두 닷띠의 음식 만 구걸하고, … 일곱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며, 하루에 한 번만, 이틀에 한 번만 ... 이런 식으로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삽니다.”112)
112) 본 문단은 본서 제1권 「사자후의 긴 경」 (M12) §45와 동일하다.
6. “악기웻사나여, 그런데 그들은 정말 그것으로만 삶을 영위하는가?”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때는 아주 좋은 딱딱한 음식을 먹고,
아주 좋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아주 좋은 것을 맛보고, 아주 좋은 것을 마십니다.
그래서 [다시] 그들의 몸은 원기로 충만하고 튼튼하고 살찌게 됩니다.”
“악기웻사나여, 그들은 처음에는 버리고 나중에는 다시 취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몸이 살찌기도 하고 여위기도 한다.
악기웻사나여, 그런데 그대는 어떤 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들었는가?”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마음을 닦는 수행에 대해 세존의 질문을 받았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7. 그러자 세존께서는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악기웻사나여, 그대가 처음에 말한 몸을 닦는 수행은
성자의 율에서는 몸을 닦는 법다운 수행이 아니다.
악기웻사나여, 그대는 몸을 닦는 수행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다시 마음을 닦는 수행을 알겠는가?
악기웻사나여, 이제 어떻게 해서 그가 몸을 닦지 않은 사람, 마음을 닦지 않은 사람,
몸을 닦은 사람, 마음을 닦은 사람이 되는지 그것에 대해 잘 듣고 마음에 잘 잡도리하라. 이제 나는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8. “악기웻사나여, 어떻게 사람이 몸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은 자가 되는가?
악기웻사나여, 여기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가 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고 그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길 갈망한다. 그런 그에게 이제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한다.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고 다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가 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악기웻사나여, 그에게 일어난
그 즐거운 느낌은 마음을 제압하면서 머무나니 그것은 몸을 닦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에게 일어난 그 괴로운 느낌은 몸을 제압하면서 머무나니 그것은 마음을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기웻사나여, 이와 같이 양 측면 모두,
즉 몸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그의 마음을 제압하여 머물고,
마음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그의 몸을 제압하여 머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같이 몸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못한 자이다.”
9. “악기사나여, 어떻게 사람이 몸을 닦고 마음을 닦은 자가 되는가?
악기사나여, 여기 [법을]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더라도
그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지 않고 그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길 갈망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이제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한다.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고 다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악기웻사나여, 그에게 일어난
그 즐거운 느낌은 마음을 제압하지 않나니 그것은 몸을 닦았기 때문이고,
그에게 일어난 그 괴로운 느낌은 몸을 제압하지 않나니 그것은 마음을 닦았기 때문이다.
악기웻사나여, 이와 같이 양 측면 모두,
즉 몸을 닦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그의 마음을 제압하지 않고,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그의 몸을 제압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같이 몸을 닦고 마음을 닦은 자이다.”
10. “저는 '고따마 존자는 몸을 닦은 분이고 마음을 닦은 분이다.'라고
이와 같이 고따마 존자께 믿음이 생깁니다.”
“악기웻사나여, 참으로 그대는 [나의] 덕을 해치고 비방하는 말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나는 그대에게 설명하리라.
악기웻사나여, 내가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 이후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면서 머물거나,
혹은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몸을 제압하면서 머무는 그런 경우란 없었다.”
11. “정말 고따마 존자께는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면서 머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정말 고따마 존자께는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몸을 제압하면서 머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12. “악기웻사나여, 어찌 없었겠는가?
악기웻사나여, 내가 깨닫기 전, 아직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라고.”
13.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나중에 아직은 연소하고 젊고 머리가 검고
축복받은 젊음을 구족한 초년기에 부모님이 원치 않아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심에도 불구하고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출가했다.”
14. “그런113) 나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무엇이 유익함[善]인가를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라라 깔라마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이 법은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114)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과 동등한 것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법입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술을 두드리자마자 말하자마자115)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116)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단순히 믿음만으로117)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113) 이하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라 라마뿟따를 참예하여 수행하는 부분(§§14~16)은 본서 제1권 「성스러운 구함 경」 (M26) §§15~17과 동일하다. 그곳의 주해들을 모두 여기에 그대로 옮겨 실었다.
114)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은 yattha viññū puriso(지혜로운 사람이면)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이것을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yasmin dhamme paṇḍito puriso)”(MA.ii.171)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주석서대로 옮겼다.
115) “'입술을 두드리자마자(oṭṭha-pahata-mattena)'라는 것은 스승이 그에게 말해준 것에 응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자마자라는 뜻이고, '말하자마자(lapita-lāpana-mattena)'라는 것은 스승이 그에게 말해준 것을 그대로 따라 하자마자라는 말이다.” (MA.ji.171)
116) “'지혜로운 말(ñāṇa-vāda)'이란 ‘나는 안다.'라고 하는 말이고, 확신에 찬 말(thera-vāda)'이란 '나 장로가 여기 있노라.'라고 확신에 차서 하는 말(thira-bhāva-vāda) 이다.”(MA.ii.171)
117) “'단순히 믿음만으로(kevalaṃ saddhāmattakena)'라는 것은 통찰지로써 실현하지 않고 단순히 청정한 믿음만(suddha saddhā-mattaka)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다.”(MA.ii.171)
악기웻사나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어떻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무소유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118)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믿음119)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싸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싸띠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삼매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리라.”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118) “무소유처를 마지막으로 하는(ākiñcaññāyatana-paniyosānā) 일곱 가지 증득(satta samāpatti)을 나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이다.” (MA.ii.171) 이 무소유처는 네 가지 무색계 증득 가운데 세 번째로, 세간적인 것이지 출세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119) “이 믿음 등 다섯 가지는 일곱 가지 증득을 얻기 위한 믿음 등이다.” (MA.ii.171)
이 다섯 가지는 니까야에서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 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 bala]으로 불리며 37보리분법에 포함되어 있다. 다섯 가지 기능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324쪽 이하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해제 §8. 『기능[根] 상윳따』(S48)와 『기능 상윳따』(S48)에 포함된 것들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악기웻사나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당신은 이렇게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라고 선언하십니까?”
“존자여, 나는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합니다.”
“깔라마 존자시여, 나도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합니다.”
“존자여, 존자와 같은 분이 우리의 동료 수행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이득이고 큰 축복입니다.
이처럼 내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한 그 법을
존자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존자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합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그 법을 존자가 알고, 존자가 아는 그 법을 내가 압니다.
이와 같이 나처럼 존자도 그렇고 존자처럼 나도 그러합니다.
오십시오, 존자여. 우리 둘이 함께 머물면서 이 무리를 지도해 나갑시다.”
악기웻사나여, 이와 같이 나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 으로 인도하지 못한다.120)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121)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않고 그 법을 염오하면서 떠나갔다.”122)
120) 여기서 '염오', '탐욕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의 일곱 가지는 각각 nibbidā, virāga, nirodha, upasama, abhiññā, sambodha, nibbā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염오(nibbidā) 등의 이 일곱 가지 증득의 법(satta-samāpatti-dhamma)은 윤회(vaṭṭa)에 대해 염오 등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네 가지 도에 대한 바른 깨달음(catu-magga-sambodha)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것으로 인도 하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MA.ii.172)
121)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yāvadeva ākiñcaññāyatanüpapattiyā).'라는 것은 60,000겁의 수명을 가진 무소유처에 태어나는 한 그만큼만 살고 그이상은 살 수 없다. 그 기간이 다하면 그곳에서 죽어 더 낮은 세계로 돌아온다. 그가 이르는 그곳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生老 死, jātijarāmaraṇ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apanimutta) 염라대왕의 덫에 갇혀 있는 것(maccu-pāsa-parikkhitta)이다.” (MA.ii.172)
122) “그때부터 마하살(mahāsatta)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얻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먹고 나서 담즙이나 점액으로 [생긴 병 때문에] 토하고 난 뒤에는 또 다시 한 덩이의 음식을 먹으리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런 일곱 가지의 증득을 불굴의 정진(ussāha)으로 얻었지만 그 증득들에서 이런 다시 돌아옴(punar-āvattika) 등의 재난(ādīnava)을 보자 또 다시 이 법으로 전향하고, 증득하고, 머물고, 출정하고, 반조하리라는(āvajjissāmi vā samāpajjissāmi vā adhiṭṭhaissāmi vā vuṭṭhaissāmi vā paccavekkhissāmi v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MA.ii.172)
15. “악기사나여, 그런 나는 유익한 것[善]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웃다까 라마뿟따123)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웃다까 라마뿟따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이 법은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과 동등한 것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법입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술을 두드리자마자 말하자마자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마는 단순히 믿음만으로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악기웻사나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어떻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라마에게만 싸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싸띠가 있다.
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삼매가 있다.
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리라.”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123) 본경과 본서 제1권 「성스러운 구함 경」 (M26)에서 보듯이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는 세존께서 처음 출가하여 찾았던 두 스승 가운데 두 번째 사람이었으며 그는 세존께 비상비비상처를 가르쳤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웃다까 경」 (S35:103)에서 세존께서는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라고 비판하신 뒤에 이 말의 참다운 의미를 불교식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제2권 「왓사까라 경」(A4:187)에서도 라마뿟따가 언급되는데 주석서(AA.iii.164)와 DPPN은 이 라마뿟따가 웃다까 라마뿟따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는 웃다까 라마뿟따는 초기불전에서 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문자적으로 라마뿟다(Rāmaputta)는 라마(Rāma)의 아들(putta)이라는 뜻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의 부친인 라마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가르쳤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지만 그 경지는 증득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래 주해를 참조할 것.
악기웻사나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라마는 이렇게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라고 선언하셨습니까?”
“존자여, 라마는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 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나도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존자여, 존자와 같은 분이 우리의 동료 수행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 이익이고 큰 축복입니다.
이처럼 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한 그 법을
존자도 스스로 최상 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존자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그 법을
라마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라마가 알았던 그 법을 존자가 알고, 존자가 아는 그 법을 라마가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라마처럼 존자도 그렇고 존자처럼 라마도 그러했습니다.
오십시오, 존자여. 그대가 이 무리를 지도해주십시오.”124)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동료였던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를 스승의 위치에 올려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비상비비상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않고 그 법을 염오하면서 떠나갔다.”
124) 보살과 웃다까 라마뿟따의 이 대화에서 보듯이 라마뿟따의 부친인 라마(Rāma)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라마뿟따는 부친이 천명한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 경지는 증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체득한 보살을 자신의 스승의 위치(ācariyaṭṭhāna)'에 올려놓았으며 보살은 그를 자신의 '동료(sabrahmacāri)'라고 언급하고 있다.
16.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유익한 것[善]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유행하다가 우루웰라의 장군촌125)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땅과 매력적인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아름다운 강기슭과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을 보았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땅은 풍요롭고 숲은 상쾌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은 맑고, 강기슭은 아름답다.
근처에는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다.
참으로 이곳은 용맹정진을 원하는 선남자들이 용맹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125) “'장군촌(Senā-nigama)'은 장군의 마을(senāya nigama)이라는 뜻이다. 처음 겁이 생길 때에 그곳에 장군이 살았던 이유로 그 마을을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혹은 세나니(Senāni)는 수자따의 아버지이고, 그의 마을(gama)이라는 뜻이다.” (MA.ii.173)
주석서는 이처럼 Senānigama를 Sena-nigama로도 끊어 읽고 Semāni-gama로도 끊어 읽어서 두 가지로 뜻을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장군(sena) 촌(성읍, nigama) 이라는 뜻이 되고, 후자는 수자따 아버지의 이름인 세나니(Senāni)의 마을 (gama) 이라는 뜻이 된다.
17. “악기웻사나여,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가지 비유가 즉시 내게 떠올랐다.
악기웻사나여, 예를 들면 젖은 생나무 토막이 물위에 떠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불을 지피고 열을 내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부시 막대를 가지고 왔다 하자.
악기웻사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물위에 떠있는 저 젖은 생나무 토막에다 부시 막대를 비벼 불을 지피고
열을 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젖은 생나무 토막이고
더군다나 [241] 물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지치고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악기사나여, 그와 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126) 감각적 욕망들을 멀리 떨쳐버리지 못한 채 머물거나,
혹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망, 애착, 홀림, 갈증, 열병을 안으로 잘 제거하지 못하고 가라앉히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 사문 · 바라문들은 비록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느끼더라도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127)을 얻을 수 없고, 비록 그런 느낌을 느끼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내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즉시에 떠오른 첫 번째 비유이다.” 128)
126) Ee와 Se에는 kāyena ceva kāmehi avūpakaṭṭhā(육체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리지 못하고)라고 되어있지만 Be에는 kāena ceva cittena ca kāmehi avūpakaṭṭhā(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리지 못하고)라고 나타난다. 문맥상으로도 후자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역자는 이를 따라 옮겼다. 냐나몰리 스님도 역자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로 옮겼다.(냐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335쪽 참조)
127) “여기서 '지(ñāṇa)'와 '견(dassana)’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 sambodha)'은 출세간도(lokuttara-magga)를 말한다.” (MA.ii.287)
128) “이 비유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kilesa-kāma)에 의해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버리지 못한 자는 젖은 무화과 나무토막(alla sakhīra udumbara-kaṭṭha)과 같다. 물속에 잠겨있는 상태는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에 젖어 있는 것과 같다.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에 의해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격렬한 느낌(opakkamikā vedanā)에 의해서도 출세간도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젖어있는 나무를 비록 열심히 비벼도 불을 피울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사람들이 격렬한 느낌이 없이도 출세간도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비비지 않아도 불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MA.ii.287)
18. “악기웻사나여, 참으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두 번째 비유가 즉시 내게 떠올랐다.
악기웻사나여, 예를 들면 젖은 생나무 토막이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불을 지피고 열을 내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부시 막대를 가지고 왔다 하자.
악기웻사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는 저 젖은 생나무 토막에다
부시 막대를 비벼 불을 지피고 열을 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기는 하나 젖은 생나무토막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지치고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악기웻사나여, 그와 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각적 욕망들을 멀리 떨쳐버리지 못한 채 머물거나,
혹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망, 애착, 홀림, 갈증, 열병을 안으로 잘 제거하지 못하고 가라앉히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 사문 · 바라문들은 비록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느끼더라도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비록 그런 느낌을 느끼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내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즉시에 떠오른 두 번째 비유이다.”
19. “악기웻사나여, 참으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번째 비유가 즉시 내게 떠올랐다.
악기웻사나여, 예를 들면 물기 없는 마른 장작이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 이 '북을 지피고 열을 내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부시 막대를 가지고 왔다 하자.
악기웻사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는 저 물기 없는 마른 장작에다
부시 막대를 비벼 불을 지피고 열을 낼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것은 왜냐하면 그 장작이 마르고
물기가 없으며 게다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악기사나여, 그와 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각적 욕망들을 멀리 떨쳐버리고서 머물고,
혹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망, 애착, 홀림, 갈증, 열병을 안으로 잘 제거하고 가라앉힌 자들이 있다.
그 사문 · 바라문들은 비록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느끼더라도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비록 그런 느낌을 느끼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와 견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내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즉시에 떠오른 세 번째 비유이다.
악기웻사나여, 이들이 내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즉시에 떠 오른 세 가지 비유이다.”
20.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랫니에다 윗니를 얹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129)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키리라.'라고,
그래서 나는 아랫니에다 윗니를 얹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켰다.
내가 그렇게 아랫니에다 윗니를 얹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키자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다.
악기웻사나여, 마치 힘센 사람이 허약한 사람의 머리통을 잡거나
어깨를 붙잡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키듯이
나는 아랫니에다 윗니를 얹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켰다.
내가 그렇게 아랫니에다 윗니를 얹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키자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다.
129) “'마음으로 마음을(cetasā cittaṃ)'이란 것은 유익한 마음[善心, kusala-citta]으로 해로운 마음[不善心, akusala-citta]을 제압하고 압박하고 항복시킨다는 말이다.”(MA.ii.289)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130)
130) 여기서부터 아래 §25까지 각 문단의 끝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 문장은 위 §11에서 삿짜까가 “정말 고따마 존자께는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뭄을 제압하면서 머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 드린데 대한 세존의 대답이다.
21.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귓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면서 굉음이 났다.
마치 대 장장이가 풀무를 불면 굉음이 나듯이 그와 같이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귓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면서 굉음이 났다.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22.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다.
악기사나여, 그렇게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거센 바람이 머리를 내리쳤다.
마치 힘센 사람이 예리한 칼로 머리를 쪼개듯이
그와 같이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거센 바람이 머리를 내리쳤다.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23.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머리에 심한 두통이 생겼다.
마치 힘센 사람이 [244] 단단한 가죽 끈으로 머리에 머리띠를 동여맨 것처럼
그와 같이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머리에 심한 두통이 생겼다.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24.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거센 바람이 배를 도려내었다.
마치 능숙한 백정이나 백정의 도제가 예리한 도살용 칼로 배를 도려내듯이
그와 같이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거센 바람이 배를 도려내었다.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25.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내가 입과 코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몸에 큰 불이 붙었다.
마치 힘센 두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양팔을 잡고 숯불 구덩이 위에서 지지고 태우듯이
그와 같이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숨과 날숨을 멈추자 몸에 큰 불이 붙었다.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싸띠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 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26. 악기웻사나여, [245] 그러자 신들이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죽었다.'라고,
다른 신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죽어가고 있다.'라고,
다른 신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죽은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131)이다. 아라한은 이처럼 머문다.'라고.”
131) 문자적으로 '아라한(阿羅漢, Arahan, 應供)'은 √arh(to deserve)의 현재 분사를 취해서 명사화한 것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이미 바라문교 『제의서』의 하나인 『샤따빠타 브라흐마나 (Satapathabrāhmaṇa) 등 베다문헌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샤따빠타 브라흐마나』에는 마치 아라한 즉 존경받아야 할 분이 그 마을을 방문하면 소를 잡아서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문구가 나타난다고 한다.(『금강경 역해』54쪽 참조) 이 술어는 자이나 문헌에도 나타난다. 본경의 여기 이 문맥에 나타나는 아라한은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렇게 고대인도 문헌에서 존경받아야할 분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이 아라한이라는 술어는 초기불교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 불교 최고의 경지인 번뇌 다한 자를 뜻하게 되었다. 아라한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VII.4~25와 XXII.28~30을 참조할 것.
27.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음식을 끊고 수행하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러자 신들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당신이 모든 음식을 끊어버리고 수행하시는 것은 안됩니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만약 당신이 모든 음식을 끊어버리고 수행을 하시면
우리는 당신께 하늘 음식을 당신의 털구멍으로 공급해드릴 것입니다.
그것으로 당신은 연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완전한 단식을 공포했는데도 이 신들이 내게 하늘 음식을 털구멍으로 공급해주고 내가 또 그것으로 연명한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그 신들에게 '필요 없소'라고 거절했다.”
28.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리라.
녹두죽이건 대두 죽이건 완두콩 죽이건 검은콩 죽이건 그것을 한 움큼씩만 먹으리라.'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었나니
녹두죽이건 대두 죽이건 완두콩 죽이건 검은콩 죽이건 그것을 한 움큼씩만 먹었다.
악기사나여, 내가 그렇게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자 내 몸은 극도로 여위어갔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사지는 마치 아시띠까 넝쿨의 마디나 깔라 풀의 마디와 같았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엉덩이는 마치 낙타의 발처럼 되었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등뼈는 줄로 엮어둔 구슬처럼 되었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갈빗대들은 오래된 집의 서까래가 허물어지고 부서지듯이 허물어지고 부서졌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내 동공 안에서 눈동자의 빛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물빛이 깊고 멀리 들어가 보이듯이 깊고 멀리 들어가 보였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머리 가죽은
마치 [246] 익지 않은 쓴 호리병박이 바람과 햇빛에 시들듯이 시들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뱃가죽이 등뼈에 달라붙어
내가 뱃가죽을 만져야지 하면 등뼈가 잡혔고, 등뼈를 만져야지 하면 뱃가죽이 잡혔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내가 대변이나 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땅에 고꾸라졌다.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몸을 편안하게 하려고 손으로 사지를 문지르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29. “악기웻사나여, 사람들은 나를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검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검은 것이 아니라 푸르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문 고따마는 검지도 푸르지도 않고 황금색 피부를 가졌다.'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깨끗하고 맑은 피부색이 파괴 되어 갔다.”
30.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어떠한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가장 지독한 것이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어떠한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가장 지독한 것이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현재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어떠한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경험하더라도 이것이 가장 지독한 것이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을 다른 길이 없을까?”
31.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삭까족의 농경제 의식을 거행하실 때 나는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132)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133)이 되지 않을까?'
132) “삭꺄의 왕에게는 농경제 축제를 행하는 날(vappa-maṅgala-divasa)이 있었다. 그때는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도시의 길도 깨끗이 청소하고 물을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깃발을 세우는 등 온 시가지를 천상의 왕궁처럼 장엄했다. 모든 하인들과 고용인들은 새 옷을 차려입고 향과 꽃으로 장식하여 왕궁에 모였다. 준비된 쟁기들은 모두 금과 은으로 도금되었고, 왕은 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 한 그루 잠부나무가 있었는데 무성한 가지와 함께 시원한 그늘이 있었다.
그 나무 아래 왕자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위로 금빛 별무늬가 새겨진 일산을 세우고 휘장으로 보호하게 하고는 왕은 모든 장신구로 장엄하여 대신들에 둘러싸여 밭가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왕은 금 쟁기를 집어 들었고, 대신들은 은 쟁기를 집어 들고 여기저기서 쟁기질을 했지만 왕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혹은 저쪽 끝에서 이쪽 끝으로 갔다. 왕이 쟁기질을 하는 곳에 풍성한 수확(mahā-sampatti)이 있었다. 그래서 보살을 돌보면서 주위에 앉아있던 시중들도 그것을 보기 위해 휘장 밖으로 나갔다. 그때 보살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이 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하고 들숨날숨을 챙겨(ānāpāne pariggahetvā) 초선(初禪, paṭhama-jjhāna)에 들었다. 시중들은 식사 후 잠시 경행을 했고,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없어졌지만 오직 그 나무의 그늘은 잘 장엄한 채 드리워져 있었다. 시중들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홀로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얼른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살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는 신통(pāṭihāriya)을 보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급히 와서 그 신통을 보고 아들이여, 이것이 너를 위한 두 번째 경배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 인사했다.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MA.ii.290~291)
133) “'깨달음을 위한 길(maggo bodhāya)'이라 하셨다. 여기서 '길[道, magga]'이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초선(ānāpānassati-paṭhamajjhāna)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라는 말씀이다.”(MA.ii.291)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134)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
134)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는 satānusāriviññāṇaṃ ahosi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satānusāri는 sati와 anusāri의 합성어이다. sati는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초기불전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sati의 어원인 √smṛ(to remember)의 기본 의미인 '기억' 으로 이해하였다. 냐나몰리 스님도 memory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anusāri는 anu+√sr(to flow)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따름을 뜻하고 중국에서는 隨順(수순)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농경제 때 체험한 이 경지는] 깨달음을 위한 길(bodhāya maggo)이 바로 되지는 않고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초선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기억이 일어나서(uppanna-sati) 바로 그 다음에(anantaraṃ) 알음알이가 일어난 것(uppanna-viññāṇa)을 두고 satānusāriviññāṇa 즉 기억을 따라서 알음알이가 일어남이라 한다.” (MA.ii.291)
한편 satānusāri-viññāṇa는 『디가 니까야』제3권 「정신경」 (D29) §27에도 “쭌다여, 과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가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지 기억한다.”라는 문맥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로 옮겼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는 이 복합어를 그곳의 문맥에 따라서 “전생을 기억하는 것과 함께하는(pubbenivāsa-anussati-sampayuttaka) 지혜(ñāṇa)”(DA.iii.914)로 설명하고 있어서 그렇게 옮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satānusāri-viññāṇa에서 sati는 기억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32.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행복135)은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데,
그것을 내가 왜 두려워하는가?'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36)
135) “여기서 '행복(sukha)'이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초선의 행복(ānāpāna-ssati-paṭhama-jjhāna-sukha)을 말한다.”(MA.ii.291)
여기서 '행복'으로 옮기는 단어는 sukha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즐거운 느낌(sukha-vedanā), 괴로운 느낌(dukkha-vedan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a-vedanā)의 세 가지 느낌의 하나로 나타나는 sukha는 대부분 '즐거움'으로 옮기고 여기서처럼 초선 등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sukha나 느낌의 문맥에서 나타나지 않는 sukha는 '행복'으로 옮기고 있다.
136) 이 구절은 고행에 대한 부처님의 반성이 깊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닌, 수행을 통한 행복을 인정하는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괴로움의 무더기의 짧은 경」(M14) §20에 나타나는 “행복으로 행복은 얻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으로 행복은 얻어집니다.”라는 니간타들의 강변과 여기에 대한 세존의 대응도 참조할 것.
33.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극도로 야윈 몸으로 그런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으리라.'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었다.
악기웻사나여, 그때에 다섯 비구들137)이
'참으로 우리의 사문 고 따마가 법을 증득한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시중들고 있었다.
악기사나여, 그러나 내가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자
그 다섯 비구들은 '사문 고따마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혐오하여 떠나 가버렸다.”
137) '다섯 비구들' 혹은 '오비구(五比丘, pañcavaggiyā bhikkhū)'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성스러운 구함 경」 (M26) §24의 주해를 참조할 것.
24.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덩어리진 음식을 먹고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138)
138) 여기서부터 아래 §44까지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 문장은 위 §11에서 사짜까가 “정말 고따마 존자께는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면서 머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 드린데 대한 세존의 대답이다.
35. “그런 나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36. “그런 나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렀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 ·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이를 일러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37. “그런 나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기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38.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248]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
그런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시 여기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냈다.”
39.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初更)에 증득한 첫 번째 명지(明知)139)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나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나듯이,
내게도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139) 본경에 나타나는 세 가지 명지[三明, te-vijjā] 와 명지(明知, vijjā)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두려움과 공포 경」(M4) §28을 참조할 것.
40.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
그런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알았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말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아주 나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말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알았다.”
41.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二史)에 증득한 두 번 째 명지(明知)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나고 어둠이 [249]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나듯이,
내게도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42.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
그런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43.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나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했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
44. “악기웻사나여, 이것이 밤의 삼경(三更)에 내가 증득한 세 번째 명지(明知)이다.
마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나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나듯이,
내게도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났고 어둠이 제거되고 광명이 일어났다.
악기웻사나여, 내게 비록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45. “악기사웻나여, 나는 수백의 대중들에게 법을 설한 것을 기억한다.
아마 그 사람들은 제각기 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오직 나를 위해 법을 설하신다.'라고, 악기웻사나여, 그러나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
여래는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공평하게 그들에게 법을 설할 뿐이다.
악기웻사나여, 설법을 마치고 나면 나는 항상140) 머무는 이전의 삼매의 표상141)에 안으로 싸띠를 확립하고 고요하게 하고 전일하게 하고 집중한다.” 142)
140) '항상'은 niccakappaṃ niccakappaṃ을 옮긴 것이다. 직역하면 nicca(영원한)-kappaṃ(겁 동안) nicca(영원한)-kappaṃ(겁 동안)이 되어서 '영겁 동안' 혹은 '영원히'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주석서는 nicca-kappaṃ을 항상(nicca-kalaṃ)으로 설명하고 있어서(MA.v.82 등) '항상'으로 옮겼다.
사실 kappa가 겁(劫)이라는 엄청나게 긴 시간 단위로만 항상 쓰이는 것이 아닌 것으로 주석서는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경」 (D16) 등에 “누구든지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을 닦고, 많이 [공부]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닦은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일 겁을 머물 수도 있고, 겁의 남은 기간이 다하도록 머물 수도 있다.”(D16 83.3; 『상윳따 니까야』제6권 「탑묘 경 (S51:10) §5)라고 나타나는데,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겁은 수명의 겁(āyu-kappa)을 뜻한다고 하며, 그것은 백 년이라고 한다.(SA.iii.251; AA.i.149) 그 당시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의 한계를 다 채울 때까지 머물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niccakappaṃ niccakappaṃ을 '영겁에서 영겁으로'로 직역하면 아주 극적인 표현이 될 수 있지만 현재 우리가 쓰는 영겁이라는 어법과 여기에서 뜻하는 niccakappaṃ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이해해서 그냥 '항상 오래오래' 정도로 옮겼다.
'겁(劫, kappa)'에 대해서는 『상윳따 니까야』제2권 「산 경」 (S15:5)의 내용과 §3의 주해와 제6권 「탑묘 경」(S51:10) §5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141) '삼매의 표상(samādhi-nimitta)'에 대해서는 다른 주석서의 설명을 인용 한다.
“어떤 한 가지 삼매의 표상(aññatara samādhi-nimitta)'이란 38가지의 대상(명상주제)을 가진 [삼매] 가운데서 어떤 하나의 삼매가 삼매의 표상이다.” (AA.iii.230)
『청정도론』「삼매 품」(III~XI)에는 삼매를 닦는 명상주제로 40가지를 들어서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석서에는 38가지 명상주제라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본서 제1권 「지워 없앰 경」 (MS) §18의 주해 참조) 이러한 대상 중의 하나를 가진 삼매를 삼매의 표상이라고 주석서 는 설명하고 있다.
142) '나는 항상 머무는 이전의 삼매의 표상에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고요하게 하고 전일하게 하고 집중한다.'는 tasmiṃ yeva purimasmiṃ samādhinimitte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mi sannisādemi ekodikaromi samādahāmi yena sudaṃ niccakappaṃ nicca-kappaṃ viharāmīti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항상(nicca-kalaṃ) 그 공한 과의 삼매(suñña phala-samādhi)에 머무는데 그 '삼매의 표상(samādhi-nimitta)'에 마음을 확립하고 집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MA.ii.292)
공한 과의 삼매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공(空)에 대한 긴 경」 (M122) §6과 주해들을 참조할 것.
“그것에 관해선 고따마 존자를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라한이시고 정등각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따마 존자께서는 낮에 낮잠 주무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46. “악기웻사나여, 나는 여름의 마지막 달에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깔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잠을 잤던 것을 기억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사문 · 바라문들은 이것을 두고 미혹에 빠져 머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런 것을 두고 미혹하다거나 미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악기웻사나여, 어떻게 미혹한 사람이 되고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지
그것을 이제 듣고 잘 마음에 잡도리하라. 나는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7.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그가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제거하지 못했다면, 그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한 사람이 된다.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그가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를 제거했다면,
그를 나는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143)
143)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āsavānañhi pahānā asammūḷho hoti).'라고 하셨다. 번뇌의 제거(āsavānan pahāna)는 그가 깨달은 사람이냐 미혹한 사람(sammūḷha)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불교의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은 항상 번뇌 다한 자(khīnāsava)로 여러 경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본서 제1권 「뱀의 비유 경」(M22) §10 등) 그런 것이지 잠을 자느냐 마느냐는 깨달음이나 미혹하지 않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신다.
악기웻사나여, 여래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악기웻사나여, 예를 들면 야자수가 그 윗부분이 잘리면 다시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여래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를 모두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 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48.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께서는 이와 같이 거듭되는 무례한 말과 비방하는 조의 말투로 대응해도
피부색이 깨끗하고 안색이 밝아서 참으로 아라한 · 정등각자에게 어울립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전에 저는 뿌라나 깟사빠와 논쟁을 벌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논쟁을 시작하더니 엉뚱한 말로 받아넘기고 회피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불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께서는 이와 같이 거듭되는 무례한 말과 비방하는 조의 말투로 대응해도 피부색이 깨끗하고 안색이 밝아서 참으로 아라한 · 정등각자에게 어울립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전에 저는 막칼리 고살라144)와 … 아지따 께사깜발라145)와 …
빠꾸다 깟짜야나146)와 … 산자야 벨랏티뿟따147)와 …
니간타 나따따148)와 논쟁을 벌였던 것을 기억합니다.149)
그는 논쟁을 시작하더니 엉뚱한 말로 받아넘기고 회피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불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서는 이와 같이 거듭되는 무례한 말과 비방하는 조의 말투로 대응해도 피부색이 깨끗하고 안색이 밝아서 참으로 아라한 · 정등각자에게 어울립니다.
144)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의 사상은 한마디로 운명론(niyati)으로 정리된다. 모든 것은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노력으로도 이를 바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행이나 악행을 저질러도 그것 때문에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그는 업지음(kiriya)도 노력(viriya)도 업의 결과(vipāka)도 모두 부정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하시며(A1:18:4/i.33) 그의 사상이 가장 천박하다고 꾸짖으신다.(A3:135/i.286)
주석서에서는 그의 이름을 풀이하는 것으로도 그를 비하하고 있다. 그가 하인으로 있으면서 기름통을 가지고 흙탕길을 갈 때 그의 주인이 절대로 넘어지지 마라(ma khāli, 마칼리)고 했는데도 넘어졌기 때문에 막칼리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DA.i.143; MA.i.422) 그리고 그는 소 외양간(go-sāla, 고살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살라라고 한다. 그는 아지와까(Ajīvaka, 邪命外道) 가운데 가장 유명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DPPN은 그의 교설을 아지와까의 교설과 동일시하고 있다.(DPPN . v. ajīvaka)
자이나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살라 망칼리뿟따(Gosāla Maṅkhaliputta, 혹 은 Ghosāla Maṅkhamiputta)로 알려졌으며 아버지는 망칼리였고 어머니는 밧다였다고 한다. 자이나 문헌에서는 maṅkha를 다니면서 그림을 보여 주면서 구걸하는 자(A wandering beggar earning his liveli-hood by showing pictures)'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는 일종의 광대였던 것 같으며 고살라는 그가 사문이 되기 전에 가졌던 소치는 직업을 뜻한다. 이처럼 자이나 문헌에서도 그를 하시(下視)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바루아 교수(Barua 298)에 의하면 빠알리어 Makkhali와 아르다마 가디어(자이나교의 경전언어)의 Maṅkhali가 산스끄리뜨 Maskarin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를 대문법가 빠니니는 '대나무 지팡이(maskara)를 지니고 있는 자'로 해석하여 Maskarin은 '하나의 지팡이를 지니고 있는 자(Ekadaṇḍin)'라고 설명한다.(Pāṇini.V1.i.154) 그러나 문법가 빠딴잘리는 마스까린은 유행승의 한 집단으로, 그들이 대나무 지팡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Maskarin이 아니라 그들은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한다.(Mahābhāṣya.iii.96) 이것은 『디가 니까야』「사문과경」에서 나열하고 있는 그의 운명론(niyati)과도 일치한다.
흥미롭게도 자이나 문헌에 의하면 막칼리 고살라가 지와 견[知見, ñāṇadassana]을 가진 자로 묘사되고 있다(uppanna-ñāṇa-daṃsana-dhāre jiṇe arahā kevalī sabbaṇṇū sabbadarisī. - Bhag 15.1). 그리고 여러 문헌에 의하면 아지와까(사명외도)는 아소까(Asoka) 대왕 때까지도 번창했다고 한다.
145)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o Kesakambalī)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고 도덕적이었고 사람들에게서 높은 명성을 가졌다고 한다.(S3:1/i.68) 그는 '보시한 것도 없고 제사지낸 것도 없고 헌공(獻供)한 것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임종하며, 땅은 땅의 몸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몸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몸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돌아가고, 감각기능들은 허공으로 돌아간다.'라고 주장하는 [사후] 단멸론(ucchedavāda) 자였다.
146) 빠꾸다(Pakudha)는 이름이고 깟짜야나(Kaccāyana)는 바라문 족성이다.
그는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영혼의 일곱 가지를 궁극적 실재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생이라는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 생명체는 죽일 수 있지만 이 일곱 가지 실재는 죽일 수도, 자를 수도, 없앨 수도 없는 본래 존재하는 실재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는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부정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편 이처럼 여러 기본 실재들의 적집으로 우주와 인간은 구성되어 있다는 이러한 사문 전통의 사상을 학자들은 적취설(積取說)이라고 부르고, 이것과 반대로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가 전변하여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바라문 전통의 학설을 전변설(轉變說)이라 부른다.
147)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ena Belaṭṭhiputta)는 애매모호한(vikkhepa)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반 불교개론서에는 산자야의 교설을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회의론으로 명명하고 있는데, 역자는 원의미를 살려 애매모호함이라 명명한다. 그는 “만일 당신이 '저 세상이 있소?'라고 내게 물으면 내가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이론을 내세웠다. 이렇듯 그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 해서는 어떤 결정적인 답을 회피했으며 다른 외도들과는 달리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Vin.i.39)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와 목갈라나(Moggallāna) 존자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론보다는 연기(緣起)에 바탕한 고(苦)의 완전한 소멸을 통한 해탈 · 열반을 즉시에 이해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삿짜
까 짧은 경」 (M35)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148)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ṭha Nātaputta)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괴로움의 무더기의 짧은 경」 (M14) §17의 주해를 참조할 것.
149) 여기 언급되고 있는 육사외도의 더 자세한 주장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사문과경」(D2) §16 이하를 참조할 것.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악기웻사나여, 지금이 적당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하라.”
그러자 니간타의 후예 삿짜까는 세존의 설법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자리를 떠났다.150)
150) “여기서 세존께서는 이 니간타에게 두 개의 경(M35와 M36)을 설하셨다.
앞 경은 한 개의 바나와라 분량이고, 이번 경은 한 개 반의 바나와라 분량이다. 이렇듯 두 개 반의 바나와라 분량의 경을 듣고도 이 니간타는 어떤 [진리의] 관통(abhisamaya)도 증득하지 못했고, 교단에 출가하지도 않았고, 삼보에 귀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법을 설하셨는가? 미래의 영향력(vāsanattha)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 사람이 지금은 강한 의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열반에 든 후 200년이 지난 후 땀바빤니 섬(Tambapaṇṇi-dīpa,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될 것인데, 그곳에서 이 사람은 장자의 집에 태어나서 시절인연이 도래할 때 출가하여 삼장을 배워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무애해(paṭisambhidā)를 겸한 아라한과를 얻어서 깔라붓다락키따(Kāḷa-Buddharakkhita)라는 이름의 번뇌 다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시고 미래의 영향력 때문에 가르침을 설하셨다.”(MA.ii.209)
바나와라(bhāṇavārā)는 문자 그대로 '암송(bhāṇā)의 전환점(vāra)'이라는 말인데 성전을 외워 내려가다가 한 바나와라가 끝나면 쉬었다가 다시 외우는 것이 반복되고 그 다음 바나와라가 끝나면 또 다시 쉬었다가 시작한다. 한 바나와라는 8음절로 된 사구게(四句偈)로 250 게송의 분량이라 한다. 그래서 총 4x8x250=8000음절이 된다. 한편 삼장은 모두 2547개에 해당되는 바나와라를 가진다고 한다.
삿짜까 긴 경(M36)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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