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3 - 사성제 2A - 순일 큰스님
이것이 괴로움이다. 조금 남은 부분이 있어서 마저 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는 시간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색수상행식을 알아 봤죠. 색은 물질 그리고 혹은 개인 입장에서 보면 몸이 되는 겁니다. 수는 느낌, 상은 인식, 행은 의도라고 알아봤고, 식은 아뢰야식 이렇게 얘기했고 비유도 드렸었죠. 각각이 색은 몸체고 느낌 기능이 있고 인식할 수 있고, 아뢰야식이라는 프로그램을 저장할 수 있고, 기억을, 기억을 저장해서 기억으로 윤회를 하는 거죠, 기억을 저장하면 식별할 수 있다 를 알아봤고.
의도 여기 의도는 여섯 가지 의도입니다. 색은 지수화풍이예요. 물질이고 지수화풍과 지수화풍에서 파생된 물질 몸 등등 이 됩니다. 지수화풍은 요소입니다. 에너지예요. 진짜로 땅, 흙, 물, 불, 바람을 얘기한다기보다, 땅을 이루는 견고한 요소 에너지 땅도 지(地)에 속합니다. 땅보다 더 원소적인 거예요 지는...
수 (水) 물보다 더 원소적인 것 이런 겁니다. 에너지 지수화풍으로 이 세상은 다 이루어진 것이죠. 지수화풍이 물질이고, 지풍화풍으로 파생된 것이 물질입니다. 수는 느낌 인데요. 간단하게 3가지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셋이지만 정신적 물질적으로 나누게 되면, 6가지가 되죠.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6가지가 됩니다. 분류에 따라서는 과거 현재 미래 하게 되면 18가지가 되는 거구요. 분류에 따라서 가지수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느낌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3가지 느낌이다. 이렇게 여기시면 편합니다.
느낌은 무엇을 반연하여 무엇을 조건으로, 무엇을 원인으로 벌어지냐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기는게 느낌이고, 감각접촉은 안의비설신의를 조건으로 생깁니다. 안의비설신의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이렇게 아시면 되겠고요, 인식은 색성향미촉법을 조건으로 생기는 겁니다.
이 차이를 잘 느끼세요. 나의 눈 귀 코 혀 몸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은 감각접촉이요 느낌이다. 이렇게 아셔야 되고, 바깥쪽의 색성향미촉법을 반연하는 것은 인식이다. 인식을 조건으로 사유가 벌어진다. 사유를 조건으로 열의가, 열의를 조건으로 열기가, 열기를 조건으로 추구가, 추구하는 것까지 벌어지는 것이 열의 열기 추구가 의도입니다. 색수상행이 되는 겁니다.
이 의도는 12연기 두 번째로 의도라는 내용이 좀 다른 겁니다. 단어로는 상카라와 똑같지만 자~ 돌아와서 인식작용은 색성향미촉법을 반연하여 일어난다. 이렇게 되고 행의 의도지로 알아봤습니다. 사유가 생긴 다음 뭔가 하고자하는 의욕이 생기는 거죠. 열의가 생기고, 열기가 생기고, 추구 한다는 것이 추구하러간다 이것이 의도입니다. 인식을 조건으로 의도가 생긴다 이런 얘기인데요. 그래서 색수상 다음에 의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6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눈의 의도, 귀의 의도, 코의 의도, 혀의 의도, 몸의 의도, 마음(마노)의 의도, 이렇게 6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식은 6가지 식이 있죠. 눈의 아뢰야식, 귀의 아뢰야식, 코의 아뢰야식, 혀의 아뢰야식, 몸의 아뢰야식, 마노=마음의 아뢰야식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무엇을 조건으로 있냐하면, 안의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을 조건으로, 둘의 화합을 조건으로 아뢰야식이 생기는 겁니다.
쉽게 얘기한다면 눈이 모양을 색을 모양을 볼 때 그것에 대한 아뢰야식, 저장된 함장 식에서 기억을 뽑아 내갖고 식별을 하는 겁니다. 그제 예를 드렸다시피 공기청정기가 코에 해당하는 센서가 있지만, 프로그램에 미리 담배연기나 담배냄새나 니코친 종류나 혹은 음식의 더러운 냄새가 나면은, 센서가 알아서 맡은 다음에 터보를 윙하고 돌려라.
이런 게 프로그램이 없다면 안돌아 갈건 데 프로그램이 아뢰야식에 기억저장에 해당하고 기억저장 뿐이 아니라, 안 좋은 냄새가 센서에 맡게 되면 센서 자체가 식별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기능만 있을 뿐이지 그러면 아뢰야식이 식별할 수 있는 식별지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아뢰야식만 있다고 아무것도 안되죠. 물론 센서가 없다면 기능할 수 없습니다.
센서 자체가 없으면 아뢰야식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몸뚱아리와 눈 귀 코 혀 등등이 있을 때 정신 물질이라는 것과 결합을 해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인조인간이 죽었는데 칩을 꺼냈다. 그 칩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죠. 도로 인조인간의 몸뚱아리를 만들어놓고 그 칩을 집어넣어야지만 그 인조인간이 움직이듯 자 그러면 지금 6가지식 알아봤습니다.
눈과 모양이 만나고 , 귀가 소리를 만났을 때 프로그램에 저장된 아뢰야식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눈과 귀가 눈이 모양을 만나면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이 있어서 식별을 한다. 저장된 기억이 없으면 어떻게 되죠? 뭐가 뭔지 모르죠. 선 저장된 기억이 없으면 보이긴 보이는데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그전에 저장된 것 중에 제일 비슷한 것을 끌어당겨다가, 그걸 분석을 해야 한다. 처음 봤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 색수상행식을 알아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색수상행식의 집합체가 이 지금“ 나”라고 하는 오온의 무더기다 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서 전문적인 용어를 하나 드릴 건데 삭까야라는 겁니다. 빨리어로 삭까야를 경에서 뭐라고 하시나하면 삭까야가 오온이다. 삭까야를 나 라고 또는 실체라고 하는 게 아주 잘못된 것이다. 삭까야는 실체가 아니다. 그저 이루어진 나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가지 무더기에 불과하다. 다섯 가지 무더기를 해체하면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유신견 입니다. 유신견이 빨리어로 삭까야디티 입니다. 디티는 견해라는 얘기예요.
삭까야가 오온이 실체 내지는 나라고 믿는 게 아주 잘못된 견해다 이런 얘기입니다. 유신 견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가 없다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의역입니다. 경은 직역으로 가야 되는데, 삭까야 디티 유신견은 직역의뜻이, 오온 이라는 견해 오온이 실체내지, 나라고 믿는 견해가 잘못된 거다.
오온은 해체하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러시는 겁니다. 오온을 얘기해 드렸는데 오온에 대해서 한번 보죠. 아까 색은 중의적인 뜻인데 크게는 세상 전체의 물질이고, 작게는 나로 볼 때는 나의 몸뚱아리가 색인데, 이 색이 이 몸뚱아리가 부처님의질문은 저 앞을 보시면 맨 앞에 오온이 무상이다. 우리가 흔히 삼법인을 합니다.
삼법인이 뭐죠 1. 제행무상 2. 일체개고 3. 제법무아 이렇게 나가는데 사실은 빨리어로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죠. 빨 리어로 제행은 비상이다. 저기도 사실 무상이라고 쓴 것도 빨리어로는 비상입니다. 우리는 관습적인 언어로 무상, 무상 하도 쓰니까, 관습적으로 무상으로 쓴다. 무상과 비상은 좀 다른 겁니다.
원래 뜻은 비상이라고 알고 계십시오. 여하간 돌아와서 부처님 빨리어 에는 제행비상 입니다. 무상으로 하죠. 일체개고가 아니라 제행개고 입니다. 그리고 제행비아입니다. 이거 좀 다른 뜻입니다. 지금 제행무상 이라고 하는 거 보죠. 여기서는 단어도 똑같죠. 모든 행(상카라)입니다. 의도입니다. 그런데 색수상행식의 의도가 아니라 12연기의 두 번째 의도입니다. 좀 다릅니다. 이것은 12연기 때 얘기 드리겠습니다.
이 의도는 형성 되어진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 두 가지 뜻이 의도란 뜻이 있고 형성 이란 뜻이 있습니다. 모든 형성되어진 것들은 항상 하지 않는다. 그 뜻입니다. 변한다는 그 뜻이죠. 안 항상한다. 모든 형성되어진 것들은, 만들어진 것들은 항상할 수가 없죠.
불변일 수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조건 지어지고, 만들어지고, 생겨지고, 형성되어진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제행비상입니다.
그런데 일체개고와 제행개고는 다른 얘기 입니다. 왜 다르냐 부처님께서는 늘 전작이 나옵니다. 바로 제행무상에는 잘 여겨셔야 됩니다. 모두 무상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흔히 무상 고, 무아, 할때 그것은 잘못된 단어들 입니다. 이유가 무상 앞에 수식어가 나와야 됩니다. 뭐가 무상한지 항상 한개 없다면, 우리공부하지 말고 다 돌아가시면 되요.
부처님께서 경에 보시면, 분명히 항상하고 견고하고 불변이 있다 이러셨어요. 열반이죠? 그리고 형성되어진 것들은,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러셨어요. 그래서 형성되어진 것들에 여윔이 알려진다. 해탈이 알려 진다 이런 거예요. 형성되어진 안은 것들이 없다면, 형성되어진 이 세상만 불과하고, 깨달을 방법이 없다. 그제 얘기 드렸습니다. 형성되어지고, 조건 지어지고, 만들어지고, 생겨진 것들은, 형성되어지지 않고, 조건 지어지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형성되어지고, 조건 지어지고, 만들어지고, 생겨난 것들에 멀리 떠남이 열반이 알려 질 수 있다. 이러신 거예요.
즉 무상하면 모두 무상이란 뜻이 되는데, 무상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이런 겁니다. 열반이 그러므로 앞에 나와야 될 것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불변의 열반이 있다. 그런데 제행 모든 형성된 것들만은 변한다.
일체개고는 모두 고통이다. 일체가 고통이면 공부할 필요가 없죠? 부처님께서 열반은 지복이다 이러셨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그러시면서 상수멸도 지복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질문을 할 것이다. 상수멸이면 상과 느낌이 완전히 멸한 것인데, 느낌이 멸해 놓고도 지복을 선언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외도들이 물어볼 것이다. 부처님께서 나는 지복스런 느낌만을 지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괴로움이 완전히 멸절한 상태를 지복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느낌이 없더라도 괴로움이 완전히 멸했기 때문에, 그러면 일체개고도 성립이 안 되죠. 일체개고는 말 그대로하면 열반의 고통이다 그렇게 됩니다.
부처님 빨리어 경전에 제행개고다. 형성되어진 것들만 고통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른 말로하면,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이 없다면 구원은 없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할 그 무엇은 여기에 있고 그것은 오온은 아니다.” 그러신 거죠. 구원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복이요.
그러나 제행 형성된 것들은 오온들은, 세상은 전부다 형성된 것들입니다. 세상은 전부다 변하는 거다. 고통이다. 신마저도 모두 변하는 거다. 세상 이라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 다 얘기 하는 거고, 높은 신들까지도 모두 형성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마저도 전부 모두 고통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그것이 있다. 그래서 제법무아라고 하는 것도 제행은 자아가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모든 형성된 것들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만 모두 초월하게 되면 실체가 있다. 이렇게 나오는 건데요. 이것이 지금 빨리어 말씀보다도 경에는 오히려 저 지금 칠판에 쓴 오온무상(五蘊無相) 오온개고, 오온은 실체가 아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왜냐 한번 보시죠. 즉 전체 세상에 형성된 것들이 무상하고 이 말씀도 계시지만, 그것은 전체 세상을 설명할려고 하시는 거고 중요한 거죠. 신들마저도 형성된 것이다 를 설명할려고 한 것이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해탈하는데 있어서는 직접적인 것은, 우리 우리 우리의 오온이거든요. 오온을 떠나려는 거기 때문에 저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오온을 보죠. 지금 색은 항상 한가? 안항상한가? 변하는가? 몸뚱아리는 항상 하나요? 변하나요? 소림사에서 했던 얘기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 변하죠? 신들도 모양이 있는데 모양 있는 존재들은 움직이는 존재들은 움직임 자체가 변하는 거예요. 그제 얘기 드렸습니다. 자기가 별도로 움직일공간이 있다면, 자기가 부분자라는 거고, 공간이 있는 거고 공간으로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고, 시간과 공간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전부 다 변하고, 멸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훨씬 오래 살지만 다 죽는 겁니다. 어떤 높은 신도 부처님 말씀이죠.
비색계는 형체가 없죠. 형체가 없어서 안 죽겠구나. 거기는 순수의식의 동료들이 있는 세계라고 그러셨어요. 끝까지 편재 못해서 동료들이 있다. 동료가 있다는 것은 전 체자가 아니라 부분자다. 그래서 그들도 우주 몇 만겁까지 살지만, 수명이 결국은 죽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식으로 존재가 이루어 졌다고 하더라도, 오온은 모두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래서 무상하다. 변하는 것은 무상한 것은 즐거움인가요? 괴로움인가요?
네 3가지 이야기 드렸습니다.
1. 괴로움 그 자체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 그자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2. 표피적인 즐거움들은, 어떤 탐에 즐거움들이나 이런 것들은 잠깐이요 그거로는 행복을 못 갖고 있을 것이고, 곧 괴로움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리고 오히려 표피적 즐거움 때문에 내면의 지고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움이다.
3. 형성되어진 것들은, 모두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고고성, 변고성, 행고성 다 이야기 드렸습니다.
변하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몸뚱아리가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겁니다. 몸뚱아리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은, 그런 몸뚱아리는 실체가 아니다. 그런가요. 이 몸뚱아리를 실체라고 여기는 대부분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 지으며 공부는 거꾸로 가는 거다.
느낌은 항상 한가요 무상한가요? 아까 느낌관련 얘기해드렸군요. 고고성 변고성 몸에도 해당 하는 겁니다. 느낌은 변하는 거죠. 변하는 거니까 무상하고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오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즐거움인가요, 괴로움인가요? 이것이 잘 인정이 안 되나요?
네 즐거운 느낌마저도 괴로움입니다. 사실은 즐거운 느낌이 곧 머지않아 괴로워지니까 , 괴롭다고 설명 드리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게 되면 부처님께서 삼매를 많이 해라고 한 것이, 그 감각적 욕망에 즐거운 느낌을 없애면 훨씬 더 큰 지복의 삼매가 되는데, 그 지복이 안되겠끔 막고 있는 것이 ,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 때문에 그 삼매의 지복이 된 사람은, 그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 그 자체가 괴로움 이다 라고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감각적 욕망이 지복을 막고 있기 때문에 ......
부처님께서 느낌에 대해서 예를 이렇게 드셨죠. 여기 소가 있는데 껍질을 다 벗겼다. 거죽을 이 소가 나무에 기대면 나무에 사는 미생물들이 그의 몸뚱아리를 벗겨진 몸뚱아리를 먹을 것이고, 물속에 들어가면 물속에 사는 생물들이 먹을 것이고, 벽에 기대면 벽에 사는 미생물 들이 쪼아 먹을 것이고, 이것이 감각접촉이고 여기서 생긴 느낌이다 라고 하신 거거든요.
그래 느낌은 그리고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콤한 느낌이 있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 부모가, 형제가, 자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 사별 얼마나 무참합니까? 달콤하고 즐거웠든 느낌이 너무나 무참한 괴로운 느낌이 된다. 그래 느낌은 변하고 무상한 것이요.
무상한 것은 어떤 것이든 모든 무상한 것은, 항상 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은 전부다 괴로움이다. 이 느낌이 만약에 항상 즐겁기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불가능한거다 라는 거죠. 이 느낌은 그래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느낌은 본성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항상 하고, 견고하고, 불변이고, 지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느낌을 버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 버리게 되면 항상 하고 견고하고 불변이고 궁극의 지복이 드러날 것이다.
인식은요, 인식은 아름다운 표상, 적의의 표상, 중간의 표상,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모양을 볼 때 아! 아름답다. 어떤 것은 적의의 표상 분노스럽다. 더럽다. 혐오가 된다. 화내야 되겠다. 중간에 인식이 오락가락하죠. 이런 인식 작용은 항상 하나요. 무상하나요.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즐거움 인가요? 괴로움인가요? 괴로움 입니다.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 이것이 실체라면 우리는 큰일 납니다. 구원이 없는 거예요.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하더라도, 괴로움이 실체다 이런 소리가 되는 건데, 인식은 오락가락 하면서 괴로운 건데 괴로움이 불성이다 이렇게 되면 너무나 괴로운 거죠.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의도는요, 부처님께서 의도는 뭐라고 얘기하셨나하면, 여기 사람들이 많아 연기가 안 나지만 너무나 뜨거운 불구댕이가 있는데, 여기 이 사람은 불멸이고 완전한 행복을 원하는데,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양쪽 팔을 잡고, 불구댕이로 집어 넣는다고치자, 그는 불구댕이 속으로 들어가고 싶겠는가? 들어가고 싶은가요? 죽고 싶지않고 행복을 바라는 사람인데 말이죠.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 불구댕이 속에 들어가면, 그는 거의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받거나, 죽거나 행복을 바라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런 거잖아요. 지금 건장한 두 사람이 양쪽 팔을 잡았다는 것은, 하나는 선이요 하나는 악입니다. 선악을 선 (善)을 지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 이 사람은 나는 불멸이고 싶고, 행복하다고 하지만은, 짓는 의도마다 눈으로 짓고, 귀로 짓고, 코로 짓고, 혀로 짓고, 몸으로 짓고, 마음으로 짓는 의도마다, 본인이 행복하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짓는 의도는 전부다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의도를 짓고 있다는 겁니다. 중생은 누구나
불사의 죽음 없는 쪽의 해탈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쪽으로, 늘 죽음 있는 쪽으로 윤회 쪽으로 6가지 의도를 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의도는 항상 한가요? 무상한가요? 변하나요? 변하죠.
변하는 것은 모두 즐거움 입니까? 쉬운 얘기로 항상 하고 견고하고 불변인 것만 궁극인 거고요, 항상 하지 않고 변하고 견고하지 않고 무너지고 조건 지어지고 죽고 이러한 것들은 모두 괴로움입니다. 그래 의도는 괴로움이다.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의도는 결코 실체가 아니다.
아뢰야식은요, 6가지 식은 그때그때 변하면서 쌓아놓은 것도, 여적 경향성도 변하고 좋았다 싫었다. 변덕도 많고 인식은 저장된 기억 땜에 그나마 잘 쌓아 좋으면 천상가고, 그나마 엉터리 삶을 살게 되면 지옥간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하는게 식이 쌓여진 것인데, 이것은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한 것인데, 무상한 식은 괴로움이다.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이 아뢰야식이 실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도움이 안 된다. 괴로움이 실체라고 하는 거기 때문에, 괴로움은 결코 불성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색수상행식 전부다, 오온은 분명히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한 것 아시죠? 무상한 것은 모두 괴로움입니다. 오온자체 전부다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결코 불성이 아니다. 여래가 아니다. 이렇게 잘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잘 알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로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오온을 염오 한다. 오온을 싫어한다. 오온을 싫어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바랜 다.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혹시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이 있을 거예요. 탐욕은 좀 남겨놓고 해탈한 다음 나는 저절로 탐욕 안 할래요. 마치 해탈한 다음 화 안낸다 이거와 같거든요. 화가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불가능 한 거 알죠.
“화를 안 내는 것만큼 깨닫는다. 깨달은 다음 화 안내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한 번 보죠. 한 사람이 두 얼굴 일 수 없듯이, 그 얼굴 하난데 어떨 때 화내면 그 사람 얼굴은 거기에는 평화로운 얼굴을 볼 수만 없어요. 오직 화내는 얼굴만 있다. 그런가요? 그 사람이 평화로울 때, 평화로운 하나의 얼굴만 있지. 어제까지는 비록 화를 냈더라도, 오늘은 안 찡그리고 있잖아요. 그렇게 하나의 얼굴만 있는데 수시로 변하잖아요.
마음 에는요, 우린 평화로운 마음이 되고 싶은데 말이죠, 살생하고 있어요. 살생 할때는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아세요? 살생하는 마음 이예요. 몸의 행동은 마음이 하는 거니까, 살생하는 마음은 평화롭지가 않죠. 도둑질 할 때는 도둑질하는 마음 이예요.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10가지 해로운 법을 전부다 보신다면, 그때그때 다 해로운 행동을 할 때는, 해로운 마음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평화로운 마음이 되고자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거죠. 그런 행위를 하는데 내가 깨닫고 난 다음에, 그런 행위를 없애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때 그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안하면, 그 마음이 아닌 거고, 해로운 마음이 아닌 거고, 그때 평화로운 마음이 되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여적 우리가 이해한 것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 나는 이해는 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나에게 곤란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요
두 번째는 2. 나는 저 얘기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허무적이다. 이런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요. 왜 이런 생각이 드냐하면 사실은 오온에 관련된 탐욕이 많기 때문에요. 색수상행식에 관련된 습관적 탐욕이 많게 되면 은, 지금 두 가지 경우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칠판을 보시면,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하면, 몸뚱아리는 이것은 절대로 결코 ‘나의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나 가 아니고 ,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셨습니다. 실체가 아니다 라고 여기십시오. 그러면 앞서서 몸뚱아리가 실체가 아니다 라는 것은 살폈어요.
여래가 아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실체가 결코 아니다 라는 것을 살폈는데, 나도 아니다. 이건 나 일수 없다. 그 다음에 보시면, 나의 것도 아니다. 최소한 우리는 이렇게 생각 할 거예요.
불성이 있다면, 이 몸뚱아리는 쓰임으로 나의 것 정도는, 그래도 되어도 되지 않느냐, 여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좀 전에 몸뚱아리는 괴로운 거였는데요, 여러분 괴로운 것을, 괴로운 물건을, 나의 것이라고 두고 옆에 둘 사람 계십니까?
쉽게 말해서, 똥이 여기 있는데 괴로운 건데, 똥을 나의 것이라고, 옆에 두고 주무실 분계신가요. 즐거운 거니까 옆에 두는 거잖아요. 좀 전에 몸뚱아리는 괴로움이다 라고 분명히 살폈습니다. 명제를 늙고, 병들고, 죽는 거니까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나의 것도 되면 안 됩니다. 그렇죠.
괴로움은 나의 것이 되면 안 되죠. 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되더라도 나도 괴로워지는 거예요. 또 하나는 불성입장에서는 굳이, 이 모든 게 불성의 나툼이라 얘기한다면, 다 불성 것이 되는 거지. 특별한 한 사람만 불성의 것이 되는 건 아니죠.
예를 든다면 꿈속에 깨어있게 되면, 모든 꿈속의 등장인물의 마음을, 다 알게 되요. 특별한 한 사람이 아니라, 그중에 특별한 한명이 “나 ” 이면 안 되는 거죠. 그 꿈을 내가 다 창조했기 때문에, 혹은 죽을 때에 죽음에 이르러서, 찰나에 살아온 생을 다 보거든요. 그때 다른 사람 마음 까지도 내 마음처럼 다 보여요.
특별한 하나가 나의 것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몸뚱아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나이면 큰일 납니다. 괴로움이기 때문에 나가 아니고, 나의 실체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느낌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아까 느낌이 괴로움 이였어요. 괴로움이 나의소유물이면, 나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괴로움이죠.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나의 실체가 아니다. 느낌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다.
이와 같이 인식은, 의도는, 아뢰야식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며, 나의 실체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더러 어떤 외도가 그 당시 힌두교는 실체가 자아가 몸 안에 있다. 영혼처럼 생각을 했어요.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하면, 외도야 그게 몸 안에 있다면 그게 궁극의 실체가 그대 몸 안에 있다면, 몸 아~ 늙지 말라고 한번 해봐라.
그 실체가 그대 안에 있는 것이 맞다 면, 그대는 몸아~ 늙지 마라 라 할 수 있어야한다. 실체가 궁극이기 때문에 못하지 않느냐? 지금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느냐? 어떻게 실체가 몸 안에 있겠는가? 외도가 그러니까 느낌 안에 실체가 있습니다. 외도야 항상 즐거워 라고 느낌한테 명령해봐라. 가능한가? 인식은 항상 아름다운 인식으로 꽉 차봐라 고 명령해봐라. 의도도 아뢰야식도 불가능하죠. 외도여, 그대가 말하는 실체란 그대가 말하는 색수상행식 안에 없다.
세 번째 얘기로 갑니다. 칠판을 보시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처님 이러십니다. 색이 실체인가 몸뚱아린가요, 지금 여러분 몸뚱아리가 실체입니까요.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죠. 느낌은, 인식은, 의도는, 아뢰야식은 다 각각 실체가 아니죠.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러면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다 합친 것이, 실체인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오온 안에 실체가 있는가. 그러셨어요. 그게 실체면 오온 안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영혼들이죠.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실체가 아니다. 오온 안에 실체가 어찌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안에 불성이 있다는 말은 쓰죠, 그것은 관습적인 언어입니다. 불성이 이 안에 갇혀 있을 수 있나요? 겨자씨 안에도 있고 우주 넘어 까지 있듯이, 모두 편재해 있는 거죠. 이 안에 갇혀있는 것은 영혼 같은 얘기예요.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어찌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체가 갇혀 있다면, 오온보다 못한 놈이 예요. 오온이 갇혀 있으면, 실체가 오온 안에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실체가 오온 밖에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 오온 밖에 있다면요 이 오온이 하나 있고, 오온과 밖에 또 뭐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크더라도 자타가 있게 됩니다.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도 부분입니다. 전체로 편재해야지 오온 밖에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네 가지 다 오온이랑 상관없는데, 그 오온을 잡고 있으면 영원히 괴롭게 윤회 할 것이다. 놓아라! 놓게 되면 실체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밑에 또 다음 칠판에 내려가면,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색수상행식을 하나하나 얘기하면서
1. 몸뚱아리가 실체인가 아닙니다.
2. 몸뚱아리를 가진 자가 실체인가 아닙니다. (가진 자는 이것이 나의 것이다 에 해당 합니다 아닙니다.)
3. 몸뚱아리가 실체 안에 있는가? 아닙니다.
4. 몸뚱아리 안에 실체가 있는가? 아닙니다.
조금 위에랑 다르죠.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오온을 다 설명하십니다.
1. 색수상행식은 실체인가? 아닙니다.
2. 색수상행식을 가진 자가 실체인가? 아닙니다.
3. 색수상행식이 실체 안에 있는가? 아닙니다.
4.색수상행식 안에 실체가 있는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잘 배우고 잘 보는 성스러운 제자는, 오온을 염오한다. 염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바로 해탈한다.
그러시면서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8정도이다 라고 하신 겁니다. 칠판에 오른쪽으로 가게 되면요, 이렇게도 말씀하셨어요. 좀 전에 우리는 몸뚱아리는 무상하고 변한다 가 아는데, 여기 어떤 사람은 몸뚱아리는 항상하다 항상하고, 견고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며, 즐거운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거 아세요. 영생을... 내지는 여러 종교에서 이 세상에서 몸뚱아리로 영생을 할 수 있다. 이런 길도 있고 이런 극단적 얘기는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 모두 변한다는 걸 논리로 아는데도 나 죽을 날 아직 멀었어! 대부분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몸뚱아리가 항상하고 견고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괴로움이 아니며 즐거움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는 곧 몸뚱아리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는 괴롭다. 이유는요 그는 몸뚱아리가 항상하고, 견고하고, 즐거울 거라고 여겼는데, 괴로움이고 늙고 병들고 죽는, 다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보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여기 또 어떤 사람은 몸뚱아리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 잘 통찰로 본다. 그는 곧 그의 몸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는 괴롭지 않다. 그러니 몸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 라는것을, 통찰의 눈으로 잘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 어떤 사람은 느낌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즐겁기 마련이다 라고 여긴다. 그는 곧 그의 느낌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괴롭다. 그는 느낌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즐겁기 마련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느낌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고, 괴로움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죠.
여기 또 어떤 사람은, 이 느낌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이다 라고 잘 본다. 곧 그는 느낌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괴롭지 않다. 그는 느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이다 라고 잘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식, 의도 , 아뢰야식, 색수상행식이 모두 무상이요 변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이다 라고, 잘 배우고 보는 성스러운 제자는, 이 색수상행식이 곧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늘 보게 됩니다. 보게 되지만 우리는 괴롭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미 색수상행식은 무상함이요,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 이다. 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어떤 외도는 이 색수상행식이 항상할 거야, 견고할 거야, 이게 즐거움이지 어떻게 괴로움이냐 라고, 여긴 사람이라면, 그는 곧 색수상행식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고, 그때 그는 너무나 괴롭다. 항상하고 견고하고 즐거울 줄 알았는데,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이다 라는 것을 볼 수 밖 에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까 색수상행식이 변하더라도, 잘 본 성스러운 제자는, 괴롭지 않을뿐더러, 삶 자체도 아주 편안하다. 오온을 놓아버렸는데, 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몸뚱아리와 느낌과 인식과 의도가 아뢰야식에 대해서, 툭 하고 놓아버렸는데, 무슨 근심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무상함 인줄 알았고 괴로움 인줄 알았고 변하기 마련인 줄 알았기 때문에 툭하고 놓았는데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적 고통이, 없다는 거죠.
녹취자 : 예심
2011. 1.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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