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023. 개미집 경 [Vammikasuttaṃ]

Daisy청량심 2023. 5. 24. 08:28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꾸마라깟사빠758)존자는 장님들의 숲759)에 머물렀다.

그때 밤이 아주 깊어갈 즈음 어떤 천신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장님들의 숲을 온통 환하게 밝히면서 꾸마라깟사빠 존자에게 다가와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그 천신은 꾸마라깟사빠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758) “꾸마라깟사빠(Kumārakassapa)는 그의 이름이다. 어릴 적에 출가했기 때문에 세존께서 '깟사빠를 불러오라, 이 과일이나 혹은 먹거리를 깟사빠에게 줘라.'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깟사빠를 말씀하십니까?' '어린(kumāra) 깟사빠를 말한다.'라고 이름을 붙인 때부터 시작하여 커서도 꾸마라깟사빠라고 불렸다. 또한 꼬살라의 왕인 빠세나디의 양자였기 때문에(posāvanika-puttattā) 그를 꾸마라깟사빠라고 인식했다.” (MA.ii.121)

주석서에 의하면 꾸마라깟사빠 존자(āyasmā Kumārakassapa)의 어머니는 라자가하 출신이라고 한다. 그녀는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혼한 뒤에 남편의 동의를 받아 비구니가 되어 사왓티에 머물렀다. 출가하고 보니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승가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세존께서는 우빨리 존자에게 사태 해결을 위임하셨고 상세한 조사 끝에 그녀는 결백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우빨리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빠세나디 왕이 깟사빠라는 이름을 지어 아이를 키웠으며 일곱 살에 출가하였다고 한다.(DA.iii.808)

아무튼 그는 어린 애(kumāra)였을 때 승가에 들어왔고 왕이 키웠기 때문에(kumāra는 왕자 즉 rājakumāra라는 뜻도 됨) 꾸마라깟사빠라는 이름을 가졌다. 세존께서는 그를 다양한 설법을 하는 자(cittakathika)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칭송하셨다고 한다.(Ibid) 주석서는 본경을 통해서 존자가 아라한 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MA.ii.134)

『법구경 주석서』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에 대한 애정 때문에 12년간을 울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길에서 존자를 만나자 그를 향해서 달려가서 그의 앞에서 넘어졌는데 자식에 대한 큰 애정 때문에 가슴에서 젖이 나와 그녀의 가사를 적셨다고 한다. 깟사빠 존자는 그녀의 이러한 전일(全一)한 애정이 도를 증득할 인연이 됨을 알고 그녀를 심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아들로부터 크게 경책을 받은 그녀는 바로 그날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DhpA.iii.147.)

759) '장님들의 숲' Andha-vana를 옮긴 것인데 사왓티 남쪽에 있는 숲의 이름이다.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거주하였다고 하며 특히 한거(閑居)에 몰두하는 자들(paviveka-kāmā)이 거주하기에 좋은 숲으로 알려졌다. 깟사빠 부처님 시대에 깟사빠 부처님의 탑(cetiya)을 조성하기 위해서 야소다라 (Yasodhara)라는 법을 암송하는(dhamma-bhāaka) 성스러운 사람(ariya-puggala)이 재물을 가지고 이 숲으로 갔다고 한다. 거기에는 500명의 도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야소다라의 눈을 손상시켜버렸다. [그 업의 과보] 그들도 장님이 되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nivutthattā) 그때부터 이 곳을 장님들의 숲이라 불렀다고 한다.(SA.i.189)

이 숲은 사왓티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다. 적지 않은 경들이 여기서 설해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본서 제4권 「라훌라를 교계한 짧은 경」 (M 147)이 잘 알려져 있다. 라훌라 존자는 이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몇몇 『율장』의 계목들도 여기서 제정되었다고 한다.

 

2. “비구여, 비구여, 개미집밤에는 연기를 내뿜고 낮에는 불타오릅니다.

그때 바라문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760), 을 가지고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빗장을 보았습니다. '빗장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현자여, 빗장을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761)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두꺼비를 보았습니다. '두꺼비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두꺼비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두 갈래 길을 보았습니다. '두 갈래 길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두 갈래 길을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체를 보았습니다. '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거북이를 보았습니다. '거북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거북이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칼과 도마762)를 보았습니다. '칼과 도마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도마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고깃덩이를 보았습니다. '고깃덩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고깃덩이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용을 보았습니다. '용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은 그대로 두십시오.

용을 해치지 마십시오. 용에게 예배하십시오'라고,

 

760) '현자(paṇḍita)'에 대한 정의는 본서 제4권 「차례대로 경」(M111)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761) “'빗장을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ukkhipa lagi abhikkhana sattha ādāya).'라는 것은 이 빗장(lagi)이 밤에 연기를 내뿜고 낮에 불타는 것(ratti dhūmāyati divā pajjalati)'이 아니니, 그것을 버리고 더 깊이 파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구절에도 이와 같이 적용된다.”(MA.ii.128)

762) '칼과 도마' asi-sūnā를 옮긴 것인데, 본서 「뱀의 비유 경」 (M22) §3에서는 도살장으로도 옮겼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4 의 해당 주해를 참조 할 것.

 

비구여, 그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세존께 다가가서 여쭈어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해설해주시는 대로 그대로 잘 호지하십시오.

나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 · 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 가운데서 이 질문을 해설하여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실 분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나 혹은 그에게 들은 자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그 천신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 그러자 꾸마라 깟사빠 존자는 그 밤이 지나자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간밤에 밤이 아주 깊어갈 즈음 어떤 천신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장님들의 숲을온통 환하게 밝히면서 제게 다가와 한 곁에 섰습니다. 한 곁에 서서 그 천신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구여, 비구여, 이 개미집은 밤에는 연기를 내뿜고 낮에는 불타오릅니다.

그때 바라문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빗장을 보았습니다.

'빗장 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현자여, 빗장을 버리고

혹은 그에게 들은 자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그 천신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개미집은 무엇이며,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은 무엇이며, 낮에 불타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라문은 누구이고, 현자는 누구입니까?

칼은 무엇이고, 파는 것은 무엇이고, 빗장은 무엇이고, 두꺼비는 무엇이고,

두 갈래 길은 무엇이고, 체는 무엇이고, 거북이는 무엇이고, 칼과 도마는 무엇이고,

고깃덩이는 무엇이고, 용은 무엇입니까?”

 

4. “비구여, 개미집이란 바로 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시큼한 죽으로 적집되었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763)

 

763) “'연기를 내뿜는 것(dhūmāyanā)'에서 연기(dhuma)라는 단어는 '분노(kodha), 갈애(ta), 사유(vitakka),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 kāmagua)' 등에 적용되지만 여기서는 사유를 뜻한다.”(MA.ii.130)

 

비구여,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비구여, 바라문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여래를 두고 한 말이다.764)

 

764) “여래는 중생들의 법들(sattanna dhammā)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bāhitattā) '바라문(brāhmaa)'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어떤 법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탐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성냄, 어리석음, 자만, 유신견, 의심,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러한 중생들의 법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바라문이라 한다.” (Nd1.86~87; 『앙굿따라 니까야』제4권 「사문 등 경」(A7:82) 참조)라고.”(MA.iii.130)

 

비구여, 현자유학인 비구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765) 이란 성스러운 통찰지를 두고 한 말이다.

 

765) “'(sattha)'은 세간적인 통찰지와 출세간적인 통찰지(lokiya-lokuttarā paññā)를 두고 한 말이지, 무기인 칼(āvudha-sattha)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MA.ii.131)

 

비구여, 파는 것정진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빗장이란 무명을 두고 한 말이다. 766)

'빗장을 밀어제쳐라 무명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66) “왜 세존께서는 무명(avijjā)'빗장(lagi)'이라고 하셨는가? 도시의 성문을 닫고 빗장을 채우면 사람들의 출입이 중단된다. 그리하여 도시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안에 머물고,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밖에 머물게 되듯 이, 지혜의 입(ñāa-mukha)에 무명의 빗장을 채우면 열반을 성취케 하는 지혜의 출현이 끊어져버린다. 그러므로 무명을 빗장이라 했다.” (MA.ii.131)

 

비구여, 두꺼비분노에 따른 절망을 두고 한 말이다.

'두꺼비를 버려라 분노에 따른 절망을 버려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비구여, 두 갈래의 길767)의심을 두고 한 말이다.

'두 갈래의 길을 버려라 의심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67) 여기서 '두 갈래의 길' dvidhā-patha를 옮긴 것이다. 냐나몰리 스님은 이것을 'the fork, 쇠스랑 혹은 포크'라고 옮기고 있는데 PED 등에는 두 갈래의 길로만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도 두 갈래 길로 설명하고 있어서 역자는 두 갈래의 길로 옮긴다. 주석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마치 재물과 재산을 가지고(sadhana sabhoga) 황무지를 가던 사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dvedhā-patha)에 이르러 이 길을 가야 할지, 저 길을 가야 할지 결정을 짓지 못하고 머물다가 도둑들(corā)에게 붙잡혀 파멸에 이르듯이, 근본 명상주제(mūla-kammaṭṭhāna)를 들고 앉은 비구가 부처 님 등에 대해 '의심(vicikicchā)'이 일어나면 명상주제를 증장시킬 수가 없다. 그러면 오염원의 마라(kilesa-māra) 등 모든 마라들이 그를 붙잡아 파멸(anayabyasana)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의심은 두 갈래의 길(dvidhā-patha)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셨다.”(MA.ii.132~133)

 

비구여, 다섯 가지 장애들을 두고 한 말이다.768)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의 장애이다.

체를 버려라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68) “'(cakavāra)'에다 물을 부으면 한 항아리든, 두 항아리든, 백 항아리든 모두 흐리고 한 움큼의 물도 남지 않는다. 그와 같이 장애(nīvaraa)를 가진 사람 사이에서는 유익한 법[善法, kusala-dhamma]이 머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체는 '다섯 가지 장애들[五蓋, pañca nīvaraāni]'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셨다.”(MA.ii.133)

 

비구여, 거북이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두고 한 말이다.769)

즉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거북이를 버려라,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69) “'거북이(kumma)'는 네 발과 머리의 다섯 가지 부분을 가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가 모든 형성된 법들[有爲法, sakhatā dhammā]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거북이는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ā)'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하셨다.”(MA.ii.133)

 

비구여, 칼과 도마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두고 한 말이다.770)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다.

로 인식되는 소리들이다. 로 인식되는 냄새들이다. 로 인식되는 맛들이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 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다.

'칼과 도마를 버려라,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70) '칼과 도마' asi-sūnā를 옮긴 것인데, 본서 「뱀의 비유 경」(M22) §3에서는 도살장으로 옮겼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서 asi-sūnā는 고기를 자르는(masa-cchedaka) (asi)과 자르는 받침대(adhikuṭṭana)를 말한다.”(MA.ii.128)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일반적으로 sūnā 혹은 sūnā-ghara는 도살장을 뜻한다.(PED)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치 도마(sūnā) 위에 고기를 놓고 칼로 자르듯이,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을 따르는 중생들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vatthu-kāma)에 놓여 오염원으로서의 감각적 욕망(kilesa-kāma)에 의해 절단된다. 그러므로 세조께서 칼과 도마는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 kāma-gua)'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셨다.”(MA.ii.133)

 

비구여, 고깃덩이향락 탐욕을 두고 한 말이다.771)

'고깃덩이를 버려라, 향락과 탐욕을 제거하라. 현자여, 칼을 가지고 파라.'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

 

771) “여기 이 '고깃덩이(masa-pesi)'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끄샤뜨리야 등 인간들도 그것을 좋아하고, 까마귀 등 동물들도 그것을 좋아한다. 이 중생들은 무명에 도취되어 향락과 탐욕에 다가가서 윤회를 좋아한다. 혹은 마치 고깃덩이를 두는 곳마다 거기에 잘 들러붙어 있듯이, 이러한 중생들도 '향락과 탐욕(nandi-rāga)'에 묶여 윤회에 들어붙어 있다. 괴로움을 경험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향락과 탐욕은 고깃덩이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고깃덩이는 향락과 탐욕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셨다.”(MA.ii. 133~134)

한편 고깃덩이를 감각적 욕망에 비유하는 것은 본서 제2권 「뽀딸리야 경」 (M54) §16에도 나타난다.

 

비구여, 번뇌 다한 비구를 두고 한 말이다.

'용은 그대로 두어라, 용을 해치지 마라. 용에게 예배하라.'772)는 것이 그 질문의 뜻이다.”773)

 

772) 어떤 뜻에서 번뇌 다한 자(khīāsava)'(nāga)'이라 하는지는 본서「흠 없음 경」 (M5) §33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그곳의 해당부분과 주해를 참조할 것.

“'용에게 예배하라(namo karohi nāgassa).'는 것은 번뇌 다한 부처님이라는 용께 깨달으신(buddha)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제어되신(danta) 세존께서는 제어를 위해 법을 설하신다. 고요하신(santa) 세존께서는 고요함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건너신(tiṇṇa) 세존께서는 건너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구경열반을 성취하신(parinibbuta) 세존께서는 구경열반(parinibbāna)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본서 제2권 「삿짜까 짧은 경」 (M35) §26; 『디가 니까야』 제3권 우둠바리까 사자후경」(D25) §21) 라고 이와 같이 공경(namakkāra)해야 한다. 이것이 그 뜻이다.” (MA.ii.134)

773) “'이것이 그것의 뜻이다(ayam etassa attho).'라는 것은 '이것이 그 질문(pañha)의 뜻이다.'는 말이다.”(MA.ii.134)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774)

 

774) “이 경은 존자의 명상주제(kamma-ṭṭhāna)가 되었다. 존자는 이 경을 명상주제로 삼아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과(arahatta)를 얻었다.”(MA.ii.134)

 

 

개미집 경(M23)이 끝났다.

 

 

2. “비구여, 비구여, 개미집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

밤에는 연기를 내뿜고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

낮에는 불타오릅니다.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

그때 바라문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여래)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 (유학인 비구), (성스러운 통찰지)을 가지고 파십시오(정진하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빗장을 보았습니다. '빗장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현자여, 빗장 (무명)을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두꺼비를 보았습니다. '두꺼비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두꺼비 (분노에 따른 절망)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두 갈래 길을 보았습니다. '두 갈래 길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두 갈래 길 (의심)을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체를 보았습니다. '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다섯 가지 장애들)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거북이를 보았습니다. '거북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거북이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칼과 도마762)를 보았습니다. '칼과 도마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도마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고깃덩이를 보았습니다. '고깃덩이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고깃덩이 (향락 탐욕)를 버리고 칼을 가지고 계속 파십시오.'

현자가 칼을 가지고 파다가 용을 보았습니다. '용입니다, 존자시여.'

바라문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번뇌 다한 비구)은 그대로 두십시오.

용을 해치지 마십시오. 용에게 예배하십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