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까시752)를 유행하셨다.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752) 까시(Kāsi 혹은 Kāsikā)는 부처님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로 바라나시(Bārānasi)를 수도로 하였다. 까시와 바라나시는 초기경에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옛적부터 와라나시(Varanasi, 바라나시)를 까시(Kāsi) 혹은 까시까(Kāsika)라고도 불렀다.(『디가 니까야』제1권 「소나단다경」 (D4) §1의 주해 참조)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팔관재계 경」 (A3:70/i.213) §17 등에 의하면 16개국은 앙가(Aṅga), 마가다(Magadha), 까시까(Kāsika, 까시, 와라나시), 꼬살라(Kosala), 왓지(Vajjī), 말라(Mallā), 제띠(Cetī), 왐사(Vaṃsā), 꾸루(Kuru), 빤짤라(Pañcāla), 맛차(Macchā), 수라세나(Surāsena), 앗사까(Assaka), 아완띠(Avantī), 간다라(Gandhāra), 깜보자(Kamboja) 이다. 한편 『디가 니까야』제2권 「자나와사바 경」 (D18) §1에서는 이 가운 데 까시와 꼬살라, 왓지와 말라, 쩨띠와 왐사, 꾸루와 빤짤라, 맛차와 수라세나, 앙가와 마가다로 서로 짝을 이루어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까시는 일찍 부터 마가다에 편입되었던 듯하다. 한편 까시에서 만든 천 혹은 비단(Kāsika vattha)은 초기불전의 몇몇 군데서 언급되고 있는데(D14. §1.27 등) 지금도 바라나시에서 만든 비단과 천과 향은 유명하다.
2. “비구들이여, 나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간다.
비구들이여, 내가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한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753)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문다고 인식할 것이다.”754)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753)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병이 없고 고통이 없는 등의]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pañca ānisaṃsa)을 보면서 밤에 먹는 것(ratti-bhojana)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때 아닌 때인 밤에 먹는 것(rattiṃ vikāla-bhojana)과 때 아닌 때인 오후에 먹는 것(divā vikāla-bhojana)의 두 가 지를 한꺼번에(eka-ppahāra)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오후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 밤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단계적으로 금하셨는가? 이 두 가지 식사(bhojana)는 이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이행되고 실행되어 온 것(vaṭṭe āciṇṇāni samāciṇṇāni)이다. 그러므로 잘 보호된 마을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커 온 아직은 어린,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이러한 두 가지 식사를 한 번에 버리 는 것은 힘든 일이다(kilamanti). 그러므로 한 번에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본서 「밧달리 경」(M65)에서는 오후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본경에서는 저녁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다. 버리게 하시면서 위협을 주거나 꾸중을 하시면서 버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이 없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이익을 보이시면서 버리게 하셨다.”(MA.iii.186)
754) 적당한때가 아닌 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본서 「메추라기 비유 경」(M66) §6에도 나타난다. 이 경 §6에서 보듯이 세존께서는 처음에 점심때 먹는 것을 금하셨고 그 다음에 저녁에 먹는 것을 금하셨다. 주석서는 세존께서는 한꺼번에(ekappāharena) 점심과 저녁을 다 금하게 되면 약한 비구들에게는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금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MA.ii.186)
3. 그때 세존께서는 까시에서 차례로 유행하시다가 마침내 끼따기리755)라는
까시의 성읍에 도착하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까시의 성읍인 끼따기리에 머무셨다.
755) 보경에 나타나듯이 끼따기리(Kīṭāgiri)는 까시에서 사왓티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성읍이며, 육군비구(六比丘, chabbaggiya bhikkhu)에 속하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Assaji-Punabbasuka)의 본거지였다. 『율장』 등에 의하면 사왓티의 제따 숲으로 향하는 어떤 비구에게 이곳의 어떤 신심 깊은 청신사가 이 두 비구의 나쁜 행실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으며 그 비구는 세존께 아뢰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두 비구를 경책하기 위해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를 보냈다고 한다.(Vin.ii.9f; ii.179f; DhpA.ii.108f.) 그 후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포함한 많은 비구들과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이 두 존자를 위해서는 아무런 거처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Vin.ii.171)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도 끼따기리를 성읍(nigama)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MA.iii.186), 『율장』주석서』에서는 이곳을 지방(janapada)이라 언급하면서 이곳은 적당한 비가 내려 곡물이 풍성하였고 그래서 앗사지와 뿌납바수가 이곳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고 나타난다.(VinA.ii.613)
4. 그때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라는 두 비구가 끼따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756)
그때 많은 비구들이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756) “앗사지(Assaji)와 뿌납바수까(Punabbasuka)는 [『율장』 『건도부』(Vin.jii.179~184) 등에서 언급되는] 육군(六群, chabbaggiya) 비구 가운데 무리를 거느리는(gaṇācariya) 두 사람이다. 이들 여섯 명은 빤두까(Paṇḍuka), 로히따까(Lohitaka), 메띠야(Mettiya), 붐마자까(Bhummajaka), 앗사지(Assaji), 뿌납바수까(Punabbasuka)인데, 이들 여섯 명을 육군비구(六群比丘, chabbaggiya bhikkhu)라 한다. 이 중에서 빤두까와 로히따까는 자기들의 회중(parisa)을 거느리고 사왓티에서 머물렀고, 메띠야와 붐마자까는 라자가하에서, 이 두 사람은 끼따기리에서 머물렀다.”(MA.iii.186~187)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비구 승가도 그러하고요.
도반들이여,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 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습니다.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어도
우리는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고
미래에 얻어질 이익757)을 추구하겠습니까?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757) '미래에 얻어질 이익'은 kālika(시간에 속하는, 시간이 걸리는)를 주석서에서 설명한 대로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미래의 시간에 얻어질 이로움(anāgate kāle pattabbaṃ ānisaṃsaṃ)” (MA.iii.187)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의미를 가진 akālika(시간이 걸리지 않는)라는 단어는 삼보 가운데 법을 설명하는 단어로, 즉 부처님 가르침은 누구든지 그것을 바르게 실천할 때 그 결과가 시간이 걸리지 않고(akālika) 즉각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옷 감의 비유 경」 (M7) §6과 본서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25를 참조하고 설명은 『청정도론』 VII.80~81을 참조할 것.
5. 그 비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할 수 없자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앗사지 비구 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할 수가 없어서
세존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6.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른 비구를 부르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말이라 전하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 까 비구를 불러오라.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셨습니다.'라고.”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하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도반이여, 잘 알겠습니다.”라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하고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 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사실인가? 많은 비구들이 그대들을 만나러 가서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비구 승가도 그러하고요.
도반들이여,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대들은 그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습니다.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어도 우리는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 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이로움을] 버리고
미래에 얻어질 이로움을 추구하겠습니까?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인간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어떤 느낌을 경험하면
그에게 해로운 법들은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법을 설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7.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이렇게 법을 설한 것을 알지 못하는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758)
758) “이 문장의 첫 번째 즐거운 느낌은 재가에 바탕한 기쁨(gehas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출가에 바탕한 기쁨(nekkhamma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다음 두 문장에 나타나는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각각 재가와 출가에 바탕한 슬픔과 평온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MA.iii.187)
재가에 바탕 한 [여섯 가지] 기쁨 등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 (M137) §§9~15를 참조할 것.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8.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善法]이 줄어든다.'759)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하자.
내가 그와 같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버려라.'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759) '해로운 법[不善法, akusala-dhamma]'과 '유익한 법들[善法, kusala-dhamma]'을 말씀하셨다. 본서 제3권「왓차곳따 긴 경」 (M73) §§4~5에서 세존께서는 탐 · 진 · 치와, 살생과 도둑질 등의 열 가지 해로움[十不善]을 해로운 법들[不善法, akusala-dhammā]로, 불탐 · 부진 · 불치와 열 가지 유익함[十善]을 유익한 법들[善法, kusala-dhammā]로 정의하고 계신다. '유익한 법들[善法]'과 '해로운 법들[不善法]'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제20장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과 선법 · 불선법(299쪽 이하)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선법 · 불선법의 판단은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 -vāyāma]의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진리의 분석 경」 (M141) §29를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760)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760)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evarūpa sukhavedana)'이란 것은 재가에 바탕 한 기쁨(gehassita-somanassa)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MA.iii.187) 재가에 바탕한 기쁨과 출가에 바탕 한 기쁨 등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 (M137) §9이하를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내가 이와 같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761)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
761) “여기서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evarūpa sukhavedana)'이란 것은 출가에 바탕한 기쁨(nekkhamma-sita-somanassa)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MA.iii.187)
9.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
10.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
11.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12.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존재의 족쇄를 부수었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3.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762) 위없는 유가안은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763)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기능[根]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764)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762) '얻지 못했지만'은 appattamānasā를 옮긴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본서 제1권 「뿌리에 대한 법문 경」 (M1) §27의 주해를 참조할 것.
763) “'적당한 거처(anulomikāni senāsanāni)'란 도닦기에 적당하고(paṭipatti anulomāni) 명상주제를 들기에 적합한 곳(kammaṭṭhāna-sappāyāni)으로, 그곳에 머물 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MA.iii.187)
764) “'기능[根]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indriyāni samannānayamānā)'라는 것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즉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samānaṃ kurumānā)을 말한다.”(MA.iii.188)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유지함(indriyānaṃ samabhāva-karaṇa)에 대해서는 『청정도론』IV.45~49를 참조할 것.
14.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일곱 부류의 인간들765)이 존재한다.766) 무엇이 일곱인가?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
몸으로 체험한 자,
견해를 얻은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이다.”
765) '일곱 부류의 인간들(satta puggalā)'은 『인시설론 주석서』 (PugA.194~ 195)에도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본서 「밧달리 경」(M65) §11의 주해에서 소개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본서에 해당하는 주석서의 설명은 아래 주해들에서 인용하고 있다.
766) “이 일곱 부류의 인간들 가운데서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appamādena karaṇīya)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두 부류(양면해탈자와 혜해탈자)이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은 다섯 부류이다. 그리하여 모두 일곱 부류의 사람이 있다.”(MA.iii.188)
15.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767)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또 그는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767)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ubhato-bhāga-vimutta)'란 두 가지 측면(bhāgā) 모두로 해탈한 자이다. 즉 무색계 증득(arūpa-samāpatti)으로 물질의 몸(rūpa-kāya)에서 해탈했고, 도를 얻음으로 정신의 몸(nāma-kāya)에서 해탈했다. 네 가지 무색계 증득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출정하여(vuṭṭhāya)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a]을 명상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네 부류의 사람과 상수멸(nirodha)에서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불환자, 이렇게 다섯 부류의 사람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이다.
그러나 『인시설론』(Pug.73)에는 “어떤 사람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인가? 여기 어떤 사람이 여덟 가지 해탈(aṭṭha vimokkhā)을 몸으로 체험하여(kāyena phusitvā) 머물고, 또 통찰지로써 번뇌들(āsavā)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라고 나타난다. 이처럼 『논장』 (Abhidhamma)에서는 여덟 가지 해탈을 얻은 것(aṭṭha-vimokkha-lābhi)으로 설명하고 있다.” (MA.ili.188)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해 야 할 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6.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768)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지만,
그는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통찰지로 해탈한 자라 한다.
768)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paññā-vimutta)'란 통찰지를 닦아 해탈한 자이다.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와 네 가지 [색계]禪 에서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네 사람, 이렇게 다섯 부류의 사람이 통찰지로 해탈한 자이다. 그러나 성전(즉 『인시설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오직 여덟 가지 해탈과 반대되는 것만으로(aṭṭha-vimokkha-paṭikkhepa-vasena eva) 설명했다. “그는 여덟 가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문다. 그러나 통찰지로써 번뇌들(āsavā)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이런 사람을 통찰지로 해탈한 자라고 한다.” (Pug.73)라고” (MA.iii.188)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란 禪 혹은 삼매의 습기(濕氣, 촉촉함)가 없이 위빳사나를 닦은 자를 말하며, 순수 위빳사나를 닦는 자(suddha-vipassaka, 『청정도론』 XVII.8)라고도 불린다.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9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 112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7.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몸으로 체험한 자769)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또 그는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 들을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몸으로 체험한 자라 한다.
769) “감촉하면서(phuṭṭhanta) 실현한다.(sacchikaroti)고 해서 '몸으로 체험한 자(kāya-sakkhī)'라 한다. 禪의 감촉(jhāna-phassa)에 먼저 닿고, 나중에 소멸(nirodha)인 열반을 실현한다. 그는 예류과의 경지를 시작으로 아라한 도의 경지까지 여섯 부류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자는 여덟 가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또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의 일부(ekacca)를 제거한다. 이를 일러 몸으로 체험한 자라고 한다.”(Pug.73)라고.”(MA.iii.188)
이런 비구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18.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견해를 얻은 자770) 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지만,
그는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들을 제거하고
또 여래가 선언하신 법들을 통찰지로써 잘 보고 바르게 검증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를 얻은 자라 한다.
770) “'견해를 얻은 자(diṭṭhi-ppatta)'의 간단한 특징(saṅkhepa-lakkhaṇa)은 이렇다. '형성된 것들[行]은 괴로움이고 소멸은 행복이다.'라고 알고(ñāta) 보고(diṭṭha) 체험하고(vidita) 실현하고(sacchikata) 체득한(phusita) 것을 분명하게 안다(paññāyāti)고 해서 '견해를 얻은 자'이다.
상세하게 설하면(vitthārato) 이런 사람도 몸으로 체험한 자처럼 여섯 부류이다. 그러므로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래도 꿰뚫어 안다.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여래께서 선언하신(tathāgata-ppaveditā) 가르침들(dhammā)을 통찰지로써 잘 보고(vodiṭṭhā) 바르게 검증한다(vocaritā), 이런 사람을 일러 견해를 얻은 사람이라 한다.”(Pug.74)라고”(MA.iii.188)
이런 비구들에게도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 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19.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해탈한 자771)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지만,
그는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들을 제거하고 또 여래에 믿음을 심고 뿌리내려 확고하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771) “'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saddhāya vimutta)'도 여섯 부류가 된다. 그러므로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는 여래께서 선언하신 가르침들을 통찰지로써 잘 보고 바르게 검증한다. 그는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고 그들의 일부(ekacca)를 제거한다. 그러나 견해를 증득한 사람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탈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일러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Pug.74)라고”(MA.iii.189~190) 여기서 [ ] 안의 부분은 아래에서 인용하는 『디가 니까야 복주서』의 설명을 참조하여 넣은 것이다. 『디가 니까야 복주서』는 '견해를 얻은 사람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심으로 해탈한다.'라는 이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견해를 얻은 자(diṭṭhi-ppatta)와 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간에 오염원들을 버림(kilesa-ppahāna)에 다른 점(nānatta)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무슨 연고로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견해를 얻지 못 하는가? 도가 오는 근원이 다르기(āgamanīya-nānatta) 때문이다. 견해를 얻은 자의 경우 도가 나타나서 오염원들을 억압할 때(vikkhambhento) 고통스럽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억압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오염원들을 억압할 때 고통스럽고 힘들이고 어렵게 억압하기 때문에 견해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통찰지(paññā)에 의해서도 차이가 있다. 견해를 얻은 자는 앞의 세 가지 도(예류도부터 일래도까지)의 위빳사나의 지혜가 예리하고 용감하고 밝다.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위빳사나의 지혜가 예리하지 않고 용감하지 않고 밝지 않기 때문에 그는 견해를 얻지 못한다.”(DAȚ.iii 94)
이런 비구들에게도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20.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법을 따르는 자772)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773)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며,
또 그는 통찰지로써 보지만 아직 번뇌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래가 선언하신 법을 그의 통찰지로 충분히 사유하여 받아들이고
또한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의 이런 법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772) “법을 따르기 때문에 '법을 따르는 자(dhamma-anusārī)'이다. 법이란 통찰지(paññā)이다. 통찰지를 앞세운 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아래 21의]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이 둘은 예류도의 경지에 머무는 자들(sotāpatti-magga-ṭṭhā)이다.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가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이 강하고(adhimatta), 통찰지를 가져오고 통찰지를 앞세운(paññā-pubbaṅgama) 성스러운 도(ariya-magga)를 닦는 자를 법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Pug.74)라고, 마찬가지로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가 믿음의 기능[信根, saddhindriya]이 강하고, 믿음을 가져오고 믿음을 앞세운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를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Pug.74)라고 여기서 설명한 것은 간략한 것이다. 상세한 것은 『청정도론』의 통찰지의 수행 편(paññā-bhāvanādhikara, Vis.XVII.74~78)에 설명되어 있다.”(MA.iii.190~191)
773) “색계 증득 없이는 무색계 증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무색계라고 표현했지만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 aṭṭha vimokkhā]을 말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MA.iii.191)
팔해탈의 정형구는 본서 제3권 「사꿀루다이 긴 경」 (MT7) §22와 주해들을 참조할 것.
이런 비구들에게도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 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21.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을 따르는 자774) 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며,
또 그는 통찰지로써 보지만 아직 번뇌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래에 대해 충분한 믿음과 사랑이 있고,
또한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의 이런 법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한다.
774)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위 §20의 주해를 참조할 것.
이런 비구들에게도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 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22. “비구들이여, 나는 구경의 지혜가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차적인 도닦음으로
구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것이다.”775)
775) 여기서 세존께서는 '나는 구경의 지혜가 단박에 성취된다고 말하지 않는다.(nāhaṃ ādikeneva aññārādhanaṃ vadāmi).'라고 하시고, '순차적인 공부지음(anupubba-sikkhā)'과 '순차적인 실천(anupubba-kiriyā)'과 '순차적인 도닦음(anupubba-paṭipadā)'으로 구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본서 제3권 「가나까 목갈라나 경」(M107) §2에도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차적인 도닦음'은 나타나고 있으며 §3이하에서 세존께서는 이것을 계를 지님부터 네 가지 禪까지의 8가지 단계로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세 술어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그곳 §2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여기서 '단박에'는 ādikena ev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단 한 번에(첫 번째에 바로, paṭhamam eva)”(MA.iii.193)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개구리(maṇḍūka)가 단 한 번에(paṭhamam eva) 껑충 뛰어올라서(uppatitvā) 가는 것처럼 그렇게 구경의 지혜가 이루어져서(aññārādhana) 아라한과에 확립(patiṭṭhāna)된다고 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MA.iii.193)
이것은 후대에서 전개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위시한 돈(頓)과 점(漸)의 문제에 대한 초기불교의 입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행에 대한 초기불교의 입장은 점수적 혹은 점진적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은 성자는 예류자 · 일래자 · 불환자 · 아라한의 네 부류로 분류된다. 이러한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학적인 이해와 수행이 있어야 한다. 범부가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순차적이고 점진적인 수행 즉 '순차적인 공부지음(anupubba-sikkhā)'과 '순차적인 실천(anupubba-kiniyā)'과 '순차적인 도닦음(anupubba-paṭipadā)'이 있어야 한다. 본 『맛지마 니까야』에 나타나는 15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가 그렇고 『디가 니까야』에 나타나는 23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이 둘은 본서 역자 서문 §8-(3)을 참조할 것.)가 그렇다. 그리고 본경 §3에 나타나는 12가지 점진적인 방법이 그렇고, 본서 제3권 「가나까 목갈라나 경」 (M107) §3이하에 나타나는 계를 지님부터 네 가지 禪까지의 11가지 점진적인 방법도 그렇다. 그러므로 범부에서 성자의 첫 단계인 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순차적이고 점전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정과 절차와 순서와 차례가 있는 세상의 모든 일의 입장에서도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10가지 족쇄 가운데 몇 가지를 풀었는가에 따라서 예류자 · 일래자 · 불환자 · 아라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자체가 돈오점수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인 유신견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과 의심은 단박에 해결되는 것이라서 돈오의 입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정서적 · 감정적 번뇌인 감각적 욕망과 악의 등은 점진적으로 닦아서 없어지는 것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집착부터 무명까지의 미세한 족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비담마 문헌의 여러 곳에서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처음의 셋을 보아서[見, dassana] 버려야 할 법들(dassanena pahātabbā dhammā)이라고 정리하고 있으며(Dhs.182 {1002}), 나머지는 닦아서[修, bhāvanā]) 버려야 할 법들(bhāvanāya pahātabbā dhamm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Dhs.183 {1007}) 이러한 봄[見]과 닦음[修]은 다시 견도(見道, dassana-magga)와 수도(修道, bhāvanā-magga)라는 술어로 주석서 문헌들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으며(MA.1.75 등) 견 혹은 견도에 의해서 예류자가 되고 수 혹은 수도의 성취정도에 따라서 차례대로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Ps.ii.82 이하; Pm 299 등)
물론 견도로 유신견 등의 세 가지 족쇄를 없애기 위해서도 당연히 점진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고 수도로 정서적 번뇌 등 나머지 족쇄를 없애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본경은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 차적인 도닦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 · 계 · 생천(施·戒·生天)과 관계된 또 다른 순차적인 가르침(anupubbi-kathā)의 정형구에 대해서는 본서 「우빨리 경」 (M56) §18과 그 주해와 본서 제3권 「브라흐마유 경」 (M91) §6을 참조할 것.
2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순차적으로 공부짓고 순차적으로 행하고
순차적으로 도를 닦아 구경의 지혜가 이루어지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스승에 대해 믿음이 생긴 자는
스승을 친견한다.
친견하면서 공경한다.
공경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귀 기울이면서 법을 배운다.
배우고 나서 법을 호지한다.
호지한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본다.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의가 생긴다.
열의가 생길 때에 시도한다.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본다.” 776)
776) “'열의(chanda)'란 하고자 하는 유익한 열정(kattukamyatā-kusala-cchanda)이다. '세밀하게 조사한다(tuleti).'는 것은 무상, 고, 무아라고 세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tulayitvā padahati).'는 것은 세밀하게 조사할 때 도의 노력(magga-padhāna)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한다(kāyena ceva paramasaccaṃ sacchikaroti).'는 것은 정신의 몸(nāma-kāya, 즉 정신의 무더기)으로 열반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통찰지로써 꿰뚫어본다 (panñāya ca naṃ ativijjha passati)'는 것은 정신의 무더기가 함께한 도의 통찰지로써 꿰뚫고 보는 것이다.”(MA.iii.193)
24.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는] 참으로 그런 믿음이 없었고, 참으로 친견이 없었고,
참으로 공경이 없었고, 참으로 귀 기울임이 없었고, 참으로 법을 들음이 없었고,
참으로 법을 호지함이 없었고, 참으로 뜻을 자세히 살펴봄이 없었고,
참으로 법들을 사유하여 받아들임이 없었고, 참으로 열의가 없었고, 참으로 시도가 없었고, 참으로 세밀한 조사가 없었고, 참으로 노력이 없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길을 잃었고, 그릇된 도를 닦았다.
비구들이여,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이 법과 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고 얼마나 잘못 들어섰던가!”
25. “비구들이여, 네 구절로 된 진리777)가 있나니, 그것을 암송할 때 지자는
오래지 않아 통찰지로써 그 뜻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을 위해 암송하리라. 이것을 잘 이해하도록 하라.”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누구라고 그 법을 이해하겠습니까?”
777) “'네 구절로 된 진리(catu-ppada veyyākaraṇa)'란 사성제에 대한 설명(catu-sacca-byakākaraṇa)을 말한다.” (MA.iii.193)
26. “비구들이여, 스승이 세속적인 것을 중히 여기고 세속적인 것을 상속받고
세속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고 머문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런 것을 얻으면 이것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그에게 이런 흥정을 해서는 안 되는데,778)
하물며 그가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여래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778) “마치 물건을 사고팔 때 가격을 올리거나 깎는 것처럼 흥정하는 것을 말한다.” (MA.ji.194)
27. “비구들이여, 스승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가 통찰하여 취할 때,779)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780)
779) '통찰하여 취할 때'는 pariyogāy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이것을 “pariyogāhitvā(pari + ava + √gāh, to plunge) ukkhipitvā gahetvā”(MA.ii.194)라고 설명하고 있듯이 pariyogāya는 pariyogāhitvā의 축약형이며 깊이 들어가서 취한다는 의미이다.
780) “'법다운 것(anudhamma)'이라는 것은 고유성질(sabhāva)이 [있는 진실한 것]이라는 말이다. 즉 '세존께서는 한 자리에서만 먹는 그 이익을 아시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을 버리고 한 자리에서만 먹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법다운 것이고 그 고유성질이 있는 [진실한 것]이다.”(MA.iii.194)
'세존은 스승이시고, 나는 제자이다. 세존께서는 아시고,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스승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가 통찰하여 취할 때
스승의 교법은 증장할 것이고 자양분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스승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가 통찰하여 취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
'피부와 힘줄과 뼈가 쇠약해지고 몸에 살점과 피가 마르더라도 남자다운 근력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분발로써 얻어야 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리라.'라고, 781)
781) 주석서는 이러한 '정진(vīriya)'을 네 가지 요소를 갖춘 정진(catur-aṅga-samannāgata vīriya)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네 가지는 본문에 나타나는 '피부(taca)', '힘줄(nahārū)', '뼈(aṭṭhi)', '살점과 피(maṃsa lohita)'이다.(MA.iii.194; SA.ii.49) 이 정진의 정형구는 『상윳따 니까야』제2권 「십력 경」 2(S12:22) §6과 「통 경」 (S21:3) §5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스승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가 통찰하여 취할 때
두 가지 결실 가운데 한 가지 결실을 얻나니,
바로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증득하거나 만일 취착이 남아있다면 불환자가 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끼따기리 경(M70)이 끝났다.
제7장 비구 품이 끝났다.
* 4념처(/正念- ↔ 5蓋</5下分結>제거 -正定) ☞ 定 |
(3) 『맛지마 니까야』의 15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
1) 『디가 니까야』제1권의 23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
부처님의 일대시교는 계 · 정 · 혜 삼학(三學, 세 가지 공부지음 tisso sikkhā, sikkhattaya, tividhā sikkhā)으로 정리된다. 계 · 정 · 혜는 니까야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고, 주석서의 노둣돌인 『청정도론』의 기본골격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계학(戒學)은 도덕적인 삶을 뜻하고 정학(定學)은 삼매 수행을 말하고 혜학(慧學)은 통찰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이 삼학 가운데 계학은 『율장』에서, 정학은 『경장』에서, 혜학은 『논장』에서 주로 설해진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DA.i.19).
계 · 정 · 혜 삼학하면 초기불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디가 니까야』 제1권 『계온품』의 10개의 경들에서 정리하고 있는 삼학이다. 이 가운데 대표되는 경이 「사문과경」(D2)이다. 「사문과경」은 출가자가 닦아야 할 것으로 3가지 계의 무더기와 감각대문의 단속 등의 공부지음을 들고(계학), 이것을 통해서 4가지 禪(정학)과 8가지 지혜(혜학)를 실현하는 것을 사문의 결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모두 23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
그는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②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③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
④ <짧은 길이의 계 - 모두 26가지로 계를 지님>
⑤ <중간 길이의 계 - 모두 10가지로 잘못된 행위를 멀리함>
⑥ <긴 길이의 계 - 모두 7가지로 삿된 생계를 멀리함>
⑦ 이처럼 계를 구족한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
* 正精進
⑧ 비구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킨다. …
⑨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춘다. …
⑩ 비구는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
☞ 戒 / 定
閑居(實參)
* 4념처(/正念- ↔ 5蓋</5下分結> 제거 -正定) ☞ 定
⑪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 해태와 혼침을 버려 …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
⑫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⑬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⑭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⑮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⑯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⑰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⑱ 신통변화[神足通 신족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⑲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通 천이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⑳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 타심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㉑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숙명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㉒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천안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㉓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누진통]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런데 같은 『디가 니까야』제1권에 속하는 「수바 경」 (D10)에서 아난다 존자는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를 계의 무더기[成蘊]라고 정리하고 있고, ⑧부터 ⑮까지를 삼매의 무더기[定蘊]라고 정리하고 있으며, ⑯부터 ㉓까지를 통찰지의 무더기[慧蘊]라고 정리하고 있다. 삼매의 무더기의 핵심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의 구족과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극복과 초선부터 제4선까지이며, 통찰지의 무더기의 핵심은 지와 견의 정형구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의 정형구와 육신통 즉 8통이 된다. 이 정형구에 대한 다른 설명은 『디가 니까야』제1권 해제 §2를 참조하기 바란다.
아무튼 경의 특성상 「뽓타빠다 경」(D9)과 「삼명경」 (D13)에서만 23 단계 정형구가 모두 언급되지 않을 뿐이지, 이 둘과 「범망경」 (D1)을 제외한 『계온품』의 나머지 10개의 경들은 모두 23가지 정형구를 각 경의 특성에 맞게 모두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범망경」과 「뽓타빠다 경」과 「삼명경」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경들은 계 · 정 · 혜 삼학을 23가지로 정리한 정형구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체계로 『디가 니까야』 제1권인 『계온품』이 구성되어 있다.
2) 『맛지마 니까야』의 15단계 계·정·혜의 정형구
이처럼 『디가 니까야』에 23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가 있다면 본서에는 『맛지마 니까야』의 15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가 있다. 이 15 단계 정형구는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짧은 경」 (M27) §§11~26을 위시한 M51, M60, M76, M79, M101, M125의 7개 경에 나타나고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정형구가 M38, M125, M58 등에도 나타난다. 이 15 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
그는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②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③ 이와 같이 출가하여 여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
④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戒蘊]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한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
⑤ 비구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킨다. …
⑥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춘다. …
⑦ 비구는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
⑧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 해태와 혼침을 버려 …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
⑨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⑩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⑪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⑫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⑬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⑭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⑮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한편 위의 『디가 니까야』의 23단계 정형구를 계 · 정 · 혜로 배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디가 니까야』제1권 「수바 경」(D10)에 준해서 이 『맛지마 니까야』의 15단계 정형구를 계 · 정 · 혜와 배대해 보면 위의 15단계 가운데 ①부터 ④까지는 계의 무더기[戒蘊]에, ⑤부터 ⑫까지는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다시 ⑬부터 ⑮까지는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배대가 된다. 여기서 삼매의 무더기의 핵심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의 구족과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극복과 초선부터 제4선까지이며, 통찰지의 무더기의 핵심은 3명이 된다.
그런데 『디가 니까야』의 23단계 정형구에는 6통 + 2통 = 8통이 나타나지만 『맛지마 니까야』의 15단계 정형구에는 삼명만이 나타난다. 물론 『맛지마 니까야』에도 6통은 M6, M12, M73, M77, M108, M119의 6개 경에 나타나지만 이처럼 15단계 계 · 정 · 혜의 정형구에는 삼명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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