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43교리문답248)의 긴 경 mahāvedallasuttaṃ
248) 여기서 '교리문답'으로 옮긴 단어는 vedalla(웨달라) 이다. 이 웨달라는 구분교(九分敎) 즉 아홉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스승의 교법[九分敎, navaṅgasatthu-sāsana]으로 불리는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교리문답[方等]의 아홉 가지 가운데서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다.(이 구분교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뱀의 비유 경」 (M22) §10과 주해를 참조할 것.)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교리문답의 긴 경」(M43), 「바른 견해 경」(M9), 「제석문경」(D21), 「상카라 분석경」, 「보름밤의 긴 경」(M109) 등 모든 신성한 지혜(veda)와 만족(tuṭṭhi)과 여러 가지 이익됨(laddhā laddhā)이 질문된 경들(pucchita-suttantā)이 바로 교리문답(方等, vedalla]이라고 알아야 한다.” (DA.i.24)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교리문답'으로 옮겼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불분명하며(PED) 중국에서는 방등(方等)으로 옮겼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마하꼿티따 존자249)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서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249) 마하꼿티따 존자(āyasmā Mahākoṭṭhita)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하나의 모음」 (A1:14:3-10)에서 무애해(paṭisambhidā)를 얻은 비구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언급되었던 분이다. 그는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삼베다에 통달했다고 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곧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AA.i.286)
그는 본경 외에도 여러 경에서 특히 사리뿟따 존자와 담론을 나누는데, (예를 들면 『상윳따 니까야』제3권 「계 경」(S22:122) 등 여러 경들) 『장로게』 (Thag)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마하꼿티따 존자를 칭송하는 게송이 나타날 정도로 두 분은 교분이 깊었던 듯하다.
2. "도반이시여, '통찰지가 없는 자, 통찰지가 없는 자'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통찰지가 없는 자'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통찰지가 없는 자라 합니다.
그가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할까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50)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통찰지가 없는 자라 합니다."
250)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nappajānāti) '통찰지가 없는 자(duppañña)'라고 한다. 이 방법은 모든 곳에 적용된다.
'이것은 괴로움이다(idaṃ dukkhaṃ).'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괴로움이고, 이만큼이 괴로움이고, 이 이상은 아니다.'라고 괴로움의 진리(dukkha-sacca)를 역할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yāthāva-sarasa-lakkhaṇato)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ayaṃ dukkha-samudayo).'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에서 괴로움이 일어난다.'라고 현재의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갈애(taṇhā)가 일어남의 진리라고 그 역할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ayaṃ dukkha-nirodho).'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괴로움과 이 괴로움의 일어남은 이곳에 이르러 소멸한다. 그러므로 이 둘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열반(nibbāna)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그 역할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도닦음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한다.'라고 도의 진리(magga-sacca)를 역할과 특징에 따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MA.ii.337)
"장하십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설명을 환희하고 기뻐하면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또 다시 질문을 했다.
3. "도반이시여, '통찰지를 가진 자, 통찰지를 가진 자'251) 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통찰지를 가진 자'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고 해서 통찰지를 가진 자라 합니다.
그는 무엇을 꿰뚫어 알까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고 해서 통찰지를 가진 자라 합니다."
251) “아래로는 예류자부터 위로는 번뇌 다한 아라한까지를 '통찰지를 가진 자(paññavā)'라 한다.” (MA.ii.339)
4. "도반이시여, '알음알이,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알음알이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알까요?
'즐거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252) '괴로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고 분별해서 압니다.
도반이시여,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253)
252) “'즐거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안다(sukhantipi vijānāti)'는 등은 즐거운 느낌이라고도(sukha-vedanampi) 분별해서 알고(vijānāti), 괴로운 느낌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고도 분별해서 안다는 말이다.”(MA.ii.339)
253) “여기서는 무엇을 질문하는가? [성자(ariya-puggala – MAȚ]는 알음알이를 통해서 형성된 것들(saṅkhārā)을 명상한 뒤에(sammasitvā) 통찰지를 가진 자(paññavā)가 되는데 바로 그런 알음알이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즉 [성자가] 도달하게 되는 위빳사나(āgamana-vipassanā)의 알음알이와 [수행(bhāvanā)이라는 - MAȚ] 본업을 행하는 마음(kamma-kārakacitta)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리뿟따] 장로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M10, §32)는 등의 방법으로 전승되어오는 느낌을 통해서 정신의 명상주제를 들고 있다. 이것은 본서 제1권 「마음챙김의 확립 경」(M10, §32)에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MA.ii.339)
알음알이 혹은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ārammaṇaṃ cinteti ti cittaṃ - DhsA.63 등)'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주석서의 설명에서 보듯이 여기서 질문한 알음알이는 아무 대상이나 아는 그러한 일반적인 알음알이가 아니라 수행(bhāvanā)을 할 때 생겨나는 알음알이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방법을 담고 있는 「마음챙김의 확립 경」 (M10) 에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정리된 몸 · 느 낌· 마음 · 법[身·受·心·法]의 네 가지 가운데서 특별히 '느낌(vedanā)'을 알아차리는 그런 알음알이를 가지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5. "도반이시여, 그러면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습니까, 혹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254)
이 법들을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그런데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54) “'결합되어 있는(saṃsaṭṭhā)'이란 것은 함께 일어남(ekuppāda) 등의 특징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는 뜻(saṃyog-aṭṭha)에서 결합되어 있는지 혹은 '분리되어 있는지(visaṃsaṭṭhā)'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마하꼿티따 장로가 도의 통찰지(magga-paññā)와 위빳사나의 알음알이(vipassanā-viññāṇa)인 이 두 가지의 세간적인 법과 출세간적인 법을 혼합하여 경지(bhūmantara)를 각각 나누어 교리(samaya)를 알지 못하는 듯이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도의 통찰지가 도의 알음알이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지, 또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위빳사나의 알음알이와 함께 결합 되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도 그 뜻을 설명하면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다는 등으로 대답을 하셨다.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na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ṃ).'는 것은 이 법들은 세간적인 도의 순간이건 출세간적인 도의 순간이건 함께 일어난다(ekato uppannā). 그러므로 따로 따로 분리해서(visuṃ visuṃ katvā) 대상(ārammaṇa)으로서나 토대(vatthu)로서나 일어남(uppāda)으로서나 소멸함(nirodha)으로서나 그들의 다른 점(nānākaraṇa)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그 법들에는 차이점(visaya)이 있다. 세간적인 법에 관한 한, 마음(citta)이 지도자(jeṭṭhaka)이고 선행하지만(pubbaṅgama) 출세간적인 법에 관한 한 통찰지(paññā)가 지도자이고 선행한다. 정등각자께서도 세간적인 법에 대해 질문하실 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통찰지를 얻었는가? 첫 번째 도의 통찰지인가?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도의 통찰지인가?'라고 질문하지 않으신다.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감각접촉, 어떤 느낌, 어떤 인식,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라고도 묻지 않으신다.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라고 오직 마음을 가지고 질문하신다. 유익함[善]과 해로움[不善]을 드러내실 때에도 '마음이 모든 법들을 선행하고, 맨 먼저이다.'라고 하셨고,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인가? 욕계 유익한 마음이 일어날 때에'라고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드러내신다. 그러나 출세간적인 법에 대해 질문하실 때에는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감각접촉, 어떤 느낌, 어떤 인식,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라고 묻지 않으시고,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통찰지를 얻었는가? 첫 번째 도의 통찰지인가?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도의 통찰지인가?'라고 이와 같이 통찰지를 가지고 질문하신다.” (MA.ii.339~340)
도반이여, 꿰뚫어 아는 그것을 분별해서 알고, 255) 분별해서 아는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256)
그러므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55) “'꿰뚫어 아는(yaṃ pajānāti)'에서 꿰뚫어 안다는 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이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등으로 도의 통찰지(magga-viññāṇa)로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분별해서 알고(taṃ vijānāti)'에서 분별해서 안다는 것은 도의 알음알이(magga-viññāṇa)도 그렇게 그것을 분별해서 안다는 말이다.” (MA.ii.341 ~ 342)
256) “'분별해서 아는(yaṃ vijānāti)'이란 것은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라는 식으로 위빳사나의 알음알이가 분별해서 안다는 것이고, '그것을 꿰뚫어 안다(taṃ pajānāti).'는 것은 위빳사나의 통찰지도 그렇게 그것을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다(saṃsaṭṭhā).' 즉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하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고, 동일한 대상을 가지기 때문에(ekuppāda-ekanirodha-ekavatthuka-ekārammaṇatā)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MA.ii.342)
한편 남북방 아비담마 · 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여기서처럼 마음과 통찰지 뿐만 아니라 마음과 모든 심리현상들 혹은 모든 마음부수법[心所法]들은 이처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하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고 동일한 대상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비담마의 기본전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께 일어나고 등의 이 네 가지 정의는 아비담마에서 마음과 마음부수법(심소법)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기본 문구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장 §1과 [해설]을 참조할 것.
6. "도반이시여,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이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도반이여,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통찰지는 닦아야 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257) 이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257) “'통찰지는 닦아야 한다(paññā bhāvetabba).'는 것은 도의 통찰지(magga-paññā)와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한 알음알이도 함께 반드시 닦아야 한다.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 한다(viññāṇaṃ pariññeyyaṃ).'는 것은 위빳사나의 알음알이(vipassanā-paññā)와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한 통찰지도 함께 반드시 철저히 알아야 한다.” (MA.iii.342)
여기서 [도의] 통찰지는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사유[正思惟]를 말하는 것이므로 팔정도는 닦아야 하는 것으로 정리되기 때문에(『상윳따 니까야』제6권 「철저히 알아야 함 경」 (S56:29) §5 참조) '통찰지는 닦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위빳사나의] 알음알이는 오온에 포함되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에 속한다[五陰盛苦(오음성고), 五取蘊苦(오취온고)]. 그러므로 이것은 철저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경에 나타나기 때문에(Ibid)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도반이시여, '느낌, 느낌'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로 느낌이라고 합니까?" 258)
"도반이여, '느낀다,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느낄까요?
'즐거움'이라고도 느끼고, '괴로움'이라고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라고도 느낍니다. 259)
도반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느낀다,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합니다."
258) “'느낌, 느낌(vedanā vedanā)'이라고 시작하는 이 질문은 마하꼿티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느낌의 특징(vedanā-lakkhaṇa)을 질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오로지 명상의 범주에 속하는 삼계의 느낌(tebhūmika-sammasana-cāra-vedanā)만을 말한다고 알아야 한다.”(MA.ii.342)
259) “'즐거움이라고도 느낀다(sukhampi vedeti).'는 것은 즐거운 대상(sukha ārammaṇa)이라고 느낀다, 체험한다.(anubhavati)는 말이다. 나머지 두 가지 경우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상윳따 니까야』제3권 「마할리 경」(S22:60/ii.69)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할리여, 만일 물질에 전적으로 괴로움만이 있고 물질이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빠져들고 즐거움에는 빠져들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마할리여, 그러나 물질에는 즐거움이 있고 물질은 즐거움에 떨어지고 즐거움에 빠져들고 괴로움에[만] 빠져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중생들은 물질에 집착한다. 집착하기 때문에 속박되고 속박되기 때문에 오염된다. 마할리여, 중생들이 오염되는 것에는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이 있다.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중생들은 오염된다. 마할리여, 만일 느낌에 … 인식에 … 심리현상들에 … 알음알이에 전적으로 괴로움만이 있고 알음알이가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빠져들고 즐거움에는 빠져들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마할리여, 그러나 알음알이에는 즐거움이 있고 알음알이는 즐거움에 떨어지고 즐거움에 빠져들고 괴로움에[만] 빠져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중생들은 알음알이에 집착한다. 집착하기 때문에 속박되고 속박되기 때문에 오염된다. 마할리여, 중생들이 오염되는 것에는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이 있다.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중생들은 오염된다.” (S22:60 §5)
이 「마할리 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대상을 가지고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으로 설하셨다. 나아가서 이전의 즐거운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즐거운 느낌이 느끼고, 이전의 괴로운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괴로운 느낌이 느끼고, 이전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느낀다고 이렇게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느낌이 느끼지(vedanāyeva hi vedeti) 다른 어떤 것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하신 것이다.” (MA.ii.342)
8. "도반이시여, '인식, 인식'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로 인식이라 합니까?" 260)
"도반이여, '인식한다, 인식한다.'해서 인식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인식할까요?
'푸른색'이라고도 인식하고, 261) '노란색'이라고도 인식하고,
'붉은 색'이라고도 인식하고, '흰색'이라고도 인식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므로 '인식한다,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합니다."
260) “이 질문도 인식의 특징을 묻는 것이지만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오로지 명상의 범주에 속하는 3계의 인식을 말한다.” (MA.ii.342~343)
261) “'푸른색이라고도 인식한다(nīlakampi sañjānāti).'는 것은 푸른 꽃이나 푸른 천에 [까시나 명상의] 준비(parikamma)를 지어 근접삼매(upacāra)나 본삼매(appana)를 얻도록 인식한다. 이런 뜻에서 준비의 인식이나 근접삼매의 인식이나 본삼매의 인식이 모두 해당된다. 푸른색에 대해 푸른색이라고 일으키는 인식(uppajjanaka-saññā)도 해당된다. 노란색 등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MA.ii.343)
9. "도반이시여, 그러면 느낌과 인식과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습니까? 262) 혹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그런데 느낌과 인식과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62) “왜 느낌, 인식, 알음알이인 이 세 가지 법만을 언급하고, 통찰지는 제외되었는가? 통찰지는 모든 알음알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asabba-saṅgāhikattā)이다.”(MA.ii.343)
아비담마와 유식에 의하면 느낌과 인식은 모든 마음과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반드시들 혹은 변행심소법(遍行心所法)에 속한다. 그러나 통찰지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2장 <도표 2.1>과 §2 이하를 참조할 것.
도반이여, 느끼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그것을 분별해서 압니다. 263)
그러므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63) “느낌이 어떤 대상을 느끼면 인식도 바로 그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고, 인식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면 알음알이도 바로 그 대상을 분별하여 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식하다(sañjānāti)'와 '분별해서 알다(vijānāti)'와 '꿰뚫어 알다(pajānāti)'의 이 세 단어는 차이점이 없다. 접두어만(upasaggamatta) 다를 뿐(visesa)이다. '안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avisesa), 아는 형태가 다르다.
'인식[想, saññā]'은 '푸르다, 누르다'라고 단지 대상을 인식하는 정도이며, 무상 · 고 · 무아라는 특징을 통찰(paṭivedha) 하지는 못한다. 알음알이[識, viññāṇa]는 '푸르다, 누르다.'라고 대상을 알뿐만 아니라 특징을 통찰(lakkhaṇa-paṭivedha)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도의 현전(magga-pātubhāva)에 이르지는 못한다. 통찰지[慧, paññā]는 이미 설한대로 대상도 알고 특징을 통찰할 뿐만 아니라 노력하여 도의 현전에도 이르게 한다.
예를 들면 어느 천진한 어린아이와 시골 농부와 금속 세공인 세 사람이 금속 세공인의 모루 위에 놓인 동전 더미를 보았다 하자. 천진한 어린아이는 동전이 아름답고 장식이 되어 있으며 길고 네모지고 둥글다는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용품이나 향락을 얻으려고 이것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사실은 모른다. 시골 농부는 이것이 아름답고 장식이 되어있다는 것 등도 알고, 사람들이 일용품과 향락을 얻으려고 이것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이고, 이것은 가짜이며, 이것은 반쯤 섞인 혼합물이다.'라고 이들의 차이점은 알지 못한다. 금속 세공인은 이 모든 것을 다 안다. 그는 동전을 보기만 해도 알며 부딪히는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혀를 대 보거나 손으로 무게를 어림잡아보아도 안다. 그는 이것이 어느 특정한 마을이나 성읍이나 도시나 산이나 강가에서 만들어졌는지도 알고, 어느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도 안다. 이와 같이 인식은 천진한 어린아이가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나타난 양상을 푸르다 등의 정도로만 알기 때문이다. 알음알이는 시골 농부가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양상을 푸르다 등으로도 알고 나 아가 무상 ·고 · 무아라는 특징을 통찰함에 이르기 때문이다. 통찰지는 금속 세공인이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양상을 푸르다 등으로 알뿐 만 아니라 그것의 특징을 통찰함에 이르고 여기서 더 나아가 도의 현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MA.ii.343~344)
같은 설명이 『청정도론』 XIV.3~5에도 나타나므로 참조할 것.
10. "도반이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 264) 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264) “여기서 '청정한 마노의 알음알이(parisuddha mano-viññāṇa)'란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五根]에서 벗어나 마노의 문에서 진행되는, 오염원이 없는(nirupakkilesa) 마노의 알음알이[意識], 즉 색계 제4선의 마음(rūpa-avacara-catuttha-jjhāna-citta)을 말한다.”(MA.ii. 345)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노의 알음알이로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알 수 있고,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알 수 있고,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알 수 있습니다." 265)
265) “어떻게 색계 제4선의 마음으로 무색계의 증득(arūpa-avacara-samāpatti)을 알 수 있는가? 색계 제4선에 머무는 자는 무색계의 증득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머무는 자는 무색계 증득을 성취하기 때문에 공무변처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비상비비상처는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지극히 미세하여] 개별적으로(pāṭiyekkka) 이것만을 천착할 수 없기 때문(abhinivesa-abhāvato) 이다.”(MA.ii.345)
A9:37 아난다 경
참으로 눈도 있을 것이고 형상들도 있지만
그 [형상들의]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귀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코도 있을 것이고 냄새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혀도 있을 것이고 맛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몸도 있을 것이고 감촉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인식이 없는 자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도반이여, 인식이 있는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어떤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4.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 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5.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6.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M106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길 경 무소유처
6.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이들은 모두 인식들이다.
<*慾-色-āneñja(제4선/공무변처/식무변처): 想이 남김없이 없음(natthi)>
이들이 남김없이 멸하는 곳,
그것은 고요하고 그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바로 무소유처이다.'라고.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첫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7.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서 이렇게 숙고한다.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공하다.(텅 비었다)'라고. [주> 空 解脫]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두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8.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내 것은 누구에게도 없다.'라고.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세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M1뿌리에 대한 법문 경
17. "그는 무소유처를 무소유처라 인식한다.
무소유처를 무소유처라 인식하고서
[자신을] 무소유처라 생각하고,
[자신을] 무소유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무소유처로부터 생각하고,
무소유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소유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8.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비상비비상처라 인식한다.
비상비비상처를 비상비비상처라 인식하고서 [자신을] 비상비비상처라 생각하고,
[자신을] 비상비비상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비상비비상처로부터 생각하고,
비상비비상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M106
11.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비구가 취착할 때 무엇을 취착합니까?"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를 취착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참으로 그 비구가 취착할 때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에 취착하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참으로 그 비구가 취착할 때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에 취착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는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처럼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건,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건,
존재 더미[有身]가 있는 한 이 모든 것이 존재 더미이다.
취착없이 마음이 해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사(不死)이다.'라고."]
11. "도반이시여, 그러면 무엇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까?"
"도반이여, 통찰지의 눈[慧眼]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다." 266)
266) “'통찰지의 눈[慧眼]으로 꿰뚫어 안다(paññā-cakkhunā pajānāti).'라고 했다. 여기서 통찰지의 눈이란 바로 통찰지를 말한다. 보는 것은 안내자를 뜻하는데(dassana-pariṇāyak-aṭṭha) 이러한 뜻을 가진 눈이라는 통찰지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 통찰지는 삼매의 통찰지와 위빳사나의 통찰지의 두 가지가 있다. 삼매의 통찰지에 의해서는 역할(kicca)과 미혹하지 않음(asammoha)을 통해서 꿰뚫어 알고, 위빳사나의 통찰지에 의해서는 [무상·고·무아의] 특징을 통찰하여(lakkhaṇa-paṭivedhena) 대상을 통해서 아는 것을 설했다.” (MA.ii.345)
12. "도반이시여, 그러면 통찰지는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
"도반이여, 통찰지는 최상의 지혜를 목적으로 하고 통달지를 목적으로 하고 버림을 목적으로 합니다." 267)
267)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을 완전히 안다(abhijānāti)고 해서 '최상의 지혜(초월지, abhiññā)'이다.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을 철저히 안다(parijānāti)고 해서 '통달지(pariññā)'이다. 버려야 할 법들을 버린다(pajahati)고 해서 '버림(pahāna)'이다.” (MA.ji.346)
[세 가지] 통달지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 §3의 주해와 「법의 상속자 경」 (M3)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런데 본서 제1권의 첫 번째 경인 「뿌리에 대한 법문 경」(Mūlapariyāya Sutta, M1) §§27~50은 유학(sekha)은 땅부터 열반까지의 24가지 토대를 최상의 지혜로 안다(abhiññāya)고 표현하고 있고, 이것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pariññeyyaṃ tassa) 유학은 더 공부지어야 하며, §§51~74에서는 아라한이 되어야 이것을 철저하게 알았다(pariññāṃ tassa, 통달지)고 일컬어진다고 설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 등을 통해서 보면, 최상의 지혜는 유학과 무학(아라한) 둘 다에 속하는 지혜이고 통달지는 무학인 아라한에게만 있는 지혜이다. 냐나몰리 스님도 이렇게 설명한다.(냐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1167쪽 23번 주해 참조)
13. "도반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268)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과 지혜롭게 잡도리함입니다. 269)
도반이여, 이 두 가지 조건이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268) “여기서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란 위빳사나의 바른 견해와 도의 바른 견해를 다 포함한다.”(MA.ii.346)
269)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parato ghoso)'이란 유익한 가르침을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sappāya-dhamma-ssavana)이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 함(yoniso manasikāro)'이라는 것은 스스로 수단을 마음에 잡도리함(attano upāya-manasikāro)인데, 이 두 가지가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하는 조 건(paccaya)이다.
그러나 벽지불들(paccekabuddhā)이나 일체지를 얻은 부처님들(sabbaññu-buddhā)의 경우는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필요 없고 오로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만 있어도 된다. 그 외에 법의 총사령관(dhammasenāpati)인 사리뿟따 존자의 경우에도 두 가지 조건이 다 필요하다.” (MA.ii.346)
14. "도반이시여, 어떤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270)
마음의 해탈[心解脫]의 결실[果]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의 결실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까?"
270) “여기서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는 아라한도의 바른 견해를 말한다.”(MA.ii.346)
"도반이여,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다.
도반이여, 여기 바른 견해는 계의 도움을 받고, 배움의 도움을 받고, 담론의 도움을 받고, 사마타[止]의 도움을 받고, 위빳사나[觀]의 도움을 받습니다. 271)
도반이여, 이들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의 해탈의 결실과 통찰지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다."
271) “'계(sīla)'는 네 가지 청정한 계(catu-pārisuddhisīla)를 말하고, '배움(suta)'은 유익한 가르침을 듣는 것(sappāya-dhamma-ssavana)을, '담론(sākaccha)'은 명상주제에 확고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을 끊는 대화(khalana-pakkhalana-cchedana-kathā)를, '사마타(samatha)'는 위빳사나의 토대가 되는 여덟 가지 증득(aṭṭha samāpatti)을, '위빳사나(vipassanā)'는 일곱 가지 수관(sattavidhā anupassanā)을 말한다.
네 가지 청정한 계를 원만히 하고(pūrenta), 유익한 가르침을 듣고(suṇanta), 명상주제에 확고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을 끊고(chindanta),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여덟 가지 증득에 대해 공부를 짓고(kammaṃ karonta), 일곱 가지 수관을 닦는 자(bhāventa)의 경우 아라한도가 일어나고 과를 얻는다.” (MA.ii.346)
일곱 가지 수관은 본서 제1권 원한다면 경」 (M6) §3의 주해와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24의 [해설]을 참조할 것.
15. "도반이시여, 얼마나 많은 존재[有]가 있습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존재, 즉 욕계 존재와 색계의 존재와 무색계의 존재가 있습니다." 272)
272) “'욕계 존재(kāma-bhava)'란 욕계 존재에 태어날 업(kamma)과 이미 업에서 태어난 무더기들(kamma-abhinibbattā upādinna-kkhandhā), 이 둘을 한데 묶어서 욕계 존재라고 말했다. 색계 존재 등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MA.ii.347)
16. "도반이시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까?" 273)
"도반이시여, 중생들이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 274)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다."
273) “'미래에 다시 태어남(āyatiṃ punabbhava-abhinibbatti)'이라고 했다. 이것을 통해서 윤회(vaṭṭa)를 질문한 것이다.”(MA.ii.347)
이 질문과 §17의 질문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답은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의 핵심을 개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12연기 가운데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행애취유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들고 있다. 12연기의 유전문 즉 발생구조의 정형구는 본서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17을, 환멸문 즉 소멸구조의 정형구는 §20을 참조할 것. 12연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초기불교 이해』 제15장과 제16장(225~272쪽)을 참조할 것.
274)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tatra-atatra-abhinandanā)'라는 것은 형색을 즐기고, 소리를 즐기면서 이와 같이 여기저기서 즐긴다는 뜻이다. 이 문구는 윤회를 한다(vaṭṭaṃ vattati)는 것에 대한 그 근원(matthaka)을 나타내는 말이다. 반면에 바로 앞의 두 문구인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avijjā-nivaraṇ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는 중생들을 수식하는 말이다.” (MA.ii.347)
17. '도반이시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까?"
"도반이여, 무명이 빛바래고 명지(明知)가 생기고 275)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다."
275) “'무명이 빛바래고(avijjā-virāga)'라는 것은 무명을 부수어 소멸함(khaya-nirodha)에 의해서이고, '명지(明知)가 생기고(vijj-uppādā)'라는 것은 아라한도의 명지(arahatta-magga-vijjā)가 일어남으로써 윤회가 끝난다(vivaṭṭa)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만약 '무명이 먼저 소멸하는가(niruddhā), 혹은 명지가 먼저 일어나는가?(uppannā)'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둘 다 잘못된 질문이다. 마치 등불을 켬(padīp-ujjalana)으로써 어둠이 사라지는 것(andhakāra-vigama)처럼 명지가 일어나면 무명도 이미 소멸하기 때문이다.” (MA.ii.347~348)
18. "도반이시여, 무엇이 초선(初禪)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관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초선이라 합니다."
19. "도반이시여, 초선은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까?"
"도반이여, 초선은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다.
도반이여, 여기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과 희열[喜]과 행복[樂]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초선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다." 276)
276) 이것을 '다섯 가지 선의 구성요소(pañca jhānaṅgāni)'라 한다. 이 다섯은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보 [樂 sukha].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cittassa ekaggatā = 집중)이고, 한문으로 요약하면 심 · 사 · 희 · 락 · 정(尋 · 伺 · 喜 · 樂 · 定)이다. 다섯 가지 선의 구성요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18의 [해설], 특히 151쪽의 도표를 참조할 것.
M111 차례대로 경
4. "초선에는
일으킨 생각[尋],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精進), 싸띠[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바, 그는 이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20. "도반이시여, 초선에서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까?"
"도반이여, 초선에서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다.
도반이여, 여기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고, 악의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고, 들뜸과 후회가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집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이 있게 됩니다.
도반이여, 초선에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다."
21. "도반이시여, 277)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무엇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까?"
277) 본경 §21에 나타나는 마하꼿티따 존자와 사리§따 존자의 이 대화는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운나바 바라문 경」(S48:42) §3에서는 운나바 바라문과 세존의 대화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본경에서는 오근(§21)-마노[意, §21]-수명(§22)-온기(§22)-느낌(§23)으로 대화가 진전되지만 거기서는 오근(§3)-마노(§4)-마음챙김(§5)-해탈(§6)-열반(§7)의 순서로 진행이 되고 있다.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이들 다섯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만
마음[意]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마음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278)
278) “'마음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다(mano paṭisaraṇaṃ).'라는 것은 속행의 마음(javana-mano)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가 됨을 말하고, '마음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한다(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i)'라는 것은 마음의 문[意門]을 통한 속행의 마음(mano-dvārika -javana-mano)이나 다섯 가지 문[五門]을 통한 속행의 마음(pañca-dvārika-javana-mano)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gocara-visaya)을 애착하거나(rajjana) 싫어하거나(dussana) 미혹함(muyhana)을 경험한다(anubhoti)는 말이다. 눈의 알음알이는 형색을 볼 뿐 애착하거나 싫어하거나 미혹함이 없기 때문이다. 귀의 알음알이 등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 ii.349)
22. "도반이시여, 다섯 감각기능인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도반이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합니다."
"도반이시여, 수명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수명은 온기를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도반이시여, 온기는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온기는 수명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279)
279)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usmā āyuṃ paṭicca)'라는 것은 생명 기능[命根, jīvit-indriya]을 조건하여 존재한다는 말이고,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āyu usmaṃ paṭicca)'라는 것은 생명기능이 업에서 생긴 불의 요소(kammaja-teja)를 조건하여 존재한다는 말이다. 업에서 생긴 이 불의 요소도 생명 기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MA.ii.349~350)
"도반이시여, 이제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 존재하고, 온기는 수명을 조건으로 존재한다.'라고.
도반이시여,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도반이여, 그렇다면 비유를 들겠습니다. 비유를 통하여 여기 어떤 지자들은 이 말의 뜻을 이해 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불꽃에 의지하여 빛이 드러나고 빛을 의지하여 불꽃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이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 존재하고,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합니다."
23. "도반이시여, 수명280)이라는 것은 느낌과 동일합니까,
아니면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그 수명은 느낌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이 느낌과 같은 것이라면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81)
280) 본경에서 '수명'은 āyu-saṅkhārā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āyu(수명) + saṅkhārā(형성된 것들)로 분해된다. 이것은 '수명의 상카라들'이나 '수명의 형성들'로 직역할 수 있겠지만 주석서에서 “그 뜻은 그냥 수명이다(āyum eva).”(MA.ii.350)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수명'으로 옮겼다.
281) '상수멸(想受滅, saññā-vedayita-nirodha, 인식과 느낌의 소멸)'은 불환자나 아라한만이 들 수 있는 증득으로 여기서는 모든 심소법들이 다 가라앉는다. 그러나 온기(usma)가 남아있기 때문에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므로 만약 수명(āyu)이 느낌과 동일한 것이라면 상수멸에서 수명도 가라앉아버려 다시 그 증득에서 출정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상수멸은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āpatti)과 동의어로 쓰인다. 특히 주석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니까야에서 “비구여, 상수멸의 요소라는 이러한 요소는 소멸의 증득[滅盡定]으로 얻어진다.”(S14:11 §5)라고 나타난다. 상수멸과 멸진정에 대해서는 『상윳따 니까야』제2권 「일곱 요소 경」 (S14:11)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리고 상수멸 혹은 멸진정에 대한 여러 논의는 『청정도론』제23장 §9 이하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상수멸은 본서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16 이하에도 잘 논의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24. "도반이시여, 얼마나 많은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마치 무정물인 통나무처럼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져서 누워있게 됩니까?"
"도반이여, 수명과 온기와 알음알이의 세 가지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마치 무정물인 통나무처럼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져서 누워있게 됩니다."
282) “'수명(āyu)'이란 물질의 생명 기능(rūpa-jīvit-indiya)을, '온기(usma)'란 업에서 생긴 불의 요소(kammaja-tejo-dhātu)를, '알음알이(viññāṇa)'는 마음(citta)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이 물질의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마치 무정물(acetana)인 통나무(kaṭṭha)처럼 땅 위에 내던져져 누워있게 된다는 말이다.” (MA.ii.351)
참고로 생명기능은 물질의 생명 기능과 정신의 생명 기능 두 가지가 있다.
정신의 생명기능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장 §2의 [해설] 6을, 물질의 생명기능은 제6장 §3의 [해설] 6을 참조할 것.
283) 사리뿟따 존자의 이 설명은 『상윳따 니까야』 제3권 「포말 경」 (S22:95) §3의 네 번째 게송에 나타나는,
“생명과 온기와 알음알이가 이 몸을 떠나면
그것은 던져져서 의도 없이 누워 있고
남들의 음식이 될 뿐이로다.”{4}
라는 말씀과 비슷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 몸도 땅 위에 누워 있으리니
알음알이가 떠나 내팽개쳐져 쓸모없는 나무토막처럼.”(Dhp {41})
(aciraṃ vatayaṃ kāyo, pathaviṃ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ṃva kaliṅgaraṃ)
이라는 『법구경』 (Dhp.6) {41}도 참조할 것.
25. "도반이시여, 죽어 생을 마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284)
"도반이여, 죽어 생을 마친 자는 몸의 작용들[身行]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말의 작용들[口行]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마음의 작용들[心行] 285)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수명이 다하고, 온기가 식어버리고, 감각기능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러나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는 몸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말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마음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지만, 수명은 다하지 않고 온기가 식지 않고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합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죽어 생을 마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입니다."
284) 본경 §25는 『상윳따 니까야』제4권 「까마부 경」2(S41:6) §8과 같다.
285) 여기서 '몸의 작용들[身行]'과 '말의 작용들[口行]'과 '마음의 작용들[心行]'은 각각 kāya-saṅkhāra와 vacī-saṅkhāra, citta-saṅkhāra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saṅkhāra를 '의도적 행위'로 옮기지 않고 '작용'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본서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13~15와 주해들을 참조할 것.
M44
19. "스님, 그러면 상수멸에서 출정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일어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먼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말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온 수행승에게는
세 가지 접촉, 즉 비움의 접촉, 인상없음의 접촉, 바램없음의 접촉이 경험됩니다.”
20.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몇 가지 감각접촉[觸]이 닿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세 가지 감각접촉이 닿습니다.
그것은 공한 감각접촉, 표상 없는 감각접촉, 원함 없는 감각접촉입니다."]
26. "도반이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286)
286)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함(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무엇을 질문한 것인가? 상수멸(nirodha)에 대해서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無間緣, anantarapaccaya]이 되는 비상비비상처를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사리뿟따 존자의] 대답은 '즐거움도 버리고' 등의 [제4선을 통한] 네 가지(즐거움, 괴로움, 기쁨, 슬픔) 버림이라는 조건들(apagamana-paccayā)을 말하고 있다.”(MA.ii.352)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들 네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27.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無相] 287) 마음의 해탈288)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즉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界]를 마음에 잡도리함입니다. 289)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287) “'표상 없는[無相, animitta]'이라고 한 것은 상수멸에서 출정하는 과의 증득(nirodhato vuṭṭhānaka-phala-samāpatti)에 대해 묻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증득에서 출정할 때에는 잠재의식을 통해 하지만 상수멸에서 출정할 때에는 과의 증득을 통해 하기 때문에 그것을 질문하는 것이다.”(MA.ii,352) 표상 없음[無相]에 대한 설명은 『상윳따 니까야』제4권 「표상 없음 경」(S40:9)의 주해들도 참조할 것. 그리고 '표상(nimitta)'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보름밤의 긴 경」(M109) §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288)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에 대해서는 본경 §34의 주해를 참조할 것.
289) “'모든 표상(sabba-nimittā)'이란 형색 등 모든 대상을 말하고,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animittāya dhātuyā manasikāra)'이란 모든 표상에서 벗어난 열반의 요소(nibbāna-dhātu)를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과의 증득과 함께 생긴 마음에 잡도리함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서 상수멸의 토대(pādaka)가 되는 초선을 설명했고, 상수멸에게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anantara-paccaya)이 된 비상비비상처를 설명했고, 여기서는 상수멸에서 출정하는 과의 증득을 다루었다.”(MA.ii.352)
28.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과
이 증득에 들기 전의 결심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29.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함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이들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30. "도반이시여, 290) 무량한 마음의 해탈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과
공한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른 것입니까?" 291)
290) 이하 본경의 §§30~37은 『상윳따 니까야』제4권 「고닷따 경」 (S41:7) §§3~13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서는 고닷따 존자와 찟따 장자가 본경과 같은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91) “여기서 문자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다. 뜻으로 보면,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āṇā cetovimutti)'은 경지(bhmantara)로는 고귀한(mahaggatā) 색계에 속하고(rūpāvacarā) 대상(ārammaṇa)으로는 중생과 개념(sattapaṇṇatti)을 대상으로 가진다.
'무소유(ākiñcaññā)의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고귀한 무색계에 속하고(arūpāvacara) 대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navattabba)을 대상으로 가진다.
복주서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욕계의 것 등이나 과거의 것 등이나 안의 것 등으로 그 대상을 말할 수 없다.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의 증득(nibbāna-ārammaṇa-phalasamāpatti)이기 때문이다.”(MAȚ.ii.277)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한(suññatā)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욕계에 속하고(kāmāvacarā) 대상으로는 형성된 것들(saṅkhārā)을 대상으로 가진다. 여기서 공함은 위빳사나와 동의어이다.
'표상 없는(animitta)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출세간에 속하고(lokuttarā) 대상으로는 열반(nibbāna)을 대상으로 가진다.”(SA.iii.98)
"도반이여,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에 따라 이 법들은 그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며,
방편에 따라서는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31. "도반이여, 어떤 방편이 있어, 그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32. "도반이시여, 어떤 것이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33. "도반이시여, 어떤 것이 공한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 가거나 빈방에 가서
'이것이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292)이 공하다.'293)라고 숙고합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공한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294)
292) “여기서 '자아에 속한 것(attaniya)'이란 옷 등의 필수품이라 불리는 것(cīvarādi-parikkhāra-saṅkhāta)을 말한다.” (MA.ii.353)
293) 이 문장은 본서 제3권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길 경」 (M106) §7에서 '무소유처에 적합한 두 번째 도닦음'을 설명하는 곳에 나타나고 있다.
294) 주석서는 '공한 마음의 해탈(suññatā cetovimutti)'에 대해서는 설명을 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앞의 주해들을 참조해서 설명하자면 공한 마음의 해탈은 제법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에 기반을 한 삼매와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의 9가지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4. "도반이시여, 어떤 것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를 증득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편이 있어, 이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35. "도반이시여, 어떤 방편이 있어, 그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도 같고 표현만 다릅니까?"
"도반이여, 탐욕은 한계를 만들고, 성냄은 한계를 만들고, 어리석음은 한계를 만듭니다. 295)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296)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297)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295) “'한계를 만든다(rāga pamāṇa-kāraṇa).'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산기슭에 썩은 나뭇잎들이 쌓여 있는 물이 있는데 검은색으로 변해 있어서 쳐다보면 100 길이나 되는 깊은 곳(byāma-sata-gambhīra)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 막대기나 밧줄로 재어보면(minanta) 등짝 정도에도 채 미치지 못하듯이, 탐욕 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는 마치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그에게 탐욕 등이 일어나면 그가 탐하는 자(ratta)인지, 성내는 자(duṭṭha)인지, 어리석은 자(mūḷha)인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사람에게 한계(pamāṇa)를 보여주는 것처럼 일어나기 때문에 한계를 만든다고 했다.”(MA.ii.354)
296)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yāvatā appamāṇā cetovimuttiyo)'이란 열두가지 마음의 해탈을 말한다. 즉 네 가지 거룩한 마음[四梵住, brahmavihārā],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를 말한다. 이 중에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은 확장하는 범위가 무량하기 때문(pharaṇa-appamāṇatā)이고, 나머지는 한계를 짓는(pamāṇa-kāraṇa) 오염원들이 없기(abhāva) 때문에 무량하다.”(MA.ii.354)
297)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akuppā ceto-vimutti)'이란 아라한과의 마음의 해탈을 말한다. 이것이 그들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에(sabba-jeṭṭhikā) '최상'이라 한다(aggam akkhāyati).”(MA.ii.354)
36. "도반이여, 탐욕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298)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299)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300)
298) “'탐욕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rāgo kho kiñcano)'에서 탐욕은 일어나면 사람을 방해하고(kiñcati) 밟아 뭉개고(maddati) 훼손한다(palibundhati). 그래서 그 무엇(kiñcana)이라고 한다.”(MA.ji.354)
이처럼 주석서는 그 무엇이 있는 것(kiñcana)이란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299)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akiñcaññā cetovimutti)'에는 9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무소유처(akiñcaññ-āyatana)와 네 가지도와 네 가지 과이다. 이 가운데 무소유처는 어떤 것(akiñca)도 대상으로 가지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라 불린다. 도와 과는 어떠한 괴롭히고 방해하는 오염원(maddana-palibundhana-kilesa)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며, 열반도 무소유이다.”(MA.ii.354)
300) 초기불전에서 공(空, suññata)에 대한 논의는 본서 제4권 「공(空)에 대한 짧은 경」(M121)에 잘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특히 이 경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37. "도반이여, 탐욕은 표상을 만들고, 성냄은 표상을 만들고 어리석음은 표상을 만듭니다. 301)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302)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301) “'탐욕은 표상을 만들고(rāgo nimitta-karaṇo)' 등이라 했다. 예를 들면 두 가문에 비슷한 두 마리 소가 있다 하자. 그들에게 특징(lakkhaṇa)을 표해놓지 않으면 '이것은 어떤 집안의 소이고, 이것은 어떤 집안의 소다.’라고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뚝 등에다 어떤 표시를 해두면 알 수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탐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이 사람이 성인인지, 범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탐욕은 일어나는 순간 '이 사람은 탐욕을 가졌다.'라고 인식하는 표상(sañjanana-nimitta)을 만들듯이 일어나기 때문에 표상을 만든다고 한 것이다. 성냄과 어리석음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MA.ii.354~355)
302)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이란 위빳사나, 네 가지 무색계,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의 열세 가지 법을 말한다. 이 중에서 위빳사나는 영원하다는[常, nicca] 표상, 행복이라는[樂, sukha] 표상, 자아라는[我, attā] 표상을 부수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animittā)이라고 하고, 네 가지 무색계는 색계의 표상(rūpa-nimitta)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도와 과는 표상을 짓는 오염원들(kilesā)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이라 한다.”(MA.ii.355)
도반이여, 이런 방편이 있어, 이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303)
303) “'뜻이 같다(ekatthā).'는 것은 대상(ārammaṇa)을 통해서 그렇게 말했다. 무량(appamāṇa)과 무소유(ākiñcañña)와 공함(suññatā)과 표상 없음(animitta)의 이 모든 법들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이와 같이 이러한 방편(pariyāya)에 따라서는 뜻이 같다.
'표현이 다르다(nānābyañjanā).'라는 것은 이처럼 어떤 곳에서는 무량하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무소유라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공하다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표상이 없다고 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이러한 방편에 따라서는 표현이 다른 것이다.”(MA.ii.355)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설했다.
마하꼿티따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을 크게 기뻐하였다.
교리문답의 긴 경(M43)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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