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니까야 2권(각묵스님, 초기불전연구원, 2006년) p.113-157
서언 –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에서 깜마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 연기(緣起)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연기의 가르침
2.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老死(노사)]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生(생)]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존재[有(유)]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취착[取(취)]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갈애[愛(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느낌[受(수)]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감각접촉[觸(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 ․ 물질 [名色(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알음알이[識(식)]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 ․ 물질[名色(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3. “아난다여, 이처럼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고온)]가 일어난다.”
4.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生緣老死(생연노사)]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신들이 신이 되고, 간답바 1)들이 간답바가 되고, 약카 2)들이 약카가 되고, 정령들이 정령이 되고, 인간들이 인간이 되고, 네발짐승들이 네발짐승이 되고, 새들이 새들이 되고, 파충류들이 파충류들이 되는 이러한 태어남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저런 중생들의 이런 태어남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이처럼 태어남이 소멸해버려 태어남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늙음 ․ 죽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 ․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어남이다.”
5.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有緣生(유연생)]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비색계의 존재 3) – 이러한 존재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존재가 소멸해 버려 존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태어남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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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답바는 초기경전에서 크게 두 문맥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대왕천에 사는 신들이다. 두 번째는 향기나는 곳에 사는 신들이다.
디가니까야 2권(각묵스님, 2006년) p.121 주석 90번 참고
2) 약카는 디가니까야 3권의 ‘아따나띠야 경(D32)’에 의하면 사대왕천의 북쪽에 거주하며 꾸웨라가 그들의 왕이라고 한다.
디가니까야 2권(각묵스님, 2006년) p.121 주석 91번 참고
3) 욕계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계, 욕계 여섯 천상(사대왕천, 삼십삼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 색계 :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 / 비색계 :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
우다나 경(전재성님, 2009년) p.57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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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取緣有(취연유)]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慾取(욕취)],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견취)],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계금취)],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아어취)] - 이러한 취착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취착이 소멸해버려 취착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취착이다.”
7.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愛緣取(애연취)]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에 대한 갈애 – 이러한 갈애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갈애가 소멸하여 버려 갈애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취착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취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
8.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受緣愛(수연애)]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닿아서 생긴 느낌, 소리에 닿아서 생긴 느낌, 냄새에 닿아서 생긴 느낌, 맛에 닿아서 생긴 느낌, 감촉에 닿아서 생긴 느낌, 법에 닿아서 생긴 느낌 – 이러한 느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느낌이 소멸하여 버려 느낌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갈애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갈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9가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
9.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慾貪(욕탐), chanda-rāgo]이,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ɱ)이,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守護, 지키고 보호함)가,
수호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
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
10. “수호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수호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수호가 소멸하여 버려 수호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수호다.”
11.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인색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인색이 소멸하여 버려 인색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수호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수호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색이다.”
12.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거머쥠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거머쥠이 소멸하여 버려 거머쥠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인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인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머쥠이다.”
13.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탐착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탐착이 소멸하여 버려 탐착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거머쥠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거머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탐착이다.”
14.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욕망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욕망이 소멸하여 버려 욕망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탐착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탐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15.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판별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판별이 소멸하여 버려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욕망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판별이다.”
16.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얻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얻음이 소멸하여 버려 얻음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판별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판별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얻음이다.”
17.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추구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추구가 소멸하여 버려 추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얻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얻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추구다.”
18.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갈애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갈애가 소멸하여 버려 갈애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추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추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두 가지 법들이 이처럼 두 가지 부분으로 느낌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
19.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觸緣受(촉연수)]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대한 감각접촉, 소리에 대한 감각접촉, 냄새에 대한 감각접촉, 맛에 대한 감각접촉, 감촉에 대한 감각접촉, 법에 대한 감각접촉 - 이러한 감각접촉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감각접촉이 소멸해버려 감각접촉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느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접촉이다.”
20.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名色緣觸(명색연촉)]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의]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 [名身(명신)]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무리[色身(색신)]에서 이름 붙이기를 통해 생기는 정신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의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해 생기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고유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 짓기로 얻어지는 [정신의] 감각접촉이나 부딪힘으로 얻어지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 ․ 물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감각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 물질이다.”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은 상호 조건이 된다.
21.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識緣名色(식연명색)]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정신 ․ 물질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어간 뒤 잘못되어버렸는데도 정신 ․ 물질이 [오온을 구비한] 그러한 상태를 생기게 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동자나 동녀와 같은 어린아이일 때 잘못되어버렸는데도 정신 ․ 물질이 향상하고 증장하고 번창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정신 ․ 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알음알이이다.”
22.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名色緣識(명색연식)]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정신 ․ 물질에 확립됨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미래에 다시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괴로움의 일어남이 생긴다고 천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알음알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 물질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반야의 영역이 생기며, 이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 ․ 물질은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attā를 천명함.
23.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attā 라고 천명하는가? 아난다여, ① 물질[色(색)]을 가진 유한한 attā를 천명하면서 ‘나의 attā 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②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③ 물질을 가지지 않은[無色(무색)] 유한한 attā를 천명하면서 ‘나의 attā 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④ 물질을 가지지 않은[無色(무색)] 무한한 attā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24. “아난다여, ① 여기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attā 를 천명하는 자는 attā 는 현생에서 물질을 가지고 유한하다고 천명하거나,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attā 는 물질을 가지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자아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② 여기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는 자는 attā 는 현생에서 물질을 가지고 무한하다고 천명하거나,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attā 는 물질을 가지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attā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무한한 attā 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③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attā를 천명하는 자는 현생에서 attā 는 물질을 가지지 않지만 유한하다고 천명하거나,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attā 는 물질을 가지지 않지만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attā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유한한 attā 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④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는 자는 현생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는 무한한 attā를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attā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무한한 attā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사람들은] 이렇게 attā를 천명한다.”
attā를 천명하지 않음.
25. “아난다여, 그런데 [성자들은] 어떻게 천명하지 않으면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가? 아난다여, ① 물질[色(색)]을 가진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attā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②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attā 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③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attā 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④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attā 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26.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진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유한한 attā 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는 물질을 가진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한한 attā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유한한 attā 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attā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한한 attā 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성자들은] 이렇게 천명하지 않으면서 attā를 천명하지 않는다.”
attā를 관찰함.
27.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관찰하면서 attā를 관찰하는가? 아난다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attā를 관찰한다. ① ‘느낌은 나의 attā다.’ ② ‘느낌은 나의 attā 가 아니다. 나의 attā는 느껴지지 않는다.’ ③ ‘느낌은 나의 attā 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attā 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attā 는 느낀다. 나의 attā 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아난다여, [사람들은] 이와 같이 관찰하면서 attā를 관찰한다.”
28. “아난다여, 여기서 ① ‘느낌은 나의 attā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느낌들 가운데서 그대는 어떠한 attā를 관찰합니까?’라고.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때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낀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낀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낀다.”
29.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緣起(연기)]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attā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즐거운 느낌을 소멸하면 ‘나의 attā는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attā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괴로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attā는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attā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attā 는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느낌은 나의 attā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결국 ‘attā는 현생에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고, 일어나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관찰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느낌은 나의 attā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0. “아난다여, 여기서 ② ‘느낌은 나의 attā가 아니다. 나의 attā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이여, 만약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은 나의 attā가 아니다. 나의 attā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
31. “아난다여, 여기서 ③ ‘느낌은 나의 attā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attā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attā는 느낀다. 나의 attā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이여, 만약 모든 종류의 느낌이 남김없이 전부 소멸해 버린다면 느낌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느낌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은 나의 attā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attā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attā는 느낀다. 나의 attā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2. “아난다여, 비구는 느낌을 attā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attā는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관찰하지 않으며, attā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느낀다고도 관찰하지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이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갈증내지 않는다. 갈증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반야로 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름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어원에 입각한 언어와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개념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가지 미치건, 반야와 그것의 영역이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윤회의 회전이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그 모든 것을 비구는 초월지로 안 뒤 해탈했다. ‘그 비구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 라고 한다면 참으로 옳지 않다.”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
33. “아난다여, 참으로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住(식주)]와 두 가지 장소[處(처)]가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
①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지고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②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지고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初禪)을 닦아서 [죽은 뒤] 범중천에 태어난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③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④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⑤ 아난다여, 물질[色(색)]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⑥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⑦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리고 무사유정처가 있고 두 번째로 비상비비상처가 있다.”
34.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반야로 보고, 그것의 일어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사라짐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달콤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위험을 반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반야로 보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初禪)을 닦아서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 이것이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 이것이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 이것이 다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 이것이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 이것이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반야로 보고 그것의 일어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사라짐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달콤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위험을 반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반야로 보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무상유정처를 반야로 보고 그것의 일어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사라짐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달콤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위험을 반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반야로 보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를 반야로 보고 그것의 일어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사라짐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달콤함을 반야로 보고 그것의 위험을 반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반야로 보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구는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住(식주)]와 두 가지 장소[處(처)]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했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반야로 해탈한 자[慧解脫者(혜해탈자)]라고 한다.”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팔해탈)]
35. “아난다여, 참으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팔해탈)]이 있다. 무엇이 여덟인가?
① 여기 비구는 [안으로] 색계에 속하는 [禪(선)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②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③ 깨끗하다[淨(정)]고 확신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④ 물질[色(색)]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부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재 해탈이다.
⑤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⑥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⑦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⑧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
맺는 말
36. “아난다여, 비구는 이 여덟 가지 해탈을 순서대로도 증득하고, 역순으로도 증득하고, 순서대로와 역순으로도 증득한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곳마다 원하는 때마다 원하는 만큼 증득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심해탈)]과 반야의 해탈[慧解脫(혜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초월지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양면해탈을 한 자라고 한다. 아난다여, 이 양면해탈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양면해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대인연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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