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수라 경
- 삼매 경1
- 삼매 경2
- 삼매 경3
- 화장터 나무토막 경
- 탐욕을 버림 경
- 재빠르게 앎 경
- 자신의 이익 경
- 공부지음 경
- 뽀딸리야 경
아수라 경(A4:91) Asura-sutta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아수라252)에 에워싸인 아수라, 신253)에 에워싸인 아수라,
아수라에 에워싸인 신, 신에 에워싸인 신이다.”
252) “아수라처럼 무시무시한 사람을 뜻한다.” (AA.iii.116)
253) “신과 같은 공덕 때문에 모습이 출중하여 호감이 가는 자를 뜻한다.” (Ibid)
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아수라에 에워싸인 아수라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계행이 나쁘고 사악한 성품을 가졌으며
그의 회중도 계행이 나쁘고 사악한 성품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아수라에 에워싸인 아수라이다.”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에 에워싸인 아수라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계행이 나쁘고 사악한 성품을 가졌지만
그의 회중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신에 에워싸인 아수라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아수라에 에워싸인 신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지만
그의 회중은 계행이 나쁘고 사악한 성품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아수라에 에워싸인 신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에 에워싸인 신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고
그의 회중도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신에 에워싸인 신이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삼매 경1(A4:92) Samādhi-sutta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止]는 얻었지만254)
위빳사나[觀]의 높은 통찰지255)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었지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었다. 256)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254)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ajjhattaṃ cetosamatha) 얻은 자'란 자기 안에서 본삼매인 마음의 삼매(appanā-citta-samādhi)를 [얻은 자를] 말한다.”(AA.iii.116)
255) “원문은 adhipaññā-dhamma-vipassanā이다. 즉 형성된 것[行]들을 파악하는 위빳사나의 지혜(saṅkhāra-pariggāhaka-vipassanā-ñāṇa)를 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높은 통찰지[增上慧]라고도 불리고, 또한 오온이라 불리는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이기 때문에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라 한다.”(Ibid)
256) 본경과 다음의 두 개의 경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훌륭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이 세 경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삼매와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와 동의어이다. 그리고 사마타 즉 삼매를 먼저 얻은 사람도 있고 위빳사나 즉 통찰지를 먼저 얻은 사람도 있으며 이 둘을 다 얻은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먼저 닦느냐 위빳사나를 먼저 닦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기질의 문제이지 반드시 사마타를 먼저 닦고 위빳사나를 닦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마타와 위빳사나 둘 다를 구족할 것을 본경은 강조하고 있다.
삼매 경2(A4:93)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2.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止]는 얻었지만
위빳사나[觀]의 높은 통찰지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었지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었다.”
2.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었지만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를 얻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 자기 마음의 사마타에 굳게 서서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를 얻기 위해서
수행(yoga)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을 것이다.”
3.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었지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한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에 굳게 서서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을 것이다.”
4.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한 사람은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이러한 유익한 법들을 얻기 위해서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싸띠 수행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옷이 불타고 머리가 불타는 자는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싸띠 수행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사람은 유익한 법들을 얻기 위해서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싸띠 수행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을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은 사람은 이러한 유익한 법들에 굳게 서서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삼매 경3(A4:94)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었지만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었지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었다.”
2.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었지만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지 못한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를 얻은 사람을 찾아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도반이여,
형성된 것[行, saṅkhāra]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그러면 그분은 그가 본대로 그가 체득한대로
'도반이여, 참으로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257)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명상해야 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을 것이다.”
257)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anicca)하다고 보아야 하고 무상하다고 명상해야 하고 무상하다고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와 같이 괴로움(dukkha)이라고 비아(anatta)라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Ibid)
3.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었지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은 사람을 찾아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도반이여,
어떻게 마음을 하나에 고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라고,
그러면 그분은 그가 본 대로 그가 체득한 대로
'도반이여, 참으로 이렇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다.258) 이렇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을 것이다.”
258) “초선(pathamajjhāna)을 통해서 마음을 고정시켜야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고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그와 같이 2선과 3선과 4선을 통해서 마음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Ibid)
4.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은 사람을 찾아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도반이여, 어떻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그러면 그분은 그가 본 대로 그가 체득한 대로
'도반이여, 참으로 이렇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
참으로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명상해야 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을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은 사람은 이러한 유익한 법들에 굳게 서서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화장터 나무토막 경(A4:95) Chavālāta-sutta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다.”259)
259)『디가 니까야』 제3권 「합송경」(D33) §1.11(48)에도 나타나고 있다.
2.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화장터에서 사용된 나무토막이 있어 양끝은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난다면 마을에서도 그것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숲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은
그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
3.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은 앞의 사람보다 뛰어나고 수승하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은 앞의 두 사람보다 뛰어나고 수승하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네 사람 가운데 으뜸이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고 가장 탁월하다.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제호, 醍醐)가 만들어지나니, 그것을 으뜸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네 사람 가운데 으뜸이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고 가장 탁월하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탐욕을 버림 경(A4:96) Rāgavinaya-sutta 260)
260) PTS본의 품의 목록(uddāna)에는 본경과 다음 경에 해당하는 제목이 불분명하고 다만 santi라고 나타난다. DPPN은 이것을 본경의 제목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과 관계가 없고 특히 다음 97번 경에 해당하는 품의 목록이 없어서 본경과 다음 경은 육차결집본의 경의 이름을 따랐다. 아래 주해를 참조할 것.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다.”
2.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으로 하여금 탐욕을 버리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냄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으로 하여금 성냄을 버리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버리도록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3.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탐욕을 버리도록 한다.
자신의 성냄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성냄을 버리도록 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버리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도 않고 남으로 하여금 탐욕을 버리도록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성냄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도 않고 남으로 하여금 성냄을 버리도록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지도 않고 남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버리도록 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다.”
5.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고 남으로 하여금 탐욕을 버리도록 한다.
자신의 성냄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고 남으로 하여금 성냄을 버리도록 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서 도를 닦고 남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버리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재빠르게 앎 경(A4:97) 261) Khippanisanti-sutta
261) PTS본의 품의 목록(uddāna)에 santi로 나타나는 것은 본경을 통해서 보면 nisanti인 듯하다. PTS본 uddāna의 각주는 rāganisanti로 읽고 있는 판본을 두 개를 밝히고 있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rāga-nisanti라는 이 판본들을 따르면 앞 경의 명칭은 rāga이고 본경은 nisanti가 된다. 이렇게 되면 앞 경을 Rāgavinaya라 이름하고 본경을 Khippanisanti로 이름하는 육차결집본과 의미가 일치한다. 그래서 역자는 육차결집본에 따라 이 두 경의 이름을 정하였다.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다."
2.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안다. 262)
262) “'재빠르게 앎(khippa-nisanti)'이란 빨리 알 수 있는 능력(sīghaṃ jānituṃ samattho)이다.”(AA.iii.117) 복주서는 “재빠른 통찰지(khippa-paññā)”(AAȚ.ii.292)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청정도론』의 복주서(Pm.367)는 “khippa-nisanti의 nisanti는 '본다(nisāmana)'는 뜻인데 禪의 눈으로 땅의 까시나 등 禪의 대상을 본다는 뜻이다.”(Pm.367, Vis.XII.8의 주석)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청정도론』의 삼매와 관련된 문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본 단어를 재빨리 禪에 드는 것으로 옮겼다. (『청정도론』 XII.8 등 참조)
그는 들은 법들을 바르게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뜻을 면밀히 조사한다.
뜻을 완전하게 알고 법을 완전하게 안 뒤에 263)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다.
263) 주석서는 여기서도 '뜻(attha)과 법(dhamma)을 아는 것'을 각각 주석서(aṭṭhakatha)와 삼장(pāḷi)을 아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AA.ili.117)
한편 뜻(attha)에 대한 무애해(義無得解)를 결과(phala)에 대한 지혜로 설명하고, 법(dhamma)에 대한 무애해(法無得解)를 원인(hetu)에 대한 지혜로 설명하는 『청정도론』의 설명도 함께 고려해볼 일이다. (『청정도론』 XIV.22;23을 참조할 것)
그러나 그는 선한 말을 하거나 선한 말씨를 가졌거나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지는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3.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알지 못한다.
그는 들은 법들을 바르게 호지하지 않고, 호지한 법들의 뜻을 면밀히 조사하지 않는다.
뜻을 완전하게 알고 법을 완전하게 안 뒤에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알지 못한다.
그는 들은 법들을 바르게 호지하지 않고, 호지한 법들의 뜻을 면밀히 조사하지 않는다.
뜻을 완전하게 알고 법을 완전하게 안 뒤에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는 선한 말을 하거나 선한 말씨를 가졌거나 예의 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다.”
5.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안다.
그는 들은 법들을 바르게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뜻을 면밀히 조사한다.
뜻을 완전하게 알고 법(원인)을 완전하게 안 뒤에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다.
그리고 그는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이익 경(A4:98) Attahita-sutta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도를 닦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이다. 264)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264) 앞 경들의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공부지음 경(A4:99) Sikkhā-sutta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다.”
2.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은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지만
남으로 하여금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은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지만
남으로 하여금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금하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은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지만 남으로 하여금 삿된 음행을 금하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의지만
남으로 하여금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금하도록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3.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은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도록 한다.
자신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의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금하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도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도록 격려하지도 않는다.
… 자신도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의지 않지만
남으로 하여금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금하도록 격려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다.”
5.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도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남에게도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도록 한다.
… 자신도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의고
남에게도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금하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뽀딸리야 경(A4:100) Potaliya-sutta
1. 그때 유행승 뽀딸리야265)가 세존께 다가갔다. 세존께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유행승 뽀딸리야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65) 주석서는 뽀딸리아(Potaliya)에 대한 설명이 없다. 『맛지마 니까야』에도 「뽀딸리야 경」(M54)이 나타나는데 그곳의 뽀딸리야는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해버린 장자이고 여기의 뽀딸리야는 유행승이다. 양쪽 주석서 모두 별다른 설명이 없다.
“뽀딸리야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뽀딸리야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266)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 않는다.
뽀딸리야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뽀딸리야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고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도 않는다.
뽀딸리야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한다.
뽀딸리야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266) '말해야 할 때'로 옮긴 원문은 kālena이다. 주석서는 “[사실을 말하기에] 적당함을 얻은 때에”라고 설명하고 있어서(AA.iii.118) 이렇게 옮겼다.
2. 뽀딸리야여,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대는
어떤 사람이 더 경이롭고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3.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고따마 존자시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고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도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저는,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고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도 않는 사람이
더 경이롭고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고따마 존자시여, 무관심(upekhā)267)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267) 여기서 '무관심'으로 옮긴 단어는 upekhā/upekkhā이다. 이것은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확립[捨念淸淨, upekkhā-sati-parisuddhi]으로 정의되는 제4선의 평온과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 brahma-vihāra,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의 네 번째인 평온과 같은 단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고귀한 심리현상으로서의 우뻑카는 평온으로 옮기고, 본문에서와 같은 우삑카는 무관심으로 옮긴다. 영어로도 전자는 equanimity'로 후자는 indifference로 구분해서 옮긴다.
4. “뽀딸리야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뽀딸리야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한다.
뽀딸리야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뽀딸리야여,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는 사람이
더 경이롭고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뽀딸리야여, 모든 곳에서 [진실을 얘기할] 적당한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268)
268) 한편 『맛지마 니까야』 「아바야 왕자 경」(M58. §8)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래가 사실이고 옳고 [듣는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고 아는 말이 남들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면 거기서 여래는 그 말을 해줄 적당한 때를 안다(kālaññū).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왕자여, 여래는 중생들에게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무엇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정확히 아시고 그것을 적당한 때에 말씀하시는 분이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중생을 연민(anukampā) 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세존의 태도에 깊이 감격한 뽀딸리야가 부처님의 신도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5.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고따마 존자시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
사실과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는 더 경이롭고 더 수승한 사람이 저는 좋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고따마 존자시여, 모든 곳에서 [진실을 얘기할] 적당한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269)
269) 지루한 반복처럼 생각이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상대의 이야기를 다시 읊어서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뽀딸리야도 세존의 말씀을 정확하게 반복해서 읊어서 받아들인 뒤에 세존을 찬탄하고 세존에게 귀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뽀딸리야의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바른 믿음과 바른 수행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제10장 아수라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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