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9
Re..비구니거처경 질문에 답하신 스님말씀중
나무 석가모니불_()_
참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대념처경에서의 호흡 관찰을 한 번 봅니다:
1. 사티를 확립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2.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3. 온숨을 경험하면서...
4. 숨의 형성(의도)를 고요히 하면서...
여기서 1번은 사티를 확립해서 들숨이면 들숨이라고 반야로 보고, 날숨이면 날숨이라고 반야로 봅니다.
즉 다른 생각없이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이것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이제 2번이 됩니다.
2번은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고찰'만 있는 상태입니다.
2번에서 '일으킨 생각'이 있으면 '숨은 엉클어집니다.'
3번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아닌' 상태여야,
처음 숨, 중간 숨, 끝 숨까지 모든 숨이 입체적으로 한 번에 경험 되어집니다.
4번은 숨이 거의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숨은 소멸하고 사선에 이릅니다.
경전에 사선에서는 숨이 소멸한다고 하셨지요?
위에서
1.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2.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3.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아니고.
이것은 사마디에 드는 절차입니다.
정리하면:
2번과 초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3번과 이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4번과 삼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즉
2번의 숨관찰과 초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3번의 숨관찰과 이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4번의 숨관찰과 삼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마음관찰을 한 번 봅니다:
1. 탐이 있다면 탐이 있다고 반야로 보고, 탐이 없다면 탐이 없다고 반야로 보고...
2. 성냄이 있다면... 성냄이 없다면...
3. 어리석음이 있다면... 어리석음이 없다면...
4. 산란한 마음과 수축된 마음(전재성박사님은 이것을 산란한 마음과 단일한 마음으로 번역 했던 것으로 기억함)
5. 고귀한 마음과 고귀하지 않은 마음(광대한 마음과 광대하지 않은 마음)
6 위없는 마음과 위 있는 마음
7. 사마디에 든 마음과 사마디에 들지 않은 마음
8.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않은 마음
일단
1번을 '반야로 보라(위의 숨관찰에서도 1번을 반야로 보라)'고 하셨지만,
공부 초년생이 어떻게 반야로 보겠습니까?
이 말씀은 나중에 사마디도 닦고 하여서, 반야로 보여질 때까지, 해탈할 때까지,
먼지만큼이라도 탐욕이 남아 있다면 남아 있다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1,2,3번을 먼저 어느 정도 공부합니다.
그리고 4번은 앞의 것이 각묵스님 번역이고, 괄호 안이 전재성박사님 번역입니다.
각묵스님 번역대로 하면:
산란한 마음과 수축된 마음(해태와 혼침)이 됩니다.
이것을 제거 하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전재성박사님 말에 의하면 '산란한 마음과 단일한 마음(초선)'이 됩니다.
결론은 1234를 하면서 초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5번은 각묵스님은 고귀한 마음과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번역하셨는데,
아마도 문장상 뜻이 '광대한 마음과 광대하지 않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일이가 언어학자는 아니므로 누군가가 한 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하간 여기서 이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여기서는 이선이 안 되었다면, 여기서의 '광대한 마음 관찰'도 없게 됩니다.
6번은 삼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삼선이 안 되었다면, '위없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7번의 '사마디에 든 마음'에서, 여기서의 사마디는 '사선' 또는 그 이상의 사마디입니다.
그리고
8번은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공부가 아주 많이 된 건 사실이고, 해탈은 아직 조금 남았을 때 마저도
해탈을 하였다고 착각 할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해탈을 선언하는 네 가지 경우수가 나옵니다.
1. 완전히 전도 되어서
2. 바라는 것이 있어서
3. 자만 때문에(신 등등, 사람의 교만 자만, 아만 등이 아니고, 존재로 있고자 하는 마지막 여망)
4. 정말 해탈해서
여기서 3번의 '자만 때문에'가 공부는 많이 되었지만, 아직 해탈은 안 되었는데도, 해탈 했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위와 같이
신수심법은 각각을 닦으면서 병렬적으로 '사마타(네 가지 자나, 선)'를 꼭 같이 닦아야 합니다.
평화 평화
===========================================================================================
비구니거처경 질문에 답하신 스님말씀중
큰스님께서 풀어주신 마지막 말씀중에
그러므로
신수심법(몸, 느낌, 마음, 법)은
몸관찰 다 끝내고 난 후, 느낌관찰하고 느낌관찰 다 끝낸 후, 마음관찰하고 마음 관찰 다 끝낸 후, 법관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관찰 앞에 부분을 하고 난 후, 느낌관찰 앞에 부분을 하고, 마음관찰 앞에 부분을 하고, 법관찰 앞에 부분을 합니다.
특히 법관찰에서 '네 가지 사마디 중에서 초선'을 하는 것이지요.
계정혜와 같습니다.
계율 어느정도 하고 난 후, 사마디 어느 정도를 하게 되고, 반야의 무더기가 어느 정도 드러나면,
다시 계율이 더 잘되고, 그러면 사마디 더 높은 경지를 공부하고, 그러면 반야의 무더기가 더 드러납니다.
밑줄그은 부분중 몸(호흡관찰, 앉은모습, 선모습,움직이는 모습, 걷는 모습 등), 느낌(좋은느낌 나쁜느낌 좋지도나쁘지도 않은 느낌), 마음(생각의 흐름), 법관찰(삼매 수행법 전체) 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이 네가지 관찰에 대해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또 부끄러운 질문을 드립니다)
=============================================================================
< 2020년 1월에 문답집을 만들면서 법견행자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
1.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2.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3.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아니고.
이것은 사마디에 드는 절차입니다.
정리하면:
2번과 초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3번과 이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4번과 삼선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즉
2번의 숨관찰과 초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3번의 숨관찰과 이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4번의 숨관찰과 삼선을 쌍으로 닦습니다.
....
--------------------------------
질문 :
1번(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이 초선은 같은 선상에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여기에서는 2번을 초선과 같은 선상에 두고 있어서요...
-------------------------------------------
< 순일스님 답변 >
질문에서
초선은 '일으킨 생각이 있고, 지속적인 관찰이 있고'이며
초선과 이선의 교집합은 '일으킨 생각이 가라앉고, 지속적인 관찰이 가라앉고'이며
이선은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관찰은 없고'입니다.
여기서 초선과 이선의 교집합인 '일으킨 생각이 가라앉고, 지속적인 관찰이 가라앉고'가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관찰만 있고'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교집합'이 의미하듯이 초선과 이선에 걸쳐져 있기 때문에, '초선이라고도, 이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하게 복잡하고 현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평소에는 의미도 없고, 사람들에게 도움도 안 됩니다.
그런데 '숨 관찰'과는 관계가 있기도 합니다.
숨 관찰에서 '사티를 확립하고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은 언듯 보면 '초선'인 것 같지만, 초선이 아닙니다.
이유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은 초선이 되려는 방법일 뿐, 결과로서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요소들을 떨쳐버렸음'이 초선이기 때문입니다.
즉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은 방법일뿐이고, 목적인 '... 떨쳐버렸음'이 되어야 '초선'입니다.
'숨 관찰'에서는 '감감적욕망과 해로운 요소들이 떨쳐버려진' 상태가 바로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관찰 되어지는 상태'에 해당합니다.
'감각적욕망과 해로운 요소들'을 '해로운 생각'들로 대체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해로운 여러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흐를 때, 숨관찰의 들숨날숨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을 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생각들'이 이깁니다. 그러다가 '들숨날숨에 대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이 잘 되면, '여러 생각들'이 떨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여러 생각들이 다 떨쳐지면' '일으킨 생각은 없고(더 이상 노력해서 안해도 되고), 지속적인 숨관찰만 남게 됩니다'.
이때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관찰이 되어지는 상태'가 자연히 됩니다.
위의 이야기는 궁금해 하신 법견행자님용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책을 만들때에는 그냥 '질문과 대답'에 있는 '대답'만 실어도 충분하겠습니다.
늘 수고가 많으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기도합니다.
_()_
'순일스님 법문 > 경전독송질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 인식, 방일함에 대하여 (1) | 2023.10.09 |
---|---|
비구니 거처 경 '앞과 뒤가 축약되지 않고, 풀려났고' (0) | 2023.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