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음 경
- 말룽꺄뿟따 경
- 쇠퇴 경
- 방일하여 머묾 경
- 단속 경
- 삼매 경
- 홀로 앉음 경
- 그대들 것이 아님 경1
- 그대들 것이 아님 경2
- 웃다까 경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음 경(S35:94)123) Adantāgutta-sutta
123) 경의 제목은 Be를 따랐다. Se에는 Chaphassāyatana(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로 나타난다. Ee에는 Saṅgayha(포함됨)로 나타나는데 게송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구들이여, [70]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124) 무엇이 여섯인가?
124)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dukkha-adhivāhā).'는 것은 지옥 등으로 분류되는(nerayikādi-bheda) 극심한 괴로움(adhika-dukkha)을 실어 나른다는 말이다.”(SA.ii.381)
비구들이여, 눈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니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비구들이여,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니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4.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행복을 실어 나른다.125) 무엇이 여섯인가?
125) “'행복을 실어 나른다(sukha-adhivāhā).'는 것은 禪과 도와 과로 분류되는(jhāna-magga -phala-pabheda) 지극한 행복(adhika-sukha)을 실어 나른다는 말이다."(SA.ii.381)
비구들이여, 눈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니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행복을 실어 나른다.
비구들이여,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니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행복을 실어 나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행복을 실어 나른다.”
5.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이신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단속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만나도다.
그러나 이들의 단속을 잘 아는 자들은
믿음을 동반자 삼아 타락하지 않고 지내도다. {1}
마음에 드는 형색들을 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되면
마음에 드는 것에 대한 애욕의 길은 없애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되리. {2}
사랑스럽거나 [71] 사랑스럽지 않은 소리를 듣고
사랑스런 소리에 혹해서는 안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증오를 없애야 하나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되리. {3}
향기롭고 마음을 끄는 냄새를 맡거나
불결하고 악취 나는 냄새를 맡고
악취 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을 없애야 하고
향기로운 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켜서는 안되리. {4}
달콤하고 감미로운 맛을 즐기거나
때로는 맛없는 음식을 먹더라도
감미로운 맛에 탐착하지 말고 먹어야 하며
맛없는 음식들을 혐오해서는 안되리. {5}
즐거운 감촉에 닿더라도 홀리지 않고
괴로운 것에 닿더라도 동요하지 않으면
즐겁고 괴로운 두 가지 감촉에 평온하여
어떤 것에도 끌리거나 거부하지 않으리. {6}
사량분별하는 인식을 가진126) 이런저런 인간들은
인식하면서 사량분별하는 데 빠져 지내지만
세속에 의지한 모든 정신적 상태127)를 몰아내고
출리에 의지한 [길을] 걸어가야 하리. {7}
126) “'사량분별하는 인식을 가진(papañca-saññā)'에서 오염원의 인식(kilesa-saññā) 때문에 사량분별하는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SA.ji.382)
주석서에 의하면 세 가지 사량분별(papañna)이 있는데 그것은 갈애(taṇhā)의 사량분별과 자만(māna)의 사량분별과 견해(diṭṭhi)의 사랑분별이다.
'사량분별(papañca)'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팍구나 경」(S35:83) §3과 주해를 참조할 것.
127) “'세속에 의지한 모든 정신적 상태(manomayaṃ gehasitañ ca sabbaṃ)'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는 세속에 의지한(pañca-kāma-guṇa-geha-nissita) 정신적인 일으킨 생각(mano-maya vitakka)을 말한다. 유능한(dabba-jātika) 비구는 이러한 것을 모두 몰아내버리고 출리에 의지한 (nekkhamma-sita)' 길(iriya)을 가야 한다.”(SA.ii.382)
세속에 의지한 기쁨(somanassa)과 출리에 의지한 기쁨은 『맛지마 니까야』「육처분석 경」 (M137/iii.217~218) §§10~11에 서로 대비되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여섯 가지를 잘 닦으면,
닿더라도 마음은 어디서건 동요하지 않으리니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탐욕과 성냄을 지배하여
태어남과 죽음의 피안에 이른 자가 될지어다.” {8}
말룽꺄뿟따 경(S35:95) Māluṅkyaputta-sutta
2. 그때 [72] 말룽까뿟따 존자128)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말룽까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128) 말룽까뿟따 존자(āyasmā Māluṅkyaputta)는 꼬살라 왕의 보좌관의 아들이었으며 말룽꺄는 어머니 이름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말룽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서 외도 유행승(paribbājaka)이 되었다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했다고 한다.(Thag A.ii.170)
그는 한역 『중아함」의 「전유경」(箭喩經, 독화살 비유 경)을 통해서 존자 만동자(尊者 鬘童子)로 번역되어 알려진 분이며, 세존께서 세상은 유한한가 하는 등의 열 가지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 주시지 않는다고 환속하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맛지마 니까야』「짧은 말룽꺄뿟따 경(M63)이 한역 「전유경」에 해당한다. 「긴 말룽꺄뿟따 경」(M64)도 그를 두고 설하신 경이다. 『앙굿따라 니까야』「말룽까뿟따 경」(A4:254/ii.248~249)도 세존께서 그에게 설하신 경이며, 『장로게』(Thag) {794~817}은 그의 게송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내고자 합니다.”
4. “말룽까뿟따여, 이미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른 그대가 이제서야 여래에게 법을 간략하게 설해줄 것을 요청하니,
참으로 내가 젊은 비구들에게는 무엇을 설하겠는가?”129)
129) “세존께서는 장로를 꾸짖기도 하고(apasādeti) 격려하기도(ussādeti)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젊었을 때는 방일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숲속에 거주하기(arañña-vāsa)를 원하여 명상주제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SA.ii.382)
계속해서 주석서는 그가 나이가 들 때까지 사문의 법(samaṇa-dhamma)을 행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셨고, 젊은 비구들에게 본보기(adhippāya)를 보이기 위해서 그를 격려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SA.ii.382~383)
5. “선서시여, 저는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소서.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해 주신 말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6. “말룽까뿟따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보지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으며 지금 보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눈으로 알아야 하는 형색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130)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30) “'보지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으며(adiṭṭhā adiṭṭhapubbā)'라는 것은 지금 이 자기 존재(atta-bhāva)에서 보지 못했고 과거(atīta)에도 본 적이 없으며 라는 말이다.”(SA.ii.383) 여기에 대한 보기는 본서 「바드라까 경」(S42:11)에 나타난다.
7. “그대가 듣지 못했고 전에도 들은 적이 없으며 지금 듣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듣지 못할, 귀로 알아야 하는 소리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 “그대가 맡지 못했고 전에도 맡은 적이 없으며 지금 맡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맡지 못할, 코로 알아야 하는 냄새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9. “그대가 맛보지 못했고 전에도 맛본 적이 없으며 지금 맛보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혀로 알아야 하는 맛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0. “그대가 닿지 못했고 전에도 닿은 적이 없으며 지금 닿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닿지 못할, 몸으로 알아야 하는 감촉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1. “그대가 알지 못했고 전에도 안 적이 없으며 지금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마노로 알아야 하는 법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2. “말룽까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131)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132)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다.”133)
131) 주석서는 이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볼 때는 단기 봄만이 있을 것이다(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라고 했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① 눈의 알음알이[眼識]로 형색의 감각장소[色處]를 보는 단지 봄만이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눈의 알음알이는 단지 형색에서 형색만을 볼 뿐이지 항상하다거나 하는 그런 고유성질(niccādi-sabhāva)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알음알이들[속행의 마음들, 즉 업을 짓는 알음알이들 - SAȚ]에 대해서도 단지 봄만이 있는 알음알이가 있을 것(혹은 있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② 혹은, 볼 때에 있는 봄(diṭṭhe diṭṭhaṃ)이란 것은 눈의 알음알이인데 이것은 형색에서 형색을 아는 것(rūpa-vijānana)을 말한다. '단지(matta)'라는 것은 제한(pamāṇa)을 뜻한다. 그러므로 '단지 보는 것일 뿐'이라고 해서 단지 보는 마음을 말한다.[여기서는 본문의 diṭṭha-matta(문자적으로는 봄뿐임을 뜻함)를 소유복합에[有財釋, bahuvrīhi]로 해석해서 이것이 마음(citta)을 수식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diṭṭha-matta를 '단지보는 것일 뿐인 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뜻은 '나의 마음은 단지 눈의 알음알이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뜻이다. 눈의 알음알이는 눈의 영역에 들어온 형색(āpātha-gata-rūpa)에 대해서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다. 그와 같이 속행의 마음(javana, 즉 업을 짓는 알음알이)도 탐욕 등이 없는 단지 눈의 알음알이와 같아지도록 할 것이다. 나는 눈의 알음알이를 한계로 가진(cakkhu-viññāṇa-pamāṇa) 속행의 마음을 확립되게 할 것이다.
③ 혹은 '봄(diṭṭha)'이란 눈의 알음알이로 보여 진 형색이고 '볼 때는 봄만이(diṭṭhe diṭṭha-matta)'라는 것은 거기에서 일어난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sampaṭicchana-santīraṇa-voṭṭhabbana)이라 불리는 세 가지 마음(citta-ttaya)을 말한다. 마치 이것이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듯이 나는 눈의 영역에 들어온 형색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마음 등을 한계로 가지는 속행의 마음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나는 그 한계(pāmaṇa)를 넘어서서 탐욕 등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음(suta)과 감지함(muta)에도 적용된다.”(SA.ii.383-384)
본 주석을 이해하려면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인식과정(vīthi-citta)을 이해해야 한다. 상좌부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의 문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오문전향의 마음, 전오식(안식부터 신식까지) 가운데 하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속행의 마음, 등록의 마음의 순서로 마음이 찰나생멸하면서 대상을 인식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속행의 마음만이 업을 짓는 마음이고 다른 마음들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거나 작용 만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전오식 등의 마음들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업을 짓는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마음은 볼 때는 봄만 있는 마음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업을 짓는 속행의 마음에서도 이런 마음들처럼 볼 때는 봄만 있는 그런 마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주석서는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여러 마음들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3장 8의 해설 등을 참조할 것.
132)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mute mutamatto)'라는 것은 코와 혀와 몸의 알음알이로 얻은 뒤에 받아들일 때에는 단지 받아들임만이(gahite gahita-matto) 라는 뜻이다.” (Nd1A.ii.347)
133)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다.(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라고 했다. 여기서 '앎(vññāta)'이란 것은 의문전향의 마음(mano-dvār-āvajjana)을 통해서 알아지는 대상(viññāt-ārammaṇa)을 말한다. '알 때에는 단지 앎만이 있다.'는 것은 전향의 마음을 한계로 하는 것(āvajjana-pamāṇa)이다. 마치 단지 전향만으로는 사람이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는 것처럼, 나도 탐욕 등을 통해서 [속행의 마음이] 일어나게 하지 않고 오직 전향의 마음만을 한계로 하는 마음을 확립할 것이다.'라는 것이 그 뜻이다.”(SA.ii.384)
마노의 문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의문전향의 마음 바로 다음에 업을 짓는 속행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인 의문전향의 마음에서 탐 · 진 · 치로 대표되는 업을 짓지 않듯이 수행자는 그와 같이 속행의 마음에서도 그런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13. “말룽까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134)
말룽까뿟따여, '그것에 의함'이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135)
말룽까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여기 [이 세상]도 없고 저기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136)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137)
134)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na tena).'는 것은 그 탐욕(rāga)으로 탐하지(ratta) 않고 성냄(dosa)으로 성내지(duṭṭha) 않고 어리석음(moha)으로 어리석기(mūḷha) 않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SA.ji.384) 즉 탐 · 진 · 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135)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tvaṃ na tatthā).'는 것은 그대가 이러한 탐 · 진 · 치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지 않게 되면 그대는 그러한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안 것에 묶이거나(paṭibaddha) 집착하거나(allīna) 확고하게 되지(patiṭṭhita)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SA.ii.384)
136) 상좌부 아비담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서도 '둘의 가운데(ubhayam antarena)'를 중유(中有, 中陰, antarã-bhava)로 해석하면 안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토론장 경」(S44: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137) 『쿳다까 니까야』의 『자설경』(Ud.8)에서도 세존께서는 바히야 다루찌리야(Bāhiya Dāruciriya) 유행승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설하고 계신다.
14.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이렇게 자세하게 압니다.
형색을 보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형색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은 그에게서 증장하고
마음을 어지럽히는138) 욕심과 불쾌함도 그러하나니
이처럼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은 아주 멀다고 말합니다. {1}
138) '마음을 어지럽히다'는 Ee: cittamm assu pahaññati 대신에 Be, Se: cittam ass' ūpahaññati로 읽어야 한다.
소리를 듣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소리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은 그에게서 증장하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심과 불쾌함도 그러하나니
이처럼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은 아주 멀다고 말합니다. {2}
냄새를 맡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3}
맛을 보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4}
감촉에 닿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5}
법을 알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6}
싸띠를 확립하여 형색을 보고 형색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형색을 보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139)
그는 이처럼 싸띠를 확립하며 유행합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나이다. {7}
139)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는 khīyati no pacīyati를 옮긴 것인데 주어가 없다. 주석서는 괴로움 (dukkha)과 여러 가지 오염원들(kilesa-jāta)이라고 설명다고 있다.(SA.ii.384)
싸띠를 확립하여 소리를 듣고 소리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소리를 듣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그는 이처럼 싸띠를 확립하며 유행합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나이다. {8}
싸띠를 확립하여 냄새를 맡고 냄새에 물들지 않는 자는 … {9}
싸띠를 확립하여 맛을 보고 맛에 물들지 않는 자는 … {10}
싸띠를 확립하여 감촉에 닿고 감촉에 물들지 않는 자는 … {11}
싸띠를 확립하여 법을 알고
그것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법을 알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그는 이처럼 싸띠를 확립하며 유행합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나이다. {12}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압니다.”
15. “장하고 장하구나, 말룽까뿟따여.
그대는 내가 간략하게 말한 뜻을 자세하게 알았으니 참으로 장하구나.
형색을 보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도다.
형색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은 그에게서 증장하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심과 불쾌함도 그러하나니
이처럼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은 아주 멀다고 말하리. {1}
소리를 듣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2}
냄새를 맡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3}
맛을 보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4}
감촉에 닿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5}
법을 알고 싸띠를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6}
싸띠를 확립하여 형색을 보고 형색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도다.
그는 형색을 보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그는 이처럼 싸띠를 확립하며 유행하도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리. {7}
… …
싸띠를 확립하여 법을 알고 법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도다.
그는 법을 알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그는 이처럼 싸띠를 확립하며 유행하도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리. {12}
말룽까뿟따여, 그대는 내가 간략하게 말한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16. 그때 말룽까뿟따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17. 그때 말룽까뿟따 존자는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18. 말룽까뿟따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쇠퇴 경(S35:96) Parihāna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쇠퇴하는 법140)과 쇠퇴하지 않는 법과
여섯 가지 지배의 경지141)를 설하리라. … ”
140) “'쇠퇴하는 법(parihāna-dhamma)'이란 쇠퇴하는 고유성질(parihāna-sabhāva)을 뜻한다.” (SA.ii.384)
141) 본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여섯 가지 지배의 경지(cha abhibhāyatanāni)'는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 경」(D16) §3.24 이하와 『맛지마 니까야』「긴사꿀루다이 경」(M77) §23과 『앙굿따라 니까야』「지배 경」(A8:65)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지배의 경지[八勝處, aṭṭha abhibhāyatanāni]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쇠퇴하는 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142)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장 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142) 여기서 '기억'은 sara를 옮긴 것인데, √smṛ(to remember)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 것이다. 마음챙김(sati)도 이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주석서는 이것을 sarati(√sṛ, to run)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dhāvati(달리다)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SA.ii.384) 그래서 복주서는 대상(visaya)에 안주하지 못하는 상태(anavaṭṭhita-bhāva)로 설명하고 있다.(SAȚ.iii.21)
다시 비구들이여, 귀로 소리를 들은 뒤 … 코로 냄새를 맡은 뒤 … 혀로 맛을 본 뒤 …
몸으로 감촉을 느낀 뒤 … 마노로 법을 [77] 안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장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쇠퇴하는 법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쇠퇴하지 않는 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 귀로 소리를 들은 뒤 … 코로 냄새를 맡은 뒤 … 혀로 맛을 본 뒤 … 몸으로 감촉을 느낀 뒤 … 마노로 법을 안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장내고 존재하지 않게 하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쇠퇴하지 않는 법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섯 가지 지배의 경지인가? [*지배의 경지 - (6)處를 극복]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귀로 소리를 들은 뒤 … 코로 냄새를 맡은 뒤 … 혀로 맛을 본 뒤 …
몸으로 감촉을 느낀 뒤 … 마노로 법을 안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지배의 경지이다.”
방일하여 머묾 경(S35:97) Pamādavihāri-sutta
2. “비구들이여, [78] 그대들에게 방일하여 머묾과 방일하지 않고 머묾에 대해서 설하리라.
… §3> …
비구들이여,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마음[心]은
눈으로 알아진 형색들에 물들어버린다.143)
그의 마음이 물들어버리면 환희가 없다. 환희가 없으면 희열이 없다.
희열이 없으면 경안이 없다. 경안이 없으면 괴롭게 머문다.144)
괴로운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한다.
마음이 삼매에 들지 못하면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145)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방일하여 머문다고 일컬어진다.
143) “'물들어버린다(vyāsiñcati).'는 것은 오염원에 젖어서(kilesa-tinta) 있다는 뜻이다.”(SA.ii.385)
144) '괴롭게 머문다.'는 Be: dukkhaṃ hoti(괴로움이 있다) 대신에 Ee, Se: dukkhaṃ viharati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145)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dhammā na pātubhavanti).'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止觀]의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SA.ii.385)
그런데 오히려 안팎의 감각장소들, 즉 육내외처(六內外處)인 법들이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래 「삼매 경」(S35:99) §3을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귀의 감각기능을 … 코의 감각기능을 … 혀의 감각기능을 … 몸의 감각기능을 … 마노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마음[心]은 마노[意]로 알아진 법들에 물들어버린다.
그의 마음이 물들어버리면 환희가 없다. 환희가 없으면 희열이 없다. 희열이 없으면 경안이 없다. 경안이 없으면 괴롭게 머문다. 괴로운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한다.
마음이 삼매에 들지 못하면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방일하여 머문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방일하여 머무는 것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방일하지 않고 머무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머물면 마음은 눈으로 알아진 형색들에 물들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환희가 있다. 환희가 있으면 희열이 있다. 희열이 있으면 경안이 있다. 경안이 있으면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마음이 삼매에 들면 [79]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방일하지 않고 머문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귀의 감각기능을 … 코의 감각기능을 … 혀의 감각기능을 … 몸의 감각기능을 … 마노의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머물면 마음[心]은 마노[意]로 알아진 법들에 물들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환희가 있다. 환희가 있으면 희열이 있다. 희열이 있으면 경안이 있다. 경안이 있으면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마음이 삼매에 들면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방일하지 않고 머문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방일하지 않고 머무는 것이다.”
단속 경(S35:98) Saṃvara-sutta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단속과 단속하지 못함에 대해서 설하리라. … §3> …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단속하지 못함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80]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단속하지 못함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단속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깍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단속이다.”
삼매 경(S35:99)146) Samādhi-sutta
146) 본경과 다음 경은 본서 제3권 「삼매 경」(S22:5)과 「홀로 앉음 경」(S22:6)과 같은 방법으로 설해졌다. '홀로 앉음(paṭisallāṇa)'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홀로 앉음 경」 (S22:6)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3.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가?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형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알음알이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알음알이는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알음알이는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알음알이는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알음알이는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노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법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홀로 앉음 경(S35:100) Paṭisallāna-sutta
3.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홀로 앉음에 몰두하는 수행을 하라.
비구들이여, 홀로 앉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가?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형색은 [81]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알음알이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알음알이는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알음알이는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알음알이는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알음알이는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노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법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4.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홀로 앉음에 몰두하는 수행을 하라.
비구들이여, 홀로 앉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대들 것이 아님 경1(S35:101)147) Natumhāka-sutta
147) 본경과 다음 경은 본서 제3권 「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1/2(S22:33~34)와 같은 방법으로 설해졌다.
3. “비구들이여,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가?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형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알음알이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알음알이는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알음알이는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알음알이는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알음알이는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노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법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람들이 이 제따 숲에서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자.
그러면 그대들에게 '사람들이 우리를 가져간다거나 태운다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세존이시여, 그것은 자아가 아니고 자아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 것이 아님 경2(S35:102)
<본경은 바로 앞의 「그대들 것이 아님 경」1(S35:101) 가운데서
마지막의 비유(§4)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과 꼭 같다.>
웃다까 경(S35:103) Uddaka-sutta
3. “비구들이여, [83] 웃다까 라마따뿟148)은 이렇게 공언하였다.
'참으로 이것이149) 지혜의 달인150)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151)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152)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
148)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전에 만났던 두 번째 스승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 「성구경」 (M26/i.165~166) §16과 23을 참조할 것.
149) 본 게송에는 '이것이(idaṃ)'가 세 번 나타나고 있다. 주석서는 그냥 단지 불변사(nipāta-matta)로 쓰였을 뿐이거나, 아니면 '이러한 나의 말(vacana)을 들어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SA.ii.386)
150) “'지혜의 달인(vedagū)'이라는 것은 '나는 전적으로 지혜의 달인이다. 베다(Veda)라 불리는 지혜(ñāṇa)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neyya)에 도달했다 (gata), 혹은 베다(Veda)에 도달했다(gata), 증득했다, 나는 현자(paṇḍita)이다.'라는 뜻이다.”(SA.ii.386)
웃다까 라마따가 바라문교 수행자였기 때문에 주석서는 vedagū를 위와 같이 해석했다. 그러나 vedagū는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아라한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지혜(veda)의 달인(-gū)으로 옮겼다. 불교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브라흐마데와 경」 (S6:3) {567}의 주해를 참조할 것.
151) “'일체승자(sabba-ji)'라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윤회(sabba-vaṭṭa)를 이기고 승리하여 나는 확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SA.ii,386)
152) '아직 파내지 못한'은 Be, Se: apalikhataṃ로 읽은 것이다. Ee: palikhataṃ은 apalikhataṃ으로 고쳐져야 한다.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apalikhata gaṇḍa-mūla)'란 아직 파내지 못한 괴로움의 뿌리(dukkha-mūla)라는 말이다.”(SA.ii.386)
비구들이여, 그러나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4.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가 그것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라고.”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지혜의 달인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지혜의 달인이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일체승자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취착 없이 해탈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일체승자이다."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파내버렸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종기라는 것은 이 몸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153)
153) “여기서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를 통해서는 증장(vaḍḍhi)을 설하셨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를 통해서는 쇠퇴(parihāni)를 설하셨다. 혹은 전자는 일어남(samudaya)을, 후자는 사라짐(atthaṅgama)을 설하셨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몸의 증장과 쇠퇴와 생성과 부서짐(vaḍḍhi-parihāni-nibbatti-bhedā)을 설하셨다.”(SA.ii.387)
몸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본서 「낑수까 나무 비유 경」(S35:245) §9와 「까마부 경」1(S41:5) §4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종기의 뿌리라는 것은 갈애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갈애는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84]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파내버렸다.”
8.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따는 이렇게 공언을 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9.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가 그것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라고.”
10장 여섯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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