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박가414)에서 악어산 근처 베사깔라 숲의 녹야원415)에 머물렀다.
414) 박가(Bhagga)는 종족 이름이면서 나라 이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꼬삼비에 예속되어 있었던 듯하며 왔지(Vajji) 공화국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DPPN) 그래서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박가는 웨살리와 사왓티 사이에 놓여 있었고 수도는 숨수마라기리(Sunsuṃāragiri, 악어산)였으며 그곳에 있는 숲이 베사깔라 숲(Bhesa-kalāvana)이다. 세존께서는 이곳에서 8번째 안거를 보내셨다고 한다.
주석서에 의하면(AA.ii.124; BvA.3) 세존께서 45년 동안 안거를 보내신 곳 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안거는 바라나시(Bārāṇasi) 이시빠따나(Isipatana)의 녹야원(Migadāya)에서
두 번째부터 네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의 대나무 숲(Veḷuvana),
다섯 번째는 웨살리(Vesāli)의 큰숲[大林, Mahāvana]에 있는 중각강당(Kūṭāgārasālā),
여섯 번째는 마꿀라 산(Makulapabbata),
일곱 번째는 삼십삼천의 거주처(Tāvatiṃsabhavana),
여덟 번째는 박가(Bhagga)의 숨수마라기리(Suṃsumāragiri)에 있는 베사깔라 숲(Bhesakaḷāvana),
아홉 번째는 꼬삼비(Kosambi),
열 번째는 빠릴레야까(Pālileyyaka)의 밀림,
열한 번째는 날라(Nālā)의 바라문 마을(Brāhmaṇagāma),
열두 번째는 웨란자(Verañjā),
열세 번째는 짤리까(Cālikā)의 짤리까 산(Cālikāpabbata),
열네 번째는 사왓티(Sāvatthi) 의 제따 숲(Jetavana),
열다섯 번째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
열여섯 번째는 알라위(Aḷavi),
열일곱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
열여덟 번째와 열아홉 번째는 짤리까 산(Cālikāpabbata),
스무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이다.(AA.ii.124; BvA.3)
그 후 스물한 번째부터 마흔세 번째까지의 23안거는 사왓티의 제따 숲과(18 안거) 동쪽 원림[東園林, Pubbārāma]에서(5안거) 하셨다.(BvA.3)
그리고, 마흔네 번째인 마지막 안거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 (벨루와 마을, Beḷuvagāma)에서 하셨다.(『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D16) §2.22)
『디가 니까야』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웨사카 달(우리의 음력 4월)의 보름날 새벽에 반열반에 드셨다. 그러므로 두 달 뒤 아살하(Asāḷha) 달 보름(음6월 보름)부터 시작되는 이 해의 안거는 하지 못하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 제3권 부록 『디가 니까야 주석서』 「서문」 §§17~18을 참조할 것.
415) '녹야원'으로 옮긴 원어는 Migadāya(미가다야)이다. 주석서는 “사슴(miga)들에게 두려움 없이 머무는 장소(abhayattha)로 주어졌기 때문에 미가다야라 한다.” (MA.ii.188)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녹야원(鹿野苑)으로 옮겼다.
한편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S56:11)을 하신 동산의 이름도 녹야원(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이다. 이처럼 초기불전에는 본경에 나타나는 박가의 악어산 베사깔라 숲에 있는 녹야원(「나꿀라삐따 경」 (S35:131) §1과 본서 제1권 「추론 경」 (M15)도 참조할 것.), 라자가하의 맛다꿋치 녹야원(「돌조각 경」 (S1:38) §1; 「돌조각 경」(S4:13) §1; D16 §3.42), 사께따의 안자나 숲에 있는 녹야원(「까꾸다 경」 (S2:18) §1), 우준냐의 깐나가탈라 녹야원(본서 제3권 「깐나가탈라 경」 (M90)) 등 여러 곳의 녹야원이 나타난다. 불교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교단의 수행자들 이 유행을 하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아마 각 지역에서 사슴을 보호하는 곳으로 지정한 곳인 듯하다.
2. 그때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노지에서 포행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사악한 마라416)가 목갈라나 존자의 배에 들어가서 창자에 붙었다.
416) 마라(Māra)는 초기불전의 아주 다양한 문맥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며, 『상윳따 니까야』에 마라를 주제로 하는 25개의 경들을 모아서「마라 상윳따」(Māra-saṃyutta, S4)로 결집을 하여 전승해오고 있기도 하다.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마라를 연구하는 자체가 하나의 논문감에 해당한다 할 수 이다.
전통적으로 빠알리 주석서는 이런 다양한 마라의 언급을 다섯 가지로 정리 하다. 그것은 ① 오염원(kilesa)으로서의 마라(ItA.197; Thaga.ii.70 등) ② 무더기(蘊, khandha) 로서의 마라(S.iii.195 등) ③ 업형성력(abhisaṅkhāra)으로서의 마라 ④ 신(devaputta) 으로서의 마라 ⑤ 죽음(maccu로서의 마라이다.(Thag A.ii.46; 46; Vism.VII.59 등)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은 이러한 다섯 가지 마라를 부순 분(bhaggavā)이기에 세존(bhagavā)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V1.59) 그러므로 열반이나 출세간이 아닌 모든 경지는 마라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으로서의 마라는 자재천(Vasavatti)에 있는 다마리까 천신(Dāmarikadevaputta)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라는 욕계의 최고 천상인 타화자재천 (Paranimmitavasavatti)에 거주하면서 수행자들이 욕계를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나 출세간의 경지로 향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SnA.i.44; MA.i.28) 그리고 그는 신들의 왕인 삭까(인드라) 처럼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마군(魔軍, Mārasena)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아주 유력한 신이다. 주석서들에서는 Māra의 어원을 한결같이 √mṛ(to kill, to die)로 본다. 물론 산스끄리뜨 문헌들에서도 죽음을 뜻하는 √mṛ(to die)로도 보기도 하지만 역자는 기억을 뜻하는 √smṛ(to remember)로 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Māra는 산스끄리뜨어로 쓰여진 인도 최고의 희곡인 「샤꾼딸라』 등에서 Smāra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마라는 바로 기억을 뜻하는 √smṛ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힌두 신화에서 마라는 사랑의 신을 뜻하는 까마데와(Kāmadeva)이며 이 신의 많은 별명 가운데 하나가 스마라이다. 까마데와는 로마 신화의 사랑의 신인 큐피드(Cupid)에 해당한다. 사랑의 신 까마데와도 큐피 드처럼 사랑의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화살을 쏜다. 이 화살에 맞으면 사랑 의 열병에 걸린다.
산스끄리뜨 문학 작품에 의하면 마라는 수련화(Aravinda), 아쇼까 꽃(Aśoka), 망고 꽃(Cūta), 재스민(Navamālikā), 청련화(Nīlotpala)의 다섯 가지 꽃 화살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러한 까마데와의 꽃 화살에 맞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불교 주석서들에서도 이러한 다섯 가지 마라의 꽃 화살은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마라는 유혹자이다. 이성을 서로 꼬드기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라는 Tempter(유혹자, 사탄)이다. 그래서 마라를 Tempter라고 옮기는 서양학자도 있다.
그리고 이 √smṛ에서 파생된 것이 빠알리의 sati(Sk. smṛti) 즉 마음챙김[念]이다. 마음챙김과 마라는 이렇게 대비가 된다. 이렇게 마라의 어원을 신 √smṛ(to remember)로 이해하면 마음챙김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케 하는 아주 의미심장한 해석이 된다.
그러자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 배가 이렇게도 무거울까? 콩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구나.”
그러자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포행을 그만두고 원림에 들어가서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3.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앉아서 스스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했다.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사악한 마라가 배에 들어와서 창자에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사악한 마라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오라, 사악한 자417)여. 나오라,
사악한 자여, 여래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래의 제자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대는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을 받게 하지 마라.”
417) “[남들을] 사악함에 빠져들게 하고, 혹은 스스로 사악함에 빠져든다고 해서(pāpe niyojeti, sayaṃ vā pāpe niyutto) '사악한 자(pāpiman, 빠삐만)'라 한다. 그는 깐하(Kaṇha, 검은 자), 지배자(Adhipati), 자재천(Vasavatti) 끝장내는 자(안따까, Antaka), 나무찌(Namuci), 방일함의 친척(pamatta-bhandu)이라는 다른 많은 이름들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라와 빠삐만(사악한 자)라는] 단지 두 가지 이름만을 들고 있다.”(SA.i.169)
4. 그러자 사악한 마라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문은 나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오라, 사악한 자여. 나오라, 사악한 자여, 여래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래의 제자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대는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을 받게 하지 마라.’라고,
그의 스승도 나를 이렇게 빨리 알아보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어떻게 그의 제자가 나를 알겠는가?”
5. 그러자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사악한 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악한 자여, 이와 같이 나는 그대를 안다.
그대는 '그는 나를 알 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사악한 자여, 그대는 마라이다. 사악한 자여, 그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사문은 나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오라, 사악한 자여. 나오라,
사악 한 자여, 여래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래의 제자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대는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을 받게 하지 마라.'라고,
그의 스승도 나를 이렇게 빨리 알아보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어떻게 그의 제자가 나를 알겠는가?'라고.”
6. 그러자 사악한 마라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문은 나를 알고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오라, 사악한 자여. 나오라, 사악한 자여, 여래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래의 제자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대는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을 받게 하지 마라.'라고.”
그러자 사악한 마라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입으로부터 뛰쳐나와 문빗장 곁에 섰다.
7.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사악한 마라가 문빗장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사악한 마라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악한 자여, 나는 거기 있는 그대를 본다. 그대는 '그는 나를 보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사악한 자여, 그대는 문빗장 곁에 서 있다.”
8. “사악한 자여, 옛적에 나는 두시라는 마라였고, 내게 깔리라는 이름의 누이가 있었다. 그대는 그녀의 아들이었으므로 나의 조카였다.”
9. “사악한 자여, 그때에 까꾸산다418)라는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사악한 자여,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는 위두라와 산지와라고 하는
한 쌍의 복덕이 구족한 상수제자가 있었다.
사악한 자여, 까꾸산다라는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의 제자들 중에서
설법에 관한한 위두라 존자와 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악한 자여, 이런 이유로 위두라 존자에게 위두라419)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사악한 자여, 한편 산지와 존자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집에 가서
어려움 없이 상수멸420)에 들었다.”
418) 까꾸산다(Kakusandha) 부처님은 칠불 가운데 네 번째 부처님이다. 첫 번째 부처님이 위빳시(Vipassi) 부처님인데 위빳시 부처님을 비롯한 칠불의 일대기는 『디가 니까야』「대전기경」 (D14) §§1.4~1.12에 자세히 나타나므로 그곳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전기경」에 의하면 위빳시 부처님은 91겁 이전에 세상에 출현하였고, 시키(Sikhi) 부처님과 웻사부(Vessabhu) 부처님은 31겁 이전에 출현하였으며, 까꾸산다, 꼬나가마나 (Koṇāgamana), 깟사빠(Kassapa), 석가모니(Sakyamuni) 부처님은 행운의 겁(bhadda-kappa)이라 부르는 현겁에 출현하셨다고 한다.
419) “'위두라(vidhura)'라는 이름은 그 뜻에 걸맞은 것으로, 대적할 만한 이가 없다(vigata-dhura) 즉 남들과 같지 않다(asadisa)는 뜻이다.” (MA.ii.417)
420) '상수멸(想受滅, saññā-vedayita-nirodha,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대해서는 본서 「교리문답의 긴 경」(M43) §23 이하와 특히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16 이하를 참조할 것.
10. “사악한 자여, 옛적에 산지와 존자는 어떤 나무 아래서 상수멸에 들어 앉아있었다.
사악한 자여, 소치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과 농부들이 길을 가다 산지와 존자가
어떤 나무 아래서 상수멸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보고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들, 이 사문께서 앉은 채 입적하시다니 참으로 경이롭고,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화장합시다.”
길 가던, 소치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과 농부들은 풀과 장작과 소똥을 모아
산지와 존자의 몸에 덮고 불을 붙이고 떠났다.”
11. “사악한 자여, 그러나 그 밤이 지나자 산지와 존자는 그 증득에서 일어나
가사를 털고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마을로 탁발을 갔다.421)
사악한 자여, 길 가던 소치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과 농부들은
산지와 존자가 탁발하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들, 참으로 경이롭고,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사문께서는 앉아서 입적하셨는데 스스로 다시 살아나시다니요.”
사악한 자여, 그런 이유로 산지와 존자에게 산지와422)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421) 여기서 보듯이 상수멸 즉 멸진정을 증득한 사람은 증득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죽거나 상해를 당하지 않으며, 멸진정은 그의 가사나 자리 등의 소유물이 손상되는 것까지도 보호한다고 한다. 본경의 이 일화는 『청정도론』XII.32에서 인용되어 나타난다. 『청정도론』 XXIII.35~37도 참조할 것.
422) '산지와(Sañjīva, sam+√jīv, to live)'라는 이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는 뜻이다.
12 “사악한 자여, 그때 두시 마라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이들 비구들의 오고 감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이렇게 말하여]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아야겠다.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비난하고 욕하고 괴롭히고 모욕하라.
그대들로부터 비난받고 욕을 듣고 괴롭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라고.”423)
423) 이 비구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럽기 때문에 마라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라는 갖은 노력으로 이들의 마음에 오염원들을 일으키게 해서(kiles-uppatti) 오직 윤회의 영역에 붙들어두려고 한다.(MA.ii.417~418)
13 “사악한 자여, 그때 두시 마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았다.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비난하고 욕하고 괴롭히고 모욕하라.
그대들로부터 비난받고 욕을 듣고 괴롭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두시 마라에게 사로잡힌 바라문 장자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이렇게 비난하고 욕하고 괴롭히고 모욕했다.
'우리 조상의 발에서 태어난424) 비천하고 가무잡잡한 이들 까까머리 사문들은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게을러빠진 채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한다. 425)
424) '조상의 발에서 태어난'은 bandhupādāpaccā를 옮긴 것이다. 이 합성어는 bandhu(친척의)-pādāpaccā(발에서 [태어난] 후손들)로 분석할 수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bandhu(친척)'이란 범천(brahmā)을 두고 한 말이다. 바라문들은 그 범천을 조상(pitamaha, 할아버지)이라 부른다. 'pādāpaccā(발에서 [태어난] 후손들)'이란 범천의 발바닥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믿고 있었다. '사제계급인 바라문은 범천의 입에서 나왔고, 무사계급인 끄샤뜨리야는 가슴에서, 평민 계급인 와이샤는 배꼽에서, 천민 계급인 수드라는 다리에서, 사문들은 발바닥에서 태어났다.'라고”(MA.ii.418)
한편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는 이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리그베다 열 번째 장(만달라)의 「뿌루샤 숙따」(Puruśa Sūkta, 原人에 대한 찬미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라문은 그(뿌루샤)의 입(mukha)이고 그의 팔(bāhu)로부터 끄샤뜨리야가 만들어졌고 그의 넓적다리 (ūru)로부터 와이샤가 발(pad)로부터 수드라가 태어났다.”(Rv.x.90:12)
하지만 세존께서는 “가문의 전통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가 단연 으뜸”(D3 §1.28)이라고 설하셨다. 여기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제1권 「암밧타 경」(D3) §§1.24 ~1.28을 참조할 것.
425)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한다.'는 jhāyanti pajjhāyanti nijjhāyanti apajjhāyanti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생각하다(cintayati)를 뜻하는 jhāyanti(√dhyai, to meditate)라는 동사에 pa-(pra-)와 nis-와 apa-같은 각각 다른 접두어(upasagga)가 붙어서 그 강도를 더 높인 것 (vaḍḍhit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MA.ii.418)
이 구문은 본서 제3권 「고빠까 목갈라나 경」(M108) §26에도 나타나는데 거기서 이 네 가지 동사는 다섯 가지 장애에 지배된 채로 禪수행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올빼미가 나뭇가지에서 생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하듯이,
우리 조상의 발에서 태어난 비천하고 가무잡잡한 이들 까까머리 사문들은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게을러빠진 채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한다.
마치 자칼이 강둑에서 물고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하듯이, …
마치 고양이가 문기둥이나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서 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하듯이, …
마치 당나귀가 짐을 내려놓고 문기둥이나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하듯이,
우리 조상의 발에서 태어난 비천하고 가무잡잡한 이들 까까머리 사문들은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게을러빠진 채 생각하고 궁리하고 궁구하고 이리저리 궁구한다.'
사악한 자여, 그때 그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14. “사악한 자여, 그때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시 마라가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비난하고 욕하고 괴롭히고 모욕하라.
그대들로부터 비난받고 욕을 듣고 괴롭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15. “사악한 자여, 그러자 비구들은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의
이런 훈도와 이런 가르침을 받아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집에 가거나 하여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렀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렀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물렀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렀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렀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물렀다.”
16. “사악한 자여, 그때 두시 마라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이들 비구들의 오고 감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이렇게 말하여]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아야겠다.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경의를 표하라.
그대들로부터 존경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경의받으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라고.”
17. “사악한 자여, 그때 두시 마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았다.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경의를 표하라.
그대들로부터 존경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경의받으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두시 마라에게 사로잡힌 바라문 장자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경의를 표했다.
사악한 자여, 그때 그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天界]에 생겨났다.”
18. “사악한 자여, 그때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시 마라가
'오라. 그대들은 계를 구족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닌 비구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경의를 표하라.
그대들로부터 존경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경의받으면 마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시 마라가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바라문 장자들을 사로잡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그대 들은 몸에 대해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일체 세상에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에서 무상을 관찰하라.” 426)
426) 주석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제4권 「인식 경」 2(A7:46) §4, §8, §10 §12에 나타나는 이 네 가지를 설명하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MA.ii 419~420)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부정(不淨) 경」(A4:163), 제3권 「역겨움 경」(A5:69) 등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의 여러 경에서 닦아야 할 인식들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타나는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122~125쪽을 참조할 것.
19. “사악한 자여, 그러자 비구들은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의
이런 훈도와 이런 가르침을 받아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집에 가서
몸에 대해 부정함을 관찰하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일체 세상에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에서 무상을 관찰했다.”
20. “사악한 자여,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위두라 존자를 시자로 삼아 마을로 탁발을 가셨다.”
21. “사악한 자여, 두시 마라는 어떤 소년에게 들어가 돌을 집어
위두라 존자의 머리를 때려 존자의 머리가 깨졌다.
사악한 자여, 위두라 존자는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면서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의 뒤를 계속하여 따라갔다.
사악한 자여, 그때 까꾸산다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는
'이 두시 마라는 한도를 모르는구나.'라고 여기시면서
코끼리가 뒤를 돌아보듯이 뒤를 돌아보셨다. 427)
사악한 자여, 까꾸산다 세존께서 돌아보시자마자 두시 마라는 그곳에서 떨어져 대지옥에 태어났다.”
427) “머리를 때리는 소리를 듣고 마치 코끼리가 여기저기를 보고자 할 때 목만 돌리지 않고 온몸을 돌려서 보듯이, 까꾸산다 세존께서도 온몸을 돌려 보셨다는 말이다.”(MA.ii.420~421)
22. “사악한 자여, 그 대지옥에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여섯 가지 [원하지 않는] 감각접촉을 겪는 감각장소의 지옥,428)
창으로 찌르는 지옥, 스스로 겪는 지옥이다.429)
428) '여섯 가지 [원하지 않는] 감각접촉을 겪는 감각장소의 지옥'은 cha-phass-āyatanika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여섯 가지 대문을 통해 대상을 경험할 때 모든 것이 원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인 대지옥으로 무간지옥을 말한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기회 경」(S35.135)이 이 지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라는 지옥(cha-phass-āyatanikā nāma nirayā)'이 따로(visuṃ)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21가지 대지옥(mahāniraya)에 있는 여섯 가지 문을 가진 감각접촉의 장소에 대한 개념적 표현(cha-dvāra-phass-āyatana-paññatti)일뿐이다. 여기서는 아위찌 대지옥(Avīci-mahāniraya, 無間地獄)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400)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 제6권 「대열뇌(大熱惱) 경」(S56:43) §3에서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는 지옥을 대열뇌 지옥(Mahāpariḷāha niraya)이라 부르고 있다.
429) '대지옥(mahāniraya)' 혹은 무간지옥(無間地獄, Avīci)의 묘사는 본서 제4권 「저승사자 경」 (M130) §§16~19를 참조할 것.
사악한 자여, 그때 옥사쟁이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창과 창이 그대의 심장에서 부딪칠 때 그대는
'나는 천 년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라고 알게 될 것이요.”
23. “사악한 자여, 그런 나는430) 수년, 수백 년, 수천 년을 그 대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만 년을 그 대지옥의 보조 지옥에서 과보로 나타난 최종의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고통을 받았다.
사악한 자여, 그런 나의 몸은 마치 인간의 몸과 같았지만
머리는 마치 물고기의 머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430) '그런 나는(so kho ahaṃ)'이라는 어법으로 이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바로 두시 마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24. “제자인 위두라와 까꾸산다 바라문431)을 공격하여
두시가 고통받은 그 지옥은 무엇과 같은가?
백 개나 되는 쇠못이 있고 모두 스스로 고통을 받네.
제자인 위두라와 까꾸산다 바라문을 공격하여
두시가 고통받은 그 지옥은 이와 같다네.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432)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1) 까꾸산다 부처님을 여기서는 까꾸산다 바라문(Kakusandha brāhmaṇa)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본서 「앗사뿌라 긴 경」 (M39) §24에서 나쁘고 해로운 법들인 정신적 오염원들을 모두 내쫓았기 때문에 비구는 바라문이라고 하신 말씀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432) '부처님의 제자인 이 비구(bhikkhu buddhassa sāvako)'는 바로 본인인 마하목갈라나 존자 자신이다. 그는 지금 자신을 해치려던 마라에게 자신이 옛적에 두시 마라가 되어 까꾸산다 부처님과 그의 시자 위두라에게 행한 일체의 행위와 그 과보를 다 기억하여 이야기해준 것이다. 그리고 만일 지금의 이 마라가 존자 자신을 괴롭히면 지금의 이 마라도 큰 고통을 받을 거라고 훈계하고 있다.
25. “바다 한가운데 겁을 지속하는 궁전들이 있어
청옥의 색깔을 가졌고 아름답고
섬광이 번쩍이고 광휘로워라. 433)
그곳에는 여러 색의 요정들이 춤을 추네.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3) “대해 한가운데 물을 발판으로 삼아 궁전들이 생겼으니 그것은 겁을 지속했다. 그것의 색깔은 청옥(veḷuriya)과 같고, 산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빛나는 한 줄기 불꽃처럼 섬광이 번쩍이고, 광휘로웠다. 그 궁전 속에 푸른색 등 여러 색의 요정들이 춤을 추었다는 말이다.”(MA.ii.422)
26. “부처님의 권고로 비구 승가가 보는 앞에서
녹자모 강당을 발끝으로 흔들었다.434)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4) 이것은 『상윳따 니까야』 제6권 「목갈라나 경」 (S51.14) §3의 내용을 말한다. 「목갈라나 경」에서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가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않고 머무는 것을 보시고 목갈라나 존자에게 권유하여 미가라마따 강당을 흔들어 비구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라고 하셔서 이런 신통을 나툰 것이다.
27.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여
웨자얀따 궁전을 발끝으로 흔들어
신들에게 경종을 울렸었네.435)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5) 이것은 본서 「갈애 멸진의 짧은 경」 (M37)의 §11에 그 내용이 담겨 있으니 참고할 것.
28. “웨자얀따 궁전에서 삭까에게 물었네.
'와사와여,436) 그대는 갈애가 소멸한 해탈을 아는가?'
질문을 받자 삭까는 그에게 진실하게 대답했다.437)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6) 와사와(Vāsava)는 인드라 혹은 삭까의 다른 이름이다. 『상윳따 니까야』제1권 「삭까의 이름 경」 (S11:12) §3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휴게소(āvasatha)를 보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와사와라 불린다.”고 한다. 이 경에서는 삭까의 이름 와사와(Vāsava)를 '휴게소(āvasatha)'와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삭까와 휴게소에 얽힌 이야기는 『법구경 주석서』(DhpA.i.269~270; BL 1:317~318)에 나타난다.
437) 세존께서 인드라에게 갈애의 멸진을 통한 해탈의 법문을 설하셨는데, 목갈라나 존자가 세존께서 하신 그 가르침을 알고 싶어 인드라에게 질문하고, 인드라가 대답한 것으로 본서 「갈애 멸진의 짧은 경」(M37) §12에 그 내용이 나타난다.
29. "나는 수담마 [의회]에 모인 회중에서 범천에게 물었네.
'도반이여, 그대 전에 가졌던 삿된 견해를 지금도 가졌는가?
범천의 광명이란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보는가?'
그런 [내게] 범천은 차례대로 진실하게 대답했다네.
'존자여, 전에 가졌던 그런 삿된 견해는 더 이상 내게 없고
범천의 광명이란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고 보거늘
어떻게 '나는 항상하고 영원하다.'라고 말하겠는가?'438)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8) 이 일화는 『상윳따 니까야』제1권 어떤 「범천 경」 (S6:5)에 나타난다. 특히 §9에서 “존자여, 이전에 가졌던 저의 견해는 지금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범천의 세상을 넘어서서 빛나는 찬란한 저 광명을 저는 지금 보나니 그런 제가 어찌 오늘 '나는 항상하고 영원하다.'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본 게송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
30. “대수미산의 정상을 해탈하여 만졌으며439)
잠부디빠440)와 뽑바위데하와 땅에 사는
여러 사람들을 [방문했네.]
부처님 제자인 이 비구는 이것을 잘 기억하나니
검은 자여, 그런 자를 공격하여 그대는 고통받으리.”
439) “禪의 해탈(jhāna-vimokkha)을 통해 만졌다.”(MA.ii.423)
440) '잠부디빠'라고 옮긴 원어는 vana(숲)인데 주석서에서 잠부디빠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MA.ii.423) 잠부 나무가 있는 숲이라고 해서 잠부디빠를 숲이라 부른 듯하다.
'잠부디빠(Jambudīpa)' 혹은 '잠부 섬은 jambu(잠부)-dīpa(섬)로 이루어진 합성어인데 원래는 인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주석서는 “잠부 나무가 있으며 유명한 섬”(AA.ii.34)이라고 설명한다. 주석서에서는 히말라야 산에 일 겁을 머무는 큰 잠부(Mahājambu) 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이 섬에는 잠부 나무(jamburukkha)가 번성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Ibid) 그리고 인도의 지형이 마치 잠부 열매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잠부디빠는 중국에서 염부제(閻浮提)로 음역되었다.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아비부 경」 (A3:80)과 같은 불교신화에서는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잠부디빠(Jambudīpa)와 아빠라고야나(Aparagoyāna)와 웃따라꾸루(Uttarakuru)와 뿝바위데하(Pubbavideha)는 수미산(須彌山, Sineru, Sk. Sumeru) 주위에 있는 네 대륙(dīpa)의 이름이다.(AA.ii.36)
잠부디빠는 남쪽에 있는 대륙이며 우리 같은 인간이 사는 곳이다. 아빠라고야나는 서쪽(apara)에, 웃따라꾸루는 북쪽(uttara)에, 뿝바위데하는 동쪽(pubba)에 있는 대륙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넷을 각각 남섬부주(南瞻部洲), 서우화주(西牛貨洲), 북구로주(北俱盧洲), 동승신주(東勝身洲)로 옮겼다.
31. “'어리석은 자를 내가 태워버려야지.'라고
불은 결코 의도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자는 타오르는 불을 공격하여 스스로 불타네.
마라여, 이와 같이 그대는 그분 여래를 공격하여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태우나니
어리석은 자가 불을 공격하여 그렇게 되듯.
마라여, 그대 그분 여래를 공격하여 큰 악업을 쌓았거늘
사악한 자여, 그대 죄악은 익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죽음을 만드는 자여, 그렇게 행할 때
그대 오랜 세월 악업을 쌓나니
마라여, 부처님을 떠나라.
비구들에게 희망을 갖지 마라.”441)
441) “'비구들에게 희망을 갖지 마라(āsaṃ mākāsi bhikkhusu).'는 것은 비구들을 내가 괴롭혀야지 하는 그런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MA.ii.423)
이처럼 베사깔라 숲에서 비구가 마라를 견책했을 때
그 나쁜 마음을 먹은 야차는 거기서 바로 사라져버렸네.
마라 견책 경(M50)이 끝났다.
제5장 작은 쌍 품이 끝났다.
I. 처음 50개 경들의 묶음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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