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9월 5일 법문 中에서_자기를 사랑하는 것
이해를 돕기 위하여 관리자 주를 달았고 괄호 안에 있는 말들은 첨부한 말들입니다.
- 관리자 주
여기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불교경전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 관리자 주)
꿈이 없는 사람, 꿈이 있는 사람, 다 마쳐서 꿈이 없는 사람, 이중에 비유를 드셨어요.
비유로 이웃나라에 왕자가 왕위 즉위식을 갖는 거죠, 그때 이 나라의 왕자는 꿈을 갖죠,
희망을. 나도 왕자인데 언젠가는 왕이 될 텐데 언제 될까 부럽다 하면서도 나도 되겠지 라는 꿈을 갖는 거죠.
이 나라의 노예는 그걸 보면서도 전혀 희망이 없겠죠. 나랑 아무 상관없는 얘기죠, 왕이 될 수 없으니까.
이게 꿈이 없는 사람 (즉) 절망적인 사람, 그 다음에 왕자가 꿈이 있는 사람, 그 다음에(는) 왕자가 아니라 다 모든 것을 (버려) 무아가 되어 해탈 하신 분은 당연히 꿈이 없겠죠, 다 마쳤기 때문에.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더 이상 말씀안계세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씀인거죠.
그러면 이 말씀을 현대로 옮겨서 해보면 현대에서도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을 갖으라고 해야 되요. 꿈이 없는 아까 좌절한 사람에겐 꿈과 희망을 줘야 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것이 궁극이 아니라 더 갈 여정이 또 있는 거죠. 모든 것을 다 에고를 소멸해서 해탈해서 꿈이 없는 궁극에, 바램이 없는 여기까지 가야 되는 건데. 그래서 세상에 두 가지 견해가 난무하는 거예요 보통은 이렇게 피라미드 구조에 하부구조 사람들이 훨씬 많죠. 그것은 지구가 아니라 어디건 그런 거예요. 그래서 꿈이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 더 많거든요.
그래서 꿈과 희망과 용기를 가져라. 이런 얘기가 많이들 있고 실제로 이게 가슴에 와 닿는 얘기죠, 세상에서...
그런데 꿈 자체가, 꿈을 갖는 것은 세상에서 꿈을 갖고 용기를 갖고 좀 잘사는 법이고, 이게 궁극의 평화를 갖고 오거나 생노병사를 해결은 못 해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꿈을 갖은 사람은 다시 내 안에 에고를 소멸하고 본성을 드러내는 그 길을 가게 되는 거죠.
이와 같이, 돌아와서 세상에서는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요.
하나는 사랑이 없어서 절망인사람,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려는 사람, 하나는 사랑을 다 버린 사람이 있는 거예요.
세상에 자기를 사랑하려는 사람이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할까? 해서, ‘아 나에게 바깥에 좋은 환경들을 만들어주고 좋은 대상들을 취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은 이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 일 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을 사랑한다는 것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사랑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보통은 좋은 환경, 좋은 물건 대상들을 취하게 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대상이 있는 기쁨, 대상이 있는 사랑, 대상이 있는 즐거움 이예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나를 사랑하기’는 고통이다, 불가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 미워하는 것과의 만남.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괴로움’ 이다, 하셨기 때문에 대상과 환경을 나를 위해서 100%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절망적이어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꿈을 가져야 하듯이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북돋아 주긴 해야 되겠죠.
그런데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기’는 이건 생로병사를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생 자체에서 어떻게 조금 기뻐볼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이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물건, 대상, 환경에 의해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은 내 마음이 사랑스러운 마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랑스러운 마음, 평화로운 마음이 되면은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럼 어찌하면 사랑스러운 마음이 될까? 그러고 과거를 생각했더니 사랑스러운 마음이 됐을 때는 다른 것들을 사랑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 때, 이성이라면 눈만 떠도
행복하던 때가 있다. 진짜 자기의 사랑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알고 보니 다 다른 것들을 사랑했을 때다.
그리고 내면에 성냄이 없어지니까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내면에 어리석음이 없어지니까 사랑스러운 마음, 평화스러운 마음이 되는구나.
나를 사랑하려고 대상들을 집착하려했던 것은 탐욕의 마음이었구나. 결국은 진짜로 나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두 번째 사람은 여기고, 해로운 법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해로운 법을 버리니까 바로 구체적으로 평화의 마음, 본성의 마음,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 하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둘 다는 나를 사랑하려고 마음먹었던 거죠. 근데 방법이 틀렸던 거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어떤 에고를 사랑하는 건줄 알고, 대상 환경을 사랑하는 줄 알고 그렇게 하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그것은 떨어지는 길로 간 것이다.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마음이 번뇌로운 길로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걸 지적하셨던 것이다. 즐거움이 있는 한 고통이 있다 라는 말씀이 즐거움과 고통은 오간다. 여기에 나온 즐거움은 대상이 있는 즐거움이다. 영원히 즐거움과 고통으로 오락가락 할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려는 것은, 아까 해로운 법을 버리게 되면 그것이 사실은 사랑스러운 마음 평화로운 마음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냄이 없는 자애로운 마음,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자애가 굳이 얘기 한다면 사랑과 같은 뜻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해로운법을 버리는 길입니다, 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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