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금강경

금강경 3 - 3 (2011-11-10 (목)) - 순일스님

Daisy청량심 2024. 8. 13. 06:49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無量無數無邊) 중생들을 멸도 하지만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비유를 하나 들어본다. 우리 모두는 꿈을 꾼다. 꿈을 꿀 때에 그 꿈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그 꿈은 실체가 아닌 꿈(相)일 뿐이다. 꿈속에서의 아(我)도 인(人)도 중생(衆生)도 수자(壽者)도 나아가 그 세상(相)도 모두 꿈(相)이었다. 거기서 수많은 중생들을 멸도 하였으나 그 꿈에서 깨고 나니 아인중생수자가 모두 상(相)에 불과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멸도 한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다시 꿈속을 헤메이는 것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상(아뜨마 相)은 오온(五蘊)이 불멸의 실체라고 믿거나 또는 오온과 관련된 것이 실체라고 믿는 삿된 견해이다. 오온에 대해서는 앞서서 설명했듯이 ‘거친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들’만이 전부가 아니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들’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들’ ‘형체 없는 순수의식으로 이루어진 존재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불멸의 실체가 아닌 생멸(生滅)하는 중생들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색(色, 몸)은 실체인가?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몸은 실체가 아니다.

수(受, 느낌)는 실체인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느낌은 실체가 아니다.

상(想, 인식)은 실체인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인식은 실체가 아니다.

행(行, 의도들)은 실체인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의도들은 실체가 아니다.

식(識, 아뢰야식)은 실체인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아뢰야식은 실체가 아니다.

2. 그러면 색수상행식(오온)을 모두 합쳐놓은 것은 실체인가?
각각이 실체가 아니었으므로 다 합쳐 놓아도 역시 실체가 아니다.

3. 그러면 색수상행식 안에 실체가 있는가?
색수상행식 안에 실체가 있다면 색수상행식은 결코 무상하고 괴롭고 변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색수상행식 안에는 실체가 없다.

4. 그러면 색수상행식 밖에 실체가 있는가?
밖에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오온과 실체’가 서로 분리 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럴 때 전체가 아닌 부분이 되므로 이것 역시 실체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오온(五蘊)은 실체가 아니며, 오온과 관련된 것들도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상(我相)은 삿된 견해가 된다.

인상(人相)은 산스크리트본에는 ‘지와 아뜨마’로 나오는데 이것은 자이나교의 아뜨마(我相)이다. 자이나교에서는 불멸의 순수영혼인 ‘지와’가 있으며 몸처럼 소멸하는 ‘a지와(非지와)’가 있다. 순수자아인 ‘지와’가 ‘a지바(몸)’에 들어와서 구속(괴로움)이 된다. 이 구속을 ‘고행과 금욕, 삼매, 반야’를 통해서 벗어나게 되면 모크샤(해탈)라고 주장한다. 부처님께서 ‘상과 비상’을 모두 불어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해탈이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지와’와 ‘a지와’는 서로 부분(部分, 상호의존성의 관계)에 불과하므로 최소한 ‘지와와 a지와’ 둘 다를 완전히 불어서 꺼야 해탈에 가깝거나 또는 해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지와 아뜨마’는 ‘상(相)’에 불과하며 실체가 아니다.

자이나교의 ‘고행 금욕, 삼매, 반야’와 불교의 ‘계율, 삼매, 반야’의 차이점은 ‘고행 금욕’과 ‘계율’의 차이점이다. 계율의 목적은 악하고 불건전한 해로운 법(非法)과 감각적 욕망을 마음에서 소멸시키는 것이다. 계율로는 이것을 이룰 수 있지만 ‘고행’으로는 이룰 수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행’은 완전한 방법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고행과 금욕’은 아주 극단적이다. 예로서 머리카락을 하나하나씩 전부 뽑아내고 찬물을 평생 멀리하고 물을 마실 때 혹여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마셔서 살생하게 될까봐 채로 걸러 마시고 길가다 눈에 안 보이는 생물을 죽일까봐 빗자루로 앞을 쓸면서 걷고 나체로 생활하고 죽을 때 단식으로 죽는 등 극단적인 고행과 금욕을 추구한다. 앞의 1장에서 극단적인 ‘계율에 대한 집착’은 삿된 길임을 밝혔듯이 ‘극단적인 고행과 금욕’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극단적인 고행과 금욕’은 해탈과 관계가 없으며 단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삿된 길임을 설하셨다.

또한 8가지 삼매를 모두 설하시고 상수멸까지 설하신 분은 오직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다른 종교의 삼매는 주로 ‘유상삼매(有相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 정도로만 뭉뚱그려서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삼매의 전모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상(衆生相)은 중생의 무리가 실체라는 견해이다. 산스크리트본을 보면 ‘중생들’은 ‘중생의 세계에서 중생의 무리로 무리 지어진 존재’들이다. ‘무리 지어진 것들’은 경계가 있는 ‘부분(部分)들’로서 실체가 아니다.
중생들이 사는 이 ‘중생들의 세계’도 실체가 아니다. 이 세계는 모두 ‘상(相)’이다.

수자상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상(相)이다.
‘형체 있는 존재’는 필히 태어나고 변하고 멸하므로, 형체가 아닌(非형체) 순수의식으로 불멸하려는 ‘상’이다. 그러나 ‘비형체인 순수의식도 동료들이 있는 세계(非色界)’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역시도 무리로 이루어져 있는 중생의 세계이다.
‘형체와 비형체(非형체)’ ‘존재와 비존재(非存在)’는 ‘A와 anA’의 상호의존성의 관계이다. 즉 ‘비존재’는 ‘형체가 아닌(非형체) 것으로서 존재하는 존재’이다. ‘형체 있는 존재’의 입장에서는 ‘형체가 아닌 존재’는 단일한 하나(전체)라고 생각하겠지만 ‘형체가 아닌 존재(非存在)’에도 더욱더 형체가 아닌 여러 경지가 있다.
‘뽓따빠다 경’의 ‘구경의 상(相)’을 상기해보자. ‘고유한 상(相)’이 구경에까지 이르렀어도 열반(소멸)이 아니었던 이유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수자상’은 10가지 족쇄로 보면 7번째의 ‘비색계에 대한 집착’이 된다. 즉 ‘수자상’자체가 ‘집착과 의도’가 남아 있다는 반증이며 이것은 ‘나라는 잠재적 경향성’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수자상을 가진 그’는 여전히 윤회하는 중생이다.

이와 같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세계’를 모두 소멸해서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소멸하면 거기에 오직 ‘금강반야’만이 있는 해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