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삼매에 대한 이치
마음(생각)은 두 가지를 오락가락한다. 행복과 고통을 오락가락한다.
행복할 때는 행복만이 전부인줄 알며, 고통일 때는 고통만이 전부인줄 안다.
마음이 행복이라면 고통을 모를 것이다. 마음이 고통이라면 행복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두 가지에 모두 응한다.
두 가지에 모두 다 응하는 본래마음이란 그러므로 공적(空寂)하여야 한다.
허나 우리는 그러하게 모두에 응하는 공적함을 잊고서 행복할 때는 그 마음을 행복과 동일시하며, 고통일 때는 그 마음이 고통에 동화한다.
이와 같이 단과상, 유와무, 선과악에 오락가락하는 마음(생각)은 늘 어느 한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마음의 본질인 본래마음은 만상에 응한다. 허나 스스로는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마음공부와 종교의 목적은 이러한 본래마음이 되는 것 또는 스스로 그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본래의 그것은 참나, 신, 신성, 불성, 마음, 본래마음, 주인공, 전체자 등등으로 이름 불리워진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본래의 그것이 있으며, 그것이 마음의 본래 성품이다.
그것은 실체이며 지복이며 불멸이다.
이것이 드러나기(또는 합일이라는 말도 쓴다) 위하여서 우리는 이치를 공부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체험한다.
그것은 오로지 유일(전체)이기 때문에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이원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원성을 초월하여 그것이 체험(스스로 그것이 된 것을 체험이라고 쓴 것이다.)되어지는 길만이 있다.
또는 오로지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는 길만이 있다.
그러한 길을 무심이라고 부른다.
마음(생각)이 오락가락하며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 사라져야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마음 사라진 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또한 가칭하여서 무심삼매라고도 한다.
이원적인 마음(생각)으로 그것에 대한 이치와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사 이치를 모두 알아도 허망할 것이다.
불멸의 드러남 또는 불멸의 실체와의 합일은 온전한 평화이다.
이러하게 불멸이 되었다가는 또 다시 위태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할 때 불멸이 드러난 이는 그저 묵묵히 무노력의 노력으로 더 나아간다.
드러난 이에게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단어도 중요하지 아니 하며, 그러한 이치도 중요하지 아니 하다.
더 이상 추구하는 무엇도 없다.
다만 그것이 드러난 것만이 오로지 지복이며 전부이기에 늘 그러하고파서 묵묵히 갈 뿐이다.
실체(무심삼매)가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할 초기 즈음에, 많은 이들이 포기한다.
늘 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여기고 그 정도면 모든 것을 알고 되었다고 여기고 돌아 나온다.
그리고는 무수히 많은 이치들을 이야기 한다.
그러하게 많이 아는 이치가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치란 실체의 드러남이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위한 용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계속 가야하며 가다보면 개아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본래가 오롯이 모든 것을 드러내며 그러하게 저절로 마음이 모두 멸한다.
이러하게 오롯이 실체만 드러난, 전체인 것은 말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알려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말로 짓지 아니하면 또 어찌 방법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기에 대략의 이치와 겉모습을 그려본다.
허나 이러한 이치라는 것 또한 그저 표지판이다.
목적지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표지판은 필요가 없다.
삼매(三昧, Samadi, 禪定)
1. 일심삼매(一心三昧)와 무심삼매(無心三昧)
2. 무심삼매에서는 생각이 다 끊어진다(사라진다).
3. 내면에 쉬임 없이 흐르며, 무엇을 보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분석하는 생각을 그림을 통하여 알아 본다.
4. 견(見)과 관(觀)의 차이점. “본다” “보여진다” “비추인다” “봄”의 차이점
5. 텅빈삼매
6. 생각에서 “나”만 사라지면 된다.
7. 텅빈삼매와 외연삼매의 차이점
8. 물아일체(物我一體)부터 우아일체(宇我一體)까지
9. 삼매가 유지 되지 아니 하는 이유.
10. 본래마음이란
11. 탐진치(貪嗔癡)를 마음에서 빼어내야 한다.
12. 모든 종교와 마음공부의 공통점
13. 반야심경, 도덕경, 천부경 등이 밝히는 (실상과 현상)의 관계의 핵심
14. 붓다가 말씀하신 일심의 방법
15. 초선(初選)에서 이선, 삼선을 거쳐서 사선(四禪)이 되는 방법
16. 텅빈삼매로부터 외연삼매의 궁극인 관(觀)까지의 상태
17. “눈”으로 풀어보는 무심의 상태. (본다) (보여진다) (허공에 멈춘다) (비추인다) (봄)
18. 안광(眼光)의 쏘아 내보냄, 안으로 안광을 거둠, 안광의 멈춤
19. 번뇌에서 일심을 거쳐서 무심이 되는 여정
삼매
삼매(三昧)에는 일심(一心)삼매와 무심(無心)삼매가 있다.
일심삼매란 생각이, 번뇌가 “사라지는” 상태이다.
무심삼매란 생각이, 번뇌가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하므로 본성(참나, 본마음)이 드러나는 상태이다.
또한 무심삼매는 무아상태이다.
일심삼매란
번뇌 또는 잡생각이 사라지며 오로지 일심(한 생각)만이 오롯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말로는 일심(한 생각)이라고 하여서 “하나”의 상태 같지만은 실은 두개의 상태가 일심 상태이다.
외적으로 본 다면은 “주시의 대상”만 있고 다른 생각은 다 사라진 상태이다.
이때 외적으로는 대상만 남은 듯 하나 사실은 여전히 그것을 “주시하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보는 자” 와 “보여지는 대상”의 두개가 있는 상태이며 그 외에는 다른 모든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일심상태이다.
내적으로는 누군가 “하나의 개념 혹은 뜻” 또는 “하나의 영상”만을 잡고 있고, 다른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면 이것 역시 일심삼매이다.
그러할 때 내적으로는 “하나의 대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자(주시자)가 있으므로 이것역시
두개만이 남아있고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을 때 일심삼매상태이다.
이러한 일심삼매일 때 다른 모든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대상과 주시자만 남았기 때문에 마치 대상과 하나가 된 상태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상태가 깊어지고 유지가 되어 더 고요하여지면 드디어 주시자는 사라지게 된다.
동시에 대상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은 온전히 사라지게 되어서 무심상태가 된다. 이러할 때 무아상태가 된다.
생각은 온전히 사라졌으나 깨어있음 또는 각성의 상태가 벌어진다.
요약한다면 일심이란 “주시자와 대상”의 두개의 분리된 상태 즉 자와 타(自他)의 상태이며 무심이란 자타가 사라진 상태이다.
헌데 무심(無心)삼매란 무엇인가?
과연 사람생각이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
또는 사람생각이 모두 사라졌을 때 기절이나 혼절 혹은 죽음이 아닐까?
모든 생각이 사라졌을 때, 죽거나 혼절하지 아니하고 깨어있다.
이러하게 깨어있을 때 아무 생각이 없다. 즉 무심이다.
과연 그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생각이 사라지면은 죽음이다.
혹은 생각이 사라졌는데 무엇인가 깨어있다면 그것 역시 생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생각이 아니라면 어찌 깨어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헌데 생각이 다 사라져도 무엇인가 깨어있다.
이것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평생을 생각으로만 살아온 우리는, 생각이 사라지면은 잠 아니면 기절일 뿐인 것이다.
허나 일심상태로 가서 더 나아가 일심마저 사라지면은 생각은 텅텅 비워진다.
그곳에는 공의 모양이나 또는 공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텅텅 비워진 공이 가이 없이 벌어지는 상태이다.
이것이 무심삼매의 시작이다.
이러할 때 그 깨어있음 또는 본성(本性)이 드러난다.
요약하면은 무심삼매란 무심이며 무아이다.
생각이 사라진 그 상태에서 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생각도 없다.
분별의 생각이 다 사라졌다.
허나 본성은 오롯이 깨어서 드러난다.
생각이란 기본단위가 주관과 객관이다.
컴퓨터가 존재하려면 0 과 1 이라는 두개의 숫자가 필요하다.
즉 컴퓨터는 이진법이다. 이것이 정보의 최소단위이다.
생각은 정보의 확대개념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 생각을 하려면 최소단위가 주관과 객관이다.
작용과 반작용 또는 “찧고 빻고”가 있어야 만이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최소한의 생각의 기본단위인데
이러하게 주시자와 대상만 남고 다른 생각은 다 사라졌을 때가 일심상태이다.
헌데 이러한 두개의 주객이 사라진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의 최소 기본단위가 주객인데, 이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은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나 그 두 가지의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을 때, 그 두개가 비롯한 본래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두개가 사라지고 무엇인가가 나타났으니, 이것을 “하나” 또는 “하나의 마음”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이 “하나”는 생각(마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곤란하다.
이유가 생각은 기본단위가 두개이며, 이 “하나”는 굳이 두개와 구분 지으려고 억지로 만든 이름일 뿐 무심삼매에서는 하나이니 무엇이니 하는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어있음 또는 각성이라고 굳이 이름 한다.
또는 순수의식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주관 과 객관으로 나뉘어 진 두개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순수의식”이라고 말할 뿐 그것은 의식(생각)의 주관과 객관이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이며 온전한 깨어있음 또는 각성상태이다.
이러하게 무심삼매가 되려면 어찌 하면 될까?
평소에 우리는 느끼든 아니 느끼든 수없는 번뇌(생각)들이 흐르고 있다.
일차로 큰 번뇌들은 무의식에 과거에 저장된 것이다.
이것들을 참회내지 여하한(어떠한) 방법으로 일단 많이 녹여낸다.
그러고 나면은 미래 번뇌가 있다.
참 이해로써 미래 번뇌를 많이 녹여낸다.
그러할 즈음 자동으로 사물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생각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애초에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에 따르는 부수적인 판단의 생각들이 수없이 동시적으로 떠오른다.
“자동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아래의 그림을 보자.
위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겠는지?
모른다면 다음 페이지를 보자.
자 이제 앞의 그림을 알겠는지?
앞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 앞의 그림만 보면서, 애초의 무슨 그림인지 몰랐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지 하여보자.
아마도 애초에 무슨 그림인지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기 힘이 들것이다.
아마도 자꾸만 카우보이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1. 잠시 보았는데도 이미 생각 속에서는 모든 분석이 끝났다.
분석이 끝이 났기 때문에 애초의 몰랐던 상태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2.그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의 데이터량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3.앞의 몰랐던 그림을 보다가 뒤의 카우보이 그림을 보고는 앞 그림을 아는 동안, 즉 분석하는 동안에 스스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다고 여겼는가? 아니면 분석 하는 줄도 모르고 무심히 분석이 끝나 버렸는가?
아마도 분석하는 줄도 모르고 분석이 끝났을 것이다.
즉 우리는 늘 미세하게 생각이 움직이는데도 그것을 눈치 채기 힘이 들 다는 것이다.
4.잠깐 동안 본 그림인데도, 아마도 이제 평생 앞의 그림을 보아도 뒤의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하다면 여적 살아오며 우리가 배워온 모든 것들 또는 관념들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무가 광합성을 하고 무엇을 하고 ........등등 “나무란 이러한 것이다”라고 배웠다면 나무를 볼 때마다 배웠던 생각들이 떠오를 것인가 떠오르지 아니할 것인가?
아마도 떠오를 것이다. 허나 스스로만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아니한다고 여길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것이 떠오르지 아니 한다면 그것이 “나무”인지 무엇인지 도저히 알길이 없다.
아무러한 생각이 없다면 단지 “색과 형상”만 “있는 그대로” 있게 된다. “색”이라는 것 역시 그저 경이롭게 선명하게 있을 뿐, 무슨 색인지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다.
“순일수련원”이라고 칠판에 크게 써놓고서는 머릿속에서 그 글씨를 안 읽어보려고 노력을 해보자.
아마도 순일수련원이라고 자꾸 읽혀 질것이다.
그 글씨를 아니 본다면 모를까 글씨를 정면에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면 대개로 그 단어들이 생각으로 자꾸 떠오를 것이다.
혹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글씨를 머릿속에서 안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볼 때는 “ 순일수련원”이라는 단어를 안 떠올렸으나, 지금 오히려 안 읽으려고 노력을 하는 바람에 자꾸 떠오를 뿐이다“
평소에 칠판의 그러한 글씨를 볼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여서 글씨가 안 보였거나, 또는 글씨를 보고 있었다면 그 글씨가 분명히 생각 속에 떠올랐으나 그저 지나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칠판의 글씨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냥 무늬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가 “나라는 것 밖”의 어떠한 대상을 볼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배워서 분석하여서 저장 된 대로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또한 “나라는 것 안”의 어떠한 대상을 주시하든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컴퓨터가 화면에 꽃 한 송이를 띄어 놓았을 때 화면에는 꽃만 보이지만 칩 속에는 수많은 컴퓨터 언어가 꽃 한 송이를 띄우기 위하여 조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꽃 한 송이를 보면서 그 꽃에 대하여 배우고 분석된 모든 정보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자동생각”이라고 아래에서부터 쓰겠다.
이러한 “움직이는 생각”들이 멈추었을 때 고요의 깨어있음이 벌어진다.
5.우리에겐 “틀”이 있다. 배운 대로의 틀이 만들어져 있다.
생각이 세모난 이에게 네모난 생각이나 관념이 들어오면 그것은 곧바로 세모로 바뀌어 진다. 이것이 반쪽견해이다. 한번 보았는데도 잊혀지지 아니하는데 수없이 배우고 분석되어진 생각들은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신념화”되어지며 이것이 시시비비를 야기하게 된다.
위에서 잠시 여정을 살펴보았다.
즉 여정은 다음과 같다.
큰 번뇌 사라지고
작은 번뇌 사라지고
선험적 자동생각 사라지면은
일심상태 거쳐서
무심상태 된다.
무심상태에서 참나가 드러난다.
위에서 무엇을 보든 자동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러하면 방법은 무엇이건 아니 보면 되지 않겠는가?
허나 눈을 감아보면 밖을 아니 본다는 것 뿐, 안의 수많은 번뇌들이 보인다.
또는 거친 마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갔다가 하며 뛰어다닌다.
이 마음을 어찌 사라지게 할 것인가?
눈이 본다는 행위는 생각(마음)과 연결되어있다.
생각은 한시도 사라져 본적이 없고, 또한 “생각이 나”라고 믿기 때문에 생각자체가 사라지면은 죽는 줄로 안다.
그러므로 생각은 한시라도 사라지길 원하지 아니하며 그러하기 때문에 눈(귀, 코, 입, 몸, 개념)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려고(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에 의하여 느낌을 받고, 개념들을 분석하려)한다.
생각(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눈”이다.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면 다시 그것을 통하여 자동생각을 하게 되고 또한 분석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사라지지 아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과 의식과 무의식은 일렬종대로 연결되어있다.
무의식의 경향성이 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의식이 눈을 움직이고 대상을 보게 하고는 다시 역순으로 그 본 것에 대한 자동분별생각이 다시 의식에 의하여 종합분석 되고 그것이 다시 무의식에 저장되는 순환의 구조이다.
이러하므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행위를 멈추지 아니 하는 한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마음(생각)을 멈추려면 일단 보는 행위를 내면으로 거두어 들여야 한다.
본다는 행위는 생각(마음)이 밖을 향한 표출이며 움직임이다.
그 시선을 거둔다는 것은 움직이는 생각(마음)을 거두는 것이다.
아기일 때 눈이 안 보인다. 점점 조리개가 형성되면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련의 이 과정은 생각(마음)이 점점 눈을 보게 하여서 대상들을 분석을 하게끔 하여서 생각이 점점 더 살아나고 움직이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기들이 조리개가 잘 조정이 되면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아기들은 안광(레이저빔)을 쏘아내서 사물에 정확하게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예로 들어보자.
육백만불 사나이가 멀리 있는 것을 눈으로 보려할 때, 눈에서 뚜두두두 하고서는 레이저빔 같은 것을 보려고 하는 대상까지 쏘아낸다. 그래야만 볼 수 있다.
즉 대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 대상까지 레이저빔(안광)을 쏘아야만이 볼 수가 있다.
연필을 1미터 앞에다 놓아두고서, 안광을 50센티만 쏘았거나 2미터를 쏘았다면 그 연필을 볼 수가 있을까 없을까?
연필은 안보이거나 뿌옇게 “보여지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즉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본다”와 "보여진다“는 다른 뜻이다.
안광이 대상에 딱 맞았을 때 “본다”이며
안광이 대상에 딱 아니 맞았을 때 그러므로 전체에 풀어졌을 때 “보여지는”상태가 된다.
또는 물질을 볼 때 “본다”이며 비물질을 볼 때 “보여진다”이다.
보는 것을 다 거두어 들였을 때 마음이 외부로 향하며 날뛰건 것이 내부로 향하여 진다.
그때 마음은 고요하여지며 생각은 사라져간다.
이러하게 내면으로 마음이(또는 안광이) 향하면 일심상태가 벌어진다.
그러고 내면으로 향한 마음이 사라지면 “가이없이 텅 빈” 고요만이 드러난다.
다 사라지면은 가이 없는 텅빈 고요만이 드러난다.
이때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텅빈삼매( 무심삼매)이다.
텅빈삼매는 최초로 본성(참나)이 드러난 것이다.
헌데
이러한 “텅빈삼매”는 유지가 아니 된다. 다시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한국불교에서는 오랜 생을 개아(個我)로 살아왔기 때문에 습기가 남은 것을 이유로 든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습기를 더 제거해야 한다.
또는 중국에서는 오랜 생을 개아로 살아왔기 때문에 병통이 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고 들었다.
듣기로 티벳 불교에서는 본래성품을 보기는 하였으나 이제부터 명상시작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때부터 참스승으로부터 텅빈삼매가 자주 유지 되게끔 또한 한번 들었을 때 삼매가 깊어지게끔 하는 방법을 배워서 더욱더 무심삼매가 깊어지게, 즉 더욱더 본성이 드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된 것이라고 들었다.
즉 위의 말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텅빈삼매가 되어도 본성이 다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무심삼매의 깊이는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논리로는 이해되지 아니하는 대목이다.
본성이 드러났으면 잠시 된 것이나 늘 되는 것이나 시간차이일 뿐이지 깊이가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텅빈무심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다.
스스로 텅빈삼매에 들면 그 순간 무심 무아라 우아일체가 된듯하다.
즉 생각으로 돌아 나오면 그 무심삼매 순간에는 전체였던 듯 하다.
허나 그 후 계속되는 뒤의 텅빈삼매에 의하여, 즉 깊이가 더하여지는 무심삼매에 의하여 점점 더 깨어있음이 또는 각성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삼매의 깊이를 스스로 어느 정도까지인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외부적으로는 시간이다.
깊이는 시간과 비례한다. 물론 내부적으로 그 깊이가 측정이 된다.
허나 스스로 그것을 알뿐 그것의 비교대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온 것인가 가르쳐줄 사람스승이 없다면 시간으로 비교함이 손쉬운 방법이다.
텅빈삼매에서 스스로 생각이 다 사라졌다고 느낄 뿐 미세한 생각이 움직이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의식에서의 움직임은 없다. 무의식에서의 미세한 움직임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더 사라졌는지 또는 고요하여졌는지가 텅빈삼매의 깊이의 차이다.
텅빈삼매라는 것이 이치와 방법(무심상태에 드는 것에 무슨 이치와 방법이 있느냐고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 이치와 방법이 반야심경에도 있다)을 알고 그 상태에 들었다면 그 후 그러한 방법으로 자주 그러한 상태에 들 수가 있다.
그러하다가 어느 날 방법 없이 저절로 들어지기 시작한다.
허나 어떠한 방법으로 무심삼매에 들기는 들었는데 그 후 잘 아니 되기 십상이다. 이치가 확연하지 아니하고 체계적인 삼학을 밟지 아니하였거나 삼매에서 일심의 상태를 확고히 다지지 아니하고 무심상태에 들어 보았을 때는 종종 이러하다.
속성인 방법에 의하여 텅빈삼매에 자주 들다 보면 또는 속성이 아닌 많은 세월을 하여서 텅빈삼매에 든 경우, 텅빈삼매에서 생각으로 돌아와도 텅빈삼매는 아니지만은 텅빈삼매 비슷한 상태가 어느 정도 유지된다.
즉 곧바로 생각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여진이 어느 정도 지속된다.
삼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러한 여진이 더 많은 시간동안 유지된다.
이러할 때 걸어 보아야한다. 물론 텅빈삼매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천천이 천천이 걸어질 것이다.
왜 이때 걷는가 하면은 걸으면서도 무심삼매상태에 드는 것을 체득하기 위하여서다.
삼매란
1. 앉아서 꼼짝 안하고 이완하여서 들게 되며
2. 그 후에는 탈것(버스)등에 타서도 되며
3. 움직이면서도 되며(운전하면서도 되며)
4. 말하면서도 되게 된다.
위의 것이 여정이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텅빈삼매는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라고 하였다.
헌데 다시 생각하면서 말하면서 텅빈삼매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허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텅빈삼매보다 더 나아간 외연삼매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찌 말하면서도 무심상태일수가 있는지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다.
텅빈삼매가 깊어지면 외연삼매가 벌어진다.
둘 다 무심삼매이다.
허나 둘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텅빈삼매에서는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말 그대로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지는 상태이다.
허나 이 “공”은 “공”의 모양이 아니다. 그저 텅빔만 가이 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공”이라고 굳이 이름 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깊은 텅빈삼매에서 즉 나도 세상도 사라진 무아 무심상태에서 이제 눈을 세상을 향하여 든다. 그때 다시 세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세상은 전에 보던 그러한 세상이 아니다.
“맙소사! 이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이러하게 청정하고 이러하게 맑고 밝으며 깨끗하였단 말인가!”
물론 이러한 생각을 그 상태에서는 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 돌아 나오기 시작할 때에 느껴지는 소감이다.
장장엄한 극락(極樂), 정토(淨土)가 펼쳐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 예전의 산과 물이 아니다.
여정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세상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된다.
텅빈삼매에 들면 “산도 공이요 물도 공이로다”가 된다. 사실은 산이니 물이니 다 사라진다. 그러므로 공이다.
외연삼매에 들면 세상은 다시 드러나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된다.
허나 산이란 이름자도 물이란 이름자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색깔과 형태”로만이 청정하게 비추일 뿐이다.
이러한 상태는 육안으로 보는 즉 생각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르다.
생각으로 볼 때에는 세상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으로 꾸며서 보았을 뿐인 것이다.
그 생각이 다 사라진 무심(외연삼매)의 상태에 비추어지는 세상은 모두 맑고 밝게 기이하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이러한 외연삼매가 깊어지면 “봄”이 벌어진다. 이것이 진정한 관(觀)이다.
무심에서 눈을 들어 세상을 볼 때 말이 “본다고” 표현하였을 뿐 눈에는 “보는 자”가 없다. 즉 눈은 창(창문, 거울, 유리창)이 되었다. 그러할 때 이제 “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세상이 눈이라는 창에 비추어진다.
즉 생각으로는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요.
외연삼매상태에서는 “보는 것”이 아니며 거꾸로 사물들이 본래마음에 또는 눈이라는 유리창에 “비추어”진다. 이것이 바로 조견(照見)이다.
외연삼매가 깊어지면 조견을 넘어서게 되고 드디어 “비추이는 바탕”과 “비추이는 대상”이 없이 모두 하나 된 “봄”만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관”이다.
요약하면 무심이라는 티끌하나 없는 전체의 거울에, 세상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고 나아가서 “봄”만이 존재하게 된다.
텅빈삼매는 뒤에 더 깊어지는 고요, 지극한 평화, 온전한 각성상태, 청정심의 깊이에 의하여 파악된다.
외연삼매는 물아일체(物我一體)부터 우아일체(宇我一體)까지로 파악이 된다.
똑같은 외연삼매인데 어찌 물아일체부터 우아일체까지의 차등이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텅빈삼매가 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연삼매도 또한 깊어진다.
우아일체라고 하면은 마치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된 듯이 의미가 느껴진다.
허나 말을 차용하여 썼을 뿐 “나”가 “우주”와 하나 되는 방법은 없다.
무심삼매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은 “나, 개아”가 얼마나 더 사라졌느냐와 비례한다.
즉 “개아”가 온전히 사라진 상태가 “우아일체”이다.
본디의 “참나”가 “전체자”였던 것이다.
만약 본디의 참나가 전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나 마음공부는 전부 허망한 것이 될 것이다. 본디의 나가 원래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전체가 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본디의 나가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그 무엇이란 얻어야할 무엇이 된다.
그럴 때 “얻어야 하는 자”와 “얻어야할 무엇”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두개의 대립이며 둘 다는 부분자라는 것이 된다. 얻어야할 무엇이 전체가 아닌 “부분”이라면 얻어 보아야 언젠가는 없어질 허망한 무엇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없어질 무엇을 얻으려고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체자(全體自) 또는 무한자(無限自)가 되려는 것이라면 본디 우리가 그것이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애초에 그런 것이 성립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애초에 성립하지 아니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마음공부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는 무엇인가 전체가 있을 거라는 추론으로 이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하다면 애초에 우리가 전체였을 때만이 스스로 전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늘 전체자였고 전체자인데 이러한 전체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무엇인가?
바로 “개아”이다.
요만한 몸과 요만한 생각(마음)이 “나”라고 믿는 자체가 늘 “전체”임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몸이 “나”라고 믿는 자체가 바로 “나는 부분자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나”를 만드니 또한 수많은 “너”들이라는 부분자들이 생기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물아일체는 “나가 사라진 만큼” 벌어진 참나 상태이며, 우아일체란 “나가 온전히 사라져”서 드러난 본디의 전체 상태이다.
텅빈삼매와 외연삼매는 쌍수(雙修)로 가게 된다.
텅빈삼매가 깊어질수록 외연삼매의 물아일체부터 우아일체까지의 깊이가 깊어진다.
텅빈삼매란 텅 비워진 본래마음이 드러나며
외연삼매란 맑고 밝고 각성이 드러난다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둘은 쌍수(雙修)로 꼭지점까지 나아가게 된다.
둘이 쌍수로 잘 나아갈 때에 텅 비워지고 맑고 밝고 깨어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또는 텅 비워지고 명징(明澄)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으며
또는 텅 비워지고 밝고 뚜렷하다고 이야기 될 수도 있다.
우아일체 상태도 지속이 아니 된다.
그러므로 늘 무심삼매인 본연삼매(本然三昧)상태로 가게 된다.
본연삼매상태란 다른 말로 하면은 늘 개아가 사라진 상태이다.
두 길은 다른 듯 하며 같은 말이다.
전자는 삼매를 더욱더 들어서 가는 상태이며
후자는 개아를 더 소멸하여서 가려는 상태이다.
즉 삼매에 들 수 있을 때는 늘 삼매에 들어야 하며
생각으로 돌아오면 개아를 더 소멸하는 길로 간다는 이야기다.
둘은 다르지 아니한 것이 개아가 더 소멸하면 할수록 더 깊은 무심삼매에 들며 그러다가 다시 생각으로 돌아오면 많은 개아가 소멸한 것을 알게 되며, 미세하게 남은 개아를 더 소멸하게 된다.
이러하게 텅빈삼매와 외연삼매가 쌍수로서 꼭지점에 거의 다 달았을 때 여전히 온전히 청정한 본래의 마음이 아니 되게 하는, 미세한 개아 또는 미세한 상(想)이 남아있는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온전히 개아를 버리는 무아의 길이 아니고는 본래의 청정심이 될 방법이 없을 듯 하다.
무심삼매에도 여전히 미세한 상(相)이 있으며, 여전히 안주하려는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안주하려는 것은 머무르려는 것이다. 누가 머무르려 하는가?
바로 개아(個我)이다.
혜란 무엇인가?
혜란 깨어있음, 각성, 본성이다.
그러하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혜란 무심상태에서 드러나는 오로지 하나의 본래마음이며
지혜란 본래마음의 작용 또는 쓰임이다.
즉 지혜는 주관과 객관이 있어서 분별한다. 허나 시시비비가 없다.
즉 생각(마음)에서 “개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개아가 있는 생각(마음)은 지식이요
개아가 없는 생각(마음)은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제 늘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디 혜였던 우리가 이러한 혜 자체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개아로서는 무아(無我, 無個我)여야 한다.
즉 무아=혜, 무아=전체자, 절대유아 이다.
이러하게 무아이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몸과 생각이 “나”가 아니어야 한다.
이러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의 겉모습에 마음이 머무르지 아니하여야 하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여야 한다. 응당 머무는바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하게 마음이 안과 밖 어디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일어나는 대로 쓰여져야 한다.
열역학 제일법칙을 앞에서 이야기 한바 있다.
“에너지는 우주 내에서 스스로 생길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다만 형태만 변할 뿐이다.”
형태만 변한다는 말은 같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잡을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애초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게 할 방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머무를 수 없는 것을 잡거나 저항하여서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고통만 가져올 뿐이다.
번뇌란 바로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려 하는데서 기인한다.
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삼매에 계속 들려하는 것이 만약 아트만(atman)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면 또는 개아의 의식을 확장하여서 전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려운 길이라는 것이다.
즉 혜가 되기 위하여 무아라는 이치가 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무아는 혜이기 때문이다.
전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테두리가 없이 무한이다.
개아가 의식을 확장하여서 그 끝없는 무한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한 일이 될 것이다.
개아가 개아를 놓는 순간에 무한자일 것이다.
텅빈삼매와 외연삼매가 쌍수로써 깊어질 때에
가도 가도 늘 그러한 본연의 상태에 있을 수가 없다.
그때 즈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무아”이다.
삼매를 추구하는 것이 미세하게 남은 개아이기 때문에 늘 본래의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에 늘 청정한 마음상태로 있으려면, 그 남은 개아를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마음이란?
참나 또는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본래마음과 마음은 어떠한 관계인지 이야기 해본다.
본래마음-마음-몸 이러한 순서로 여기기도 하며, 본래마음이란 마음과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여기는 수가 왕왕이다.
본래마음과 마음은 같기도 하며 다르기도 하다.
이유는 마음을 떠나서, 또는 마음 없이는 본래마음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음에서 빼어낼 것을 다 빼어내면, 즉 탐진치를 다 빼어내면 그것이 본래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늘 두 가지를 오락가락한다. 그것이 주관과 객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두 가지로 구별된다. 대소(大小), 고저(高低), 장단(長短) 이 그것이다.
또한 마음도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처럼 늘 두 가지로 오락가락한다.
마음과 세상은 모두가 늘 두 가지가 서로 의존하여서, 조건적으로 존재한다.
마음이 지은 것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락가락 하는 것, 즉 불변(不變)이 아니고, 늘 무상(無常)하여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고통이다. 또는 “비교자체”가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이란 또한 다른 말로 갈등이기도 하다.
고통과 갈등은 같은 것이며 바로 번뇌라는 이야기다.
마음과 세상은 모두 번뇌이다.
헌데 오락가락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즉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 또는 나와 남의 비교를 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한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진 본래마음이다.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 마음은 오락가락하지 아니한다.
이러할 때 두개의 마음상태가 아닌, 오롯한 하나의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무심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빈병이란 병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저 병이 비어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며, 오락가락하던 두개의 마음, 즉 갈등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마음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무심인 텅빈삼매이다.
즉 오락가락하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요
그것이 모두 고요해진 것이 바로 무심이다.
이러하게 처음에는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음료수를 손을 들어서 입으로 까지 가져가서는 마신다.
이것은 분별하는 마음이냐 아니냐를 이야기 해보자.
모든 움직임은 분별이다. 몸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써서, 정보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 역시 움직이는 마음 이다.
그렇다면 무심상태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채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커피를 무심히 마신다면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움직임이었으므로 주관과 객관이 쓰여 졌으나 이것은 갈등이 없다.
허나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인이 들었으니 마시면 아니 좋을 텐데, 또는 많이 마시면 병 걸릴 터인데” 하고 생각 했다면 이것은 갈등이다.
즉 둘은 같은 커피를 마시는 “행위”였으며, 둘 다 마음을 분별하여서 몸과 손을 움직였으나, 전자는 “나”가 없었기에 갈등이 없었으며 후자는 커피를 마시면 “나”의 몸에 아니 좋을 것 이라고 여기는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되었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한다면
전자는 “한생각”만이 있었다.
허나 후자는 “한생각”에다가 다시 “한생각”을 더하였다.
즉 전자는 무심히 아무러한 생각 없이 그저 몸을 움직이는 분별생각만 하였다.
허나 후자는 그것에 더하여서 "몸에 아니 좋을 텐데“라는 시시비비가 더하여진 생각을 하였다.
전자는 행위자 없는 행위였으며
후자는 행위자 있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무심은 고요에서만이 무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무심은 움직임에서도 고요한 무심이 되었다. 두 번째 무심이 움직임에서도 고요가 된 것은 “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아”라는 이야기다.
전자는 한 생각만 있었다. 한 생각 자체도 두개의 정보이며 분별이다. 허나 무심에서 쓰는 “한 생각”은 번뇌가 아니다.
후자는 앞의 “한 생각”에 또 다른 시시비비의 “한 생각”을 내었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성자라는 사람들은 한 생각도 없이 늘 무심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제자가 질문을 던져오면 생각을 한다. 생각하지 아니 한다면 질문을 분석할 수가 없다. 질문 내용도 모른다.
질문 내용에 답을 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된다.
허나 그는 대답을 무심히 한다.
즉 대답하는 것은 한 생각이지만, 그 답이 틀렸는지 또는 그 대답에 대하여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 등등의 또 다른 번뇌 생각을 하지 아니 한다.
허나 우리는 답을 하건 무엇을 하건 또 다른 뒷생각을 내게 된다. 듣는 중에 여러 가지 답안을 이미 준비하며 또는 답을 하는 중에도 끝없이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즉 성자는 평소에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없다. 완전한 무심이다. 허나 생각을 써야 할 때가 되면 스스로 쓴다. 이것은 번뇌가 아니다. 또한 생각할 때에 생각만 존재하듯이, 그 생각에 대하여 다시 단죄하는 제2의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허나 무심이 아닌 이는, 평소에 스스로 원하지 아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잡생각들이 오고간다. 이것이 번뇌이다. 또한 스스로 오고가는 생각들에 또 다른 생각을 내어서 찧고 빻고 한다.
요약하면은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고나서는, 움직임에서도 “나”를 버리고 고요가 되는 여정이다.
즉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이요
움직임에도 고요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움직임에도 늘 고요한 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바로 “색”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처음부터 “무아(無我)”였으면 첫 번째 무심 아니 거치고, 바로 두 번째 무심이 될 터인데 왜 돌아가는가?
“나”라는 것은 워낙 뿌리가 깊기에, “무아”라고 머리로 알아도, 되기는 쉽지가 아니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고요의 첫 번째 무심(텅빈삼매), 즉 생각이 모두 끊어져 보아야 만이, 또한 그것이 자주 깊이 되어야만, “나라고 여기는 이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나”가 아닌가 보다 하고 여기게 된다.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자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탐진치하게 되면 그것이 갈등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번뇌가 사라지면은 마음은 청정하여진다.
마음에서 번뇌를 빼어 내면은 그것이 본래마음이요 참나이다.
허나 알기는 하나, 탐진치 빼어버리는 것이 쉽지가 아니하다.
“개아(個我)”가 있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탐진치 빼어내기가 그리 용이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붓다가 팔정도와 팔선정을 제시 하셨다.
즉 탐진치가 사라지면은 해탈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 방법으로는 팔정도와 팔선정을 하라고 이야기 하신 것이다.
탐진치를 없애면 되었지 팔정도와 팔선정을 왜 할까?
팔선정이란 말 그대로 팔삼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일심이 되고는 무심이 되는 방법이다.
탐진치 빼어내는데 왜 무심이 필요한가?
무심상태가 본래마음상태요, 그 상태에서만이 전체상태요, 전체에서만이 “개아”가 “나”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가왓기타에 “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말이 나온다.
“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으로 보인다.
"행위자”가 없는데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 행위자란 “개아”를 말함이다.
행위자가 없다는 것은 “개아”가 없다는 것이며, 바로 “무아”라는 말이 된다.
즉 “개아의 행위자”는 없으며, 전체자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
헌데 “전체(자)”는 행위자가 아니란 말인가?
“전체”란 말로 쓰려니 “전체자”라고 표현 하였을 뿐 “전체”에게는 “자”가 붙을 수가 없다.
그저 “전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붓다를 “전체자”라고 표현한다고 하여보자.
붓다는 “전체자”이실 것이 필경이다. 허나 “자”라는 표현대로 생각하여서, 붓다의 몸을 전체자라고 할 것인가? 붓다의 의식을 전체자라고 할 것인가?
그러하지 아니 할 것이며 붓다의 지혜, 깨어있음, 불성이 전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전체가 나투어진 상태의 마음과 몸이 있으니 즉 전체가 전체자의 모습으로 나툰 것이 있으니 전체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형상 없으나 온전한 본래마음이 되었으므로 “전체”요, 그 형상 없는 “전체”가 형상 있는 몸과 마음으로 나투어진 것(표현되어진 것)을 전체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주(主)는 전체(全體)요, 종(從)은 전체자(全體自)이다.
손가락과 몸 중에서 누가 주인이요 누가 종이냐 묻는 다면은
아마도 “몸”이 주인이요 “손가락”은 몸의 표현 또는 몸의 한부분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몸과 마음 중에서 누가 주인이냐고 굳이 나누어보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마음”이 주인이요 “몸”은 종이다. 또는 몸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될 것이다.
또는 마음과 몸은 같은 것이지만, 몸은 마음이 일어난 다음에 움직이므로 마음이 먼저라고도 이야기 할 것이다.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본래마음과 마음 중에서 누가 더 주인이냐고 굳이 묻는 다면은
아마도 “본래마음”이 주(主)요, 마음은 본래마음이 나툰 것이라고 이야기 될 것이다.
허나 마음이 본래마음이기는 하나, 그것에서 빼어낼 번뇌(갈등)들을 모두 빼어내지 아니 하였다면, 본래마음을 모르며 되지도 아니 하였을 것이므로 스스로 “개아”라고 여길 것이다.
허나 본래마음이 된 이는 스스로가 본래마음이요, 표현이 마음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즉 본래마음이 된 이는 “전체”요, 나투어진 표현인 “마음과 몸”이 “전체자”라고 이야기 할 것이며, 본래마음이 되지 아니한 이는 마음과 몸이 “나”요 그러므로 “개아”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본디 전체였다면 지금 즉시 전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개아”가 “나”라고 믿는 것을 놓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색과 관련되어져서 쓰여지는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색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너지=질량에서 에너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 있는 무엇이다.
다만 형태가 없을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보아도, 공=색 인데, 흔히 우리가 알듯이 색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헌데 어찌 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가 있을까?
그와 같이 “무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무아”는 “절대유아”인 것이다.
“개아”로서 “무아”가 되면 “전체”가 된다.
그러한 “전체”는 온전히 깨어있다.
허나 형체는 없다.
본래가 전체라면 그러하게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본래전체이니 전체가 되자는 것이다.
하나는 “개아는 나가 아니다”고 하는 방법이다.
둘 다 종래에는 전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종래에 다 되고나서도, 전체가 되겠다는 그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여전히 상(想)이며 개아 마음인 것이다.
무심삼매의 종래에 이르면 전체와의 합일 상태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전체라고 여긴다.
허나 누군가 전체가 되었다면 다시 전체라고 여길 것인가?
전체라고 여긴다는 것은 (전체)와 (전체라고 아는) 둘의 상태가 있다.
이것은 분리 상태이며 그러는 한 “전체”의 상태는 “전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모든 의도와 작(作)을 놓게 될 것이다.
그러하게 온전히 무아가 되었을 때 “전체”라는 “상(想)”이 사라질 것이다.
즉 온전히 “무아”일 때만이 “전체”가 드러날 것이다.
참나가 되는 방법일반은 주로 행복을 추구하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참나를 찾아가게 된다.
허나 무아의 길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다.
본디 참나라면 그것은 본디 청정한 지복이다.
본디 그것이라면 행복을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
지금의 무지에 의하여 생겨진 번뇌만 사라지면은 본디 청정 아니겠는가?
지금의 “괴로움”만 사라지면은 본디 청정 아니겠는가?
무지(無知)는 모든 고통의 제1원인이다. 그러한 무지는 “이 몸과 마음”이 “나”다고 여긴 것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즉 본래의 나는 “이 몸과 마음”이 아니며 전체이기 때문이다. 마음(생각)은 두 가지를 오락가락한다. 행복과 고통을 오락가락한다.
행복할 때는 행복만이 전부인줄 알며, 고통일 때는 고통만이 전부인줄 안다.
마음이 행복이라면 고통을 모를 것이다. 마음이 고통이라면 행복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두 가지에 모두 응한다.
두 가지에 모두 다 응하는 본래마음이란 그러므로 공적(空寂)하여야 한다.
허나 우리는 그러하게 모두에 응하는 공적함을 잊고서 행복할 때는 그 마음을 행복과 동일시하며, 고통일 때는 그 마음이 고통에 동화한다.
이와 같이 단과상, 유와무, 선과악에 오락가락하는 마음(생각)은 늘 어느 한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마음의 본질인 본래마음은 만상에 응한다. 허나 스스로는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마음공부와 종교의 목적은 이러한 본래마음이 되는 것 또는 스스로 그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본래의 그것은 참나, 신, 신성, 불성, 마음, 본래마음, 주인공, 전체자 등등으로 이름 불리워진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본래의 그것이 있으며, 그것이 마음의 본래 성품이다.
그것은 실체이며 지복이며 불멸이다.
이것이 드러나기(또는 합일이라는 말도 쓴다) 위하여서 우리는 이치를 공부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체험한다.
그것은 오로지 유일(전체)이기 때문에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이원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원성을 초월하여 그것이 체험(스스로 그것이 된 것을 체험이라고 쓴 것이다.)되어지는 길만이 있다. 또는 오로지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는 길만이 있다.
그러한 길을 무심이라고 부른다.
마음(생각)이 오락가락하며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 사라져야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마음 사라진 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또한 가칭하여서 무심삼매라고도 한다.
이원적인 마음(생각)으로 그것에 대한 이치와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사 이치를 모두 알아도 허망할 것이다.
불멸의 드러남 또는 불멸의 실체와의 합일은 온전한 평화이다.
이러하게 불멸이 되었다가는 또 다시 위태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할 때 불멸이 드러난 이는 그저 묵묵히 무노력의 노력으로 더 나아간다.
드러난 이에게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단어도 중요하지 아니 하며, 그러한 이치도 중요하지 아니 하다. 더 이상 추구하는 무엇도 없다.
다만 그것이 드러난 것만이 오로지 지복이며 전부이기에 늘 그러하고파서 묵묵히 갈 뿐이다.
실체(무심삼매)가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할 초기 즈음에, 많은 이들이 포기한다.
늘 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여기고 그 정도면 모든 것을 알고 되었다고 여기고 돌아 나온다. 그리고는 무수히 많은 이치들을 이야기 한다.
그러하게 많이 아는 이치가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치란 실체의 드러남이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위한 용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계속 가야하며 가다보면 개아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본래가 오롯이 모든 것을 드러내며 그러하게 저절로 마음이 모두 멸한다.
이러하게 오롯이 실체만 드러난, 전체인 것은 말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알려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말로 짓지 아니하면 또 어찌 방법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기에 대략의 이치와 겉모습을 그려본다.
허나 이러한 이치라는 것 또한 그저 표지판이다.
목적지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표지판은 필요가 없다.
삼매(三昧, Samadi, 禪定)
1. 일심삼매(一心三昧)와 무심삼매(無心三昧)
2. 무심삼매에서는 생각이 다 끊어진다(사라진다).
3. 내면에 쉬임 없이 흐르며, 무엇을 보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분석하는 생각을 그림을 통하여 알아 본다.
4. 견(見)과 관(觀)의 차이점. “본다” “보여진다” “비추인다” “봄”의 차이점
5. 텅빈삼매
6. 생각에서 “나”만 사라지면 된다.
7. 텅빈삼매와 외연삼매의 차이점
8. 물아일체(物我一體)부터 우아일체(宇我一體)까지
9. 삼매가 유지 되지 아니 하는 이유.
10. 본래마음이란
11. 탐진치(貪嗔癡)를 마음에서 빼어내야 한다.
12. 모든 종교와 마음공부의 공통점
13. 반야심경, 도덕경, 천부경 등이 밝히는 (실상과 현상)의 관계의 핵심
14. 붓다가 말씀하신 일심의 방법
15. 초선(初選)에서 이선 삼선을 거쳐서 사선(四禪)이 되는 방법
16. 텅빈삼매로부터 외연삼매의 궁극인 관(觀)까지의 상태
17. “눈”으로 풀어보는 무심의 상태. (본다) (보여진다) (허공에 멈춘다) (비추인다) (봄)
18. 안광(眼光)의 쏘아 내보냄, 안으로 안광을 거둠, 안광의 멈춤
19. 번뇌에서 일심을 거쳐서 무심이 되는 여정
삼매
삼매(三昧)에는 일심(一心)삼매와 무심(無心)삼매가 있다.
일심삼매란 생각이, 번뇌가 “사라지는” 상태이다.
무심삼매란 생각이, 번뇌가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하므로 본성(참나, 본마음)이 드러나는 상태이다.
또한 무심삼매는 무아상태이다.
일심삼매란
번뇌 또는 잡생각이 사라지며 오로지 일심(한 생각)만이 오롯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말로는 일심(한 생각)이라고 하여서 “하나”의 상태 같지만은 실은 두개의 상태가 일심 상태이다.
외적으로 본 다면은 “주시의 대상”만 있고 다른 생각은 다 사라진 상태이다.
이때 외적으로는 대상만 남은 듯 하나 사실은 여전히 그것을 “주시하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보는 자” 와 “보여지는 대상”의 두개가 있는 상태이며 그 외에는 다른 모든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일심상태이다.
내적으로는 누군가 “하나의 개념 혹은 뜻” 또는 “하나의 영상”만을 잡고 있고, 다른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면 이것 역시 일심삼매이다.
그러할 때 내적으로는 “하나의 대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자(주시자)가 있으므로 이것역시
두개만이 남아있고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을 때 일심삼매상태이다.
이러한 일심삼매일 때 다른 모든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대상과 주시자만 남았기 때문에 마치 대상과 하나가 된 상태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상태가 깊어지고 유지가 되어 더 고요하여지면 드디어 주시자는 사라지게 된다.
동시에 대상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은 온전히 사라지게 되어서 무심상태가 된다. 이러할 때 무아상태가 된다.
생각은 온전히 사라졌으나 깨어있음 또는 각성의 상태가 벌어진다.
요약한다면 일심이란 “주시자와 대상”의 두개의 분리된 상태 즉 자와 타(自他)의 상태이며 무심이란 자타가 사라진 상태이다.
헌데 무심(無心)삼매란 무엇인가?
과연 사람생각이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
또는 사람생각이 모두 사라졌을 때 기절이나 혼절 혹은 죽음이 아닐까?
모든 생각이 사라졌을 때, 죽거나 혼절하지 아니하고 깨어있다.
이러하게 깨어있을 때 아무 생각이 없다. 즉 무심이다.
과연 그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생각이 사라지면은 죽음이다.
혹은 생각이 사라졌는데 무엇인가 깨어있다면 그것 역시 생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생각이 아니라면 어찌 깨어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헌데 생각이 다 사라져도 무엇인가 깨어있다.
이것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평생을 생각으로만 살아온 우리는, 생각이 사라지면은 잠 아니면 기절일 뿐인 것이다.
허나 일심상태로 가서 더 나아가 일심마저 사라지면은 생각은 텅텅 비워진다.
그곳에는 공의 모양이나 또는 공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텅텅 비워진 공이 가이 없이 벌어지는 상태이다.
이것이 무심삼매의 시작이다.
이러할 때 그 깨어있음 또는 본성(本性)이 드러난다.
요약하면은
무심삼매란 무심이며 무아이다.
생각이 사라진 그 상태에서 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생각도 없다.
분별의 생각이 다 사라졌다.
허나 본성은 오롯이 깨어서 드러난다.
생각이란 기본단위가 주관과 객관이다.
컴퓨터가 존재하려면 0 과 1 이라는 두개의 숫자가 필요하다.
즉 컴퓨터는 이진법이다. 이것이 정보의 최소단위이다.
생각은 정보의 확대개념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 생각을 하려면 최소단위가 주관과 객관이다.
작용과 반작용 또는 “찧고 빻고”가 있어야 만이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최소한의 생각의 기본단위인데
이러하게 주시자와 대상만 남고 다른 생각은 다 사라졌을 때가 일심상태이다.
헌데 이러한 두개의 주객이 사라진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의 최소 기본단위가 주객인데, 이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은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나 그 두 가지의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을 때, 그 두개가 비롯한 본래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두개가 사라지고 무엇인가가 나타났으니, 이것을 “하나” 또는 “하나의 마음”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이 “하나”는 생각(마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곤란하다.
이유가 생각은 기본단위가 두개이며, 이 “하나”는 굳이 두개와 구분 지으려고 억지로 만든 이름일 뿐 무심삼매에서는 하나이니 무엇이니 하는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어있음 또는 각성이라고 굳이 이름 한다.
또는 순수의식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주관 과 객관으로 나뉘어 진 두개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순수의식”이라고 말할 뿐 그것은 의식(생각)의 주관과 객관이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이며 온전한 깨어있음 또는 각성상태이다.
이러하게 무심삼매가 되려면 어찌 하면 될까?
평소에 우리는 느끼든 아니 느끼든 수없는 번뇌(생각)들이 흐르고 있다.
일차로 큰 번뇌들은 무의식에 과거에 저장된 것이다.
이것들을 참회내지 여하한 방법으로 일단 많이 녹여낸다.
그러고 나면은 미래 번뇌가 있다.
참 이해로써 미래 번뇌를 많이 녹여낸다.
그러할 즈음 자동으로 사물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생각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애초에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에 따르는 부수적인 판단의 생각들이 수없이 동시적으로 떠오른다.
“자동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아래의 그림을 보자.
위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겠는지?
모른다면 다음 페이지를 보자.
자 이제 앞의 그림을 알겠는지?
앞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 앞의 그림만 보면서, 애초의 무슨 그림인지 몰랐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지 하여보자.
아마도 애초에 무슨 그림인지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기 힘이 들것이다.
아마도 자꾸만 카우보이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1. 잠시 보았는데도 이미 생각 속에서는 모든 분석이 끝났다.
분석이 끝이 났기 때문에 애초의 몰랐던 상태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2.그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의 데이터량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3.앞의 몰랐던 그림을 보다가 뒤의 카우보이 그림을 보고는 앞 그림을 아는 동안, 즉 분석하는 동안에 스스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다고 여겼는가? 아니면 분석 하는 줄도 모르고 무심히 분석이 끝나 버렸는가?
아마도 분석하는 줄도 모르고 분석이 끝났을 것이다.
즉 우리는 늘 미세하게 생각이 움직이는데도 그것을 눈치 채기 힘이 들 다는 것이다.
4.잠깐 동안 본 그림인데도, 아마도 이제 평생 앞의 그림을 보아도 뒤의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하다면 여적 살아오며 우리가 배워온 모든 것들 또는 관념들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무가 광합성을 하고 무엇을 하고 ........등등 “나무란 이러한 것이다”라고 배웠다면 나무를 볼 때마다 배웠던 생각들이 떠오를 것인가 떠오르지 아니할 것인가?
아마도 떠오를 것이다. 허나 스스로만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아니한다고 여길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것이 떠오르지 아니 한다면 그것이 “나무”인지 무엇인지 도저히 알길이 없다.
아무러한 생각이 없다면 단지 “색과 형상”만 “있는 그대로” 있게 된다. “색”이라는 것 역시 그저 경이롭게 선명하게 있을 뿐, 무슨 색인지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다.
“순일수련원”이라고 칠판에 크게 써놓고서는 머릿속에서 그 글씨를 안 읽어보려고 노력을 해보자.
아마도 순일수련원이라고 자꾸 읽혀 질것이다.
그 글씨를 아니 본다면 모를까 글씨를 정면에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면 대개로 그 단어들이 생각으로 자꾸 떠오를 것이다.
혹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글씨를 머릿속에서 안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볼 때는 “순일수련원”이라는 단어를 안 떠올렸으나, 지금 오히려 안 읽으려고 노력을 하는 바람에 자꾸 떠오를 뿐이다“
평소에 칠판의 그러한 글씨를 볼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여서 글씨가 안 보였거나, 또는 글씨를 보고 있었다면 그 글씨가 분명히 생각 속에 떠올랐으나 그저 지나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칠판의 글씨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냥 무늬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가 “나라는 것 밖”의 어떠한 대상을 볼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배워서 분석하여서 저장 된 대로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또한 “나라는 것 안”의 어떠한 대상을 주시하든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컴퓨터가 화면에 꽃 한 송이를 띄어 놓았을 때 화면에는 꽃만 보이지만 칩 속에는 수많은 컴퓨터 언어가 꽃 한 송이를 띄우기 위하여 조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꽃 한 송이를 보면서 그 꽃에 대하여 배우고 분석된 모든 정보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자동생각”이라고 아래에서부터 쓰겠다.
이러한 “움직이는 생각”들이 멈추었을 때 고요의 깨어있음이 벌어진다.
5.우리에겐 “틀”이 있다. 배운 대로의 틀이 만들어져 있다.
생각이 세모난 이에게 네모난 생각이나 관념이 들어오면 그것은 곧바로 세모로 바뀌어 진다. 이것이 반쪽견해이다. 한번 보았는데도 잊혀지지 아니하는데 수없이 배우고 분석되어진 생각들은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신념화”되어지며 이것이 시시비비를 야기하게 된다.
위에서 잠시 여정을 살펴보았다.
즉 여정은 다음과 같다.
큰 번뇌 사라지고
작은 번뇌 사라지고
선험적 자동생각 사라지면은
일심상태 거쳐서
무심상태 된다.
무심상태에서 참나가 드러난다.
위에서 무엇을 보든 자동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러하면 방법은 무엇이건 아니 보면 되지 않겠는가?
허나 눈을 감아보면 밖을 아니 본다는 것 뿐, 안의 수많은 번뇌들이 보인다.
또는 거친 마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갔다가 하며 뛰어다닌다.
이 마음을 어찌 사라지게 할 것인가?
눈이 본다는 행위는 생각(마음)과 연결되어있다.
생각은 한시도 사라져 본적이 없고, 또한 “생각이 나”라고 믿기 때문에 생각자체가 사라지면은 죽는 줄로 안다.
그러므로 생각은 한시라도 사라지길 원하지 아니하며 그러하기 때문에 눈(귀, 코, 입, 몸, 개념)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려고(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에 의하여 느낌을 받고, 개념들을 분석하려)한다.
생각(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눈”이다.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면 다시 그것을 통하여 자동생각을 하게 되고 또한 분석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사라지지 아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과 의식과 무의식은 일렬종대로 연결되어있다.
무의식의 경향성이 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의식이 눈을 움직이고 대상을 보게 하고는 다시 역순으로 그 본 것에 대한 자동분별생각이 다시 의식에 의하여 종합분석 되고 그것이 다시 무의식에 저장되는 순환의 구조이다.
이러하므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행위를 멈추지 아니 하는 한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마음(생각)을 멈추려면 일단 보는 행위를 내면으로 거두어 들여야 한다.
본다는 행위는 생각(마음)이 밖을 향한 표출이며 움직임이다.
그 시선을 거둔다는 것은 움직이는 생각(마음)을 거두는 것이다.
아기일 때 눈이 안 보인다. 점점 조리개가 형성되면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련의 이 과정은 생각(마음)이 점점 눈을 보게 하여서 대상들을 분석을 하게끔 하여서 생각이 점점 더 살아나고 움직이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기들이 조리개가 잘 조정이 되면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아기들은 안광(레이저빔)을 쏘아내서 사물에 정확하게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예로 들어보자.
육백만불 사나이가 멀리 있는 것을 눈으로 보려할 때, 눈에서 뚜두두두 하고서는 레이저빔 같은 것을 보려고 하는 대상까지 쏘아낸다. 그래야만 볼 수 있다.
즉 대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 대상까지 레이저빔(안광)을 쏘아야만이 볼 수가 있다.
연필을 1미터 앞에다 놓아두고서, 안광을 50센티만 쏘았거나 2미터를 쏘았다면 그 연필을 볼 수가 있을까 없을까?
연필은 안보이거나 뿌옇게 “보여지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즉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본다”와 "보여진다“는 다른 뜻이다.
안광이 대상에 딱 맞았을 때 “본다”이며
안광이 대상에 딱 아니 맞았을 때 그러므로 전체에 풀어졌을 때 “보여지는”상태가 된다.
또는 물질을 볼 때 “본다”이며 비물질을 볼 때 “보여진다”이다.
보는 것을 다 거두어 들였을 때 마음이 외부로 향하며 날뛰건 것이 내부로 향하여 진다.
그때 마음은 고요하여지며 생각은 사라져간다.
이러하게 내면으로 마음이(또는 안광이) 향하면 일심상태가 벌어진다.
그러고 내면으로 향한 마음이 사라지면 “가이없이 텅 빈” 고요만이 드러난다.
다 사라지면은 가이 없는 텅빈 고요만이 드러난다.
이때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텅빈삼매( 무심삼매)이다.
텅빈삼매는 최초로 본성(참나)이 드러난 것이다.
헌데
이러한 “텅빈삼매”는 유지가 아니 된다. 다시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한국불교에서는 오랜 생을 개아(個我)로 살아왔기 때문에 습기가 남은 것을 이유로 든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습기를 더 제거해야 한다.
또는 중국에서는 오랜 생을 개아로 살아왔기 때문에 병통이 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고 들었다.
듣기로 티벳 불교에서는 본래성품을 보기는 하였으나 이제부터 명상시작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때부터 참스승으로부터 텅빈삼매가 자주 유지 되게끔 또한 한번 들었을 때 삼매가 깊어지게끔 하는 방법을 배워서 더욱더 무심삼매가 깊어지게, 즉 더욱더 본성이 드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된 것이라고 들었다.
즉 위의 말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텅빈삼매가 되어도 본성이 다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무심삼매의 깊이는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논리로는 이해되지 아니하는 대목이다.
본성이 드러났으면 잠시 된 것이나 늘 되는 것이나 시간차이일 뿐이지 깊이가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텅빈무심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다.
스스로 텅빈삼매에 들면 그 순간 무심 무아라 우아일체가 된듯하다.
즉 생각으로 돌아 나오면 그 무심삼매 순간에는 전체였던 듯 하다.
허나 그 후 계속되는 뒤의 텅빈삼매에 의하여, 즉 깊이가 더하여지는 무심삼매에 의하여 점점 더 깨어있음이 또는 각성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삼매의 깊이를 스스로 어느 정도까지인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외부적으로는 시간이다.
깊이는 시간과 비례한다. 물론 내부적으로 그 깊이가 측정이 된다.
허나 스스로 그것을 알뿐 그것의 비교대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온 것인가 가르쳐줄 사람스승이 없다면 시간으로 비교함이 손쉬운 방법이다.
텅빈삼매에서 스스로 생각이 다 사라졌다고 느낄 뿐 미세한 생각이 움직이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의식에서의 움직임은 없다. 무의식에서의 미세한 움직임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더 사라졌는지 또는 고요하여졌는지가 텅빈삼매의 깊이의 차이다.
텅빈삼매라는 것이 이치와 방법(무심상태에 드는 것에 무슨 이치와 방법이 있느냐고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 이치와 방법이 반야심경에도 있다)을 알고 그 상태에 들었다면 그 후 그러한 방법으로 자주 그러한 상태에 들 수가 있다.
그러하다가 어느 날 방법 없이 저절로 들어지기 시작한다.
허나 어떠한 방법으로 무심삼매에 들기는 들었는데 그 후 잘 아니 되기 십상이다. 이치가 확연하지 아니하고 체계적인 삼학을 밟지 아니하였거나 삼매에서 일심의 상태를 확고히 다지지 아니하고 무심상태에 들어 보았을 때는 종종 이러하다.
속성인 방법에 의하여 텅빈삼매에 자주 들다 보면 또는 속성이 아닌 많은 세월을 하여서 텅빈삼매에 든 경우, 텅빈삼매에서 생각으로 돌아와도 텅빈삼매는 아니지만은 텅빈삼매 비슷한 상태가 어느 정도 유지된다.
즉 곧바로 생각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여진이 어느 정도 지속된다.
삼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러한 여진이 더 많은 시간동안 유지된다.
이러할 때 걸어 보아야한다. 물론 텅빈삼매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천천이 천천이 걸어질 것이다.
왜 이때 걷는가 하면은 걸으면서도 무심삼매상태에 드는 것을 체득하기 위하여서다.
삼매란
1. 앉아서 꼼짝 안하고 이완하여서 들게 되며
2.그 후에는 탈것(버스)등에 타서도 되며
3.움직이면서도 되며(운전하면서도 되며)
4.말하면서도 되게 된다.
위의 것이 여정이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텅빈삼매는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라고 하였다.
헌데 다시 생각하면서 말하면서 텅빈삼매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허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텅빈삼매보다 더 나아간 외연삼매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찌 말하면서도 무심상태일수가 있는지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다.
텅빈삼매가 깊어지면 외연삼매가 벌어진다.
둘 다 무심삼매이다.
허나 둘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텅빈삼매에서는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말 그대로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지는 상태이다.
허나 이 “공”은 “공”의 모양이 아니다. 그저 텅빔만 가이 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공”이라고 굳이 이름 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깊은 텅빈삼매에서 즉 나도 세상도 사라진 무아 무심상태에서 이제 눈을 세상을 향하여 든다. 그때 다시 세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세상은 전에 보던 그러한 세상이 아니다.
“맙소사! 이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이러하게 청정하고 이러하게 맑고 밝으며 깨끗하였단 말인가!”
물론 이러한 생각을 그 상태에서는 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 돌아 나오기 시작할 때에 느껴지는 소감이다.
장장엄한 극락(極樂), 정토(淨土)가 펼쳐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 예전의 산과 물이 아니다.
여정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세상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된다.
텅빈삼매에 들면 “산도 공이요 물도 공이로다”가 된다. 사실은 산이니 물이니 다 사라진다. 그러므로 공이다.
외연삼매에 들면 세상은 다시 드러나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된다.
허나 산이란 이름자도 물이란 이름자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색깔과 형태”로만이 청정하게 비추일 뿐이다.
이러한 상태는 육안으로 보는 즉 생각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르다.
생각으로 볼 때에는 세상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으로 꾸며서 보았을 뿐인 것이다.
그 생각이 다 사라진 무심(외연삼매)의 상태에 비추어지는 세상은 모두 맑고 밝게 기이하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이러한 외연삼매가 깊어지면 “봄”이 벌어진다. 이것이 진정한 관(觀)이다.
무심에서 눈을 들어 세상을 볼 때 말이 “본다고” 표현하였을 뿐 눈에는 “보는 자”가 없다. 즉 눈은 창(창문, 거울, 유리창)이 되었다. 그러할 때 이제 “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세상이 눈이라는 창에 비추어진다.
즉 생각으로는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요.
외연삼매상태에서는 “보는 것”이 아니며 거꾸로 사물들이 본래마음에 또는 눈이라는 유리창에 “비추어”진다. 이것이 바로 조견(照見)이다.
외연삼매가 깊어지면 조견을 넘어서게 되고 드디어 “비추이는 바탕”과 “비추이는 대상”이 없이 모두 하나 된 “봄”만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관”이다.
요약하면 무심이라는 티끌하나 없는 전체의 거울에, 세상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고 나아가서 “봄”만이 존재하게 된다.
텅빈삼매는 뒤에 더 깊어지는 고요, 지극한 평화, 온전한 각성상태, 청정심의 깊이에 의하여 파악된다.
외연삼매는 물아일체(物我一體)부터 우아일체(宇我一體)까지로 파악이 된다.
똑같은 외연삼매인데 어찌 물아일체부터 우아일체까지의 차등이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텅빈삼매가 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연삼매도 또한 깊어진다.
우아일체라고 하면은 마치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된 듯이 의미가 느껴진다.
허나 말을 차용하여 썼을 뿐 “나”가 “우주”와 하나 되는 방법은 없다.
무심삼매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은 “나, 개아”가 얼마나 더 사라졌느냐와 비례한다.
즉 “개아”가 온전히 사라진 상태가 “우아일체”이다.
본디의 “참나”가 “전체자”였던 것이다.
만약 본디의 참나가 전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나 마음공부는 전부 허망한 것이 될 것이다. 본디의 나가 원래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전체가 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본디의 나가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그 무엇이란 얻어야할 무엇이 된다.
그럴 때 “얻어야 하는 자”와 “얻어야할 무엇”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두개의 대립이며 둘 다는 부분자라는 것이 된다. 얻어야할 무엇이 전체가 아닌 “부분”이라면 얻어 보아야 언젠가는 없어질 허망한 무엇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없어질 무엇을 얻으려고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체자(全體自) 또는 무한자(無限自)가 되려는 것이라면 본디 우리가 그것이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하지 아니 하다면 애초에 그런 것이 성립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애초에 성립하지 아니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마음공부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는 무엇인가 전체가 있을 거라는 추론으로 이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하다면 애초에 우리가 전체였을 때만이 스스로 전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늘 전체자였고 전체자인데 이러한 전체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무엇인가?
바로 “개아”이다.
요만한 몸과 요만한 생각(마음)이 “나”라고 믿는 자체가 늘 “전체”임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몸이 “나”라고 믿는 자체가 바로 “나는 부분자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나”를 만드니 또한 수많은 “너”들이라는 부분자들이 생기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물아일체는 “나가 사라진 만큼” 벌어진 참나 상태이며, 우아일체란 “나가 온전히 사라져”서 드러난 본디의 전체 상태이다.
텅빈삼매와 외연삼매는 쌍수(雙修)로 가게 된다.
텅빈삼매가 깊어질수록 외연삼매의 물아일체부터 우아일체까지의 깊이가 깊어진다.
텅빈삼매란 텅 비워진 본래마음이 드러나며
외연삼매란 맑고 밝고 각성이 드러난다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둘은 쌍수(雙修)로 꼭지점까지 나아가게 된다.
둘이 쌍수로 잘 나아갈 때에 텅 비워지고 맑고 밝고 깨어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또는 텅 비워지고 명징(明澄)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으며
또는 텅 비워지고 밝고 뚜렷하다고 이야기 될 수도 있다.
우아일체 상태도 지속이 아니 된다.
그러므로 늘 무심삼매인 본연삼매(本然三昧)상태로 가게 된다.
본연삼매상태란 다른 말로 하면은 늘 개아가 사라진 상태이다.
두 길은 다른 듯 하며 같은 말이다.
전자는 삼매를 더욱더 들어서 가는 상태이며
후자는 개아를 더 소멸하여서 가려는 상태이다.
즉 삼매에 들 수 있을 때는 늘 삼매에 들어야 하며
생각으로 돌아오면 개아를 더 소멸하는 길로 간다는 이야기다.
둘은 다르지 아니한 것이 개아가 더 소멸하면 할수록 더 깊은 무심삼매에 들며 그러다가 다시 생각으로 돌아오면 많은 개아가 소멸한 것을 알게 되며, 미세하게 남은 개아를 더 소멸하게 된다.
이러하게 텅빈삼매와 외연삼매가 쌍수로서 꼭지점에 거의 다 달았을 때 여전히 온전히 청정한 본래의 마음이 아니 되게 하는, 미세한 개아 또는 미세한 상(想)이 남아있는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온전히 개아를 버리는 무아의 길이 아니고는 본래의 청정심이 될 방법이 없을 듯 하다.
무심삼매에도 여전히 미세한 상(相)이 있으며, 여전히 안주하려는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안주하려는 것은 머무르려는 것이다. 누가 머무르려 하는가?
바로 개아(個我)이다.
혜란 무엇인가?
혜란 깨어있음, 각성, 본성이다.
그러하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혜란 무심상태에서 드러나는 오로지 하나의 본래마음이며
지혜란 본래마음의 작용 또는 쓰임이다.
즉 지혜는 주관과 객관이 있어서 분별한다. 허나 시시비비가 없다.
즉 생각(마음)에서 “개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개아가 있는 생각(마음)은 지식이요
개아가 없는 생각(마음)은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제 늘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디 혜였던 우리가 이러한 혜 자체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개아로서는 무아(無我, 無個我)여야 한다.
즉 무아=혜, 무아=전체자, 절대유아 이다.
이러하게 무아이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몸과 생각이 “나”가 아니어야 한다.
이러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의 겉모습에 마음이 머무르지 아니하여야 하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여야 한다. 응당 머무는바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하게 마음이 안과 밖 어디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일어나는 대로 쓰여져야 한다.
열역학 제일법칙을 앞에서 이야기 한바 있다.
“에너지는 우주 내에서 스스로 생길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다만 형태만 변할 뿐이다.”
형태만 변한다는 말은 같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잡을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애초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게 할 방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머무를 수 없는 것을 잡거나 저항하여서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고통만 가져올 뿐이다.
번뇌란 바로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려 하는데서 기인한다.
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삼매에 계속 들려하는 것이 만약 아트만(atman)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면 또는 개아의 의식을 확장하여서 전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려운 길이라는 것이다.
즉 혜가 되기 위하여 무아라는 이치가 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무아는 혜이기 때문이다.
전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테두리가 없이 무한이다.
개아가 의식을 확장하여서 그 끝없는 무한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한 일이 될 것이다.
개아가 개아를 놓는 순간에 무한자일 것이다.
텅빈삼매와 외연삼매가 쌍수로써 깊어질 때에
가도 가도 늘 그러한 본연의 상태에 있을 수가 없다.
그때 즈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무아”이다.
삼매를 추구하는 것이 미세하게 남은 개아이기 때문에 늘 본래의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에 늘 청정한 마음상태로 있으려면, 그 남은 개아를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마음이란?
참나 또는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본래마음과 마음은 어떠한 관계인지 이야기 해본다.
본래마음-마음-몸 이러한 순서로 여기기도 하며, 본래마음이란 마음과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여기는 수가 왕왕이다.
본래마음과 마음은 같기도 하며 다르기도 하다.
이유는 마음을 떠나서, 또는 마음 없이는 본래마음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음에서 빼어낼 것을 다 빼어내면, 즉 탐진치를 다 빼어내면 그것이 본래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늘 두 가지를 오락가락한다. 그것이 주관과 객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두 가지로 구별된다. 대소(大小), 고저(高低), 장단(長短) 이 그것이다.
또한 마음도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처럼 늘 두 가지로 오락가락한다.
마음과 세상은 모두가 늘 두 가지가 서로 의존하여서, 조건적으로 존재한다.
마음이 지은 것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락가락 하는 것, 즉 불변(不變)이 아니고, 늘 무상(無常)하여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고통이다. 또는 “비교자체”가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이란 또한 다른 말로 갈등이기도 하다.
고통과 갈등은 같은 것이며 바로 번뇌라는 이야기다.
마음과 세상은 모두 번뇌이다.
헌데 오락가락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즉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 또는 나와 남의 비교를 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한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진 본래마음이다.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 마음은 오락가락하지 아니한다.
이러할 때 두개의 마음상태가 아닌, 오롯한 하나의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무심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빈병이란 병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저 병이 비어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며, 오락가락하던 두개의 마음, 즉 갈등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마음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무심인 텅빈삼매이다.
즉 오락가락하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요
그것이 모두 고요해진 것이 바로 무심이다.
이러하게 처음에는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음료수를 손을 들어서 입으로 까지 가져가서는 마신다.
이것은 분별하는 마음이냐 아니냐를 이야기 해보자.
모든 움직임은 분별이다. 몸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써서, 정보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 역시 움직이는 마음 이다.
그렇다면 무심상태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채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커피를 무심히 마신다면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움직임이었으므로 주관과 객관이 쓰여 졌으나 이것은 갈등이 없다.
허나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인이 들었으니 마시면 아니 좋을 텐데, 또는 많이 마시면 병 걸릴 터인데” 하고 생각 했다면 이것은 갈등이다.
즉 둘은 같은 커피를 마시는 “행위”였으며, 둘 다 마음을 분별하여서 몸과 손을 움직였으나, 전자는 “나”가 없었기에 갈등이 없었으며 후자는 커피를 마시면 “나”의 몸에 아니 좋을 것 이라고 여기는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되었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한다면
전자는 “한생각”만이 있었다.
허나 후자는 “한생각”에다가 다시 “한생각”을 더하였다.
즉 전자는 무심히 아무러한 생각 없이 그저 몸을 움직이는 분별생각만 하였다.
허나 후자는 그것에 더하여서 "몸에 아니 좋을 텐데“라는 시시비비가 더하여진 생각을 하였다.
전자는 행위자 없는 행위였으며
후자는 행위자 있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무심은 고요에서만이 무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무심은 움직임에서도 고요한 무심이 되었다. 두 번째 무심이 움직임에서도 고요가 된 것은 “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아”라는 이야기다.
전자는 한 생각만 있었다. 한 생각 자체도 두개의 정보이며 분별이다. 허나 무심에서 쓰는 “한 생각”은 번뇌가 아니다.
후자는 앞의 “한 생각”에 또 다른 시시비비의 “한 생각”을 내었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성자라는 사람들은 한 생각도 없이 늘 무심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제자가 질문을 던져오면 생각을 한다. 생각하지 아니 한다면 질문을 분석할 수가 없다. 질문 내용도 모른다.
질문 내용에 답을 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된다.
허나 그는 대답을 무심히 한다.
즉 대답하는 것은 한 생각이지만, 그 답이 틀렸는지 또는 그 대답에 대하여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 등등의 또 다른 번뇌 생각을 하지 아니 한다.
허나 우리는 답을 하건 무엇을 하건 또 다른 뒷생각을 내게 된다. 듣는 중에 여러 가지 답안을 이미 준비하며 또는 답을 하는 중에도 끝없이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즉 성자는 평소에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없다. 완전한 무심이다. 허나 생각을 써야 할 때가 되면 스스로 쓴다. 이것은 번뇌가 아니다. 또한 생각할 때에 생각만 존재하듯이, 그 생각에 대하여 다시 단죄하는 제2의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허나 무심이 아닌 이는, 평소에 스스로 원하지 아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잡생각들이 오고간다. 이것이 번뇌이다. 또한 스스로 오고가는 생각들에 또 다른 생각을 내어서 찧고 빻고 한다.
요약하면은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고나서는, 움직임에서도 “나”를 버리고 고요가 되는 여정이다.
즉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이요
움직임에도 고요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움직임에도 늘 고요한 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바로 “색”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처음부터 “무아(無我)”였으면 첫 번째 무심 아니 거치고, 바로 두 번째 무심이 될 터인데 왜 돌아가는가?
“나”라는 것은 워낙 뿌리가 깊기에, “무아”라고 머리로 알아도, 되기는 쉽지가 아니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고요의 첫 번째 무심(텅빈삼매), 즉 생각이 모두 끊어져 보아야 만이, 또한 그것이 자주 깊이 되어야만, “나라고 여기는 이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나”가 아닌가 보다 하고 여기게 된다.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자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탐진치하게 되면 그것이 갈등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번뇌가 사라지면은 마음은 청정하여진다.
마음에서 번뇌를 빼어 내면은 그것이 본래마음이요 참나이다.
허나 알기는 하나, 탐진치 빼어버리는 것이 쉽지가 아니하다.
“개아(個我)”가 있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탐진치 빼어내기가 그리 용이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붓다가 팔정도와 팔선정을 제시 하셨다.
즉 탐진치가 사라지면은 해탈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 방법으로는 팔정도와 팔선정을 하라고 이야기 하신 것이다.
탐진치를 없애면 되었지 팔정도와 팔선정을 왜 할까?
팔선정이란 말 그대로 팔삼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일심이 되고는 무심이 되는 방법이다.
탐진치 빼어내는데 왜 무심이 필요한가?
무심상태가 본래마음상태요, 그 상태에서만이 전체상태요, 전체에서만이 “개아”가 “나”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가왓기타에 “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말이 나온다.
“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으로 보인다.
"행위자”가 없는데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 행위자란 “개아”를 말함이다.
행위자가 없다는 것은 “개아”가 없다는 것이며, 바로 “무아”라는 말이 된다.
즉 “개아의 행위자”는 없으며, 전체자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
헌데 “전체(자)”는 행위자가 아니란 말인가?
“전체”란 말로 쓰려니 “전체자”라고 표현 하였을 뿐 “전체”에게는 “자”가 붙을 수가 없다.
그저 “전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붓다를 “전체자”라고 표현한다고 하여보자.
붓다는 “전체자”이실 것이 필경이다. 허나 “자”라는 표현대로 생각하여서, 붓다의 몸을 전체자라고 할 것인가? 붓다의 의식을 전체자라고 할 것인가?
그러하지 아니 할 것이며 붓다의 지혜, 깨어있음, 불성이 전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전체가 나투어진 상태의 마음과 몸이 있으니 즉 전체가 전체자의 모습으로 나툰 것이 있으니 전체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형상 없으나 온전한 본래마음이 되었으므로 “전체”요, 그 형상 없는 “전체”가 형상 있는 몸과 마음으로 나투어진 것(표현되어진 것)을 전체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주(主)는 전체(全體)요, 종(從)은 전체자(全體自)이다.
손가락과 몸 중에서 누가 주인이요 누가 종이냐 묻는 다면은
아마도 “몸”이 주인이요 “손가락”은 몸의 표현 또는 몸의 한부분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몸과 마음 중에서 누가 주인이냐고 굳이 나누어보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마음”이 주인이요 “몸”은 종이다. 또는 몸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될 것이다.
또는 마음과 몸은 같은 것이지만, 몸은 마음이 일어난 다음에 움직이므로 마음이 먼저라고도 이야기 할 것이다.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본래마음과 마음 중에서 누가 더 주인이냐고 굳이 묻는 다면은
아마도 “본래마음”이 주(主)요, 마음은 본래마음이 나툰 것이라고 이야기 될 것이다.
허나 마음이 본래마음이기는 하나, 그것에서 빼어낼 번뇌(갈등)들을 모두 빼어내지 아니 하였다면, 본래마음을 모르며 되지도 아니 하였을 것이므로 스스로 “개아”라고 여길 것이다.
허나 본래마음이 된 이는 스스로가 본래마음이요, 표현이 마음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즉 본래마음이 된 이는 “전체”요, 나투어진 표현인 “마음과 몸”이 “전체자”라고 이야기 할 것이며, 본래마음이 되지 아니한 이는 마음과 몸이 “나”요 그러므로 “개아”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본디 전체였다면 지금 즉시 전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개아”가 “나”라고 믿는 것을 놓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색과 관련되어져서 쓰여지는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색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너지=질량에서 에너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 있는 무엇이다.
다만 형태가 없을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보아도, 공=색 인데, 흔히 우리가 알듯이 색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헌데 어찌 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가 있을까?
그와 같이 “무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무아”는 “절대유아”인 것이다.
“개아”로서 “무아”가 되면 “전체”가 된다.
그러한 “전체”는 온전히 깨어있다.
허나 형체는 없다.
본래가 전체라면 그러하게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본래전체이니 전체가 되자는 것이다.
하나는 “개아는 나가 아니다”고 하는 방법이다.
둘 다 종래에는 전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종래에 다 되고나서도, 전체가 되겠다는 그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여전히 상(想)이며 개아 마음인 것이다.
무심삼매의 종래에 이르면 전체와의 합일 상태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전체라고 여긴다.
허나 누군가 전체가 되었다면 다시 전체라고 여길 것인가?
전체라고 여긴다는 것은 (전체)와 (전체라고 아는) 둘의 상태가 있다.
이것은 분리 상태이며 그러는 한 “전체”의 상태는 “전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모든 의도와 작(作)을 놓게 될 것이다.
그러하게 온전히 무아가 되었을 때 “전체”라는 “상(想)”이 사라질 것이다.
즉 온전히 “무아”일 때만이 “전체”가 드러날 것이다.
참나가 되는 방법일반은 주로 행복을 추구하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참나를 찾아가게 된다.
허나 무아의 길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다.
본디 참나라면 그것은 본디 청정한 지복이다.
본디 그것이라면 행복을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
지금의 무지에 의하여 생겨진 번뇌만 사라지면은 본디 청정 아니겠는가?
지금의 “괴로움”만 사라지면은 본디 청정 아니겠는가?
무지(無知)는 모든 고통의 제1원인이다. 그러한 무지는 “이 몸과 마음”이 “나”다고 여긴 것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즉 본래의 나는 “이 몸과 마음”이 아니며 전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