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39. 앗사뿌라 긴 경 [Mahāassapurasutt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앙가208)의 앗사뿌라라는 앙가 족의 성읍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08) 앙가(Aṅga)는 옛 인도 중원의 16국(Mahājanapada) 가운데 하나였다. 앙가는 마가다의 동쪽에 있었으며 짬빠(Camphā, 본서 「깐다라까 경」 (M51) §1 참조)가 수도였다. 짬빠는 현재 바갈뿌르 부근에 있는 Campānagara와 Campāpura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경에 언급되는 다른 앙가의 도시로는 밧디야(Bhaddiya, 『앙굿따라 니까야』제3권 「욱가하 경」 (A5:33) 등)와 본경과 다음 경에 나타나는 앗사뿌라(Assapura)가 있다.
주석서를 통해서 보면 앙가는 마히(Mahī) 강에 의해서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마히 강 북쪽에 있는 곳을 앙굿따라빠(Aṅguttarāpa, 즉 앙가(Aṅga)의 북쪽(uttara)에 있는 물(āpa=강) 주변(avidūra)의 장소)라 부르고 있다.(SnA.ii.437) 그래서 아빠나(Apaṇa)가 앙가의 아빠나로 나타나기도 하고, 본서 「뽀딸리야 경」 (M54) §1과 「메추라기 비유 경」(M66) §1과 본서 제3권「셀라 경」 (M92) §1에서는 모두 앙굿따라(Aṅguttarā-pa)의 아빠나로 나타나고 있다.(M54 §1의 주해 참조) 이러한 세 개의 경이 모두 아빠나에서 설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빠나는 앙가의 북쪽 지방 혹은 앙굿따라빠에서 가장 번창했던 곳이 분명하다.
2.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그대들을 '사문들, 사문들'이라고 인지한다.
그대들도 역시 '당신들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사문입니다.'라고 자칭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불리고 이와 같이 자칭하므로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사문으로 만들고 진정한 바라문209)으로 만드는 그런 법들210)을 받아들여 닦으리라. 그래서 우리의 호칭이 진실이 되고 우리가 자칭한 것이 사실이 될 것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의복, 음 식,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보시해준 분들에게 큰 결실과 큰 공덕이 생길 것이며, 우리의 이 출가가 헛되지 않아 결실을 맺고 향상 될 것이다.'라고.”
209) 본경 §23과 §24에서 정의하는 내용이 '진정한 사문'과 '진정한 바라문'일 것이다.
210) “'진정한 사문으로 만들고 진정한 바라문으로 만드는 그런 법들(ye dhammā samaṇakaraṇā ca brāhmaṇakaraṇā ca)'이란 그런 법을 받아들여 완성되면 악을 가라앉힌 사문(samita-pāpa-samaṇa)이 되게 하고, 악을 멀리 내 쫓아버린 바라문(bāhita-pāpa-brāhmaṇa)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사문 경」 (A3:81) §1에서 “비구들이여, 사문에게는 세 가지 사문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높은 계를 공부짓고[增上戒學] 높은 마음을 공부짓고[增上心學] 높은 통찰지를 공부짓는 것[增上慧學]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사문이 해야 할 일이다.”(A3:81)라고 사문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설하셨다. 그것도 사문이 해야 할 일이지만 여기서는 양심과 수치심(hir-ottappa) 등으로 가르침을 상세하게 설하시다.”(MA.ii.313)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법들이 진정한 사문으로 만들고 진정한 바라문으로 만드는가?
비구들이여,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211)을 지니리라.'라고 이와 같이 그대들은 공부지어야 한다.
211)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에 대해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양심(hirī)'이라한다. 이것은 부끄러움(lajjā)의 동의어이다.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에 두려워한다고 해서 '수치심(ottappa)'이라 한다. 이것은 악행에 대한 불안의 동의어이다. 양심은 부끄러움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하고, 수치심은 두려움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한다. 양심은 자기를 중히 여기고, 수치심은 타인을 중히 여긴다. 자신을 중히 여겨 양심상 악행을 버린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처럼, 타인을 중시 여겨 수치심으로 악행을 버린다. 마치 궁녀처럼. 이 두 가지 법은 세상의 보호자라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XIV.142)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부인 경」(A2:1:9)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강조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밝은 법이 있으니, 그것은 세상을 보호한다. 무엇이 둘인가? 양심과 수치심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러한 두 가지 밝은 법이 세상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어머니라고 혹은 이모, 외숙모, 스승의 부인, 존경 하는 분의 부인이라고 [존경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 이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마치 염소, 양, 닭, 돼지, 개, 자칼처럼.”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니고 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212)
212) 주석서는 『상윳따 니까야』제5권 「사문됨 경」1/2(S45:35~36)를 인용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사문됨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 … 바른 삼매 (즉 팔정도)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사문됨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사문됨의 결실인가?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 라한과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사문됨의 결실이라 한다.”(S45:35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사문됨의 목적(sāmaññattha)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 - 이를 일러 사문됨의 목적이라 한다.”(S45:36 §3)
본경 §§3~12에서 '출가의 목적'으로 옮긴 원어는 sāmaññattha인데 사문됨(sāmañña)의 목적(attha)으로 직역할 수 있다. 출가가 바로 사문이 되는 것이라서 사문됨을 '출가'로 의역하였다. S45:36에서는 '사문됨의 목적'으로 직역하였으며 『디가 니까야』제1권 「로힛짜 경」(D12) 16~18에서는 '출가생활의 목적'이라고 옮겼다.
한편 『디가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열반이 바로 출가생활의 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DA.iii.132)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출가생활(사문됨. sāmañña)을 성스러운 도(ariya-magga)라고 설명하고 목적(attha)을 성스러운 과(ariya-phala)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32)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몸의 행위를 청정하게 하고 분명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흠이 없고
절제하여 행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몸의 행위가 청정하다해서
결코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으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우리 몸의 행위는 청정하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말의 행위를 청정하게 하고 분명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흠이 없고 절제하여 행하리라. 그리고 말의 행위가 청정하다 해서 결코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으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행위를 청정하게 하고 분명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흠이 없고 절제하여 행하리라. 그리고 마음의 행위가 청정하다 해서 결코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으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생계를 청정하게 하고 분명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흠이 없고 절제하여 행하리라. 그리고 우리의 생계가 청정하다 해서 결코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으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 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고, 우리의 생계도 청정하다. 이만큼 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 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리라.
우리는 눈으로 형색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으리라.
만약 눈의 기능[眼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우리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 을 잘 보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리라.
우리는 귀로 소리를 들음에 … 코로 냄새를 맡음에 … 혀로 맛을 봄에 … 몸으로 감촉을 느낌에 … 마노[意]로 법을 지각함에 그 표상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으리라.
만약 마노의 기능[意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우리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보호하고,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 속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고, 우리의 생계도 청정하다. 감각기능들의 문도 보호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음식에 적당한 양을 아는 자가 되리라. 우리는 지혜롭게 숙고하면서 음식을 수용하리라. 그것은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치장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장식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단지 이 몸을 지탱하고 존속하고 잔인함을 쉬고 청정범행을 잘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된 느낌을 물리치고 새로운 느낌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잘 부양될 것이고 비난받을 일이 없이 편안하게 머물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 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고, 우리의 생계도 청정하다.
감각기능들의 문도 보호했고, 음식에 적당한 양도 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 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깨어있음에 전념하리라.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리라.
밤의 초경에도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리라.
한밤중에는 발에다 발을 포개어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워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마음에 잡도리하리라.
밤의 삼경에는 일어나서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 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고, 우리의 생계도 청정하다. 감각기능들의 문도 보호했고,
음식에 적당한 양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구족하리라.
나아갈 때도 돌아올 때도 [우리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하리라.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
법의(法衣) · 발우 · 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
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을 잘 지녔다. 몸의 행위도 청정하고, 말의 행위도 청정하고,
마음의 행위도 청정하고, 우리의 생계도 청정하다. 감각기능들의 문도 보호했고,
음식에 적당한 양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하고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도 구족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이만큼 실천했다. 우리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만큼으로 그대들은 만족해버릴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하고 공언하노라.
출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대들은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출가의 목적을 버리지 마라.”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더 해야 할 일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13.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얼굴 주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물고,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의 오점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물고,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악의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 와 혼침없이 머물고,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물고,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극복하여 머물고,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심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213)
213) 이 다섯 가지를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라 부른다.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설명은 본서 제1권 「마음챙김의 확립 경」 (M10) §36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글로는 냐나뽀니까(Nyānaponika) 스님이 지은 'The Five Mental Hindrances'가 있다. 이것은 고요한 소리에서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재연 스님 옮김)으로 옮겨서 출간하였다.
14.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빚을 내어 사업을 하는데 그가 사업에 성공하여
묵은 빚을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을 부양할 수 있는 여분의 재산도 생겼다고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빚을 내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 내가 사업에 성공하여 이제 묵은 빚을 다 청산하고 부인을 부양할 수 있는
여분의 재산도 생겼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심을 내고 기뻐한다. 214)
214)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의 장애는 '빚(iṇa)'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빚(iṇa)을 얻어 쓰고는 망해버린다. 그들에게서 빚을 갚으라는 말을 듣거나 거친 말을 듣거나 포박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하더라도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고 그저 모든 것을 참는다. 그가 참는 이유는 빚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가 감각적 욕망에 물들면 갈애로 인해 그 대상을 취한다. 그는 그 때문에 거친 말을 듣거나 포박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하더라도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고 그저 모든 것을 참는다. 그가 참는 이유는 감각적 욕망(kāmacchanda)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은 빚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MA.ii.318)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그의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 없었는데, 얼마 지난 뒤 병이 나아 음식을 소화시키면서 힘이 다시 생겨났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내가 전에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 달릴 때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나의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병이 나아 음식을 소화시키면서 힘도 다시 생겨났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심을 내고 기뻐한다.215)
215)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악의는 '병(roga)'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석서의 설명을 살펴보자.
“담즙으로 인해 병이 난 자(pitta-roga-atura)는 꿀이나 사탕 등을 얻어도 담즙으로 인한 병 때문에 그 맛을 알 수 없다. '쓰다, 쓰다'라고 하면서 토해내 버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의에 찬 마음(byāpanna-citta)은 이로움을 바라는 스승이나 은사가 가볍게 충고를 해도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당신들은 나를 너무 괴롭히는군요.'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환속해버린다. 마치 담즙으로 인해 병이 난 사람은 꿀이나 사탕 맛을 모르듯이, 성냄의 병에 걸린 사람은 禪의 행복 등으로 분류되는 가르침의 맛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악의(byāpada)는 병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MA.ii.318)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옥에 갇혔다가 얼마 뒤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석방되고
그의 재산도 축나지 않았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옥에 갇혔는데 지금은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석방되었고
나의 재산도 축나지 않았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심을 내고 기뻐한다.216)
216)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은 '감옥(bandhan-āgāra)'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석서의 비유를 살펴보자.
“축제일(nakkhatta-divasa)에 감옥(bandhan-āgāra)에 갇혀 있는 사람은 축제의 시작도 보지 못하고, 중간도 끝도 보지 못한다. 그가 그 다음날에 석방되어 '참으로 어제 축제는 흥겨웠어, 그 춤이며 그 노래라니.'라고 들어도 덧붙일 말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축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힌 비구는 여러 가지 법을 듣더라도 그 법문의 시작도 알지 못하고, 중간과 끝도 알지 못한다. 법문이 끝났을 때 '아 그 법문이었어, 그 논거며, 그 훌륭한 비유라니!'라고 그 법문에 대해 칭송하는 것을 들어도 덧붙일 말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해태와 혼침 때문에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해태와 혼침(thina-middha)은 감옥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MA.ii.318~319)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어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남에게 종속되어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없이 지내다가,
얼마 뒤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남에게 더 이상 종속되지 않아서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노예가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남에게 종속되어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없이 지냈는데,
지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남에게 더 이상 종속되지 않아서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심을 내고 기뻐한다.217)
217)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들뜸과 후회는 '노예(dāsabya)'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석서는 이렇게 비유를 들고 있다.
“하인(dāsa)은 비록 축제(nakkhatta)를 즐기고 있을 때라도 '여기 급한 일이 있으니 빨리 그곳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손발이나 코와 귀를 자를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빨리 그곳으로 간다. 그는 축제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즐길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남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을 잘 알지 못하는 자는 한거를 위해 숲 속에 들어가더라도 허용된 고기에 대해 허용되지 않은 고기라는 생각이 들어 한거를 버리고 계율을 청정히 하기 위해 율을 호지한 자를 찾는다. 그는 한거에서 오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들뜸과 후회는 감옥(bandhana-agāra)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MA.ii.319)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재물을 가지고 사막으로 길을 들었다가 얼마 뒤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사막을 건넜고 재산도 축나지 않았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재물을 가지고 사막으로 길을 들었는데 지금은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사막을 건넜고 재산도 축나지 않았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심을 내고 기뻐한다.218)
218)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의심은 '사막의 길(kantār-addhāna-magga)'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고 있다.
“사막 길에 들어선 사람이 강도들에 의해 사람들이 약탈을 당하거나 살해되는 것을 보고 나뭇가지 소리나 새 소리를 듣고도 강도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공포(ussaṅkita-parisaṅkita)에 떤다. 그는 나아가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회전하기도 하고 갔던 곳에서 되돌아가길 거듭한다. 그리하여 그는 어렵사리 안전한 곳에 이르기도 하고 혹은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 여덟 가지 경우에 의심(vicikicchā)이 생긴 다.(8가지 의심은 본서 제1권 「모든 번뇌 경」 (M2) §11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가 '그는 깨달은 분인가? 혹은 깨닫지 못한 분인가?'라고 의심할 때 확신을 가지고(adhimuccitvā) 믿음(saddhā)을 가질 수 없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도나 과를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막 길에 '강도가 있을 것이다, 혹은 강도가 없을 것이다.'라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염려하고 망연자실함은 안전한 곳에 이르는데 장애가 되듯이, 의심도 '그가 깨달은 분인가? 혹은 깨닫지 못 한 분인가?'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의심하고 염려하고 망연자실함은 성스러운 지위를 얻은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사막의 길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MA.ii.319)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기 안에서 아직 제거되지 않은 이들 다섯 가지 장애들을 빚처럼, 병처럼, 감옥처럼, 노예처럼, 사막 길처럼 본다.219)
그러나 자기 안에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들이 제거되었을 때 비구는 그것을
빚 없음처럼, 병 없음처럼, 감옥에서 석방된 것처럼, 자유인처럼, 안전한 곳에 이른 것처럼 본다.”
219) 세존께서는 제거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의 장애는 '빚(iṇa)'과 같고, 악의는 '병(roga)'과 같고, 해태와 혼침은 '감옥(bandhan-āgāra)'과 같고, 들뜸과 후회는 '노예(dāsabya)'와 같고, 의심은 '사막의 길(kantāraddhāna-magga)'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15.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오직 감각적 욕망들을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관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 [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는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케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노련한 때밀이나 조수가 금속 대야에 목욕 가루를 가득 담아놓고는 물을 알맞게 부어가며 계속 이기면 그 목욕 가루덩이에 물기가
젖어들고 스며들어 물기가 안팎으로 흠뻑 스며들 뿐,
그 덩이가 물기를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220)
220) 본경 §§15~18에 나타나는 네 가지 禪과 그 비유는 본서 제3권 「사꿀루다이 긴 경」(M77) §§25~28과 본서 제4권 「몸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9) §§18~21과 『디가 니까야』제1권 「사문과 경」 (D2) §§75~82『앙굿따라 니까야』제3권 「다섯 가지 구성요소 경」 (A5:28) §§2~9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케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16,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관찰[伺]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는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밑바닥에서 물이 샘솟는 호수가 있다 하자.
마침 그 호수에는 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서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남쪽에 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으며,
또 하늘에서 때때로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그 호수의 밑바닥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솟아올라 그 호수를 차 가운 물로 흠뻑 적시고 충만케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할 것이다. 그러면 온 호수의 어느 곳도 이 차가운 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17.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 · 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그를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는 희열이 사라진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희열이 사라진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피어 있는 호수에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들이 물속에서 생기고 자라서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속에 잠긴 채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는데,
차가운 물이 그 꽃들을 꼭대기에서 뿌리까지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든다면
그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어떤 부분도 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희열이 사라진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한다.
온몸 구석구석 희열이 사라진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18.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는 이 몸을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마음으로 속속들이 스며들게 하고서 앉아 있다. 온몸 구석구석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마음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머리까지 온몸에 하얀 천을 덮어쓰고 앉아 있다면
그의 몸 어느 부분도 하얀 천으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마음으로
속속들이 스며들게 하고서 앉아 있다.
온몸 구석구석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마음이 스며들지 않은 데가 없다.”
19.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숙명통]로 마음을 향 하게 한다.
그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시 여기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 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갔다가,
그곳에서 또 다른 마을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기 마을로 되돌아온다고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나는 그 마을에서 다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다시 우리 마을로 되돌아왔다.'라고, 221)
221) “이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pubbenivāsa-ñāṇa]의 비유에서 이처럼 그날 행한 행위가 분명한 것(pākaṭā)은 그날 갔던 마을 세 곳(gata-gāma-ttaya)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 숙명통을 얻음은 마치 마을 세 곳을 간 사람과 같고, 세 가지 존재(tayo bhavā)는 마을 세 곳과 같고, 비구가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기울이고 앉아있을 때 세 가지 존재에서 행한 행위들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마치 그 사람이 마을 세 곳에서 그날 행한 행위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MA.ii.323)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20.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천안통]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 고 말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 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말도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대문이 있는 두 집이 있는데,
눈 있는 어떤 사람이 그 가운데 서서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이집 저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222)
222) “이 비유에 의하면, 죽음과 재생연결(cuti-paṭisandhi)은 마치 대문이 있는 두 집과 같고, 신성한 눈]天眼]의 지혜[天眼通]를 얻음은 마치 눈 있는 사람과 같고, 신성한 눈[天眼]을 얻은 사람이 빛을 확장하여(alokaṃ vaḍḍhe tvā) 살펴볼 때 죽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마치 눈 있는 사람이 두 집 사이에 서서 볼 때 중생들이 두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다.” (MA.ii.324)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 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21.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누진통]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 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 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마치 산속 깊은 곳에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호수가 있는데,
눈 있는 어떤 사람이 그곳 둑에 서서 조개껍데기, 자갈, 조약돌,
움직이거나 가만히 서 있는 물고기 떼를 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 호수는 참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구나. 여기 이런 조개껍데기도 있고, 자갈도 있고,
조약돌도 있고, 물고기 떼도 있어 움직이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하는구나.'라고, 223)
223) “눈 있는 자가 둑에 서서 쳐다볼 때 조개껍데기, 자갈(sippi-sambuka) 등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면서 앉아있는 비구에게 네 가지 진리[四諦]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MA.ii. 324)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 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 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 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224)
224) 이처럼 본경도 4선-3명의 구조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짧은 경」 (M27) §26의 주해를 참조할 것.
22.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두고 사문이라고도 하고, 바라문 이라고도 하고,
목욕을 마친 자225)라고도 하고, 베다에 통달한 자라고도 하고,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226)라고도 하고, 성스러운 자라고도 하고, 아라한이라고도 한다.”
225) '목을 마친 자'로 옮긴 원어는 nahātaka(Sk. snātaka)인데 √snā(to bathe)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바라문들은 보통 8살에 스승을 정해서 그 문하에 들어가서 20살까지 12년 동안 자기 문파의 베다(본집, 제의서, 삼림서 우빠니샤드)와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운다. 이런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식을 하는데 요즘처럼 졸업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강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것으로 공부를 마친 것을 표시하였다. 그래서 '목욕을 마친 자'는 바로 바라문이 배워야 할 공부를 마친 자를 뜻한다. 그래서 이러 표현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디가 니까야』제2권 「마하고윈다 경」(D19) 37에서는 '기본과정을 마친 자'로,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사문 등의 경」 (A7:82) §1에서는 '공부를 마친 자'로 의역을 하였다. 이처럼 바라문 전통에서는 강에 목욕하는 의식은 중요하다. 그래서 『상윳따 니까야』제1권 「잘못된 길 경」(S1:58) {198}과 「순다리까 경」(S7:9) {646}과 「상가라와 경」 (S7:21) {705} 등 에서는 '물 없는 목욕(sināna anodaka)'이란 표현이 나타나며 「잘못된 길 경」 (S1:58)에서는 고행과 청정범행이 바로 물 없는 목욕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참다운 목욕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옷감의 비유 경」 (M7) §§18~20도 참조할 것.
226)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는 sottiya(Sk, śrotiy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오염원들을 흘려보냈기 때문에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라 한다. 말끔하게 씻었기 때문에, 제거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kilesānaṃ sutattā sottiyo, hoti, nissutattā apahatattāti attho).”(MA.ii.324)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산스끄리뜨 슈로뜨리야(śrotriya)는 슈루띠(śruti) 즉 베다에 통달한 자를 일컫는 말인데 이 단어는 √śru(to low)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래서 본 주석서에서도 sutatta(Sk. śrutatva, 흘려보냄)로 설명하고 있다. 역자는 산스끄리뜨의 의미를 살려 '슈루띠에 정통한 자'로 옮기고 ()안에 '깨끗한 자'라는 뜻을 넣어서 옮겼다.
23. “비구들이여, 어떻게227) 비구가 사문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가라앉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사문이다.”
227) 이 이하는 어떻게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불리고, 바라문 등이라고도 불리는지 어원적으로 설명한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을 가라앉혔기 때문에(samitāssa honti) '사문(samaṇa)'이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내쫓았기 때문에(bāhitāssa honti) '바라문(brāhmaṇa)'이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목욕하여 씻어냈기 때문에(nhātāssa honti) ‘목욕한 자 (nhātaka)'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통달했기 때문에(viditāssa honti) '베다에 통달한 자(vedagū)'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들었고, 흘려보냈기 때문에(nissutāssa honti) '깨끗한 자(sottiya)'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기 때문에(ārakāssa honti) '성스러운 자(ariya)'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기 때문에(ārakāssa honti) '아라한(arahan)'이라고 한다.”(MA.ii.324)
24.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바라문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 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내쫓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바라문이다.”
25.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목욕을 마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 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씻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목욕을 마친 자이다.”
26.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베다에 통달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통달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베다에 통달한 자이다.”
27.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흘려보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이다.”
28.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성스러운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성스러운 자이다.”
29.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아라한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 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멀리 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아라한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앗사뿌라 긴 경(M39)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