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스님 법문/사성제

사성제 9B (2011-2-9)

Daisy청량심 2023. 10. 10. 03:13

2011-2-9 사성제 9B - 순일 큰스님

불사 즉 불성으로 향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들거예요.
불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불성으로 향하는가!
그래서 초선이 깊어야 되요
첫번째 삼매만 깊으면 뭔가 불성을 알것 같다 드러나요 모르지만 알것 같다.

왜냐하면 초선이 뭐냐면 삼매가 불성의 무더기가 드러난다고 그러셨거든요.  이선은 이선에 해당하는 무더기가 드러난다고 그러셨거든요 부처님께서.
무더기는 궁극은 아닌데 그 삼매가 된 만큼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알 것 같거든요.  초선이 깊으면 그러니까 그 본성으로 향하는 거죠.  
긴가민가 하지만 알 것 같거든요.

초선에 들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무더기가 들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불사로 향한 다음에 향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향해지면은 거기에 확고하게 머물러라 그러셨어요
머무르면 해탈이다. 머물수 있다면 아까 디까니까에서 삼매가 되어서 삼매가 드러난 불성의 무더기로 계목을 100% 지키면 해탈이다 한것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겁니다. 이것이 제일 낮은 해탈인데 경전에 보면 이렇게 해탈한 분들이 스스로 의문을 갖고 있어요.  돌아가실 때 부처님 저 해탈 맞나요? 물어보고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거꾸로 그대는 해로운법이 있는가, 없는가? 저는 없습니다. 계목을 다 잘 지키는가? 다 잘 지킵니다. 청정하지 않은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 없습니다 해탈 맞다 이렇게 설명해 주세요.  왜 제일 낮은 해탈한 분들이 왜 자기가 청정하고 행복스럽긴 한데 왜 죽는 입장에 자기가 해탈 맞는가 긴가 민가한가 이해되세요?

잠에서 깨어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일 낮은 단계 해탈은 이렇게 잠 속에서 깨어있지 못해요. 왜냐하면요 지금 이 뒤에 쭉 가면 저번에 법만자였는데 삼매가 몇선까지 였었죠 대념처경에서. 대념처경에 여덟개 삼매 아니에요
사선까지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사선만으로는 삼매가 5,6,7,8삼매가 없기 때문에 부족하기 때문에  잠에서 못 깨어 있어요.
지금 잠에서 깨어 있는 경지는 몸 관찰에서도 제일 뒷부분에 있죠.  
5, 6, 7, 8 삼매가 되어야 잠에서 깨어 있어요 사선가지고는 안되요.
그래서 사선으로는 삼매가 부족하기 때문에 별도의 위빠사나 방법을 부처님께서 설해 주시는 거예요.
즉 잠에서 깨어 있을려면 삼매 사선은 다 되어야 되고요 그와 더불어 위빠사나를 다 해 주어야 되요.  번외로 나가기 전에 그래서 아까 제일 낮은 단계 慧解脫 하면은 아까 삼매가 초선만 해도 해탈할 수 있다고 했어요.
초선만 안되면 이선에서 이선에서 안되면 삼선에서 해라.

즉, 제일 낮은 단계 해탈은 삼매가 꼭 필요하긴 필요한데 왜냐면 본성의 무더기 조금이라도 꼭 드러나야 되니까 삼매를 네가지만 해야 되고 이런것도 없어요.  초선만 해도 되고 계목 100% 되면 제일 낮은 단계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탈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데 이렇게 해탈하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 있지 못하니까 진짜 불성이 드러난 건가 스스로 의문이 드는거죠
그러나 그분이 왜 해탈이냐 하면 계목이 100% 청정하기 때문에 살아서는 공부가 덜 된거죠 다른 아라한들 보다 덜 됐지만 죽어서는 돌아올 근거가 없어요.  돌아올 욕망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로 편재가 되겠죠.

죽어서 녹아들겠죠 궁극으로.  살아서는 의문이 좀 들지만은 자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만 아니라면 제일 낮은 단계의 경우만 아니라면 높은 단계라면은 잠에서 깨어있는 것은 아까 [우파니샤드]에도 있고 여러종교에 있듯이 잠에서 깨어 있는 경지가 벌어지는 거예요.

[라마나 마하리쉬님] 있었죠
1951년에 돌아가셨는데 약 60여년 전에 돌아가셨죠. 그 분은 이랬었죠
나는 누구인가? 를 했든 분인데 오랜세월 동안 “나는 뭐가 아니다”
나는 비가 아니다 나는 몸이 아니다 나는 느낌이 아니다
이렇게 한 것을 보시면은 부처님경에 합당하게 공부했든거죠
아무것도 모르시면서도.

부처님께서 “오온은 실체가 아니다” 한 것을 스스로 했든거죠.  
이런것은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했어요
그분이 사성제를 모르면서 불교도 아닌데 결국은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모르고 해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셨듯이
그 분은 벽지불이기 때문에 혼자 거기까지 도달한 거예요.  
라마나 마하리쉬님이 불교 본적도 없으면서 이거 다 괴로움이다라고 했어요 이 세상 다 마야다 라고 했고 아니올시다 라고 했고 개인만이 아니라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를
부처님 말씀을 12연기를 본인식으로 굳이 이야기 하면 11연기를 이야기 했어요.  라마나 마하리쉬님이 불교 모르면서요
그러니 부처님께서 해탈한 사람에게는 다 똑같이 이것이 일어나다가 맞는 거예요.  여기서는 긴 얘기라 못하겠지만 양평선원에 얇은 책이 있는데 마하리쉬님이 그림으로 그려갔고 설명한 것이 있어요.  
바깥으로 다섯가지의 느낌이 나가고 여섯가지가 나가면은 우리 부처님의 안 이 비 설 신 의와 같애요. 세상의 일어남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에고다

에고는(ego)는 아뢰야식이에요. 영어(ego)는 우리식으로 에고스럽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이드(id)가 의식이고 ego가 무의식이에요.  
영어로 쓰는 용어가 Superego하면 거기서는 본성 비슷하게 쓰는 모양인데 거 ego가 아뢰야식 같은건데 걸로 들어가면은 저건데 그러면서 그 분은 아뢰야식이 끝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안에 문이 하나 막혀 있고 인제 그게 본인 표현인데 이제 거기서부터 무소유처 비상비비상 이런걸 거예요.
그 안에 빛이 있다 빛으로 그려냈죠 본인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표시만 관습적인 언어로 한 거예요.
그게 12연기를 그림으로 본인이 그렇게 한 거에요.  

그렇게 설명을 못하니까 세상의 소멸도 얘기 했어요.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 부처님 말씀처럼 그래서 뭔 얘기 할려고 했나하면 제가 그 분은 팔정도 몰랐죠 몰랐는데도 삼매를 열심히 해갔고 일심삼매 무심삼매 다 지나치긴 했어요 사실입니다.

왜냐면 본인이 나중에 하다보니까 누구는 아니요 오온은 아니요
오랜세월 하다보니까 끝없이 나만 남더라 나 나 나 일여죠 일심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 다음에 공백상태가 오더라 무심이죠.
공무변처 이것도 깨달음이 아니다.  그 다음에 깨어있음이 벌어지더라
꿈 없는 깊은 잠에서 깨어있고 그 넘어까지 벌어지더라
이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 사성제 모르면서 사성제를 갔어요.

어디까지 경지인지 알수가 없지만 아무튼 해탈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는 없는데 이 해탈의 경지들이 좀 있으니까 양면을 지었을지 많이 지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할려는 얘기는 이겁니다.
그런데 근자에 1951년 돌아가셨으면 근자에 사실은  삼매가 깊은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이분 혼자죠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런 경우 잠에서 깨어 있다는 거죠

대승기신론에 보면 십지보살이 있고 십지보살을 넘으면 부처님 경지다
라고 나와 있죠. 거기에 칠지보살이 꿈에서 깨어있는 경지죠.  
팔지, 구지, 십지가 숙면일여의 경지에요
그런데 팔지, 구지, 십지가 왜 숙면일여의 경지가 세가지나 있죠.
거기서부터 경지가 많기 때문이에요.

잠에서 깨어 있는거가[뽓타빠다경]에 계시다시피 그냥 깨어있는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것이 깊어지면은 그 형체도 없는 깨어있음이 편재하기 시작해요.  형체가 없으면 전체 아닙니까 아직 궁극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형체 없는 것도 여러가지 경지가 있는 거예요
공무변처도 형체없고 무소유처도 형체없고 다 형체 없는데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표상없는 삼매도 형체없고
상수멸도 형체없고 상수멸만이 궁극이라고 그러셨잖아요 열반이라고
이것처럼 더 편재를 해 가는 거죠.

잠에서 깨어있는 경지도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팔지보살, 구지보살, 십지보살이 전부다 숙면일여데 왜 차이가 있는건 안 쓰 있죠
그것이 경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만 넘으서면 부처님이시다
라고 했든거죠 자 돌아옵니다  잠들면서 분명히 알면서 행하고

잠에서 깨어있지 못 할때 에요.  
잠에 깨어 있기 전에 경지들이 어떤 경지가 있나하면요
잠들면서 분명히 알고 아침에 깨면서 분명히 알고 말씀 계시잖아요.
크게 통론으로 계시는고 그 전에 경지들로 공부가 됐다는 과정 아래서

꿈에서 깨어있는 경지를 지나게 되면 꿈에서 깨어있는 경지와
잠에서 깨어있는 경지 사이에 경지들이 있는데요
꿈에서 깨어있는 경지는 물론 세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흔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몽중일여데요
몽중일여는 꿈에서 깨어있는 경지중에서 높은경지 중에 하나에요.
그러니까 꿈에서 깨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 우리가 흔히 꾸는 꿈들을
다 지켜보는 경지가 있어요. 그것이 꿈에서 제일 낮은 경지에요.
깨어있는 것 중에 다 지켜보면 꿈 안에서 마음들을 다 알아요.

그것 말고 높은 경지가 뭐가 있냐하면 꿈에서 다 알으켜주는 경지와
일여상태의 경지가 있어요.  일여상태는 일심삼매죠.
꿈에서 아무것도 없어요 수행주제만 있어요  
꿈에서 그래 제가 꿈이라고 한 이유가 그것을 어떤 사람이 숙면일여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에요. 저는 몽중일여라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잠속에 영상이 하나라도 있으면 꿈이죠 .
꼭 영화가 2시간짜리 상영이 되어야지만 영화가 아니고 2시간 내내 한가지 그림이 딱 있어도 영화이죠 꿈이죠 그래서 꿈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꿈에서 일여상태가 되면 하나의 수행주제만 일심이면 수행주제
천안삼매면 강물이라든지 바다라든지 물만 이렇게 하고 삼매상태가 되요.  

꿈속에 삼매상태가 되면 막 황홀하죠.
일여상태가 황홀하죠 황홀하지 않으면 좀 이상한 거예요.
하나만 나오게 되면 무조건 단일한 상태는 희열이 있기 때문에 대낮이 됐건 꿈이 됐건 단일한 마음의 상태에 수행주제 하나만 있다면 단일하기 때문에 억수로 희열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 있는것 중에 좋은게 뭐냐 하면  
다 알으켜 줍니다. 깨달음에 대해서도 왠 갖것 다 알으켜 줍니다.
맨 처음에는 분별지로 알으켜 줍니다.
깨달음에 관련해서 나중에는 영상지로 알으켜 줍니다.
분별지로 알으켜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경전 한 권을 분별지로 알으켜 줄라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영상으로는 한번에 1초안에 우두둑 보여질 수 있어요.  
지금 우주 사진 한 캇이 아니에요.

예를들면 경전에 찰나에 91겁도 보시고 그러잖아요 낱낱이
전생에 뭐였고 그전생에 뭐였고  이렇게 보는것이 시간으로 불가한 그잖아요. 한 우주만 볼려고도 불가하잖아요 한 개 우주만도 이게 영상지로  가능해요

거 비유컨대
제가 방두자에 썼지만 죽을때 자기 살아온 삶을 저는 그때 21살이었지만 80살 이었더래도 마찬가지에요. 1초안에 낱낱이 다 보거든요.
그와 같아요 80살만 낱낱이 보는것이 아니라 한 우주를 낱낱이 다 기억에서부터 끝까지를 1초안에 보는 거예요.  한 우주가 뭐예요. 10만개 우주도 보시잖아요 1초안에 찰나 그렇게 점점 깊이 알으켜줘요

분별지로부터 영상으로 옮겨가면서 알려줘요. 그런데 못갖고 나와요
의식은 바이러스 수준도 안되는 거예요 대낮의 의식은
그런데 무의식은 참 광범위해요. 그런데 공부될수록 광범위하죠
말도 못할 정도로 광범위한거죠. 그런데 포기하죠
그런데 자기걸로 되가고 있어요 체화가 되가고 있어요 천천히
그래서 그때는 별짓 다 해요 그 정도 되면 재미있어갔고 8시간동안 예를들면 .
한 몇십번을 깨어요. 깨어요 갖고 나와야지 하면 못 갖고 나오죠.
도로 감으면 그 정도되면 감으면 바로 들어가요 또 그상태로
그러면 막 또 굴려요 굴린다는 것은 되새김짓을 한다는 거죠
갖고 나갈려고 못 갖고 나가요.  
또 뜨면 몇십번 오가면은 해도 못 갖고 나와요.  그때 포기하는 거죠
좀전에 몇십번을 했잖아요 그렇게 하고 못갖고 나오나 보다하고 8시간을 굴려요 일부러 그리고 한번만 딱 더해요 일부러 못갖고 나와요   그러니까 대낮에 의식과 꿈의 의식은 어차피 연결성은 없다고 했지만
공부에 관련된 꿈에서 가르쳐 준것은 더 연결성이 없어요. 너무나 광대한  거기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러니 그런걸 생각하면 아뢰야식은 참 의식보다 광대한 거예요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거예요.
하긴 그러니까 91만개 우주 10만개 우주의 살은 생을 낱낱이 다 기억되어 있고 그러는 거죠 너무 광대한 거예요.

[붓다의 길인가]
거기에 이것은 경전은 아닌데 부처님께 제자가 이뢰야식 좀 알려주십시오  하니까 면면히 흐르는 폭포와 같이 광대해서 그대가 스스로 알아 보아라
하고 마세요 설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거기는 참 광대한 겁니다
아 의식은 너무 보잘것 없다 우리 대낮의 마음은 말이죠
사람과 원숭이 비유정도가 안되요 굳이 비유하자면
무의식은 신이라면 사람이거나 의식은 바이러스 수준 미생물

다시돌아오면
그거 좋죠 가르쳐주는것 가르켜줘요 다 끝없이 못갖고 나오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은 알게 되요 체화되고 있구나

아~ 그리고 꿈중에 하나더 좋은것 있죠
꿈이라기보다 애초에 마음의 씨앗이 올라오는것이 보이죠
씨앗이 영상의 씨앗으로 올라오죠 영상이 아닙니다.
표현할 길이 없이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아직 영상 자체가 못된 영상의 씨앗같은 것이 올라와서
영상으로 빠빤자되고 확장이 되고 거기에 개념들이 붙기 시작하죠.
이름이 붙고 언어가 생기고 개념들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확장이 되면
그러면 마음이 된거에요 .
그때서야 마음도 다시 역으로 돌아가야되요
역으로 돌아갈려면 분별을 해서는 안되요

지금 부처님께서 몸관찰 하라고 하신 이유가 영상관찰 하라는 얘기에요.
분별로부터 거꾸러 아까 촛불 이름이 없어지고 길고 짧은것이 없어지고
이렇게 영상만 남듯이 공부가 더 되어 가는 과정은 나중에 마음관찰도
자기분별 관찰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관찰이 잘 된 사람은 뒤에 마음이 나오지만 마음이 관찰이 아니라
마음의 영상이 관찰이 되요.  
애초에 영상만 있고 거기다 이름 붙인거 잖아요.

여러분이 제 얘기를 이해하시려면 단어를 이해 못해요 개념으로
제 얘기를 이해하는 저변에는 스스로 아시든 모르시든 영상이 다 흐르고 있는 거예요 영상이 없으면 우리가 아이들이 사과란 영상을 갖고 사과란 단어로 만든거거든요 사람이 그러면 사과 그림보고 단어로 사과 그랬잖아요 미국애들은 애플(apple) 지금 우리가 미국애들 보고 사과하면 모르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나는 사과를 먹었다 할때에는 나가 나오고 영상이 사과를 먹는 영상이 나오고 계신거예요.  그래야만 이해하지 문장으로 나는 사과를 먹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100% 없는 거예요.

우리는 분별이 너무 많아 지다보니까 난 그런 영상만 읽었어 분별로 이해했어 그러는거지 분별로 이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는 사과를 먹었어 하면 영상이 잘 안 떠올라요.  
분별로만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들어가야 되요.
그래 영상관찰 하는 공부가 우리가 삼매에서도 그렇고 위빠사나에서는 움직임이 영상인데 분별을 관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분별만 키우는 겁니다.  지금 몸의 영상을 관찰하는 거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 꿈에서 제가 뭐가 영상의 씨앗이 올라옵니다.  
영상이 아니라 영상으로 확장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 개념들이 생기는 거죠 그걸 역순으로 들어가야 되는건데 그런데 꿈에서 깨어있으면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있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꿈에서 깨어있는 것과 잠에서 깨있기 전의 사이에 거 자기가 깨어있는 줄은 몰라요 자기가 경지가 낮아서 근데 말이죠 잠에서 꿈은 이미 깨어 있는 경지가 됐다고 그랬잖아요 그것 넘어가면 꿈이 아닌 경우에 자기 안 깨어 있죠
꿈 아닌 깊은 잠에는 안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깨어있다는걸 알게되요.  

왜냐면 과학적으로 뇌파라고 하죠.  꼭 뇌파의 형태는 아닌데 그렇게 씨~씨 뇌파가 과학에서 말하는 베타파(β) 이렇게 부드러운데 과학의 씨티파는 뭘까요 아직 꿈은 아니에요 가수면 상태인데 꿈이 시작되면 다시 베타파(β)가 되요.  꿈은 대낮이나 똑 같에요 뇌파가 복잡해져요 그런데 꿈 안꿀때는 이렇게 느슨하단 말이에요. 이 느슨한 것도 생각이에요.
비록 잠꼬대 같은 생각 잠꼬대 보다 더 약한생각 아직 제되로 된 영화가 못된 꿈은 제대로 된 영화가 된 거예요.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작아서 모르는 거지
그런데 좀전에 얘기했는것이 뭐냐면 꿈에서 깨어있다는 것을 넘어가게 되면 그게 보여요 자기는 깨어있지 안 했는줄 알았는데 깨어있지 못하는 상태로 잠들었는데 전면적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씨씨 움직임이 가끔 보여요
그래서 그거에 의해서만 내가 자고 있는줄 알았는데 뭔가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내가 깨어 있구나 이정도로 안다는 거예요

근데 그런것도 있고 혹은 샹카라들 그것보다 더 많이 뇌파라고 이야기 하죠
현대용어가 그거니까 더 쪼여가며 뇌파들이 움직이는 것들이 보여요.  
실지로 뇌파라긴 보다 의도들인데 그런게 보이죠.
또는 잠에서 깨어 있다가 잠에서 깨어있을때 아무것도 없어요
어둠도 없고 빛도 없어요 그런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니에요
그건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니요 그것은 오직 깨어있음만 이에요.
자기도 없고 세상도 없어요 오직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오직 깨어있는
각성만 있을뿐인데 밖에서 어떤일이 벌어지죠
만약에 누가 옆에 얘기가 자꾸 떨어진다든지 침대밑으로
밖에서 갑자기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든지
그러면 바깥 상황이 다 보여요

그 전까지는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데 상황이 벌어지면 눈 안뜨고 있는데 다 보인다 이거죠  다 보이는것은 그렇다고 치고
원래 자고 있는 사람이 콜린인가 뭔가 나와서 척추가 강제상태이기 때문에 깨어나면 몸을 바로 못 움직여요 과학적인 얘기입니다.
깨어나면 못 움직이기 때문에 가위 눌린 사람이 이런 거예요.  
막 움직이고 싶은데 못 움직이는거 그런 상태인거예요 척추가 강제 상태.
꿈에 들어갈때구나 잠에서 가능하겠구나 이건 제가 앞뒤가 안맞는 말을 했는데 만약 옆에서 애기가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떨어지는게 보이게
즉각 1초도 안되는 사이잖아요 1초도 안되게 받아내요 반응을 해갖고...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깨어있을때는 깨어있음만 있고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데 밖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심안으로 눈 안뜬거니까 완전히 잠들어 버린거니까 눈 자체도 기능을 못하니까 전체 상황이 다 보인다는 거예요.  이제 이렇게 되면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있게 되요.  

그런데 잠에서 깨어있는 것이 깊어지면은
스스로 형체도 없고 빛도 어둠도 아닌데도 지복입니다.
이루말 할 수 없는 지복인데 깨어있음이 있고 지복인데
그것이 편재하기 시작해요.  더 넓게 이해가 안 되는것 모순이죠
1) 형체 없는데 어떻게 더 가능한가?
2) 각성은 형체 없더라도 옆에 막대기라도 있어야 더 커지는 것은 알지  표시라도 스스로 불멸인 줄 압니다.
 

그것이 경전에 계시죠 그 말씀이 [뽓타빠다경]에 계십니다
여기에 이르면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해서 구경에 이르른다 이 말씀이 계십니다
궁금하신 분은 나중에 보시고요 뽓타빠다경

자 그 다음에 말하면서인데요
방어할 두려움없는 자유에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삼매 아니면 깨달음에 있을것 같네요
말하면서도 무심이다 이렇게 써 놓은게 있습니다.  책에는 이렇게 썼죠.
모순이다 말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하다는 거기 때문에 말하면서 무심일수가 없는데 그 상태에서는 그렇게 밖에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썼습니다 책에.  말한다는 것이 무심일 수가 없죠.  마음이 일어나는 거니까요 그런데 본인은 무심이다라고 여겨요.  바로 이것이 뭐냐하면 저는 무심인줄 알았어요.  모순이다라고 썼어요  모순인데 그렇게 밖에 안된다 라고 했는데 경에 나중에 계셨는것을 보았습니다.  아까 있어든 그 대목인데

“나는 평소에 아무 생각은 없다 무심인데 승가를 조건으로 가르킬 때에만 오직 반야속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반야만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유지하고 마음을 소멸시킨” 라고 하셨잖아요 각성만 있는 거예요.  각성만 있고 마음이 없을 때에 마음을 일으켜 쓴거죠.
그것써고자 한것만 그런데 본인은 무심이라고 느껴요.
지금 말하면서 깨어있다가 그겁니다.  말하면서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그러니까 혹시 우리도 말하면서 잘 관찰하고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앞에 잠들면서 잠에 깨면서 그 경지를 넘어선 것입니다
여기 말하면서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에는 무심에서 말한다 이런 상태에요
나가 없는 상태죠 그리고 뒤에 침묵하면서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라는 것은 제가 모르는 얘기에요.  모르는 얘긴데 추론컨대 상수멸 말씀하시는거 상수멸은 아니겠구나 위빠사나 저기니까 그냥 단순히 침묵한다는 것이 아니죠
침묵이면 전부다 삼매죠 침묵하는데 알고 있다라는 것은 깨어서 침묵을 지켜본다는 거죠.  대낮에도 잠에서도 깨어있는 경지를 지나서 대낮에 어떠한 뭘 하더라도 다 초월된 깨어있는 상태이시다 이렇게 보여 집니다..
단순히 삼매다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단순히 삼매다 하면 제가 모르는 얘기다 안 했습니다 잘 아는 얘기다 했을 겁니다.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입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여기서 중략된 것은 앞서서 얘기했지만 그에게 몸이 있구나 라고 할때까지 이런 말씀이 계시죠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입니다.  부처님께서 다른 경전에서 이런 말씀 계시죠.  
상무멸도 나는 지복이라고 말한다.  
느낌이 어느정도 멸한것 마저도 지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 하셨죠.
상수멸은 제가 모르고 모르는데 각각의 삼매에 갈수록 각각의 지복은 상상 불허입니다.  거 갈수록 전부다 이럴수가 있나 오 맙소사 오 이럴수가 상상 불허요 어마어마한 것이요 참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이런겁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기대해도 좋다 이러셨죠.

그런데 분명히 불성이 안팎 없이 편재해서 이름이야 불성이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좋지만 반야죠.  다 보고 다 아는 반야가 불성이 편재해서 있다.  이 상에세계 이 영화의세계 이 산냐의세계보다 이면에 본질적으로 영화가 있을려면 스크린이 있어야 되듯이 눈에 안 보이더래도 스크린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나 스크린은 죽어 있는 거고 반야는 살아서 다 보고 다 아는데 살았다는 의미 말이죠 이상합니다 존재 같아 갔고 존재는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 존재하는 것들이 이면에 다 알고 다 보는 반야가 있다
그 반야로 향해 가는 길이 반야로 향해서 못가더라도 높은세계로 계속 갈 것이고 지고이고 궁극의 반야는 이 모든 세계가 되지 않을 정도로 궁극아니겠습니까 예 저는 사성제를 놓치 마시고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거예요.  만약 못 간다면 이런 얘기하면 부처님께 죄받을 일입니다만 못 간다면 나날이 높아져서 향상일로 해서 가면 되는거죠.
여러분 법문듣기가 참 훌륭한 겁니다.
해탈하지 못할 경우는 전부다 경전을 봐야 됩니다.  
저도 경전을 한동안 안 보잖아요 그러면 잘 안가져요 경전을 보면 자꾸 말씀을 법을 보면 잘 가져요 그러니 한번 보세요 그당시 공부가 다 되신분들한테도 계속 말씀하셨거든요 법문을 격려로 북돋아주신다고.  
공부가 많이된 사람도 경전을 좀 등한시하면 잘 안가진다 말이에요
이러니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샛길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게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에요
한눈 파는 길이 많다 이거에요.  말씀을 조금만 등한시하면 한눈 파는게 더 재미있어요.  공부가 많이된 사람마저도 그런데 정상에 가까운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행복하십시오
나무석가모니불 _()_


녹취자 : 예 심
2011.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