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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026. 성스러운 구함 경 [Pāsarāsisuttaṃ]

Daisy청량심 2023. 5. 24. 08:31

M26. 성스러운 구함 경[聖求經] 810) Ariyapariyesanā Sutta

 

810) EeSe에는 본경의 제목이 Ariyapariyesanā Sutta(성스러운 구함 경)로 나타나고 BeBe 주석서에는 본경 §32에 나타나는 '올가미 더미(pāsarāsi)'를 경제목으로 채택하여 Pāsarāsi Sutta(올가미 더미 경)으로 나타난다. 역자는 FeSe를 따랐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사왓티로 탁발을 가셨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아난다 존자를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우리가 세존의 면전에서 설법을 들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도반 아난다여, 우리는 세존의 면전에서 설법을 들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811)

 

811)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은 지방에 살던 사람으로 십력(十力)을 가진 분(dasa-bala)을 뵈리라고 하면서 사왓티로 왔다. 거기서 그들은 스승님의 모습을 뵙기는 했지만 법문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승님을 존경하는 마음 때문에 '스승님이시여, 저희들에게 법문을 설해주십시오.'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처님들은 존경받는 분들(garū)이시기 때문이다. 사자와 사슴 왕처럼 혼자 다니셨고, 발정 난 코끼리처럼, 목을 치켜세운 독사처럼, 불 무더기처럼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접근할 수 없는 스승님을 그 비구들이 직접 찾아가 청할 수 없어 아난다 존자에게 청을 한 것이다.”(MA.ii.163~164)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람마까 바라문812)의 아쉬람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세존의 면전에서 설법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813)

그러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812) 람마까 바라문(Rammaka brāhmaa)은 본서에만 나타나는 듯하며 주석서는 그에 대한 아무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한편 람마까(rammaka, Sk.ramyaka)는 찟따(Citta, Citra, 3) 달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다.

813) “왜 아난다 장로는 그 비구들을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Rammakassa brāhmaassa assama)으로 가라고 했는가? 십력을 가진 분의 활동이 장로에게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pākaa-kiriyatā)이다. 장로는 '오늘 스승님께서는 제따 숲에서 머무시고는 동쪽 원림에 낮 동안을 머무실 것이다. 오늘 동쪽 원림에 머무시고 제따 숲에서 낮 동안을 머무실 것이다. 오늘은 혼자서 탁발을 가실 것이다. 오늘은 비구 대중과 함께 가실 것이다. 이때쯤 마을에서 나오실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가 타심통(ceto-pariya-ñāa)을 가졌는가? 그렇지는 않다. 추측(anumāna-buddhi)하여 알고 실천해 온 행위(kata-kiriya)로 안다.”(MA.ii.164)

 

3. 그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시고 탁발에서 돌아와 아난다 존자를 부르셨다.

아난다여, 동쪽 원림[東園林]814)의 녹자모 강당815)으로 가서 낮동안을 머물자.”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동쪽 원림[東園林]의 녹자모 대강당으로 가서 낮 동안을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셔서 816) 아난다 존자를 부르셨다.

아난다여, 동 꼿타까817)로 목욕을 가자.”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814) 동쪽 원림[東園林, Pubbārāma]은 사왓티의 동쪽 대문 밖에 있는 원림이다.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시면서 낮 동안에는 이 동원림에서 지내셨다고 한다.(DhpA.i.413; MA.i.369) 바로 이곳에 위사카 (Visākhā) 가 세존과 승단을 위해서 본경의 녹자모 강당(Migāramātu-pāsāda)을 건립하였다.

815) 녹자모 강당(Migāramātu-pāsāda)은 위사카(Visakhā)가 지은 강당이다.

그녀는 상인이었던 그녀의 남편 미가라에 의해 어머니의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미가라마따(Migāramātu, 녹자모, 鹿子母)라고 불렸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위사카의 남편 미가라는 처음에는 니간타(Nigaṇṭha)를 따르던 신도였는데, 나중에 그의 아내 위사카의 설득으로 휘장 뒤에서나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너무도 감사하여 '당신은 오늘부터 나의 어머니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위사카라는 이름 보다 미가라의 어머니(미가라마따, 鹿子母)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MA.ii.296; DhpA.i.387; AA.i.220)

816)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셔서(sāyahasamaya paisallānā vuṭṭhito)'라고 하였다. 그 강당에는 제자들의 방 큰 것 두 개 사이에 세존의 방이 있었다. 장로가 문을 열고 방안을 치우고 먼지와 쓰레기를 버리고 침상과 의자를 정리하여 스승님께 알렸다. 스승님께서 방에 들어가셔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사자처럼(sīhaseyya)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피로를 가라앉힌 뒤 일어나서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에 들어 앉으셨다가 해거름에 그 증득에서 나오셨다. 그것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MA.ii.165~166)

817) “동 꼿타까(Pubbakoṭṭhaka)는 동쪽에 있는 꼿타까였다. 사왓티에 있는 원림은 어떤 때에는 크고 어떤 때에는 작았는데, 위빳시 부처님 당시에는 일 요자나의 크기였고, 시키 부처님 당시에는 세 가우따의 크기였고, 깟사빠 부처님 당시에는 스무 우사바의 크기였다고 한다. 이 동 꼿타까는 원림의 크기가 스무 우사바였던 깟사빠 부처님 당시 동문에 꼿타까라고 있던 것이다. 그 것이 지금은 동 꼿타까로 나타났다.

깟사빠 부처님 당시 아찌라와띠라는 강이 도시를 에워싸고 흘러 동 꼿타까에 이르자 물길에 의해 무너져 큰 호수가 되었다. 그것은 제방도 있었고 서서히 깊어갔다. 그곳에는 각각의 목욕 장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왕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시민들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비구 상가를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을 위한 것이었다.” (MA.ii.166)

요자나(yojana)는 중국에서 유순(兪旬, 踰旬)으로 음역을 하였는데 √yuj(to pok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어원이 암시하듯이 이것은 [소에] 멍에를 얹어서(yoke) 쉬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인데 1 요자나는 대략 7마일 즉 11km 정도의 거리라고 한다.(PED)

그리고 1가우따(gāvuta)4분의1 요자나의 거리이고 1우사바(usabha)는 대략 200피트 즉 60m 정도의 거리라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더불어 동 꼿타까로 목욕을 가셨다.

동 꼿타까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 가사 하나만을 입고 몸을 말리고 계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근처에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은 상쾌한 곳입니다.

세존이시여,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은 편안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을 방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승낙하셨다.

 

4. 그러자 세존께서는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으로 가셨다.

그 때 비구들은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에서 법담을 나누며 모여 있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문밖에 서서 그 이야기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아시고 '어흠'하고 헛기침을 하시며 문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그 비구들은 세존께 문을 열어드렸다.

세존께서는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에 들어가셔서 마련 해 드린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모였는가?

그 리고 그대들이 하다만 이야기는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세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세존께서 오셨습니다.”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이처럼 법담을 나누기 위해 모여 있다니,

믿음으로 집을 나와 출가한 그대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일이구나.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함께 모이면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나니,

법담을 나누거나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두 가지 구함

 

15, “비구들이여, 두 가지 구함이 있나니 성스럽지 못한 구함성스러운 구함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럽지 못한 구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1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아내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하녀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염소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돼지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코끼리수말암말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818)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819)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818) '재생의 근거(upadhi)'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메추라기 비유 경」(M66) §14의 주해를 참조할 것.

819) “이런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인 재생의 근거(upadhi)들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jāti-dhammā)'이라는 말씀이다.”(MA.ii.170)

 

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늙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늙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염소와 양이닭과 돼지가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금과 은이 늙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늙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병들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병들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염소와 양이닭과 돼지가

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병들기 마련인 것이다.820)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병들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820) “'병들기 마련인 것(byādhi-dhamma)'의 목록에서 금과 은(jāta-rūpa)은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이 금은은 두통 등의 병듦이 없고, 중생들에게서처럼 죽음이라 부르는 사망도 없고 슬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aya) 등의 오염원(sakilesa)에 오염되기 때문에 아래 '오염되기 마련인 것(sakilesa-dhamma)'의 목록에는 포함되었다.”(MA.ii.170)

 

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죽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죽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염소와 양이닭과 돼지가

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죽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죽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슬퍼하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슬퍼하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염소와 양이닭과 돼지가

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슬퍼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슬퍼하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염소와 양이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닭과 돼지가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금과 은이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오염되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러운 구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지만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늙기 마련이지만 늙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늙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지만 병들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병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죽기 마련이지만 죽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죽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지만 슬퍼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슬픔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지만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한다.”

 

깨달음의 추구

 

13. “비구들이여, 나도 역시 깨닫기 전, 아직 정등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나는 왜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나는 왜 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나는 왜 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나는 왜 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나는 왜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하는가?

참으로 나는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내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리라.”

 

14.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나중에 아직은 연소하고 젊고 머리가 검고

축복받은 젊음을 구족한 초년기에 부모님이 원치 않아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심에도 불구하고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출가했다.”

 

15. “그런 나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유익한 것[]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알라라 깔라마821)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821) 본경에서 보듯이 알라라 깔라마(Aāra Kālāma)는 세존께서 출가하여 사문이 되신 뒤에 만난 첫 번째 스승이다. 알라라 깔라마는 세존께 무소유처의 경지를 가르쳤다. 세존께서는 즉시에 이 경지를 터득하셨지만 이것이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본경 §15-4)라고 이 법에 만족하지 않고 떠나셨다. 본경 §22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에 첫 번째 설법을 할 상대로 알라라 깔라마를 떠올리지만 천신들이 알라라 깔라마가 칠 일 전에 임종 했다고 알려준다.

알라라 깔라마에 대한 언급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담고 있는 본경과 본서 제2권 「삿짜까 긴 경」(M36) 등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초기불전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디가 니까야』제2권 「대반열반경」(D16) §§4.26~4.34에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인 뿍꾸사 말라뿟따의 일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청정도론』X.19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바란두 경」(A3:124)에는 보살(세존)이 알라라 깔라마 문하에서 수행할 때에 그 아쉬람에 같이 있었다고 하는(AA.ii.375) 바란두까 깔라마가 언급되고 있는 정도이다.

 

알라라 깔라마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이 법은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822)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과 동등한 것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입니다.”

 

822)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yattha viññū puriso(지혜로운 사람이라면)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이것을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yasmin dhamme paṇḍito puriso)”(MA.ii.171)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주석서대로 옮겼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을 증득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입술을 두드리자마자 말하자마자823)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824)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823) “'입술을 두드리자마자(oṭṭha-pahata-mattena)'라는 것은 스승이 그에게 말해준 것에 응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자 마자라는 뜻이고, '말하자마자(lapita-lāpana-mattena)'라는 것은 스승이 그에게 말해준 것을 그대로 따라 하자말라는 말이다.” (MA.ii.171)

824) “'지혜로운 말(ñāa-vāda)'이란 '나는 안다.'라고 하는 말이고, '확신에 찬 말(thera-vāda)'이란 '나 장로가 여기 있노라.'라고 확신에 차서 하는 말(thira-bhāva-vāda)이다.”(MA.ii.171)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단순히 믿음만으로825)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825) “'단순히 믿음만으로(kevala saddhāmattakena)'라는 것은 통찰지로써 실현하지 않고 단순히 청정한 믿음만(suddha saddhā-mattaka)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다.”(MA.ii.171)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어떻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무소유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826)

 

826) “무소유처를 마지막으로 하는(ākinicaññāyatana-pariyosānā) 일곱 가지 증득(satta samāpatti)을 나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이다.”(MA.ii.171)

이 무소유처는 네 가지 무색계 증득 가운데 세 번째로, 세간적인 것이지 출세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믿음827)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싸띠(마음챙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싸띠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삼매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리라.”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827) “이 믿음 등 다섯 가지는 일곱 가지 증득을 얻기 위한 믿음 등이다.” (MA.ii.171) 이 다섯 가지는 니까야에서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 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 bala]으로 불리며 37보리분법에 포함되어 있다. 다섯 가지 기능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324쪽 이하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해제 8. 「기능 상윳따」 (S48)와 「기능 상윳따」(S48)에 포함된 경들의 주해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당신은 이렇게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라고 선언하십니까?”

존자여, 나는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합니다.”

깔라마 존자시여, 나도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합니다.”

 

존자여, 존자와 같은 분이 우리의 동료 수행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이득이고 큰 축복입니다.

이처럼 내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한 그 법을

존자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존자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합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그 법을 존자가 알고, 존자가 아는 그 법을 내가 압니다.

이와 같이 나처럼 존자도 그렇고 존자처럼 나도 그러합니다.

오십시오, 존자여. 우리 둘이 함께 머물면서 이 무리를 지도해 나갑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염오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828)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829)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않고 그 법을 염오하면서 떠나갔다.830)

 

828) 여기서 '염오', '탐욕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의 일곱 가지는 각각 nibbidā, virāga, nirodha, upasama, abhiññā, sambodha, nibbā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염오(nibbidā) 등의 이 일곱 가지 증득의 법(satta-samāpatti-dhammā) 이 윤회(vaṭṭa)에 대해 염오 등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네 가지 도에 대한 바른 깨달음(catu-magga-sambodha)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것으로 인도하지도 못한다는 말이다.”(MA.ii.172)

829)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yāvadeva ākiñcaññāyatanūpapattiyā).'라는 것은 60,000겁의 수명을 가진 무소유처에 태어나는 한 그만큼만 살고 그 이상은 살 수 없다. 그 기간이 다하면 그곳에서 죽어 더 낮은 세계로 돌아온다. 그가 이르는 그곳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生老死, jātijarāmara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aparimutta) 염라대왕의 덫에 갇혀 있는 것(maccu-pāsa-parikkhitta)이다.”(MA.ii.172)

830) “그때부터 마하살(mahāsatta), 마치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얻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먹고 나서 담즙(pitta)이나 점액(semha)으로 [생긴 병 때문에] 토하고 난 뒤에는 또 다시 한 덩이의 음식을 먹으리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런 일곱 가지의 증득을 불굴의 정진(ussāha)으로 얻었지만 그 증득들에서 이런 다시 돌아옴(punar-āvattika) 등의 재난(ādīnava)을 보자 또 다시 이 법으로 전향하고, 증득하고, 머물고, 출정하고, 반조하리라는(āvajjissāmi vā samāpajjissāmi vā adhiṭṭhahissāmi vā vuṭṭhahissāmi vā paccavekkhissāmi v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MA.ii.172)

 

16.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유익한 것[]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웃다까 라마뿟따831)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웃다까 라마뿟따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831) 본경과 본서 제1권 「성스러운 구함 경」(M26)에서 보듯이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는 세존께서 처음 출가하여 찾았던 두 스승 가운데 두 번째 사람이었으며 그는 세존께 비상비비상처를 가르쳤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웃다까 경」 (S35:103)에서 세존께서는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라고 비판하신 뒤에 이 말의 참다운 의미를 불교식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왓사까라 경」(A4:187)에서도 라마뿟따가 언급되는데 주석서(AA.iii.164)DPPN은 이 라마뿟따가 웃다까 라마뿟따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는 웃다까 라마뿟따는 초기불전에서 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문자적으로 라마뿟다(Rāmaputta)는 라마(Rāma)의 아들(putta)이라는 뜻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의 부친인 라마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가르쳤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지만 그 경지는 증득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래 주해를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이 법은 이 법에 대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과 동등한 것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법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입술을 두드리자마자 말하자마자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마는 단순히 믿음만으로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어떻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정진이 있다.

라마에게만 싸띠(마음챙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싸띠가 있다.

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삼매가 있다.

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리라.”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라마는 이렇게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했다.'라고 선언하셨습니까?”

존자여, 라마는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 하고 증득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나도 이렇게 이 법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존자여, 존자와 같은 분이 우리의 동료 수행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이득이고 큰 축복입니다.

이처럼 라마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선언한 그 법을

존자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존자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그 법을 라마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라마가 알았던 그 법을 존자가 알고, 존자가 아는 그 법을 라마가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라마처럼 존자도 그렇고 존자처럼 라마도 그러했습니다.

오십시오, 존자여. 그대가 이 무리를 지도해주십시오.”832)

 

832) 보살과 웃다까 라마뿟따의 이 대화에서 보듯이 라마뿟따의 부친인 라마(Rāma)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라마뿟따는 부친이 천명한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 경지는 증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체득한 보살을 자신의 스승의 위치(ācariyaṭṭhāna)에 올려놓았으며 보살은 그를 자신의 동료(sabrahmacāri)라고 언급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동료였던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를 스승의 위치에 올려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비상비비상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않고 그 법을 염오하면서 떠나갔다.

 

17.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유익한 것[]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유행하다가 우루웰라의 장군촌833)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땅과 매력적인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아름다운 강기슭과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을 보았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땅은 풍요롭고 숲은 상쾌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은 맑고, 강기슭은 아름답다.

근처에는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다.

참으로 이곳은 용맹정진을 원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善男子]들이 용맹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833) “장군촌(Senānigama)은 장군의 마을(senāya nigama)이라는 뜻이다. 처음 겁이 생길 때에 그곳에 장군이 살았던 이유로 그 마을을 장군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혹은 세나니(Senāni)는 수자따의 아버지이고, 그의 마을(gama)이라는 뜻이다.” (MA.ii.173)

주석서는 이처럼 Senānigama Sena-nigama로도 끊어 읽고 Senāni-gama로도 끊어 읽어서 두 가지로 뜻을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장군(sena) (성읍, nigama)이라는 뜻이 되고, 후자는 수자따 아버지의 이름인 세나니(Senāni)의 마을(gama)이라는 뜻이 된다.

 

깨달음

 

18.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늙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늙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병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병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죽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죽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슬픔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슬픔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내게는 이 생겼다.834)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835)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834) “'지와 견이 생겼다(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는 것은 모든 법들을 볼 수 있는 능력(sabba-dhamma-dassana-samattha)과 일체지(sabbaññuta-ññāa)가 생겼다는 말이다.”(MA.ii.174)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지와 견이 생겼다.'는 것은 반조의 지혜(paccavekkhaa-ñāa)이다.”(AA.ii.348; DA.i.220)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지와 견이 생겼다.”를 역자는 부동해탈지견(不動解脫知見, akuppa-vimutti-ñāa-dassana)이라는 술어로 정착시킨다. 부동해탈지견과 구경해탈지(究竟解脫知)와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비교에 대해서는 『상윳따 니까야』제2권 「깨닫기 전 경」 (S14:31)의 마지 막 주해를 참조할 것.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akuppā ceto-vimutti)'에 대해서는 본서 「심재 비유의 긴 경」 (M2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835)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akuppā me vimutti)'는 것은 아라한과의 해탈이 흔들리지 않기(akuppatā) 때문에 확고부동하고, 또한 흔들리지 않는 대상(akupp-ārammaatā) 때문에 확고부동하다. 왜냐하면 이 해탈은 탐욕 등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열반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확고부동하다는 말이다.”(MA.ii.174)

 

19.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836)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수승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837)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을 좋아하고838)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긴다.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이것에게 조건이 됨'인 연기839)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840) 모든 재생의 근거841)를 완전히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빛바램, 소멸,842) 열반843)을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836) 이하 본경의 §§19~21과 거의 같은 내용이 『율장』 (Vin.i.4~7)과 『상윳따 니까야』제1권 「권청(勸請)경」(S6:1) 전체와 『디가 니까야』제2권 「대전기경」(D14) §§3.1~3.7에도 나타나고 있다. 주석서는 이 일화는 깨달음을 이루신 뒤 8번째 칠 일(aṭṭhama sattāha)에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ajapāla-nigrodha) 아래에서 있었던 것이라 적고 있다.(SA.i.195) 수자따(Sujātā)가 고행을 그만두신 세존께 우유죽을 공양올린 곳이 바로 이 염소 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J.i.16, 69)

한편 주석서(MA.ii.181 ~ 186)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초전법륜을 결심하시기 전의 7x7=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깔라 용왕의 거처가 있는(Kālanāgarājassa bhavana) 만제리까(Mañjerika, ApA.77)라는 숲에서 깨달으셨는데 첫 번째 칠 일은 깨달은 바로 그 장소에서 가부좌한 하나의 자세로 좌정하고 계셨다.

두 번째 칠 일은 깨달음을 증득하신 바로 그 자리와 그 나무[菩提樹, bodhi-rukkha]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면서 보내셨다.

세 번째 칠 일은 그곳 가까이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포행을 하시면서 보내셨다.

네 번째 칠 일은 신들에게 『논장』(論藏, Abhidhamma-piaka)을 자세하게 설하셨다.

다섯 번째 칠 일은 보리수 아래로부터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가셔서 아비담마에 대한 조직적인 도(naya-magga)를 명상하셨다.

여섯 번째 칠 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아래서 머무셨다.

일곱 번째 칠 일은 왕의 처소(Rājāyatana)라 불리는 나무아래서 머무셨다.

이렇게 칠 일을 보내신 뒤에 여덟 번째 칠 일에는 다시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가셔서 본경의 이 부분과 『상윳따 니까야』제1권 「권청(勸請) (S6: 1)에 나타나는 전법을 주저하는 사유를 하셨고, 사함빠띠 범천은 세존께서 이 세상에 법을 설해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837) “'내가 증득한 이 법(adhigato kho myāya dhammo)'이란 통찰한 사성제의 법(catu-sacca-dhammo)을 말한다.

'심오하다(gambhīra).'는 것은 밝게 드러난 상태와 반대되는 말이다.

'보기 어렵다(duddasa)'는 것은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쉽게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깨닫기 어렵다(duranubodha)'는 것은 보기 어렵기 때문에 깨닫기 어렵다, 쉽게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요하다(santa).'는 것은 가라앉았다(nibbuta)는 말이고, '수승하다 (panita).'는 것은 괴로움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데, 이 둘은 오직 출세간(lokuttara)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다(atakkāvacara).'는 것은 사유로써는 들어갈 수 없고(takkena avacaritabbo ogāhitabbo na hoti) 오직 지혜(ñāa)로써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미묘하다(nipua).'는 것은 미세하다는 말이고, '현자만이 알아볼 수 있다(paṇḍita-vedanīya)'는 것은 바른 도닦음(sammā-paipada)으로 수행한 현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MA.ii.174)

838) “'집착을 좋아하고(ālaya-ratā)'에서 집착은 ālaya를 옮긴 것이다. 중생들은 다섯 가지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기(allīyanti) 때문에 다섯 가지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집착(ālaya)'이라 부르고, 108가지의 갈애(ta)에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이라 부른다. 그 집착과 함께 좋아하기 때문에 집착을 좋아하고라고 하셨다.” (MA.ii.174)

108가지 갈애에 대해서는 『상윳따 니까야』 제2권 「분석 경(S12:2)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839) '이것에게 조건이 됨[此緣性, idappaccayatā]''연기(緣起, paiccasamuppāda)'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다른 표현이다. 연기란 조건 짓는 법들(paccaya-dhammā)을 말한다. '태어남을 조건하여 늙음 죽음이 있다.'라는 연기의 구문에서는 '태어남'이 바로 연기이고, 조건 짓는 법이고, 이것에게(imesa) 조건이 됨(paccaya)이다. 즉 늙음 · 죽음에게 태어남은 조건이 됨이다. 대신 여기서 늙음 · 죽음은 조건 따라 생긴 법(paicca-samuppanna-dhamma)이라 부르지 연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제17장 통찰지의 토양을 참조할 것.

840) “이 이하의 표현들은 모두 열반을 지칭한다. 열반에 이르러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의 동요(vipphanditāni)가 가라앉고(sammanti) 고요해지기(vūpasammanti) 때문에 열반을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sabba-sakhāra-samatha)'이라 부른다.”(SA.ii.175)

841) “'재생의 근거(upadhi)'라 했다. 여기에 괴로움이 놓이기 때문에 우빠디(upadhi, 재생의 근거)라고 한다. 즉 무더기() 등을 말한다.”(DAȚ.ii.76)

842) “'소멸(nirodha)'이라고 하셨다. 모든 재생의 근거들이 완전히 놓아졌고, 모든 갈애들이 멸진되었고, 모든 오염원에 대한 탐욕(kilesa-rāgā)이 빛바랬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재생의 근거를 완전히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빛바램, 소멸'(sabbūpadhipainissaggo tahākkhayo virāgo nirodho)이라고 하셨다.” (SA.ii.175)

843) '열반'의 범어는 nibbāna(Sk, nirvāna)인데 이것은 접두어 nis vāna로 분해가 된다. 일반적으로 nibbāna nis+√vā(to blow, 혹은 √v, to cover)에서 파생된 과거분사로 이해한다. 특히 열반(Sk, nirvāna)의 언급은 인도의 대문법가 빠니니(ini)의 문법서인 『아슈따댜이』 (Aṣṭadhyayī) VII.ii.20에도 nirvāno 'vāte"로 나타나는데 풀이하면 nis를 접두어로 가진 동사 √vā(to blow)가 바람(vāta)을 뜻하는 단어를 주어로 가지지 않을 때 그것의 과거분사형은 nirvāa이다.”로 해석된다. 이처럼 빠니니도 열반을 과거분사로 설명했다.

그런데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nibbāna에 대한 다른 어원을 내어놓는다. nibbāna(Sk, nirvāna)는 접두어 nis vāna로 분해가 된다. 주석서는 여기서 vāna를 숲을 뜻하는 vana의 곡용형으로 간주하여 숲으로 뒤덮인 곳 (즉 밀림, jungle)을 뜻하며(PED) 주석서에서는 이것을 갈애의 밀림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주석서는 nibbāna(열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갈애(ta)는 각각의 존재로써 다른 존재를(bhavena bhava) 얽히게 하거나 혹은 결과와 함께 업(kamma)을 엮기 때문에(vinati sasibbati) vāna(갈애, 밀림)라고 부른다. 이런 와나에서 벗어남(vānato nikkhanta) nibbāna(열반)이다.” (MA.ii.175)

결과와 함께 업을 엮는다는 것은 갈애를 가진 자는 미래에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DAȚ.ii.77)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피로하게 만들뿐이고, 나를 성가시게 할 뿐이다.'

 

그때 나에게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이 즉흥적으로 떠올랐다.

'내가 어렵게 증득한 법을844)

과연 설할 필요가 있을까?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

이 법을 깨닫기란 실로 어렵다.

흐름을 거스르고845) 미묘하고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세하여

어둠의 무더기에 덮여 있고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 846)

 

844) '어렵게 증득한(kicchena adhigata)'이라고 하셨다.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들께는 도닦음이 어려운 것(dukkhā paipad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부처님들은 네 가지 도를 쉽게 얻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라밀을 완성하실 때에(pāramī-pūraa-kāle)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휩싸인 자들이 보살이 얻은 것을 요구할 때 머리를 베고 목에 피를 뽑고 눈을 뽑고 아들과 부인을 주면서 얻은 도와 관련해서 '내가 어렵게 증득한 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MA.ii.175)

345) “'흐름을 거스르고(paisota-gāmi)'란 영원함 등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상 · · 무아 · 부정(anicca, dukkha, anattā, asubha)의 이런 네 가지 진리의 법(catu-sacca-dhamma)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MA.ii.176)

846) “'어둠의 무더기(tamo-khandha)'란 무명의 더미(avijjā-rāsi)를 말하고,

'탐욕에 물들었다(rāgarattā).'는 것은 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과 존재의 탐욕(bhava-rāga)과 사견의 탐욕(diṭṭhi-rāga)에 물들었다(rattā)는 말이다.”(MA.ii.176)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숙고할 때 내 마음은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847)으로 기울었다.”

 

847) “'무관심(appossukkatā)'이란 관심이 없음(nirussukka-bhāva)이니 가르치고자 하지 않음(adesetu-kāmatā)을 뜻한다.” (MA.ii.176; SA.i.197)

그러면 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셨을까? 주석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지(sabbaññutā)를 얻고서 중생들의 오염원이 두꺼움(kilesa-gahanatā)과 법의 심오함(gambhīratā)을 반조해 보셨기(paccavekkhata)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관심으로 기울면 범천이 권청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생들은 범천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범천이 권청을 하면 중생들은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씩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MA.ii.176~177; SA.i.197~198)

 

20. “비구들이여, 그때 사함빠띠 범천848)

그의 마음으로 내 마음의 일으킨 생각을 알고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여래 · 아라한 · 정등각자께서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마음을 기울이신다면

세상은 망할 것이고,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

 

848) “사함빠띠 범천(brahmā Sahampati)은 옛날 깟사빠 세존의 교단에서 사하까(Sahaka)라는 이름의 장로였다. 그가 초선을 증득하여 초선의 세계(pahama-jjhāna-bhūmi, 초선천)에 겁의 수명을 가진 대범천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를 사함빠띠 범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사함빠띠 범천이라 불리었다.”(MA.ii.177)

사함빠띠 범천(brahmā Sahampati)은 본경에서 보듯이 이 세상에 불교가 시작되는데 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을 간청하는 자도 사함빠띠 범천이고 세존이 입멸하시자 맨 처음 게송을 읊은 자도 그다.(『상윳따 니까야』제1권 「반열반 경」(S6:15) {60S} ) 그 가 어떻게 막강한 신이 되었는가는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사함빠띠 범천 경」 (S48:57) §5를 참조할 것.

그 외에도 『상윳따 니까야』에만 해도 사함빠띠 범천은 S6:2; 3; 10; 12; 13; S11:17; S22:80; S47:18, 43에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은 마치 힘센 사람이 구부린 팔을 펴고

편 팔을 구부리듯이 그렇게 재빨리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져 내 앞에 나타났다.

비구들이여, 그때 사함빠띠 범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나를 향해 합장하고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선서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눈에 먼지가 적게 낀 중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듣지 않으면 타락할 것입니다.

그 법을 이해할만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 묻은 자들이 궁리해낸849) 청정치 못한 법이 전에 마가다에 나타났습니다.

불사의 문850)을 여소서.

때 없는 분이 깨달으신 법을 듣게 하소서.

 

349) “'때 묻은 자들이 궁리해 낸(samalehi cintito)'이란 때가 있는 육사외도들(cha satthārā)이 궁리해 낸 것을 말한다.”(MA.ii.178)

850) “'불사의 문(amatassa dvāra)'이란 열반으로 향하는 문인 성스러운 도(ariya-magga)를 말한다. 탐욕 등의 때가 없는 정등각자께서 깨달으신 그 사성제의 법을 이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해달라고 세존께 간청하는(yācati) 것이다.” (MA.ii.178)

 

마치 바위산 꼭대기에 서면

주변의 사람들을 두루 볼 수 있듯이

현자시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분이시여

그와 같이 법으로 충만한 궁전에 올라

슬픔을 제거한 분께서는

슬픔에 빠져있고 태어남과 늙음에 압도된

저들을 굽어 살피시오소서.

 

일어서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

대상의 지도자시여, 빚 없는 분이시여, 세상에 유행하소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법을 이해할만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851)

 

851) §20의 이 마지막 게송은 『상윳따 니까야』제1권 「권청 경」 (S6:1) {560}과「부처님을 찬양함 경」 (S11:17) {919}와 같다.

 

21.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범천의 간청을 충분히 알고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부처의 눈[佛眼]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았다.

비구들이여, 나는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면서 중생들 가운데는

[눈에] 때가 엷게 낀 사람도 있고 두텁게 낀 사람도 있고,

기능이 예리한 사람도 있고852) 둔한 사람도 있고, 자질이 선량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저 세상과 비난에 대해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것도 보았다.

 

852) “'기능이 예리한(tikkh-indriya)'이란 것은 믿음, 정진 등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indriya]이 예리한 것을 말하고, '자질이 선량하다(svākāra).'는 것은 믿음, 정진 등의 자질이 아름다운 것(sundarā)을 말한다.”(MA.ii.181)

 

예를 들면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성장하고 물에 잠겨 그 속에서만 자란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물의 표면까지 나온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성장하여 물 위로 올라와 당당하게 서서 물에 젖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면서

중생들 가운데는 [눈에] 때가 엷게 낀 사람도 있고 두텁게 낀 사람도 있고,

기능이 예리한 사람도 있고 둔한 사람도 있고, 자질이 선량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저 세상과 비난에 대해서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것도 보았다.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사함빠띠 범천에게 게송으로 대답했다.

그들에게 감로(붓다의 교설)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853)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854)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853) “'믿음을 보여라(pamuñcantu saddha).'는 것은 불사(不死, amata)라고 불리는 열반의 문인 성스러운 도를 설했으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attano saddhā)을 보내라(pamuñcantu), 펴 보여라(vissajjentu)는 말씀이다." (MA.ii.181)

854)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vihisa-saññī)'라고 하셨다. 이것은 '내 몸과 입이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들이 믿음의 그릇(saddhā-bhājana)을 가지고 오라. 그들의 사유(sakappa)를 충족시켜 주리라는 말씀이다.” (MA.ii.181)

 

비구들이여,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은

'나는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라고 [생각하면서]

내게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 그곳에서 사라졌다.”

 

22.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지자이시고 슬기롭고 현명하며 오랫동안 [눈에] 때가 엷게 낀 분이다.

나는알라라 깔라마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리라.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천신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알라라 깔라마는 칠일 전에 임종했습니다.”

그러자 내게도 '알라라 깔라마는 칠일 전에 임종을 했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855)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크게 잃었구나!856) 그가 이 법을 들었더라면 즉시 이해했을 것이다.”

 

855) “세존께서는 천신들이 소식을 알려주어 알고 계셨지만 스스로 일체지로 살펴보아 칠 일 전에 여기서 임종하여 무소유처에 태어난 것을 보셨다. 그것을 두고 '지와 견이 일어났다(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라고 한다.” (MA.ii.186)

856) “칠 일만 더 살아있었더라면 얻어야 할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칠 일 전에 임종함으로써 그가 잃은 것이 크다는 것이다.”(MA.ii.185)

 

23.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자이시고 슬기롭고 현명하며 오랫동안 [눈에] 때가 엷게 낀 분이다.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리라.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천신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난밤에 임종했습니다.'

그러자 내게도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난밤에 임종을 했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크게 잃었구나! 그가 이 법을 들었더라면 즉시 이해했을 것이다.'”

 

24.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용맹정진을 할 때 오비구(五比丘)857)가 나를 시봉하면서 내 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 오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리라. 그들은 이 법을 즉시 이해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오비구는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天眼]으로

오비구가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858)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857) '오비구(五比丘)' pañcavaggiyā bhikkhū를 옮긴 것이다. 직역하면 다섯 명의 무리에 속하는 비구들이다. 경에 나타나는 오비구는 예외 없이 이곳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첫 출가제자가 된 꼰단냐 등의 다섯 비구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술어는 불특정한 다섯 명의 비구를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꼰단냐 존자를 위시한 특정한 다섯 비구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오비구(五比丘)'로 옮겼으며 본서 전체에서 문맥에 따라서 '다섯 비구'로 풀어서 옮기기도 하였다.

오비구의 이름은 꼰단(Koṇḍañña, 혹은 안냐 꼰단냐, Aññā-Koṇḍañña, 『상윳따 니까야』 제1권 「꼰단냐 경」(S8:9)에 나타남), 밧디야(Bhaddiya), 왑빠(Vappa), 마하나마(Mahānāma, 『상윳따 니까야』제4권 「족쇄 경」(S41:1) §4의 주해 참조), 앗사지(Assaji, 본서 제2권 「삿짜까 짧은 경」 (M35) §3의 주해 참조)이다. 오비구는 부처님의 처음 설법(『상윳따 니까야』 제6권 「초전법륜 경」 (S56:11)을 듣고 이때 이미 유학(sekha)이 되어 있었으며(『율장』(Vin.i.10~12)),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두 번째 설법인 『상윳따 니까야』제3권 「무아의 특징 경」(S22:59, 「무아상경」(無我相經))을 듣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율장』 「대품」(Vin.i.13~14)과 무아의 특징 경의 마지막에 나타나고 있다.

858) 바라나시(Bārāasi)와 이시빠따나(Isipatana)와 녹야원(Migadāya)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진리의 분석 경」 (M141)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법을 설하심

 

25. “비구들이여, 나는 우루웰라에서 흡족하게 머물고는 바라나시로 유행을 떠났다.

 

비구들이여,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859)가 가야와 보리좌의 중간쯤에서860)

길 가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그대의 감관은 밝습니다. 피부색은 청정하고 빛이 납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어느 분께로 출가했습니까?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859)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Upaka ājīvaka)는 본경에만 나타난다. 이 우빠까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우빠까 경」 (A4:188)에 나타나고 있는 우빠까 만디까뿟따(Upaka Maṇḍikāputta) 혹은 만디까의 아들 우빠까와는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은 데와닷따(Devadatta)의 추종자였다고 한다.(AA.iii.166)

860) “가야와 보리좌(Bodhi-maṇḍa)의 사이인 세 가우따 거리 이내의 장소를 말한다. 보리좌에서 가야까지는 세 가우따의 거리이고, 바라나시까지는 열여덟 요자나의 거리였다.”(MA.ii.188)

1요자나(yojana)는 약 11킬로미터의 거리이고 1가우따(gāvuta)4분의 11 요자나의 거리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에게 게송으로 대답했다.

 

나는 일체승자, 일체지자이며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리고 갈애가 다하여 해탈했고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부르겠는가?861)

 

861) “'일체승자(sabbābhibhū)'라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의 법을 극복했다는 것이고, '일체지자(sabbavidū)'라는 것은 삼계의 법과 출세간계의 법을 다 알았다는 말이다.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다(sabbesu dhammesu anupalitto).'는 것은 삼계의 법들에 대해 오염원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일체를 버렸다(sabba jaho).'는 것은 모든 삼계의 법들을 버렸다는 것이고, '갈애가 다하여 해탈했다(tahākkhaye vimutto).'는 것은 갈애가 다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해탈했다 말이다.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saya abhiññāyā).'는 것은 사계(四界, 욕계 · 색계 · 무색계 · 출세간)의 법(catu-bhūmaka-dhamma)을 오직 스스로 다 알았다는 말이고, '누구를 스승이라 부르겠는가? (kam uddiseyya)'라는 것은 다른 누구를, '이 사람이 나의 스승이다.'라고 부르겠는가라는 말이다.”(MA.ii.189)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유사한 이도 없으며,

지상에도 천상에도 나와 견줄 이 없네.

나는 세상에서 아라한이고 위없는 스승이며

유일한 정등각자이고 [모든 번뇌가] 꺼졌고

적멸을 이루었다네.862)

 

862) “'나에게 스승이 없다(na me ācaryo atthi).'라는 것은 출세간법에 관한 한 나에게 스승이 없다는 말이고, '나와 견줄 이가 없다(sadiso me na vijjati)'라는 것은 나와 대응할 이가 없다는 말이다.

'정등각자(sammasambuddha)'란 바른 원인으로 바른 방법으로(sahetunā nayena) 네 가지 진리를 스스로 깨달은 자(saya buddho)를 말하고, '[모든 번뇌가] 꺼졌다(sīti-bhūta)'는 것은 모든 오염원의 불길이 꺼짐(sabba-kiless-aggi-nibbāpana)으로써 꺼진 것이고, '적멸을 이루었다(nibbuta).'는 것은 오염원들(kilesā)이 적멸했다는 말이다.”(MA.ii.189)

 

나는 까시의 성으로 가서 법의 바퀴[]를 굴리리라.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이다.”

 

도반이여, 그대가 선언한 바와 같이 그대는 무한한 승리자가 되기에 적합합니다.”

 

번뇌 다한 나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니

우빠까여, 일체의 악한 법을 정복했기에 나는 승리자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그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는

도반이여,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고서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길로 떠났다.”

 

26.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차례대로 유행을 하여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있는 오비구를 찾아갔다. 비구들이여, 오비구는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는 서로 합의했다.

 

도반들이여, 저기 사문 고따마가 오고 있습니다.

그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있습니다.863)

그가 오면 아무런 인사도 하지 말고, 일어서지도 말고, 그의 발우와 가사를 받아주지도 맙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원한다면 앉을 수는 있도록 자리는 마련해줍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오비구는 그들 스스로의 합의를 지킬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마중 나와 발우와 가사를 받아 들었고, 다른 사람은 자리를 마련하고,

또 다른 사람은 발 씻을 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도반이여.”라고 말을 걸었다.”

 

863) “'호사스러운 생활(bāhullika)''사치스러운 생활(āvatta bāhullāyā)'이란 옷 등이 많고 사치스러운 것을 말한다.”(MA.ii.191)

 

27. “비구들이여, 나는 오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를 이름으로 불러서도 안되고 '도반이여.'라고 불러서도 안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공양받아 마땅한 사람, 應供]이고,

바르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正等覺者]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가르쳐주리라.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따라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오비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런 행동과 그런 도닦음과 그런 난행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864)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이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있습니다.

그런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 하겠습니까?”

 

864)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alam-ariya-ñāa-dassana-visesa)'이란 성자들에게 적합하거나(yutta) 성자가 되기에 충분한 지와 견이라 불리는 특별함(visesa)이다. 신성한 눈[天眼]의 지혜, 위빳사나의 지혜, 도의 지혜, 과의 지혜, 반조의 지혜가 지와 견의 동의어이다.” (AA.i.58)

본서 사자후의 긴 경」(M12) §2의 주해도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오비구가 이와 같이 말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지도 용맹정진을 포기 하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지도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바르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는 성취되었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가르쳐주리라. 그 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따라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두 번째에도 오비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런 행동과 그런 도닦음과 그런 난행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그때에도 나는 오비구에게 대답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지도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세 번째에도 오비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런 행동과 그런 도닦음과 그런 난행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그때에도 나는 오비구에게 대답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지도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28. “비구들이여, 오비구가 이와 같이 말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전에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존자시여.”865)

 

865) 이제까지는 '고따마'라는 이름과 '도반이여(āvuso)'라는 호칭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윗사람을 대하는 호칭인 '존자시여(bhante)'라고 바뀌었다. 그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지도 용맹정진을 포기 하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지도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바르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는 성취되었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가르쳐주리라. 그 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따라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29. “비구들이여, 드디어 나는 오비구를 확신시킬 수가 있었다.866)

비구들이여, 두 비구를 가르치는 동안 세 비구가 탁발을 나갔다.

세 비구가 탁발하여 가져오면 우리 여섯 명이 연명을 했다.

비구들이여, 세 비구를 가르치는 동안 두 비구가 탁발을 나갔다.

두 비구가 탁발하여 가져오면 우리 여섯 명이 연명을 했다.”867)

 

866) “즉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내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꼰단냐(Koṇḍañña) 장로를 증인(kāya-sakkhi)으로 하여 사성제에 대한 「초전법륜 경」(Dhammacakkappavattana-sutta, S56:11)을 설하셨다. 설법이 끝났을 때 장로는 많은 범천과 함께 예류과를 증득했다.”(MA.ii.192)

이처럼 최초의 설법에서 세존께서는 중도인 팔정도를 천명하고 사성제를 드러내신 뒤 보름 후에는 『상윳따 니까야』제3권에 「무아의 특징 경」(Anattalakkhaa-sutta, S22:59)으로 포함되어 있는 오온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설하셔서 오비구는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런 일화는 『율장』 『대품』 (Mahāvagga, Vin.i.7~14)에 전승되어 온다.

867) “이 문단은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그 비구들을 가르치기 위해 마을로 탁발도 가지 않은 것을 보이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 비구들에게 명상주제(kamma-ṭṭhāna)에 대해서 일어난 때를 제거해주시기 위해서(uppanna-mala-visodhan-attha) 세존께서는 항상 원림 내에 머무셨다. 그들은 명상 주제에 대해 때가 일어날 때마다 세존께 다가가서 여쭈었고, 세존께서도 그 들이 앉아있는 곳에 가셔서 때를 제거해 주셨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공양도 거르시면서(nīhaa-bhatta) 그들을 가르치실 때 왑빠(Vappa) 장로는 초하룻날에 예류자가 되었고, 밧디야(Bhaddiya) 장로는 둘째 날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는 셋째 날에, 앗사지(Assaji) 장로는 넷째 날에, 빡카(Pakkha) 장로는 다섯째 날에 예류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놓고 「무아의 특징 경」[無我相經, S22:59]을 설하셨고, 그 경이 끝났을 때 그들은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MA.ii.192)

 

30. “비구들이여, 오비구는 나에게 이런 교훈을 받고 이런 가르침을 받아

자신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늙기 마련이면서자신들이 병들기 마련이면서자신들이 죽기 마련이면서

자신들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자신들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여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868)

그들에게 지와 견이 생겼다. '우리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868)『율장』 『대품』에 의하면 오비구는 부처님의 처음 설법인 「상윳따 니까야』 제6권 「초전법륜 경」 (S56:11)을 듣고 유학(sekha)이 되었으며(Vin.i. 10~12)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인 「무아의 특징 경」 (S22:59)을 듣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한다.(Vin.i.13~14) 그리고 「무아의 특징 경」의 마지막에도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감각적 욕망

 

31. “비구들이여,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다. 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32.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간에 이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홀리고 푹 빠져서 재난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가 없이869) 그것을 즐기면,

'그들은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870)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라고 알아야 한다.

 

869)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가 없다(anissaraa-paññā).'는 것에서 벗어남은 반조의 지혜(paccavekkhaa-ñāa)를 말한다. 그 반조의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MA.ii.193)

반조의 지혜에 대해서는 본서 역마차 교대 경」(M24) §2의 주해를 참조 할 것

870) '사악한 [마라]'에 대해서는 본서 「미끼 경」(M25)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숲 속의 사슴이 묶인 채 올가미 더미 위에 누워있다면,

그는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사냥꾼이 오더라도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겨지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간에 이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홀리고 푹 빠져서 재난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가 없이 그것을 즐기는 자들은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라고 알아야 한다.”

 

3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간에 이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지 않고 홀리지 않고 푹 빠지지 않아서

재난을 보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를 갖추어서 수용하면,

'그들은 불행을 만나지 않았고, 재난을 얻지 않았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지 않았다.'라고 알아야 한다.871)

 

871) 이것은 출가생활에 필요한 네 가지 필수품(catu-paccaya)을 바르게 수용하는 (paribhoga)을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모든 번뇌 경」 (M2) §§13~16에 설명되고 있는 '수용함으로써 없에야 할 번뇌들' 편을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숲 속의 사슴이 묶이지 않은 채 올가미 더미 위에 앉아만 있다면

'그는 불행을 만나지 않았고 재난을 얻지 않았고 사냥꾼의 손아귀에 들지 않았다.

사냥꾼이 오더라도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겨지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간에 이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지 않고 홀리지 않고 푹 빠지지 않아서 재난을 보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를 갖추어 수용하면,

'그들은 불행을 만나지 않았고 재난을 얻지 않았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지 않았다.'라고 알아야 한다.”

 

3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숲 속 사슴이 숲의 밀림에서 다닐 때

두려움 없이 가고 두려움 없이 서고 두려움 없이 앉고 두려움 없이 잠을 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냥꾼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오직 감각적 욕망들을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3.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36.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 · 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정하여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3(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37.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4(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38.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물질[]에 대한 산냐(형상과 분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산냐를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39.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40.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41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42.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리고 그의 통찰지로 [진리를] 보아서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했다.'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 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성스러운 구함 경(M26)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