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

라마나 마하리쉬

Daisy청량심 2023. 9. 8. 04:44

라마나 마하리쉬

1879 12 30~1950 4 14

인도의 힌두 철학자이자 깨달음을 얻는 영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남부 중류층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7세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 이 깊은 자아에 대한 탐구는 그를 초월적인 의식상태로 이끌었는데, 희열을 느끼는 이 상태를 힌두철학에서는 사마디(삼매)라고 부른다. 그는 이후 마을을 떠나 아루나찰라산으로 가서 수행자가 되었으며 그 후 인도에서 가장 젊은 구루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나라는 생각]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 기억 등 정신적 속성도 역시 마음이다. 또한 개체의 영혼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마치 불에서 불꽃이 일어나듯 절대적인 진아로부터 불꽃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에고'라 한다. 무지한 사람에게 나타난 에고는 나타나는 순간, 자신을 어떤 대상과 동일시한다.

에고가 대상과 연관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 연관이 바로 무지이며, 그 연관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다.

에고, 1인칭 '육체가 나' 라는 형태로 존재하지만 1인칭이 사라지면 밝게 빛나는 진아가 드러난다.

대상과 연관지으려는 에고의 습성이 사라지면 에고는 순수한채로 남으며 근원으로 녹아들어간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의 실 위에 다른 생각들이 꿰어져 있다. 따라서 관심을 내부로 돌려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게 되면 모든 생각 [나라는 생각을 포함]이 사라지고 진아가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에고란?

에고란 지각능력이 없는 육체와 진아 사이를 중개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밤에 자기 옆에 비친 것을 보고 유령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자세히 보니 유령은 실재하지 않고 그것은 나무의 그림자였다. 만약 그가 자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그 유령은 그를 공포에 떨게 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기만 하면 유령은 떨어진다. 유령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에고는 육체와 순수 의식을 연결하지만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만, 자세히 찾아보면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는 생각,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근원으로 향하게 되면 에고가 소멸한다. 그대 자신 즉 '나라는 생각'에 몰입하라.

진아는 항상 깨달음의 상태에 있지 않은가?

인간은 항상 진아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자신이 진아 아닌 것, 또는 육체와 혼동하고 있다. 이 혼동은 무지 때문이며, 무지가 사라지면 혼동도 사라지고, 진정한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스승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는가?

깨달은 스승과 계속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무지는 점차 그리고 완전히 제거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진아가 드러난다.

그대는 '깨달음을 얻는다' 라고 말했지만, 진아는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진아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걷는 일뿐이다.

그대는 '영적수행' 이라고 말했지만, 영적 수행이란, 본래적인 평화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차단하는 것일 뿐이며, 영적수행을 하든 하지 않든 그대는 항상 그대의 본래 상태에 있다. 질문도 의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머무는 것이 바로 그대의 본래 상태이다.

어떤 체험을 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즐거움을 느끼든 두려움을 느끼든 그것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물으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즐거움과 두려움 등을 모두 추월한 경지, 즉 모든 이원성이 사라지고 실체만이 남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없앨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진아 이외의 다른 뭔가가 존재한다면 두려워 할 이유가 있겠으나 진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에고가 나타나지 않으면 진아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먼저 에고를 찾아봐라. 그러면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에고를 중심으로 해서 모여 있는 다른 생각들도 같이 사라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그대를 사로잡을 때는 언제인가?

그대가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그대의 육체를 포함한 이 현상계를 지각하고 있을 때뿐이다.

만약 그대가 깊이 잠든 때처럼 이 현상계를 지각하지 못하고 순수한 진아로서 남아 있다면 어떠한 두려움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만약 각성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병든 육체와 거기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점 또는 불편한 점들을 기꺼이 포기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잃을까봐 두려워 하는 것은 결코 육체가 아니라 각성 상태이며 의식이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곧 각성 상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진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각성 상태를 얻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진아의 빛

실재로 인간은 항상 삼매 속에 있으나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며 ,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창조도 없고, 소멸도 없다.

구속되어 있는 사람도 없으며

수행하는 사람도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도

자유로워진 사람도 없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반사된 빛에 의해서만 영화 화면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현상계라는 화면도 무지라는 어둠 속에서 반사되는 진아의 빛에 의해서만 지각할 수 있다.

깊이 잠든 때처럼 무지로 인해 완전히 깜깜해 버리거나 깨달음, 삼매처럼 진아의 빛으로 완전히 밝아진 상태에서는 현상계를 전혀 볼 수 없다.

개체적 영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하는 마음이 그런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는 물질적 육체를, 꿈에서는 꿈의 체를 만들어내는데 이 꿈에서도 병들면 아파한다.

탄생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계속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며, 이는 깨달음에 의해 완전히 사라진다.

카르마?

육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인지는 육체가 존재하는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

육체는 업(카르마)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한다.

이때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육체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열매에 집착 할 것인지, 아니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서 단순히 그 육체의 행위들을 지켜보는 자로 남을 것인지 그 선택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개체성이 사라져야 고통이 사라진다

좋고 나쁜 것을 일으키는 것은 에고이기 때문에 그대는 즐거움과 고통이 그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것들을 에고에게 맡기고 그대 자신에게는 고통을 부과하지 마라.

진아가 왜 비참한 세계로 나타나 있습니까?

그대로 하여금 진아를 찾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거울을 앞에 갖다 놓으면 볼 수 있게 된다.

먼저 그대 자신을 보라.

그리고 나서 현상계 자체가 진아임을 보라.

나는 누구 입니까?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가지 운동기관은 개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 등의 다섯가지 기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순수한 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각성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의 본질은 실재, 의식, 지복이다.

 

어느때에 참나를 깨달을 있습니까?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참나를 깨달을 있다.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참나를 깨달을 없습니까?

그렇다.

 

이유가 무엇 입니까?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참나를 깨달을 수 없다.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집니까?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의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란 참나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때나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 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 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 들인다.

 

마음이 참나 밖으로 나올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참나는 나타나지 않으며 참나가 나타날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참나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참나가 바로 무아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 없다. 흔히 영혼이라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9.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라는 생각이다. 이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1인칭이 있고 연후에 2인칭과 2인칭이 있을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 육체 안에서 ‘나’라는 것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나’라고 하는 생각이 몸 안의 어디서 처음 일어나는지를 탐구하면, 그것이 심장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 ‘나’를 생각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나’라는 생각(I-thought)이 첫 번째 생각입니다. 다른 생각들은 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1인칭 대명사가 나타난 뒤에야 2인칭, 3인칭 대명사가 나타납니다. 1인칭 대명사 없이는 2인칭, 3인칭 대명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화장터의 장작불을 쑤시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됩니다. 이때 거기서 진아 깨달음(Self-realization)이 일어납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일어날 때 마다 놓치지 말고 이생각이 누구에게 일어 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하면 마음은 점점 근원으로 향하게 되어 생각은 저점 사라지며 몰입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사라지게 없습니까?

방법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을 통해 마음을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 조절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되는 동안 만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 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인데 바로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참나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 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 안으면 호흡이 조절된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 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참나의 형상에 대한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뿐이다. 참나의 형상에 대해 명상 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자아탐구가 쉬워진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지켜야 중에는 과일,야채 채식 위주로 하는 적당한 식사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생각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모든 생각들은 언제 없어집니까?

참나에 대한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생각들은 사라져 간다.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 되어 대상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없어지고 순수한 참나로서만 있을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참나에 대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설사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여 괴로워 해서는 안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세속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욕망과 증오는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있게 된다.

 

자아탐구는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까?

마음 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수행을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참나를 깨달을 때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 있는 그들은 언제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직 참나 만이 실재 하며, 현상계, 개아, 등은 참나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참나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참나가 현상계이고 참나가 개아이며, 참나가 신이다. 참나는 모든 것이다.

 

일체 만물은 신의 작품 아닙니까?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노력도 없이 태양은 떠오르는데, 단지 태양이 떠 있기만 해도, 일장석(sunstone)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개화하며, 물은 증발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고 나서 휴식합니다. 자석 앞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세 가지 (우주적) 작용 또는 다섯 가지 신의 활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고 휴식합니다

 

신은 아무런 의지도 없으며, 아무런 업도 그에게 붙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의 활동이 태양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고, 다른 4대 원소들의 성질이 일체에 두루한 에테르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 입니까?

자기 자신을 참나, 붓다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붓다에게 던진 다는 말은 참나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참나 안에 몰입 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붓다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 질것이다. 지고한 붓다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무집착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이 일어날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 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참나 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신은 스승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줄수는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해탈을 열망하는 사람은 범주들의 본질을 탐구해야 합니까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쓰레기를 낱낱이 살펴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듯이, 진아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범주들의 개수를 헤아리거나 그것들의 특성을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그가 해야 할 일은 진아를 숨기는 범주들을 모조리 내버리는 것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꿈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깨어 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이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body) 가진다. 어는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필요가 있습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참나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참나를 알아야 한다. 참나는 다섯가지 감각의 내부에 있으며 책은 그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안에서 참나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배운 것을 잊어버려야 때가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참나의 본질이다. 행복과 참나는 다르지 않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무지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 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할 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되면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 그것 역시 참나의 행복이다. 깊은 잠을 삼매에 들었을 기절했을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 졌을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수한 참나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 뜨거운 태양아래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참나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헤매며 불행을 느끼고 어쩌다가 한번씩 참나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상계가 사라질 아무런 생각이 없을 우리는 행복을 경험 하며 현상계가 나타날 불행을 경험한다.

 

무엇이 지견[지혜 안목]입니까

고요히 있음’이 지견입니다. 고요히 있다는 것은 마음을 진아 안에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텔레파시나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일들을 아는 것, 그리고 투시력 같은 것은 지견에 들지 않습니다.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무욕이 지혜이다. 둘은 다르지 않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떠한 대상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 속에 아무런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참나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고 참나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이다.

 

자아탐구 명상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자아탐구는 마음을 참나 안에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참나, 실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해탈 이란 무엇입니까?

구속 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무엇이 실체입니까?

항상 실재하는 것만이 실체다 그것은 형태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들의 근간을 이루지지만 스스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의 근간을 이루면서 스스로는 실재한다. 실체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으며 "존재, 비존재" 등의 표현조차 넘어서 있다. 실체란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무지가 사라진 뒤에 남아있는 단순한 의식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이다. 실체는 현상계에 구애받지 않으며 아무런 체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안에서 불행이란 찾아볼 없다. 실체가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침묵인데,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최종적 상태이며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다.

 

순수한 앎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얻어서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합니까?

그대가 바로 순수한 앎이다. 순수한 앎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순수한 앎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가야 필요가 있다. 그대는 단지 진아가 아닌 것들을 진아로 오인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순수한 앎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제가 바로 순수한 앎이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진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원성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앎은 에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앎에서는 주체과 객체가 나누어져 있지만 진아의 앎은 절대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초월해 있다. 기억이란  것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며 기억되는 객체와 기억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는가? 

 진아는 항상 존재한다. 누구나 진아를 알고자 하는데,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하여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진아를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진아를 마치 번개불과 같은 걸로 보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그럴 있겠는가? 그것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며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정의될 없으며 가장 훌륭한 정의가 있다면 "나는 나로서의 "라는 정의일 것이다. 어떤 경전에는 진아가 사람의 엄지손가락만 하다는 , 머리털 끄트머리만하다는 , 전깃불의 번쩍임과 같다는 , 굉장히 크다는 , 가장 작은 것보다 작다는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진아는 그냥 실재할뿐이며, 실재한다, 실재하지 않는다 라는 등의 분별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지혜이지만 지혜다, 무지다 하는 분별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지혜이지만 지혜다, 무지다 하는 분별과는 다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정의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냥 실재할뿐.....

 

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됩니까?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존재할뿐이다.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항상 존재하여 왔던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진실 아닌 것을 진실로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 그때 그대는 그토록 분명한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초월해 있다. 지금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보는 "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있습니까?

진아에 대해서 안다는 표현을 쓸때 거기에는 두개의 진아 "아는 진아와 알려지는 진아" 있게 되며 또한 아는 과정이 있게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그냥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지 무엇을 안다거나 무엇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깨닫게 되면 항상 하나인 채로 있고, 항상 하나인채로 있어왔던 바로 그것이 된다.  상태를 묘사할 수는 없으며, 다만 상태로 있을 뿐이다.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진아는 침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각해야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침묵입니까?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며 존재 자체가 침묵이다. 어떻게 언어로써 침묵을 설명할 있겠는가? 나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진아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침묵이라고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며 외의 모든 앎들은 보잘것 없고 하찮은 앎에 불과하다. 기억하라. 현상계의 수많은 차별상들은 진실되지 않다. 그것들은 진아의 표면에 나타난 허상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헤아릴 없이 많은 자아들의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말할 있습니까?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인정하면 무수한 자아들이 있게 되지만, 생각이 사라졌을때 진아가 나타난다. 그리고 상태에는 진아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하는 것이다. 진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육체는 결코 실재하지 않으며, 착각의 힘에 의해 왜곡된 마음의 외향적인 측면에서 볼때만 육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진아가 육체의 주인이라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견해다. 세상은 육체를 통해 존재하고 육체는 마음을 통해 존재하며, 마음은 의식으로 인해 존재한다. 그리고 의식은 실체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진아를 간파해 버린 깨달은 사람에게서는 진아 외에는 더이상 알아야 것이 없다. ? 육체를 나와 동일시하던 에고가 사라져 버리고, 그는 형태없는 존재, 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진아라는 사실을 알며 진아 외에는 육체나 그밖의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와같은 사람에게 육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진아는 항상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우물을 파면 구멍이 생기는데 구멍속의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옮겼을 뿐이다. 공간은 그때, 거기에 있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곳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의 내면에 쌓여있는 오래되고 낡은 축적물을 밖으로 던져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갓을때 진아만이 홀로 빛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자유를 얻을 있습니까?

자유는 바로 우리들의 본성이다. 우리가 자유다. 우리가 자유를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만 하면 되며, 그렇게 할때 거기에는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생각도 없게 되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한은 스스로 구속하게 된다

 

진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의 세가지 상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까?

그들에게 세가지 상태가 없다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 깨어있다라는 말들을 함에 있어서 그대는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볼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대는지금 깨어 있는 상태에있으며, 꿈꾸는 상태에서는지금의 이상태가 가려지고 깊은 잠을 잘때는 꿈꾸는 상태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한다. 세가지 상태는 나타낫다가 사라져 가지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같다.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지만 여러가지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스크린은 스크린으로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는다. 그대가 사실을 이해한다면 스크린 위에 나타났던 화면들이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버리듯이 세가지 상태들은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위에는 때로 수많은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떤 때는 큰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스크린은 어느 경우에나 그냥 거기에 남아있다. 스크린은 결코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는다. 어떤 화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 꿈꾸는 동안, 잠자는 동안에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며 그대는 자신의 진아로서 남아있다. 

 

세가지 상태가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들에게 세가지 상태가 없다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 깨어있다라는 말들을 함에 있어서 그대는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볼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대는 지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꿈꾸는 상태에서는 지금의 상태가 가려지고, 깊은잠을 잘때는 꿈꾸는 상태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한다. 세가지 상태는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지만,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같다.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지만 여러가지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스크린은 스크린으로서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세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는다. 그대가 사실을 이해한다면 스크린 위에 나타났던 화면들이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듯이, 세가지상태들은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위에는 때로 수많은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어떤 때는 큰불이 났다가 사라지지만, 스크린은 어느 경우에나 그냥 거기에 남이있다. 스크린은 결코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는다.어떤 화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 꿈꾸는 동안, 잠자는 동안에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며 그대는 항상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아있다.

 

세가지 상태가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렇다. 상태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며 진아는 결코 그것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진아에게는 한가지 상태만 있다. 

 

그럼 진아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속에서 단순히 주시자로서 남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다른 예로 무대위에 있는 등불의 예를 들어보자.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등불은 항상 그곳에 켜져 있으면서 모든 배우와 모든 관객들을 차별하지 않고 고루 비추어 준다. 또한 등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이나 연극이 끝난 뒤에도 항상 그곳에 켜져 있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등불인 진아도 자신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에고에게나 지성에게나 기억-마음에게도 빛을 보내주고 있다. 깊은 잠든 상태에서는 에고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때에도 진아는 어디에도 치우침없이 계속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사실 진아가 주시자라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일뿐이며 그것은 진아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주시자는 주시되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이다. 주시자나 주시되는 대상은 모두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세가지 상태들 , 어느 상태가 네번째 상태 투리야에 가장 가깝습니까? 세가지 상태와 네번째 상태와의 실질적인 관계는 어떻습니까? 

사실은 한가지 상태만이 실재하며 다른 세가지 상태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이 어느 정도로 실체에 가깝다는 말은 할수가 없다. 아미 이렇게는 말할 있을 것이다. 의식이 유일한 실체이며, 의식에 깨어있음이 더해지면 깨어있는 상태이고, 의식에 잠이 더해지면 자는 상태이며, 의식에 꿈이 더해지면 꿈꾸는상태이다. 의식은 바로 그위에 화면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버리는 스크린과 같으며, 스크린이 실체이고 화면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난 그림자에 불과하다. 오랜 습관으로 인하여 세가지 상태를 실재적인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상태를 네번째라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네번째 상태란 있을 없고 한가지 상태만 있을 뿐이다. 꿈꾸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차이점은 전자는 짧고, 후자는 길다는 점뿐이다. 둘은 모두 마음의 산물이다. 깨어있는 상태가 길기 때문에 우리는 상태가 우리의 실재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의 본질적인 상태는 항상 그냥 그대로 존재하면서 세가지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번째 상태, 투리야이다. 우리가 사실을 알게 되면 네번째 상태라는 표현도 상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으며 투리야티타즉 초월적인 상태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세가지 상태들은 본질적인 상태, 진아라는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입니까?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상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진아가 말하고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보는자이며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이 마음을 구성한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 그러면 마음은 지아속으로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보는자와보이는 대상도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나타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것이다. 진아만이 항상 그대로 남아있다. 세가지 상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아에 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에 올바른 탐구가 이루어질때 세가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설명을 많이 해주어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신이 명백한 진실에 너무도 눈멀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 전에는 분명하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진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차이도 없다. 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진아요.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모든 현상계가 된다. 같은 솜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옷들을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 장신구들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것들은 결국  같은 솜이며, 같은 금이다. 마찬가지로 실체는 오직 하나이며, 그외에는 다만 이름이고 모습일 뿐이다. 마음은 진아와 따로 떨어져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에는 독립되어 있는 실체가 없다. 진아는 마음없이 존재하지만 마음은 결코 진아없이는 존재할 없다

 

진아의 본질

진아는 지복이다. 진아와 지복은 똑같은 하나. 그리고 그것만이 실체다. 현상계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에서 벗어날때, 우리는 진아의 지복을 즐길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진아와 함께 한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의 핵심은  우주 삼라만상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체에 대한 이다. 실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본체이며 누구라도 직접 체험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여러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렀는데 명칭은 결국 하나인 실체의 여러가지 다른 측면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들과 명칭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아

이는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앎이 "진정한 " 진아라고 하였다. 진아는 개아 개체적 자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개체적 자아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들어 것이 진정한 나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진아는 항상 실재하며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있는 때는 오직 스스로를 한계짓는 경향을 가진 마음이 사라졌을때 분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음이 영원히 사라져서 진아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난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실재-의식-지복

이는 진아의 세가지 측면이다. 라마나는 실재하는것은 오직 진아뿐이며  진아는 단순히 보이는 대상과 분리된 보는자가 아니라 둘을 함께 포함한 순수의식이라고 하였다. 진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상태는 지극한 행복의 상태이기때문에 이를 지복이라고  한다. 실재-의식-지복이라는 세가지 측면이 따로따로 분리된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 체험된다. 셋을 분리할 없는 것은 마치 축축함과 투명함과 유동성이라는 물의 세가지 속성을 서로 분리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마나는 우주는 진아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하였다. 유신론자들은 보통 힘이 신에게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신이라는 단어를 진아와 동의어로 가끔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힌두교에서의 지고의 존재인 브라흐만이나 시바를 진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형상일 이다. 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슴

라마나는 진아에 대해 이야기할때 흐리다얌이라는 산스크리트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것은 보통 가슴이라고 번역되지만 좀더 글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이것이 중심이다" 될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라마나는 평소 제자들을 가르칠때 각자의 영적수준에 따라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였는데,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서 그의 그와같은 태도가 나타나있다. 진아를 직접 이해할 있는 사람들에게 진아와 동일한 의미로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진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아무런 형태도 위치도없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가 나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에 있어서 특정부위 가슴의 중심으로부터 3.75센티미터 오른쪽이 가슴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이 인간의 모든 영적체험의 중심이라고 가르쳤다.

 

즈나나(지혜) -즈나니(지혜로운 사람)

라마나는 진아를 체험하고 있는 상태를 때로 즈나나(지혜) 표현하였다. 상태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나뉘어 있지 않으며, 둘이 진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지혜, 즈나나란 주관적인"아는 " 그것과는 분리된 어떤 객관적인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함께 사라진 상태에서 하나의 실체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상태에 뿌리내린 사람을 즈나니라고 한다. 

 

투리야와 투리야티타

힌두철학에서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 교대로 나타나는 세가지 상대적  의식상태를 말하고 있다. 라마나는이 세가지 일시적인 상태들이 나타날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실체가 바로 진아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때때로 진아를 투리야 아바스타, 네번째 상태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사실은 상대적인 네개의 상태가 모두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 진정한 초월상태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가종하기 위하여 네번째를 넘어서라는 의미의 투리야타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밖의 용어들

진아를 나타내는 세개의 다른 용어들도 주목할 만하다. 라마나는 진아는 인간 존재의 본연적 상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본연적 상태라는 의미인 "샤하자 스티티'라는 용어와 진정한 형태 또는 진정한 본성이라는 의미인 스와루파라는 용어를 가끔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진아는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로움이고 완전한 고요함이며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침묵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침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