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54:1-S54:10. 제54상윳따 - 들숨날숨 상윳따 (Ānāpāna-saṁyutta) 제1장 하나의 법 품 (Ekadhamma-vagga)
- 하나의 법 경
- 깨달음의 구성요소 경
- 간단한 설명 경
- 결실 경1
- 결실 경2
- 아릿타 경
- 마하깝비나 경
- 등불 비유경
- 웨살리 경
- 낌빌라 경
하나의 법 경(S54:1) Ekadhamm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311]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싸띠를 확립하여106)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싸띠를 확립하여 숨을 들이 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싸띠를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 107)
106)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는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를 옮긴 것이다. 『위방가』는 “이 마음챙김은 코끝이나 입의 표상에(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확립되고 잘 확립되었다(upaṭṭhitā hot supaṭṭhitā)고 해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한 것이다.”(Vbh.252)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위방가 주석서』는 “입의 표상(mukha-nimitta)이란 윗입술의 가운데 부분(uttar-oṭṭhassa vemajjha-ppadeso)이라고 봐야 하나니, 즉 코의 바람(nāsika-vāta)이 닿는(paṭihaññati) 곳을 말한다.” (VbhA.368)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전면(全面 혹은 前面)에(parimulkthaṃ)'는 구체적으로 코끝에나, 숨이 닿는 윗입술의 중간부분에 혹은 인중(人中) 즉 코의 밑과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에라는 뜻이다.
호흡관찰은 기본적으로 삼매(定蘊) 수행이다. 自燈明 즉 內로 삼매에 드는 수행이다.
이것을 외부 공기(大氣)가 자신의 콧구멍 주변이나 얼굴(面相-mukha-nimitta)과의 접촉에 대해서 집중하는 수행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호흡은 (色)身들 중에서 풍대에 속하는 身[rūpakāya]을 지켜보는 수행이다.
이하 受도 心行의 (내입과의 觸생) 受이지 외입과의 (觸생) 受가 아니다.
'느낌들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주석서처럼 락/고/비고비락- 중에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느낌은 '內'와의 촉에 의한 것과 '外'와의 촉에 의한 것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受는 삼사화합 觸生受이다.
또한 名色에서의 名에 대한 느낌과 色에 대한 느낌으로도 설명된다(대인연경).
107) 다음 §5에 나타나는 16단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은 『맛지마 니까야』「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出入息念經, Ānāpānasati-sutta, M118)의 핵심이다. 이 16단계는 『청정도론』 VII.146~237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출입식념경」(M118)과 『청정도론』의 설명을 엮어서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 (대림 스님 역, 개정3판, 2008)를 출간하였으므로 참조할 것.
아래 「낌빌라 경」(S54:10) §§7~10에도 나타나지만 이 16단계는 다시 크게 네 개로 구성된 네 무리로 구분이 되는데 이 각각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의 각각에 배대된다. 그래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에 대한 관찰(kāya-anupassanā, S54:10 §7)에서부터 시작하여 느낌(vedanā)에 대한 관찰(S54:10 §8)과 마음(citta)에 대한 관찰(S54:10 §9)을 거쳐 법(dhamma)에 대한 관찰(S54:10 §10)로 종결이 된다.
5.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108)
④ '몸의 작용[身行]숨의 형성109)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숨의 형성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312]
108)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온 들숨의 몸의 … 온 날숨의 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내쉬리라고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지혜와 함께한 마음으로 들이쉬고 내쉰다.”(『청정도론』 VID.171)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이 문맥에서 몸(kāya)은 호흡 그 자체를 나타낸다.
109) 여기서 '숨의 형성[身行, kāya-saṅkhā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 본서 제4권 「까마부 경」 2(S41:6/iv.293) §5에서 까마부 존자는 찟따 장자에게 “장자여, 들숨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이고 이런 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은 숨의 형성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의 복주서인 『빠라맛타 만주사』도 “여기서 ‘숨의 형성[身行, kāya-saṅkhāra] 이란 들숨날숨을 말한다. 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숨의 형성이라 부른다.(Pm.220)”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서 제3권 「앗사지 경」(S22:88) §7의 주해도 참조할 것.
6.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110)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111)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112)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10)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pīti-paṭisaṃvedi).' 그것은 대상을 통해서와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ārammaṇato ca asammohato ca)이다. ① 그는 희열이 있는 두 禪 [즉, 초선과 제2선]에 든다. 그가 그것에 드는 순간에 禪을 얻음으로써 대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②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 다.”(『청정도론』 VIII.226~227)
즉 ①은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희열이고 ②는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 · 고 · 무아의 특상(lakkhaṇa)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희열을 말한다.
111)『청정도론』은 '행복을 경험하면서(sukha-paṭisaṃvedi)'도 희열의 경험과 같은 방법으로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①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행복과 ②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 · 고 · 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행복을 말한다. 다른 점은 행복은 초선부터 제3선까지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청정도론』VIII.229)
112) “마음의 작용[心行, citta-saṅkhāra]은 느낌의 무더기[受蘊]와 인식의 무더기[想蘊]를 말한다.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의 작용을 경험한다(cittasaṅkthāra-paṭisaṃvedī).'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VIII.229)
113) “'마음을 경험하면서(citta-paṭisaṃvedī)'란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을 경험한다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VIII.231)
114)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abhippamodayaṃ cittaṃ)': 여기서는 삼매와 위빳사나의 두 가지 방법으로 기쁘게 한다. 어떻게 삼매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pīti)이 있는 두 禪에 든다. 그 증득의 순간에 그 禪과 함께한 희열로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어떻게 위빳사나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禪과 함께한 희열을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청정도론』 VIII.232)
115) 『청정도론』 VIⅢ.232는 두 가지로 '마음을 집중하면서(samādaha citta)'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네 가지 禪에 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찰나삼매(刹那三昧, 순간적인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刹那心一境性, khaṇika-citt-ekaggatā)를 통해서이다. 찰나삼매는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할 때 그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통찰하는 것”이라고『청정도론』 (VIⅢ.232)은 정의하고 있다.
116)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vimocayaṃ cittaṃ)': 초선을 통해 장애들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제2선을 통해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로부터, 제3선을 통해 희열로부터, 제4선을 통해 행복과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혹은 그가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은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무상의 관찰로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으로부터, 괴로움의 관찰로 행복하다는 인식(sukha-saññā)으로부터, 무아의 관찰로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으로부터, 염오의 관찰(nibbidanupassanā)로 즐김(nandi)으로부터, 탐욕이 빛바램의 관찰로 탐욕(rāga)으로부터, 소멸의 관찰로 일어남(samudaya)으로부터, 놓아버림의 관찰로 가짐(ādāna)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청정도론』 VIII.233)
8.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117)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118)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119)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20)
117) “'무상을 관찰하면서(anicca-anupassī)'라고 했다. 여기서 무상한 것(anicca)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uppāda-vay-aññathatta-bhāvā)이다. 무상한 성질(aniccatā)이란 그들에게 존재하는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긴 무더기[蘊]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머물지 않고 순간적인 부서짐(khaṇa-bhaṅga)을 통해 부서진다(bheda)는 뜻이다. 무상의 관찰이란 그 무상함으로 물질 등에 대해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청정도론』 VIII.234)
118)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virāga-anupassī): 여기 탐욕의 빛바램은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과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khaya-virāgo ca accanta-virāgo ca)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이란 형성된 것들[行]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것(khaṇa-bhaṅga)이다.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이란 열반이다.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함이란 이 둘의 관찰로 일어나는 위빳사나와 도(magga)이다. '소멸을 관찰하면서(nirodha-anupassī)'라는 구절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청정도론』 VIII.235)
119) “여기서도 놓아버림(paṭinissagga)은 두 가지이다.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pariccāga-paṭinissaggo ca pathandana-paṭinissaggo ca)이다. 놓아버림의 관찰이란 놓아버림 그 자체가 관찰(anupassanā)이다. 이것은 위빳사나와 도의 동의어이다.
① 위빳사나는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과보로 나타난] 무더기들과 업형성력(abhisaṅkhāra)들과 함께 오염원(kilesa)들을 버리기 때문에 ㉡ 형성된 것에 대해 [무상 등의] 결점을 보고 그 [형성된 것의] 반대인 열반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② 도는 ㉠ 근절(samuccheda)로써 무더기를 생기게 하는 업형성력들과 함께 오염원들을 버리기 때문에 ㉡ 열반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이 두 [위빳사나의 지혜와 도의 지혜]는 각각 이전의 지혜를 계속해서 따라 보기 때문에 관찰[隨觀]이라 한다.”(『청정도론』 VIII.236)
120) 『청정도론』의 설명에서 보듯이 ⑫번째까지의 앞의 세 번째의 네 개조까지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방법이 둘 다 적용되었지만 이 네 번째의 네 개조는 위빳사나의 방법만이 적용되고 있다.
9.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깨달음의 구성요소 경(S54:2) Bojjhaṅga-sutta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과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313]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5.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간단한 설명 경(S54:3) Suddhika-sutta
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5.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숨의 형성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6.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7.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8.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9.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결실 경1(S54:4) Phala-sutta
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5. “비구들이여, [314]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두 가지 결실 가운데 하나의 결실이 예상되나니,
지금 · 여기(금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가 예상된다.”
결실 경2(S54:5) Phala-sutta
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5.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일곱 가지 결실과 일곱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어떤 것이 일곱 가지 결실과 이익인가?
①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한다. 만일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면 ② 죽을 때에 구경의 지혜를 성취한다.
만일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죽을 때에도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면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③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④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⑤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⑥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⑦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이러한 일곱 가지 결실과 일곱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아릿타 경(S54:6) Ariṭṭha-sutta
3.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가?"
4.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릿타 존자121)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습니다.” [315]
121)『율장』에서 아릿타(Ariṭṭha) 비구는 승가로부터 분리하는 거죄갈마 (ukkhepanīya-kamma, 擧罪羯磨, 거죄갈마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교단과 계율』 130~134를 참조할 것.)를 받아서 승단으로부터 축출된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난다.(Vin.iii.25~8)
『맛지마 니까야』「뱀의 비유경」(M22) §2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기 전에 독수리 사냥꾼(gaddha-bādhi-pubba)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antarāyika) 법들이라고 설하신 것을 그대로 따라 행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비구들이 여러 가지 비유로 그의 삿된 견해를 버리라고 간곡히 교계하였지만 듣지 않다가 세존의 면전에서 여러 가지 교계를 듣는다. 『율장 주석서』는 그를 교법(Sāsana)의 적(paccatthika)이라고 언급하고 있다.(VinA.iv.874)
본경에 나타나는 아릿타 존자(āyasmā Ariṭṭha)가 『율장』과 『맛지마 니까야』에 나타나는 이 아릿타 비구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DPPN은 동일인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릿타여,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의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욕구를 버렸고,
미래의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였고,
안과 밖으로 법들에 저항하는 인식122)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런 저는 마음챙기면서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내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들숨남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습니다.” 123)
122) '저항하는 인식'은 paṭigha-saññā를 옮긴 것이다. 니까야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 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라는 공무변처의 정형구에서 '부딪힘의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본서 등불 비유 경」(S54:8) §8 등, 설명은『청정도론』 X.16을 참조할 것.)
그러나 여기서 아릿타 존자는 아래 주석서의 설명에서 보듯이 자신의 불환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불환자의 경지에서는 탐욕과 성냄이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본 문단에서 감각적 욕망은 탐욕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paṭigha-saññā는 성냄을 뜻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부딪힘의 인식으로 옮기지 않고 paṭigha의 기본 뜻인 반감이나 저항이나 혐오나 적의로 이해하여 '저항하는 인식'으로 옮겼다. 보디 스님도 perceptons of aversion으로 옮기고 있다. paṭigha는 기본적으로 '적의'를 뜻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몸 경」(S46:2)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123) “이것을 통해서 [아릿타 존자는] 자신의 불환도(anāgāmi-magga)를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통해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제거하였음(pañc-orambhāgiya-saṃyojana-samuccheda)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 SAȚ] 이제 아라한도(arahatta-magga)의 위빳사나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존께서는 [아래에서]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등을 말씀하신다.”(SA.iii.264)
5. “아릿타여, 그것도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릿타여, 그러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상세하게 완성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6.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릿타여, 그러면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상세하게 완성하는가?
아릿타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릿타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상세하게 완성한다.”
마하깝삐나 경(S54:7) Mahākappina-sutta
2. 그 무렵 마하깝삐나 존자가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아 있었다.
세존께서는 마하깝삐나 존자가 멀지 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보고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 비구의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는 것을 보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저 존자가 승가 가운데 앉아있거나 혼자 한적한 곳에 앉아있을 때에도 [316] 저 존자의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 지었기 때문에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 그런 비구는 삼매를 원하는 대로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고 어렵지 않게 얻은 자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었기 때문에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124)를 닦고 많이 [공부] 지었기 때문에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124) 본경의 여기서부터 16단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ānāpāna-sati-samādhi)'라는 술어로 전환되고 있다. 이 전환은 다음의 경들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지었기 때문에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었기 때문에 몸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등불 비유 경 (54:8) Padīpopama-sutta
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317]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5. “비구들이여, 나도 깨닫기 전,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러한 머묾으로 많이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러한 머묾으로 많이 머물 때 몸도 피로하지 않았고 눈도 피로하지 않았고 나의 마음도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고125) 나의 마음도 번뇌들로부터 해탈하게 되기를'이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126)
125)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고(neva kāyopi kilamati na cakkhūni)' 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다른 명상주제를 통해서 수행을 하면(kammaṃ karonta) 몸도 피로하고 눈도 혹사당하기(vihaññanti)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몸을 네 가지 근본물질인] 요소별로 관찰하는 명상주제(dhātu-kammaṭṭhāna)에 대해서 수행을 하면 몸이 피로하게 되고 기계(yanta)에 던져진 것처럼 압박감을 느끼게(pīḷan-ākāra-ppatta) 된다. 까시나의 명상주제(kasiṇa-kammaṭṭhāna)에 대해서 수행을 하면 눈이 쑤시게 되어 피로하게 되고 그 수행에서 나오면 마치 넘어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patan-ākārappatta) 된다. 그러나 이 명상주제에 대해서 수행을 하는 자는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혹사당하지 않는다.” (SA.iii.264)
126) “그러면 이 성스러운 자의 성취(ariy-iddhi, 본경 §6을 주석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음.) 등의 구분(pabheda)을 왜 설하셨는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ānisaṃsa-dassan-attha)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자의 성취나 네 가지 색계선이나 네 가지 무색계선이나 멸진정을 원하는 비구는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시(nagara)를 점령하면 사방에서 생산되어 사대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bhaṇḍa)들도 점령하게 되고 그 지방(janapada)도 점령하게 되는 것처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수행하게 되면 이러한 성스러운 자의 성취의 구분을 얻는 이익이 있게 된다. 수행자(yogi)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로 [경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nipphajjati)는 이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SA.iii.264~265)
6.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나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318]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이 둘을 다 버린 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
7.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무르리라.' 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
8.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319]
‘무한한 알음알이' 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 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무르리라.' 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9.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을 때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127)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127) 여기서부터 본경의 마지막까지는 본서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2(§12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와 제3권 「앗사지 경」(S22:88) §§11~13(§13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과 제4권 「간병실 경」1(S36:7) §§9~11(§11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에도 나타나고 있다. 경문에 대한 설명은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10.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11.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기름을 반연하고 심지를 반연하여 기름 등불이 탄다 하자.
거기에다 어떤 사람이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면 그 기름 등불은 먼젓번의 연료가 다하고
다른 태울 것을 가져다 넣지 않았기 때문에 연료가 없어져서 꺼질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는 [320]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 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웨살리 경(S54:9)128) Vesālī-sutta
128) 생소한 일화를 담고 있는 본경은 『율장』 (Vin.iii.68~70)에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다.(요약된 내용은 아래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이 일화에 대한 문제점은 Mills, “The Case of the Murdered Monks”에서 논의 되고 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大林]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不淨)에 관한 말씀을 하셨고
부정함을 칭송하셨고 부정을 닦는 수행을 칭송하셨다. 129)
129) 주석서는 몸의 31가지 부위(『무애해도』와 주석서 문헌에서 32가지가 됨, 본서 「분석 경」(S51:20) §7의 주해 참조)에 대한 혐오와 10가지 부정(不淨)의 명상주제(asubha-kammaṭṭhāna, 『청정도론』 VI장 참조)를 말씀하셨다고 길게 적고 있다.(SA.iii.265~266) 몸의 31가지 부위는 본서 분석경」(S51:20) §7을 참조할 것.
3.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반 달 동안 홀로 앉고자 한다.
하루 한 끼 탁발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까이 와서는 안된다.”130)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한 뒤
하루 한 끼 탁발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130) 주석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과거에 500명의 사람이 사냥꾼이 되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들은 죽어서 지옥에 태어났지만 어떤 유익한 업 때문에 다시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존의 문하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지었던 원래의 나쁜 업의 일부분이 익어서 이날 밤에 자살을 하거나 타살을 당해 죽게 되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예견하셨지만 세존께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보셨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범부(puthujjana)였고 일부는 일래자였으며 일부는 불환자였고 일부는 아라한이었다. 아라한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성자들은 선처에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그 행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세존께서는 이들 범부들에게 부정(不淨)에 관한 말씀을 하여서 그들이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의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천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 부정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 죽음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세존께서는 이런 일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희생자가 생기는 현장을 피하기 위해서 반 달 동안 홀로 지내신 것이다.(SA.iiil.266~268)
이상이 주석서를 요약한 것이지만, 이처럼 업에 의해서 피할 수 없는 자살과 의도가 개입된 자살을 구분 짓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4. 그때 그 비구들은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不淨)에 관한 말씀을 하셨고
부정함을 칭송하셨고 부정을 닦는 수행을 칭송하셨다.'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부정을 닦는 수행에 몰두하면서 머물렀다.
그들은 이 몸에 대해서 전율을 느끼고 혐오스러워하고 넌더리를 내면서
칼을 들어 자결을 시도하였다.
하루에 열 명의 비구들이 칼로 자결을 하기도 하고 하루에 스무 명이 칼을 들어 자결을 하기도 하고 하루에 서른 명이 칼을 들어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131)
131)『율장』(Vin.iii.68 ~69)에 의하면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고, 서로의 목숨을 끊어주기도 하였으며, 미갈란디까(Migalaṇḍika)라는 땡초(samaṇa-kuttaka)에게 부탁하여 죽여 달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주석서에도 나타난다. 한편 주석서에 의하면 예류자 이상이 된 성자들은 남을 죽이지 않았고 남에게 죽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죽이는 것에 동의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범부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SA.iii.268)
5. 그때 세존께서는 그 반 달을 보내시고 홀로 앉음으로부터 일어나셔서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런데 왜 비구 승가가 줄어들었는가?”
6.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不淨)에 관한 말씀을 하셨고 부정함을 칭송하셨고 [321] 부정을 닦는 수행을 칭송하셨습니다.]132)
그래서 비구들은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不淨)에 관한 말씀을 하셨고
부정함을 칭송하셨고 부정을 닦는 수행을 칭송하셨다.'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부정을 닦는 수행에 몰두하면서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이 몸에 대해서 전율을 느끼고 혐오스러워하고 넌더리를 내면서
칼을 들어 자결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열 명의 비구들이 칼로 자결을 하기도 하고
하루에 스무 명이 칼을 들어 자결을 하기도 하고
하루에 서른 명이 칼을 들어 자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른 방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러면 비구 승가는 구경의 지혜에 확립될 것입니다.”
132) [] 안은 B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7. “아난다여, 그렇다면 웨살리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있는 비구들을 모두 집회소로 모이게 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한 뒤
웨살리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있는 비구들을 모두 집회소로 모이게 하였다.
그런 뒤 세존께 다가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구 승가가 모였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집회소로 가셨다. 가셔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셔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8.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고요하고 수승하고 순수하고 행복하게 머물고,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일어나는 족족 즉시에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한다.133)
133) 이 문단과 여기에 나타나는 용어들은 『청정도론』 VIII.146~150에서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것.
'순수하고(asecanaka)'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숙까 경」1(S10:9) {843}의 주해를 참조할 것. 거기서는 감로수로 옮겼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뜨거운 먼지 덩이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때 아닌 큰 먹구름이 몰려들어 그 자리에서 그것을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하는 것과 같다. 134)
134) 이 비유는 본서 제5권 「구름 경」1(S45:156) §3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고요하고 수승하고 [322] 순수하고 행복하게 머물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는 족족 즉시에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한다.”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지으면 고요하고 수승하고 순수하고 행복하게 머물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는 족족 즉시에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지으면
고요하고 수승하고 순수하고 행복하게 머물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는 족족 즉시에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한다.”
낌빌라 경(S54:10) Kimbil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낌빌라에서 대나무 숲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낌빌라 존자135)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135) 낌빌라 존자(āyasmā Kimbila/Kimila)는 강가(Gaṅga) 강 언덕에 있는 (DPPN) 낌빌라 도시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가하여 전생을 아는 지혜가 생겨서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되었다 한다. 그는 깟사빠 부처님의 교법이 쇠퇴(osakkana)할 때 출가하여 사부대중이 교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다리를 묶어서 낭떠러지에 매달려서 사문의 법을 닦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승님께 가서 교법이 쇠퇴하는 이유를 여쭈어보리라.'고 생각하여 『앙굿따라 니까야』「낌빌라 경」(A5:201) §1의 질문을 드리고 세존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AA.iii.323)
본경의 낌빌라 존자는 사꺄의 아누삐야(Anupiya)에서 아누룻다(Anuruddha), 아난다(Ānanda), 바구(Bhagu), 밧디야(Bhaddiya), 데와닷따(Devadatta) 같은 왕자와 이발사 우빨리(Upāli)를 비롯한 많은 사까의 청년들과 함께 출가한 사까족 출신의 낌빌라 존자가 아니다.
낌빌라와 낌빌라의 대나무 숲과 함께 언급되는 낌빌라 존자는 본경의 낌빌라 존자이고(본서 제4권 「나무 더미 비유 경」 2(S35:242) 참조), 그렇지 않은 경우(예를 들면 M38, M62, M128)는 사꺄족 출신의 낌빌라 존자라고 보면 된다.
3. “낌빌라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어떻게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낌빌라 존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4. 두 번째로 … 세 번째로 세존께서는 낌빌라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낌빌라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어떻게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세 번째에도 낌빌라 존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5. 그러자 [323]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기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세존께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는 것에 대해서
설해 주실 바로 적절한 시기입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호지할 것입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6.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136)
136) 아래에 나타나는 16단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과 사념처와의 비교는 『맛지마 니까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iii.83~85) §24 이하와 같다. 아래 S54:13도 참조할 것.
(i) 몸의 관찰
7. “아난다여, 비구는
①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숨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숨의 형성[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숨의 형성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몸137)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138) 비구는
그때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37) “'한 가지 [형태의] 몸(kāy-aññatara)'이란 흙의 몸 등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즉 바람의 몸[風身, vāyo-kāya]이라고 나는 말한다는 뜻이다. 혹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라는 이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을 물질의 몸[色身, rūpa-kāya]이라 한다. 그 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入,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SA.iii.270~271)
한편 아비담마에서는 28가지 물질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위 주석서의 인용과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MA.ji.261) 등에서는 25가지 물질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비담마의 28가지 물질의 분류 가운데서 심장토대(hadaya-vatthu)를 제외한 27가지와 일치한다. 아비담마에서는 대상 가운데 감촉(phoṭṭhabba, 觸)을 지 · 화 · 풍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28가지 물질 등은『아비담마 길라잡이』 527쪽 이하를 참조할 것.
138)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a)'라는 것은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바람의 몸이다. 혹은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인 물질의 몸 가운데 어떤 하나인 들숨날숨을 관찰하기(ānāpānaṃ anupassati)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느낌 등의 모든 곳에서 그 뜻을 알아야 한다.”(MA.iii.271)
(ii) 느낌의 관찰
8. “아난다여, 비구는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324]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受隨視]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 들숨날숨을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39)
139)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sādhukaṃ manasikāra)'이란 희열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긴 것이니, 아름답게(sundaraṃ)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vedanāññatara)'란 세 가지 느낌 가운데서 하나인 즐거운 느낌[樂受, sukha-vedana]을 두고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이 즐거운 느낌[樂受]인가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다만 설명을 위주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마치 “무상에 대한 인식[無常想, anicca-saññā]의 수행에 몰두하고 전념한다.”(「긴 라훌라 교계 경」 N62 §25)는 곳에서는 인식[想, saññā]이라는 이름으로써 통찰지[般若, paññā]를 설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이름으로써 느낌[受]을 설하셨다고 알아야한다.
이 두 번째 네 개조의 첫 번째 구절에서는 희열이라는 제목 아래 느낌을 설했고, 두 번째 구문에서 행복(즐거움)이라 설한 것은 본성에 따라 설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心行]의 두 구문에서 “인식과 느낌은 마음부수이다. 이 법들은 마음과 결합된 마음의 작용이다.” (Ps.i.188)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그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제외하고 마음과 연결된 모든 법들은 마음의 작용[心行]에 포함된다.”(cf. Yam.i.229)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이라는 이름으로써 느낌을 설했다.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이름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여기서 '잘 마음에 잡도리 하는것'이라고 하셨다.”(SA.iii.271)
(iii) 마음의 관찰
9. “아난다여, 비구는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心隨視]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40)
140)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muṭṭhassatissaas ampajānassa)'라는 구문에서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비구는 들숨날숨의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삼는다(assāsa-passāsa-nimittaṃ ārammaṇaṃ karoti), 그러나 그의 마음은 대상에 대해 마음챙김과 분명히 알아차림을 확립하면서 공부짓기 때문에 그를 오직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않는 자에게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는 수행(anāpāna-ssati-samādhi-bhāvana)은 없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써 마음을 경험함 등에 의해 그때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고 했다.”(SA.iii.372)
(iv) 법의 관찰
10. “아난다여, 비구는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法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 141)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41)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마음이 평온하게 된다.'라고
설한 구문에서 '욕심(abhijjhā)' 이라는 단어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장애(kāma-cchanda-nīvaraṇa)를 설했고, '싫어하는 마음(domanassa)'이라는 단어로 악의(byāpāda)의 장애를 설하셨다.
그리고 이 네 번째 네 개조는 위빳사나로써 설하셨다. 법을 관찰하는 것은 장애 등의 단락으로써 다섯 가지이다.(「대념처경」(D22)에서 법에 마음챙기는 공부[法念處]는 ① 다섯 가지 장애[五蓋] ②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③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 ④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⑤ 네 가지 진리[四諦]의 다섯 단락으로 분류되어 나타난다.) 그중에서 장애의 단락(nīvaraṇa-pabba)이 처음이고, 그 중에서도 이 두 종류의 장애가 처음이다. 이와 같이 법을 관찰하는 것의 처음을 보이기 위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설하셨다.
'버림(pahāna)'이란 무상의 관찰로써 항상하다는 인식[常想]을 버리기 때문에 버림이라는 형태의 지혜를 뜻한다.
'그것을 통찰지로써 보고(tam paññāya disvā)'란 무상, 탐욕의 빛바램, 소멸, 놓아버림의 지혜라 불리는(anicca-virāga-nirodha-paṭinissagga-ñāṇa-saṅkhāta) 그 버림의 지혜를 그 다음의 위빳사나의 통찰지로써, 그것도 그 다음의 것으로써, 이와 같이 그 다음 단계의 위빳사나를 보이셨다.
'평온하게 된다(ajjhupekkhitā hoti).'란 ① 사마타에 든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과 ② 하나로 확립된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으로 두 종류의 평온함이 있다. 함께 생긴(sahajāta) 법들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고, 대상(ārammaṇa)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상에 대한 평온함을 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ānanda)'란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는 방법으로 공부지을 때 그는 단지 장애의 법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필두로 설한 법들에 대한 그 버림의 지혜도 역시 통찰지로써 보고 평온해지기 때문에 “그때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라고 알아야 한다.”(SA.iii.272~273)
11, “아난다여, [325] 예를 들면 사거리에 큰 흙더미가 있다 하자.
만일 동쪽으로부터 수레나 마차가 오면 그 흙더미를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만일 서쪽으로부터 … 남쪽으로부터 …
북쪽으로부터 수레나 마차가 오면 그 흙더미를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142)
142) “여기서 사거리(catu-mahā-patha)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cha āyatanāni)를 뜻하고 거기에 있는 흙더미(paṃsu-puñja)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에 있는 오염원들(kilesā)이다. 사방에서 오는 수레나 마차(sakaṭa-rathā)는 네 가지 대상(ārammaṇa)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cattāro satipaṭṭhānā)이다. 하나의 수레나 마차로 흙더미를 누르는 것은 몸을 관찰하는 것(kāya-anupassanā) 등을 통해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파괴하는 것(upaghāta)이라고 알아야 한다.”(SA.iii.273)
아난다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면
삿되고 해로운 법들을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물면 삿되고 해로운 법들을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제1장 하나의 법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