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47:11-S47:20. 제47상윳따 - 제2장 날란다 품 (Nālanda-vagga)
- 대인 경
- 날란다 경
- 쭌다 경
- 욱가쩰라 경
- 바히야 경
- 웃띠야 경
- 성스러움 경
- 범천 경
- 세따까 경
- 경국지색 경
대인 경(S47:11) Mahāpurisa-sutta
2.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대인(大人)348), 대인'이라고들 합니다. 어떻게 해서 대인이 됩니까?”
348) '대인'은 mahā-puisa를 직역한 것이다.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아누룻다 경」 (A8:30/iv.228~235) §1은 여덟 가지 대인의 사유(mahā-purisa-vitakka)를 들고 있다. 간추리면 ① 이 법은 원하는 것이 적은[少慾] 자를 위한 것이고 ② 만족하는[知足] 자를 위한 것이고 ③ 한거(閑居)하는 자를 위한 것이고 ④ 열심히 정진하는 자를 위한 것이고 ⑤ 마음챙김을 확립한 자를 위한 것이고 ⑥ 삼매에 든 자를 위한 것이고 ⑦ 통찰지를 갖춘 자를 위한 것이고 ⑧ 사량분별(思量分別) 없음을 좋아하고 사량분별 없음을 즐기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여덟 가지이다.
4. “사리뿟따여, 마음이 해탈했기 때문에 대인이라고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사리뿟따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마음이 해탈하는가?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마음은 탐욕이 빛바래고,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마음은 탐욕이 빛바래고,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사리뿟따여, 이렇게 해서 마음이 해탈한다.
사리뿟따여, 마음이 해탈했기 때문에 대인이라고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날란다 경(S47:12)349) Nālanda-sutta
349) 맨 마지막 문단을 제외한 본경은 『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 (D16/ii.81~83) §§1.16~1.17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본경 전체는 『디가 니까야』「확신경」(D28)의 §§1~2와 같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159] 세존께서는 날란다에서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2.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청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초월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다고,
4. “사리뿟따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청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초월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이처럼 황소같이 우렁찬 목소리350)로 말을 하고 확신에 찬351) 사자후를 토하는구나.
350) “'황소같이 우렁찬 목소리(āsabhi vācā)'란 황소(usabha)의 울음소리를 닮아서 흔들리지 않고(acalā) 동요하지 않는 것(asampavedhi)을 말한다.”(SA.iii.208)
351) “'확신에 찬(ekaṃsa gahita)'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그리고 추론에 의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지혜(paccakkhato ñāṇa)로 꿰뚫은 것처럼 확신에 찬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한 결론(sanniṭṭhāna-kathā)으로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SA.iii.208)
사리뿟따여, 그러면 그대는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계를 가진 분들이셨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법을 가진 분들352) 이셨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통찰지를 가진 분들이셨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머묾을 가진 분들353)이셨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해탈을 성취한 분들이셨다.'라고
과거의 모든 아라한 · 정등각자들의 마음을 그대의 마음으로 알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52) “'이러한 법을 가진 분들(evaṃ-dhamma)'이란 삼매에 관계된(samadhipakkhā) 법들을 말한다. 도의 삼매나 과의 삼매나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lokiya-lokuttara) 삼매인 이러한 삼매를 가진 자들이라는 뜻이다.”(SA.iii.209)
353) “위에서 삼매에 관계된 법들을 취하여 머(vihāra)까지도 언급한 것이 되는데 왜 장로는 다시 여기서 이것을 언급하는가? '이러한 머묾을 가진 분들(evaṃ vihārino)'을 여기에 포함시킨 이유는 멸진정을 증득한 분들을 밝히기 위해서(nirodha-samāpatti-dīpan-attha)이다.”(SA.iii.209)
5. “사리뿟따여, 그러면 그대는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계를 가진 분들이실 것이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법을 가진 분들이실 것이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통찰지를 가진 분들이실 것이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러한 머묾을 가진 분들이실 것이다.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해탈을 성취한 분들이실 것이다.'라고
미래의 모든 아라한 · 정등각자들의 마음을 그대의 마음으로 알았는가?” [160]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6. “사리따뿟여, 나는 지금 시대에 아라한 · 정등각자다.
그러면 그대는 '세존께서는 이러한 계를 가진 분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법을 가진 분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통찰지를 가진 분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머묾을 가진 분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해탈을 성취한 분이다.'라고 나의 마음을 그대의 마음으로 알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7. “사리뿟따여, 그렇다면 참으로 그대에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 · 정등각자들에 대해서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가 없다.
사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청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초월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이처럼 황소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하고 확신에 찬 사자후를 토하는가?”
8. “세존이시여, 제게는 분명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 · 정등각자들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다운 추론354)으로 알았습니다.
354) “'법다운 추론(dhamm-anvaya)'이란 법에 대한 개인적인 지혜(paccakkhato ñāṇa)를 적용(anuyoga) 시켜서 생겨난 추론의 지혜(anumāna ñāṇa)를 말한다. 방법론(naya-ggaha)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자의 완성된 지혜(sāvaka-pāramī-ñāṇa)에 서서 이것을 통해서 알았습니다.'라고 세존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장로의 방법론은 무량하고(appamāṇa) 끝이 없다(apariyanta), 마치 일체지자의 지혜(sabbaññuta-ññāṇa)가 무량하고 끝이 없듯이 법의 장군(dhamma-senāpati)의 방법론도 그러하다.”(SA.iii.210)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튼튼한 기초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대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지혜롭고 입지가 굳고 현명한 문지기가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시의 모든 통로를 다 순찰하면서 성벽의 이음매와 갈라진 틈으로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것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도시를 들어오고 나가는 큰 생명체는 누구든 모두 이 대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라고,
세존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9. “세존이시여, 과거의 모든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들께서는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셨고,
마음의 오염원들을 통찰지로써 무력하게 만드셨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잘 확립되셨으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을 [161] 있는 그대로 닦으신 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으셨습니다. 355)
355) “여기서 '마음챙김의 확립'은 위빳사나이고,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도(magga)이며, '위없는 정등각(anuttara-sammāsambodhi)'은 아라한됨이다. 혹은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위빳사나와 도가] 혼합된 것(missakā)이다.”(SA.iii.211)
세존이시여, 미래의 모든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들께서도
다섯가지 장애들을 제거하시고,
마음의 오염원들을 통찰지로써 무력하게 만드시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잘 확립되시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닦으신 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으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세존께서도 아라한 · 정등각자시니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셨고,
마음의 오염원들을 통찰지로써 무력하게 만드셨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잘 확립되셨으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닦으신 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으셨습니다. 356)
356)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표하는 이러한 청정한 믿음이 『디가 니까야』「확신 경」(D28)의 내용이다. 더 자세한 것은「확신 경」(D28)을 참조할 것.
10. “장하고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사리뿟따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 법문을 자주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 설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쓸모없는 인간들에게 여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생기게 되면
그들은 이 법문을 듣고 여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제거될 것이다.” 357)
357) 이 마지막 문단은 「대반열반 경」(D16)에는 나타나지 않고「확신 경」(D28)의 마지막에는 나타나고 있다.
쭌다 경(S47:13) Cu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358)
358) 본경에서 보듯이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의 임종소식을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서 들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앞의 경에 나타난 사리뿟따 존자의 사자후는 「대반열반 경」(D16)에 의하면 세존의 일행이 라자가하에서 웨살리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 도중에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꾸시나라까지 바로 가신 것으로 나타나지 200km 가까이나 서쪽에 있는 사왓티에는 들르지 않으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본경에는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의 임종소식을 사왓티에서 들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적인 연대기를 따르기 위해서 주석서들(SA.iii.213와 DA.ii.550)은 부처님께서 벨루와가마(Beḷuvagāma)에서 안거를 보내신 뒤에(D16/ii.98~99 §2.21) 사왓티로 간단한 여행을 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대반열반 경」(D16)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 여행에 동참했다가 무리에서 떠나서 자신의 고향인 날라까가마에 가서 임종을 하였다고 주석서들은 적고 있다.
사리뿟따 존자의 임종에 대한 주석서에 나타나는 이야기는 『사리뿟따 이야기』와 Nyanaponika, “Sāriputta: The Marshal of the Dhamma,” in Nyanaponika and Hecker, Great Disciples of the Buddha, pp.47–59를 참조할 것.
2.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마가다의 날라까가마까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쭌다 사미359)가 사리뿟따 존자의 시자로 있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그 병으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359) “쭌다 사미(Cunda samaṇuddesa)는 사리뿟따의 동생(kaniṭṭha-bhātika)이었다. 구족계를 받기 전(anupasampanna-kāla)에 불리던 이름이었는데 장로가 된 후에도 이렇게 불렸기 때문에 쭌다 사미라고 하는 것이다.”(SA.ii.213)
쭌다 사미는 마하쭌다 존자(āyasmā Mahā-Cunda)로도 쭌다 존자로도, 쭌다까(Cundaka) 존자로도 불렸다고 한다. 한때 그는 세존의 시자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ThagA.ii.124; J.iv.95, 등)
한편 사리뿟따 존자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 즉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와 세 명의 여동생 즉 짤라(Cālā), 우빠짤라(Upacālā), 시수빠짤라(Sīsūpacālā)가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였다고 한다.(DhpA.ii.188) 짤라와 우빠짤라와 시수빠짤라의 게송은 본서 제1권 「짤라 경」등(S5:6~8)의 세 개의 경에 나타나고 있다.
3. 그러자 쭌다 사미는 사리뿟따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사왓티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으로 가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쭌다 사미는 [162]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발우와 가사입니다.”
4. “도반 쭌다여, 이것은 세존을 뵙고 [말씀드려야 할] 문제입니다.
도반 쭌다여, 같이 세존을 뵈러 갑시다. 뵙고서 이 문제를 세존께 말씀드립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쭌다 사미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5. 그때 아난다 존자와 쭌다 사미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쭌다 사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발우와 가사입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저의 몸은 무겁기만 합니다. 방향 감각도 잃어버렸고 법들360)도 제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361)
360) “여기서 '법들(dhamma)'이란 개요와 교리문답의 법들(uddesa-paripucchā-dhammā)을 말한다.”(SA.iii.223)
이 정형구에 나타나는 '법들'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각 경들마다 다 다르다. 본서 제3권 「띳사 경」(S22:84) §2의 주해와 본서 「병 경」(S47:9) §6의 주해를 참조할 것.
361) 이 정형구는 본서 제3권 「띳사 경」(S22:84) §2와 본서 「병 경」(S47:9) §6과, 『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D16) §2.24, 『앙굿따라 니까야』「은사 경」(A5:56) 등에도 나타난다. 설명은 「띳사 경」(S22:84)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6. “아난다여, 사리뿟따가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계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삼매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통찰지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해탈의 무더기를 가져가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해탈지견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362)
362) 이 다섯 가지는 아라한만이 가지는 다섯 가지 법의 무더기[五法蘊, dhamma-kkhandha]라 부른다. 본서 제1권 「존중 경」 (S6:2) §§3~7과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런데 여기서 아직 예류자인 아난다 존자에게 해탈과 해탈지견의 무더기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런 예외는 경에 가끔 나타나기도 한다. 본서 제6권 「아나타삔디까 경」1(S55:26/v.384) §10에서도 일반적으로 아라한에게만 적용되는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이 예류자인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장자에게도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7.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저의 계의 무더기를 … 해탈지견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사리뿟따는 저를 교계하고 감싸주고363)
일깨워주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법을 가르치기에 피로한 줄 몰랐으며 동료 수행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였습니다.
저희는 사리뿟따 존자가 베풀어준 법의 자양분과 법의 재물과 법의 도움을 기억합니다.”
363) '감싸주고'는 otiṇṇa를 옮긴 것인데 Ee, Be에만 나타나고 S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8. “아난다여, 참으로 내가 전에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163]
아난다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9. “아난다여, 예를 들면 속재목[心材]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큰 나무의 가장 큰 가지가 꺾어진 것과 같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속재목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비구 승가에서
사리뿟따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10.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11.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12.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욱가쩰라 경(S47:14) Ukkacelā-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왓지364)에서 욱까젤라의 강가 강 언덕에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머무셨는데 그것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한 열반에 든 뒤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365)
364) 왓지(Vajjī)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왓지 경」(S35:125)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365) 주석서에 의하면 목갈라나 존자(āyasmā Moggalāna)는 사리뿟따 존자가 임종한 지 보름 후(aḍḍha-māsa)에 반열반했다고 한다. 사리뿟따 존자는 깟띠까 달(음10월)의 보름에 입적하였고 목갈라나 존자는 그 다음 달의 초하루에 입적하였다고 한다.(SA.iii.225) 세존의 입적이 웨사카 달(음4월) 보름이기 때문에(『디가 니까야』제3권 부록, DA §17 참조)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보다 6개월 먼저 입적하였고 목갈라나 존자는 5개월 보름 먼저 입적한 셈이다.
목갈라나 존자의 임종에 대해서는 Hecker, “Moggalāna: Master of Psychic Power,” in Nyanaponika and Hecker, Great Disciples of the Buddha, pp.100~105 참조
2. 그 무렵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침묵하고 침묵하는 비구 승가를 둘러보신 뒤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164]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한 열반에 들자
내게는 회중이 텅 빈 것처럼 여겨지지만, 나의 회중은 텅 비지 않았고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머물던 그 방향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366)
366) 본 문단은 세존께서 두 상수제자의 죽음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본경의 내용도 그들의 죽음에 흔들리지 말고 자등명 · 자귀의 · 법등명 · 법귀의로 몸 · 느낌 · 마음 · 법에 마음을 챙길 것(四念處]으로 결론 맺고 있다.
4. “비구들이여, 지금의 나에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라는 고결한 두 상수제자가 있듯이
과거의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들께도 고결한 두 상수제자가 있었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나에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라는 고결한 두 상수제자가 있듯이
미래의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들께도 고결한 두 상수제자가 있을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경이롭다.
비구들이여,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놀랍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승의 교법에 따라 행할 것이고 스승의 교계에 따를 것이며,
사부대중367)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며 존중하고 높이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여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경이롭다.
비구들이여, 여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러한 두 제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데도 여래에게는 근심과 탄식이 없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들이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367) '사부대중(catu parisā)'은 비구, 비구니, 청신사(upāsaka, 남자신도), 청신녀(upāsikā, 여자신도)를 말한다.
6.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속재목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큰 나무의 가장 큰 가지가 꺾어진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속재목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비구 승가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7.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9. “비구들이여, [165]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바히야 경(S47:15) Bāhiya-sutta
1.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서>
2. 그때 바히야 존자368)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히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68) 바히야 존자(āyasmā Bāhiya)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바히야 경」(S35:89)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3.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내고자 합니다.”
4.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유익한 법들[善法]의 처음 시작점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369)
그러면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의 처음 시작점인가?
아주 청정한 계와 올곧은 견해이다.
바히야여, 그런 다음 그대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굳게 서서
세 가지 방법으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아야 한다. 무엇이 넷인가?
369) 본경의 §4는 본서 「비구 경」 (S47:3) §4와 같다. 그곳의 주해도 참조할 것.
바히야여, 여기 그대는 안으로(부터)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혹은 밖으로(부터)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혹은 안팎으로(부터)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안으로(부터) 느낌에서 … 혹은 밖으로(부터) 느낌에서 … 혹은 안팎으로(부터) 느낌에서 …
안으로(부터) 마음에서 … 혹은 밖으로(부터) 마음에서 … 혹은 안팎으로(부터) 마음에서 …
안으로(부터) 법에서 … 혹은 밖으로(부터) 법에서 … 혹은 안팎으로(부터)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바히야여, 그대가 계를 의지하고 계에 굳게 서서
이처럼 세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으면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쇠퇴는 예상되지 않고 오직 향상이 예상된다.”
5. 그때 [166] 바히야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6. 그때 바히야 존자는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7. 바히야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웃띠야 경(S47:16) Uttiya-sutta
2. 그때 웃띠야 존자370)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웃띠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70) 웃띠야 존자(āyasmā Uttiya)에 대해서는 본서 「웃띠야 경」(S45:30)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3~6.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내고자 합니다.”
… …
7. 웃띠야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성스러움 경(S47:17) Ariya-sutta 371)
371) 본서 「성스러움 경」(S46:19)과 같은 방법으로 설해졌다. 「성스러움 경」(S46:19)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에 관한 것이고 본경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관한 것이다.
3.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출리로 인도하며,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의 멸진으로 인도한다. 무엇이 넷 인가?”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5. “비구들이여, [167] 이러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출리로 인도하며,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의 멸진으로 인도한다.”
범천 경(S47:18) Brahmā-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셨다.372)
372)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옮긴 원어는 ajapāla nigrodha이다. 수자따(Sujātā)가 고행을 그만두신 세존께 우유죽을 공양올린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였다.(J.i.16, 69)
부처님의 성도과정과 성도후의 일화를 담고 있는 『맛지마 니까야』「성구 경」 (M26)에 해당하는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MA.ii.181 ~186)에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세존께서는 깔라 용왕의 거처가 있는(Kālanāgarājassa bhavana) 만제리까(Mañjerika, ApA.77)라는 숲에서 깨달으셨는데 첫 번째 칠일은 깨달은 바로 그 장소에서 가부좌한 하나의 자세로 좌정하고 계셨다.
② 두 번째 칠일은 깨달음을 증득하신 바로 그 자리와 그 나무[菩提樹, bodhi-rukkha]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면서 보내셨다.
③ 세 번째 칠일은 그곳 가까이에서 동에서 서로 길게 포행을 하시면서 보내셨다.
④ 네 번째 칠일은 신들에게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을 자세하게 설하셨다.
⑤ 다섯 번째 칠일은 보리수 아래로부터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가셔서 아비담마에 대한 조직적인 도(naya-magga)를 명상하셨다.
⑥ 여섯 번째 칠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아래서 머무셨다.
⑦ 일곱 번째 칠일은 왕의 처소(Rājayatana)라 불리는 나무아래서 머무셨다.
이렇게 칠일을 보내신 뒤에 여덟 번째 칠일에는 다시 염소치기의 나무 아래로 가셔서 본서 제1권 「권청(勸請) 경」(S6:1)에 나타나는 전법을 주저하는 사유를 하셨고 사함빠띠 범천은 세존께서 이 세상에 법을 설해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띠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오비구에게 본서 제6권의「초전법륜 경」 (S56:11)을 설하셨고 그들은 그 후에 본서 제3권「무아의 특징 경」(無我相經, S22:59)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두 번 이곳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가셨다. 사함빠띠 범천이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기를 간청한 곳도 이곳이었으며(본서 제1권 「권청 경」(S6:1) §4;Vin.i.5~7), 마라가 세존이 깨달으신 직후에 바로 열반에 드시기를 간청한곳도 이곳이었다.(D16. §3.34 참조)
그런데 『율장』의 『대품」(Vin.i.1~4)에는 본 주석서에 나타나는 두 번째 칠일부터 네 번째 칠일까지의 일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품』에는 깨달으신 자리에서 칠일,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칠일, 무짤린다 나무 아래에서 칠일, 왕의 처소라는 나무 아래에서 칠일 동안 머무셨고, 그 뒤에 다시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가셔서 전법에 대한 사유를 하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천상의 신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신 것과 아비담마 칠론(七論)에 대한 조직적인 명상에 대한 일화도 『율장』의 『대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율장』과 주석서에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실현하신 뒤에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신 일화가 두 번 나타나고 있다.
한편 본 『상윳따 니까야』전체에서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에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신 일화가 모두 8번이나 나타난다. 주석서는 이 가운데 「칠 년 동안 경」(S4:24)과 「존중 경」(S6:2)은 다섯 번째 칠일의 일화라고 밝히고 있다. 「권청(勸請) 경」(S6:1)은 당연히 이 여덟 번째 칠일의 일화라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제1권의 마라와 관계된 「고행 경」(S4:1)과 「코끼리 경」(S4:2)과, 사함빠띠 범천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칭송하는 본경과 본서 「도 경」(S47:43)과 다섯 가지 기능을 칭송하는 「사함빠띠 범천 경」(S48:57)은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여덟 번째 칠일의 일화는 세존께 법을 설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 일화도 모두 다섯 번째 칠일의 일화라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런데 「고행 경」(S4:1)(S6:1)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그 경의 일화를 깨달으신 후 칠일 안에(anto-satta-ahasmiṃ) 있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위 주석서의 문맥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주석서는 왜 이 니그로다 나무를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라 부르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로 설명을 한다. 첫째, 이 나무의 그늘에서 염소치기들이 쉬었기 때문이며, 둘째 나이든 바라문들이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베다를 암송하지 못하게 되자(ajapā)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기 때문이며, 셋째 한밤에 염소들에게 의지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UdA.51) 그리고 북방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을 하실 동안 의지처를 마련해드리기 위해서 염소치기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Mvu.iii.302) 이런 정황을 참작하여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옮겼다.
2. 그때 세존께서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났다.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 비구373)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한다.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373) “이때는 아직 비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챙김의 확립(sati-paṭṭhāna)을 닦는 자는 오염원을 자르기(kilesa-bhindana) 때문에 비구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i.225)
주석서는 이처럼 비구(bhikkhu)를 자름(bhindana)과 연결 지어서 설명하고 있다.
3. 그때 사함빠띠 범천이 마음으로 세존께서 마음에 일으키신 생각을 알고서
마치 힘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져서 세존 앞에 나타났다.374)
그때 사함빠띠 범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세존을 향해 합장하여 인사를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374) 본서 제1권 「권청 경」 (S6:1) §4와 「존중 경」(S6:2) §8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4.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선서시여.
세존이시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168]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입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입니다.”
5.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뒤 다시 [게송으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남의 소멸을 보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고
연민심을 가진 분께서는 유일한 길인 이 길을 아시도다.
그들은 이전에도 이 길을 따라 저 폭류를 건넜고
[미래에도 이 길을 따라] 건널 것이며 [현재에도] 건너도다.”
세다까 경(S47:19) Seda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숨바에서 세다까라는 숨바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
3. “비구들이여, 옛날에 대나무타기 곡예사가 대나무 막대기를 세우고
메다까탈리까375)라는 제자를 불러서 말했다.
'오라, 착한 메다까탈리까여. 그대는 대나무 막대기에 올라가서 나의 어깨위에 서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대나무타기 곡예사에게 대답한 뒤
제자 메다까탈리까는 대나무 막대기에 올라가서 스승의 어깨위에 섰다.
그러자 대나무타기 곡예사는 제자 메다까탈리까에게 이렇게 말했다.
'착한 메다까탈리까여, 그대는 나를 보호하라. 나는 그대를 보호하리라.
이와 같이 우리는 [169] 서로서로를 지키고 서로서로를 보호하면서
우리의 [곡예] 기술을 보여주고 돈을 벌고 안전하게 대나무 막대기로부터 내려오자.'
375) '메다까탈리까(Medaka-thālikā)'는 여성명사이다. 주석서에서도 “여성명사로 이름을 얻었다(itthi-liṅga-vasena laddha-nāma).”(SA.iii.226)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남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명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제자 메다까탈리까는 대나무타기 곡예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시여, 이것은 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스승께서는 자신을 보호하셔야 하고 저는 제 자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우리의 [곡예]기술을 보여주고 돈을 벌고 안전하게 대나무 막대기로부터 내려와야 합니다.'라고.”376)
376) 주석서를 참조해서 보면 스승은 밑에서 대나무(vaṃsa)의 한 끝을 목이나 이마에(galaāaṭake vā nalāṭe) 대고 제자는 그의 어깨를 타고 그 대나무의 위쪽 끝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둘 다 대나무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스승은 대나무 막대기를 꽉 잡고, 제자와 함께 움직이고, 막대기의 위쪽 끝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제자는 자신의 몸을 곧게 하고, 바람에 대해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안정된 마음챙김을 유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한다.”(SA.iii.226)
5.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제자 메다까탈리까가 스승에게 말한 것이 바로 [바른] 방법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나는 남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는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공부] 지음을 통해서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한다.”377)
377) “비구가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등을 버리고 밤낮으로 자신의 근본 명상주제(mūla-kamma-ṭṭhāna)를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āsevanto bhāvento, bahulī-karonto) 아라한됨을 얻는다. 그러면 남들이 그를 보고 마음에 깨끗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천상으로 가게(sagga-parāyaṇa) 된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는 것(attānaṃ rakkhanto paraṃ rakkhati)이다.”(SA.i.227)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가?
인욕과 해코지 않음과 자애와 동정을 통해서이다. 378)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378) '인욕과 '해코지 않음'과 '자애'와 '동정'은 각각 khanti, avihiṃsā, mettatā, anudayat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가운데서 해코지 않음과 자애와 동정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心, brahma-vihāra] 가운데 연민[悲, karuṇā], 자애[慈, mettā],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을 뜻한다고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주해하고 있다.
“비구가 거룩한 마음가짐에 기초한 禪들을 닦은 뒤 이러한 禪들을 기초(padaka)로 하여 형성된 것들[行]을 명상하여(saṅkhāre sammasanto)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됨을 얻는다. 그는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SA.iii.227)
여기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Nyanaponikka, Protection through Satipaṭṭhāna를 참조할 것.
8.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나는 남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경국지색 경(S47:20) Janapadakalyāṇī-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숨바에서 세다까라는 숨바들의 성읍에서 머무셨다.
2. 거기서 [170]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
3.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라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하자.
이제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傾國之色]379)가 세련되게 춤을 추고 세련되게 노래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춤을 춘단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노래한단다.'라고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379) 주석서에 의하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傾國之色, janapadakalyāṇī]'는 너무 크거나 작거나, 너무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너무 검거나 흰 여섯 가지 육체적인 결점이 없으며(cha-sarīra-dosa-rahitā), 피부(chavi)와 살점(maṃsa)과 근육(nhānu)과 뼈(aṭṭhi)와 나이(vaya)에 대한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었다(pañca-kalyāṇa-samannāgatā)고 한다.(SA.iii.227)
그때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사람이 거기에 온다고 하자.
그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이 사람아. 그대는 이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를
저 많은 사람들과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 사이로 가져가시오.
칼을 빼든 사람이 그대 뒤를 따라갈 것이오.
만일 그대가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흘리면 그는 그대의 머리를 잘라버릴 것이오.'380)라고 한다 하자.
380) 본경의 이 부분은 『자따까』(J96/i,393~401)의 게송과 관계가 있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기름이 언저리까지 가득 찬 단지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고 운반하듯이
자신의 마음을 잘 보호해야 하나니,
전에 가본 적 없는 [열반을] 희구하는 사람은.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 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리라.'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제2장 날란다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