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2:83-S22:92. 제22상윳따 - 제9장 장로 품 (Thera vagga)
- 아난다 경
- 띳사 경
- 야마까 경
- 아누라다 경
- 왁깔리 경
- 앗사지 경
- 케마카 경
- 찬나 경
- 라훌라 경1
- 라훌라 경2
아난다 경(S22:83) Ānanda-sutta
1. 한 때 아난다 존자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물렀다.
2. 거기서 아난다 존자는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응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3.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277)는 우리가 신참 [비구]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교계를 하였습니다.”
277)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āyasamā Puṇṇa Mantāṇiputta, Sk. Pūṇra Maitrāyaṇīputa, 부루나 미다라니자, 富婆那 彌多羅尼子) 혹은 만따니의 아들 뿐나 존자는 우리에게 설법제일 부루나(富那) 존자로 알려진 분이다. 그는 까삘라왓투에서 가까운 도나왓투(Donavatthu)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만따니는 안냐꼰단냐 존자(āyasmã Añña-koṇḍañña, 본서 제1권 「꼰단냐 경」(S8:9) §2의 주해 참조)의 여동생이었다. 꼰단냐 존자가 아라한이 된 후 그를 출가시켰다. 그는 까삘라왓투에서 머물면서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는 그의 동향 사람 500명을 출가하게 하여 열 가지 설법의 기본(dasa kathāvatthūni)을 가르쳤다 하며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AA.i.199~204)
그는 세존을 뵙기 위해서 사왓티로 왔으며 사리뿟따 존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한 것이 저 유명한 『맛지마 니까야』의 「역마차 경」(M24)이다. 이 경에서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으로 요약 설명하여 사리뿟따 존자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이것은 『청정도론』등에서 상좌부 수행의 핵심으로 정착이 되었다.(칠청정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19장 §22 이하를 참조할 것.) 이런 이유 등으로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A1:14:1-9)에서 그를 “법을 설하는 자(dhamma-kathika)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제4권 「뿐나 경」(S35:88 = 『맛지마 니까야』「교계 뿐나 경」, M145)에 나타나는 뿐나 존자는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는 수나빠란따(Sunāparanta, 지금의 마하라쉬뜨라 주)의 숩빠라까(Suppāraka, 뭄마이 근처라고 함)에서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업차 사왓티에 왔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다. 「교계 뿐나 경」에는 그가 세존의 허락을 받고 고향인 수나빠란따로 전법을 떠나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수나빠란따 지방에서 크게 전법활동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북방불교에서는 이 뿐나 존자를 설법제일로 여기는 듯하다.
4. “도반 아난다여, 취착하기 때문에278)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질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278) 여기서 '취착하기 때문에'로 옮긴 원어는 upādāya이다. upādāya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upādiyati의 절대분사로 '취착한 뒤에'로 직역할 수 있다. 둘째는 일종의 관형구로서 '파생된, 조건으로 하는'으로 해석이 된다. 예를 들면 catunnañ 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 rūpaṃ(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 본서 제2권 「분석 경」(S12:2) §12)을 들 수 있다. 본경에서도 이 두 가지 뜻을 다 적용할 수 있는데 문자적인 뜻을 존중하여 역자는 전자로 옮겼다.
본문은 '반연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주석서는 “upādāya는 '나름대로', '~에 대해서', '~를 두고', '반연하여'(āgamma ārabbha sandhāya paṭicca)라는 뜻이다.”(SA.ii.308)라고 동의어를 나열하여 후자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래 거울의 비유도 두 뜻을 다 비유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본서 「나의 것 경」 (S22:151) §3의 '무엇을 취착하고(kiṃ upādāya)'도 두 가지 의미로 다 사용되고 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에 자신의 얼굴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물질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사량분별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5.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6.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7. “도반 아난다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합니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8.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는
우리가 신참 [비구]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교계를 하였습니다.
나는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의 설법을 듣고 법을 관통하였습니다.”279)
279) “'나는 법을 관통하였다(dhammo me abhisamito)'는 것은 나는 지혜(ñāṇa)에 의해서 사성제의 법(catu-sacca-dhamma)을 관통하여 예류자가 되었다(sotāpanno'smi)는 뜻이다”(SA.ii.308)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문맥에서도 '관통(abhisamaya)'은 사성제를 관통하는 것을 말한다. 관통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띳사 경(S22:84) Tissa-sutta
2. 그 무렵 세존의 고종사촌인 띳사 존자280)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280) DPPN에 의하면 띳사 존자(āyasmā Tissa)는 세존의 고모인 아미따(Amitā)의 아들이라고 한다. 본서 제2권 「띳사 경」(S21:9)에 의하면 세존과는 고종사촌지간(pitucchā-putta)이었다.(DhpA.i.37에도 나타남)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281)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281) 이 정형구는 본서 제5권 「병 경」(S47:9) $§, 「쭌다 경」(S47:13) §5, 『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 (D16) §2.24, 『앙굿따라 니까야』「은사 경」(A5:56) 등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무겁고'는 madhuraka-jāta를 옮긴 것인데 문자적으로 madhuraka는 달콤한, 명랑한 등을 뜻하지만 PED의 설명처럼 '달콤한 술로 가득한, 취한'의 뜻도 된다. 그래서 madhuraka-jāta는 '술 취한 사람처럼 된'으로 직역할 수 있고 그래서 무겁고로 의역을 하였다. 주석서도 “무거운 상태가 되어서 행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sañjāta-garubhāvo viya akammañño)”(SA.ii.309)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서 제1권 「숙까 경」 1(S10:9) {842}의 주해에 나타나는 madhu-pitā(술을 마신 듯이)에 대한 설명도 참조할 것. 주석서는 '법들(dhammā)'은 교학으로서의 법(pariyatti-dhammā)을 뜻한다고 밝히고 있다.(SA.ii.309) 그런데 『앙굿따라 니까야』「은사 경」(A5:56) §1에 해당하는 주석서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법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AA.iii.259)로 설명되어 있다.
3.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고종사촌인 띳사 존자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4. 그때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도반 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라고
띳사 비구를 불러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는 세존께 대답한 뒤 띳사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띳사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띳사 존자는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띳사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 “띳사여, 그대가 많은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에 대한 … 인식에 대한 … 심리현상들에 대한 …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6.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인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심리현상들에 대한 …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린 자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7.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8.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9. “띳사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0. “띳사여, 예를 들면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길을 잘 알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길을 잘 안다고 하자.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가면 깊은 밀림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크게 패인 늪지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험한 낭떠러지가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가면 아름다운 평원이 나타날 것이오.'라고.”
11. “띳사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띳사여,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를 두고 한 말이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여래 · 아라한 · 정등각자를 두고 한 말이다.
두 갈래 길은 의심을 두고 한 말이고,
왼쪽 길은 여덟 가지로 된 그릇된 도를 두고 한 말이니
그릇된 견해, 그릇된 사유 … 그릇된 삼매이며,
오른쪽 길은 여덟 가지로 된 성스러운 도를 두고 한 말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 바른 삼매이다.
깊은 밀림은 무명을 두고 한 말이고,
크게 패인 늪지대는 감각적 욕망들을 두고 한 말이며,
험한 낭떠러지는 절망과 분노를 두고 한 말이고,
아름다운 평원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즐거워하라, 띳사여. 즐거워하라, 띳사여.
나는 교계하기 위해서 있고 나는 보호하기 위해서 있으며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
12.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띳사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282)
282) “그는 크게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곁에서 이러한 안식(安息, assāsa)을 얻은 뒤에 애를 쓰고(ghaṭenta) 정진하여(vāyamanta) 며칠 뒤(katipāha)에는 아라한됨에 확립되었다.”(SA.ii.310)
야마까 경(S22:85) Yama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사리뿟따 존자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물렀다.
2. 그 무렵 야마까라는 비구283)에게 '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다. 284)
283) 주석서와 복주서는 야마까 비구(Yamaka bhikkhu)가 누구인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284) 이 비구의 견해는 일반적인 단멸[斷見, uccheda-diṭṭhi]과는 다르다.
는 보통의 중생들은 윤회를 거듭하지만 깨달은 아라한은 단멸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그가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ā]은 일어났다가는 소멸한다. 형성된 것들의 전개(saṅkhāra-ppavatta)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는다(apavatta).'고 한다면 이것은 '나쁜 견해(diṭṭhi-gata)'가 아니고, 교법과 조화가 되는 지혜(sāsana-avacarika ñāṇa)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중생(satta)이 단멸하고 소멸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쁜 견해가 생긴 것이다.”(SA.ii.310)
3. 많은 비구들이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러자 많은 비구들이 야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4.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반들이여,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세존께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5.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야마까 존자는 더욱더 고집스럽게 집착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6. 이처럼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가 이러한 나쁜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사리뿟따 존자는 연민을 일으켜 야마까 비구에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7.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 야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반이여.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8.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항상 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9.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10. “도반 야마까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합니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285)
285) [무상 · 고 · 무아의] 세 가지 양상에 대한 가르침이 끝났을(ti-parivaṭṭa-desana-avasāna) 때 장로는 예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나쁜 견해에] 몰두하고 있는지(anuyoga-vatta)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다음의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다.”(SA.ii.310)
11.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1) 그대는 물질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286)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286) 주석서는 여기서 '여래(tathāgata)'는 중생(satta)을 뜻 한다고 밝힌 뒤 오온을 적집한 뒤(sampiṇḍetvā) 이것을 여래라고 관찰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311) 그래서 미얀마어 번역본에는 본문에서 바로 '중생'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며 빠알리-미얀마어 사전에도 나타난다고 한다.(일창 스님의 제언)
그러나 이 설명은 문맥과 잘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여기서 여래는 아라한을 존재로 실체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야마까는 번뇌 다한 존재를 먼저 상정한 뒤에 이 존재는 죽은 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라한(vimutta-citta bhikkhu)이 여래로 실체화되는 비슷한 사례를 『맛지마 니까야』「불에 대한 왓차곳따 경」 (M72/i.436~488) §14이하와 「뱀의 비유 경」 (M22/i.140) §3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대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2.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2) 그대는 물질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느낌 안에 … 인식 안에 … 심리현상들 안에 … 알음알이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3) 그대는 여래는 물질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느낌과 … 인식과 … 심리현상들과 … 알음알이와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3.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4) 그대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가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12]
14.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5) 그대는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심리현상들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287)
287) 이상 다섯 가지로 사리뿟따 존자는 야마까 존자에게 오온과 여래와의 관계를 질문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처음의 셋, 즉 ① 오온을 여래라고 관찰하는 것과 ② 오온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과 ③ 오온은 여래와 다르다고 관찰하는 것의 셋은 『맛지마 니까야』「근본에 대한 법문 경」(M1)에서 땅 등의 24가지를 “땅을 생각하고, 땅에서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고(pațhaviṃ maññati, pațhaviyā maññati, pațhavito maññati)”(M1 §3, 등)라는 세 가지로 관찰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서 제4권 「뿌리 뽑는데 어울림 경」(S35:30) §3과 「뿌리 뽑는데 도움이 됨 경」 1(S35:31) §3에서 “눈을 사랑하지 않고, 눈에서 사랑하지 않고, 눈으로부터 사량하지 않고(cakkhuṃ na maññati cakkhusmiṃ na maññati cakkhuto na maññati)”라고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를 관찰하는 것과도 같은 방법이다.
그리고 ④ 네 번째인 오온이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 것은 오온의 적집으로 여래를 상정하고, ⑤ 다섯 번째인 오온이 아닌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 것은 오온을 초월한 것으로 여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20가지 유신견과도 관계가 있다. 한편 이러한 다섯 가지 관찰은 『중론송』제22강 「관여래품」의 첫 번째 게송에 나타나는 여래에 대한 다섯 가지 추구와도 비교가 된다.(김성철 옮김 『중론』367쪽 이하와 김인덕, 『중론송 연구』 291쪽 이하를 참조할 것.)
15. “도반 야마까여, 이처럼 그대는 지금 · 여기(현재)에서도
여래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저는 전에 현명하지 못하여 나쁜 견해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리뿟따 존자께서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나쁜 견해를 제거하고 법을 관통하였습니다. 288)
288) '법을 관통함'에 대해서는 본서 「아난다 경」 (S22:83)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16. “도반 야마까여,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도반이여, 만일 제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 물질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이여,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289)
289) 이것은 다음에 나타나는 본서 「아누라다 경」(S22:86) §16에서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라고 결론 내리신 유명한 말씀에 대한 부연설명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17. “장하고 장합니다. 아마까여.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서 비유를 들겠습니다.
그러면 이 뜻에 대한 지혜가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도반 야마까여, 예를 들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부자여서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졌는데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합시다.
그런데 그의 이로움을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고 유가안은(瑜伽安隱)을 바라지 않고 그의 목숨을 빼앗아버리려는 어떤 사람이 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부자여서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졌는데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 힘으로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그러니 나는 그의 측근이 되어서 목숨을 빼앗아야겠다.'라고,
그래서 그는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고 그는 그를 섬길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시중을 잘 들고 행실이 훌륭하고 좋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그 사람을 친구로 여기고 흉금을 나누는 사이로 대하고
그에게 큰 신뢰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나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구나.'라고 알게 되고 그가 혼자 있을 때 시퍼런 칼로 그의 목숨을 빼앗아버릴 것입니다.”
18.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그가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시중을 잘 들고 행실이 훌륭하고 좋은 말을 할 때에도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혼자 있는 것을 알고 시퍼런 칼로 그의 목숨을 빼앗을 때에도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도반이여.”
19.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290)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290)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적용(opamma-saṃsandana)시키고 있다. 여기서 윤회에 집착하는(vaṭṭa-sannissita) 배우지 못한 범부는 어리석은 장자의 아들이다. 힘없고 부서지기 쉬운 오온은 그를 살해하려는 적과 같다. 적이 장자에게 와서 그를 섬기는 것은 재생연결의 순간(paṭisandhikkhaṇa)에 오온이 생기는 것과 같다. 장자가 적을 친구로 여기는 것은 범부가 오온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때와 같다. 장자가 적을 자신의 친구라고 여기면서 존중하는 것은 범부가 오온을 위해서 목욕시키고 먹이고 하는 등과 같다. 적이 장자를 살해하는 것은 오온이 무너져서 범부의 목숨이 다하는 것(jīvita-pariyādāna)과 같다.(SA.ii.311~312)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20. “그는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291)
'느낌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다, 심리현상들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알음알이는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91) 이하 §§20~23의 네 문단은 본서 「감흥어 경」 (S22:55) §5에도 나타나고 있다.
21. “그는 '물질은 괴로움이다, 물질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괴로움이다.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괴로움이다, 인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심리현상들은 괴로움이다, 심리현상들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는 괴로움이다. 알음알이는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2. “그는 '물질은 무아다, 물질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무아다, 느낌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무아다, 인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아다, 심리현상들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는 무아다, 알음알이는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3. “그는 '물질은 형성되었다[有爲], 물질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형성되었다, 느낌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형성되었다, 인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심리현상들은 형성되었다, 심리현상들은 형성되었다.' 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는 형성되었다, 알음알이는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4. “그는 '물질은 살인자다, 물질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살인자다, 느낌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살인자다, 인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심리현상들은 살인자다, 심리현상들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는 살인자다, 알음알이는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5. “그는 물질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합니다. 292)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합니다.
이처럼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까이하고 취착하여
그에게는 오랜 세월 손해가 있고 괴로움이 있게 됩니다.”
292)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고수한다(upeti upādiyati adhiṭṭhāti)'는 본서 제2권 「깟짜나곳따 경」 (S12:15) §5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곳의 주해를 참조할 것.
26.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27. “그는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다, 심리현상들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알음알이는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28. “그는 '물질은 괴로움이다, 물질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괴로움이다,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괴로움이다, 인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심리현상들은 괴로움이다, 심리현상들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알음알이는 괴로움이다. 알음알이는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29. “그는 '물질은 무아다, 물질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무아다, 느낌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알고,
'인식은 무아다, 인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심리현상들은 무아다, 심리현상들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알음알이는 무아다, 알음알이는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0. “그는 '물질은 형성되었다[有爲], 물질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형성되었다. 느낌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형성되었다, 인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심리현상들은 형성되었다, 심리현상들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알음알이는 형성되었다, 알음알이는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1. “그는 '물질은 살인자다, 물질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살인자다, 느낌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살인자다, 인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심리현상들은 살인자다, 심리현상들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알음알이는 살인자다, 알음알이는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2. “그는 물질을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게 됩니다.”
33. “도반 사리뿟따여,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를 연민하고
동료 수행자의 이로움을 원하여 교계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저는 사리뿟따 존자가 베푸신 이러한 설법을 듣고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293)
293) '취착이 없어져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는 이 문장은 B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4.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고 야마까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사리뿟따 존자의 가르침을 크게 기뻐하였다.
아누라다 경(S22:86)294) Anurādha-sutta
294) 본경은 본서 제4권 「아누라다 경」(S44:2)과 같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아누라다 존자295)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아누라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누라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295) 주석서와 복주서는 아누라다 존자(āyasmā Anurādha)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3. “도반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296)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297)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298)
296) 여기서 여래는 앞 경에 해당하는 주석서가 중생(satta)이라 정의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여기서 여래는 부처님 혹은 아라한을 뜻한다.
297)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uttama-purisa, parama-purisa, parama-pattipatta)'이라는 이 표현은 본서 제4권「토론장 경」(S44:9) §3 이하에도 나타나고 있다.
298) 이 네 가지는 모두 여래를 자아로 파악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첫 번째 견해는 상견을, 두 번째는 단견을, 세 번째는 혼합주의(일부 상견)를, 네 번째는 회피하는 회의론을 나타낸다. 본서 제3권 「왓차곳따 상윳따」 (S33)의 55개 경들과 제5권 「설명하지 않음 상윳따」(S44)에 포함된 11개 경 모두는 전적으로 이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본서 제2권「사후(死後) 경」(S16:12)도 그렇다.
4. 이렇게 말하자 아누라다 존자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299)
299) “아누라다 존자에게는 '이것은 교법(sāsana)에 위배(paṭipakkhā)되고 상반(paṭivilomā)된다. 스승께서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래에 대해서] 서술하지 않으실 것이다. 스승께서는 분명히 다르게 말씀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SA.ii.312)
5.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6.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아누라다 존자에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7. 그러자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자 저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제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제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8.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9.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10. “아누라다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1.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1) 그대는 물질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2.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그대는 물질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느낌 안에 … 인식 안에 … 심리현상들 안에 … 알음알이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3.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그대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가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4.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4) 그러면 그대는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심리현상들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5. “아누라다여. 이처럼 그대는 지금 · 여기(현재)에서도
여래는 실재하고 견고하다고300)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대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즉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로 천명하십니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01)
300) '실재하고 견고하다고'는 saccato thetato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실재하는 것과 견고한 것(bhūtato ca thirato ca)”(MA.i.70)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301) 본경의 흐름을 살펴보면, 본경 §§8~9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개념적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하시어 이 오온 각각이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천명하신다. 이렇게 하여 §10에서는 각각 강한 위빳사나 도-아라한과-반조로 설명이 되는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됨을 천명하신다. 그런 뒤 §11~14에서 다섯 가지 방법으로 지금 · 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온을 여래라고 볼 수 없다고 단정하신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여기 §15에서 내생에 여래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하는 언급 자체가 전혀 잘못되었음을 결론짓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석적인 방법으로 본 「무더기 상윳따」 (S22) 전체에서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의 통찰과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혹은 염오-이욕-소멸)을 거듭 강조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 「무더기 상윳따」뿐만 아니라 본서 제4권 「육처 상윳따」(S35)에서도 오온에 대한 멋진 비유가 나타나고 있다. 제4권 「류트 비유 경」(S35:246) §6에서 세존께서는 류트의 비유를 드신 뒤에 §7에서 이런 방법으로 오온을 탐구하면 “'나'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나는 있다.'라는 [견해 등은] 더 이상 그에게 존재하지 못한다.”고 강조하신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류트는 오온이고 왕은 수행자(yoga-avacara)라고 봐야 한다. 왕이 류트를 열 조각으로 부순 뒤에 살펴보고 소리를 발견하지 못하여 류트에 대한 흥미가 없어진(anatthika) 것처럼, 수행자도 오온에 대해서 명상하여(sammasanta) '나(ahaṃ)'라거나 '내 것(mamaṃ)'이라고 취할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온에 대해서 흥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그가 오온을 명상(khandha-sammasana)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i.67)
이 비유야말로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오온에 대한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 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생긴다는 본 「무더기 상윳따」(S22)의 가르침에 대한 멋진 비유라 할 수 있다.
16.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라다여.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302)
302) 이 말씀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세존께서는 사후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시지 않고 지금 · 여기(현재)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도달하는 실천적인 길을 설할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만으로는 여래에 대한 관찰과는 연결 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둘째는 여래란 무상한 여러 현상들이 합성된 것이요 그래서 괴로움이요 그래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지 인습적 표현(vohāra)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은 단지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습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천명한다는 것이다. 꼭 같은 방법으로 “비구들이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맛지마 니까야』「뱀의 비유 경」(M22/i.140~141) §38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위의「야마까 경」(S22:85) §16도 참조할 것.
왁깔리 경(S22:87) Vakkal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왁깔리 존자303)는 도기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304)
그때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03) 왁깔리 존자(āyasmā Vakkali)는 사왓티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그는 삼베다에 능통했는데 처음 부처님을 뵙자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 가까이 있기 위해서 출가하였다고 하며, 먹고 씻고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온통 부처님만 생각하였다고 한다.(AA.i.250) 세존께서 본경 §3에서 왁깔리에게 하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yo kho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dhammaṃ passati).”는 말씀은 아주 유명하다. 한편 그의 아라한과의 증득과 죽음에 대해서는 경들과 주석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A1:14:2-11)에 해당하는 주석서에 의하면 그가 세존 곁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하였기 때문에 안거를 마치던 날 세존께서 이제 떠나라는 말씀을 하시자 슬퍼서 독수리봉 산의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세존께서 “오라, 왁깔리여.”라 부르는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적고 있다.(AA.1.250~251) 그러나 본경 §§18~21을 종합해보면 그는 마지막 병상에서 세존의 말씀을 들은 뒤 자결하면서 아라한과를 얻은 것이 된다.(S.iii.119ff) 여러 주석서들은 그가 신심 깊은 자(saddhādhimutt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A1:14:2-11)에서도 그는 “신심 깊은 자(saddhādhimutt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304) 주석서는, “존자는 안거를 마치고(vuttha-vassa) 세존을 뵈러 가는 중이었는데 이 도시에서 중병(mahā-ābādha)에 걸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들것(mañcaka-sivika)에 실은 뒤 도기공의 집(kumbhakāra-sālā)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은 작업장(kamma-sālā)이지 살림집 (nivesana-sālā)은 아니었다.”(SA.ii.313)고 적고 있다.
3.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시오.”
4. “알겠습니다, 도반이여.”이라고 그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5. 그때 세존께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였다.305)
그러자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05) '[몸을] 움직이다.'는 samadhosi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samadhosi란 이리저리 흔들었다(samantato adhosi)는 말이다. 움직임(calanākāra)을 통해서 존경(apaciti)을 표하였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중병에 걸렸더라도 연장자(buḍḍha-tara)를 보면 일어남(uṭṭhānākāra)을 통해서 존경을 표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SA.ii.313)
“그만 하여라, 왁깔리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겠다.”
6.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악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왁깔리여, 어떻게 견딜 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차도가 없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7. “왁깔리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왁깔리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왁깔리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에는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8.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306)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306) “세존께서는 '대왕이여,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는 자입니다(dhammakāyo kho, mahārāja, tathāgato).'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법을 몸으로 함(dhamma-kāyatā)을 보이신 것이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lokuttara-dhamma)이 여래의 몸이기 때문이다.”(SA.ii.314)
그러나 '대왕이여,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는 자입니다.'라고 주석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문장은 니까야에서 찾기가 힘들다. 대신에 “와셋타여, 여래에게는 '법을 몸으로 가진 자'라는 이런 다른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tathāgatassa hetaṃ vāseṭṭha adhivacanaṃ dhammakāyo iti pi).”(D27/iii.84)라는 『디가 니까야』「세기경」(D27) §9를 인용할 수 있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은 예류도, 예류과부터 아라한도, 아라한과까지의 8가지와 열반을 뜻한다.
두 번째 구절에서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진정으로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을 봐야 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 왁깔리 존자와 교리문답을 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이 체득하신 무상 · 고 · 무아의 법을 봐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성취하여 깨달음을 실현해야 진정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0.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11. “왁깔리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2. 그때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독수리봉산307)으로 가시었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나가신지 오래되지 않아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07) '독수리봉 산'으로 옮긴 원어는 Gijjhakūṭa pabbata이다. 주석서에서는 “독수리(gijjha)들이 그곳의 봉우리(kūṭa)들에 살았다고 해서, 혹은 그곳의 봉우리가 독수리를 닮았다고 해서 독수리봉이다.”(DA.ii.516)라고 설명하고 있다. 독수리봉은 라자가하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독수리봉으로 올라가는 기슭에는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바위를 굴렸던 곳이 있으며(Vin.ii.193 등) 이곳에서 설하신 경들이 다수 전해 온다. 지금도 세계에서 많은 불자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곳이다. 특히 『법화경』이 설해진 곳이라 하여 대승불교권에서 신성시 하고 있다. 실제로 가보면 날개를 접은 독수리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 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308)로 옮겨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집안에서 임종할 생각을 하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놓았다.
308) 바로 이곳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Isigili-passa-kāla-silā)에서 고디까 존자(āyasmā Godhika)도 자결을 하였다. 본서 제1권 「고디까 경」(S4:23) §7을 참조할 것.
13. 그때 세존께서는 그날 밤을 독수리봉 산에서 머무셨다.
그날 두 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 309)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잘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310)
309) “'해탈하고자 의도한다(vimokkhāya ceteti).'는 것은 도의 해탈(magga-vimokkha)을 하고자 의도한다는 말이다.”(SA.ii.314)
여기서 해탈로 옮긴 단어는 vimokkha인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해탈로 옮기는 vimutti와 같은 어원(vi+√muc, to release)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쓰이는 문맥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역자는 둘 다 해탈로 옮기고 있다.
310) “'잘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suvimutto vimuccissati).'라는 것은 아라한과의 해탈(arahatta-phala-vimutti)로 해탈한 자가 되어 해탈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신들은 그가 어떤 방법(nīhāra)으로 위빳사나를 일으키든 그는 곧바로(anantarāyena) 아라한됨(arahatta)을 얻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i.314)
두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거기서 사라졌다.
14.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왁깔리 비구에게 가라.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신의 말을 들으시오.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잘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5.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한 뒤 왁깔리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신의 말을 들으시오.”
그때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에서 내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분 세존의 교법을 들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에서 내려놓았다.
16.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잘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7.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려주시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드려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물러갔다.
18.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비구들이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서 칼을 사용해서 [자결을 하였다.]311)
311) 경문을 통해서 보면 왁깔리는 자신이 이미 아라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석서의 입장은 다르다. 주석서는 이렇게 말한다.
“장로는 자신을 과대평가(adhimānika)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삼매와 위빳사나로 오염원들을 억압(vikkhambhita)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염원이 출몰하는 것(samudācāra)을 보지 못하고 '나는 번뇌 다한 자다.'라는 인식을 가져서 '내가 이 괴로운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칼을 사용해서 죽음을 택할 것이다.'라고 날카로운 칼로 목의 핏줄(kaṇṭha-nāḷa)을 끊었다. 그러자 그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그는 그 순간에 자신이 범부의 상태임을 알고 즉시 자신의 근본 명상주제(mūla-kammaṭṭhāna)를 취해서 명상을 하여(sammasanta) 아라한이 되자마자 임종을 하였다.
그러면 반조(paccavekkhaṇā)는 어떻게 되었는가?(아라한이 되자마자 죽어버리면 반조할 순간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임)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는 최대 19가지 반조만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즉 아라한에게는 반조할 번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반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임.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34의 59-2의 해설을 참조할 것.)(SA.ii.314~315)
아무튼 주석서도 그가 아라한으로 임종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본경 §21에서 세존께서도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본서 제1권 「고디까 경」(S4:23)에서 고디까 존자는 이러한 확신이 없이 자결을 하였다. 그는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sāmāyika cetovimutti)을 얻고 나오고 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한 뒤에 자결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임종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세존께서 인정하셨다.(S4:23 §9)
19. 그때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20.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자.
거기서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가 칼을 사용해서 [자결을 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가 침상위에서 몸통이 거꾸로 된 채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보셨다.
그 무렵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간방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21.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
간방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알음알이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알음알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는
알음알이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앗사지 경(S22:88) Assaj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앗사지 존자312)는 깟사빠까 원림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앗사지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12) 앗사지 존자(āyasmā Assaji)는 오비구 가운데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분이다. 그는 오비구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예류자가 되었다고 한다.(AA.i.84)
그리고 오비구와 함께 본서 「무아의 특징 경」(無我相經, Anattalakkhaṇa-sutta, S22:59/iii.66)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사리뿟따 존자가 진리를 찾아다니던 끝에 라자가하에서 걸식을 하는 앗사지 존자의 엄정한 품행을 보고 그가 공양을 마칠 때를 기다려 앗사지 존자에게 그의 스승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자 그는 다음의 유명한 게송으로 대답을 한다.
“원인으로부터 생긴 법들
그들의 원인을 여래는 말씀하셨고
그들의 소멸도 [말씀하셨나니]
대사문은 이렇게 설하시는 분입니다.”(Vin.i.40)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etuṁ Tathāgato āha tesañ ca yo nirodho
evaṁ vādī Mahāsamano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사리뿟따 존자는 게송의 첫 번째 두 구절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Vin.i.39~40, DhpA.i.75ff) 사리뿟따 존자는 그 후로 항상 앗사지 존자에게 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DhpA.iv.150~151)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짧은 삿짜까 경」(M35)에서 그는 니간타의 후예인 삿짜까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오온의 무상과 무아를 가르치신다고 대답한다.(§4) 이것이 인연이 되어 삿짜까는 500명의 릿차위들을 데리고 세존께 질문을 드리러 가게 된다.
3.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앗사지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이라고 그 비구들은 앗사지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4.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앗사지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5. 그때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으심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앗사지 존자에게로 가셨다.
앗사지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하여라, 앗사지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겠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앗사지여, 어떻게 견딜 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앗사지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앗사지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7. “앗사지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전에 제가 아팠을 때는 몸의 작용313)을 계속적으로 고요하게 하면서 [제4선에 들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314)
313) “여기서 '몸의 작용(kāya-saṅkhāra)'이란 들숨과 날숨이다. 왜냐하면 제4선을 통해서 들숨날숨을 고요하게 하면서 머물기 때문이다.”(SA.ii.315)
『맛지마 니까야』「염처경」(M10/i.56) §4와 「짧은 방등경」 (M44/i.301) §14에서도 들숨날숨이 몸의 작용이라고 나타나며, 본서 제4권 「한적한 곳에 감 경」(S36:11) §5에서도 제4선에서는 들숨날숨이 멈춘다고 설하고 있다. 한편 본서 전체에서 역자는 kāya-saṅkhāra(신행, 身行)를 크게 두 가지로 옮기고 있다. 여기서처럼 '몸의 작용'으로도 옮기기도 하고, '몸의 의도적 행위'로도 옮긴다. 삼행(三行) 즉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과 구행(口行, vaci-saṅkhāra)과 심행(心行, citta-saṅkhāra)의 문맥에서 나타날 때와 (예를 들면 본서 제4권 「까마부 경」2(S41:6) §3) 여기서처럼 들숨날숨을 뜻할 때는 '몸의 작용'으로 옮기고 있으며, 12연기 각지 가운데 두 번째인 의도적 행위(saṅkhāra)를 설명하는 문맥에서 나타날 때는 '몸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예를 들면 본서 제2권「분석 경」 (S12:2) §14)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신행, 구행. 심행을 각각 '몸의 행위'와 '말의 행위'와 '마음의 행위'로도 옮기기도 하였으나, 본서 제4권 「까마부 경」2(S41:6) §3이하를 참조하여 이 경우도 모두 몸의 작용[身行], 말의 작용[口行], 마음의 작용[心行]으로 통일하여 옮겼다. 이 셋을 의도적 행위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314) “그는 병에 걸렸기(ābādha-dosa) 때문에 전에 얻었던 모든 본삼매의 증득(appit-appitā samāpatti)으로부터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내가 교법(sāsana)으로부터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SA.ii.315)
“앗사지여, 삼매를 속재목으로 여기고 삼매를 사문의 결실이라 여기는315)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삼매에 들지 못하면 그들에게 '우리는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315) “'삼매를 속재목[心材]으로 여기고 삼매를 사문의 결실이라 여기는(samādhi-sārakā samādhi sāmaññā)'이란 삼매를 속재목(sāra)으로 여기고 사문됨(사문의 결실, sāmaññ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세존께서는 여기서 '그러나 나의 교법(sāsana)에서는 이것이 속재목이 아니다. 위빳사나와 도와 과(vipassanā-magga-phalāni)가 속재목이다. 그런데 그대는 삼매로부터 쇠퇴하였다고 해서 왜 교법으로부터 쇠퇴하였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장로를 안심시키신 뒤에 이제 세 가지로 된 설법(ti-parivaṭṭa dhamma-desana)을 시작하시는 것이다.”(SA.ii.315)
8.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 느낌은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9.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10. “앗사지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316)
316) “세 가지로 된 설법(ti-parivaṭṭa-desana = 무상 · 고 · 무아의 삼특상에 대한 설법)이 끝나자 그는 아라한됨을 증득하였다.(그러나 본서「무아의 특징 경」(S22:59) §7에는 「무아의 특징 경」을 듣고 아라한이 된 것으로 나타남) 이제 그에게 [아라한의] 항상 머묾(satata-vihāra)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이라는 [이 다음 가르침을] 설하셨다.”(SA.ii.315)
11.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317)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317) 여기서부터 본경의 마지막까지는 본서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2(§12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와 제4권 「간병실 경」1(S36:7) §§9~11(§11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과 제6권 등불 비유 경」(S54:8) §§9~11(§11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에도 나타나고 있다. 경문에 대한 설명은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12.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3. “앗사지여, 예를 들면 기름을 반연하고 심지를 반연하여 기름 등불이 탄다 하자.
거기에다 어떤 사람이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으면
그 기름 등불은 꺼질 것이다. 318)
318) 본서 제2권 「족쇄 경」1 (S12:53) §§3~4에도 이 비유가 12연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가르침은 본서 제4권 「간병실 경」1/2(S36:7~8) §11과 제6권 등불 비유 경」(S54:8) §24에도 나타나고 있다.
앗사지여,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 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케마까 경(S22:89) Khema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많은 장로 비구들이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렀다.
2. 그 무렵 케마까 존자319)는 도기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장로 비구들은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 다사까 존자320)를 불러서 말했다.
319) 주석서와 복주서는 케마까 존자(āyasmā Khemaka)가 누구인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320) DPPN은 다사까 존자(āyasmā Dāsaka)가 『장로게』(Thag.4) {17}을 지은 다사까 존자와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장로게 주석서』에 의하면 『장로게』 (17)을 지은 다사까 존자는 사왓티에서 태어났으며 아나타삔디까(급고독) 장자에 의해서 승원을 돌보는 일(vihāra-paṭijaggana-kamma)에 고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일을 하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신심이 생겨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주석서는 다른 견해도 적고 있다. 그는 아나타삔디까 장자의 하녀(dāsa)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다사까(dāsaka, 하녀의 아들)가 된 것이다. 장자는 그가 출가할 수 있도록 하인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깟사빠 부처님 시대에 출가한 스님이었는데 자기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서 어떤 아라한에게 일을 시켜서 그 과보로 금생에 하녀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ThagA.72~73)
3.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어떻게 견딜 만합니까? 그대는 편안합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4.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어떻게 견딜 만합니까? 그대는 편안합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5. 그러자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대상이 되는]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합니까?'라고.”
6.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합니까?'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7. 그때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그런데 만일 케마까 존자가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321)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322)
321)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은 avigataṃ으로 읽고 옮긴 것이다. Ee, Be, Se의모든 판본에서 adhigataṃ(얻은, 증득한, 이해한)으로 나타나지만 이렇게 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디 스님은 avigataṃ으로 제언하고 있고(보디 스님, 1082~1083 176번 주해 참조) 역자도 이를 따랐다. 본서「관찰 경」(S22:47) §3의 주해도 참조할 것.
322) 본문은 유학(sekha)과 아라한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유학은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20가지 유신견은 극복하였지만 아직 “오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anusahagato asmī ti māno asmī ti chando - 아래 본문 §23에 나타남)” 등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무학인 아라한은 모든 그릇된 생각의 근본 뿌리인 무명(avijjā)을 모두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관념이 남아있지 않다.
케마까 존자는 적어도 예류자는 되었다.(어떤 자들은 그가 일래자였다고도 하고 어떤 자들은 불환자였다고 한다는 견해를 복주서는 적고 있다. SAȚ.ii.220)
9. 그때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느낌을 두고 … 인식을 두고 … 심리현상들을 두고 …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 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합니까?'라고.”
10.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합니까?'라고.”
“도반 다사까여,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왜 그대가 이 일로 왔다갔다해야 합니까?
도반이여, 지팡이를 주십시오. 내가 장로 비구들에게 직접 가겠습니다.”
11.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지팡이를 짚고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케마까 존자에게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 라고 말합니까?
느낌을 두고 … 인식을 두고 … 심리현상들을 두고 …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 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합니까?”
12.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 인식을 두고 … 심리현상들을 두고 …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향기가 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는 꽃잎에서 난다고 하거나 꽃자루323)에서 난다고 하거나 암술에서 난다고 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바르게 설명하는 것입니까?”
“도반이여, 꽃에서 향기가 난다고 설명해야 바르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323) '꽃자루'는 보디 스님의 제언에 따라 Ee, Be, Se의 vaṇṇassa(색깔, 아름다움, 외관) 대신에 SS의 vaṅṭassa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 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 인식을 두고 … 심리현상들을 두고 …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324)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324) '미세한'은 anusahagato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sukhumo(미세한, 섬세한)로 설명하고 있어서(SA.ii.316) 이렇게 옮겼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 :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 감각적 욕망, 악의
유신견(有身見, sakkāya diṭṭhi) : 오온(五蘊)이 궁극, 실체라는 견해.
의심[疑(의), vicikicchā] : 불법(佛法)에 대한 의심.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
감각적 욕망(kāma-rāga)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paṭigha) :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냄과 동의어.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14.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더럽고 때가 묻은 천이 있는데
주인이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긴다 합시다.
그러면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빤 뒤
맑은 물에 헹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 소금물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세탁업자가 이런 천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다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있던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모두 뿌리 뽑히게 될 것입니다.”325)
325) 주석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더러운 천(kiliṭṭha-vattha)은 범부(puthujjana)의 마음의 행로(cittācāra)와 같다. 세 가지 세제(khārā)는 [무상 · 고 · 무아의] 삼특상을 관찰(anupassanā)하는 것이다. 세 가지 세제에 의해서 세탁된 천은 설법으로 문질러진(maddita) 불환자(anāgami)의 마음의 행로와 같다. 미세한 소금물 등의 냄새(ūsādi-gandha)는 아라한도로 박멸되어야 할(arahatta-magga-vajjhā) 오염원들(kilesā)이다.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gandha-karaṇḍaka)는 아라한도의 지혜요,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 들어가서 미세한 소금물 냄새 등이 모두 뿌리 뽑히는 것은 아라한도에 의해서 모든 오염원들이 멸진되는 것(sabba-kilesa-kkhaya)이다. 마치 냄새가 완전히 제거된 옷을 입고 축제일(chaṇa-divasa)에 여러 곳으로 좋은 향기를 뿜으면서 다니는 것처럼 번뇌 다한 자는 계의 향기(sīla-gandha) 등으로 시방(十方)을 원하는 대로 다니게 된다.”(SA.ii.317)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15.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케마까 존자를 성가시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교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교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16. 케마까 존자의 말을 들은 장로 비구들은 이처럼 마음이 흡족해져서
케마까 존자의 말을 크게 기뻐하였다.
17.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와
케마까 존자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찬나 경(S22:90) Chann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물렀다.
2. 그 무렵 찬나 존자326)는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
[승원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에서 저 승원으로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326) 주석서에 의하면 찬나 존자(āyasmā Channa)는 세존께서 출가하실 때 마차를 몰던 찬나였다고 한다. 그도 뒤에 출가하였지만 그는 세존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에 대해서 지나친 자만과 오만이 생겨서(makkhī ceva paḷāsī) 다른 비구들을 험담하며 지냈다고 한다.(SA.ii.317)
부처님께서는 반열반하실 때 특별히 찬나 존자를 언급하시면서 그에게 일종의 집단 따돌림인 최고의 처벌(brahma-daṇḍa)을 주라고 당부하셨다.(『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D16) §6.4 참조) 세존께서는 찬나와의 인연을 중히 여기시어 임종의 마지막 침상에 누우셔서도 그를 구제할 방법을 찾으신 것이다. 『율장』에 의하면 찬나 비구는 이 처벌을 받고 정신이 들어서 자만심과 제멋대로 하는 성질을 꺾고 홀로 한거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Vin.ii.292)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본경은 찬나에게 이러한 최고의 처벌이 내려진 후에 생긴 일화를 담고 있다.
3.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를 훈도해 주소서,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소서.
장로 존자들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법을 설해 주소서.”
4.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찬나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합니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심리현상들은 무아고 알음알이는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諸法無我].”327)
327)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諸行無常, sabbe saṅkhārā aniccā].'라는 것은 삼계에 속하는 모든 형성된 것들(te-bhūmaka-saṅkhārā)은 무상하다는 말이다.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라는 것은 4가지 세계(삼계 + 출세간)에 속하는 모든 법들(catu-bhūmaka-dhammā)은 무아라는 말이다.
이처럼 그 비구들은 장로에게 무상의 특상(anicca-lakkhaṇa)과 무아의 특상(anatta-lakkhaṇa)의 두 가지 특상은 말했으나 괴로움의 특상(dukkha-lakkhaṇa)은 말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비구는 시비걸기를 좋아하기(vādī) 때문에 괴로움의 특상을 언급하는 순간에 '물질도 … 알음알이도 괴로움이라면 도도 괴로움이요 과도 괴로움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괴로움을 얻은(dukkha-ppattā) 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특상만 말한 것이다.”(SA.ii.318)
한편 『맛지마 니까야』「짧은 삿짜까 경」(M35/i.228과 230) §4와 §9에서도 앗사지 존자는 니간타의 후예인 삿짜까에게 오온의 무상과 무아만을 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도 위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MA.ii.271)
5. 그때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심리현상들은 무아고 알음알이는 무아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關]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빛바램, 소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대신에 초조함에 기인한 취착이 생겨서 나의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328)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자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인가?'
328)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에 대한 원문은 atha ko carahi me attā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장로는 조건(paccaya)을 파악하지 못하고(apariggahetvā) 위빳사나를 시작하였다. 그의 약한 위빳사나(dubbala-vipassanā)는 자아라고 거머쥐는 것(atta-gāha)을 철저하게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성된 것들이 공하다고 드러나게 되자 '나는 이제 멸절할 것이고(ucchijjissāmi) 파멸할 것이다(vinassissāmi)'라는 단견(uccheda-diṭṭhi)과 두려움(paritassanā)이 생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낭떠러지(pāpata)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고 한 것이다.”(SA.ii.318)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보름밤 경」(S22:82) §15와 주해도 참조할 것.
한편 조건을 파악함(paccaya-pariggaha)은 칠청정(『아비담마 길라잡이』 §22 참조) 가운데 네 번째인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kaṅkhā-vitaraṇa-visuddhi)의 내용이다. 이것은 나를 이루는 오온, 즉 정신과 물질의 원인과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인데, 오온을 무상 ·고 · 무아로 통찰하는 본격적인 위빳사나에 앞서서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것으로 『청정도론』에는 언급되어 있다.(『청정도론』 XIX.] 이하와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강 §31 을 참조할 것.)
6.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그러니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
그때 찬나 존자는 거처를 잘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꼬삼비에 있는 고시따 원림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찬나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7. “도반 아난다여, 한때 나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 나는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 [승원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에서 저 승원으로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를 훈도해 주소서. 장로존자들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소서,
장로 존자들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법을 설해 주소서.'라고,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찬나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합니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심리현상들은 무아고 알음알이는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爲]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諸法無我].'라고,
그때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물질은 무상하고 …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자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인가?'라고,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그러니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를 훈도해 주소서.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소서.
아난다 존자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법을 설해 주소서.”
8. “이 정도로도 나는 찬나 존자 때문에 기쁩니다.
그러니 찬나 존자는 이제 스스로를 활짝 열었고 자신의 삭막함329)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29)『앙굿따라 니까야』제3권 「삭막함 경」(A5:205), 제5권 「마음의 삭막함경」(A9:71), 제6권 「삭막함 경」(A10:14) 등과, 『디가 니까야』제3권 「합송경」(D33) §2.1, 『맛지마 니까야』「마음의 삭막함 경」(M16) §§3~6등에는 '다섯 가지 마음의 삭막함(pañca cetokhil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다섯 가지는 스승과 법과 승가와 계율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네 가지에다, 동료 수행자들에게 화내고 기뻐하지 않고 불쾌하게 여기고 삭막해지는 것을 더한 것이다. 여기서 칸나 존자의 경우는 다섯 번째 마음의 삭막함을 이제 부수었다고 아난다 존자가 칭송하는 것이다.
그때 찬나 존자에게는 '내가 법을 알 수 있다고 하는구나!'라는 크고 광대한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9.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이]
깟짜나 곳따 비구를 훈도하는 것을 들었고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330)
330) 이하 인용되고 있는 부분은 본서 제2권 「깟짜나곳따 경」(S12:15) §§4~6과 일치한다. 본문에 대한 설명은 이 경의 해당 주해들을 참조할 것.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이라는 두 가지에 대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집착과 취착과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331)
331) 아난다 존자가 여기서 본서 제2권 「깟짜나곳따 경」(S12:15) §§4~6을 인용한 것은 특별히 돋보인다. 이 경(S12:15)은 연기의 가르침이 어떻게 상견과 단견을 극복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단지 괴로움의 일어남과 소멸이 있을 뿐이라는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격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도반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를 연민하고 그의 이로움을 원하여
교계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저는 아난다 존자가 베푸신 이러한 설법을 듣고 법을 관통하였습니다.”
라훌라 경1(S22:91)332) Rāhula-sutta
332) 본경은 본서 「라다 경」(S22:71)의 마지막 문단을 제외한 것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서>
2. 그때 라훌라 존자333)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33) 라훌라 존자(āyasmā Rāhul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눈[眼] 경」(S18:1)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3.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4.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5.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라훌라 경2 (S22:92) 334)
334) 본경은 본서 「수라다 경」(S22:72)의 마지막 문단을 제외한 것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2. 그때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우리의] 마음은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잘 해탈하게 됩니까?”
4.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5.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마음은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잘 해탈하게 된다.”
제9장 장로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