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2:1-S22:11. 제22상윳따 - 온의 요소 상윳따 (Khandha samyutta) 제1장 나꿀라삐따 품 (Nakulapita vagga)
- 나꿀라삐따 경
- 데와다하 경
- 할릿디까니 경1
- 할릿디까니 경2
- 삼매 경
- 홀로 앉음 경
- 취착에 의한 초조함 경1
- 취착에 의한 초조함 경2
- 과거/미래/현재 경1
- 과거/미래/현재 경2
- 과거/미래/현재 경3
할릿디까니 경1(S22:3) Hāliddikān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마하깟짜나 존자54)는 아완띠55)에서 꾸라라가라의 빠빠따 산56)에 머물렀다.
54)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혹은 마하깟짜야나(Mahā-Kacāyana, 니까야에는 두 가지 표현이 다 나타남. 대가전연(大迦旃延, 摩訶迦旃延) 혹은 가전연(迦旃延)으로 한역되었음.) 존자는 이곳 아완띠(Avanti, 아래 주해참조)의 수도인 웃제니 (Ujjeni, 지금 인도 맛댜쁘라데쉬의 우자인 지방)의 짠다빳조따(Caṇḍappajjota) 왕의 궁중제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깟짜나는 그의 족성이다. 그는 베다에 능통했으며 그의 부친이 죽은 뒤 대를 이어 궁중제관이 되었다. 그는 짠다빳조따 왕의 명으로 일곱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을 웃제니로 초대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갔다가 설법을 듣고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어 출가하였다.(AA.i.206)
이런 이유 때문에 마하깟짜나 존자는 아완띠와는 인연이 많으며 특히 본경에서 언급되는 꾸라라가라(Kuraraghara)와는 많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앙굿따라 니까야』「깔리 경」(A10:26)도 존자가 이곳에서 설한 것이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에서 으뜸가는 사부대중으로 언급되고 있는 소나 꾸띠깐나(Soṇa Kuṭikaṇṇa) 존자(A1:14:2-9 참조)와 까띠야니(Kātiyānī) 청신녀(A1:14:7 8 참조)도 이곳 출신이었다.
『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A1:14:1-10)에는 마하깟짜나 존자가 “간략하게 설한 것에 대해 상세하게 그 뜻을 설명하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주석서는 이 보기로 『맛지마 니까야』「꿀 덩어리 경」(Madhupiṇḍika Sutta, M18)과 「깟짜나 뻬얄라」(M133인 듯)와 「도피안 경」(Pārāyana Sutta)을 들고 있다.(AA.i.209) 이 가운데 특히 『맛지마 니까야』의 두 경은 멋진 보기가 된다. 그리고 본경과 다음 경, 그리고 본서 제4권 「할랏다까니 경」(S35:130)과 「로힛짜 경」 (S35:132) 등도 이러한 그의 재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북방에서도 깟짜나(가전연) 존자는 논의게일(論議第一)로 꼽힌다.
55) 아완띠(Avanti)는 옛 인도 궁원의 16국(Mahājanapada) 가운데 하나로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Kosala)와 왕사(Vaṃsa, Vatsa)와 더불어 4대 강국으로 꼽혔다고 한다. 수도는 웃제니(Ujjenī, 지금의 Ujain)와 마힛사띠(Māhissati)였다. 한때 아완띠는 북쪽과 남쪽(Avanti Dakkhiṇā-patha)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둘은 각각의 수도였다고도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빳조따 왕이 통치하였으며, 그는 그의 불같은 성품 때문에 짠다빳조따(Caṇḍa Pajjota)로 잘 알려졌다.(Vin.i.277)
56) '빠빠따 산'은 Papāta pabbata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papāta는 '낭떠러지'를 뜻하는 보통명사로도 볼 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깔리 경」(A10:26) §1에서는 pavatta pabbata로 나타나는데 이런 이유로 이를 산협(山峽)으로 옮겼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papāta를 고유명사로 읽어서 빠빠따 산으로 옮긴다. pabbata가 산이기 때문에 이 전체를 산협(山峽)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해서이다.
2. 그때 할릿디까니 장자57)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할릿디까니 장자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57) 할릿디까니 장자(Hāliddikāni gahapati)가 누군지 주석서와 복주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와 관계된 경으로는 본경과 다음 경과 본서 제4권「할릿다까니 경」(S35:130)이 니까야에 전승되어 오는데 모두 마하깟짜나 존자가 그에게 설한 경이다.
3.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 「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58)
58)『숫따니빠따』 제4장 {844} 게송이다.(Sn.165)
아래에 나타나는 그의 설명에서 보듯이, 마하깟짜나 존자는 본 게송의 첫 번째 구를 설명하면서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일상적인 단어들을 통해서 본 게송이 드러내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게송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교학상의 전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본 게송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교학적인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주석서 문헌들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집을 버린 뒤 거처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욕망들을 없애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하지 않노라.'
존자시여, 이처럼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어떻게 자세하게 알아야 합니까?”
4.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집에서 유행합니까?]59)
장자여, 물질의 요소는 알음알이의 집이요,
물질의 요소에 대한 탐욕에 묶이는 것은
알음알이의 집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60)
59) 문맥으로 볼 때 본 문단의 마지막에 평서문으로 나타나는 이 문장이 있어야 매끄럽지만 Ee, Se, B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 ]에 넣어서 옮겼다.
60) “여기서 '물질의 요소[色界, rūpa-dhātu]'는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khandha]를 뜻한다. '물질의 요소에 대한 탐욕에 묶이는 것'으로 옮긴 rūpa-dhātu-rāga-vinibaddha는 rūpa-dhātumhi(물질의 요소에 대한) rāgena(탐욕에 의해서) vinibaddha(묶임)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알음알이'란 업을 짓는 알음알이(kamma-viññāṇa)를 뜻한다. '집에서 유행하는 것(oka-sārī)'이란 가정에서 유행하는 것(geha-sārī), 거주하는 곳에서 유행하는 것(ālaya-sārī)을 뜻한다. 여기서 '집(oka)'이란 조건[緣, paccaya]의 뜻에서 말한 것이다.”(SA.ii.258~259)
일반적으로 요소[界, dhātu]와 무더기[蘊, khandha]는 법들(dhammā)을 분류하는 서로 다른 방법에 속하는 술어이다. 그런데 본서 S22:45, 53, 54등에서도 여기서처럼 계와 온은 섞여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오온 가운데서도 식온이 특별 취급되고 있다.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은 모두 무상 · 고 · 무아의 삼특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식온은 찰나생 · 찰나멸을 거듭하면서 한 개인이 윤회를 거듭할 때 그 영속성[相續]을 연결해 주는 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마하깟짜나 존자의 이런 설명은 본서 제2권 「의도 경」1/2/3(S12:38~40)에서 보았듯이 [업을 짓는] 알음알이가 이전의 존재와 새로운 존재를 함께 연결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업을 짓는 알음알이를 포함한 윤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의도 경」1/2/3(S12:38~40)의 주해들, 특히 「의도 경」1(S12:38)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한편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蘊]은 알음알이의 거주처(viññāṇa-ṭṭhitiyo)의 역할을 한다.(본서 S22:53~54 참조) 그리고 알음알이는 자아로 간주되는 실체는 아니지만 인식의 과정에서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긴 갈애를 부숨 경」 (M38/i.256~60)을 참조할 것.
느낌의 요소는 알음알이의 집이요,
느낌의 요소에 대한 탐욕에 묶이는 것은
알음알이의 집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식의 요소는 알음알이의 집이요, [10]
인식의 요소에 대한 탐욕에 묶이는 것은
알음알이의 집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리현상들의 요소는 알음알이의 집이요,
심리현상들의 요소에 대한 탐욕에 묶이는 것은
알음알이의 집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자여, 이와 같이 집에서 유행합니다.”61)
61) “그런데 왜 알음알이는 여기서 [알음알이의 집이라고]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sammoha-vighāt-attha)이다. 여기서 집이란 조건[緣, paccaya]의 뜻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긴(pure-jāta) 업을 짓는 알음알이(kamma-viñññāṇa)는 나중에 생긴(pacchā-jāta) 업을 짓는 알음알이와 나중의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vipāka-viñññāṇa) 둘 다에게 조건이 된다. 그리고 [먼저 생긴]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는 [나중에 생긴]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와 [나중에 생긴] 업을 짓는 알음알이에게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음알이를 포함시키면] '어떤 알음알이가 여기서 뜻하는 알음알이인가?'하는 혼란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알음알이의] 대상(혹은 토대, ārammaṇa)이 되어서 업을 짓는 알음알이의 거주처들(abhisaṅkhāra-viññāṇa-ṭṭhitiyo)이라 불린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서 알음알이는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SA.ii.259)
5.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집 없이 유행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들62)을 여래는 제거하셨고 그 뿌리를 자르셨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드셨고 존재하지 않게 하셨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셨습니다.63)
그래서 여래는 집 없이 유행하신다고 말합니다.
62) 욕구, 탐욕, 즐김, 갈애는 각각 chanda, rāga, nandi, taṇhā를 옮긴 것이고, 집착과 취착은 upāya와 upādānā를, 입각처와 천착과 잠재성향은 각각 adhiṭṭhāna, abhinivesa, anusaya를 옮긴 것이다.
욕구로 옮긴 chanda는 열의로도 옮기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 「분석 경」 2(S48:10) 85의 주해를 참조할 것. 집착과 취착(upāy'upādānā), [갈애와 사견이라는] 입각처(adhiṭṭhāna), 천착(abhinives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깟짜나곳따 경」 (S12:15)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63) 이 정형구는 아라한을 설명하는 정형구로 다른 경에서도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간단한 설명은 본서 제2권 「무명을 조건함 경」1(S12:35)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이것은 아라한들에 해당되는 정형구인데 여기서 정등각자인 여래를 언급한 것은 여래는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본보기(uparima-koṭi)가 되기 때문이라고 주석서는 적고 있다.(SA.ii.259)
장자여, 느낌의 요소에 대한 … 인식의 요소에 대한 … 심리현상들의 요소에 대한 …
알음알이의 요소64)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들을 여래는 제거하셨고 그 뿌리를 자르셨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드셨고 존재하지 않게 하셨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집 없이 유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장자여, 이와 같이 집 없이 유행합니다.”
64) “알음알이는 왜 여기서 언급되었는가? 오염원들이 제거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kilesa-ppahāna-dassan-attha)이다. 오염원들은 다른 네 가지 무더기들만을 통해서는 다 제거되지 않고 오온 전체를 통해서만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SA.ii.259)
6.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거처에서 유행합니까?
형색의 표상65)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66)을 거처에서 유행한다고 합니다.
소리의 표상이라는 … 냄새의 표상이라는 … 맛의 표상이라는 … 감촉의 표상이라는 … 법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을 거처에서 유행한다고 합니다.
65) '표상'은 nimitta를 옮긴 것이다. 표상으로 옮긴 니밋따(nimitta)는 ni(아래로)+√mā(to measur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초기불전과 특히 주석서 문헌에서는 표상(nimitta)라는 술어가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① 신호, 표시, 징조 조짐 등의 뜻으로도 쓰이고(영어의 sign) ② 외관, 흔적, 자국, 특성, 성질 등의 뜻으로도 쓰이며(영어의 mark) ③ 영상, 잔영, 표상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영어의 image) 주석서 문헌에서는 세 번째 의미로 많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의미로 쓰이는 표상은 특히 삼매 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본삼매의 증득은 준비단계의 표상, 익힌 표상, 닮은 표상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고 주석서 문헌들은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5 이하의 [해설들]을 참조할 것.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여러 문맥에서 나타나는 nimitta를 모두 표상으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는데, 『디가니까야 주석서』에서 “인식의 원인(sañjānana-hetu)이 되기 때문에 '표상(nimitta)'이라 한다.” (DA.ii.500)고 설명하고 있듯이 모든 종류의 인식은 대상이 드러내는 혹은 대상을 통해서 생기는 표상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나꿀라삐따경」(S22:1) §12의 주해도 참조할 것.) 표상은 한문의 表相 혹은 表象을 염두에 두고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66)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은 rūpa-nimitta-niketa-visāra-vinibandhā라는 긴 합성어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형색(rūpa)' 그 자체는 오염원들의 조건이 된다는 뜻에서 '표상(nimitta)’이다. 그리고 이것은 [알음알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ārammaṇa-kiriya-saṅkhāta-nivāsana-ṭṭhān-attha)에 의해서 '거처(niketa)'라고 한다. 그래서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가 된다. 그리고 visāra-vinibandha는 '배회함(visāra)'과 '묶임(vinibandda)'으로 분석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생겨난 오염원의 배회(kilesa-visāra)와 오염원의 묶임(kilesa-bandhana)이라는 뜻이다."(SA.ii.259~260)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거처 없이 유행합니까?
장자여,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을 여래는 제거하셨고
그 뿌리를 자르셨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드셨고 존재하지 않게 하셨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거처 없이 유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장자여, 소리의 표상이라는 … 냄새의 표상이라는 … 맛의 표상이라는 … 감촉의 표상이라는 … 법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을 여래는 제거하셨고
그 뿌리를 자르셨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드셨고 존재하지 않게 하셨고 [11]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거처 없이 유행하신다고 말합니다.67)
장자여, 이와 같이 거처 없이 유행합니다.”
67) “그런데 왜 여기서 다섯 가지 무더기들(오온)은 '집(oka)'이라 부르고 여섯 가지 대상들(육외처, 육경)은 '거처(niketa)'라 부르는가? 욕탐(chanda-rāga)의 강함과 약함(balava-dubbalatā) 때문이다.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ālayaṭṭha)에서 집과 거처는 비슷하지만 집은 자신이 항상 머무는(nicca-nivāsana) 자신의 집(geha)을 뜻하고, 거처는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을 뜻하는데 정원(uyyāna) 등과 같은 곳이다. 욕탐이 자신의 아내나 자식들이나 재산이나 재물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는 아주 강해지는 것처럼, 욕탐은 자신의 안에 있는 오온에 대해서는(ajjhattikesu khandhesu) 아주 강하다. 그러나 공원 등과 같은 거처에 대한 욕탐은 약하듯이, 외부의 감각대상들에 대한(bāhiresu chasu ārammaṇesu) 욕탐도 약하다. 그래서 각각 이렇게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SA.ii.260)
“욕탐은 안의 오온에 대해서 더 강하기 때문에 안의 오온을 집(geha)이라 한다. 욕탐은 밖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더 약하기 때문에 밖의 대상들을 거처(niketa)라 한다.” (SAȚ.ii.187)
7.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마을에서 관계 맺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가자들과 섞여 지내면서 기쁨을 같이하고 슬픔을 같이 하며, 즐거운 일들을 즐거워하고 괴로운 일들을 괴로워하며, 해야 할 일들이 생기면
자신이 그것에 몰두합니다.68) 장자여, 이와 같이 마을에서 관계를 맺습니다.
68) 본서 제1권 「나가닷따 경」(S9:7) §§2~3과 제4권 「나무 더미 비유 경」1(5:241) §6 등에 의하면 마을에서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은 출가자들에게는 적절하기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마을에서 관계 맺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가자들과 섞이지 않고 지내면서
기쁨을 같이 하지 않고 슬픔을 같이 하지 않으며,
즐거운 일들을 즐거워하지 않고 괴로운 일들을 괴로워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들이 생기면 자신이 그것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와 같이 마을에서 관계 맺지 않습니다.”
8.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감각적 욕망들을 없애지 못합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합니다.
장자여,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들을 없애지 못합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감각적 욕망들을 없앱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입니다. 장자여,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들을 없앱니다.”
9.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기대합니까?69)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생깁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이 있게 되기를, 미래에 이러한 느낌이 … 이러한 인식이 …
이러한 심리현상들이 … 이러한 알음알이가 있게 되기를.'이라고,
장자여, 이와 같이 기대합니다.
69) '기대하다'로 옮긴 원어는 Ee, Be: purakkharāno, Se: purekkharāno인데 『숫따니빠따』 (Sn.177 {910})에도 후자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존경하다, 존중하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앞에(pure) 놓다(karoti)는 의미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원함을 통해서 미래에 대해서 계획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기대하다로 옮겼다.
주석서는 “윤회를 [자기] 앞에 놓는 것(vaṭṭaṃ purato kurumāno)”(SA.ii,260) 즉 자신의 윤회가 어떻게 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는 것(apurekkharāno)은 이와 반대로 “윤회를 [자기] 앞에 놓지 않는 것(vaṭṭaṃ purato akurumāno)”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숫따니빠따 주석서』(SnA.ii.547)는 “미래에 자기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āyatiṃ attabhāvaṃ anabhinibbattento)”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하깟짜나 존자의 이러한 설명은 부처님께서 '경사스러운 하나에 몰입함(Bhaddekaratta)'의 게송들을 설명하신 것(M131/iii.188 §§4~9)과 비슷하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이 있게 되기를, 미래에 이러한 느낌이 … 이러한 인식이 …
이러한 심리현상들이 … 이러한 알음알이가 있게 되기를.'이라고. [12]
장자여, 이와 같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10.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합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제대로 모른다. 나야말로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안다.'
'어찌 그대가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알겠는가?'
'그대는 그릇된 도를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도를 닦는 자이다.'
'[내 말은]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는다.'
'그대는 먼저 설해야 할 것을 뒤에 설했고 뒤에 설해야 할 것을 먼저 설했다.'
'그대가 [오랫동안] 주장해 오던 것은 [한 마디로] 논파되었다.'
'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대는 패했다. 비난으로부터 도망가라.
혹은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설명해보라.'70) 라고.
장자여, 이와 같이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합니다.
70) 본문은 본서 제6권「논쟁의 소지가 있음 경」(S56:9) §3과 『디가 니까야』「범망경」(D1/i.8) §1.18 등에도 나타나는 정형구이다. 이것은 다른 교파에 속하는 유행승들 간의 뜨거운 철학적 논쟁에서 사용되던 문구들에서 유래된 듯하다. 뜨거운 논쟁에 대한 부처님의 평가는 특히 『숫따니빠따』「여덟 편의 시 품」(Aṭṭhaka-vagga, Sn.151 이하)의 Sn4:8, 12, 13 경들에 잘 나타나 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제대로 모른다. 나야말로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안다.…'
'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대는 패했다. 비난으로부터 도망가라.
혹은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설명해 보라.'라고,
장자여, 이와 같이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11. “장자여, 세존께서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 「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버린 뒤 거처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욕망들을 없애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다투는 말을 하지 않노라.'
장자여, 이처럼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봐야 합니다.”
할릿디까니 경2(S22:4)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마하깟짜나 존자가 아완띠에서 꾸라라가라의 빠빠따 산에 머물렀다. [13]
2. 그때 할릿디까니 장자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할릿디까니 장자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디가 니까야』「제석문 경」(D21 §2.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애를 부수어 해탈한71) 사문·바라문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72)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닦고 구경의 목적을 얻으며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 뛰어나다.'73) 라고.
존자시여, 이처럼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어떻게 자세하게 알아야 합니까?"
71) “갈애를 부숨(taṇhā-saṅkhaya)이란 도(magga)와 열반이다. 도는 갈애를 부수고(saṅkhiṇāti) 파멸시킨다(vināseti)고 해서 갈애를 부숨이다. 열반은 갈애를 부수고 파멸시켜서 드러나는(āgamma) 것이기 때문에 갈애를 부숨이다. 갈애를 부수는 도에 의해서 해탈했고 갈애를 부숨인 열반 [안]으로 해탈한다, 향한다(확신한다, adhimuttā)고 해서 '갈애를 부수어 해탈함(taṇhā-saṅkhaya-vimuttā)'이다.”(DA.iii.738)
해탈(vimutti)과 관련하여 '멸진'으로 옮기고 있는 khaya는 항상 탈격인 khayā로 나타나지만(아래 §4의 마지막 주해 참조) 본문에서처럼 'saṅkhaya'는 처소격인 saṅkhaye로 나타난다.(anuttare upadhisaṅkhaye vimutto = 존재의 근거를 모두 부수어 위없는 해탈을 성취하셨다. - S4:25 §4) 그래서 주석서의 문장을 '열반 [안]으로'라고 옮겼다.
72) 유가안은(瑜伽安隱, yogakkhema)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유가안은을 설하는 자 경」 (S35:104) §2의 주해와 본서 제1권 「까시 바라드와자 경」(S7:11) {665}의 주해를 참조할 것.
73)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 뛰어나다(seṭṭhā devamanussānaṃ).'는 이 부분은『디가 니까야』「제석문 경」(D21) §2.6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맛지마 니까야』「짧은 갈애를 부숨 경」 (M37/i.252) §2 등의 삭까의 말에는 나타나고 있다.
4. “장자여, 물질의 요소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들을 부수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74)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잘 해탈했다고 합니다.75)
74) '소멸'은 nirodha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ni(아래로)+√rudh(to obstruct)의 명사이다. 그래서 소멸, 억압, 파괴 등의 뜻이 된다. 초기불전에서 nirodha는 다음의 문맥에서 주로 나타난다.
첫째, 사성제의 멸성제(滅聖諦, dukkha-nirodha ariya-sacca)로 나타난다.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주로 멸제(滅話, 소멸의 진리, nirodha-sacca)로 나타나지만 이 술어는 초기불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경에서는 항상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dukkha-nirodha ariya-sacca)'로 나타나거나 ‘괴로움의 소멸(dukkha-nirodha)'로만 나타난다. 이 경우의 소멸은 당연히 열반을 뜻한다.
초기불전에서 사성제는 항상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dukkha ariya-sacca],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dukkha-samudaya 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dukkhanirodha 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dukkhanirodhagāmini paṭipadā ariyasacca)로 표현되어 나타난다. 이것을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dukkha-sacca(苦, 괴로움의 진리), samudaya-sacca(集諦, 일어남의 진리), nirodha-sacca(滅諦, 소멸의 진리), magga-sacca(道諦, 도의 진리)로 축약해서 전문술어화 하고 있고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한편 같은 구문은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loka(세상), loka-samudaya(세상의 일어남), loka-nirodha(세상의 소멸), lokanirodhagāmini paṭipadā(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X와 그 집 ·멸 · 도의 구문'으로 부를 수 있다. 즉 X, X-samudaya, X-nirodha, Xnirodha-gāmini paṭipadā로 초기불전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X 대신에「인연 상윳따」(S12)에서는 연기의 12가지 구성요소들이 들어가서 나타나며, 「요소 상윳따」(S14)에서는 X 대신에 지 · 수 · 화 · 풍 사대가 들어가서 땅과 그 집 · 멸 · 도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더기 상윳따」(22)에서는 자기 존재[有身]와 그 집 · 멸 · 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이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
둘째, 12연기의 구성요소들의 소멸로 나타난다. 본서 제2권 「인연 상윳따」(S12)의 도처에 12지 연기는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은 asesa-virāga-nirodh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이 소멸도 당연히 열반과 아라한과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연기 경」(S12:1)의 주해들과 특히 「분석경」(S12:2) §16의 주해와 본서 「짐 경」(S22:22) §7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그리고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과 '소멸/소멸함(nirodha)'의 차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연기 경」 (S12:1) §4의 세 번째 주해를 참조할 것.
셋째, 염오 - 이욕 - 소멸(nibbidā-virāga-nirodha)의 정형구로도 많이 나타난다. 이 경우의 소멸도 아라한과나 열반을 뜻한다.(본서 제2권 「설법자[法師] 경」 (S12:16) §5의 주해와 본서 「과거 · 미래 · 현재 경」1(S22:9) §3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넷째, 무엇보다 소멸은 초기불전들 자체에서 이미 “일체의 생존(upadhi)에 대한 집착을 포기함(paṭinissagga), 갈애의 멸진(khaya), 탐욕의 빛바램[離慾, virāga], 소멸(nirodha), 열반이다.”(본서 제1권 「권청 경」(S6:1) §2)라는 문맥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존재(오온)의 소멸이 열반이다.”(본서 제2권 「꼬삼비 경」(S12:68) §5)라고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
다섯째,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vivekanissitaṃ virāganissitaṃ nirodhanissitaṃ vossaggapariṇāmiṃ) 바른 견해 등을 닦는다. … ”등으로 본서 제5권 「도 상윳따」(S45) 등에 정형화 되어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본서 제5권 「비구 경」(S46:5)에 해당하는 복주서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라는 구문으로 모든 도의 역할과 과를 보이신 것이다. '소멸을 의지하고'라는 구문으로는 열반의 실현을 말씀하신 것이다.”(SAȚ.ii.130)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우의 소멸도 열반과 동의어이다. 이처럼 소멸은 니까야의 대부분의 문맥에서 열반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여섯째, 본서 제4권 「아난다 경」1(S36:15) §5에는 anupubba-saṅkhārānaṃ nirodha(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이라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초선에서부터 제4선까지 그리고 공무변처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그리고 상수멸의 아홉 가지 단계의 삼매를 차례대로 닦아서 거친 심리현상들을 차례차례 소멸해 가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것은 『디가 니까야』「합송경」(D33) §3.2 (6)과 『앙굿따라 니까야』「차제멸(次第滅) 경」(A9:31)에서는 아홉 가지 차례로 소멸함(九次第滅, nava anupubbanirodhā]이라는 술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 아홉 가지 삼매의 경지는 본서 제4권「한적한 곳에 감 경」(S36:11) §5 이하 등 본서의 여러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서 제1권 「반열반 경」(S6:15) §§3~4에서는 세존께서 초선부터 상수멸까지, 다시 상수멸부터 초선까지, 그리고 다시 초선에서부터 제4선에 들었다 나와서 반열반하신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곱째, 그리고 여기서 언급한 상수멸(想受滅, saññā-vedayita-nirodha)은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소멸의 증득(nirodha-samāpatti, 멸진정)이라 불리며 중국에서는 멸진정(滅盡定)으로 옮겼다. 이 상수멸 혹은 멸진정에 들었다 나오면 불한과나 아라한과를 증득한다고 한다. 이처럼 여기서도 nirodha(소멸, 멸진)는 열반의 체험과 다름없는 경지로 쓰이고 있다. 소멸의 득(nirodha-samāpatti, 멸진정)은 본서 제2권 「일곱 요소 경」(S14:11) §5에도 나타난다. 이곳의 주해도 감조할 것. 그리고 상수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서 제4권 「까마부 경」2(S41:6) §§6~13까지를 참조할 것.
여덟째, 그리고 nirodha-dhamma(소멸하기 마련인 법)로도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본서 제4권 「환자 경」1(S35:74) §9 등)는 예류자의 정형구로도 나타나고,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본서 「아난다 경 (S22:21) §4 등)라는 정형구로도 나타난다. 이 외에도 nirodha는 여러 단어들과 합성어로 나타나서 소멸이나 열반을 뜻하고 있다.(PED 참조)
75) “부수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잘 해탈했다고 합니다.”는 khayā virāga nirodhā cāgā paṭinissaggā cittaṃ suvimuttanti vuccati를 옮긴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여섯 가지 청정 경」(M112/iii.31) §6에도 이 문장이 나타나고 있다.
장자여, 느낌의 요소에 대한 … 인식의 요소에 대한 … 심리현상들의 요소에 대한 …
알음알이의 요소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들을 부수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잘 해탈했다고 합니다.”
5. “장자여, 세존께서는 『디가 니까야』「제석문 경」(D21 §26)에서 말씀하시기를
'갈애를 부수어 해탈한 사문 · 바라문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닦고 구경의 목적을 얻으며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 뛰어나다.'라고 하셨습니다.
장자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아야 합니다.
삼매 경(S22:5) Samādhi-sutta
1.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 에서>
3.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7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가?
물질의 일어남과 사라짐,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14] 인식의 일어남과 사라짐,
심리현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알음알이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다.”77)
76) “세존께서는 이 비구들이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cittekaggatā = 삼매]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시고 이들이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을 얻을 수 있도록 명상주제(kammaṭṭhāna)를 증장(phāti)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SA.ii.261)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심일경성)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 「삼매 경」(S45:8)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여기서 '삼매(samādhi)'란 본삼매(appanā-samādhi)도 되고 근접삼매(uracāra-samādhi)도 된다. 명상주제란 삼매를 토대로 한(samādhi-pādaka) 위빳사나의 명상주제(vipassanā-kammaṭṭhāna)이다.”(SAȚ.ii.188)
77) 본서 제2권 「십력 경」1 (S12:21)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본경에서 오근의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ṅgama)'은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것)인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본서 SL2:56; 57 등에서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동시에 일어나는 것)인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사람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러면 무엇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는가?
그는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다.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는 자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물질을 즐기는 것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 (M28) 안으로 눈이 손상되지 않았고 밖에서 형색이 눈의 영역에 들어오고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28. "도반들이여,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물질은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色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느낌은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受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인식은 취착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想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심리현상들은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알음알이는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에 속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이렇게 해서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모임, 적집, 더미가 만들어집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연기(緣起)을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은 조건 따라 생긴[緣起] 것입니다. 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에 욕심내고 집착하고 친밀하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입니다. 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에 대한 탐욕과 욕망을 제어하고 탐욕과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될 때 비구는 많은 것을 행한 것이 됩니다." |
그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다.
알음알이를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있는 자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알음알이를 즐기는 것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78)
78) 본문의 결론 부분은 압축된 형태의 연기(緣起, paṭiccasamuppada)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는 것(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은 갈애의 작용이다. 이를 통한 즐김(nandi)은 취착(upādāna)이고 이를 조건으로 해서 연기의 다음 각지들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현재의 오온에 대한 갈애가 다음 생의 새로운 오온이 일어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온의 발생에 대한 통시적(通時的)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서「취착의 양상 경」(S22:56) §6 이하와 일곱 가지 경우 경」(S22:57) §5 이하는 이와는 반대로 오온이 음식이나 감각접촉이나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남을 설하고 있는데 이는 공시적(共時的)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멸에 대한 구문은 이와 반대로 이해하면 된다. 현재의 오온에 대한 갈애가 소멸되면, 다음 생의 새로운 오온이 일어나는 중요한 조건이 소멸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물질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느낌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인식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사람은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는가?
그는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다.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는 자에게 즐김이 소멸한다.
즐기는 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그는 느낌을 [15]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다.
알음알이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는 자에게 즐김이 소멸한다.
즐기는 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