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06.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적합함 경(Āneñjasappāyasuttaṃ)
M106.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길 경 Aneñjasappāya 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724)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724) 본서 제1권 「마음챙김의 확립 경」(염처경, M10)도 이곳에서 설하셨다. 꾸루(Kuru)에 대해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경」 (M10)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2.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725)이란 무상하고 허망하고 거짓되고 부질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환영(幻影)이고 어리석은 자들의 지껄임726)이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727) [262]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728)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의
이 둘은729) 마라의 영토이고 마라의 범위이고 마라의 미끼이며 마라의 소유지이다.
이것 때문에 나쁘고 해로운 마음의 상태인 욕심과 악의와 성급함이 일어난다.
이들은730) 성스러운 제자가 공부지을 때 장애가 된다.”
725) “여기서 '감각적 욕망(kāmā)'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vatthu-kāmā)과 오염원으로서의 감각적 욕망(kilesa-kāmā)을 모두 말한다.” (MA.iv.56)
726) “'어리석은 자들의 지껄임(bāla-lāpana)'이라고 하셨다. 내 아들, 내 딸, 내 금덩이라고 이렇듯 어리석은 자들이 지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MA.iv.57)
727) “'현재의 감각적 욕망(diṭṭhadhammikā kāmā)'이란 인간들의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 kāmaguṇā)을 말하고 '미래의 감각적 욕망(samparāyikā kāmā)'이란 그 나머지를 말한다.”(MA.iv.57)
728)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diṭṭha-dhammikā-kāma-saññā)'이란 인간들의 감각적 욕망과 관련하여 일어난 인식을 말한다.”(MA.iv.57)
729) “둘이란 감각적 욕망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MA.iv.57)
730) “성스러운 제자가 이 교단에서 공부지을 때 이 세 가지 오염원들(kilesā)은 장애(antarāya-karā)가 된다.”(MA.iv.57)
흔들림 없음731)
731) '흔들림 없음'은 āneñja를 옮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흔들림 없음' 혹은 '흔들림 없는 경지(āneñja 혹은 ānejja)'는 항상 무색계를 뜻한다. 그런데 냐나몰리 스님은 주해에서 본경에서의 흔들림 없음(āneñja)은 색계 제4선과 무색계의 낮은 두 가지 禪인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세 가지 증득만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냐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1309쪽 1000번 주해 참조) 본경과 앞의 「수낙캇따 경」 (M105)의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아주 타당한 설명이라 여겨진다. 본서 「수낙캇따 경」 (M105) §10의 주해를 참조할 것.
8. “비구들이여, 이 경우에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의
이 둘은 마라의 영토이고 마라의 범위이고 마라의 미끼이며 마라의 소유지이다.
이것 때문에 나쁘고 해로운 마음의 상태인 욕심과 악의와 성급함이 일어난다.
이들은 성스러운 제자가 공부지을 때 장애가 된다.
참으로 나는 풍부하고 고귀한 마음으로 세상을 극복하고732)
굳건한 마음으로733) 머물리라.
참으로 내가 풍부하고 고귀한 마음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굳건한 마음으로 머물 때
나쁘고 해로운 마음의 상태인 욕심과 악의와 성급함이 생기지 못할 것이다.
이들을 제거할 때 나의 마음은 제한 없고 무량하며 잘 개발될 것이다.'734)라고,
732) “'세상을 극복하고(abhibhuyya loka)'란 감각적 욕망의 세상(kāma-loka)을 극복한다는 뜻이다.”(MA.iv.57)
733) “'굳건한 마음으로(adhiṭṭhāya manasā)'라는 것은 禪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jhān-ārammaṇa-citta)으로 굳건히 결심하여 머문다는 말이다.”(MA.iv.57)
734) “욕계의 마음(kāmāvacara-citta)은 제한된(paritta) 마음이라 한다. 그것을 버림으로써 고귀하고(mahaggata) 제한 없는(aparitta) 마음이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색계(rūpa-avacara)와 무색계(arūpa-avacara)의 마음을 무량한(appamāṇa) 마음이라 한다. 그러나 '잘 개발되었다(subhāvita)'는 것은 욕계 · 색계 · 무색계에는 해당되지 않고 오직 출세간(lokuttara)에만 해당된다. 그러므로 '제한 없고 무량하며 잘 개발된다(aparittaṃ appamāṇaṃ subhāvitaṃ).'는 것은 오직 출세간 마음을 말한 것이다.” (MA.iv. 58~59)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735)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736)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흔들림 없음을 증득하거나737)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흔들림 없음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첫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735)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은 tab-bahula-vihārino을 옮긴 것인데, “감각적 욕망을 몰아내어 반드시 그 도닦음을(tameva paṭipadaṃ) 많이 행하면서(bahulaṃ katvā) 머문다.”(MA.iv.59)는 뜻이라고 주석서에서 설명하고 있어 이렇게 옮겼다.
736) “'이러한 경지(āyatana)'란 아라한과(arahatta)나 아라한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나 제4선이나 제4선으로 인도하는 근접삼매(upacāra)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낸다(āyatane cittaṃ pasīdati).'는 것은 아라한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를 얻거나 제4선으로 인도하는 근접삼매를 얻는 것(paṭilābha)을 말한다. 위빳사나는 통찰지를 확고하게 하는(adhimuccana) 원인(kāraṇa)이고 근접삼매는 흔들림 없는 경지를 얻는(āneñja-samāpatti) 원인이다.”(MA.iv.59~60)
737) “여기서 '흔들림 없음을 증득한다(āneñja-samāpatti.'는 것은 제4선(catuttha-jjhāna)의 흔들림 없음에 해당한다.” (MA.iv.62)
4.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738)
'현재의 감각적 욕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과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 있고,
물질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모두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과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所造色]이다.'라고,
738) “'이렇게 숙고한다(iti patisañcikkkhati).'는 것은 제4선을 얻고 나서 이렇게 숙고한다는 말이다. 이 비구는 이전의 비구보다 통찰지가 더 크기 때문에 그 비구의 명상주제(kamma-ṭṭhāna)와 자신의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서 명상한다(sammasati).”(MA.iv.62)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739)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흔들림 없음을 증득하거나740)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흔들림 없음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두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263]
739) “물질을 제거한(rūpa-paṭibāhana) 그 도닦음(paṭipada)을 많이 행하면서 머문다는 말이다.” (MA.iv.62)
740) “여기서 '흔들림 없음을 증득한다(āneñjaṃ samāpaijati),'는 것은 공무변처(ākāsāñanc-āyatana)의 흔들림 없음을 말한다.”(MA.jv.62)
5.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741)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이 둘은 다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기뻐할 가치가 없고742) 환영할 가치가 없고 고수할 가치가 없다.'라고,
741) “공무변처를 얻고 나서 이렇게 숙고한다(patisañcikkkhati), 이 비구는 앞의 두 비구보다 통찰지가 더 크기 때문에 그 두 비구들의 명상주제와 자신의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 명상한다(sammasati).”(MA.iv.63)
742) “'기뻐할 가치가 없다(nālaṃ abhinandituṃ).'는 것은 갈애와 사견(taṇhā-diṭṭhi)을 가지고 기뻐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고, 나머지도 그와 같다.” (MA.iv.63)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743)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흔들림 없음744)을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흔들림 없음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세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743) “여기서 '도닦음(paṭipadā)'이란 감각적 욕망도 물리치고(kāma-paṭibāhana) 물질도 제거한(rūpa-paṭibāhana) 그런 도닦음이다.” (MA.iv.63)
744) “이것은 식무변처의 흔들림 없음(viññāṇañc-āyatan-āneñja)이다.” (MA.iv.63)
무소유처
6.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이들은 모두 인식들이다.
이들이 남김없이 멸하는 곳,745)
그것은 고요하고 그것은 수승하나니746) 그것은 바로 무소유처이다.”라고,
745) “무소유처(ākiñcaññ-āyatana)라는 경지에 이르러 앞서 말한 이 모든 인식들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MA.iv.63)
746) “이 경지는 구성요소가 고요하고(aṇga-santatā) 대상이 고요하기(ārammaṇa-santatā) 때문에 '고요하다(santa)'고 하고, 괴로움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atappakaṭṭhena) 수승하다(paṇīta)'고 한다.” (MA.iv.63)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747)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첫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747) “그러한 인식들(saññā)을 제거한 도닦음이다.”(MA.iv.63)
7.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서 이렇게 숙고한다.748)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749)라고,
748) “식무변처(viññāṇañc-āyatana)를 얻고 나서 이렇게 숙고한다. 이 비구는 앞의 네 명의 비구보다 통찰지가 더 커서 그 비구들의 명상주제와 자기의 명상주제, 즉 다섯 가지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 명상한다.”(MA.iv.63~64)
749)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suññam idaṃ attena vā attaniyena vā).'는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긴 경」 (M43) §33에서 '공한 마음의 해탈(suññatā cetovimutti)'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곳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750)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두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750) “앞서 말한 도닦음과 이 공함의 도닦음(suññata-paṭipadā)을 말한다.”(MA.iv.64)
복주서에서는 앞서 말한 도닦음이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무소유처의 명상주제라고 밝히고 있다.(MAȚ.ii.256)
8.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751)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264]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내 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없다.'752)라고,
751) “식무변처(viññāṇañc-āyatana)를 얻고 나서 이렇게 숙고한다. 이 비구는 앞의 다섯 명의 비구보다 통찰지가 더 커서 그 비구들의 명상주제와 자기의 명상주제, 즉 여섯 가지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 명상한다.”(MA.iv.64)
752)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내 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없다.'로 옮긴 원문은 nāhaṃ kvacani kassaci kiñcanatasmiṃ, na ca mama kvacani kismiñci kiñcanaṃ natthi이다. 주석서는 이 문장은 “네 가지 방식(catukoṭikā)으로 공함(suññatā)을 설한 것”(MA.iv.64)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첫째, 나는 어디에도 없고, 둘째, 나는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셋째,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넷째, 누구에게도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 ' 안의 이 문장은 『청정도론』 XXI.53에서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nupekkhā-ñāṇa)를 설명하는 중심 문장으로 인용되어 나타나며 §54에서는 이 네 가지가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55에서는 여섯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하고 §56에서는 여덟 가지, §57에서는 열 가지,
§58에서는 12가지, §59에서는 42가지로 공을 파악하고 있다.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무소유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무소유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처에 적합한 세 번째 도닦음이라 한다.”
비상비비상체
9.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753)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건 이들은 모두 인식들이다.
이들이 남김없이 멸하는 곳,
그것은 고요하고 그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바로 비상비비상처이다.'라고,
753) “식무변처를 얻고 나서 이렇게 숙고한다. 이 비구는 앞의 여섯 명의 비구보다 통찰지가 더 커서 그 비구들의 명상주제와 자기의 명상주제, 즉 일곱 가지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 명상한다.” (MA.iv.64)
그가 이와 같이 도닦고 그 도닦음을 많이 행하면서 머물면
그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청정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지금 비상비비처를 증득하거나 통찰지로 [해탈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재생으로] 나아가는 그의 알음알이는 비상비비상처에 이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상비비상처에 적합한 도닦음이라 한다.”
열반
10.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는 다음과 같이 닦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있지 않다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754)
있는 것, 존재하는 것, 그것을 나는 버린다.'755)라고,
이와 같이 하여 그는 평온을 얻습니다.756)
세존이시여, 이런 비구는 열반을 얻습니까?”
754) '이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있지 않다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는 no cassa noca me siyā na bhavissat na me bhavissati를 옮긴 것이다. 이 문장은 『상윳따 니까야』 제3권 「감흥어 경」 (S22: 55) §3과 『앙굿따라 니까야』 제6권 「꼬살라 경」1(A10:29) §12에도 나타난다.
「감흥어 경」 (S22:55) §3에서는 그곳의 문맥에 따라서 “업 지음이 존재 하지 않았다면 나의 [오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업 지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에게는 [다시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로 옮겼다.
그리고 「꼬살라 경」 1(A10:29) §12에서는 그곳의 문맥에 따라 “[만일 과거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고, [만일 미래에] 내가 없다면 내게 [장애도] 있지 않을 것이다.”로 옮겼다.
이 문장에 대한 여러 가지 고찰은 특히 「감흥어 경」 (S22:55) §3의 주해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독자들의 정독을 권한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생에(pubbe) 다섯 종류의 업의 윤회(kamma-vaṭṭa)를 쌓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현재(etarahi) 다섯 종류의 과보의 윤회(vipāka-vaṭṭa)가 나에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현재에 다섯 종류의 업의 윤회를 쌓지 않는 다면 미래에(anāgate) 나에게 다섯 종류의 과보의 윤회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MA.iv.65)
복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한다.
“'전생에 다섯 종류의 업의 윤회(pubbe pañcavidhaṃ kammavaṭṭa)'란 전생의 업의 존재(purima-kamma-bhava)에서의 어리석음인 무명(moha avijjā), 쌓음인 의도적 행위(āyūhanā saṅkhārā), 갈망인 갈애(nikanti taṇhā), 집착인 취착(upagamana upādāna), 의도인 존재(cetanā bhava), 이러한 업의 연속(kamma-ppabandha)을 말하고, '현재 다섯 종류의 과보의 윤회(etarahi pañcavidhaṃ vipākavaṭṭa)'란 알음알이[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이라 불리는 현재 과보의 연속(vipāka-ppabandha)을 말한다.”(MAȚ.ii.257)
755) “'있는 것, 존재하는 것, 그것을 나는 버린다(yad atthi yaṃbhūtaṃ taṃ pajāhāmīti).'라고 하셨다. 여기서 '있는 것, 존재하는 것(yad atthi yaṃbhūtaṃ)'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 khandha-pañcaka)인데, 그것을 버린다는 뜻이다.” (MA.iv.65)
“즉 오온과 관련된 탐욕(chanda-rāga)을 버려서 미래에(āyatiṃ)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서 버린다는 뜻이다.”(MAȚ.ii.257)
756) “'평온을 얻는다(evaṃ upekhaṃ paṭilabhati).'는 것은 위빳사나의 평온(vipassan-upekkhā)을 얻는다는 말이다.” (MA.iv.66)
“아난다여, 이런 경우 어떤 비구는 열반을 얻고 어떤 비구는 열반을 얻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비구는 열반을 얻고 어떤 비구는 열반을 얻지 못합니까?”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있지 않다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265] 존재하는 것, 그것을 나는 버린다.'라고 이와 같이 닦는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평온을 얻는다.
그는 그 평온을 기뻐하고757) 환영하고 고수한다.
그가 그 평온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고수하기 때문에
그의 알음알이는 그것에 의지하고758) 그것에 취착한다.
아난다여, 취착이 남아있는 비구는 열반을 얻지 못한다.” 759)
757) “'그는 그 평온을 기뻐한다(so taṃ upekkhaṃ abhinandati).'는 것은 그 위빳사나의 평온을 갈애와 사견과 즐거움(taṇhā-diṭṭhi-abhinandana)으로 기뻐한다는 말이다.”(MA.iv.66)
758) “그 알음알이는 위빳사나를 의지한다(vipassanā-nissita)는 말이다.”(MA.iv.66)
759) “'열반을 얻지 못한다(na parinibbāyati).'고 하셨다. 위빳사나에 집착하는(sālaya) 비구는 나의 교단(sāsana)에서 열반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하물며 승원이나 객사나 시자 등(vihāra-pariveṇa-upaṭṭhāk-ādi)에 집착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음을 보이신 것이다.”(MA.iv.66)
11.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비구가 취착할 때 무엇을 취착합니까?”760)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에 취착한다.”
760) “그 비구가 취착할 때(upādiyamāna) 어떤 존재의 재생연결(paṭisandhi)을 취착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다.”(MA.iv.67)
“세존이시여, 그러면 참으로 그 비구가 취착할 때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에761) 취착하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참으로 그 비구가 취착할 때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에 취착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는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761) '취착의 대상 가운데 최상의 대상'은 upādāna-seṭṭha(취착의 최상)을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취착의 대상(gahetabba-ṭṭhāna) 가운데서 최상이고 최고인 존재에(seṭṭha uttama bhava)에 취착한다(upādiyati).” (MA.iv.67)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12.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762)
'이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있지 않다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존재하는 것, 그것을 나는 버린다.'라고 이와 같이 닦는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평온을 얻는다.
762) “앞 문단은 그의 재생연결(paṭisandhi)을 말했고, 이 문단은 아라한과를 말한다.” (MA.iv.67)
그는 그 평온을 기뻐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가 그 평온을 기뻐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알음알이는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그것에 취착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취착이 남아있지 않는 비구는 열반을 얻는다.”
13.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각각의 [증득을] 의지하여763) 격류를 건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어떤 것이 성스러운 해탈입니까?”764)
763) '각각의 [증득을] 의지하여'는 nissāya nissāya(의지하여 의지하여)를 옮긴 것인데, 이렇게 직역하면 뜻이 드러나지 않아 주석서의 설명을 따라 '증득(samāpatti)'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각각의 [증득을] 의지하여'로 옮겼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의지하여 의지하여(nissāya nissāya)'란 그 증득(samāpatti)을 의지하여 라는 뜻이다.”(MA.iv.67)
764) “'어떤 것이 성스러운 해탈입니까(katamo ariyo vimokkho)?'라는 질문은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사람(sukkha-vipassaka)의 아라한과(arahatta)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증득(samāpatti)을 기초(pada-ṭṭhāna)로 삼아 위빳사나를 증강하여 아라한과를 바라는 비구는 배나 뗏목을 이용하여 큰 폭류 (mahogha)를 건너 피안(para)으로 가는 것처럼 피로하지가 않다(na kilamati), 그러나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사람(sukkha-vipassaka)은 여러 가지 상카라들(pakiṇṇaka-saṅkhārā)을 명상하여(sammasitvā) 아라한과를 바랄 때 있는 힘을 다해(bāhu-balena) 흐름(sota)을 끊고 피안으로 가는 것처럼 피로하다. 그러므로 이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사람의 아라한과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MA.iv.67)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자(sukkha-vipassaka)는 본서 「끼따기리 경」 (M70) §16의 주해와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9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112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765)는 이처럼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건,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건,
존재 더미[有身]가 있는 한 이 모든 것이 존재 더미이다.766)
취착 없이 마음이 해탈하는 것, 그 것이 바로 불사(不死)이다.'라고.”
765) “'성스러운 제자(ariya-sāvaka)'란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sukkha-vipassaka) 성스러운 제자이다. 이 제자는 앞의 여덟 명의 비구들보다 통찰지가 더 커서 그 비구들의 명상주제와 자기의 명상주제, 즉 아홉 가지 명상주제를 하나로 만들어 명상한다(sammasati).”(MA.iv.67)
766) “'존재 더미[有身]가 있는 한 이 모든 것이 존재 더미이다(esa sakkāyo yāvatā sakkāyo)'라고 하셨다. 즉 삼계에 윤회한다고 하는(te-bhūnaka-vaṭṭa-saṅkhāta) 존재 더미[有身, sakkāya]가 존재 더미이다. 이것을 벗어나 존재 더미라는 것은 있지 않다고 숙고한다(paṭisañcikkhati)는 말씀이 다.”(MA.iv.67)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2에서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존재 더미[有身]라고 정의하고 있다.
14.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도닦음을 설했다.
나는 무소유처에 적합한 도닦음을 설했다.
나는 비상비비상처에 적합한 도닦음을 설했다.
나는 각각의 [증득을] 의지하여 격류를 건너는 것을 설했다.
나는 성스러운 해탈을 설했다.”
15. “아난다여, 항상 제자들의 이익을 기원하며 제자들을 연민하는 스승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266] 나는 연민으로 했다.
아난다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이 있다. 참선을 하라.
아난다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길 경(M106)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