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97. 다난자니 경(Dhanañjānisuttaṃ)
맛지마 니까야 제3권, (대림스님, 2012년) p506-519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남산489)에서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185] 비구가 라자가하에서 안거를 마치고 남산으로 사리뿟따 존자를 뵈러 갔다.
가서는 사리풋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에게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489) '남산(南山)'은 닥키나기리(Dakkhiṇāgiri)를 직역하여 옮긴 것이다. 라자가하(Rājagaha, 왕사성)는 여러 산들로 에워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라자가하는 예전에는 기립바자(Giribbaja)라 불리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는 산(giri)의 요새(vaja)라는 뜻이다.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SnA.ii.382)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무탈하시고 건강하십니까?”
“도반이시여, 세존께서는 무탈하시고 건강하십니다.”
“도반이여, 비구 승가도 모두 무탈하고 건강합니까?”
“도반이시여, 비구 승가도 모두 무탈하고 건강합니다.”
“도반이여, 거기 딴둘라빨라 대문 근처에 다난자니490)라는 바라문이 살고 있습니다.
도반이여, 그 다난자니라는 바라문도 무탈하고 건강합니까?”
490) 주석서는 다난자니 바라문(Dhanañjāni brāhmaṇa)이 누구인지 설명이 없다.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상윳따 니까야』제1권 「다난자니 경」(S7: 1)에 나타나는 다난자니라는 바라문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주석을 하고 있다.
“다난자니(Dhanañjāni)'는 다난자니라는 족성(gotta)이다. 그들은 바라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족성(ukkaṭṭha-gotta)이라고 한다. 다른 바라문 들은 범천의 입(mukha)에서 태어났지만 다난자니 족성은 범천의 머리(matthaka)를 열고 출현하였다고 한다.”(SA.i.226)
“도반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도 무탈하고 건강합니다.”
“도반이여, 다난자니 바라문은 방일하지 않습니까?”
“도반이시여, 어찌 다난자니 바라문이 방일하지 않겠습니까?
도반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은 왕을 빙자하여 바라문 장자들을 수탈하고
장자들을 빙자하여 왕을 수탈합니다.
신심 있는 가문에서 시집온 신심 있는 그의 아내는 죽었고
다른 신심 없는 가문 출신인 신심 없는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도반이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방일하다니 내가 참으로 안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도반이여, 참으로 안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든 다난자니 바라문을 만나게 되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번 나누어봐야겠습니다.”
3.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남산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고서 라자가하로 유행을 떠났다.
차례로 유행을 하여 라자가하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렀다.
4.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아침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라자가하로 탁발을 갔다.
그 즈음에 다난자니 바라문은 도시 외곽의 외양간에서 소젖을 짜고 있었다.
그때 사라뿟따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다난자니 바라문을 만나러 갔다.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따 존자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사리뿟따 존자에게로 갔다.
가서는 사라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이 우유를 드십시오. 아직 공양을 드셔도 되는 시간입니다.”
“바라문이여, 됐습니다. 오늘의 공양은 마쳤습니다.
나는 저쪽 나무 아래서 낮 동안을 머물 것입니다. 거기로 오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5. 그러자 다난자니 바라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사리뿟따 존자를 뵈러 갔다.
가서 사라뿟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난자니여, 그대는 방일하지 않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어찌 저희들이 방일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고, 처자를 부양해야 하고, 하인과 일꾼들을 거두어야 하고, 친구와 동료들에게 친구와 동료에 대한 도의를 지켜야 하고,
일가친척들에게 일가친척에 대한 도의를 지켜야 하고, 손님들에게 손님에 대한 도의를 지켜야 하고, 조상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고, 신들에게는 신에 대한 도의를 지켜야 하고, 왕에게는 왕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이 몸도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줘야 합니다.”
6.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부모 때문에 비법(非法)491)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면,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한 이유로 지옥지기가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가 '나는 부모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혹은 그의 부모가 이 사람은 우리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울부짖더라도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491) “여기서 말하는 '비법(非法, adhamma)'이란 다섯 가지 나쁜 행위(pañca dussīlya-kammāni) 혹은 열 가지 나쁜 행위를 말한다.” (MA.in.430)
“'열 가지 나쁜 행위(dasa dussīlya-kammāni)'란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十不善業道, dasa akusala-kamma-patha]에 있는 법들을 말한다.” (MAȚ.ii.197)
7.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처자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면,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한 이유로 지옥지기가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가 '나는 처자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저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혹은 그의 처자가 '이 분은 우리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울부짖더라도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8.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하인과 일꾼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9.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친구와 동료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88]
10.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일가친척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1.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손님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2.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조상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3.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신들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4.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왕 때문에 …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5.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 못을 행하면,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한 이유로 지옥지기가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가 '나는 내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은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 주는 것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했으니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울부짖더라도 지옥지기는 그를 지옥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16.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모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와 부모 때문에 법을 따르고492)
바르게 행하는 자 중에서 어떤 자가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부모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는 더 나은 자가 아닙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부모 때문에 법을 따르고 바르게 행하는 자가 더 낫습니다.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보다 법을 따르고 바르게 행하는 자가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악한 업을 짓지 않고
공덕을 쌓기 위해 [선한] 원인이 되는 다른 종류의 법다운 일들이 있습니다.”
492) “여기서 '법을 따른다(dhamma-cārī)'는 것은 묘지의 귀신 물리치기나 망령 물리치기(sivavijjā bhūtaviijā, 『디가 니까야』 제1권 「범망 경」(D1 §1.21참조) 등을 법답게(dhammika) 행하는 것(dhamma-cārī)을 말한다.” (MA.iii.430)
17. ~ 25.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처자 때문에 … [189] … 하인과 일꾼들 때문에 … 친구와 동료들 때문에 … [190] …
일가친척들 때문에 … 손님들 때문에 … 조상들 때문에 … 신들 때문에 … [191] … 왕 때문에 …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와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법을 따르고 바르게 행하는 자 중에서 어떤 자가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는 더 나은 자가 아닙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 때문에 법을 따르고
바르게 행하는 자가 더 낫습니다.
비법을 행하고 잘못을 행하는 자보다 법을 따르고 바르게 행하는 자가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자기 몸에 원기를 돋우어주고 잘 먹여주면서도 악한 업을 짓지 않고
공덕을 쌓기 위해 [선한]원인이 되는 다른 종류의 법다운 일들이 있습니다.”
26. 그러자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27. 다난자니 바라문은 그 후에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때 다난자니 바라문은 어떤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여보게 이 사람아, [192] 그대는 세존을 뵈러 가게.
세존을 뵈러 가서 내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세존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라고 문안을 드려주게.
그리고 사리뿟따 존자를 뵈러 가게. 뵈러 가서 내 이름으로 사리뿟따 존자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존자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사리뿟따 존자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라고 문안을 드려주게.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려주게.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다난자니 바라문의 거처를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그 사람은 다난자니 바라문의 말에 대답하고서 세존을 뵈러 갔다.
세존을 뵈러 가서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그리고 사리뿟따 존자를 뵈러 갔다. 뵈러 가서 사리뿟따 존자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 사리뿟따 존자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사리뿟따 존자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다난자니 바라문의 거처를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으로 동의하였다.
29. “사리뿟따 존자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통증이 더 심해지고 진정되질 않습니다. 차도는 고사하고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마치 [193] 힘센 사람이 시퍼런 칼로 머리를 쪼개듯이
거센 바람이 제 머리를 내리칩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 차도는 고사하고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마치 힘센 사람이 튼튼한 가죽끈으로 머리에 머리띠를 동여맨 것처럼 제 머리에 심한 두통이 생겼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 차도는 고사하고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마치 능숙한 백정이나 백 정의 도제가 소 잡는 날카로운 칼로 배를 도려내듯이 거센 바람이 제 배를 도려냅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 차도는 고사하고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마치 힘센 두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양팔을 잡고 숯불 구덩이 위에서 지지고 태우듯이 제 몸에 뜨거운 열기가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통증이 더 심해지고 진정되질 않습니다. 차도는 고사하고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30.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옥과 축생의 모태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지옥보다는 축생의 모태가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축생의 모태와 아귀의 영역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축생의 모태보다는 아귀의 영역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귀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아귀의 영역보다는 인간의 영역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194]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의 영역과 사대왕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인간의 영역보다는 사대왕천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대왕천과 삼십삼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사대왕천보다는 삼십삼천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삼십삼천과 야마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삼십삼천보다는 야마천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야마천과 도솔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야마천보다는 도솔천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솔천과 화락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도솔천보다는 화락천이 더 낫습니다.”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락천과 타화자재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사리뿟따 존자시여, 화락천보다는 타화자재천이 더 낫습니다.”
31. “다난자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타화자재천과 범천의 세상493)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493) '범천의 세상'은 brahma-loka를 직역한 것이다. 본서를 비롯한 니까야의 여러 곳에 범천의 세상이란 술어가 나타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색계 초선천부터 삼선천까지의 9가지 천상과 4선천의 광과천과 무상유정천과 다섯 가지 정거천과 네 가지 무색계 천상 - 이 20가지 천상을 모두 범천의 세상(brahma-loka)으로 부르고 있다.(MA.ii.333; VibhA.521, 등) 본경에서도 욕계의 가장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 다음에 범천의 세상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주석서의 이러한 설명은 타당하다. DPPN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색계 초선천의 신들을 범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색계 초선천을 범신천(梵身天)이라 부르고 이 범신천은 다시 범중천과 범보천과 대범천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 천상의 키워드가 바로 범천(brahma)이기 때문이다. (범신천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5장 §6의 해설을 참조할 것.) 특히 대범천의 몇몇 신들은 범천 혹은 대범천으로 초기불전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초선천을 범천으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초선천을 범천이라 부르지 않고 범신천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범천과 범신천이 정확히 일치 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DPPN도 색계 이상의 천상 즉 범천의 세상에 머무는 신들을 통틀어서 범천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편 범천으로 옮긴 brahma는 초기불전에서는 보통명사로도 쓰이며 특히 합성어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예외 없이 모두 '신성함, 거룩함, 높음, 위대함'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주석서는 “최상이라는 뜻에서 (seṭṭhatthena) 브라흐마(brahma)라 부른다.”(DA.iii.865 등)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정범행으로 옮기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iya)와 거룩한 마음가짐으로 옮기는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āra), 최상의 존재로 옮기는 브라흐마부따(bhrahma-bhūta), 최고의 처벌로 옮기는 브라흐마단다(brahma-daṇḍa) 등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색계와 무색계 천상을 일컫는 범천의 세상(brahma-loka)은 거룩한 천상 세계로 옮길 수 있다.
“범천의 세상이라고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범천의 세상이라고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바라문들은 범천의 세상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
나는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해야겠다.”
“다난자니여, 나는 그대에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하겠습니다.
그것을 듣고 마음에 잘 잡도리하십시오. 나는 설하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195]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설했다.
32. “다난자니여, 어떤 것이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입니까?
다난자니여,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다난자니여, 이것도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입니다.”
33. ~ 35. “다시 다난자니여, 비구는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다난자니여, 이것도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입니다.”
36. “사리뿟따 존자시여, 이제 제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세존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은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라고 문안을 드려주십시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다난자니 바라문을 낮은 범천의 세상에 머물게 한 뒤
그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494)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494) 사리뿟따 존자는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태어나서 범천의 일원이 되는 것만 가르치고, 출세간의 도와 과를 증득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고, 그는 범천에 태어났다.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결코 저열한 것은 아니지만 도와 과나 열반과 비교하면 낮은(hīna) 경지이다.
그러나 「상윳따 니까야」 제6권 「병 경」(S55:54) §11에서 세존께서는 본경과 유사한 순서로 범천의 세상(brahma-loka)까지 이른 뒤에 §12에서 다시 이러한 범천의 세상을 넘어선 '존재 더미의 소멸(sakkāya-nirodha)' 즉 열반의 증득을 구경으로 설하고 계신다.
그때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따 존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임종하여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다.
37.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다난자니 바라문을 낮은 범천의 세상에 머물게 한 뒤
그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38.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을 뵈러 갔다. 뵈러 가서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난자니 바라문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사리뿟따여, 그런데 그대는 왜 다난자니 바라문을 [196] 낮은 범천의 세상에 머물게 한 뒤 그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는가?” 495)
“세존이시여, 그것은 '참으로 바라문들은 범천의 세상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
나는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해 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495) 이 질문은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한 사리뿟따 존자의 가르침에 가벼운 경책을 하시는 표현이다. 세존께서는 다난자니 바라문이 출세간의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본서 「수바 경」 (M99) §§24~27에서처럼 세존 자신이 범천에 태어나는 가르침을 설하시기 때문이다.
“사리뿟따여, 다난자니 바라문은 임종하여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다.” 496)
496)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그곳에 가서 법을 설하라는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도 [신통으로] 즉시 그곳에 가서 범천에 태어난 [다난자니]에게 법을 설했다. 존자는 이 이후부터는 사구게(四句)의 게송을 설할 때라도 항상 사성제의 법문을 설했다.” (MA.iii.430~431)
본서에서도 사리뿟따 존자는 제1권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M28) §2와 제4권 「진리의 분석 경」 (M141) §8이하 등에서 사성제를 강조하고 있다.
다난자니 경(M97)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