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076. 산다까 경(Sandakasuttaṃ)

Daisy청량심 2023. 6. 15. 03:30

산다까 경 Sandaka Sutta(M76)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꼬삼비의 고시따 원림에 머무셨다.68)

 

68) 고삼비(Kosambi)와 고시따 원림(Ghositārām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꼬삼비 경」 (M48)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2. 그 즈음에 산다까 유행승69)은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유행승 회중과 함께

삘락카 동굴에 머물고 있었다.

 

69) 주석서는 산다까 유행승(Sandaka paribbājaka)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3. 그때 아난다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 비구들을 불러 말했다.

오시오, 도반들이여. 데와까따 호수로 동굴을 보러갑시다.”

그럽시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데와까따 호수로 갔다.

 

4. 그때 산다까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의 회중과 함께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높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70)를 나누고 있었다.

즉 왕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들 이야기, 군대 이야기, 공포에 관한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음식 이야기, 음료수 이야기, 옷 이야기, 침대 이야기, 화환 이야기, 향 이야기, 친척 이야기, 수레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거리 이야기, 우물 이야기, 옛적 유령 이야기, 하찮은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 [514]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71)였다.

 

70) “'쓸데없는 이야기(tiracchāna-kathā)'[해탈의] 출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aniyyānikattā) 천상과 해탈의 길(sagga-mokkha-magga)과는 평행선을 긋게 되는(tiracchāna-bhūta) 이야기를 말한다.” (SA.iii.294)

'쓸데없는'으로 옮긴 tiracchāna는 원래 옆으로 기어가는 자 즉 동물(축생, 짐승)을 뜻한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이야기로 옮긴 tiracchāna-kathā는 짐승의 이야기로 직역할 수 있다.

71) “'이런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iti-bhava-abhava-kathā)'에서, 이렇다(bhava)는 것은 영속(sassata)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렇지 않다(abhava)는 것은 단멸(uccheda)에 관한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증장(vaḍḍhi)에 관한 것이고, 이렇지 않다는 것은 쇠퇴(hāni)에 관한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감각적 쾌락(kāma-sukha)에 관한 것이고, 이렇지 않다는 것은 자기학대(atta-kilamatha)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여섯 종류의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서른두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bāttisa-tiracchāna-kathā)가 있다.” (MA.iii.223~224)

『청정도론』 IV.38에는 여기서 언급되는 27가지에다 5가지를 더하여 32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담론)를 정리하고 있다. 『청정도론』의 주석서인 『빠라맛타만주사』 (Pm)에 의하면 이 27가지에다 산, , 섬에 대한 이야기와 천상과 해탈에 대한 것도 쓸데없는 이야기에 포함시켜서 모두 32가지라고(Pm.59) 설명하고 있다.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가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자신의 회중을 조용히 하도록 했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오고 있소.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이 꼬삼비에 머물고 있는데

이 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문 아난다입니다.

저 존자들은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길들여져 있고 조용함을 칭송합니다.

이제 우리 회중이 조용한 것을 알면 그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 회중은 침묵하였다.

 

5. 그때 아난다 존자는 산다까 유행승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는 아난다 존자를 환영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오랜만에 여기에 오실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이리로 와서 앉으십시오. 아난다 존자시여, 이것이 마련된 자리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산다까 유행승도 역시 다른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산다까 유행승에게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산다까여,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모였습니까?

그리고 그대들이 하다만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들이 지금 앉아서 하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냥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아난다 존자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72)

아난다 존자께서는 당신의 스승이 하신 법문을 이야기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산다까여, 그렇다면 듣고 잘 마음에 잡도리하십시오. 나는 설하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72) “그는 '만약 아난다 존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중에라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에게 이익이 없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이왕 여기 오셨으니 다른 좋은 원인을 가진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난다 존자에게 세존께서 하신 법문 (dhamma-desana)을 들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MA.ili.226)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다.

6.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이들 네 가지 청정범행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고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삶으로는 지혜 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좋은 방법인 유익한 법73)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그러면 무엇이 그런 삶으로는 [515]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청정범행이 아닌 것 입니까?”

 

73)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ñāya dhamma kusala)'이란 원인이 되는 것(kāraa-bhūta)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다는 뜻(anavajj-aṭṭha)에서 유익한 법을 말한다.”(MA.iii.226)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ñāya dhamma kusala)'이란 성스러운 도의 법(ariya-magga-dhamma)을 말한다.” (SA.iii.132)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념처경」(D22)에 대한 주석서에서도 옳은 방법(ñāya)이란 성스러운 팔정도를 말한다.”(DA.iii.750)고 설명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도닦음 경」(A2:4:9)에 대한 주석서에서는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위빳사나와 함께한 도(saha-vipassanaka magga)”(AA.ii. 143)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한다.

확실하게 열반으로 가게 하거나(gameti) 혹은 이것으로(paivijjhīyati)고 해서 옳은 것(ñāya)이라 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sampādaka-hetu-bhāvato) 옳은 방법이란 성스러운 도(ariya-magga)를 말한다. 그래서 옳은 법이란 원인이 되는 법을 말하는 것이다.”(MAȚ.ii.42)

 

7,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임종하면 땅은 땅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74) 물은 물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불은 불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들어가 고 돌아가고, 감각기능들은 허공으로 들어간다.75)

상여를 다섯 번째로 한 [] 사람이 시체를 나른다.76)

묘지에 도착할 때까지 추도가77)를 읊는다. 뼈다귀는 잿빛으로 변한다.

공물은 재로서 끝날 뿐이다. 보시란 어리석은 자의 교설일 뿐이다.78)

누구든 [보시 등이]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79)은 공허하고 쓸데없는 거짓말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할 뿐이라서 사후란 없다.'80)라고.”

 

74) “'들어가고 돌아간다(anupeti anupagacchati)'는 것은 안(ajjhattikā) 땅의 요소가 밖의(bāhira) 땅의 요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들어가고 돌아간다는 것은 동의어(vevacana)이다.”(MA.iii.226)

75) “마음을 여섯 번째로 한 감각기능들(manacchaṭṭhāni indryāni)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MA.iii.227)

76) “상여를 다섯 번째로 한 네 사람이 시체를 나른다(āsandi-pañcamā purisā mata ādāya gacchanti).'는 것은 네 사람과 상여(mañca)가 다섯 번째가 되어, 이 다섯이 시체를 실어 나른다는 말이다.”(MA.iii.227)

77) “'추도가(padāni)'란 이 사람은 이러한 계행을 실천했고, 이러한 나쁜 계행을 실천했다는 방법으로 공덕을 기리는 노래(gua-padāni)이다. 혹은 이 단어는 여기서 오직 몸(sarīra)을 말한 것으로 묘지에 도착할 때까지 몸을 나른다는 말이다.”(MA.iii.227)

78) “즉 어리석고(bāla) 현명하지 못한 사람(abuddhi)들이 이런 보시를 주장하지 현명한 사람들(paṇḍitā)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주고, 현명한 사람은 받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MA.iii,227)

79)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atthika-vāda)'이란 '보시도 있고, 보시의 과보도 있다(atthi dinna dinnaphala)'고 주장하는 자들의 교설이다." (MA.jii.227)

80) 이것은 『디가 니까야』제1권 「사문과경」(D2/i.55) §§22~24에서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ī)[사후] 단멸론(ucchedavāda)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상윳따 니까야』제3권 「없음 경」(S24:5)의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니까야에서 이 정형구가 나타나는 곳은 「사문과경」(D2) §2.23, 본서 제2권 「살라의 바라문들 경」 (M41) §10, 「확실한 가르침 경」 (M60) §5, 3권 「산다까 경」(M76,§7(본경), 「보름밤의 짧은 경」 (M110) §11, 4권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함 경」(M114) §10, 「위대한 사십 가지 경 (M117) §5, 『상윳따 니까야』제3권 「없음 경」 (S24:5) §3, 4권 「빠딸리야 경」(S42:13) §12; 『앙굿따라 니까야』 제6권 「쭌다 경」(A10:176) §5 등이다.

 

8.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도 없다. 사후란 것은 없다.'라고,

만일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내가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지 않고도 닦은 것이 된다.81)

그리하여 우리는 둘 다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경지를 얻는다.82)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할 뿐이라서 사후란 없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81) “내가 아직 사문의 일(samaa-kamma)을 하지 않았지만(akata) 여기 이 사람의 교법(samaya)에서는 한 것이 되고, 청정범행을 살지 않았지만(avusita brahmacariya) 여기 이 교법에서는 산 것이 된다는 뜻이다.”(MA.ii.228)

82)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경지를 얻는다(samasamā sāmañña-pattā).'는 것은 스승과 나는 동일한 공덕(gua)에 의해 동일하고, 동일한 상태(samāna-bhāva)를 얻는다는 말이다.” (MA.iii.228)

 

그러나 이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쪼그리고 않는 자세를 취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왜냐 하면 내가 자식들이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 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과 연고를 즐겨 사용하고 금은을 향유하지만

이 스승과 동일한 행처를 가지고 동일한 미래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내가 이 스승의 문하에서 청정범행을 닦아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겠는가?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이 아니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9.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516]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청정범행이 아닌 것입니다.”

 

10.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하도록 시키고, 절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절단하도록 시키고,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시키고, 슬픔을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슬픔을 주도록 시키고,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시키고,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집을 부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약탈하고, 주거침입을 하고, 노상강도질을 하고, 남의 아내를 강간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이가 예리한 칼이 가장자리에 달린 바퀴로

이 땅의 모든 생명을 갈아서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어버리더라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과보도 없다.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거나 죽이도록 시키고, 절단하거나 절단하도록 시키고,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시켜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과보도 없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도록 시키더라도 그로 인한 어떤 공덕도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를 하고 자신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공덕이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다.' 83)라고

 

83) 이것은 『디가 니까야』제1권 「사문과경」(D2/i.52~53)§§16~18에서 뿌라나 가사빠(Pūraa Kassapa)의 도덕부정론(akiriya-vāda)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상윳따 니까야』 제3권 「행위 경」(S24:6)의 주제로도 나타나고 있다.

 

11.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하도록 시키고,

보시를 하고 자신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공덕이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다.'라고,

만일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내가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지 않고도 닦은 것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둘 다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경지를 얻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건 간에 악을 짓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쪼그리고 않는 자세를 취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그런 내가 이 스승의 문하에서 청정범행을 닦아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겠는가?'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이 아니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12.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청정범행이 아닌 것입니다.”

 

13.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중생들이 오염되는 데에는 어떤 원인도 없고 어떤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오염된다.

중생들이 청정해지는 데에도 어떤 원인도 없고 어떤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자신의 행위도 남의 행위도 인간의 행위도 없다.]

힘도 없고 노력도 없고 남자의 용기도 [517] 없고 남자의 분발도 없다.

모든 중생들과 모든 생명들과 모든 존재들과 모든 영혼들은 지배력도 없고 힘도 없고

정진력도 없이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 여섯 종류의 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84) 라고.”

 

84) 이것은 「사문과경」(D2) §§19~21에서 막칼리 고살라(Makkhaligosāla)의 윤회를 통한 청정(sasāra-suddhi) 혹은 무인론(ahetuka-vāda)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본서 제2권 「모순 없음 경」 (M60) §21에도 언급되고 있으며, 『상윳따 니까야』제3권 「원인 경」 (S24:7)의 주제로도 나타나고 있 다. [ ] 안의 문장에 대해서는 「모순 없음 경」(M60) §21의 주해를 참조할 것.

 

14.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중생들이 오염되는 데에는 어떤 원인도 없고 어떤 조건도 없다.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 여섯 종류의 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 한다.'라고,

만일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내가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지 않고도 닦은 것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둘 다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경지를 얻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 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청정해진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쪼그리고 않는 자세를 취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그런 내가 이 스승의 문하에서 청정범행을 닦아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겠는가?'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이 아니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15.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청정범행이 아닌 것입니다.”

 

16.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몸들이 있나니,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86)

창조된 것이 아니고,87) 창조자가 없으며, 생산함이 없고,88)

산꼭대기처럼 서 있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 있다.89)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90)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도 줄 수 없다. 무엇이 일곱인가?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 번째로 영혼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몸들이 있나니,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없으며,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서 있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고 알게 하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르는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다만 칼이 이 일곱 가지 몸들의 가운데로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사십만 가지의 주요한 모태가 있고,91) 다시 육천육백 가지 [주요한 모태]가 있다. 오백 가지의 업이 있고,92) 다섯 가지, 세 가지 업이 있고, 완전한 업이 있고 절반의 업93)이 있다. 예순두 가지 도닦음이 있고 예순두 가지 중간 겁이 있다.94)

여섯 부류의 태생이 있고,95) 여덟 가지 인간의 단계가 있고,96) 사천구백 종류의 생명체가 있고 사천구백 부류의 유행승이 있고 사천구백 종류의 [518] 용이 있다.

이천 가지 감각기관이 있고, 삼천 가지 지옥이 있고, 서른여섯 가지 티끌이 쌓이는 곳97)이 있고, 일곱 가지 인식이 있는 모태98)와 일곱 가지 인식이 없는 모태99)가 있고, 일곱 가지 마디를 가진 모태100)가 있고, 일곱 부류의 신,101) 일곱 부류의 인간, 일곱 가지 유령, 일곱 가지 호수,102) 일곱 가지 매듭, 일곱 가지 낭떠러지, 칠백 가지 낭떠러지,103) 일곱 가지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다. 팔백사십 만의 대겁(大劫)이 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이것을 모두 치달리고 윤회한 뒤 괴로움을 끝낸다. 104)

그러므로 여기에 '나는 계행105)이나 서계나 고행이나 청정범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리라.'라거나 '이미 익은 업을 경험할 때 그것을 없애리라.'106)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할당되었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이 윤회를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없다.107)

마치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그와 같이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그것을 모두 치달리고 윤회한 뒤 괴로움을 끝낸다.'108)라고.”109)

 

86)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akaa-vidhā)라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라.'라고 어떤 자가 시켜서 만들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MA.iii.228)

87) “'창조된 것이 아니고(animmitā)'라는 것은 신통(iddhi)으로도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MA.iii.228)

88) “'생산함이 없고(vañjhā)'란 새끼를 낳지 못하는 동물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자수처럼 결과를 내지 못한다 (aphalā)는 말로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ajanakā)는 뜻이다. 이것은 땅의 몸(pathavī-kāya) 등이 물질 등을 생산하는 상태를 부인한 것이다.” (MA.iii,228)

89) “'산꼭대기처럼 서 있고, 기둥처럼 서 있다(kūaṭṭhā esikaṭṭhāyiṭṭhitā).'는 것은 이 일곱 가지 몸들의 파괴되지 않는 상태(vināsa-abhāva)를 보인 것이다.” (MA.iii.229)

90) “'움직이지 않는다(na iñjanti)'는 것은 기둥(esikatthambha)처럼 서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변하지 않는다(na vipariamanti).'는 것은 그들의 천성(pakati)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na aññamañña byābādhenti).'는 것은 서로를 다치게 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MA.iii.229)

91) 여기서부터는 결정론(akaa-vāda)으로 불리는 빠꾸다 까짜야나(Pakudha Kaccāyana)의 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음의 본문처럼 이미 이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일종의 운명론 (niyati)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간 이 정해져 있는 이 윤회를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92) “'오백 가지의 업이 있다(pañca ca kammuno satāni).'고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추론만(takka-mattaka)으로는 소용이 없는 견해(niratthaka-diṭṭhi)를 드러낸 것이다.

'다섯 가지 업(pañca kammāni)' 등도 이와 같다. 그러나 다른 스승의 전통 에서는 '다섯 가지 업'이란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 따라 취한 것이고, '세 가지 업'이란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마음의 업에 따라 취한 것이라고 한다. (MA.iii.230)

93) “'완전한 업이 있고 절반의 업이 있다(kamme ca aḍḍhakamme ca)'고 했다. 어떤 자들은 '완전한 업(kamma)'이란 몸의 업(kāya-kamma)과 말의 업(vacī-kamma)이고, '절반의 업(aḍḍha-kamma)'이란 마음의 업(mano-kamma)이라는 신조(laddhi)를 갖고 있었다.”(MA.iii.230)

94) “'중간 겁(antara-kappā)'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의 겁에 예순두 개의 중간 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두 개의 겁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MA.iii.230)

95) '여섯 부류의 태생'cha-ābhijātiyo를 옮긴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여섯 태생 경」(A6:57) §2와 『디가 니까야 주석서』 (DA.i.162)에 의하면 '여섯 부류의 태생(chaābhijāti)'은 흑인의 태생(kaha-abhijāti), 청인의 태생, 적인의 태생, 황인의 태생, 백인의 태생, 순백인의 태생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여섯 태생 경」 (A6:57) §2에 상세하게 나타나므로 참조할 것.

그런데 「여섯 태생 경」 (A6:57) §2에서 이 이론은 막칼리 고살라가 아닌 뿌라나 깟사빠가 주장하였다고 나타난다.

96) “'여덟 가지 인간의 단계(aṭṭha puisa-bhūmiyo)'란 영아의 단계(manda-bhūmi), 놀이의 단계(khiḍḍā-bhūmi), 탐구의 단계(vīmasaka-bhūmi), 직립의 단계(ujugata-bhūmi), 배움의 단계(sekkha-bhūmi), 사문의 단계(samaa-bhūmi), 승리의 단계 (jina-bhūmi), 파멸의 단계(panna-bhūmi)를 말한다.

좁은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태어난 날로부터 일주일 동안 중생들은 어리석고 어리둥절하다. 이것을 '영아의 단계'라 한다. 악처(duggati)에서 온 중생들은 계속해서 울고 큰 소리로 울어대지만, 선처(sugati)에서 온 중생들은 그것을 기억하면서 웃는데, 이것을 '놀이의 단계'라 한다. 부모님의 손이나 다리나 침대나 의자를 잡고 바닥에 발을 딛는 것을 '탐구의 단계'라 한다. 발 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시기를 '직립의 단계'라 한다. 기술(sippa)을 배우는 시기를 '배움의 단계'라 한다. 집을 떠나 출가하는 시기 (pabbajana-kāla)'사문의 단계'라 한다. 스승을 섬겨서 꿰뚫어 아는 시기를 '승리의 단계'라 한다. 쓰러진 영웅(pannaka jina)이 아무 말이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

한 사문을 '파멸의 단계'라 한다.”(MA.ill.230~231)

97) “'티끌이 쌓이는 곳(rajo-dhātuyo)'이란 손등(hattha-piṭṭhi)과 발등(pāda-piṭṭhi) 등을 두고 한 말이다.”(MA.iii.231)

98) “'일곱 가지 인식이 있는 모태(satta saññī-gabbhā)'란 낙타(oṭṭha), 황소(goa), 당나귀(gadrabha), 숫양(aja), 염소(pasu), 사슴(miga), 물소(mahisa)를 두고 한 말이다.” (MA.iii.231)

99) “'일곱 가지 인식이 없는 모태(asaññī-gabbhā)'란 쌀(sāli), 보리(yava), (godhuma), 녹두(mugga), 기장(kagu), (varaka), 꾸드라사까(kudrūsaka, 호밀의 일종)를 두고 한 말이다.” (MA.iii.231)

100) “'마디를 가진 모태(nigaṇṭhi-gabbhā)'란 사탕수수(ucchu), 대나무(veu), 갈대(naa) 등을 두고 한 말이다.” (MA.iii.231)

101) “'일곱 부류의 신(satta deva)'이란 많은 신들을 말하는데, 그것을 다만 일곱이라 했고, '인간들(mānusā)'도 끝이 없지만 일곱이라 했고, '유령들(pisācā)'도 그와 같다.”(MA.11.231)

102) “일곱 가지 호수(satta sarā)'란 큰 호수인 깐나문다(kaṇṇamuṇḍa), 리타까라(rathakāra), 아노땃따(anotatta), 시하빠빠따(sīhapapāta), 꾸릴라(kuira), 무짤린다(mucalinda), 꾸날라다하(kuāladaha) 호수를 말한다. (MA.iii.232)

103) “'일곱 가지 낭떠러지(satta papātā)'는 큰 것을 말하고, '칠백 가지 낭떠러지 (satta papātasatāni)'는 작은 것을 말한다. '(supinā)'의 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MA.iii.232)

104) “팔백사십만 대겁(大劫, mahā-kappuno)을 다 지난 뒤에야 어리석은 자들(bālā)도 현명한 자들(paṇḍitā)도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laddhi)였다. 그 중간에는 현명한 자도 청정해질 수 없고, 어리석은 자도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MA.iii.232)

105) “여기서 '계행(sīla)'이란 나체의 계행(acelaka-sīla)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서계(誓戒, vata)'도 그러한 종류를 말한다.”(MA.iii.232)

106)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리라(aparipakka kamma paripācessāmi).'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그 중간에 청정해진 다는 것이고, '이미 익은 업을 경험할 때 그것을 없애리라(paripakka kamma phussa phussa byantikarissāmi).'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설명한 기간보다 더 오래 업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MA.iii.232~233)

107) “괴로움과 즐거움은 됫박(doa)으로 양을 잰 것처럼 할당되었고(doamite sukhadukkhe), 기간이 정해져있는 윤회(sasāra)에서 현명한 사람에게는 윤회가 단축되거나 어리석은 자에게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MA.iii.233)

108) “산이나 나무 꼭대기에서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nibbehiyamānam eva paleti)' 실이 풀리면서 계속 굴러가다가 실이 다하는 곳에서 멈추고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명한 기간(vutta-kāla)보다 더 오래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MA.jii.233)

109) 이것은 「사문과경」(D2) §§25~27에서 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의 결정론(akaa-vāda)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상윳따 니까야』제3권 「큰 견해 경」(S24:8)의 주제로도 나타난다.

 

17.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이러한 일곱 가지 몸들이 있나니,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그것을 모두 치달리고 윤회한 뒤 괴로움을 끝낸다.'라고.

만일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내가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지 않고도 닦은 것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둘 다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경지를 얻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 다 그것을 모두 치달리고 윤회한 뒤 괴로움을 끝낸다.'라고.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쪼그리고 않는 자세를 취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그런 내가 이 스승의 문하에서 청정범행을 닦아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겠는가?'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이 아니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18.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청정범행이 아닌 것입니다.”

 

19.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519] 말씀하신 네 가지 청정범행이 아닌 것입니다.”

 

20.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 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청정범행이 아닌 것이군요.

 

아난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 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 범행입니까?”

 

21.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모든 것을 아는 자요[一切知者] 모든 것을 보는 자[一切見]라면서

'나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 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완전한 지와 견을 선언합니다. 110)

 

110) 이 정형구는 본서(『맛지마 니까야』)에 주로 나타난다. 본서 제1M14 §17, 3M71 §6, 본경, M79 §6, M90 §5, M101 §10에 나타나며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니간타 경」 (A3:74) §1과 제5권 바라문 경」(A9: 38) §2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말을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황소를 만나기도 합니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묻기도 하고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묻기도 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111)

'내가 빈집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갔다.

나는 음식을 얻지 못해야만 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

개에게 물려야만 했기 때문에 물렸다.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야만 했기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말을 만나야만 했기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개를 만나야만 했기 때문에 만났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물었다.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물었다.'라고 말합니다.”

 

111)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아는 자(sabbaññu)라고 하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운명론(niyati-vāda)을 보완하면서 '빈집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갔다.(suñña me agāra pavisitabha ahosi tena pāvisi).'라는 등으로 말한다.” (MA.iii.233)

 

22.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모든 것을 아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라면서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물었다.'라고 말하는구나.

그는 '이것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이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23.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520] 말씀하신 첫 번째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입니다.”

 

24.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전통주의자라서 구전되어 온 것을 진리로 여깁니다.112)

그는 구전되어온 것과 이러이러하다고 전승되어온 것113)

성전으로 전해온 것에 의지하여 법을 설합니다.

산다까여, 그런데 구전되어온 것을 의지하고 구전되어온 것을 진리로 여기는 스승은

바르게 기억한 것도 있고 잘못 기억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112) '전통주의자라서 구전되어온 것을 진리로 여깁니다.'anussaviko hoti anussava-sacco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anussavaanu+śru(to hear)에서 파생된 명사로 '따라서 들음'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구전을 뜻하기도 하고 소문을 뜻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깔라마 경」 (A3:65) §3'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를 들 수 있다.) ussavika는 이러한 구전되어온 것을 의지하는 자를 뜻하고 그래서 '전통주의자'로 의역을 하였다. 이 구문은 본서 「상가라와 경」 (M100) §7에도 나타난다.

113) '이러이러하다고 전승되어온 것'itihītiha-parampara를 옮긴 것이다.

itihītiha라는 이 생소한 단어는 PED에서 itiha+itiha로 이해하여 so & so로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도 이렇다고 하더라, 이렇다고 하더라(eva kira eva kira).” (MA.iii.424)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이러하다고'로 옮겼다.

itihītiha라는 표현은 『상윳따 니까야』제1권 「안다까윈다 경」 (S6:13) §3{601}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곳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그곳의 문맥에 따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단지 소문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na yida itihītiha).'라는 것은 이것은 이렇고 이렇다고(ida itiha itihāti) 추론을 통해서나(takka-hetu) 논리를 통해서나(naya-hetu) 성전을 받아들임(piaka-sampadāna)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SA.i.221)

본서 「짱끼 경」 (M95) §12에는 이러이러하다고 전승되어오고 성전으로 전해온 바라문들의 오래된 만뜨라를 의지하여(brāhmaāna porāa mantapada itihītihaparamparāya piakasampadāya)”라는 문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5.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전통주의자라서 구전되어온 것을 진리로 여긴다.

그는 구전되어온 것과 이러이러하다고 전승되어온 것과

성전으로 전해온 것에 의지하여 법을 설한다.

그런데 구전되어온 것을 의지하고 구전 되어온 것을 진리로 여기는 스승은

바르게 기억한 것도 있고 잘못 기억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이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26.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입니다.”

 

27.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논리가요 탐구자입니다.114)

그는 논리에 의해 안출(家出)되었고 탐구를 거듭하여 스스로가 구명(究明)한 법을 설합니다.

산다까여, 그러나 논리가요 탐구자인 스승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114) '논리가'로 옮긴 원어는 takkī이고 '탐구자'로 옮긴 원어는 vīma이다.

『디가 니까야』제1권 「범망경」(D1) §1.34 등에서는 vīma'해석가'로 옮겼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논리한다(논리로 따진다)고 해서 '논리가(takkī)'이다. 논리하고 사량한 뒤에(takketvā vitakketvā) 견해를 취하는 자(diṭṭhigāhi)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해석한다고 해서 '해석가(vīmasī)'이다. 해석이란 재고(tulana) 선택하고(ruccana) 결정하는 것(khamana)이다. 마치 사람이 장대로 물을 재어본 뒤에 건너는 것처럼 재어서 선택하여 결정한 뒤에 견해를 취한다. 그가 바로 해석가라고 알아야 한다.”(DA.i.106)

한편 복주서(DAȚ.i.188~89)에서는 논리(takka)를 일으킨 생각[, vitakka], 해석(탐구, 검증, vīmasa)을 지속적 고찰[, vicāra]에 배대(配對)하고 있다. 논리가는 본서 「상가라와 경」 (M100) §7에서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로 언급되고 있으며, 「범망경」(D1)에는 네 가지 논리가들의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1.34, §2.13, §2.20, §2.32).

 

28.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논리가요 탐구자이다.

그는 논리에 의해 안출(案出)되었고 탐구를 거듭하여 스스로가 구명(究明)한 법을 설한다.

그러나 논리가요 탐구자인 스승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 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이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29.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입니다.”

 

30.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우둔하고 어리석습니다.115)

 

115) 이것은 『디가 니까야』제1권 「사문과경」(D2) §§31~33에 나타나는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ena Belaṭṭhiputta)의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애매모호함(vikkhepa)으로 잘 알려졌으며 역시 『디가 니까야』제1권 『범망경』 (D1) §2.27에 나타나는 네 번째 아마라위케삐까(Amarāvikkhepika, 애매모호함을 설하는 자, 문자적으로는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 자)에 해당한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의 옛 스승이었음이 분명하다.(Vin.i.39) 두 사람이 산자야를 떠나자 그는 뜨거운 피를 토했다고 한다.(Vin.i.42)

비록 본경과 「범망경」 (D1) §2.27에서 아마라위케삐까들은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언급되었지만 정형구에서 보듯이 산자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회피했으며 다른 외도들과는 달리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형이상학적인 존재론보다는 연기연멸(緣起緣滅)을 바탕한 고()의 완전한 소멸을 통한 해탈 · 열반을 힘주어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즉시에 이해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우둔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521]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것은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다르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116)라고 하면서 말이 혼란스럽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갑니다.”117)

 

116) 본경에 나타나는 이 구절은 「사문과경」 (D2) §32와 「범망경」(D1) §2.27 에는 만일 당신이 '저 세상이 있소?'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다르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라는 방식으로 모두 16가지로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117)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amarā-vikkhepa를 옮긴 것이다. 이 용어는『디가 니까야』제1권 「범망경」(D1) §§2.23~28 등에도 아마라위케삐까(Amarāvikkhepika,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범망경에서는 '애매모호함을 설하는 자'로 의역을 하였다.

amarā-vikkhepaamarāvikkhep의 합성어인데 「범망경」 (D1) §2.23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이것을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역자가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으로 옮긴 것은 두 번째 설명에 따른 것이다.

죽지 않는다(na marati)고 해서 죽지 않음(amarā, 즉 정해진 끝이나 결론이 없음)이다. 이것은 '이렇다.'라고도 하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사견을 가진 자(diṭṭhi-gatika)의 결말이 없는(pariyanta-rahitā) 견해(diṭṭhi)와 주장(vācā)이다. 여러 곳으로 던짐(vividho khepo)이 이리저리 던짐(vikkhepa)이다. 결말이 없는 견해와 주장으로 이리저리 던진다고 해서 아 마라위케빠(애매모호하게 늘어놓음)이다.

다른 설명은 이렇다. '아마라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maccha-jāti, 즉 뱀장어)이다. 이것은 물속에서 [매끄럽게]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며 달아나기(sandhāvati) 때문에 잡을 수가 없다. 그와 같이 이런 주장(vāda)도 이리저리로 달아나기 때문에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다.'라고 해서 아마라위케빠(뱀강어처럼 빠져나감)라 한다.” (DA.i.115)

 

31. “산다까여, 여기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우둔하고 어리석다.

그는 우둔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것은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다르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말이 혼란스럽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구나.'

그는 '이것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이다.'라고 알아 그런 청정범행을 역겨워하며 떠납니다."

 

32.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입니다.”

 

33. “산다까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입니다.”

 

34.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것이 그런 삶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결코 청정범행을 행할 수 없고

혹은 행하더라도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 한다고,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안식을 주지 못하는 청정범행이군요.

 

아난다 존자시여,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이 확실히 청정범행을 행할 수 있고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 할 수 있도록

스승께서는 어떤 교설을 가졌고 어떤 가르침을 설하십니까?”

 

35. “산다까여, 여기 여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십니다.

그는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시며,

영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은 분[]이시며, 세존(世尊)이십니다.

그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이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냅니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을 구족했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법을 설하고, 범행(梵行)을 드러냅니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습니다.

 

36. “ 그는 이 법을 듣고 여래에게 믿음을 가진다.

그는 이런 믿음을 구족하여 이렇게 숙고한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라고,

그는 나중에 재산이 적건 많건 간에 모두 다 버리고, 일가친척도 적건 많건 간에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37.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비구들의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그것과 더불어 생활한다.

그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고, 양심적이고 동정심이 있으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머문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준 것 만을 받고 준 것만을 받으려고 하며 스스로 훔치지 않아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머문다.

그는 금욕적이지 못한 삶을 버리고 청정범행을 닦으며, 도덕적이고 성행위의 저속함을 멀리 여윈다.

그는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진실을 말하며 진실에 부합하고

굳건하고 믿음직하여 세상을 속이지 않는다.

그는 중상모략하는 말을 버리고 중상모략하는 말을 멀리 여의고,

여기서 듣고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고

저기서 듣고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와 같이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우정을 장려하며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는 욕설을 버리고 욕설을 멀리 여의고,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잡담을 버리고 잡담을 멀리 여의고, 적절한 시기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법을 말하고, 율을 말하며, 가슴에 담아둘 만한 말을 하고, 이치에 맞고, 절제가 있으며, 유익한 말을 적절한 시기에 한다.

 

그는 씨앗류와 초목류를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 여읜다.

하루 한 끼만 먹는다.

그는 밤에 [먹는 것을] 여의고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 여읜다.

, 노래, 연주,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화환을 두르고 향과 화장품을 바르고 장신구로 꾸미는 것을 멀리 여읜다.

높고 큰 침상을 멀리 여읜다.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생고기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여자나 동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염소 와 양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코끼리, , , 암말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농토나 토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멀리 여읜다. 사고파는 것을 멀리 여읜다.

저울을 속이고 금속을 속이고 치수를 속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악용하고 속이고 횡령하고 사기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상해, 살해, 포박, 약탈, 노략질, 폭력을 멀리 여읜다.”

 

38. “그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資具)를 몸에 지니고 간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기 양 날개를 짐으로 하여 날아가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의 자구를 몸에 지니고 간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戒蘊]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39. “그는 눈으로 형색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기능[眼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 을 잘 방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한다.

귀로 소리를 들음에코로 냄새를 맡음에혀로 맛을 봄에몸으로 감촉을 느낌에마노[]로 법을 지각함에 그 표상을 취하지 않으며, 그 세세한 부분상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노의 기능[意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구족하여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40. “그는 나아갈 때도 돌아올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법의(法衣) · 발우 · 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41.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 한다.”

 

42.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싸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347]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물고,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의 오점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물고,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악의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 없이 머물고,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싸띠를 확립하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물고,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극복하여 머물고,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심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43.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처럼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이런 고귀한 수승함을 증득합니다.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히 청정 범행을 행할 수 있고 [522]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44. ~ 46. “산다까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2선을3선을4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처럼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이런 고귀한 수승함을 증득합니다.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히 청정범행을 행할 수 있고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47.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 [宿命通 숙명통]로 마음을 향하게 합니다.

그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산다까여, 이처럼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이런 고귀한 수승함을 증득합니다.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히 청정범행을 행할 수 있고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48.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 [天眼通 천안통]로 마음을 향하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 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중생들 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산다까여, 이처럼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이런 고귀한 수승함을 증득합니다.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히 청정범행을 행할 수 있고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49.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누진통]로 마음을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50.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깁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산다까여, 이처럼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이런 고귀한 수승함을 증득합니다.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히 청정범행을 행할 수 있고

또 청정범행을 행할 때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51.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 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 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523] 감각적 욕망을 즐깁니까?”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118)

 

118) 본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다섯 가지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5권 「수따와 경」(A9:7) §2와 『디가 니까야』제3권 「합송경」 (D33) §2.1 (10)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는 「수따와 경」 (A9:7) §3에서 모두 아홉 가지로 확장되어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 두고119) 감각적 욕망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119) “전에 재가자였을 적에는 축적해놓고 감각적 욕망(kāma)을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기름(tila), 쌀밥(taṇḍula), 버터기름(sappi), 버터우유(navanīta) 등을 쌓아놓고 즐길 수 없다.” (MA.iii.234)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

 

52.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 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걸어 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 있습니까?”

 

산다까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시다.

그의 팔과 다리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압니다.

 

산다까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고 압니다.” 120)

 

120) '산다까여, 예를 들면'부터 여기까지는 역자가 저본으로 삼은 Ee(PTS)의 문맥에 따라 옮긴 것이다. 그러나 Be(6차결집본)를 따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산다까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시다. 그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그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압니다.

산다까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잠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고 압니다.”

나나몰리 스님은 BBS본을 따라 영역했다고 주해에서 밝혔는데 이 Be와 같다.(냐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627~628쪽 참조)

 

53. “아난다 존자시여, 그런데 이 법과 율에는 해탈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다까여, 백 명뿐만이 아니라, 이백 명, 삼백 명, 사백 명, 아니 오백 명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자들이 이 법과 율에서 해탈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자기의 법을 칭찬하지 않고 남의 법을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영역 안에서 법을 설하여 [524] 수많은 해탈한 자들을 배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은 아들과 마찬가지인 이 아지와까들121)

자신들을 칭찬하고 남들을 비난하면서도 오직 세 사람의 해탈한 자를 천명합니다.

즉 난다 왓차, 끼사 산낏짜, 막칼리 고살라입니다.”

 

121) '어머니의 죽은 아들과 마찬가지인 이 아지와까들'ime ājīvikā putta matāya putta를 옮긴 것이다. 직역하면, '아들이 죽은 자의(puttamatāya) 아들인(putta) 이 아지와까들이 된다. 주석서에서도 이 '아들이 죽은 자(putta-matā)'mātā(어머니)라고 설명하고 있다.(MA.iii.235) 그래서 '어머니의 죽은 아들과 마찬가지인 이 아지와까들'로 풀어서 옮겼다. 여기서 아들이 죽은 자로 옮긴 putta-matā는 바후워리히 합성어(유재석, 有財釋)이다. 한편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산다까는 이 법문을 듣고 '아지와까(사명외도)는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다. 즉 아지와까는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머니(matā)는 죽은 아들을 갖고 있다(putta-matā)는 뜻이다.”(MA.iii.235)

 

54. 그때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회중을 불러서 말했다.

존자들이여, 가시오.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으시오.122)

지금 우리가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122) “사문 고따마에게만 청정범행(brahma-cariya)이 있고, 다른 곳에는 청정범행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대목이다.” (MA.iii.235)

 

이처럼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회중에게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도록 권고했다.

 

 

산다까 경(M76)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