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066. 메추라기 비유 경(Laṭukikopamasuttaṃ)

Daisy청량심 2023. 6. 15. 03:27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앙굿따라빠아빠나694)라는 앙굿따라빠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694) 앙굿따라빠(Aguttarāpā)와 아빠나(Apaa)에 대해서는 본서 「뽀딸리야 경」(M54)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2. 그때 세존께서는 아침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아빠나로 탁발을 가셨다. 아빠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시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어떤 숲으로 가셨다. 그 숲에 들어가셔서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어떤 나무 아래 앉으셨다.

 

3. 그때 우다이 존자695)도 아침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아빠나로 탁발을 갔다. 아빠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어떤 숲으로 갔다. 그 숲에 들어가서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어떤 나무 아래 앉았다.

 

695) “우다이(Udāyī)라 이름하는 세 분의 장로가 있는데 랄루다이(Lāudāyī), 깔루다이(Kāudāyī), 마하우다이(Mahā-udāyī)이다. 여기서는 마하우다이 존자를 두고 한 말이다.”(DA.ili.903)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도 본경의 우다이 존자는 마하우다이 존자(Mahā-udāyi-tthera)라고 밝히고 있다.(MA.ili.163)

마하우다이 존자에 대해서는 본서 「많은 느낌 경」 (M59) §2의 주해를 참조 할 것.

 

4. 그때 우다이 존자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 [명상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696)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유익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697)

 

696) '제거해주셨다' '가져다주셨다'는 각각 apahattā upahattā를 옮긴 것인데, 이 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에 모두 해당된다고 복주서는 설명하고 있다. 복주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제거해주셨다(apahattā)'는 것은 제거해주셨고(apahari), 제거해주시고(apaharati), 제거해주실 것이다(apaharissati)라는 뜻이다. '가져다주셨다.(upahattā)'는 것도 이와 같다.”(MAT.ii.74)

697) 여기서 '괴로운 법들', '즐거운 법들', '유익한 법들', '해로운 법들'은 각각 dukkha-dhammā, sukha-dhammā, kusala-dhammā, akusala-dhammā를 옮긴 것이다.

한편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괴로운 법들(dukkha-dhammā)'을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법들(dukkha-sambhava(=uppatti)-dhammā)로 해석 하고(SA.iii.53) 복주서는 괴로움의 이유들(dukkha-kāraā)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두 가지 '즐거움(sukha)'에 대해서는 본경 §§18~21을 참조할 것. 그리고 유익한[, kusala]과 해로[不善, akusala]은 본서 제3권 「왓차곳따 긴 경」 (M73)의 주제이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5. 그러자 우다이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698)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우다이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698)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MA.iii.163)

 

6, “세존이시여, 여기서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 [명상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전에는 저녁에도 아침에도 오후에도 이렇게 때 아닌 때에 먹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자 그 즈음에 세존께서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부디 그대들은 적당한때가 아닌 오후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려라.‘

세존이시여, 그런 저희들은 당황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신심 있는 장자들이 우리에게 적당한때가 아닌 오후에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데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선서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세존이시여, 그러나 저희들은 세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보면서 이와 같이 적당한때가 아닌 오후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리하여 저희들은 저녁과 아침에만 음식을 먹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자 그 즈음에 세존께서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부디 그대들은 적당한때가 아닌 저녁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려라.'

세존이시여, 그런 저희들은 당황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두 끼 공양 중에 우리가 더 좋아라고 생각하는 그것마저도 세 존께서는 우리들에게 버리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선서께서는 그것마저도 우리들에게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세존이시여, 전에699) 어떤 사람이 오후에 국을 얻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저녁에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먹어야겠다.

세존이시여, 모든 특별한 요리는 저녁에 하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700)

그러나 저희들은 세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보면서 이와 같이 적당한때가 아닌 저녁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렸습니다. 701)

 

699) “'전에(bhūtapubba)'라고 시작하는 이 대목은 사람들이 저녁에 음식 먹는 것(ratti-bhojana)을 더 좋아함(paīta-bhāva)을 보여주는 것이다.” (MA.iii.163)

700) “'모든 특별한 요리는 저녁에 하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yā kāci sakhatiyo sabbā tā ratti, appā divā).'라고 했다. 여기서 특별한 요리(sakhatiyo)란 특별히 준비하는 음식들(abhisakhārika-khādanīyāni)을 말한다. 이러한 음식들은 모두 저녁에 하고, 낮에는 아주 조금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낮에는 우유죽이나 흰죽(yāgu-kañjiya) 등을 먹고 생활하지만 저녁에는 원하는 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MA.ili.164)

701) 『율장』은 비시불식(非時不食)에 대한 학습계목(vikāla-bhojana-sikkhāpada)을 설명하면서(Vin.iv.85) '때 아닌 때 먹는 것(vikāla-bhojana)'은 단타죄(單墮罪, pācittiya)에 속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율장』은 이 계목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단계적으로 때 아닌 때에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율장」은 비시불식(非時不食, 때 아닌 때 먹지 않는 것)은 비구들에게는 일반상식에 속하는 당연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본경의 이 문단을 통해서 보면 처음에는 오후에 먹는 것만 금하게 하시고 저녁에 먹는 것은 허락하셨다. 그 다음에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저녁에 먹는 것도 금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전에는702) 비구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탁발을 다니다가 오물 구덩이에 빠지고 하수구에 떨어지고 가시덤불로 들어서고 잠자는 소 위로 넘어지고 도둑질을 이미 했거나 꾀하고 있는 불량배들을 만나고 여인들로부터 부정하게 유혹받기도 했습니다.

 

702) “다시 '전에는(bhūtapubba)'이라고 시작하는 이 대목은 적당한때가 아닌 저녁에 음식을 먹는 것(vikāla-bhojana)에 대한 위험(ādīnava)을 보여주는 것이다.” (MA.iii.164)

 

세존이시여, 전에703) 제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탁발을 다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어떤 여인이 그릇을 씻다가 번갯불이 비칠 때 저를 보았습니다.

저를 보고서는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살려주세요. 유령이 나타났어요.'

세존이시여, 이것을 듣고 저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이여, 저는 유령이 아닙니다. 탁발을 온 비구입니다.'

'어미 아비가 다 죽은 비구겠지.704)

비구여, 이런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창자를 위해 탁발을 다니는 것보다는

날카로운 푸줏간 칼로 그 대의 창자를 잘라버리는게 더 나을 거요.'

 

703) “다시 '전에'라고 시작하는 이 대목은 자신이 체험한 일(diṭṭha-kāraa)을 설명하는 것이다.”(MA.iii.164)

704)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만일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그의 부모는 우리 아들이라는 생각에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공양하고 잠자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 비구가 이 밤에 탁발을 위해 돌아다니지 않을 것인데, 그의 부모가 죽고 없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다닐 것이다.'라고.”(MA.iii.165)

 

세존이시여, 그런 것을 기억할 때 제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많은 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고.”

 

7. “참으로 그러하다, 우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대꾸한다.

'뭐 이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까지? 이 사문은 지나친 완벽주의자로군!'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다.”

 

8. “우다이여, 예를 들면 암 메추라기가 썩은 넝쿨에 묶여 부상을 당하고 감금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썩은 넝쿨은 저 메추라기에게 강하지 않고 허약하고 썩었고 속빈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다고 하자. 우다이여, 이 자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저 암 메추라기가 썩은 넝쿨에 묶여 부상을 당하고 감금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그 메추라기에게는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우다이여.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대꾸한다.

'뭐 이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까지? 이 사문은 지나친 완벽주의자로군!'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다.”

 

9. “우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말한다.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까지도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하시는 구나.

선서께서는 포기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시주물로만 살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705)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허약한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705)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migabhūtena cetasā viharanti).'는 것은 인적이 없는 쪽(apaccāsīsana-pakkha)을 의지하여 머문다는 뜻이다. 마치 사슴은 공격(pahāra)을 받으면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약(bhesaija)이나 연고(vaa-tela)를 얻어 오리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 인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서 공격당한 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낮추어서 상처가 아물면, 일어나서 간다. 이와 같이 사슴은 인적이 없는 쪽을 의지하여 머문다.”(MA. iii.167)

 

10. “우다이여, 예를 들면 마차의 깃대만 한 상아를 가졌고 건장하고 혈통 좋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코끼리가 질긴 가죽끈들로 묶여 있더라도

몸을 조금 비틀어서 끈들을 잘라버리고 끊어버린 뒤 원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자.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질긴 가죽끈들은 그 왕의 코끼리에게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다.'라고 한다고 하자. 우다이여, 이 자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마치 마차의 깃대만 한 상아를 가졌고 건장하고 혈통 좋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코끼리는 질긴 가죽끈들로 묶여있더라도 몸을 조금 비틀어서

끈들을 잘라버리고 끊어 버린 뒤 원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코끼리에게는 강하지 않고 허약하고 썩었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말한다.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까지도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하시는구나.

선서께서는 포기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다른 이가 주는 시주물로만 살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허약한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11. “우다이여, 예를 들면 가난하고 무일푼이고 곤궁에 처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는 다 낡고 허물어져서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의 허름한 오두막 한 채에다 다 낡아서 부서져 가는 초라한 침상이 하나 있고

한 항아리의 묵은 곡식과 호박씨가 있고 볼품없는 아내가 한 명 있다.

그가 승원에 사는 비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손과 발을 잘 씻고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고결한 마음에 몰입해 있는 것을 본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수행자의 삶이란 참으로 큰 행복이로구나. 수행자의 삶이란 참으로 건강한 것이로구나. 그러니 이제 나도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해야겠다.'

 

그러나 그는 다 낡고 허물어져서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의

허름한 오두막 한 채를 버리지 못하고 다 낡아서 부서져 가는 초라한 침상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한 항아리의 묵은 곡식과 호박씨를 버리지 못하고 볼품없는 아내 한 명을 버리지 못하여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할 수 없었다고 하자.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속박에 묶여서 다 낡고 허물어져서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의

허름한 오두막 한 채를 버리지 못 하고볼품없는 아내 한 명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허약한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고 속 빈 속박이다.'라고 한다하자. 우다이여, 이 자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속박에 묶여서 다 낡고 허물어져서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의 허름한 오두막 한 채를 버리지 못하고 다 낡아서 부서져 가는 초라한 침상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한 항아리의 묵은 곡식과 호박씨를 버리지 못하고 볼품없는 아내 한 명을 버리지 못하므로 그것은 그에게 강한 속박이고 견고 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우다이여.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대꾸한다.

'뭐 이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까지? 이 사문은 지나친 완벽주의자로군!'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다.”

 

12. “우다이여, 예를 들면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부유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수많은 금괴와 곡식을 나르는 수많은 짐마차와 수많은 전답과 수많은 토지와 수많은 아내와 수많은 하인과 수많은 하녀를 가졌는데, 그가 원림에 사는 비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손과 발을 잘 씻고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고결한 마음에 몰입 해 있는 것을 본다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수행자의 삶이란 참으로 큰 행복이로구나. 수행자의 삶이란 참으로 건강한 것이로구나. 그러니 이제 나도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해야겠다.'

 

그는 수많은 금괴를 버리고 곡식을 나르는 수많은 짐마차를 버리고 수많은 전답을 버리고 수많은 토지를 버리고 수많은 아내를 버리고 수많은 하인을 버리고 수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할 것이다.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속박으로 묶여있지만 수많은 금괴를 버리고 곡식을 나르는

수많은 짐마차를 버리고 수많은 전답을 버리고 수많은 토지를 버리고 수많은 아내를 버리고 수많은 하인을 버리 고 수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다.'라고 한다 하자. 우다이여, 이 자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속박으로 묶여있었지만

수많은 금괴를 버리고 곡식을 나르는 수많은 짐마차를 버리고 수많은 전답을 버리고

수많은 토지를 버리고 수많은 아내를 버리고 수많은 하인을 버리고 수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출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에게 강하지 않고 허약하고 썩었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이것을 버려라.'라는 내 말을 들으면 이와 같이 말한다.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까지도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하시는구나.

선서께서는 포기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다른 이가 주는 시주물로만 살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

우다이여, 그들에게 이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허약한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13. “우다이여, 여기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706) 무엇이 넷인가?”

 

706) “앞 문단에서 '그들은 그것을 버린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버리는 자들(pajahanakā)과 버리지 않는 자들(appajahanakā)을 집합적으로(rāsi-vasena) 말했지만 여기서는 그들을 개별적으로(pāiyekka) 네 부류로 설명하기 위해 이 법문을 시작하셨다.”(MA.ii.169)

 

14.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근거(오온)707)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는다.

 

707) 여기서 '재생의 근거(오온)' upadhi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upa+√dhā(to put)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는 '그 위에 무엇이 놓여'을 의미하며 그래서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설비 등을 뜻한다. 그래서 『디가 니까야 복주서』는여기에 괴로움이 놓이기 때문에 우빠디(upadhi, 재생의 근거)라고 한다. 즉 무더기() 등을 말한다.”(DAȚ.ii.76)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외적인 입장과 내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외적인 입장에서(objectively) 보자면 얻어진 것들을 뜻하는데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한다. 내적인 입장에서(subjectively) 보자면 갈애가 생겨서 소유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남(재생)의 근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빠디(upadhi)는 우빠다나(취착, upādāna)와 유사하다. 물론 이 두 단어의 어원은 다르다. 이 두 입장을 고려해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정착시키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노력 경」 (A2:1:2)의 주해와『상윳따 니까야』 제1권 「기뻐함 경」 (S1:12)의 주해를 참조할 것.

주석서에 의하면 네 가지 재생의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무더기[]라는 재생의 근거(khandha-upadhi),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근거(kilesa-upadhi), 업형성력이라는 재생의 근거(abhisakhāra-upadhi),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라는 재생의 근거(kāma-upadhi)이다.(MA.iii.170)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그는 그들을 품고 있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되었다708)고 하지 속박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708) “'속박되었다(sayutta)'는 것은 오염원(kilesa)에 의해 속박되었다는 말이다.” (MA.iii.170)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나는 이 사람이 가진 기능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

 

15.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그는 그것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도 속박되었다고 하지 속박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나는 이 사람이 가진 기능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

 

16.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우다이여, 그의 마음챙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온종일 달구어진 철판 위에 두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지만 그것은 즉시에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709)

 

709) 이 비유는 본서 제4권 「감각기능을 닦음 경」 (M152) §9과 「상윳따 니까야」 제4권 「괴로움을 야기 시키는 법 경」 (S35:244) §10에도 나타난다.

 

우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우다이여, 그의 마음챙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도 속박되었다고 하지 속박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나는 이 사람이 가진 기능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 710)

 

710) “여기까지버리지 않는 자(nappajahati), ② 버리는 자(pajahati), ③ 빨리 버리는 자(khippa pajahati)의 세 가지 무리(rāsi)를 설하셨다. 이 중에서 네 사람을 두고버리지 않는 자라고 하고, 네 사람을 두고버리는 자라고 하고, 네 사람을 두고빨리 버리는 자라고 한다.

여기서 범부(puthujjana)와 예류자(sotāpanna)와 일래자(sakadāgāmī)와 불환자(anāgāmī)인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 자라고 한다. 앞의 세 부류의 사람은 제쳐두고라도 어떻게 불환자를 그렇게 말하는가? 불환자에게도 존재에 대한 탐욕이 있어서 ', 행복해, , 행복해.'라고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버리지 않는 자라 한다.

또한 바로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버리는 자라고도 한다. 예류자 등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범부를 그렇게 말하는가? 위빳사나를 시작한 비구가 마음챙김을 놓아버려(sati-sammosa) 급히 오염원이 일어나면 '나 같은 비구에게 오염원이 일어나다니.'라고 절박감(savega)에 사로잡혀 정진을 일으켜 위빳사나를 증장하여 도로써 오염원들을 뿌리 뽑는다. 그러므로 그를 버리는 자라 한다.

또한 바로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빨리 버리는 자라 한다.” (MA.iii.170)

 

17. “우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근거야말로 괴로움의 뿌리라고 알고서 재생의 근거를 여의고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한다.711)

 

711) “'재생의 근거야말로 괴로움의 뿌리다(upadhi dukkhassa mūla).'라고 하셨다. 여기서 재생의 근거(upadhi)는 다섯 가지의 무더기(오온)라는 재생의 근거를 말한다. 그 오온이 괴로움의 뿌리라고 알아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근거에서 재생의 근거를 여읜다. 즉 거머쥠이 없다(niggahaa), 갈애가 없 다(nitaha)는 말이다.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한다(upadhisakhaye vimutto).'는 것은 갈애가 다한(taha-kkhaya) 열반을 대상으로 해탈한다는 것이다.”(MA.iii.171) 이것은 모든 족쇄를 다 부순 아라한을 말한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되지 않았다고 하지 속박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나는 이 사람이 가진 기능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

 

18. “우다이여, 여기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712)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 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다.

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 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우다이여, 이들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712) “이와 같이 네 부류의 사람을 상세히 설명하신 뒤, 이제 '버리는 자는 이러한 오염원을 이만큼 버리고, 버리지 않는 자는 이러한 오염원을 이만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이 설법을 시작하셨다.” (MA.iii.171)

 

19. “우다이여,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을 일러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 불결한 즐거움, 범부들의 즐거움, 고결하지 못한 즐거움이라 한다.

이런 즐거움은 받들어 행해서도 안되고, 닦아서도 안되고, 거듭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20.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3(三禪)4(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21. “이것을 일러 출리의 즐거움, 떨쳐버림의 즐거움, 고요함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이라 한다.

이런 즐거움은 받들어 행해야 하고, 닦아야 하고, 거듭해야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말한다.”713)

 

713) “'출리의 즐거움(nekkhamma-sukha)'이란 감각적 욕망(kāma)에서 벗어남의 즐거움(nikkhanta-sukha)이고, '떨쳐버림의 즐거움(paviveka-sukha)'이란 대중을 떨치고 오염원을 떨쳐버림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고요함의 즐거움(upasama-sukha)'이란 탐욕 등을 가라앉힘으로 오는 즐거움이고 '깨달음의 즐거움(sambodha-sukha)'은 도라 불리는 깨달음에서 생긴 즐거움이다. 이런 즐거움은 지금 얻은 것(pailābha)이건 과보로 나타난 것(vipāka)이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계발해야(bhāvetabba) 한다.” (MA.iii.171)

 

22.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는 []이라고 말한다.714)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714) “'이것을 동요하는 []이라고 나는 말한다(iñjitasmi vadāmi).'라는 것은 이 초선이 흔들리고(iñjana), 움직이고(calana), 동요하는 [](phandana)이라는 말이다. 거기서 무엇이 동요하는가? 초선에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소멸되지 않고 존재하는데, 그것이 동요한다. 2선 등에서도 이런 방법이 적용된다. 그러나 제4선을 두고 '동요하지 않는 []이라고 말한다(aniñjitasmi vadāmi - §25).'라는 것은 제4선은 흔들림이 없고 움직임이 없고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MA.iii.171)

'흔들림 없음(āneñja/āniñjita)' 등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수낙캇따 경 (M105) §11의 주해도 참조할 것.

 

23.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도 동요하는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희열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24.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3(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도 동요하는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평온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25.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도 슬픔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4(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지 않는 []이라고 말한다.”715)

 

715) 일반적으로 '흔들림 없음' 혹은 '흔들림 없는 경지(āneñja/aniñjita)'는 무색계를 뜻한다. 그런데 본경의 이 문단은 제4선이 '흔들림 없음' 혹은 '흔들림 없는 경지'에 속한다는 경전적 근거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수낙캇따 경」 (M105) §11의 주해를 참조할 것.

 

26.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716)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716)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analanti vadāmi)'는 것은 이 초선에 갈애와 집착(tahā-āIaya)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MA.iii.171~172)

 

27.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28.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3(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29.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도 슬픔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4(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30. “우다이여, 비구는 물질[]에 대한 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산냐를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31. “우다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윈냐냐[]'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 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32. “우다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 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33.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넘어서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34. “우다이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다이여, 이처럼 나는 비상비비상처조차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다이여, 그대는 작든 크든 간에717) 내가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그런 족쇄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717) “'작든 크든 간에(au vā thūla vā)'라는 것은 사소하거나 중요한 것(khuddaka vā mahanta vā), 혹은 약간의 비난을 받아야 하거나 크게 비난받아야 할 것(appa-sāvajja vā mahā-sāvajja vā)을 말한다.”(MA.iii.172)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우다이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메추라기 비유 경(M66)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