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59. 많은 느낌(경험) 경(Bahuvedanīyasuttaṃ)
576) 본경은 『상윳따 니까야』 제4권 「빤짜깡가 경」(S36:19)과 동일하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어느 때 빤짜깡가 목수577)가 우다이 존자578)를 뵈러 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곁에 앉았다.
한곁에 앉아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577) 빤짜깡가 목수(Pañcakaṅga thapati)는 사왓티의 도목수(vaḍḍhakī-jeṭṭhaka)였다고 한다.(SA.ii.79)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까뀌(vāsīpharasu)와 끌(nikhādana)과 자(daṇḍa)와 망치(muggara)와 먹줄(kāḷa-sutta)의 다섯 가지 연장을 사용하는데 능했기 때문에 다섯(pañcaka, 빤짜까) 연장(aṅga, 앙가)을 가진 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Ibid)
빤짜깡가 목수는 본서 제3권 「사마나만디까 경」 (M78) §2이하와 제4권「아누룻다 경」 (M127) §2이하에도 나타나고 있다.
578) “우다이(Udāyī)라 이름하는 세 분의 장로가 있는데 랄루다이(Lāḷudāyī), 깔루다이(Kāḷudāyī), 마하우다이(Mahāudāyī)이다. 여기서는 마하우다이 존자를 두고 한 말이다.” (DA.iii.903)
이 마하우다이 존자는 빤디따 우다이(Paṇḍita-udāyī) 존자라고도 주석서에 나타나는데 그만큼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분(paṇḍita)이었다고 한다. 본 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본경의 우다이 존자는 빤디따 우다이 장로(Paṇḍita-udāyi-tthera)라고 밝히고 있으며(SA.iii.79; MA.ii,114), 복주서는 랄루다이 존자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부처님 고향인 까삘라왓투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며 부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그분 부처님의 덕성을 흠모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뒤에 아라한이 되었다.(Thiga.iii.7)
3.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다시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수여, 세 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두 번째에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세 번째에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수여, 세 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에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장로는 빤짜깡가 목수를 설득시킬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4.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장로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다이가 빤짜깡가 목수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579)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580)
579) “여기서 '두 가지'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이다. '세 가지'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다섯' 가지’ 느낌은 기능[根, indriya]에 따라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 평온의 기능이다. '여섯 가지' 느낌은 [감각의] 문(dvāra)에 따라 눈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등이다.
'열여덟 가지' 느낌은 고찰(upavicāra)에 따라 '눈으로 형색을 보고 기분 좋은 형색을 조사한다.'는 등이다. 즉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 의한 여섯 가지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과 여섯 가지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과 여섯 가지 평온한 느낌이다. ‘서른여섯 가지’ 느낌은 앞의 열여덟 가지 느낌이 각각 세속에 바탕을 둔 것(geha-ssitā)과 출리에 바탕을 둔 것(nekkhamma-sitā)이다. ‘백여덟 가지’ 느낌은 앞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 각각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이다.”(MA.ii.114)
580)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 §§8~15과 『상윳따 니까야』제4권 「백팔 방편 경」(S36:22)을 참조할 것.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그렇게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서로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말다툼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며
혀를 무기 삼아 서로를 찌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그렇게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서로 동의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고 정중하고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6.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것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그것을 관능적 쾌락이라 부른다.”
7.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 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관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8.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9. “아난다여, …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0. “아난다여, …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도 슬픔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581)
581) “여기서 제4선부터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요하다는 뜻(sant-aṭṭha)과 수승하다는 뜻(paṇīt-aṭṭha)에서 즐거움(sukha, 행복)이라 불린다.” (SA.iii.80)
11. “아난다여, …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산냐를(형상, 분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산냐를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2. “아난다여, …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3. “아난다여, …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4. “아난다여, …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5.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6. “아난다여, 그런데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을 설하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천명한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582)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 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오히려 여래는 언제 어디서 얻어진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든지 간에,
그것을 모두 즐거움이라고 합니다.'라고.”583)
582) “여기서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kāma-guṇa)으로 인한 즐거움과 여덟 가지 증[八等至, aṭṭha-samāpatti]으로 인한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vedayita-sukha)이고, '소멸(nirodha)'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avedayita-sukha)이다.” (MA.iii.115)
“'소멸(nirodha)'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avedayita-sukha)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된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kāma-guṇa)과 여덟 가지 증득(aṭṭha-samāpatti)을 통해서 생긴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vedayita-sukha)이지만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niddukkha-bhāva)라 불리는 즐거움이라는 뜻에서 전적인 즐거움(ekanta-sukha)이 되는 것이다.”(SA.iii.80)
sukha는 즐거움으로도 옮길 수 있지만 행복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sukha를 즐거움으로도 옮기고 행복으로도 옮긴다.(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삿짜까 긴 경」 (M36) §32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런데 본 경의 본 문맥에서의 소멸(nirodha)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행복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본경에서 sukha가 나타나는 문맥이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본경 전체의 문맥을 맞추기 위해서 여기서도 sukha를 즐거움으로 옮기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움이든 행복이든 상수멸이나 열반이나 아라한과와 같은 이러한 경지는 전적인 행복(ekanta-sukha)이고 지극한 행복(adhikasukha, SA.ii.381)이고 열반의 행복(nibbāna-sukha, SA.i.328)이며, 『상윳따 니까야』 제1권 「믿음 경」 (S1:36) {120} 등에서는 궁극적인 행복[至福, parama-sukha]이라 부르고 있다.
583) “외도들은 '소멸(nirodha)'이 어떻게 즐거움인가?'라고 물음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세존께서 여기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신다. 느껴진 즐거움(vedayita-sukha)이건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avedayita-sukha)이건, 이 둘 다를 여래는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신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괴로움이 없는 상태(niddukkha-bhāva)이기에 여래는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시기 때문이다.”(MA.iii.115)
즉 인식과 느낌의 소멸(상수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인 까닭에 이 또한 즐거움인 것이다.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간에 그것이 괴로움이 없는 상태(niddukkha-bhāva)이면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두 즐거움(행복)에 포함시켜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멸진정(nirodha-samāpatti)을 으뜸(sīsa)으로 삼으셔서 아라한됨을 정점으로 하여 제도되어야 할 사람(neyya-puggala)에게 [법을] 설하셨다.”(SA.iii.80)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많은 느낌 경(M59)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