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56. 우빨리 경( Upālisutt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날란다518)에서 빠와리까 망고 숲519)에 머무셨다.
518) 날란다(Nālanda)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왕사성)에서 불과 20여 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리뿟따 존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후에 유명한 불교 유적지인 날란다 대학이 생긴 곳이기도 하다.
519) 우선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여기서 언급되는 빠와리까 망고 숲의 주인은 빠와리까(Pāvārika) 장자인데, 그는 꼬삼비에서 불교 정사를 지은 세 명의 장자 가운데 한 명인 빠와리까 장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본경이 설해진 날란다의 빠와리까 망고 숲의 주인인 이 빠와리까를 둣사빠와리까 (Dussa-pāvārika)라고 부르기도 한다.(DA.iii.873; MA..594; SA.iii.169.)
그는 망고 숲에 정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정사를 본경에서처럼 빠와리까 망고 숲(Pāvārikambavana)이라 부른다. 한편 빠와라(pāvāra)는 외투를 뜻하며 빠와리까는 외투를 파는 사람을 뜻한다. 그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본경 이외에도 이곳에서 「께왔다 경」 (D11), 「확신경」 (D28), 「날란다 경」(S35:126), 「아시반다까뿟따 경」 (S42:6) 등이 설해졌다.
2. 그 무렵 니간타 나따뿟따520)는 많은 니간타 회중과 함께 날란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니간타 디가따빳시521)가 날란다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오다가 빠와리까 망고 숲으로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섰다.
한곁에 선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20) 니간따 나따뿟따에 대해서는 본서 「삿짜까 긴 경」 (M36) §48의 주해를 참고할 것.
521) “디가따빳시(Dīgha-tapassi)란 키가 커서(dīgh-attā) 그렇게 불린 이름이다.”(MA.ii.52) 즉 ,키 큰(dīgha) 고행자(tapassi)라는 뜻이다.
“따빳시여, 여기 자리가 있으니 그대가 원한다면 앉으시오.”
3. 이렇게 말씀하시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낮은 자리를 택해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따빳시여, 그런데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업522)을 설하는가?”
“도반 고따마시여, 니간타 나따뿟따께서는 '업, 업'이라는 표현에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니간타 나따뿟따께서는 '몽둥이, 몽둥이'523)라는 표현에 익숙하십니다.”
“따빳시여, 그러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몽둥이를 설하는가?”
“도반 고따마시여, 니간타 나따뿟따께서는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세 가지 몽둥이를 설하십니다. 그것은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와 마음의 몽둥이524) 입니다.”
522) '업(業, kamma, Sk. karma)'은 √kṛ(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무슨 행위든 다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제4권 「꿰뚫음 경」 (A6:63) §11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라고 정의하신다.
상좌부에서는 전통적으로 업을 12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불교의 업 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제5장 §§17~33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523) 원어는 daṇḍa로, 몽둥이, 막대기, 지팡이 등의 뜻인데, 자이나교에서는 처벌하는 도구인 몽둥이라는 뜻으로 나중에는 응징, 처벌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러 자이나 문헌 특히 최초기 자이나 문헌인 『아야랑가 숫따』 (Ayaraṅga-sutta, Ayaro, Sk. Acaryaṅga-sutta)에 몽둥이(daṇḍa)를 금하는 구절이 많이 나타난다.
524)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와 마음[意]의 몽둥이'는 각각 kāya-daṇḍa. vacī-daṇḍa, mano-daṇḍa를 직역한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그들은 처음 두 가지는 마음이 없는 것(acittaka)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바람이 불면 가지가 흔들리고 물결이 일듯이 몸의 몽둥이에는 마음(citta)이 없다. 또한 바람이 불면 야자수 잎이 소리를 내고 파도 소리가 나듯이 말의 몽둥이에도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처음 두 가지는 마음이 없다고 설한다. 그러나 마음(citta)을 마음의 몽둥이(mano-daṇḍa)라고 설한다. 이제 세존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주장(vacana)을 분명하게 하시고자 하여(patiṭṭhapetu-kāma) '따빳시여, 그러면 … '이라고 다음 문단의 말씀을 시작하셨다.” (MA.iii.52~53)
“따빳시여, 그러면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와 마음의 몽둥이는 서로 다른 것인가?”
“도반 고따마시여,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와 마음의 몽둥이는 서로 다릅니다.”
“따빳시여, 이렇게 분류하고 이렇게 구별한 세 가지 몽둥이 가운데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떤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하는가? 몸의 몽둥이인가? 말의 몽둥이인가? 마음의 몽둥이인가?”
“도반 고따마시여, 이렇게 분류하고 이렇게 구별한 세 가지 몽둥이 가운데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하십니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몽둥이라 말했는가?” “도반 고따마시여, 저는 몸의 몽둥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몽둥이라 말했는가?” “도반 고따마시여, 저는 몸의 몽둥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몽둥이라 말했는가?” “도반 고따마시여, 저는 몸의 몽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대화의 논지를 세 번이나 확립시키셨다.
4. 이렇게 말씀하시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도반 고따마시여, 그런데 당신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몽둥이를 설하십니까?"
“따빳시여, 여래는 '몽둥이, 몽둥이'이라는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여래는 '업, 업'이라는 표현에 익숙하다.”
“도반 고따마시여, 그러면 당신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업을 설하십니까?”
“따빳시여, 나는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것에 대해 세 가지 업을 설하는데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마음의 업이다.”
“도반 고따마시여, 그러면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마음의 업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따빳시여,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마음의 업은 서로 다르다.”
“도반 고따마시여, 이렇게 분류하고 이렇게 구별한 세 가지 업 가운데
당신은 어떤 업이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하십니까? 몸의 업입니까? 말의 업입니까? 마음의 업입니까?”
“따빳시여, 이렇게 분류하고 이렇게 구별한 세 가지 업 가운데서
마음의 업이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설한다. 몸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말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니다.”525)
525)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존의 가르침에서는 의도(cetanā)가 업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에 대한 정의로는 『앙굿따라 니까야』 「꿰뚫음 경」(A6:63) §11의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 단순한 몸이나 말의 행위는 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석서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이 말씀은 확정된 삿된 견해(niyata-miccha-diṭṭhi, 고질적인 삿된 견해)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크게 비난받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삿된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삿된 견해는 가장 크게 비난받는 것이다.”(A1:18:3)를 인용하고 있다.(MA.iii.54)
확정된 삿된 견해를 『디가 니까야 주석서』는 “삿된 것으로 확정된 것(micchatta-niyata)이란 그릇된 고유성질로 확정된 것이다. 이것은 확정된 삿된 견해와 함께하는 무간업(無間業, ānantariya-kamma)의 이름이다.”(DA.iii.992 = D33 §1.10 (28)에 대한 주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처럼 마음의 업에 해당하는 고질적인 삿된 견해가 몸이나 말로 짓는 나쁜 업보다 더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 세존의 말씀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삿된 견해로는 본서 「확실한 가르침 경」 (M60) §5에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ī)의 [사후] 단멸론(uccheda-vāda)이, §13에 뿌라나 깟사빠(Pūraṇa Kassapa)의 도덕부정론(akiriya-vāda)이, §21에 막칼리 고살라(Makkhaligosāla)의 무인론(ahetuka-vāda)이 나타난다. 그리 고 주석서는 이 셋을 역시 “확정된 삿된 견해(niyata-miccha-diṭṭhi)”(MA. iii.122)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경은 이런 견해를 가진 자는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도반 고따마시여, 당신은 마음의 업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마음의 업이라고 말했다.”
“도반 고따마시여, 당신은 마음의 업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마음의 업이라고 말했다.”
“도반 고따마시여, 당신은 마음의 업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마음의 업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세존께 대화의 논지를
세 번이나 확립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나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갔다.
5.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발라까에서 온526) 아주 많은 재가 회중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서 우빨리가 상수 제자였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보고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이렇게 물었다.
“따빳시여, 이 한낮에 그대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에게 다녀오는 길입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사문 고따마와 어떤 대화를 나누기라도 했는가?”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따빳시여, 그러면 그대는 사문 고따마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
그러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세존과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알렸다.
526) '발라까에서 온'은 Bālakiniy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우빨리에게는 발라까의 소금장수의 마을(Bālaka-loṇa-kāra-gāma)이 있었다. 그는 거기서 세금(āya)을 받아서 '우리의 스승이신 마하 니간타를 뵈올 것이다.'라고 하면서 회중에 에워싸여 여기에 온 것이다. 그래서 '발라까에서 온'이란 발라까 마을에 사는 자들(Bālaka-gāma-vāsini)을 뜻한다.” (MA.iii.55)
6. 그와 같이 말했을 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하구나 따빳시여. 장하구나, 따빳시여.
마치 스승의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잘 배운 제자처럼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사문 고따마에게 설명하였구나.
어찌 하잘것없는 마음의 몽둥이가 이와 같이 거친 몸의 몽둥이에 비해 더 중요하단 말인가?
사실은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다.”
7.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우빨리 장자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따빳시 존자는 장하고 장합니다,
마치 스승의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잘 배운 제자처럼
따빳시 존자는 사문 고따마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어찌 하잘것없는 마음의 몽둥이가 이와 같이 거친 몸의 몽둥이에 비해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오히려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존자시여, 이제 저도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겠습니다.
만일 사문 고따마가 따빳시 존자께 주장한 것처럼 제게도 그렇게 주장한다면,
마치527) 힘센 사람이 긴 머리털의 숫양을, 그의 머리채를 잡고 앞으로 끌고 뒤로도 끌고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듯이,528) 그와 같이 나도 논쟁에서
사문 고따마를 앞으로 끌고 뒤로 끌고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겠습니다.
527) 여기 본경 §7에 나타나는 네 가지 비유는 본서 「삿짜까 짧은 경」 (M35) §5에도 나타나고 있다.
528)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겠다.'는 samparikaḍḍhissāmi(sam+pari+√kṛṣ(to draw)의 미래형 동사)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겠다(kālena ākaḍḍheyya kālena parikaḍḍheyya),”의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이렇게 옮겼다.(MA.ii.271)
마치 힘센 양조업자가 술 거르는 체를 깊은 물탱크에다 던져 넣고는
그 가장자리를 잡고 앞으로 끌고 뒤로 끌고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 듯이,
그와 같이 나도 논쟁에서 사문 고따마를 앞으로 끌고 뒤로 끌고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끌겠습니다.
마치 힘센 양조 혼합사가 체의 가장자리를 잡고 위로 흔들고 아래로 흔들고 탁탁 치듯이, 그와 같이 나도 논쟁에서 사문 고따마를 위로 흔들고 아래로 흔들고 탁탁 치겠습니다.
마치 60년 된 코끼리가 깊은 호수에 들어가서 대마 씻는 놀이529)를 즐기듯이,
그와 같이 나도 사문 고따마와 함께 대마 씻는 놀이를 즐기겠습니다.
존자시여, 이제 저는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겠습니다.”
529) '대마 씻는 놀이'는 sāṇadhovika nāma kīḷitajāta(대마를 씻음이라 불리는 놀이)을 옮긴 것이다. '대마 씻는 놀이'에 대해서는 본서 「삿짜까 짧은 경」 (M35)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장자여, 가라. 그대가 가서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라.
장자여, 내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듯이 니간타 디가따빳시나 그대도 논파할 수 있다.”
8. 이와 같이 말하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530)을 알아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장자여, 가라. 그대가 가서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라.
장자여, 내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듯이 니간타 디가따빳시나 그대도 논파할 수 있다.”
530) '개종시키는 요술'은 āvaṭṭani māyā를 옮긴 것이다. 초기불전의 몇 곳에서 외도들은 세존을 요술쟁이(māyāvi)라고 비난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제2권 「밧디야 경」(A4:193)에서 밧디야는 세존께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킨다.”는 말이 사실인가를 여쭙는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저 유명한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깔라마 경」(A3:65)과 같은 내용으로,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행해서 나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증장한다면 그 가르침은 따르지 마라고 하시고 반대로 해소가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따르라는 내용의 가르침을 설하신다. 세존의 가르침을 들은 밧디야는 “세존의 개종시키는 요술은 축복입니다.”라고 하면서 감격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빠딸리야 경」(S42:13)에서 빠딸리야 촌장은 “사문 고따마는 요술에 대해서 안다.”는 항간의 말을 세존께 전하고 이것이 사실인가를 질문 드리자 세존께서는 진정한 요술의 의미에 대해서 길게 설하고 계신다. 본경에서도 니간타들은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āvaṭṭani māyā)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사라바 경」 (A3:64)에 해당하는 주석서 에 의하면 사라바(Sarabha)는 부처님의 명성이 온 마가다에 크게 퍼지자 이를 시샘한 유행승들이 그를 일부러 비구 승가로 출가하도록 하여 잠시 불교 교단으로 출가한 유행승이었다고 한다. 유행승들은 부처님의 삶에 대해서 허물을 잡지 못하자 부처님의 위력은 필시 매번 보름마다 문을 닫고 비구들끼리 외우는 '개종시키는 요술(āvaṭṭani māyā)'때문일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사라바를 보내서 그것을 배워오도록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사라바는 승가에 와서 비구들에게 거만하게 대했지만 어떤 장로가 그를 연민하여 출가를 허락했으며 그는 마침내 보름마다 외우는 『비구계목』 즉 그 들이 말한 '개종시키는 요술'을 배우고 바로 환속하여 유행승들에게 가서 그것을 알려주었으며 그래서 그는 사꺄의 아들의 법을 알았노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AA.ii.295~298)
두 번째에도 … 세 번째에도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장자여, 가라. 그대가 가서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라.
장자여, 내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듯이 니간타 디가따빳시나 그대도 논파할 수 있다.”
9.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우빨리 장자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
빠와리까 망고 숲으로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우빨리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니간타 디가따빳시께서 여기 다녀간 적이 있습니까?”
“장자여, 니간타 디가따뱃시가 다녀간 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어떤 대화라도 나눈 것이 있습 니까?”
“장자여,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어떠한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그러자 세존께서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나눈 대화를 모두 우빨리 장자에게 들려주셨다.
10.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우빨리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세존이시여, 따빳시 존자는 장하고 장합니다.
마치 스승의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잘 배운 제자처럼 따빳시 존자는 세존께 설명했습니다.
어찌 하잘것없는 마음의 몽둥이가 이와 같이 거친 몸의 몽둥이에 비해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오히려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장자여, 만일 그대가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하고자 한다면 여기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보자.”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
11.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니간타가 있어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찬물을 거부하고 끓인 물만을 마신다고 하자. 그는 찬물을 섭취하지 못하면 임종하게 될 것이다. 장자여, 그러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이 자가 어디에 태어난다고 천명하는가?”
“세존이시여, 마음이 묶인 신들이 있는데, 그는 거기에 태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는 마음이 [찬물에] 묶여 임종했기 때문입니다.”531)
531) “'찬물을 거부한다.(sītodaka-paṭikikhitto).'는 것은 이 사람의 병은 찬물(sītodaka)를 마셔야 고칠 수 있지만 니간타들은 찬물에는 생명이 살아있다는 인식(satta-saññā) 때문에 찬물을 금한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마음이 묶인 신들(manosattā nāma devā)'이란 마음에 의해 묶여있고 들러붙어 있고, 집착해 있다(sattā laggā lagitā)는 말이다.
'그의 마음이 [찬물에] 묶였다(mano-paṭibaddho).'는 것은 그의 마음이 [찬물을 마시고 싶은 것에] 묶여서 임종했기 때문에 마음이 묶인 신들 가운데 태어난다고 설명한다.
그는 담즙에 이상이 생긴 병(pitta-jara-roga)에 걸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끓인 물을 마시거나 손발을 씻기 위해 가져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병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찬물은 이 병을 가라앉히기 때문에 적절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오직 끓인 물만 마시고 혹시 구하지 못하면 묽은 죽을 먹는다. 마음속으로는 찬물을 마시고 싶고 사용하고 싶기 때문에 마음의 몽둥이(manodaṇḍa)는 바로 깨진다. 그러나 몸의 몽둥이(kāya-daṇḍa)와 말의 몽둥이 (vacī-daṇḍa)를 지키고 싶은 생각에 찬물을 마시고 싶으니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가 이렇게 지킨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는 죽음[의 마음](cūti)과 재생연결[식](paṭisandhi)을 끌어당길 수 없지만 마음의 몽둥이는 이미 깨졌지만 그것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그에게 몸의 몽둥이와 말의 몽둥이는 힘없고(dubbalā) 하잘것없고(chavā) 저열하지만(lāmakā) 마음의 몽둥이는 강하고(balavā) 크다(mahanta)고 말을 하도록 하신다.”(MA.iii.57)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532)
532) “우빨리 장자가 앞에서는 몸의 몽둥이가 크다고 했는데 지금은 마음의 몽둥이가 크다고 하니 그의 말은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MA.iii.58)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533)
533) 아래 §15에서 우빨리는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미 세존께 믿음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세존의 여러 가지 답변을 더 듣고 싶어서 반대 입장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2.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니간타는 네 가지 단속으로 단속한다.534)
그는 모든 찬물을 거부하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에 전념하고,
모든 [악을] 금하여 [악을] 털어버리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535)
그러나 그가 나아가고 물러갈 때 작은 생명들을 많이 해친다.
장자여,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니간타 나따따는 어떤 과보를 설하는가?”
“세존이시여, 니간타 나따따는 의도하지 않는 것은 크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설합니다.”
“장자여, 그런데 만일 의도한 것이면 어떠한가?” “세존이시여, 크게 비난받을 일입니다.”
534) “'네 가지 단속으로 단속함(cātu-yāma-saṃvara-saṃvuta)'이란 첫째, 생명을 죽이지 않고(na pāṇam atipāteti), 죽이도록 하지 않고(na atipātayati), 죽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na atipātayato samanuñño hoti), 둘째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na adinnaṃ ādiyati), 주지 않은 것을 가지게 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 셋째 거짓말 하지 않고(na musā bhaṇati), 거짓말 하게 하지 않고, 거짓말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 넷째 좋은 것을 원하지 않고(na bhavitaṃ āsīsati), 원하게 하지 않고, 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것(bhāvita) 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pañca-kāmaguṇā)을 말한다.”(MA.iii.58)
535) ‘그는 모든 찬물을 거부하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에 전념하고, 모든 [악을] 금하여 [악을] 털어버리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로 옮긴 원어는 sabbavārivārito sabbavāriyutto sabbavāridhuto sabbavāriphuto이다. 이것은 『디가 니까야』제2권 「사문과경」 (D2) §29에서도 니간타 나따뿟따가 직접 한 말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이 네 가지 술어에 핵심단어로 나타나는 것이 vāri이다. 이것은 여기서 '물'이라는 뜻과 '[악을] 금함(√vṛ, to enclose)'이라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한 동음이의의 표현이다. 자이나 교도들은 찬물에는 생명이 있다고 생각 하여 끓인 물만 마시는 계율을 엄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 '물'과 그들의 고행인 '악을 금함'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역자는 여기서 vāri를 악을 금함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이 문맥을 이렇게 풀어서 옮긴 이유는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찬물을 거부한다(sabba-vāri-vārita).'는 것은 모든 찬물(sabba-vāri sabba-sītodaka)을 거부하는(vārita, parikhitta) 것이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에 전념하고(sabba-vāri-yutta)'는 모든 악을 금하는 것(sabba pāpa-vāraṇa)에 전념하는(yutta) 것이고, '모든 악을 금하여 악을 털어버리고(sabba-vāri-dhuta)'는 모든 악을 금하여(sabba pāpa-vāraṇa) 악을 털어버리는(dhuta-pāpa) 것이고, '모든 악을 금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sabba-vāri-phuṭa).'는 것은 모든 악을 금하는 것(sabba pāpa-vāraṇa). 이 몸에 배어있다.(phuṭa)는 뜻이다.”(MA.iii.58~59)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 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 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13.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날란다 도시는 번창하고 풍요로워 인구가 많고 사람들로 붐비는가?”
“세존이시여, 그러하옵니다. 이 날란다는 번창하고 풍요로워 인구가 많고 사람들로 붐빕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는 이 날란다의 모든 생명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536)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어버리겠다.'라고 한다고 하자.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으로 그 사람은 이 날란다의 모든 생명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열 사람, 스무 사람, 서른 사람, 마흔 사람, 쉰 사람일 지라도 이 날란다의 모든 생명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인데 어찌 하잘것없는 한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536) '한 찰나'와 '한 순간'은 각각 eka khaṇa와 eka muhutta를 직역한 것이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통력을 가지고 있고 마음의 자유자재를 성취한 사문이나 바라문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나는 단 한 번의 마음의 저주로 이 날란다를 온통 재로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자.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통력을 가지고 있고 마음의 자유자재를 성취한 사문이나 바라문이 단 한 번의 마음의 저주로 이 날란다를 온통 재로 만들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런 신통력을 가지고 있고 마음의 자유자재를 성취한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날란다 도시가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 마흔 개, 쉰 개라도 단 한 번의 마음의 저주로 온통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거늘,
하물며 하잘것없는 이 한 개의 날란다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몸의 몽둥이가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의 몽둥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14.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단다까 밀림과 깔링가 밀림과 멧자 밀림과 마땅가 밀림이 어떻게 해서 밀림이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가?”537)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단다까 밀림과 깔링가 밀림과 멧자 밀림과 마땅가 밀림이 어떻게 해서 밀림이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537) 이 넷은 각각 『자따까』의 J.iii.463, v.133ff, 267과 J.v.144와 J.vi.389, v.267과 J.v.114, 267와 『밀린다빤하』(Mil.130)를 참조할 것.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무엇에 의해서
그 단다까 밀림과 깔링가 밀림과 멧자 밀림과 마땅가 밀림은 밀림이 되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선인(仙人)들이 단 한 번 마음에 저주538)를 일으켜
그 단다까 밀림과 깔링가 밀림과 멧자 밀림과 마땅가 밀림은 밀림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538) '선인(仙人)들의 마음의 저주'는 isīnaṃ mano-padosa를 옮긴 것이다.
인도 바라문 수행자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저주(sapana, abhisapana, dhik, curse)'이다. 초기불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누구나 가 다 인정하는 『숫따니빠따』 제5장 「도피안 품」도 바로 이 저주로부터 시작된다.(Sn.191 {983} 참조) 『상윳따 니까야』제1권 「바다의 선인 경」 (S11 :10)에도 선인(仙人)들의 저주(abhisapita, abhisapana, abhi+√sap)가 나타난다.
인도에서 제일가는 희곡인 『샤꾼딸라』에서도 바라문의 저주가 희곡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 『라마야나』나 『마하바라따』등 인도를 대표하는 문헌에서도 바라문의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것으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바라문들의 저주이다. 바라문이나 수행자의 저주로 숲이나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설화는 바라문 제의서나 자이나교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비구에게는 바라문들의 주특기인 '저주(dhik, sapa, curse)'(「바다의 선인 경」 (S11:10) §7 참조)란 허락되지 않으며, 허락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저주에 대해서 내리신 세존의 처방은 초기불전의 도처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ma-vihāra]'이다. 바라문들의 제일의 염 원인 범천에 태어나려면 악의를 품고 저주를 할 게 아니라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평온[捨, upekkhā]을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수바 경」(M99/ii.207) §§23~27과 『디가 니까야』제1권 「삼명경」 (D13/1.250~251) §§76 ~79 등을 참조할 것.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 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15.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해주신 첫 번째 비유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하고 크게 기뻤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세존의 이런 답변을 듣고 싶어서
세존과는 반대 입장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16. “장자여, 심사숙고한 연후에 행하라. 그대와 같은 유명한 사람은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이처럼
'장자여, 심사숙고한 연후에 행하라. 그대와 같은 유명한 사람은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씀하시니 저는 더욱더 마음이 흡족하고 기쁩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외도들은 저를 제자로 얻으면
'우빨리 장자는 우리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온 날란다에 깃발을 드날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심사숙고한 연후에 행하라. 그대와 같은 유명한 사람은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다.'라고,
세존이시여, 이런 저는 두 번째에도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 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17. “장자여, 그대의 가문은 오랜 세월 니간타들을 후원해왔다.539)
그러니 그들이 오면 음식을 공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이처럼 ‘장자여, 그대의 가문은 오랜 세월을 니간타들을 후원해왔다.
그러니 그들이 오면 음식을 공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니
저는 더욱더 마음이 흡족하고 기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처럼 ‘사문 고따마는
'나에게만 보시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안된다.
나의 제자들에게만 보시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 보시하면 안된다.
나에게 보시한 것은 큰 과보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한 것은 큰 과보가 없다.
나의 제자들에게 보시한 것은 큰 과보가 있다.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 보시한 것은 큰 과보가 없다.'라고 말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제게 니간타들에게도 보시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저는 세 번째에도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 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539) “'후원해왔다(opāna-bhūta)'라는 것은 마치 니간타 교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우물처럼 존재해 있었다(paṭiyatta-udapāno viya ṭhitaṃ)는 말이다.”(MA.iii.89)
18. 그러자 세존께서는 우빨리 장자에게 순차적인 가르침540)을 설하셨다.
보시의 가르침, 계의 가르침, 천상의 가르침,
감각적 욕망들의 재난과 타락과 오염원, 출리의 공덕을 밝혀주셨다.541)
세존께서는 우빨리 장자의 마음이 준비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마음이 고무되고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생겼음을 아시게 되었을 때 부처님들께서 직접 얻으신 괴로움[苦]과 일어남[集]과 소멸[滅]과 도[道]라는 법의 가르침을 드러내셨다.
540) 여기에 “세존께서는 '순차적인 가르침(ānupubbi-kathā)'을 설하셨다.”고 나타난다. 한국불교에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초기불교는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끼따기리 경」 (M70) §22의 주해를 참조할 것.
본서 「끼따기리 경」 (M70) §22에서 세존께서는 “나는 구경의 지혜가 단박에 성취된다고 말하지 않는다(nhāhaṃ ādikeneva aññārādhanaṃ vadāmi).”고 하셨다. 그리고 “순차적인 공부지음(anupubba-silskhā)”과 “순차적인 행(anupubba-kiriyā)”과 “순차적인 도닦음(anupubba-paṭipadā)”으로 구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으며, 그 방법으로 “여기 스승에 대해 믿음이 생긴 자는 스승을 친견한다.”(§23)로 시작하는 12단계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특히 본서 제4권 「가나까 목갈라나 경」(M107) §3이하에서도 세존께서는 이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차적인 도닦음을 계를 지님부터 네 가지 禪까지의 8가지 단계로 설명하신다.
'순차적인 공부지음(anupubba-sikkhā)'과 '순차적인 가르침(anupubbikathā)'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역자 서문 §8-(8)을 참조할 것.
541) “'순차적인 가르침(anupubbi-kathā)'이란 보시에 대해 설하신 다음 계에 대해, 계의 가르침 다음에 천상에 대해, 천상의 가르침 다음에 도에 대해 이렇게 순차적으로 가르침을 설하신 것(anupaṭipāṭi-kathā)을 말한다.
'보시(dāna)'란 행복의 원인(nidāna)이고, 증득(sampatti)의 뿌리(mūla)이고, 부(富, bhoga)의 기반(patiṭṭhā)이고, 위험에 처한 자에게 기댈 곳(tāṇa)이 되고, 금생과 내생에서 보시와 같은 그런 의지처가 없다는 등으로 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셨다. … 그 다음에 보시를 행할 때 계를 성취할 수 있으므로 계의 가르침에 대해 설하셨다.
'계(sīla)'는 의지처(avassaya)이고, 기반(patiṭṭhā)이고, 대상(ārammaṇa)이고, 기댈 곳(tāṇa)이고, 귀의처(leṇa)고 행처(gati)고 피안(parāyaṇa)이라는 등으로 계의 공덕에 대해 설하셨다. … 그 다음에 이 계를 의지하여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천상의 가르침을 설하셨다.
'천상(sagga)'이란 원하는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마음에 드는 것이고, 항상 유희를 즐길 수 있고, 항상 행운이 가득하다는 등으로 천상의 공덕과 관련된 말씀을 하셨다. …
그리고 나서 이 천상도 무상한 것이니 거기에 탐욕을 갖지 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감각적 욕망이란 달콤함은 적고 많은 괴로움과 많은 절망을 주는 것이어서 거기에는 재난이 더 많다.”(본서 제1권 「괴로움의 무더기의 짧은 경」 (M14) §4)라는 방법으로 '감각적 욕망의 재난과 타락과 오염원(kāmanaṃ ādīnayaṃ okrāṃ saṅkilesaṃ)'을 설하셨다. ...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의 재난으로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신 뒤 '출리의 공덕(nekkhamme ānisaṃsa)'을 드러내셨다.”(MA.iii.89~92)
마치 얼룩이 없는 깨끗한 천이 바르게 잘 염색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생긴 것은 무엇이건 모두 멸하기 마련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끌 없고 때 없는 법의 눈[法限]이 우빨리 장자에게 생겼다.
그때 우빨리 장자는 법을 보았고,542)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542) “'법을 보았고(diṭṭha-dhamma)'란 성스러운 진리의 법(사성제, ariya-sacca-dhamma)을 보았다는 말이다. 이 방법은 나머지 구절에도 다 적용된다.” (MA.iii.92)
그러자 그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저희는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장자여, 지금이 적당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하라.”
19. 그러자 우빨리 장자는 세존의 설법을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가서는 문지기를 불러서 말했다.
“착한 문지기여, 오늘부터 니간타의 남자 신도들과 니간타의 여자 신도들에게는 문을 닫고 세존의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는 문을 연다.
만일 니간타가 오면 그대는 그에게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존자시여, 멈추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
오늘부터 우빨리 장자는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니간타의 남자 신도들과 니간타의 여자 신도들에게는 문을 닫고 세존의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는 문을 열었습니다.
존자시여, 만일 탁발을 위해서 오셨으면 여기서 계십시오. 이곳으로 가져오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주인님.”이라고 문지기는 우빨리 장자에게 대답했다.
20.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를 찾아갔다.
가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에도 …
세 번째에도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제가 가서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겠습니다.”
“따빳시여, 그대가 가서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아라.”
21. 그러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우빨리 장자의 집으로 갔다.
문지기는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멈추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
오늘부터 우빨리 장자는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니간타의 남자 신도들과 여자 신도들에게는 문을 닫고
세존의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는 문을 열었습니다.
존자시여, 만일 탁발을 위 해 오셨다면 여기서 계십시오. 가져오겠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탁발을 위해 온 것이 아닐세.”라고 말한 뒤 되돌아서서
니간타 나따뿟따에게로 갔다.
가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존자시여, 제가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킵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존자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존자시여, 존자의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개종시키는 요술에 홀려 개종을 했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두 번째에도 … 세 번째에도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존자시여,
제가 '존자시여, 저는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를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킵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존자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존자시여, 존자의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개종시키는 요술에 홀려 개종을 했습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따빳시여, 그렇다면 내가 가서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리라.”
22. 그러자 니간타 나따뿟따는 많은 니간타 회중과 함께 우빨리 장자의 집으로 갔다.
문지기가 멀리서 니간타 나따뿟따가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멈추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
오늘부터 우빨리 장자는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니간타의 남자 신도들과 여자 신도들에게는 문이 닫혔고
세존의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는 문이 열렸습니다.
존자시여, 만일 탁발을 위해 오셨다면 여기서 계십시오. 가져오겠습니다.”
“착한 문지기여, 그렇다면 우빨리 장자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
'주인님, 니간타 나따뿟따께서 많은 니간타 회중과 함께 문밖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주인님을 만나고자 하십니다.'라고.”
“그러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문지기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대답하고서 우빨리 장자를 뵈러 갔다.
가서 우빨리 장자에게 이렇게 말 하였다.
“주인님, 니간타 나따뿟따께서 많은 니간타 회중과 함께 문밖에 서계십니다.
그분은 주인님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착한 문지기여, 그렇다면 중앙 문의 큰 방에다 자리들을 마련하라.”
“그러겠습니다, 주인님.”이라고 문지기는 우빨리 장자에게 대답하고
중앙 문의 큰 방에다 자리들을 마련하고서 우빨리 장자에게 갔다.
가서는 우빨리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중앙 문의 큰 방에 자리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지금이 적당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23. 그러자 우빨리 장자는 중앙 문의 큰 방으로 갔다.
가서는 거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문지기를 불러 말했다.
“착한 문지기여, 니간타 나따뿟따께 가거라. 가서 니간타 나따뿟따께 이렇게 말씀드려라.
'존자시여, 우빨리 장자가 '존자시여, 원하신 다면 들어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라고.”
“그러겠습니다, 주인님.”이라고 문지기는 우빨리 장자에게 대답하고서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갔다.
가서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우빨리 장자가 '존자시여, 원하신다면 들어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간타 나따뿟따는 많은 니간타 회중과 함께 중앙 문의 큰 방으로 들어갔다.
24. 우빨리 장자는 전에는 니간타 나따뿟따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마중을 나갔으며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윗옷으로 털어서 잘 살펴보고 앉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자신이 앉아서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앉으십시오.”
25. 이와 같이 말했을 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우빨리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는 미쳤구나. 장자여, 그대는 바보로구나.
그대는 '존자시여, 이제 저는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고 오겠습니다.'라고 가서는 큰 논쟁의 그물에 걸려들었구나.
장자여,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환을 제거하러 갔다가
자기의 두 고환이 거세되어 돌아온 것과 같다.
장자여,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알을 빼러 갔다가
자기의 두 눈알이 다 빠져서 돌아온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장자여, 그대는
'존자시여, 이제 저는 이 말의 논지에 대해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고 오겠습니다.'라고 가서는 큰 논쟁의 그물에 걸려들었구나.
장자여, 그대는 사문 고따마의 개종시키는 요술에 홀려 개종을 했구나.”
26. “존자시여, 그 개종시키는 요술543)은 축복입니다. 존자시여, 그 개종시키는 요술은 훌륭합니다.
존자시여, 사랑하는 나의 친지들이나 혈족들이 이러한 개종으로 개종한다면
사랑하는 나의 친지들과 혈족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만일 모든 끄샤뜨리야들이 이런 개종으로 개종한다면
모든 끄샤뜨리야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만일 모든 바라문들이 … 와이샤들이 … 수드라들이 이러한 개종으로 개종한다면 모든 수드라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만일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 · 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이
이러한 개종으로 개종한다면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 · 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에게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여기에 대해서 당신께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지자들은 비유를 통해 이 말의 뜻을 완전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543) “여기서 '개종시키는 요술(āvaṭṭanī māyā)'은 우빨리 장자 자신이 통찰한(paṭividdha) 예류도(sotāpatti-magga)를 말한다.”(MA.iii 94)
27. “존자시여, 옛날에 어떤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한 바라문에게 젊은 바라문 아내가 있었는데 임신하여 출산 예정일이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존자시여, 그러자 젊은 아내는 그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문이여, 시장에 가서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사오십시오.
그러면 내 아이의 놀이친구가 될 것입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이 말하자 그 바라문은 젊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분만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여보, 만일 당신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는 시장에서 수원숭이 새끼를 사오겠소
그러면 그 사내아이의 좋은 놀이친구가 될 것이오.
여보, 만일 당신이 여자아이를 낳으면 나는 시장에서 암원숭이 새끼를 사오겠소
그러면 그 여자아이의 좋은 놀이친구가 될 것이오.”
존자시여, 두 번째에도 … 세 번째에도 그 젊은 아내는 그 바라문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문이여, 시장에 가서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사오십시오.
그러면 내 아이의 놀이친구가 될 것입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이 말하자 그 바라문은 그 젊은 아내를 향한 사랑에 마음이 묶여
시장에 가서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사가지고 와서 젊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시장에 가서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사왔소. 이제 당신 아이의 놀이친구가 될 것이오.'
존자시여, 이와 같이 말했을 때 그 젊은 아내는 그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 원숭이 새끼를 데리고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에게 가서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착한 랏따빠니여, 나는 이 원숭이 새끼를 진한 노란 물감으로 염색하고
또 두들기고 뒤집어놓고 두들겨 양쪽 모두 윤이 나도록 만들어 주기를 원하오.'라고,
존자시여, 그러자 그 바라문은 원숭이 새끼를 데리고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에게 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랏따빠니여, 나는 이 원숭이 새끼를 진한 노란 물감으로 염색하고
또 두들기고 뒤집어놓고 두들겨 양쪽 모두 윤이 나도록 만들어 주기를 원하오.'라고,
존자시여, 이와 같이 말했을 때 그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는 그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시여, 당신의 원숭이 새끼는 염색 할 수는 있지만
두들길 수도 없고 윤을 낼 수도 없습니다.'라고. 544)
544) “장난감이든 살아 있는 것이든 원숭이 새끼(makkaṭa-cchāpaka)는 염색을 할 수는 있다(raṅga-kkhama) 그러나 '두들김을 감당할 수 없다(no ākoṭana-kkhama).'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널빤지에다 놓고 배를 두들기면 위장이 터져 배설물이 튀어나올 것이고, 머리를 두들기면 머리가 터져 뇌수가 밖으로 나오고, 장난감일 경우 조각조각 흩어지기 때문이다. '윤을 내는 것도 감당하지 못한다(no vimajjana-kkhama).'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돌로 문지르면 털이 벗겨져 피부가 없이 될 것이고, 장난감이라도 뭉개질 것이기 때문이다.” (MA.iii.95)
존자시여, 그와 같이 유치한 니간타들의 교설은
유치한 자들이 좋아하지만 현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사하는 것을 감당 하지 못하고 윤을 내는 것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545)
545) “'조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윤을 내는 것도 감당하지 못한다(no anuyoga-kkhamo, no vimajjana-kkhamo).'는 것은 니간타들의 교설은 조사하는 것(anuyoga)과 연구하는 것(vīmaṃsa)을 감당하지 못한다. 껍질을 두들겨 쌀을 찾는 것과 같고, 야자나무에서 고갱이(sāra)를 찾는 것과 같아서 그들의 교리는 공허하고(rittaka) 비어 있을(tucchaka) 뿐이다.”(MA.iii.95)
존자시여, 그 바라문이 다른 때에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에게 가서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랏따빠니여, 나는 이 새 옷 한 벌을 진한 노란 물감으로 염색하고
또 두들기고 뒤집어놓고 두들겨 양쪽 모두 윤이 나도록 만 들어 주기를 원하오.'라고,
존자시여, 이와 같이 말했을 때 그 염색공의 아들 랏따빠니는 그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시여, 당신의 이 새 옷 한 벌은 염색도 할 수 있고
두들길 수도 있고 윤을 낼 수도 있습니다.'라고,
존자시여, 그와 같이 세존 · 아라한 · 정등각자의 교설은
현자들은 좋아하지만 유치한 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사하는 것도 감당해내고, 윤을 내는 것도 감당해냅니다.”
28. “장자여, 왕을 포함한 회중들은 이렇게 알고 있다.
'우빨리 장자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이다.'라고,
장자여, 우리는 그대를 누구의 제자라고 여겨야 하는가?”
이 말을 듣고 우빨리 장자는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하고서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29. “존자여, 그렇다면 제가 누구의 제자인지를 들어보십시오.
현명하시고 미혹을 여의었고
[마음의] 삭막함546)을 잘라버렸고
승리했고 괴로움이 없고547)
평등하게 대하고
계가 원숙하고 수승한 통찰지를 가졌고
탐욕 등 해로움을 건넜고
더러움이 없는 세존께서 계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46) ‘삭막함(khila)' 혹은 '마음의 삭막함(ceto-khila)'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마음의 삭막함 경」 (M16) §§2~7를 참조할 것.
547) “'승리했다.(vijitavijaya)'는 것은 모든 범부들을 이겼고 이기고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죽음으로서의 마라, 오염원으로서의 마라, 신으로서의 마라(maccumāra-kilesamāra-devaputtamāra)를 세존께서는 모두 이기셨다. 그래서 승리자이다. '괴로움이 없다.(anīgha)'는 것은 오염원의 괴로움도 과보의 괴로움도 세존께는 없기 때문이다.”(MA.ii.96)
죽음으로서의 마라 등에 대해서는 본서 「마라 견책 경」 (M50)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분은 의혹이 없고 만족을 알고
세속의 비린내를 토했고 기뻐하고548)
한 인간으로 사문의 할 바를 다 했고,
마지막 몸을 가졌고,
때가 없고 비견할 데 없는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48) “'세속의 비린내를 토했다.(vanta-lokāmisa).'는 것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kāmaguṇa)을 다 버렸다는 말이다. '기뻐한다.(mudita)'는 것은 더불어 기뻐함의 거룩한 마음가짐[喜梵住, muditā-vihāra]으로 머무시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뜻이다.
'평등하게 대한다.(susama-citta).'는 것은 [부처님의 외사촌으로 부처님을 해하려했던] 데와닷따에게도, 앙굴리말라에게도, [아들이었던] 라훌라에게도 그리고 신들과 인간들(deva-manussā)에게도 모두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하셨기 때문이다.” (MA.iii.96)
그분은 의심이 없고 능숙하고
중생들의 지도자이고 최고의 조어장부이고
위없고 청정한 성품을 지녔고549)
확신에 차있고 빛을 비추며
자만을 잘랐고 영웅이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49) 원어를 직역하면 '빛나는 성품을 지녔고(rucira-dhamma)'라고 옮길 수 있지만, 주석서의 설명에 따라 '청정한 성품을 지녔다.(suci-dhamma).'로 옮겼다.(MA.iii.97)
그분은 무리의 지도자이고 측량할 수 없고
덕이 깊고 지혜를 얻었고
안온을 주고 명지를 지녔고
법에 주하고 자신을 단속했고
집착을 건너 해탈하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분은 용550)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족쇄를 부수었고 해탈했고
대화에 능숙하고 지혜롭고
[자만의] 깃발을 내리고551) 탐욕을 건넜으며
자신을 제어하고 사량 분별을 여의신552)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50) “부처님은 네 가지 이유로 '용(nāga)'이라 한다. 즉 열의(chanda) 등 때문에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고(agacchanata), 버린 오염원들(pahīna-kilesā)을 다시 불러오지 않고(anāgacchanata), 죄(āgu)를 범하지 않고(akaraṇata), 강하다는 뜻에서(balavant-aṭṭha) 용(나가)이라고
불린다.” (AA.iii.78)
551) 본서 역마차 교대 경」 (M24) §35에 의하면 '깃발dhaja'은 '자만(māna)'의 깃발이다.
552) '사량 분별을 여읜'은 nippapañca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사량 분별'을 뜻하는 papañca에 부정 접두어 nis-를 붙여서 만들어진 술어이다.
여기서 빠빤짜(papañca, Sk. prapañca)는 대부분 불교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pra(앞으로)+√pañc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인도 최고의 문법학자인 빠니니(Pāṇini)의 산스끄리뜨 어근 사전인 『다뚜빠타』(Dhātupatha)에 '√pañc는 퍼짐의 뜻으로 쓰인다.(paci vistāravacane).'라고 나타난다. 아마 '빵(pañc)' 하고 터지면서 퍼져나가는 것을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희론(戱論)이라고 한역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량 분별이 확장되고 전이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불교술어이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대부분 사량 분별로 옮기고 있다.
본서 제4권 「경이롭고 놀라운 일 경」 (M123) §2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사량 분별(papañca)'이란 갈애(taṇhā), 자만(māna), 사견(diṭṭhi)의 세 가지 오염원(kilesa)을 말한다.”(MA.iv.167)라고 설명한다.
한편 '사량 분별 없음(nippapañca)'은 열반의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는데 『상윳따 니까야』제5권 「무위 상윳따」(S43)에서 무위 혹은 열반의 33가지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주석서는 “사량 분별없는 경지(nippapañca-pada)'란 열반의 경지(nibbāna-pada)를 말한다.”(AA. iii.348)라거나, “'사량 분별 없음(nippapañca)'이란 자만(māna), 갈애(taṇhā), 사견(diṭṭhi)의 사량 분별이 없음이다.”(MA.iii.112; DA.iii.1062)라고 설명한다.
'사량 분별(papañca)'과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papañca-saññā-saṅkhā)'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꿀 덩어리 경」 (M18) §8과 §16이하와,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 §3의 '땅을 땅이라 인식하고서는(pathaviṃ pathavito saññatvā)'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것.
그분은 선인(仙人)들 중 최상이고553) 속이지 않고
삼명을 갖추고 거룩함을 증득했고
오염원을 씻었고 문장에 뛰어나고
고요하고 지혜를 갖추었고
법보시의 시조이고 유능하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53) '선인(仙人)들 중 최상이고'는 isi-sattamassa를 옮긴 것이다. 이 합성어는『숫따니빠타』 {356}번 게송에도 나타나는데 『숫따니빠따 주석서』(SnA. i.351)는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isi ca sattamo ca uttamaṭṭhena'이다. 첫 번째는 사문 고따마는 위빳시 선인(isi, 부처님) 등 여섯 부처님의 뒤를 이은 일곱 번째 부처님(D14 §1.4 참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두 번째는 선인들 중에 최상(uttama)이란 뜻이다. 이럴 경우 합성어인 isi+sattama의 sattama가 sat(being, 중생, 존재)의 최상급이 되어 최상의 선인이라는 뜻이 된다. 『숫따니빠따 주석서』는 이처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지만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MA.iii.98)에는 첫 번째 설명만 나타난다. 그러나 역자는 두 번째 설명을 따라서 옮겼다.
그분은 성자이고 마음을 닦았고
얻어야 할 것을 얻었고554) 상세하게 설하시고
싸띠와 반야를 구족했고
기울지 않고 타락하지 않았고555)
동요함이 없고 자유자재를 증득하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54) “'얻어야 할 것을 얻었고(pattipattassa)'라는 것은 얻어야 할 공덕들(guṇā)을 다 얻었다는 말이다.”(MA.iii.98)
555) '타락하지 않았고'는 no apanatassā(뒤로 굽지 않은)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aduṭṭhassa(망가지지 않은)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MA.iii.98)
그분은 바르게 갔고 사마디에 머무시고
안으로 오염원이 없고 청정하고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이 없고556)
홀로 머물고 구경을 증득했고
몸소 윤회를 건넜고 건너게 하시는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56) '두려움이 없고'는 appabhītassa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Ee, Se에는 appahīnassa(비열함이 없다)로 나타나고 Be에는 hitassa로 난다. 그러나 이것은 이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Te에서 이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BBS본에 appabhītassa(두려움이 없다.)가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는 냐나몰 리 스님의 견해를 따라서(나나몰리 스님/ 보디 스님, 1257쪽 598번 주해 참조) 옮긴 것이다.
그분은 고요하고 넓은 반야를 가졌고
큰 반야를 가졌으며 탐욕을 건넜고
여래이고 선서이며
필적할 사람 없고 동등한 자 없고
용맹하고 달인이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분은 갈애를 잘랐고 깨달았고
연기를 맑혔고 더러움이 없으며557)
공양받을 만하고 약카이고558)
인간 중에 최상이고 저울질할 수 없으며
위대하고 최고의 명성을 얻으신 세존이시니,
저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557) “'더러움이 없으며(anupalittassa)'라는 것은 갈애와 사견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alitta) 말이다.”(MA.ili.98)
558) “위력을 보여준다는 뜻(ānubhāva-dassan-aṭṭha)에서 세존께서는 '약카(yakkha)'라 불리신다.” (MA.iii.98)
'야카(yakkha)'에 대해서는 본서 「고싱가살라 짧은 경」(M31) §21의 주해를 참조할 것.
30. “장자여, 그런데 그대는 사문 고따마를 칭송하는 이 [게송을] 언제 이렇게 조합했는가?”
“존자시여, 예를 들면 여러 가지 꽃이 어우러진 큰 꽃무더기가 있다 합시다.
그것으로 숙련된 꽃꽂이 선생이나 꽃꽂이 선생의 제자가 여러 색깔의 화환을 엮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그와 같이 그분 세존께는 수많은 칭송이 있고 수백의 칭송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누가 칭송할 만한 분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니간타 나따뿟따는 세존께 바치는 이 경의를 견딜 수 없어
바로 거기서 입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다.
우빨리 경(M56)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