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52. 앗타까나가라 경(Aṭṭhakanāgarasuttaṃ)
464) 본경은 『앙굿따라 니까야』 제6권 「다사마 경」(A11:17)과 경의 제목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곳에서도 6차 결집본의 제목은 본경과 동일하다. 본경에 실린 주해는 대부분 역자가 옮긴 『앙굿따라 니까야』의「다사마 경」 (A11:17)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465)에 머물렀다.
465) 베루와가마까(Beluvagāmaka) 혹은 벨루와가마(Beluvagāma, 벨루와 마을)는 웨살리의 남쪽 면(dakkhiṇa-passa)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MA.iii.12) 벨루와 마을은 『디가 니까야』제2권 「대반열반경」(D16) §§2.21~26에서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혹독한 병에 걸리신 곳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곳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병을 다스리신 후에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고 귀의처로 삼아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셨다.
2. 그 무렵 앗타까나가라466)의 다사마 장자467)가 어떤 볼일이 있어 빠딸리뿟따468)에 도착했다.
그러자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꾹꾸따 원림[鷄林]469)의 어떤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466) 앗타까나가라(Aṭṭhakanāgara)가 어느 곳에 있는지 주석서에는 설명이 없다.
467) 다사마 장자(Dasama garhapati)가 누군지 불분명하다. 주석서는 태생과 족성(jāti-gotta)으로나 가문의 서열(sāra-patta-kula-gaṇana)상으로나 열 번째(dasama)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AA.v.84; MA.iii.13)
468)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는 지금 인도 비하르 주의 주도인 빠뜨나(Patna)이다.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경」 (D16) §1.19 이하와 §1.26에는 빠딸리 마을(Pāṭaligāma)을 확장하여 빠딸리뿟따 도시가 건설되는 것이 언급 되고 있으며, 세존께서는 이 도시는 번창한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언 하셨다.(D16 51.28) 세존의 예언대로 그 후 빠딸리 마을은 빠딸리뿌뜨라(Sk. Paṭaliputra)로 불리게 되며, 마우리야(Maurya) 왕조 굽따(Gupta) 왕조 등 역대 인도 통일 국가의 수도로 그 이름을 떨쳤다.
469) 꾹꾸따 원림(Kukkuṭārāma)은 꾹꾸따 상인이 지은 승원이라고 한다.(AA.v.84; MA.iii.13) 『앙굿따라 니까야』 제3권 「나라다 경」(A5:50) 등 몇몇 경들이 여기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꾹꾸따 원림은 아소까 대왕이 불교로 개종한 뒤에 처음으로 지었거나 중건하여 아소까 원림(Asokārāma)으로도 불리었던 것 같다.(DPPN) 빠뜨나에는 지금도 꾹꾸따 원림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존자여, 요즈음 아난다 존자는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저는 아난다 존자를 친견하고 싶습니다.”
“장자여,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에 머물고 계십니다.”
3. 그러자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그 볼일을 본 뒤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로
아난다 존자를 뵈러 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난다 존자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 분 세존께서 설하신
한 가지 법이 있습니까?470)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하게 되는, 그러한 한 가지 법을 설하셨습니까?”
470) “간략한 뜻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30가지 바라밀을 모두 완성했고, 오염원을 부수고 무상정등각을 깨달으셨다. 즉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들의 성향과 의향을 아시는 분이고, 손바닥에 놓인 아말라끼 열매처럼 알아야 할 모든 법들을 보시는 분이며, 더욱이 숙명통 등으로 아시는 분이고, 천안으로 보시는 분이며, 3명 혹은 6통으로 아시는 분이고, 모든 곳에 걸림 없는 완전한 눈으로 보시는 분이며, 모든 법들을 알 수 있는 통찰지로 아시는 분이고, 모든 중생들의 시야를 스쳐갔거나 벽 뒤에 있는 형색들조차도 청정한 육안으로 보시는 분이며,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는 삼매를 가까운 원인으로 하는 꿰뚫음의 통찰지(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아시는 분이고, 타인의 이익을 성취하는 연민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는 가르침의 통찰지로 보시는 분이며 장애가 되는 법을 아시는 분이고, 해탈로 인도하는 법을 보시는 분이며, [오염원들의] 적을 쳐부수었기 때문에 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온전하게 모든 법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정등각자이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담대함이라는 네 가지 이유로 찬탄을 받은 그가 설한 한 가지 법이 있는가?'라는 말이다.”(AA.v.84)
3명(三明)은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고 6통(六通)은 육신통으로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장자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한 가지 법이 있습니다.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하게 되는, 그러한 한 가지 법을 설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그러면 무엇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까?”
4. “장자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초선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471)
그리고 그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그는 여기에 확고하여472)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阿羅漢]. 473)
471) “'형성되었다(abhisaṅkhata)'는 것은 만들어졌고(kata) 생겨난 것(uppādita)이고, '의도되었다(abhisañcetayita)'는 것은 의도한 것(cetayita)이고, 상상한 것(pakappita)이라는 말이다.”(MA.iii.13)
472) “'여기에 확고하다(tattha ṭhito).'는 것은 그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법(samatha-vipassanā-dhamma)에 확고하다는 말이다.”(MA.iii.13)
이 초선은 형성되었고, 형성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꿰뚫어 안다는 것은 위빳사나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법에 확고하다는 말이다.
473) 이런 방법의 수행을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쌍 경」 (A4:170) §2에서는 '사마타를 먼저 닦고 위빳사나를 닦는다(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위빳사나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이것도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쌍 경」 (A4:170)을 권한다. 이 경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이지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 가지 선을 바탕으로 하여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가르침은 본서 「말룽꺄 긴 경」 (M64) §§9~15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만일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즐기기 때문에474)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不還者], 475)
474) “'법을 좋아하고 법을 즐긴다(dhammarāgena dhammanandiyā).'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둘 다에 대한 열정(chanda-rāga)을 말한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해 모든 열정을 완전히 끝낼 수 있으면 아라한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환자가 된다. 그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법에 대해 열정을 다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제4선의 의도에 의해 정거천(Suddhāvāsa)에 태어난다.”(MA.iii.13~14)
475) 본경의 이 가르침은 실참 수행, 특히 위빳사나 수행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요하다. 본경 §§4~14에서 보듯이 깨달음 혹은 아라한과는 반드시 4선-4처로 대표되는 색계선과 무색계선 등을 다 증득한 뒤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4선-4처로는 일시적인 해탈 밖에 성취하지 못한다.(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공(空)에 대한 긴 경」 (M122) §4, 제1권 「심재 비유의 긴 경」 (M29) §6의 주해, 『상윳따 니까야』 제1권 「고디까 경」 (S4:23) §2와 이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것.) 초선을 증득한 뒤에도 무상 등을 통찰해야만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고 나머지 색계선과 무색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입장은 본서 「말룽꺄 긴 경」 (M64) §§9~15와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쌍 경」(A4:170)과 특히 『상윳따 니까야』 제2권 「수시마 경」 (S12:70) 등에도 나타난다.
그래서 혜해탈은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네 가지 禪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이 된 네 가지 경우에다 이러한 네 가지 禪의 체험 없이 해탈한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를 더한 것으로 설명된다.(DA.ii.512; MA.iii.188 등) 여기에 대해서는 「수시마 경」 (S12:70) §14의 주해를 참조할 것. 경의 도처에 나타나는 선의 체험 없이 해체 무상 · 고 · 무아-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한 깨달음의 정형구는(예를 들면 본서 제1권 M22 §§26~29. 제4권 M147 §§3~10 등) 마른 위빳사나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는 본서 「끼따기리 경」(M70) §16의 주해와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9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 112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즐기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不還者]'
dhamma: 주석서의 설명처럼 止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선 등을 말한다.
또한 번역처럼 정거천에 화생하는 것이 아니라 초선천 등에 화생한다.
불환자라고 해서 모두 색계 4선천 그 중에서 정거천에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초선에 든다고 해서 모두 불환자인 것은 아니나
초선(中道/색계 삼매)에도 들지 못하고서는 불환자가 될 수 없다.
물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그 조건이 된다.
이렇게 5하분결을 해결하신 분들을 불환자라고 하고
불환자가 갈 곳은 [불환자가 태어날 곳 경(A7:52) Purisagatisuttaṃ]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 중에는 사생간(中有)상태에서 해탈하시는 불환자도 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5. “장자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관찰[伺]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제2선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그리고 그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그는 여기에 확고하여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6. “장자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정하고 싸띠가 확립되어지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제3선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7. “장자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도 슬픔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저하고 싸띠가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제4선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8. “장자여, 다시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9 ~ 11 “장자여, 다시 비구는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 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평정을 통한 마음의 해탈[捨心解脫]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476)
476) 초기불전 전체에서 보자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사무량, bhrahma-vihāra]이 본경 여기 §§8~11에서처럼 수행법의 영역에 나타나는 것은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으면 열반을 실현하기보다는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태어난다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D17 §2.13; M83 §6; A5:192 §3 등을 참조할 것.) 그렇지만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이 수행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면 이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강한 힘을 낳는 토대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경 §8~11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네 가지 禪(§§4~7)과 공무변처(§12), 식무변처(§13), 무소유처(§14)뿐만 아니라 본경 §8~11에서 비구들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가운데 하나를 토대로 해서 번뇌를 모두 멸진하여 아라한이 되거나 불환자가 되고 위없는 유가안은을 얻게 된다고 본경에서 아난다 존자는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칠각지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사무량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자애가 함께 함 경」(S46:54) §9이하의 가르침도 각별하다 할 수 있다. 특히 이 경은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은 깨끗함이,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공무변처가,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식무변처가,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무소유처가 정점(parama)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청정도론』 (IX.119)에 인용되어 설명되고 있다.
12. “장자여, 다시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산냐를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공무변처의 증득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13. “장자여, 다시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식무변처의 증득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하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14. “장자여, 다시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 무소유처의 증득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그리고 그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그는 여기에 확고하여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
만일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즐기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장자여, 이것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자이신 그분 세존께서 설하신
그 한 가지 법으로, 비구가 그 법과 함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해탈하지 못한 그의 마음이 해탈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가 소멸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을 성취합니다. 477)
477) 이상으로 네 가지 색계선(ruppa-jhāna)과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과 세 가지 무색계선(āruppa-jhāna)인 열한 가지를 말씀하셨고, 나머지 무색계선인 비상비비상처는 제외시켰다. 그것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가 너무 미세하여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교리문답의 긴 경」 (M43) §10의 주해를 참조할 것.
15. 이런 설법을 듣고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존자시여, 마치 사람이 하나의 보물창고의 입구를 찾다가
한꺼번에 열한 개의 보물창고의 입구를 발견하는 것과 같이, 478)
저는 하나의 불사(不死)의 문을 찾다가 한꺼번에 열한 개의 불사의 문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마치 어떤 사람의 집에 열한 개의 문이 나 있으면
그 집에 불이 날 때 그 중 어떤 문으로도 그의 피난처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저도 이 열한 개의 불사의 문들 가운데서 어떤 문으로도 저의 피난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478) 본서 제4권 「오염원 경」 (M128) §20에도 같은 비유가 나타난다.
존자시여, 외도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스승께 올릴 보시를 구합니다.479)
그런데 제가 어찌 아난다 존자께 공양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79) “'스승께 올릴 보시를 구한다(ācariyadhanaṃ pariyesissanti).'는 것은 외도들은 스승의 곁에서 학문(sippa)을 전수받으면, 그에게 학문을 전수받기 전이나 후나 혹은 중간에 집에서 가져와서 보시(dhana)를 올린다. 만야 집에서 가져올 것이 없으면 친척 집에서 구한다. 거기서도 없으면 그들은 공동의 것(sabhāga)에서 구하고, 그곳에서도 얻지 못하면 탁발(bhikkha)을 해서라도 보시를 올린다. 그것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AA.v.86)
16. 그때 앗타까나가라에 사는 다사마 장자는 빠딸리뿟따와 웨살리에 머무는 비구 승가를 초대하여 딱딱한 음식과 부드러운 음식 등 맛있는 음식을 손수 충분히 대접하고 만족시켜드렸다.
그리고 각각의 비구에게 옷 한 벌씩을 공양하였다.
아난다 존자께는 삼의(三衣)를 드렸고, 아난다 존자께 오백480)의 가치가 되는 원림을 지어 드렸다.
480) 이것은 오백 까하빠나를 뜻하는 듯하다. 까하빠나(kahāpaṇa)는 그 시대의 화폐 단위였다. 본서 제3권 「고따무카 경」(M94) §33과 주해를 참조할 것.
앗타까나가라 경(M52)이 끝났다.